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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27일 11시 42분 등록

이 소설을 다 읽었을 때는 새벽 2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나는 책을 모두 읽기 전에 피곤해서 잠깐 졸았었다. 그러다가 깨서 다시 읽었는데, 소설의 끝부분까지 다 읽고는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두려움 때문인지, 살인이라는 것 때문에 심장이 어떻게 된 것인지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았다. 불을 끄는 것도 무서웠다. 밤에 세차게 비가 3차례나 내렸다. 베란다쪽에 덧대서 단 처마가 요란스러웠다. 나는 그 소리에 몇 번이나 들었던 선잠을 깼다.
심장이 미친듯이 벌떡이는 것을 진정된 것이 언제쯤인지는 모르겠다. 몹시도 피곤한 밤이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허무했다.
나는 이 책의 마지막에 말하는 반야심경의 그 순간을 경험하고 싶어했었다. 그런데, 이 소설 속에서는 참 기묘하게 그것을 경험한다. 그런 것을 읽고나니 어찌 무섭지 않겠는가. 내가 지금 이 시간의 감옥에 갇혀버리는 데 어찌 무섭지 않겠는가.


친구가 이 소설 강추냐고 묻는다.
이 소설은 독특하고 강렬하다고 소개했다. 사람마다 취향이 있어 이걸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난 책의 구성이 앞과 뒤에 2개의 불교경전을 배치한 것과 오디세우스와 오이디푸스를 끌어온 것을 멋지게 봤다. 주인공이 그 2개의 경전을 잘못 해석하고 이상한 세계에 갇혀버렸지만, 어차피 인생이란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치매라는 것을 소재로 인생의 후반기, 기울어가는 시점을 다루면서 삶을 되돌아보는 면이 멋지다. 나도 곧 45세가 된다. 몇 년 안 남았다.

뒷편에 작가의 말에
'이번 소설은 유난히도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아 애를 먹었다. 하루에 한두 문장밖에 쓰지 못한 날이 많았다. 처음에는 꽤나 답답했는데 생각해보니 그게 바로 주인공의 페이스였다.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 아닌가. 그래서 마음을 편히 천천히 받아적기로 했다. 그렇게 한 문장 한 문장 써나가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은 내 소설이다. 내가 써야 한다. 나밖에 쓸 수 없다.

여행자의 비유로 돌아가자면, 오직 나만이 그 세계에 방문했다는, 오직 나만이 그 세계를 받아들여졌다는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이것이 없었다면 아마 이소설은 끝내지 못했을 것이다. '

이런 부분이 있다. 나는 이 말로 인해 작가의 모습이 이 소설에 아주 많이 들어있다고 생각했다.




==

7. 내가 마지막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벌써 25년전, 아니 26년 전인가, 하여튼 그쯤의 일이다.
*첫 문장이 이렇게 시작한다.

7. 더 완벽한 쾌감이 가능하리라는 희망. 희생자를 묻을 때마다 나는 되뇌곤 했다.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살인을 멈춘 것은 바로 그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 끝까지 다 읽고나서 앞으로 돌아와 이 문장을 다시 읽으니 느낌이 처음과는 다르다. 처음에는 위 문장은 살인자의 심정을 덤덤하게 표현한 표현한 문장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다시 볼 때는 좀 다르다. 이건 이때부터 그가 늙기 시작했다는 말로 들린다. 이미 그의 삶의 중요한 부분인 살인이 빠져버린 것이다. 살인자가 살인자가 아닌, 정체성이 달라진 인간으로 보인다.

9. 금강경을 읽는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일으킬지니라."

11. 나는 시가 뭔지 몰랐기 때문에 내 살인의 과정을 정직하게 썼다. 첫 시의 제목이 '칼과 뼈'였던가? 강사는 내 시어가 참신하다고 했다. 날것의 언어와 죽음의 상상력으로 생의 무상함을 예리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거듭하여 내 '메타포'를 고평했다.
"메타포라는 게 뭐요?"
.
.
미안하지만 그것들은 비유가 아니었네. 이 사람아.

12. 일주일 후에 인지검사인가 뭔가도 했다. 의사는 묻고 나는 답했다. 문제는 쉬운데 답이 어려웠다.

16. 식물들은 인간의 출퇴근 시간에는 관심이 없다. 가끔은 한밤중에 수정을 시켜줘야 하는 일도 있는 모양이다. 그것들은 염치없이, 맹렬하게 자란다.

21. 하여간 누군가의 소설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노작가가 강변을 산책하다가 한 젊은이를 만나 벤치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나중에야 깨닫는다. 강변에서 만난 그 젊은이는 바로 자신이었음을. 만약 젊었을 때의 나를 그렇게 만나게 된다면 알아볼 수 있을까?
* 노작가가 젊은 이를 알아볼 수 있겠지만, 젊은이는 노작가가 자신임을 알아보지 못할 것 같다. 그런데, 지금 내게 노작가가 나타난다면 난 알아볼 것 같다. 왜냐하면 난 지금 내 방향을 알고 있으니까. 난 내가 생각한 모습과 비슷하게 늙어갈 테니까. 그리고, 지금 생각하는 것과 늙어 생각하는 것이 많이 달라질 것 같지 않다. 젊은 나를 만난다면 어떠할까? 난 그냥 방황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한 순간의 만남으로 다독거리고 말 것이다. 어차피 난 인생에 거쳐야 할 것들을 통과하여 지금 이 자리에 있다.   


22. 은희 엄마가 내 마지막 제물이었다. 그녀를 땅에 묻고 돌아오는 길에 차가 나무를 들이받고 전복됐다. 경찰은 내가 과속을 하다 커브길에서 중심을 잃었다고 말했다. 두 번의 뇌수술을 받았다. 처음에는 약 기운 탓이라고 생각했다. 병실에 누워 있는데, 마음이 한없이 평안하여 기이했다. 전에는 사람들이 떠더는 소리만 들어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짜증을 느꼈었다. 음식을 주문하는 소리, 애들이 웃는 소리, 여자들이 조잘대는 소리. 다 싫었다. 그런데 갑자기 찾아온 평화. 끝없이 들끓기만 하던 마음이 정상인 줄만 알았다. 아니었다. 갑자가 귀거 멀어버린 사람처럼 나는 마음에 찾아온 이 돌연한 정적과 평온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사고 때의 충격이든 의사의 메스질 때문이든 내 뇌에는 뭔가가 일어났던 것이다.
* 이런 평온이 찾아오기도 하나?
나도 주변이 시끄러워서 미칠 것 같다. 아주 짜증이 난다.

23. 반성과 반추도 충동을 억누르는 것 같았다. 나는 나약해지고 싶지도, 애 안에 들끓는 충동을 억누르고 싶지도 안았다. 어둡고 깊은 동굴로 떠밀려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아직도 내가 알던 나인지를 알고 싶어졌다. 눈을 뜨니 바로 눈앞에 은희 엄마가 있었다 - 우연은 불운의 시작일 때가 많지.

27. 나는 그 시를, 첫날밤에 신부를 살해하고 도주한 신랑 이야기로 읽었다.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 그리고 시체. 그걸 어떻게 달리 읽겠는가?

30. 아버지가 나의 창세기다.

31. 죽이는 게 최선이었다. 다만 후회가 되는 것은, 혼자 할 수도 있었던 일에 어머니와 여동생을 연루시켰던 것뿐이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아버지는 늘 악몽을 꿨다. 잠꼬대도 심했다. 죽는 순간에도 아마 나쁜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우리 엄마의 치매가 닥쳐오면, 그때 엄마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시콜콜할까? 그렇다면 그때 그것을 소재로 이야기를 하나 써도 될까? 그렇다면 분위기가 위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춘기때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듣고 싶지 않은 때에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는 내가 언젠가는 듣게 될 이야기였지만 그때 그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이 소설 속의 주인공 김병수의 창세기는 아버지이다. 여자 주인공이 자기 결혼생활의 시작을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처럼 말이다.

33. 나는 악마인가, 아니면 초인인가, 혹은 그 둘 다인가.
* 이 대목까지 읽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주인공은 자신이 육체적으로 굉장히 건강했을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는 생각이. 그리고 그때를 자신이 초인이나 신이나 혹은 악마로 착각한다. 아마도 그때는 절대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했던 시절일 것이다.

34. 내 앞에 있는 사람의 표정을 그대로 흉내내는 것이다. 남이 찡그릴 때 찡그렸고 남이 웃을 때 웃었다.
옛사람들은 거울 속에 악마가 살고 있다고 믿었다지. 그들이 거울에서 보던 악마. 그게 바로 나일 것이다.

35. 나는 수의사였다. 살인자로 살기에 좋은 직업이다. .......... 닭을 제외하면 모두 포유류다. 인간의 몸과 구조가 크게 다르지 않다.

35. 치매는 늙은 연쇄살인범에게 인생이 보내는 짓궂은 농담이다. 아니 몰래카메라다. 깜짝 놀랐지? 미안. 그냥 장난이었어.

36. 하루에 한 편씩 시를 외우기로 했다. 해보니 쉽지 않다.
* 작가 김영하가 대학생때 통학하는 지하철 안에서 하루에 한편씩 시를 외웠다고 들었다. 이것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일 것이다.
이 책에 시에서 건졌을 것 같은 멋진 표현이 많다. 작가는 시어 대신에 자신의 언어를 썼겠지만, 감성을 어떻게 언어로 표현하는지는 배워왔을 것이다.

36. "내 고통은 자막이 없다 읽히지 않는다. _김경주, [비정성시] "
같은 시 중에서 또 한 구절.
"내가 살았던 시간은 아무도 맛본 적 없는 밀주였다.
나는 그 시간의 이름으로 쉽게 취했다."

37. 포유류는 호흡기가 있는 목이 약점이다.

38. 한 부만 남기고 199부는 땔감으로 썼다. 잘 탔다. 시로 데운 구들이 따뜻했다.
어쨌든 나는 그 뒤로 시인으로 불렸다. 아무도 읽지 않는 시를 쓰는 마음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살인을 저지르는 마음이 다르지 않다.

42. 세상의 모든 전문가는 내가 모르는 분야에 대해 말할 때까지만 전문가로 보인다.

44. 죄책감은 본질적으로 약한 감정이다. 공포나 분노, 질투 같은 게 강한 감정이다. 공포와 분노 속에서는 잠이 안 온다. 죄책감 때문에 잠 못 이루는 인물이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나는 웃는다. 인생도 모르는 작자들이 어디서 약을 팔고 있나.

46. 은희가 왜 도끼를 방에 두느냐고 묻기에 좀비 때문이라고 말했다. 시체에는 도끼가 최고다.
* 이런 생각을 하는 김병수라는 인간, 살인자가 궁금하다.
아니 작가가 궁금하다. 작가는 소설이 끝날 때 완벽하게 그 속에 숨어버린다고 하더만, 나는 그 말을 믿지 못하겠다. 이 소설을 다 읽고나서 김영하 작가의 사진을 보는 데 무척 무서웠다. 야무지게 입을 다물고 있는 모습이 무서웠다. 김영하 작가가 쓴 소설에 죽음이 주요 소재인 소설이 있지 않은가. 자살을 다룬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든가, 혁명을 꿈꾸는 것 말고는 존재를 드러낼 수 없는 시대에 슬프게 산 이정이란 인간도 있고 말이다.

이런 부분이 있다. 나는 이 말로 인해 작가의 모습이 이소설에 아무 많이 들어있다고 생각했다.

48. 프랜시스 톰프슨이라는 자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모두 티인의 고통 속에서 태어나 자신의 고통 속에서 죽어간다." 나를 낳은 어머니, 당신 아들이 곧 죽어요. 뇌에 구멍이 숭숭 뚫려서 혹시 나는 인간 광우병이 아닐까? 병원에서 숨기고 있는 걸까?
*사이코패스가 나오는 영화 시나리오를 읽은 적이 있다. 거기 인물과 비슷하다. 그 극의 주인공은 자기 딸이 사이코패스라는 것을 알고 오열한다. 그리고, 그 딸에게 자신이 살해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영화가 끝난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무엇을 읽고 있나? 아마도 나는 내 과거를 읽어내고 있나 보다. 여기 치매 살인자처럼 말이다.

51. 나는 살아오면서 남에게 험한 욕을 한 일이 없다.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욕고 안하니 자꾸 예수 믿느냐고 묻는다. 인간을 틀 몇 개로 재단하면서 평생을 사는 바보들이 있다. 편리하기는 하겠지만 좀 위험하다. 자신들의 그 앙상한 틀에 들어가지 않는 나 같은 인간은 가늠조차 못 할 테니까.

52. 술만 마시면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다 닞어버리는 동네 사람이 있었다. 죽음이라는 건 삶이라는 시시한 술자리를 잊어버리기 윟해 들이켜는 한 잔의 독주일지도.

55. 욕을 하거나 겁을 준 것도 아니고 조용히 몇 마디 했을 뿐인데 웬일인지 다들 기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꽁무리를 뺐다. 제아무리 사나운 개도 동물병원에 오면 꼬리를 말고 낑낑거려 주인들을 놀라게 한다. 십대 남자아이들도 개와 다르지 않다. 첫 대면의 눈빛이 관계를 결정한다.

56. 간장이 어디 있나 아무리 찾아도 없다. 새로 하나 사야 할 것 같다. 내가 죽은 후에 집 어디선가 수십 갠의 간장병이 발견되는 건 아닐까.

62. "혼돈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면 혼돈이 다신을 쳐다본다._니체"

63. "박주태는 어떻게 만났니?"
아침을 먹다 은희에게 물었다.
"우연히요. 정말 우연히요."
은희가 말했다.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쓰는 '우연히'라는 말을 믿지 않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

68. 언제나 그랬듯이 언어는 늘 행동보다 느리고 불확실하며 애매모호하다. 지금은 행동이 필요한 시간.

70. 난생처음으로 필요에 의한 살인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평생 오디오를 수집하던 남자가 회사의 지시로 행사용 앰프를 사러 다니게 되면 아마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71. 지금 신은 나에게 내가 저지른 악행의 신성을 스스로 진부하게 만들 것을 명령하고 있다.

72. 사냥은 추적과 포착이 과정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살인은 목표물을 잡는 것보다 안전하게 빠져나오는 게 우선이다.

84. 너희들이 보고 있는 그 기록들에는 주어가 없지. 목적어와 술어만 즐비한 불구의 기록. 거기 '불상자'로 갈음했을 그 이름, 내가 바로 그 이름, 그 주어다. 그렇게 떠들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겨우 참았다.
* 이런 욕망이 심해질 때가 있다. 겨우 참아야 하는 순간. 그런데 그게 다 뭐야? 자신의 존재 이유를 외부의 인정으로 하면 그건 좀 아니다.
주어가 되는 것 좋다. 그걸 얼마아 외치고 싶었을까. 그래도 삶은 참아야 하는 것 같다.

85. "그래, 개가 없어졌다. 개가 없어졌어."
"아빠, 우리 집에 개가 어디 있어요?"
이상하다. 분명하게 개가 있었던 것 같은데.
* 살인자가 치매에 걸려서 기억이 오락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들을 보면 처음에는 엄청 우스운데, 나중에는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든다.

87. 사람마다 구원의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 죄수들은 엄격한 위계로 나를 길들일 것이고, 그 안에서 나는 철저하게 나를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잠시도 쉬지 않고 부산히 움직이던 내 자아를 잠재울 수 있을 것 같았다.

..... 어쩌면 나는 너무 오랫동안 나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삶에 지쳐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악마적 자아의 자율성을 제대로 수렴시키는 세계, 내게는 그곳이 감옥이고 징벌방이었다. 내가 아무나 죽여 파묻을 수 업슨 곳, 감히 그런 상상조차 하지 못할 곳, 내 육체와 정신이 철저하게 파괴될 곳, 내 자아를 영원히 상실하게 될 곳.
* 주인공은 마침내 그 곳에 가게 되지만, 나는 그 치매란 것이 마음이 아프다.

92. 은희는 모른다. 내가 추구하는 즐거움에 타인의 자리는 없다는 것을. 나는 타인과 어울려 함께하는 일에서 기쁨을 얻어본 기억이 없다. 나는 언제나 내 안으로 깊이깊이 파고들어갔고, 그 안에서 오래 지속되는 쾌락을 찾았다. 뱀을 애완용으로 키우는 이들이 햄스터를 사들이듯이, 내 안의 괴물도 늘 먹이를 필요로 했다. 타인은 그럴 때만 내게 의미가 있었다.

93. "서로 어떻게 알아듣고 저렇게들 대화를 하시죠?"
한두 번 받은 질문이 아니었는지 사회복지사는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술 취한 사람들도 자기들끼리는 즐거워하잖아요. 대화를 즐기는 데 꼭 지력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요."

93. 답답한 마음에 인터넷을 찾아보니 '미래 기억'은 앞으로 할 일을 기억한다는 뜻이었다. 치매 환자가 가장 빨리 잊어버리는 게 바로 그것이라고 했다. "식사하고 30분 후에 약을 드세요"같은 말을 기억하는 게 바로 미래 기억이란다. 과거기억을 상실하면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고 미래 기억을 못하면 나는 영원히 현재에만 머무르게 된다.
* 이 소설의 주인공 김병수는 결국 과거 기억은 조금만 남고, 미래 기억은 사라져서 영원히 현재라는 감옥에 갇혀버린다. 그는 살인죄로 법정에 설수도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살인자가 살인자가 아니고 정신병자 취급을 받는다는 것을 그가 안다면 그것을 견딜 수 있을까? 그걸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영원히 감옥에 갇힌게 아닐까.

96. 책장에서 괜찮은 시를 발견했다. 감탄하여 읽고 또 읽으며 외우려 애썼는데 알고 보니 내가 쓴 시였다.
* 하하하. 나도 이런 경험이 있어서 이 부분에서 웃지만은 못한다.

98. 인간은 시간이란 감옥에 갇힌 죄수다. 치매에 걸린 인간은 벽이 좁혀지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숨이 막힌다.

112. "나 어릴 적 때만 해도 아이가 하나에만 몰입하면 어른들이 걱정을 했다네. 애가 외골수라며. 그때는 오직 미친 사람들만 한 가지에 몰입을 했지. ...... 몰입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안다면 그 입을 다물 거야. 몰입은 위험한 거야. 그래서 즐거운 거고."

117. 오디세우스의 여행을 생각해봐도 그렇다. 오디세우스는 귀환을 시작하자마자 연을 먹는 사람들의 섬에 기착한다. 사람들이 친절하게 권한 연 열매를 먹고 나자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 고향은 과거에 속해 있지만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계획은 미래에 속한다. 그후로도 오디세우스는 거듭하여 망각과 싸운다. 세이렌의 노래로부터도 달아나고 그를 영원히 한곳에 붙들어두려는 칼립소로부터도 탈출한다. 세이렌과 칼립소가 원했던 것은 오디세우스가 미래를 잊고 현재에 못박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가 끝까지 망각과 싸우며 귀환을 도모했다. 왜냐하면 현재에만 머무른다는 것은 짐승의 삶으로 추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19. 꿈에 아버지를 보았다. 벌거벗고 목욕을 가고 있었다. 아버지, 왜 다 벗고 목욕을 가세요? 내가 묻자 아버지는 말한다. 어차피 벗을 것 아니냐. 미리 벗고 가는 게 편하다.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았다. 그래도 뭔가 이상해 아버지에게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다른 사람들은 옷을 입고 목욕을 하러 가요? 아버지가 대답했다.
우린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니.

123. 대숲을 산책한다. 파릇한 죽순들이 쑥쑥 자라고 있다. 죽순과 관련해 뭔가가 떠오를 듯하다가 그냥 뇌리에서 사라진다. ..... 누구네 대숲인지 모르겠지만 참 좋다. 동네를 한 바퀴 돌아봤다. 뭔가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긴 했는데 그게 뭔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 완전히 꼬인 상태인가보다.

128. 오이디푸스는 길을 가다가 홧김에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잊어버렸다. 처음 읽고는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잊어버리다니.

129. 그러나 인생의 종막에 나는 내가 저지른 모든 악행을 잊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스스로를 용서할 필요도, 능력도 없는 자가 된다. 절름발이 오이디푸스는 늙어서 비로소 깨달은 인간, 성숙한 인간이 되지만 나는 어린아이가 된다. 아무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유령으로 남으리라.

132. 니체와 호메르스와 소포클레스에 대해, 그들이 얼마나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날카롭게 통찰하고 있었는지.
그러나 형사들은 그 얘기는 듣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은 나의 자랑스러운 과거와 철학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들은 내가 은희를 죽였다고 믿고 있고, 거기에만 집중하고 있다. 나는 박주태가 죽였을 거라고 말한다. 그가 은희와 만나고 있었다고. 그가 은희와 만나고 있었다고. 내가 그의 차를 들이받은 후에, 그의 차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발견한 뒤에 내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고.

134. 혼돈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

140. 너무 많은 그림을 그려 화가 자신도 위작 여부를 판단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화가는 위작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렸음직한 그림이지만 그린 기억은 전혀 없소."
화가는 결국 소송에서 패소했다. 내가 바로 그런 심정이었다. 나는 형사에게 말했다.
"내가 저질렀음직한 일이오. 그러나 기억은 없소."

143. 문득, 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무엇에 진 걸까. 그걸 모르겠다. 졌다는 느낌만 있다.

144. 사람들은 모른다. 바로 지금 내가 처벌받고 있다는 것을. 신은 이미 나에게 어떤 벌을 내릴지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나는 망각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144. "악을 왜 이해하려 하시오?"
"알아야 피할 수 있을 테니까요."
나는 말했다.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악이 아니오. 그냥 기도나 하시오. 악이 당신은 비켜갈 수 있도록."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그에게 덧붙였다.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 신은 시간으로 벌을 하신다고 하던데, 이번 경우도 그런가?

148. 무심코 외우던 반야심경의 구절이 이제 와 닿는다. 침대 위에서 내내 읊조린다.
"그러므로 공 가운데에는 물질도 옶고 느낌과 생각과 의지작용과 의식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으며, 형체와 소리, 냄새와 맛과 감촉과 의식의 대상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도 없으며,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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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8 [2-14] (소설) 허삼관 매혈기- 위화 한정화 2013.08.07 3189
1257 [2-10] 떠남과 만남 - 구본형 콩두 2013.08.08 3248
1256 [2-11] 마흔 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 구본형 콩두 2013.08.11 2424
1255 [2-12] 낯선 곳에서의 아침 - 구본형 콩두 2013.08.12 4419
1254 [2-15] 농가월령가 - 정학유 타오 한정화 2013.08.13 4156
1253 #14,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file 쭌영 2013.08.19 4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