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땟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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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52년 6월 14일, 스물 네 번째 생일. 에르네스토 게바라
환자들과 축구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의사들의 숙소로 돌아왔다. 동료 의사들과 간호사들은 나의 스물 네 번째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파티를 준비했다. 즐거운 자리에 술과 음악이 빠질 수는 없는 법. 나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맘보, 탱고…. 잠시 잠깐 밖으로 나왔다. 맑은 공기에 정신을 차리고 나니 왠지 마음 한 구석이 텅 빈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칠 흙 같은 어둠 속에서 출렁이는 강물, 심연의 형체 모를 괴물이 존재하는 듯한 강. 그 강 너머에 불빛이 보인다.
‘그래, 저 불빛이야. 지금 내가 가고 있고 싶은 곳은 저곳이야.’
나는 주저하지 않고 강물로 뛰어 들었다. 한 여름이었지만 밤의 강물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살을 애는 듯한 차가운, 서슬퍼런 강물이 나를 감싸고 강 밑바닥으로 끌어내려했지만 강을 건너 저 불빛으로 가겠다는 나의 의지와 움직임또한 만만치 않았다. 헤엄쳤다. 헤엄치고 또 헤엄쳤다. 팔을 휘젓고 있는 힘껏 발을 굴렀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이 놈의 폐가 말썽이다. 숨이 가빠오고 폐가 타 들어가는 듯 하더니 기도가 꽉 막히는 듯 좁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천명은 멈출 줄 몰랐고 숨을 쉬기 어려워지니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움직임은 둔해지고 몸이 물속으로 가라 앉는 횟수가 잦아졌다. 얼음짱 처럼 차가운 물이 목으로 넘어왔다. 차가운 강물 속 괴물이 나의 식도를 타고 들어오는 듯 했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마치 눈앞에 죽음이 나를 반기는 것 같았다. 그 뒤엔 거의 무의식적인 몸부림이었다. 어디쯤 왔을까… 어디쯤 왔을까……를 되내일 즈음, 발 끝에 땅이 닿기 시작했다. 거의 걷다시피 강물을 박차고 나오는데, 검은 손들이 나를 감싸고 잡아 끌었다. 무서웠다. 죽은 건가?! 하지만 곧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리기 시작한다. 하나 둘 부축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그들은 환호했다. 나로 그 불빛 속 나환자들이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그 불빛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2. 1978년 4월, 스물 아홉 살의 어느 화창하게 갠 봄날, 무라카미 하루키
야구장을 찾았다. 재즈빠는 오늘 하루 열지 않기로 했다. 사람들은 재즈카페를 운영하는 사장이라고 하면 낭만적인 음악과 조명아래에서 멋진 손님과 그것만큼 멋진 대화를 하는지 알겠지만 나의 하루는 담배연기와 음식재료냄새와 쓰레기에 둘러쌓여있다. 하루 13시간의 중노동에 숨쉴 틈 없이 바쁜 일상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오늘은 지친 나의 몸과 마음을 풀어주기 위한 날이다. 하늘이 푸르다. 몇 회쯤 되었을까. 투수가 던진 공을 날카롭게 바라보던 타자가 배트를 휙 휘두른다. ‘깡~!’ 하는 소리와 함께 공이 2루수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듯한 공. 그 공을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 느낌이 뭔지 잘 모르겠지만, 나도 소설을 한번 써보자. 쓸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가는 길에 괜찮은 만년필을 하나 구입하고 책상에 앉았다. 머리 속에 있던 몇 가지 원칙을 노트에 적어보고 타자기 앞에 앉았다. 큰 호흡으로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숨을 내뱉음과 동시에 나의 마음은 차분해 졌다. 이내 나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들과 이미지들을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번에 주욱 써 내려간 첫 번째 원고가 20~30페이지 정도가 되었다. 타자기 옆에 놓여진 수십매의 원고지. 그 종이들 안엔 내 머리 속 이미지의 편린들로 이루어진 나의 첫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3. 1983년 서른 살의 어느날 이태리 밀라노, 하워드 슐츠
이태리 밀라노. 상품박람회에 참석하는 출장 겸 여행일정이다. 박람회장으로 이동하는 중 나는 아담한 커피바에 들어왔다. 커피 바 건너편의 멋진 바리스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친근해보였다. 멋진 남자 바리스타는 원두를 갈고, 우유를 데우며, 에스프로소를 추출해 맛있는 카푸치노를 만들고 있었다. 커피 바 안의 손님들은 그 광경을 즐겁게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칠 때면 살짝 눈인사를 하며 소통하고 있었다. 바리스타가 만단 따뜻한 카푸치노와 에스프레소가 나왔다. 진하고 달콤한 향이 내 코 끝을 자극한다. 내 코 끝을 자극한 커피 향은 곧 커피 바 전체를 휘감고, 손님들은 그 그윽한 향을 즐기고 있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바리스타의 움직임은 마치 한 편이 춤을 보는 듯 했고 그것만으로도 돈을 내고 찾아갈 가치가 있는 듯 했다. 열정적인 바리스타와 그가 만들어주는 진하고 달콤한 에스프레소, 춤추듯 뽐내는 커피 만드는 과정, 그리고 분위기 있는 가게와 이 곳을 가득 메운 여유로운 사람들... 미국에서는 볼 수 없는, 지금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있었다. 지금의 이 느낌은 색달랐고, 이 색다름이 새로운 변화를 몰고 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무라카미 하루키, 현 최고의 작가. 대중성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 그러한 대중적 지지도로 인해 노벨문학상에 까지 거론되는 등 기준 자체를 바꾸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 최근 출간된 최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일본에서는 출간 일주일만에 100만부 판매, 한국에서는 1쇄가 무려 20만부가 찍혔다.
20세기를 넘어 21세기 까지도 최고의 작가로 손꼽히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 내가 그를 눈여겨보기 시작한 것은 작가로서의 그의 ‘시작’이었다.
그의 시작은 극적이라고 하면 극적일 수 있고, 밑도 끝도 없이 다소 쌩뚱맞을 수 있는 그런 시작이었다. 하지만, 사실 작가로서의 그 시작은 대중에게 알려진 바와 달리 그리 극적이지도, 쌩뚱 맞지도 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대학을 나와 밥벌이를 위해 약 7년간 재즈빠를 운영하였지만, 그 생활은 고되었다. 어두컴컴한 실내와 뿌연 담배연기, 자정이 넘어서야 끝나는 고된 일상. 그가 음악을 많이 알고 좋아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뭐 하나 만족스러운 것이 없었다. 그는 현실에 만족하지 못했고 밥벌이의 지겨움에 대해 여러번 토로하였다. 중요한 건, 그는 작가로서의 기본기를 갖추었다는 사실이다. 열두 살 때 그의 아버지가 구입해준 세계문학전집을 몇 번씩 탐독했으며, 이런 그의 관심은 외국문학, 러시아 문학으로 이어졌고, 세계역사 전집을 통독한 뒤에는 트루먼 카포티나 스콧피츠 제랄드와 같은 영미문학으로 넘어갔다. 그는 학교공부를 뒤로한 채 책 읽기에 심취해 있었다. 1년이 재수 끝에 진학한 명문 와세다해 문학부 연극과에 들어가서도 그의 관심은 달라지지 않았다. 학교 공부보다는 영화보는 것을 좋아해 일년에 200편이 넘는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보지 않을 땐, 학교 연극박물관에 있는 동서고금의 시나리오를 무차별적으로 읽었고 수차례 시나리오를 써보기도 했다. 그가 배우자 요코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을 하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꾸리기 시작한 것이 스물 두살 즈음 되니, 그도 여느 천재와 다름없이 10년 간을 ‘책과 글’이란 것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대중 작가로 대성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책, 글과 함께한 그의 10년이었던 것이다.
그럼, 과연 나의 10년은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이런 모습 아닐까.
2006년 스물 아홉의 봄….. 회사에 입사한지 2년차이다. 회사생활은 고되고 스트레스로 가득했다. 그래서 주말은 나에게 소중한 휴일이었다. 얼마 전부턴 주말마다 종로 영풍문고나 서울문고를 찾기 시작했다. 책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던 나인데, 왠일인지 책을 가까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공한 사람들은 언제나 책을 옆구리에 또는 가슴 속에 품었다고 하니, 성공을 원하는 내가 의도적으로라도 책을 가까이 하려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이제 경제적으로도 독립을 하였으니 벌이의 10%로 쯤은 책 구입에 투자해도 될 것이라 생각했다.
2008년 서른 하나의 가을…… 팀장이 거지같다. 팀장의 말을 따르려 해도 도저히 따를 수가 없다. 언행일치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을 뿐더러, 있는 후까시 없는 후까시 다 동원해서 아랫사람을 누르려 하고 있다. 결국 얼마 전에는 그런 팀장과 술자리에서 한 판 붙었다. 그 뒤 팀장은 말이 없다. 술자리에 가서도 나에게 술을 권하지 않는다. 하루하루가 스트레스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서점에 들렀다. 이리저리 보고 있는데 내 눈을 끄는 제목 하나가 보인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 저자 구본형……’ 나는 그의 책을 그렇게 만났으며 그는 명쾌하고 간결한 필체로 나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그를 만났다.
2012년 서른 다섯의 겨울…… 변경연 연구원 공지가 떴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지원하겠다는 답글을 달았다. 실수였다. 단군을 같이 하는 진희누나가 나의 댓글에 반갑게도 또 다른 답글을 달았다…… ‘이런…… 조용조용 진행하려 했는데……’ 사실, 여전히 나 자신에 대한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지원을 안하는게 본래의 마음이었지만, 홍쌤으로부터 선생님이 아프시다는 소식을 듣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그와의 만남을 더는 늦출 수 없었다. 그 주말에 동네 카페로 가 자리를 잡았다. 뜨거운 헤이즐넛향 라떼를 마셨다. 뜨거운 라떼는 중력과 본능적인 식도의 움직임에 따라 나의 혀끝과 목젓 그리고 식도와 위를 적셨다. 커피 향이 코를 찔렀고 커피로부터의 온기는 온몸으로 퍼졌다.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목뒤 근육이 부드러워지고 뇌가 말랑말랑해졌다. 뇌를 요리조리 굴린지 몇 십분. 자기소개서에 대한 구상이 끝났다. 큰 숨을 들이셨다 내쉬었다. 모니터를 보고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흘렀을까… 6시간? 7시간? 어느 덧 mestory는 10페이지에 다달았다. 기분이 좋았다. 불연듯, 나도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2013년 서른 여섯의 여름…… 몽골이다. (????) 몽골이다. 내 생애 첫 해외여행이다. 언제나 내 옆을 지켜주는, 그리고 내가 지켜주었던 가족들도 없다.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 나처럼 변화에 목마른 사람들, 가슴 속에 불씨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이 함께 했다. 쏟아질 듯 밤하늘을 가득메운 별을 보았다. 온 세상을 담을 듯한 묵직한 기세를 가지고 있는 호수도 보았다. 태양의 떠오름과 가라앉음을 동시에 품고 있는 지평선도 보았다. 몽골은 자연을 품고 있었고, 세상을 품고 있었고 모든 사람들의 꿈을 품고 있는 순수의 땅이었다. 백지와 같은 마음, 순수한 열정, 새로운 시작을 위해 내가 가져야 하는 그것들이었다. 몽골은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 몽골은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것이 나에게 새로운 시작임을……
2016년 서른 아홉의 여름… 나의 첫 번째 책이 출간된지 3개월이 지난 어느 날. 출판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2쇄 들어간다고…… 감격의 순간이다. 지난 봄 나의 첫 책 ‘일상부여잡기’가 나올 때까지는 그저 책을 썼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여한이 없었는데, 2쇄라니….. 하기야 2쇄라고 해봤자 2천부에 불과하다. 전작이 출간된 지 3년 만에 나온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후쿠시마의 봄’은 전작과 같이 1쇄가 무려 20만부가 찍혔고, 출간과 동시에 동이 났다고 하니, 나의 2쇄 2천부는 새발의 피 수준. 하지만 일개 직장인에 불과한 나의 책을 출판해준 출판사와 그 동안 내 간절했던 바람을 생각하면 이는 단순한 2쇄가 아니다. 올해는 책이란 걸 접한 지 딱 10년째 되는 해이다. 본격적으로 책과 글에 관심을 가진 걸로 따지자면, 약 5년이 지난 시점이다. 결국 나는 나의 첫 책을 완성해냈다. 선생님의 바람대로 이루어낸 것 같아 기뻤다. 혁명의 아이콘 체 게바라는 서른 아홉 가을, CIA요원 총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세상을 모두 가져보았다. 혁명에 성공하였고 온 시민이 그를 마음 속에 품었다. 나에게 서른 아홉은 또 다른 시작이다. 대중 속에 파뭍혀 보일 듯 말 듯 미미한 존재로 살아왔던 내가 작게나마 나의 이름을 알리는 해가 되었다.
오늘도 난 스타벅스를 찾았다. 언제나와 다름없이 따뜻한 헤이즐넛향 라떼를 마시며 몸과 마음과 뇌의 긴장을 풀어준다. 몸과 마음의 긴장이 풀리고 뇌가 말랑말랑해지는 것을 느낀다. 가슴이 팽팽창하 터질 듯 숨을 들이마셨다가 이내 내쉰다. 모니터를 보고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난 글 속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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