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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1일 11시 52분 등록

세 사는 마음

 

 

 

우디 알렌과 순이 프레빈의 이야기를 읽었다. 1년에 1편씩 영화를 만들어온 우디 알렌의 새 영화 [로마 위드 러브] 가 올해 개봉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작년에는 파리를 주제로 한 영화를 만들었다. 1년에 한 권의 책을 쓰는 사람에 이어 한 권의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니. 창의력에도 성실성이 필요하다는 걸 보여주는 놀라운 사람들. 우디 알랜과 순이 프레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불온한 상상력을 가지고 읽던 오지라퍼 나는 집요하게 웹써핑을 했다. 아마도 여름 무더위에 불쾌지수가 높아져서일거다.

 

남자가, 사실혼관계였던 여자가 전남편과 입양한 열 여섯살 딸과 잤고, 이 일을 계기로 남녀는 헤어지고, 남자는 딸이었던 여자와 결혼을 했다는 이야기다. 이런 상황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건 남자가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감독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친아버지와 딸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그들은 엄마 애인과 엄마가 전 결혼에서 입양한 딸의 관계였다. 그런데 그 사실혼을 기반으로 아들 하나를 출산했고 두 아이를 입양해 키우고 있는 상황이었다. 구설수에 오를만한 것이었구나. 나의 불온한 관심의 물줄기가 이 속에서 마르지 않고 흐른다. 한국 사람들은 양엄마의 동거남과 결혼한 그 여자가 아리랑만큼 한국적인 이름을 가졌고, 7살에 한국에서 입양되었기 때문에 친정붙이의 마음으로 듣고 있을까? 나는 그랬다. 한편 이 이야기는 나의 오랜 즐겨찾기 관심사인 오이디푸스 신화를 데리고 온다.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왕 라이오스와 왕비 이오카스테의 아들이었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신탁을 받은 라이오스왕은 근심의 싹을 없애기 위해 아들을 숲으로 가서 죽이라 사주한다. 그러나 젖냄새를 풍기며 방글거리는 아이를 신하는 죽이지 못한다. 애기를 다른 이에게 주었다. 그 아들은 우연히 왕의 양자가 되었다. 그의 이름 오이디푸스부은 발이라는 뜻이다. 아이를 버릴 때 발목을 묶었던 끈 때문에 발목이 부어 있어서 양부가 붙인 이름이다. 그가 성년이 되었을 때 자신이 양자임을 알게 된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운명이라는 신탁을 듣는다. 그는 운명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다른 나라로 떠났다. 그는 양부모를 사랑했다. 그리고 우연히 사거리에서 행패를 붙이던 노인 일행과 싸움이 붙었고, 오이디푸스는 그 싸움에서 이겼다. 싱겁게도 일행 4명 중 3명이 죽어버렸고, 1명은 도망쳐 버린 거다. 혼자만 살아온 것에 대한 추궁이 두려워서 신하는 떼강도를 만나 왕이 죽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떠돌던 오이디푸스는 테베에 이른다. '아침에는 네 발, 점심때는 두 발, 저녁 때는 세 발로 걷는 짐승이 뭐게?' 라는 스핑크스의 유명한 수수께끼를 풀고 마침 왕이 공석인 테베의 왕비와 왕의 자리를 부상으로 받는다. 그리고 아들딸 낳고 잘먹고 잘 살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테베에 전염병이 창궐했다. 충실한 오이디푸스왕은 국가의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신탁을 들으러 사람을 보낸다. 아폴론의 신탁을 받으러 갔던 사람은 아버지를 죽인 아들이 어머니와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받아 들고 돌아온다. 오이디푸스는 타고난 집중력과 영특함을 가지고 그 놈을 찾으려 든다.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에 의해 자신이 그임이 밝혀졌을 때 오이디푸스는 목을 맨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의 장신구로 두 눈을 찌른다. 그는 두 눈이 먼 방랑자가 된다. 그의 방랑에 이오카스테와의 사이에서 난 맏딸 안티고네가 동행한다. 그의 두 아들은 자리를 놓고 다투다 서로를 죽이는 불상사의 주인공이 된다. 그는 평생을 눈 먼 거지노인으로 떠돌다 콜로노스 숲에서야 평화롭게 숨진다. 그리고 신들은 오이디푸스의 시신을 받아들이는 나라는 번영을 구가하리라는 신탁을 내린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쌍을 이루는 엘렉트라 콤플렉스가 있다. 유부녀였던 헬레네를 파리스가 훔쳐 도망가자 오쟁이진 남편은 전쟁을 일으킨다. 트로이를 향해 진격한다. 그런데 배가 뜨지 않는 거다. 아가멤논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치라는 아르테미스 여신의 신탁이 내렸다. 아가멤논은 어머니 크리타임네스트라에게 딸을 영웅 아킬레우스와 결혼시킨다고 속여서 배에 태운 후 제물로 바쳐버린다. 그러자 바람이 자고 군대는 출격할 수 있었다. 이 전쟁은 10년을 끌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죽었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딸을 죽인 남편에게 원한이 졌다. 그래서 남편 아가멤논이 돌아온 날 정부인 아이기스토스와 짜고 그를 죽여버린다. 엘렉트라는 이피게네아아의 여자 형제이며 클뤼타임네스트라의 딸이다. 그녀는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에게 복수를 맹세했다. 결국 남동생 오레스테스와 공모하여 모친 살해에 성공한다.  

 

오이디푸스와 엘렉트라 두 경우 모두 이성부모를 제거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엄마와 결혼해 아이들을 낳았고, 엘렉트라는 자신의 일과 사랑이 아니라, 아버지를 살해한 어머니를 죽이는데 자신의 생을 소진했다. 조셉 캠벨은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 이 두 가지 신화가 유아기 염원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이성부모를 향한 사랑을 그들의 기존의 배우자인 동성부모에게 돌려주고, 자신의 길을 갈 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극복될 수 있다고 보았다. 프로이드는 사람의 인생 초기를 결정적 시기로 보았다. 구순기, 항문기, 성기기를 지나 잠시 잠복하던 에너지는 오이디푸스 또는 엘렉트라 콤플렉스의 시기를 지나는데 특정 발달단계의 과업이 충분히 성취되지 못하면 그 시기에 고착된다고 보았다. 알코올과 담배 등 입으로 하는 것에 중독을 보이는 사람은 구순기 욕구의 불충족을 보여주며, 지나친 깔끔함과 보유 성향은 대소변을 가리는 훈련을 받던 항문기의 강박저인 훈련의 결과이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넘어서지 못한 사람은 말 그대로 다른 이성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이성 부모에게로 향하는 사랑에 자신의 에너지를 집중하게 된다고 보았다.  

 

신화 속에서는 이성부모와 자녀 사이의 끌림에 대한 이야기가 더 있다. 로마시대 시인인 오비디우스가 그리스신화를 쓴 책 [변신이야기]를 읽어보면 뮈라는 아버지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사랑을 느낀다. 그녀는 유모의 주선 아래(어디서나 이 유모들이 사건의 촉진자 노릇을 한다!) 어머니가 디오니스소스 축제를 위해 집을 떠났을 때 다른 여자라 속이고, 아버지와 잤고 아들 아도니스를 출산했다. 아도니스는 매우 잘 생기고 매력적인 남자로 자라나 아프로디테 여신의 애인이 된다. 뮈라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으면 아이를 밴 채 나무가 되어 눈물을 흘렸다고 했을까? 아마 모든 미혼모들의 고통을 대변하는 것이리라. 그녀는 몰약나무가 되었다.

 

우디 알렌과 순이 프레빈의 경우는 피가 섞이지 않은 사이이니, 어떤 관계쯤 될까? 양아들에 대해 사랑을 느껴 대쉬했지만 거절당하자 모함을 하고 자결해버린 여자쯤 될까? 이런 캐릭터는 동서양과 대륙을 넘나들며 생성된다. 그리스신화에서는 테세우스의 아내 파이드라가 그러했고 한국의 윤정선 희곡 [왕자호동]에서 계모 왕비가 또한 양아들 호동에게 그러하여 낙랑공주를 연적으로 대립한다. 아니면 처제에게 욕정을 느껴 속여서 취한 뒤 혀를 잘라서 데리고 온 남자쯤 될까? 사막이나 어려운 곳에서는 형제가 죽으면 생존이 막연한 형의 아녀자들을 가족에서 거두자는 취지로 형사취수제도 있었고, 어디 왕실은 지금도 사촌형제끼리 결혼한다고 했다. 어느 문화권, 어느 시대에는 자연스러운 일이 다른 곳에서는 이상한 일이 되고 마는 그런 일로 이것을 보아야 할까?

 

다시 영화감독 부부 두 사람의 일로 돌아간다. 그들은 합법적인 부녀가 아니었으므로 결혼을 할 수 있었던 것이었나? 중간에 낀 그 여자만 낙동강 오리알이 된 건지도 모른다. 그녀의 역사를 살펴본다. 그녀는 51살인 아버지 친구와 21살에 결혼을 했었다. 두 번째 결혼은 임신을 해서 다른 가정을 깨고 지은 것이었다. 거기서 3아이를 출산했고, 3아이를 입양했는데 그 한 양딸이 저 여자였다. 그녀는 아버지와 잔 게 아니라, 엄마 집에 드나들면서 엄마와 아이를 만들어 낳고 엄마와 입양을 했던 아저씨와 잤고 그 아저씨와 결혼을 했다. 남의 가정을 깨고 내 가정을 세웠던 과보를 내 가정이 누군가의 사랑으로 인해 깨어지는 걸로 받는 걸까? 그리 생각해야 할까? 역시나 이 주제는 오이디푸스콤플렉스와 관련된다.  

 

오이디푸스콤플렉스와는 다른 이런 관점도 있다. 독일의 심리학자 버트 헬링거가 개창한 가족 세우기는 이러한 것을 정서적 대리배우자 역할이라고 한다. 어머니 자리에 딸이 들어가는 건 세 사람 사이에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다고 본다. 딸은 어머니를 위해서 아버지의 대리배우자가 된다. 그 내용이 정서적이든 성적이든 말이다. 가족은 유기체여서 필요한 것에 따라 유기적으로 변화해간다. 각자 가족 유기체 안에서 그 유기체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기능을 맡는다. 희생자의 역할 순교자의 역할을 자처하는 사람도 있다. 생존을 위해 그 가족에 소속되고 그 가족이 붕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기능한다.  

 

몇 주 전 일이다. 주말 이틀 동안 가족세우기 웍샆에 갔다. 아침 9시에 출근해서 6시에 끝나는 프로그램이었다. 이전에 나는 이 프로그램에 세 번 온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이 네 번째 참여다. 그때는 막연한 끌림만 있을 뿐 특별히 절실한 이슈가 있었던 게 아니기 때문에 이틀 중 하루만 와도 좋았다. 지인 중에 이 프로그램을 좋아해서 훈련 받는 이가 있었고, 나는 그 지인의 전도를 받아들였던 것 같다. 가족 세우기와 그 원리를 조직에 적용한 조직세우기에 대한 책을 두 권 읽은 후였다. 동연출판사와 산티출판사에서 책이 나왔다. 그 중 한 권의 번역자가 이 웍샾의 진행자였다. 세 번 모두 운좋게도 대리인 역할을 했다.

 

장충동의 기독교 회관에 갔던 때는 엄마를 대신해서 아버지와 싸우고 있는 딸의 대리인을 했다. 이 여자는 매우 화가 나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가족들은 그녀를 피해서 아버지 옆에 모여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에너지와 시간을 그 역할에 소진하고 있었다. 너무 화가 나있고, 아버지에게 복수하는 것에 골몰해 있어서 사실 자신의 남편과 아이들, 그녀 자신의 가족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 지는 살필 겨를이 없었다. 반면 어머니는 자신의 분노를 딸에게 대신 지워놓고 편안히 있었다. 불쌍한 건 그녀의 아이들이었다. 화가 난 엄마 때문에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의 짐을 원래 주인인 어머니한테로 돌려주고, 어머니 대신 남성을 응징하는 역할을 벗고 빈 손의 가볍고 작은, 딸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화내는 그녀의 에너지를 보여주는 대리인이었다.

 

서울역의 요가원에는 두 번 갔었다. 한 번은 그녀의 유산이 확정된 날이었는데 그녀가 우는 걸 잘 돕지 못하는 것에 좌절하고 있었다. 혹 도움이 될까 하고 갔었다. 서른다섯 살을 넘기며 혼자 있는 좌절된 모성을 그녀에게로 전가했더랬다. 태교책을 사다 준다 어쩐다 오버를 하고 있었다. 거기서 마침 유산된 태아의 역할과 유산을 한 여자의 역할을 했다. 유산을 한 여자는 친정 어머니를 향해 죽일 듯 주먹을 치켜 들었고, 화를 내며 다가갔다. 그런데 막상 손을 내리쳐 친정 어머니를 때릴 수 있을 때 그 어머니 앞에 쓰러져 오열했다. 그녀는 아마도 아이들을 유산시키고 싶지 않았거나 그 일이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딸만 생각하는 친정 어머니의 입김에서 아이를 후딱 유산하길 반복했던 것 같다. 친정어머니는 딸의 태 속에서 자라나는 아이보다는 딸의 안녕을 생각했던 것 같다. 딸이 고통받는 것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고 결정권자이자 책임자인 딸을 앞질러 결정을 내린 것 같다. 남의 운명에 끼어들었을 거다. 그런데 딸은 자기 자식을 죽이기로 결정하도록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그녀에게 커다란 분노와 아픔을 가지게 되었다. 주먹을 쥐고 자신의 기가 넘치는 데도 친정엄마를 향해 가던 딸은 엄마 앞에서 왕 울어버렸다. 분노의 아래에는 슬픔과 아픔이 있었다. 한편 그녀는 친정어머니를 향항 분노 뒤로 자신의 아픔을 슬쩍 밀어놓고 아이를 낙태하기로 결정한 자신과 죽은 아이를 대면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과제만으로 너무나 화가 나고 슬프기 때문에 자기 아이들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살아있는 아이와 죽은 아이 모두 슬픔 밑에는 사랑이 있었을까? 흘려야할 눈물은 흘러나와야한다.

 

낙태된 태아의 대리인 역할은 두 경우였다. 가족세우기에서 죽은 이의 대리인은 바닥에 눕는다. 나더러 진행자가 가서 누우라는 자리에 누웠다. 한 번은 움직임이 없이 그저 누워있는 죽은 아이였다. 그렇지만 죽은 아이도 살아있는 자식과 마찬가지로 자리를 만들어 소속감을 주고, 엄마 아빠가 사랑한다고 말해주니까 누워 눈을 감은 채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또 한 번은 매우 화가 난 낙태아의 역할이었다. 그 부부의 낙태된 4명의 아이 중 3번째 아이 역할이었다. 낙태가 산아조절의 정당한 수단처럼 오인되어 사용되는 때의 일인 듯 했다. 그 아이는 부모가 손을 대도 뿌리쳤다. 그러면서도 어쨎든 부모가 와서 아이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곳을 마련해주고, ‘너를 사랑한다고 말해주니 진정이 되었고 평화가 왔다. 낙태는 부부 모두에게 커다란 사건이었고 엄마아빠 대리인인 두 사람이 손을 맞잡은 후에야, 또 수많은 어머니들이 그 엄마의 뒤에 서고, 수많은 아버지들이 그 아빠의 뒤에 선 뒤에야 감당가능해진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느껴지는 것보다 지나치게 행동을 하는 것 같았다. 몸의 느낌에 주의해서 움직이라는 주의를 여러 번 받았다. 어떤 에너지는 나에게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에너지와 부합해 농축된 것을 한꺼번에 일으켜 꿈틀거리게 그 에너지를 활성화 시킬 만한 것이었던 것 같다. 진행자는 나의 가계에 대한 추축을 말했다. 가계 안에 가려진 살해가 있었을 거라고 말했다. 살해자와 죽은 이가 모두 있을 거라고 했다. , 죽은 이 없는 가계가 어디 있어? 게다가 가까이에는 한국전쟁을 거쳤고, 내가 아는 역사에도 집 안의 아들을 같은 날 두 명이나 잃은 보도연맹 사건이 있었지. 그런 사연이 없는 집이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거야? 나는 도를 아십니까?’ 하고 다가와서 이 집안 조상들이 나에게 공을 많이 들이고 있다는 말을 해줄 때처럼 허황스럽게 느꼈다.

 

네 번째인 이번에 가서는 분명히 말했다. 야근을 마친 이가 와서 집에 혼자 있기 때문에 가기 싫은 마음도 좀 있었다. 나는 결혼을 한 지 한 달이 되었고, 잘 해보고 싶다고. 그랬더니 원가족을 세울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두 사람뿐인 내 가족을 대뜸 세웠다. 두 사람을 골라 세운 후 내가 손을 잡고, 느껴지는 대로 남편의 대리인과 나의 대리인을 자리에 세웠다. 나의 대리인은 끈읺없이 바닥과 남편을 보고 남편은 나에게는 관심이 없고 바닥에 집중했다. 거기 한 여자가 누웠다. 그러고도 부족해 또다른 여자와 또다른 아이가 누웠다. 첫번째 누운 사람의 어머니와 남동생이었다. 그녀의 역사 속에 수많은 아픔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누워 있는 어머니를 일으키려는 게 그에게 얼마나 커다란 도전이고 부담이었는 지를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손을 잡자 그는 휘청거리지 않게 되었다. 결혼은 남편의 눈을 통해 들어온 가족사를 아내에게 전송하고, 아내의 눈을 통해 들어온 아내의 가족사를 남편에게 전송하는 것이며, 짐을 나누어지는 것이라 했다. 

 

나의 대리인은  내 아버지의 대리인을 두려워했다. 두려워하는 건지 외면하는 건지, 정면으로 대하지 못하고 빙글빙글 돌아서 외면한다. 진행자가 끌어다 놓으면 남편의 손을 잡은 채 남편 어깨 뒤에 숨는다. 그러나 아버지의 대리인과 딸의 대리인 두 사람만 남았다. 기어서 도망을 치다가 겁에 질려서 벽에 붙어서 저 쪽을 쳐다본다. 아이가 아직 걷지 못할 때니 진행자는 2살 이전에 있었던 일일 거라고 말했다. 아마도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는 장면을 보고 놀라고 두려워했던 경험이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 아이의 두려움을 다시 경험하고 표현하는 시간을 가지는 게 좋겠다고 했다. 이거야 뭐 최면경험이나 굿처럼 황당하다. 나는 아버지의 딸로서 아버지로부터 독립하는 과제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랑이 아니라 두려움이 있다니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진행자는 '어른인 나는 아버지에게 화가 나 있고, 아이인 나는 두려움에 젖어 있다'고 말했다. 저건 또 무슨 말일까? 오이디푸스콤플렉스나 아버지의 딸에서 독립하는 게 과제가 아니었던가? 알 수 없다. 뭔가 뒤죽박죽이 되어 있다. 암튼 아버지 대리인은 덩치 큰 남자가 굳건히 서 있고, 나는 그의 발을 잡고 다리를 쭉 뻗은 모습으로 매달려 있었다. 둥글게 모여 앉은 사람들 사이에서 기어서 도망치는 행동은 그 때 나왔다. 진행자는 그 두려움을 표현하도록 했다. 그런데 자꾸 어른인 나와 아이인 나를 헤깔려서 연극하지 말라고 한다. 저건 또 무슨 말인가? 알 수 없다. 그런데 다시 이런 기회를 갖기는 힘들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 도와주는 이들이 있을 때, 내가 자발적으로 만들어 가진 이런 기회 속에서 뭔가가 진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다.  

 

결혼식 때 받은 절값은 아직 빨강 한복 빽에 든채다. 앞으로 살면서 니가 갚을 빚이니 네게 준다면서 혼주인 엄마는 부모님이 모르는 명단과 금액을 정리한 종이와 부조돈을 모두 내게 주셨다.  집들이 선물로 받은 현금도 있다. 이것들을 가지고 상담을 다닐 생각이다. 결혼해서 잘 사는데 보태라고 십시일반으로 도와주신 거니까, 좋은 일로, 결혼을 튼튼히 하는 데 쓰고 싶은 마음이 있다. 결혼의 기초공사를 튼튼히 하고, 내 집을 아담하고 살고 싶은 곳으로 세우는 일, 빈 집이 아니라 마당가에는 꽃도 피어있고, 시렁 위에 식구대로 밥그릇을 엎어놓고, 신발을 씻어 세우고, 오가던 이웃에게도 머물러 쉬고 싶은 곳으로 가꾸는 일 말이다. 나도 아름다운 가정을 가꾸는 안주인이고 싶다는 소망은 진심이다. 콩쥐는 원님잔치에 가기 위해 아홉 개의 밑빠진 독에 물을 채운다. 그런 소원이 없다면 계속 물을 채울 수 없었을 거다. 그리고 은행나무는 매년 그의 짝이 되는 나무를 그리워한다. (나는 나무라면 은행나무가 아닐까 생각했다. 은행나무는 공해많은 도시의 가로수로도 살아남는다. 그런데 암수 딴 그루여서 늘 그리워한다. 은행나무의 색은 노랑인데 개나리처럼 봄에 까불랑  팔랑거리지 않고 남들이 지는 가을에에 노래진다. 나무가 여성적이기 보담 좀 중성적이다.) 새로운 가정을 건설하는데 필요한 작업 중에는 인삼밭을 만들기 전 3년간이나 질 좋은 퇴비를 넣어 지질을 돋우는 것같은 기초작업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게 바로 내 안의 우선과제를 해결하고, 재생산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귀한 주말 시간을 이런데 쓰는 걸 보고 그는 나에게 궁금해한다. 약속시간에 매번 늦어서 그 습관을 고치려고? 왜 그런지 이해가 안 되는 것 같다. 이해가 안되는 데도 내가 원하는 일을 하도록 지원하고 내버려두는 게 고맙다. 자신이 동의하는 일을 지원하고 묵인하는 것보다 동의하지 않는 일을 인정하는 게 훨씬 '관용'적이다.

 

연구원을 지원하기 전에, 영화 만추의 도시처럼 공기가 모호하고 지루하고 답답해서 나에게 이런 질문을 했었다. 지금 천 만원이 네게 그냥 생긴다면 뭘할래? 나는 구본형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에 지원하거나 심리상담을 받고 싶다고 대뜸 적었다. 심리상담인지 정신분석인지 구분이 모호했다. 어쨎든 상담은 김형경씨 소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을 탐독하면서 생긴 소망이었다. 그녀는 서른일곱 즈음에 정신분석을 이년 정도 받은 경험을 가지고 그 소설을 썼다. 소설 속 두 여자는 마흔 전환을 이루어 가고 있었다. 정신분석을 받았던 소설 속 세진은 사랑과 성이 불가능해서 정신분석을 받았고, 그녀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다루면서 결국 애착에 대해 다루었던 것 같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어린아이가 이성 부모에 대한 사랑에 목을 매는 건 주된 애착을 형성해야 했던 시기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것으로 대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였다. 소설 속 건축가 세진은 어린아이로 돌아가 그 아이의 아픔과 분노를 다시 경험한다. 그리고 그걸 놓아버리는 과정을 거쳤다. 어쨎든 연구원에 지원을 했다. 연구원이 더 접근하기가 좋았고, 또 글을 쓰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묶인 부분을 풀어가고 싶다는, 그게 가능할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책을 못써서 천 만원을 날려도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다. 다만 대학원을 다닐 때 졸업논문을 내듯이 기한이 정해진 거라고, 그리고 책이나 논문은 배운 것을 갈무리하는 좋은 방편이라는 생각이 여전하다. 지금은 둘 다를 하고 있는 셈이다. 필요한 것이면 앞서거니 뒷서거니 어떻게든 와 닿는 것 같다. 그건 나로 향하는 길 일거다. 그래서 나의 사랑이 세 사는 마음이 아니라 당당한 집주인의 것이 되길 기대한다.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애를 쓸 필요가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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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02 10:40:04 *.160.232.5
저는 이야기를 무척 좋아하는데요, 그건 아마도 제 바닥에 결핍이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네요. 우린 뭔가 뭔지 모르는 시기를 겪으면서 혼자 어떻게 어른이 되는게 모른채 혼란이 무서워서 타인의 이야기를 수집하며 사는 게 아닐까합니다.
혼자 알아서 해야하는 시간이 너무 기니까 그게 언제까지 이어질지 몰라 두려웠으니까, 그래서 남은, 어른들은 어찌사는지 궁금했던게 아닐까 하네요.
제가 장편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를 많은 사람이 등장해서, 많은 사건이 있어서, 다양한 삶이 있어서, 이야기가 잘 안풀려서....라고 쯤 해두죠.

콩두님의 글에 다양함과 지르는 맛이 있어 좋네요. 대리인이란 거 그거 벗어나는 거 알고 싶네요. 엄마나 이모 대리인이 아닌 자기로 사는 삶은 어디쯤의 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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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02 12:17:29 *.50.65.2

콩두님 덕분에 새로운 사람 새로운 이야기를 접하는군요.

영화 '로마위드러브' 한 번 봐야겠습니다.


배운 것을 마음속이나 머리속에 담아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쏟아내고 정리하고 글을 엮으면 

한마디씩 정리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런 의미에서 배우고 있는 과정이구요.


세심하게 스토리를 쓰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담담히 써나가시는 콩두님.

그렇게 자신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저도 연습하고 싶네요. 


좋은 글 잘 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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