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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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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7일 23시 58분 등록

절망하고 이민을 떠나는 그대에게

  

지난 대통령선거일에 결정했다고 했지요? 이민을. 이 나라의 상식이 너무 암담해서 이 나라에서는 더 이상 그대 아이들을 키우고 싶지 않다며 내린 결정이라고 했어요. 교육자인 그대가 그렇게 판단했다면 그때까지 그대 얼마나 뜨거운 속을 끓고 끓여왔을까요? 그대가 얼마나 정직하고 정의로운 사람인지 내가 느끼고 있으니 적어도 그 결정의 맥락은 이해할 듯합니다.

 

십여 년 전에 그린, 그대 스승이 정말 마음에 든다고 자신에게 그 그림을 줄 수 없느냐고 간청했다던, 하지만 거절한 이후 누구에게도 공개한 적이 없다는 작품을 그대는 기꺼이 내게 주고 떠나겠다 했습니다. 그림을 받아 포장을 뜯고 찬찬히 살펴보면서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 놀랐습니다. 검은 바탕에 시뻘건 물감을 어떻게 뿌려 표현한 걸까요? 나는 그 속에서 우주가 탄생하는 모습을 보았어요. 137억 년 전의 빅뱅! 우주가 터져 나오는 가장 가까운 시간의 공간에는 누군가를 잉태한 자궁이 표현되어 있는 듯 했고... 색이 바래가고 일부는 자연스레 녹이 슬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침 핀과 붉은색 실을 재료로 써서 이제 막 누군가가 새롭게 태어나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느꼈어요. 그대는 내가 기괴하다 여길까 염려하여 이 작품을 주는 일을 꺼렸다고 했지만, 나는 이 그림만큼 그대를 잘 표현한 그 무엇을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귀한 감탄을 느꼈어요. 스스로 자궁을 열고 태어나고 싶은 뜨거움 가득한 그대.

  

그대 삶과 그대 삶이 품은 실존적 욕망과 가치가 더없이 강렬하게 느껴져서 정말 좋았어요. 그리고 이내 슬퍼졌어요. 저 삶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얼마나 커다란 절망이 되었으면 이곳의 바람과 흙과 하늘과 그대를 키워낸 남쪽 바다, 그리고 모든 인연을 뒤로 하고 이민을 결정했을까? 그대에게 대선은 틀림없이 그저 하나의 상징이겠지요. 좋은 스승이고 싶어 온 힘을 다해 아이들을 만나고 가르쳐온 그대 교육현장에서도 그대는 너무 자주 절망했겠지요. 입시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학교 체제에서 그림을 가르치는 미술 선생님으로서 그대가 입었을 무기력감을 나는 감히 짐작합니다. 누구보다 정직해서 적당히 침묵하고 적당히 타협하지 못하는 그대 성정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왜곡당하고 상처받았을까요? 작가의 세계관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그 창의와 정직, 아름다운 세상을 열망하는 눈은 얼마나 자주 실명의 위기에 놓였을까요?

 

그림을 선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그 사이 모든 짐을 싸서 해운 화물에 맡겼다 했으니 이제 그대는 정말 떠나는군요. 하지만 나는 왜 기쁘게 축하할 수가 없는 것일까요? 왜 자꾸 마음 한 구석이 아려 오는 것일까요? 그래도 이 나라는 살만한 곳이라고 그대를 잡지 못하는 속절없이 나이만 먹어가는 무기력한 내 지성 때문일까요? 빛나는 재능과 정직한 열정을 품은 선생님 한 분을 이 나라에 잡아두지 못하는 안타까움 때문일까요? 저 뜨거운 그림만 남고 그 작가는 없는 외로운 시간을 상상하는 것이 불편해서 일까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일찍, 되돌릴 시간 있는 때에 그대의 결정을 알았더라면 꼭 말해주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그대의 절망을 이해하지만, 그래도 여기 있기를 바란다는 말. 바라는 세상이 있다면 그 바라는 상태를 이루기 위해 뜨겁고 정직한 사람들이 감내해야 하는 역할과 시간이 있는 것이라는 말. 일제강점기의 절망 속에서도 은밀하게 우리말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있었다는 말. 더 부자유하고 더 불평등하고 더 비민주적인 시대에도 자유와 평등과 민주를 위해 자신이 선 자리에 두 발로 서서 시대를 건너온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 무엇보다 세상은 대통령 한 사람 바꾼다고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말. 그대가 가는 그 나라의 사회체제가 지금의 자유, 지금의 민주, 지금의 평등을 완성하기까지 몇 세대가 뜨거웠고 또 몇 세대가 절망했으며 지금까지도 몇 세대가 맞서는 삶을 살았는지 헤아려 보라는 말.

 

너무 늦어버린 이 말들은 그대에게 닿지 못하고 모두 맥없이 흩어질 테니, 세 가지만 부탁하겠습니다. 부디 기쁘고 건강할 것. 그대 절망에 갇힌 뜨거움이 보석 같은 그림으로 승화되도록 계속 그릴 것. 그곳이 절망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생각 혹시라도 들거든 지금은 늦어버린 내 충고의 말 잊지 말고 돌아와 다시 두 발을 딛고 맞서는 삶을 시작할 것. 그대 부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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