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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8일 15시 13분 등록

<떠남과 만남> 구본형, 2008, 을유문화사

 

1.   저자에 대하여

 

구본형은 인문학을 경영에 접목시켜 사람 중심 경영이라는 신선한 비전을 제시하는 우리 시대의 변화경영 전문가이다. 역사학과 경영학을 공부한 m 1980년부터 2000년까지 한국  IBM에서 근무하면서 경영 혁신의 기획과 실무를 총괄했고, IBM 본사의 말콤 볼드리지 국제 평가관으로 아시아 태영양 지역 조직의 경영 혁신과 성과를 컨설팅했다.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를 운영함과 동시에 무료 개인대학을 열어 평범한 인물들의 위대한 잠재력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작업에 주력하고 있다. 그의 명함에는 우리는 어제보다 아름다워지려는 사람들을 돕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직업 비전이다.”

 

책 왼날개를 베껴적었다. 소개가 간략하다. 스스로를 변화경영전문가라고 한 것만 챙긴다.

 

 

저자에 대한 개인적 평가

 

이 책은 2001년 그가 20년 다닌 직장을 그만 두고 퇴사한 후 직장인의 독을 빼기 위해 나섰던 40여일의 남도여행의 기록이다. 내가 읽은 건 을유문화사에서 재판된 것이다. 재판되면서 구본형 소장의 선동에 속아 새로운 출발을 했고, 10년이 지나자 자리를 잡은사진가 윤광준의 사진이 곁들여지고 그의 평설이 뒤에 붙었다.

 

이 책 초판에 얽힌 이런저런 풍문을 모아본다. 이 사람 저사람에게서 얻어 들었다. 당시 그는 이 책 전에 세 권의 책을 냈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 <낯선 곳에서의 아침><월드 클래스를 향하여>. 앞의 두 권은 베스트셀러였고, 세번째 책은 미국적인 경영에 대한 비판?을 다룬 것이라고 그의 다른 책에서 읽었다. 또 어느 날 그가 ‘1인 지식기업가의 아지트를 꿈꾸며 만든 오프라인 카페 살롱9에서 돌아오는 차에서 두 명의 선배와 같이 들었던 라디오에서 남편은 퇴직하기 몇 년 전부터 새벽 4시에 일어나 글을 써서 세 권의 책을 냈어요. 저는 그에 대한 믿음이 있었어요라는 성우의 목소리를 들었다. 4번째 책이고, 그가 1인 회사를 세워서 써낸 첫번째 책이다.

 

나는 이 책 초판본을 연구원 레이스를 하던 2012 2월에 서초국립중앙도서관에서 읽었는데 거기의 저자 사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여행길에 오랫동안 수염을 못깍은 덥석부리 사내의 사진. 최근에 그 사진과 느낌이 비슷한 사진을 보았다. 선발과정까지만 그가 주관하고 그의 사후에 그의 개인대학 커리큘럼으로 공부를 하고 있는 빨간 이가 선물로 주었다. 그 사진 속 하와이안 셔츠는 내가 같이 갔던 시칠리아여행에서도 보았고 그와 함께 해외연수를 떠났던 다른 연구원들도 그의 자유로움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기억한다. 모자는 터키인의 계단이 있던 바다에서 파도를 타면서 본 바로 파랑색이다. 게다가 수줍은 사람들이 눈을 가릴 수 있는 썬글라스까지! 나는 저런 차림으로 여행 안에서 자유롭게 펄럭이던 그의 옆에 있었다. 나는 그 여행에서 전혀 자유롭지를 못했다. 어딘가 떠난다는 것도 불안하고, 새로운 곳에서도 불안해서 힘들었다. 나는 잘 떠나지 못하는 방안퉁수 주제에 여행을 흠모하고 동경한다.        

 

그는 여행을 선동하나? 그렇다. 목차를 보고서 가보고 싶다고 내가 꼬인 데는 다압리 매화마을과 섬진강가 거닐기, 하동쌍계사 벚꽃구경이다. 언젠가 봄여행에서 가보게 될거다. 책을 읽고 난 후 가보고 싶은 곳은 그가 연결해놓은 옛사람과 관련된 곳이다. 이순신장군의 시신이 잠시 가매장되었던 걸 지켜본 나무가 있는 고금도 충무사, 구본형씨도 앉고 법정스님도 앉아 홀로 자기의 길을 가야 했던 한 남자를 기억했던 강진 다산초당, 고려왕실이 항복한 다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몽고에 대항했던 삼별초, 그리고 4,3때 토벌당한 붉은오름의 한라산과 해상왕 장보고의 완도다. 그리고 어쩐 지 마음에 들어 예정에 없던 며칠을 멈물렀다는 여성적인 산 천관산.

 

가장 여행을 추동하는 건 그의 후기다. 그는 후기에서 휴식이 있어야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내면적 성찰이 가능하고, 휴식을 허락하는 사회가 성숙한 사회라고 했다. 그리고 휴식하기 위해서 계속 여행할거라고 했다. 개인적인 여행기에서조차 그는 자신의 관점을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저리 의미를 만들어낸다. 마치 그가 우리 사회의 성숙을 위해 쉬고(여행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2.   내가 저자라면

 

1)     뼈대와 목차

 

여행기를 전체 5장으로 꾸몄다. 4장까지는 날짜 가는 대로 간 곳과 소감을 적었고, 5장에서는 섬만 따로 모았다. 꼭지글로 치면 34개이다. 그의 여행이 34일은 아니고 달 반 정도라도 읽었다. 직장 생활 10년에 한 달씩 2달의 여행을 선물로 주기로 작정했는데 책 출간 관련한 분주한 일로 여기저기 불려다니다 보니 보름을 까먹었다고 했다. 여행은 2000 3월 중순에서 4월 말까지였고, 이 책은 그 해가 저물기 전에 나왔다. 40여일의 여행기를 1년에 걸쳐 쓰면서 이 여행기는 여행을 매개로 한 풍부한 교양서가 되었다. 

 

목차가 아름답다. 지명을 먼저 나오고 그 지명을 설명할 수 있는 한 문장으로 된 목차다. 여행기에서는 가장 적절한 목차가 아닐까? 개정판 서문과 사진작가의 말이 개정하면서 붙었다.

 

개정판 서문 날마다 두려움 속을 걸었던 그때 그곳들

초판 서문 아주 천천히, 달팽이처럼, 온몸으로

 

1장 매화향기 가득하니, 봄이다.

 

기차 안에서 기차는 늘 시간 속을 달린다.

아아, 섬진강 섬진강을 따라 걸으면 나도 강물이 되어 흐른다.

고흥반도 봄은 늘 사람을 어쩔 줄 모르게 한다.

지리산 불무장등 무착대 자은 산이 큰 산을 가리고 있네,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네

다압리 매화마을 꽃은 절정인데 매향을 들을 수 없다.

운주사 그러나 나는 쉬고 있는 부처가 좋다.

 

2장 옛 사람의 마음에 취하다

 

적벽 이제 달 뜨면 아름다울 이곳에 있지 못하리

해남 두륜산 대흥사 아름다운 고목과 청허당의 마음이 있는 곳

강진 햇빛과 동백 그리고 예사람 그리운 백련사

다산초당 천일각에 가서 보면 그가 뒷짐을 지고 구강포를 바라보고 서있네

칠량 봉황리 가업을 이어가기는 어렵고, 세상은 아직 알아주지 않는다.

고금도 충무사 아무도 없는 늦은 오후 이곳에 오면 한 사람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마량의 밤 여관에서, 그리움으로

마량의 아침 산다는 건 망설임이며 차마 어쩔 수 없음이다.

관산 방촌리 날은 미칠 듯 맑은데 오래 묵은 매화 한 그루 만발해 있다.

 

3장 바다와 바람 그리고 길

정환 일몰 바다가 하도 찬란해 쳐다볼 수 없다.

천관 초야 보면, 그대 아마 잊지 못할 것이다.

천과산 장천오미 숨겨두고 혼자 즐긴다는 말의 의미를 아는가

가지산 보림사 옛 사람들은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는데 요즘 사람들은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

 

4장 아무 계획없이, 아무 목적없이

 

땅끝 사자봉에서 보길도 격자봉까지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섬이 있다는데

나도 바닷길 따라 그 섬에 가고 싶다.

보옥리 뽀족산 이곳을 놓치면 보길도를 보았다고 하기 어렵다.

보길도 예송리 바다를 즐기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완도 선착장 부두에 매여 있는 배들을 보면 자유로움을 느낀다.

장좌리 장도 바람과 파도 속에서 그때를 아쉬워한다.

완도에서 녹동까지 아름다운 한려수도 푸른 뱃길을 따라

하동 쌍계사 벚꽃은 이미 지고

목포 볼 것도 많고 먹을 것도 많다.

 

5장 아름다운 섬 이야기

흑산도 흑산도에는 아직 홍어가 있고, 예리 포구에는 옛날의 정취가 남아 있다.

홍도 아름답고 슬픈 구녕섬

관매도 잘록한 허리에 천리향 향기로운 섬

진도 용장산성과 제주 항파두리 항전 9개월, 2 700년 뒤

한라산 구름 속 눈 위의 산책

귀환 다시 일상으로

 

후기 자연과 사람 그리고 변화

사진작가의 말 익숙한 것과의 결별 그리고 떠남과 만남

 

 

 

2)     장점과 보완점 평설

 

장점 첫째,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밝힌 그 책의 목적, 씨앗, 컨셉에 충실하다. 그는 다섯가지를 버리기 위해, 휴식을 위해서 한국의 산수에서 한국의 인물을 만나 충전하기 위해서 떠난다고 했다. 그리고 내면적 성찰이 가능한 휴식의 시간이 허용되는 사회를 제안한다. 고부가가치의 사회가 되는 일이겠다.

 

장점 둘째, 여행기 쓰기는 좋은 글쓰기 훈련으로 보인다. 그의 전작 <익숙한 것과의 결별><낯선 곳에서의 아침><월드클래스를 향하여>는 경영서다. 그런데 이 책 속에는 그의 키워드인 변화경영과 역사를 전공한 인문학적인 향기를 묻히고 있지만 좀 더 묘사적이고 구체적인 사항에 주의한다. 오일장이 선 장판 구경, 노을의 묘사, 친구가 서울에서 내려 와서 게를 삶아먹으러 간 얘기들이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여행기를 한 권 쓰고 나면 두루뭉수리하게 상황을 보는 이들에게는 오감을 열어 관찰하는 훈련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장점 셋째, 검증을 끝내고, 다른 출판사에서 개정판을 낸 책의 뒤에 윤광준씨의 평설이 붙었다. 그는 저자에게서 변화를 추동하는 스승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그에게는 저자와 함께 했던 여행이 매우 특별했을 거고, 독자인 나로서는 그의 평설이 이 책에 대한 신뢰도를 높인다. 한 사람이 온 몸으로 쓴 책이 누군가의 인생에 저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게 아름답다.

 

보완점이라기 보담은 이 책을 들고 남도여행을 가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수 없을 것 같아 아쉬다. 1~2 페이지 정도의 상세한 안내가 있었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메모 위주의 일지 같은 것, 어디서 차를 타고, 차비, 식비는 얼마였고, 이런 것을 나는 좀 덧붙일 것 같다.

 

3)     감동적인 장절

 

5 8년 전 회사를 나온 후에도 한동안 나는 여전히 월급쟁이였다. 평일 낮에 거리를 어슬렁거리면 알 수 없는 곳에서 화살이 날아드는 듯 불안했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보려 했지만 나는 여전히 품삯에 길들여진 직장인이었다. 내 정신은 야성을 잃어버렸다. 우리를 나왔지만 홀로 살아가는 것이 두려운 짐승 같았다. 내 속에 있는 숨어있는 자유로운 영혼을 끄집어 내는 나만의 의식이 절박했다.

천지없이 자유로와 보였던 그도 퇴직 직후 평일 낮에 불안했구나. 아내는 출근하고 남편은 남아서 아침에 재활용쓰레기를 버리고 있는 장면을 이웃이 볼 때도 불편했고. 이건 영화에서도 많이 묘사되었다. 아내는 출근하고 남편은 남아서 아이의 우유팩을 말려 오릴 때의 불안함에 대해. 이웃들의 수군거림에 대해.

 

6 커다란 베낭을 메고 하루 25킬로미터 이상을 걸었다. 걷는 것과 바람을 만나는 것, 그것이 다였다. 종종 바람 속에서 그곳을 스쳐간 크고 작은 사람들의 자취를 냄새 맡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나의 한 조각을 찾아보는 것이 이 여행의 목적이라면 목적이었다. 그저 이리처럼 떠돌 수 있는 지를 시험했다. 턱수염이 산적처럼 길어졌을 때 여행에서 돌아왔다. 그 후에는 대낮에 거리를 걸을 때 어딘가로부터 나를 꿸 듯 날아들며 불안하게 하던 화살들이 사라졌다. 나는 비로소 낮술을 마실 수 있는 건달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도보여행 나도 언젠가는 해 보고 싶다. 나는 불안하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놀더라도 이렇게 대놓고 여행을 다니는 일을 해본적이 없다. 1년에 두 달씩 방학을 12년 보냈으면서 나는 한 번도 장기 여행을 떠나지 못했다. 비슷한 마음에서 였던 것 같다.

 

6 그 때 나는 나에게 외쳤다. 새로운 세상으로 나올 때는 새로운 마음으로 나와야 한다. 새로운 세상의 두려움을 미리 과장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그 잠재력과 가능성을 읽어야 한다. 좀 배고프면 어떠냐 평생에 한 번 찾은 이 일의 불알을 꽉 쥐고 놓지 않을 것이다. 주어진 천복이니 이 길이 내 길이다. 엎어지고 뒹굴어도 이 길 위에서 죽으리라. 때마다 주어지는 밥이 사슬이지 않더냐. 굶주림을 두려워하면 들판의 이리가 되지 못한다. 이런 마음이 나를 지배할 때까지 나는 매일 걸었다. 

직장을 20년 다닌 남자가 46세에, 아직 공부해야할 아이들이 둘 있는 상태에서 퇴직을 했다. 그의 행보는 매우 도전적이었다. 이미 3권의 책을 낸 작가이고 그 중 두 권은 베스트셀러였다. 게다가 그의 직장 생활은 훌륭했다. 인기 부서도 아니고, 출세와 승진을 하는 부서도 아닌데 같은 곳에서 16년을 지냈다. 자기가 가장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부서였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직장생을 하기도 어려울 거다. 대부분의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은 저 나이가 되면 임원이 되거나 퇴직하거나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해야 한다. 그런데 그가 준비를 거쳐서 회사를 그만 두고서도 이행의 의례를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다. 10년에 한 달씩 휴가를 주어서 2달의 장기여행을 기획하고 그걸 실행한다. 대단한 용기이며 힘이다.

 

8 이 책의 그 장소들이 목줄이 풀린 내가 이리저리 떠돌던 바로 그곳이었다. 마흔여섯 살에 매일 아침 짐을 꾸려 여관문을 나와 커다란 배낭을 메고 날마다 두려움 속을 걸었던 그곳들이었다. 미래를 너무 두려워하지 않도록 미리 두려움 속을 걸어두게 한 그 장소들이다. 그렇게 매일 걷지 않았더라면 다리가 꺽여 이미 주저 앉았을 지도 모른다. 그 공간 속에서 비범하게 살았던 그 인물들의 외로운 숨결을 느끼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처럼 살지 못했을 거다. 영광 있으라. 외로움들이여.

나도 저런 여행을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해 보지 못했다. 나의 최장의 여행은 12일 정도의 단독 도보여행 정도였다. 하루 40킬로를 걸었던 일, 설악산에 혼자 갔던 일. 여행은 나에게 두려움 그 자체다.

 

숲에는 움직이지 않는 나무가 없고, 시냇물에는 멈춰 선 물결이 없다. (곽박 동진의 시인)

이 말이 이 책 전체에서 가장 아름답다. 어디 정말 그런가 숲의 나무와 물을 찬찬히 들여다 보고 싶으다.  

 

88 위대한 정신은 세속의 명리와 기준에 묶이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세속을 떠나 홀로 고고하지 않다는 것이다. 중생을 가엾게 여기고 그래서 스스로를 갈고 닦아 도움이 되려 한다. 우리는 더 나아짐으로 더 이상 과거가 아니다. 우리는 어느 날 깨달음으로 예전과 다른 사람으로 변신한다. 이것이 불가에서 말하는 정진이다. 역시 <선가귀감>에 나오는 말을 인용한다.

 

이 일은 마치 모기가 무쇠로 된 소한테 덤벼드는 것과 같으니, 함부로 주둥이를 댈 수 없는 곳에 목숨을 한 번 걸고 뚫어보면 몸뚱이째 들어갈 것이다.

 

통쾌한 말이다. 모름지기 달라지려는 사람은 단 하나의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내가 목숨을 걸 하나의 일이란 무엇일까? 나는 알고 있다. 운명을 바꾸는 할머니가 되는 일이 그것이다. 가장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은 환골탈태’ ‘운명을 바꾸는 조상이런 말들이었다. 매일 새벽에 기도해서 흐름을 바꾸는 기점이 되는 것. 변곡점에 선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다.

 

다산은 이 곳에서 뒷짐을지고 서서 바다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부드러운 바람이 얼굴을 스쳐가는 것이 좋다. 눈을 감고 그 저 바람이 되어 보이지 않는 물결로 떠돈다.

 

104 어둠이 내려앉는 초당의 마당에 서서 잠시 고개를 숙이고 걸어보았다. 총명하고 심지가 바른 선비 하나가 역시 이 시간에 이 곳을 거닐었을 것이다. 정밀하고 치밀한 사고들이 이러한 산책을 통해 정리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책에 심서라고 제목을 지으며 한숨을 지었을 것이다. 다산은 <목민심서>의 서문을 다음과 같이 끝맺고 있다. “심서라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백성을 다스릴 마음은 있지만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지은 것이다.”

다산초당에서 저자가 18년간의 강진 유배생활에서도 멈추지 않고 용맹정진을 해서 실학의 위대한 학자로 태어난 사나이를 추억하고 있다. 그의 외로움과 그의 정진과 맞닿아 힘을 받고 있다.

 

121 하루하루를 낭비하지 마라. 충무공은 싸움터에서도 하루가 지나는 것을 무심코 넘기지 않았다. 그 하루를 기록하여 그날이 그날로서 존재함을 잊지 않았다. 일이 닥쳐서야 어쩔 줄 몰라 하다 모욕을 당하는 일만큼은 피해라. 충무공은 이미 수년 전부터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준비하였다. 거북선을 만들고 선박을 축조한 것은 그가 전장에서 용감히 싸우다 죽는 것만을 최선으로 아는 일개 무장이 아니라 미래를 스스로에게 유리하도록 만드는 개척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스스로 미래를 만들어내는 것만큼 확실한 승리는 없다. 그는 왜적과의 싸움에서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어느 나라의 전사에도 이런 기록은 찾기 어렵다. 아마 없을 것이다.   

충무공의 유적을 둘러보면서, 홀로 보낸 그 남자를 기억하면서 저자는 하루하루를 기록하기를, 그리고 미리 대비하기를 다짐한다. 멋지다.

저녁에 일기를 쓰기가 귀찮을 때 이 귀절이 며칠 생각나곤 했다.  

 

153 바라건데 기회가 있으면 이미 해가 져서 큰 길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할 때쯤 천관사를 한번 걸어 내려와 보라. 내려오다 좌측에 있는 천관산으로 오르는 오솔길 옆 등산로 표지판 아래를 조금 지나면 평생 잊지 못할 광경이 보일 것이다.

평생 잊지 못할 아름다운 그 광경을 나도 보고 싶다. 천관사 일몰

 

154 몇 시간이고 바다를 보고 있어도 여전히 바다가 그립다. 내 가슴 어디엔가 바다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하다. 나는 그렇게 태어났나 보다.

나에게는 이렇게 그리워지는 대상이 뭘까? 그가 바다에 대한 그리움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나도 그러라는 법은 없지 않나? 나는 저녁노을이 내릴 때 이런 귀소본능을 느낀다. 그 때는 집에 있으면서도 집에 가야한다는 마음이 든다.

 

162 숨겨놓고 혼자 즐긴다는 의미를 아는가? 벽장에 숨겨놓은 꿀단지여도 좋고 바쁜 날 잠시 겨를을 내어 찾아가는 찻집이어도 좋다. 혹은 서가에 꽂혀 있는 소년 시절의 감명 깊었던 책 한 권이어도 좋다. 마담이 괜찮은 술집이어도 좋다. 아주 어릴 적 왠지 모르게 울고 싶을 때 저녁이 되어 어머니가 찾아 나설 때까지 숨어 있던 자기만이 아는 작은 비밀 장소처럼 그런 치유의 은밀한 장소와 시간 없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겠는가?

이런 곳, 이런 시간이 내 삶에도 있기를 소망한다. 새벽푸른빛과 노을 속에다 지으리라. 나의 비밀 아지트를.

 

208 아름다운 예송리 갯돌 해수욕장에 도착하자 자갈밭 위에 누웠다. 따뜻했지만 바람이 불어 가져온 옷 하나를 꺼내 걸쳤다. 그리고 작은 수건을 꺼내 얼굴을 덮었다. 수건 밖으로 해가 이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수건 위가 환하다. 창호지를 통해 햇빛이 비치는 것을 보듯 환한 명랑함에 즐거워진다.

해수욕장에 벌러덩 드러누울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다. 이런 저런 자세에도 나는 남의 시선에 얽매인다.

 

210 완도에 가게 되면 꼬들꼬들 마른 생선도 좀 사서 부쳐야겠다. 뭘 사야 하나. 우럭, 민어 장어처는 이곳 바다를 주방에서 풀어볼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내가 남쪽 바다를 거쳐 갔다는 것을 알게될 것이다. 가벼운 그리움으로 그녀의 손끝이 조금 떨릴 것이다.

다정한 사람이다. 가족을 그리워하는 이런 모습이 좋아 보인다. 나는 언제나 이런 사람이 될까? 바쁘게만 살지 말고, 정말로 소중한 사람들과 시간을 나누면서 살고 싶은데 나는 언제나 우선순위에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엉똥한 짓만 하면서 보낸다. 그가 몇 가지를 빼고는 가족을 위한 시간,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의 우선순위를 매우 높게 놓아두고 실제로 실천을 하고 있는 걸 보고 배우고 싶다.

 

242 늑대는 사악한 짐승이라고 알려져 있어 늑대를 모조리 없애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미국의 한 젊은 산림청 직원은 평화로운 늑대 가족에게 라이플을 쏘아대었다. 늙은 늑대가 쓰러지자 가까이 다가간 그는 늑대의 눈에서 푸른 불꽃이 사라져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 늑대의 눈 속에 무언가 자신이 모르는 새로운 것, 즉 산과 늑대만이 알고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 후에도 그 일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결구 알도 리오폴드라는 이름의 그는 미국 환경 보호 운동의 주창자가 되었다.  

이 문장의 푸른 불꽃이 마음에 든다. 내 눈빛에 이런 것이 살아 있으면 좋겠다. 나의 야생성이 살아 있다는 의미다. 어떻게?

 

246 소비적이고 향락적인 문화는 우리의 휴식 시간이 짧다는 것과 대단히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짧게 끊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텔레비전 시청, 노래방, 그리고 짧은 여행은 향락적인 소비문화일 수 밖에 없다. 자유시간이 턱없이 짧기 때문에 클라이맥스는 빨리 맛보아야 한다. 뜸을 들일 시간이 없다. 짧은 시간에 농축되어야 하기 때문에 진해야 하고, 따라서 야만적이며 과격한 몸짓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처럼의 휴식은 또 다른 노동이 되고 만다.

나는 시간이 많은데 불안해 하면서도 잘 보내지를 못한다. 적극적으로 그 시간을 회피한다. 자면서, 또는 시시껄렁하게 보냄으로써 휴가가 짧은 이들의 공분을 산다. 바보같다.

 

246 문화는 쉽게 말해 잘 노는 것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고, 자기가 스스로의 삶을 조직하는 능력을 배양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자유시간이 부족하면 자기의 삶을 자율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낮아진다. 문화는 본질적으로 스스로를 유한계급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문화사회란 그러므로 일하는 시간을 줄여 그 시간을 자아의 실현을 위해 투여하는 사회이다. 노동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사람들의 자율적인 활동이 지배하는 사회가 바로 문화사회인 것이다.

혼자서 잘 노는 사람은 그래서 매우 건강한 사람이구나.

 

266 천촌리 산길을 오르며 면암을 생각한다. 그도 아침 일찍 산책을 나와 이 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길은 그와 닮아 있을 것이다. 가슴에 핀 꽃이 붉어 남의 나라 대마도에서 굶어죽었을 것이다. 가슴 속에 굵은 소나무 기둥이 있어 나라라 무너진 그때 의병을 일으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살았던 동네와 길을 사람이 닮는가? 그럼 어디에 살아야 할까? 내가 꿈꾸는 동네, 마을공동체에 대해서 좀 자세히 써보아야겠구나.  

 

266 인생은 길이다.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길 그 자체이다. 마음이 모질고 팍팍하여 한 구루의 나무도 자라지 못하는 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천촌리의 길처럼 솔잎이 깔려 있고 동백나무 우거진 아름다운 길일 수도 있다. 나도 인생의 어느 부분인가에 솔잎이 깔리고 주위에 꽃이 가득한 그런 부드럽고 포근한 길이고 싶다. 돌밖에 없는 길, 한 그루의 나무도 없어 뜨거운 햇빛에 머리가 벗겨질 것 같은 황막한 길, 파이고 강팍한 길, 그런 길이고 싶지는 않다. 아름다운 나무 가득하고 옆으로 작은 시내 하나 흐르는 그런 길이고 싶다.

모두들 어떤 길을 걸어왔나? 나는 어떤 길이었나? 어떤 길이길 원하나? 이 질문 역시 나는 어떤 나무인가?’처럼 재미난 질문이다. 숙제 하나 더 생겼네. 그의 책은 이런 숙제를 풍부하게 주어 좋다.

 

268 나는 좋은 길이 되고 싶다. 사람들로 하여금 천천히 걷게 하는 길이 되고 싶다. 평평하고 예쁜 바위가 몇 개 있어 좋은 날 사람들이 잠시 앉아 쉬어 갈 수 있는 그런 길이고 싶다. 깊은 정취가 있어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하면 감탄하는 그런 길이고 싶다. , 언제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나는 아직도 무엇이 되고 싶어하는 나를 좋아한다. 내가 아직 젊은 탓일까?

그래서 그는 젊음을, 빛나는 눈동자를 유지할 수 있는 거다. 조로하지 않기에. 늘 꿈꾸고, 새로와 지고 있기 때문에

 

298 비극은 늘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에게 찾아온다. 미국 흑인의 비극은 그들을 해방시킨 링컨이 흑인이 아니라는 것에서 연유하나. 해방 후 우리 민족의 비극은 우리의 힘으로 해방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미군정이 시작되었고 국토는 나뉘었다. 일제의 경찰이 미군정 경찰로 옷을 바꾸어 입고, 친일파는 반공주의자가 되어 득세했다.

 

297 김통정의 삼별초가 여몽연합군에 의해 붉은 오름에서 전멸당한 지 70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제주의 중간산은 다시 미군과 국군토벌대에 의해 온통 핏빛으로 물든다. 제주 중간상은 매우 모호한 지명으로 해변에서 5킬러미터를 벗어난 한라산 중턱쯤을 가리키는 말이다. 1948년 제주도 4.3사건이 일어난 후, 그해 11월부터 약 4개월간에 걸쳐 중간산마을은 초토화되었다. 그동안 중간산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빨갱이가 되어 젖먹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49 4월 미군정보고서에 따르면, 같은 해 3월까지 약 1 5000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중 80퍼센트 이상이 토벌대의 손에 사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1954 9월 한라산에 대한 금족령이 해제될 때가지 6 6개월 동안 죽은 사람들은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무장 봉기대의 공격이 있으면 다시 토벌대의 더욱 잔인한 보복이 뒤따랐을 것이다. 잔인성은 이렇게 재생산되었을 것이다. 중간산 일대의 평화로운 정적 뒤에는 기막힌 어리석음과 보복, 통곡과 억울함이 조용히 도사리고 있다.

 

298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힘을 끌어내지 못하는 사람 역시 비극적이다. 그는 종속적이며 누군가가 시킨 일만 할 뿐이다. 하수인이 된다는 것은 몸은 몸대로 고되고 남에게 못할 짓을 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증오하게 되고 이를 견디기 위해 세속화된다. 그의 내면 어디에도 스스로를 위한 쉴 곳이 없기 때문이다친몽파든 친일파든 친미파든 외부에서 힘을 빌어오는 경우에는 늘 외부에 종속된다. 그런 경우는 자기일 수 없다. 외부의 힘에 따르고 적응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모르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적응은 어쩔 수 없는 차선책이라는 것이다. 변화의 핵심은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새로운 상황을 창조함으로써 스스로 그 주인이 되는 것이다. 성공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다. 중요한 것은 주체적인 자기로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이 허락한 대로

나는 어떻게 중년기의 변화를 나의 내면의 힘에 기반하여 가지고 올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의지하면 그건 내 것이 될 수가 없다. 오로지 나의 힘으로, 나의 노동과 나의 피와 땀에 근거해서 나의 소중한 것이 올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변경연에도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 천천히 대답을 만들어가보자. 분명한 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고 있는게 아니라 달을 보고, 그리고 길을 스스로 가야한다는 점이다.   

 

306 산행의 즐거움은 산을 즐기는데 있다. 산은 음악과 같다. 조용해야 들을 수 있다. 한적해야 피어있는 들꽃을 만날 수 있다. 호젓하지 않으면 온몸의 피부가 그 정적을 감지할 수 없다.

혼자서 산에 가보고 싶다. 그런데 나는 어디를 나설 자율성이 생기지를 않고 있다. 자꾸 늘어진다.

아직 나의 힘의 중심, 산소 탱크를 사유하지 못하고, 그걸 일상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답게 살지 못하고 있다. 등산화가 없어서가 아니다.

 

308 제주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비행기를 타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장소의 이동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의 간격이 너무 짧아서였다. 한달 반 동안의 일탈은 그에 상응하는 귀환의 의식을 가져야 한다. 인간은 상징성을 벗어날 수 없다. 변화는 상징과 함께 나타난다. 결혼식은 두 사람이 만드는 하나의 세계를 상징하며 장례식은 삶과 죽음의 화해이고 이승에서의 이별이다.

결혼식은 이런 통과의례의 풍부한 의미를 상실했다. 그냥 간단한 형식이 되었다. 그것의 내용을 담는 일을 나는 지금, 첫 책을 통해서 해 가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309 바다는 내 삶이 추구하는 상징이다. 아이들의 이름 속에 모두 바다를 넣은 것처럼 바다는 나의 미래이다. 그리고 꿈이다. 바다는 늘 늦은 곳을 선택하는 물의 승리이다. 바다는 모든 것을 그 안에 담고도 오직 하나의 색, 푸른빛을 유지하고 있다. 똥과 오줌, 신다 버린 신발, 동물의 시체, 어부인 남편을 잃은 부인의 눈물, 절망한 사람이 먹다 버린 소주병, 부정직한 인간이 밤에 몰래 방류한 폐수, 탐욕스러운 인간이 밤새 퍼먹다 토한 오물을 다 쓸어안고도 푸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바다는 가끔 밑바닥을 뒤집어엎어 스스로를 정화한다. 태풍과 풍랑과 해일과 파도는 바다가 스스로를 정화하는 도구들이다. 바다가 바다일 수 있는 것은 스스로를 새롭게 할 수 있는 능력때문이다. 어찌 배우고 닮고 싶지 않겠는가?  

아이들의 이름에 담을 것, 나는 뭐가 있을까? 내가 늘 그리워하는 것, 그가 늘 그리워하는 것. 그건 무엇일까? , 나무, 하늘, green, , 우주, 집 우, 집 주…???

 

314 공자는 보수와 권위와 구태의연이 아닌 적극성의 상징이다. 그의 본질은 뜻을 세워 공부하고 배운 바를 실천함으로써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노자와 상자는 마음의 평화이다. 물러나 곧 자연이 되어 문화적, 사회적 속박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반문화적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314 공자와 노자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아니고 우리의 삶을 서로 보완하는 한 사람으로 인식될 때, 우리는 세상에 나가서도 자신으로 돌아와서도 자유롭다. 나아가 세상을 바꾸고 돌아와 자신을 바꾸는 것이 자유가 아닐까?

여행은 노자적인 것이다. 세상이 나를 필요로 하면 나아가 열심히 일하고 그렇지 않으면 물러나 자신으로 사는 것을 그는 말하고 있다. 두 가지 생활방식의 취사선택이 아니라 이런 상황이면 이렇게 하고 저런 상황이면 저렇게 하는 게 어떻겠냐 한다.  

 

315 긴 여행을 통해 가슴 속에 역력했던 산과 강, 바다와 구름, 바람 들은 속세에서 얻은 경험, 유용한 분별력 들과 갈등을 만들어낼 것이다. 나는 속세를 떠난 스님이 아니다. 혹은 사회적 가치에서 자유로운 탈속한 인물도 아니다. 잘 구워진 생선 한 접시에 코를 박고 술 한 병에 취한다. 책이 잘 팔리면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아이들의 일로 즐거워하고 또 고민할 것이다. 그리고 아내가 가는 곳이 어디든 따라가고 싶어하는 아이 같은 노인이 될 것이다.

나는 생활인이다는 외침. 많은 이들이 이런 생활인이므로 앞으로 더 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하지만 아름다운 영성과 사랑, 생활 속에서의 지행합일이 빛이 나리라. 90%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므로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다. 나는 나아질 것이고 스스로가 더 좋아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바라건대 다른 사람들로부터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싶다. 다른 사람들의 불운과 불행 위에 나의 행복을 쌓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변화라는 주제 속에 내가 담아내고 싶은 인생이다.     

아름다운 지향이다.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

 

321 나는 앞으로 휴식의 일환으로 여행을 계속할 것이다. 생각하기 위해서 걸을 것이고 쉬기 위해서 걸을 것이다. 버리기 위해서 떠날 것이고, 힘과 정열을 얻기 위해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시간을 거슬러 오르며, 위대한 정신들을 만날 것이다.

나더러 모두가 자기 속도로 걸을 수 있도록 스스로 모범을 보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쉬기도 하라고 했다. 그 휴식의 방법 하나를 그가 제안하고 있다.

 

318 21세기의 화두는 자연과 사람들이다. 이를 염두에 두지 않는 어떠한 변화도 나는 거부하겠다. 기술이든 돈이든 이데올로기든 그 무엇 때문이든 간에 변화를 통해 자연이 황폐해지고 인간이 서로에게 소외된다면 그것은 부정적 변화다. 삶은 기술이 아니다. 삶은 돈이 아니다. 삶이 이데올로기가 아니라는 것 또한 우리는 잘 안다. 삶은 그 자체로서 중요하다.

21세기는 나의 세기일거다. 주인공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이 세기 안에 죽을 거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21세기에 대해 책임이 있다.

 

319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의 내면적인 성찰이 요구된다. “체제에 충실하게 복무하는 평범한 인간들의 무관심에 의해 사회적 죄악이 방조되고 만들어진다는 것을 자각하는 사회야말로 위대한 사회다. 이런 사회는 나아질 수 있다. 올바른 변화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 이때 휴식과 성찰은 소비가 아니라 창조로 인식될 것이다. 지식은 데이터베이스가 아니다. 지식은 곧 사람을 의미한다. 전문적 지식뿐 아니라 그 지식을 오직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서만 사용하려는 가치관과의지를 가진 사람 그 자체를 의미한다. 사람은 쉬고 있을 때와 자신의 내면과 만날 때, 가장 자유로운 정신력을 가지게 된다. 그때 비로소 작은 이해와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런 관점을 그가 여행을 떠나는 초기에도 가졌을까? 나는 책을 쓰면서 얻게된 통찰이라고 생각한다. 책쓰기가 한 사람의 관점을 이렇게나 넓히고 있다.

 

321 한 민족이 자신의 역사 속에서 위인을 인식하고 발견하는 방법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장점을 보고 배울 일이다.

그렇구나. 장점을 보는 거구나. 나는 개인화, 최상주의자 테마가 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다른 이들의 단점을 이분법적인 관점에서 보고 걸고 넘어지고 속시끄럽게 갈구는 면이 많다. 경계할 일이다.

 

322 한국의 산수 속에서 한국의 인물을 보고, 그 인물 속에서 그를 길러낸 한국 산수의 힘을 느끼는 것, 이것이 내가 여행이라는 매력적인 휴식을 통해 즐기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휴식을 통해 정신의 지평을 넓혀 가기를 바라고 있다.

그는 자신의 여행의 목적을 성취했다. 그가 여행기로 그 여행을 남겼기 때문에 혼자만의 여행이 아니라 그 여행의 유익을 다른 사람에게도 줄 수 있게 되었다.

 

322 휴식은 자신에게 선사한 따뜻한 시간이다. 자신에게 시간을 주지 않고 어떻게 더 나아질 수 있는가? 왜 우리는 늘 바쁘고 또 다른 사람을 바쁘게 하는가? 바쁜 사람은 바보다….휴식이 게으름이나 소비로 느껴지지 않을 때, 한 사회가 이에 진심으로 공감할 때, 우리는 훨씬 나아진 사회에 살게 된다. 우리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긍정적인 변화인 것이다.

 내가 좀더 나은 사람이 되고, 내가 좀 더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세상을 위해 내가 해야할 일이로구나.

 

324 욕망을 다스리는 것이 곧 경영과 자기계발의 핵심이다 간절한 욕망만 남기고 나머지를 거세시켜 시간을 더하면 원하는 것을 얻게 된다. 필요한 것은 지루한 반복과 연마 그리고 변화의 이유를 지켜야 하는 당위의 힘이다.

이건 윤광준씨의 말이다. 매우 간명하고 핵심적이어서 베껴두었다.

 

328 후학의 이점은 선학의 발자국을 더듬어 참고하는 연유다. 설사 틀리더라도 손해볼일은 없다. 이것저것 보는 동안 방향은 더욱 선명해질 테니. 희망을 말하는 이는 허튼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328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는다. 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번 출발하면 되돌릴 수 없어 나아간다. 나간 길은 다음이 궁금해 끝을 보게 된다. 인간 구본형의 치밀한 여행 가이드는 이래서 모두에게 유용하다. 

윤광준씨도 선동가로구나. 마초하는데 얼마나 마초틱한지 궁금하구나.

 

 

3.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를 조금만 타이핑할거다. 20페이지만 할란다. 중요도에 대한 구분이 잘 안되는 나는 치다 보면 너무 많이 장수만 늘인다. 수학 정석 집합부분만 때 묻히고 포기하던 것과 비스무리 하다. 비효율적이다. 투덜투덜. 근데 한편 신경숙씨가 난쏘공을 필사했던 걸 생각하면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무작정 베껴 쓰는 것도 즐거움의 면에서는 괜찮긴 하다.

 

실컷 돌아다니며 마음껏 보고 싶었다. 아름다운 산과 강, 그리고 바다와 햇빛이 가슴에 역력해지면거기 가 닿으리라 믿었다. 마음 속에 넘쳐나면 그때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리라 생각했다. 아는 만큼 느끼는 것이 서구적 배움의 방법이라면 느끼는 만큼 알게 되는접근법이 동양의 그것이다. 자연 속에서 시간을 넘어 내가 만나고 싶은 것은 이미 그곳을 살다 간 사람들의 안으로 쌓여 넘쳐나는 마음이다. 그들의 이야기로부터 나의 이야기로 바뀌어 가는 변곡점에 내가 있고 싶었다. 그때 생각은 없어지고 마음만 남을 것이다.

 

개정판 서문 날마다 두려움 속을 걸었던 그때 그곳들

 

5 8년 전 회사를 나온 후에도 한동안 나는 여전히 월급쟁이였다. 평일 낮에 거리를 어슬렁거리면 알 수 없는 곳에서 화살이 날아드는 듯 불안했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보려 했지만 나는 여전히 품삯에 길들여진 직장인이었다. 내 정신은 야성을 잃어버렸다. 우리를 나왔지만 홀로 살아가는 것이 두려운 짐승 같았다. 내 속에 있는 숨어있는 자유로운 영혼을 끄집어 내는 나만의 의식이 절박했다.

 

6 커다란 베낭을 메고 하루 25킬로미터 이상을 걸었다. 걷는 것과 바람을 만나는 것, 그것이 다였다. 종종 바람 속에서 그곳을 스쳐간 크고 작은 사람들의 자취를 냄새 맡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나의 한 조각을 찾아보는 것이 이 여행의 목적이라면 목적이었다. 그저 이리처럼 떠돌 수 있는 지를 시험했다. 턱수염이 산적처럼 길어졌을 때 여행에서 돌아왔다. 그 후에는 대낮에 거리를 걸을 때 어딘가로부터 나를 꿸 듯 날아들며 불안하게 하던 화살들이 사라졌다. 나는 비로소 낮술을 마실 수 있는 건달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6 ‘낮술건달은 불량하지만 내게는 자유의 언어들이었다.

 

6 그 때 나는 나에게 외쳤다. 새로운 세상으로 나올 때는 새로운 마음으로 나와야 한다. 새로운 세상의 두려움을 미리 과장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그 잠재력과 가능성을 읽어야 한다. 좀 배고프면 어떠냐 평생에 한 번 찾은 이 일의 불알을 꽉 쥐고 놓지 않을 것이다. 주어진 천복이니 이 길이 내 길이다. 엎어지고 뒹굴어도 이 길 위에서 죽으리라. 때마다 주어지는 밥이 사슬이지 않더냐. 굶주림을 두려워하면 들판의 이리가 되지 못한다. 이런 마음이 나를 지배할 때까지 나는 매일 걸었다.  

 

홀로 헤매던 그 길들은 그 당시 내게는 나의 길을 묻는 순례길이었다.

 

8 그래 그래 먼저 살지 않고서야 또 어떻게 쓸 수 있으랴. 결국 밥과 존재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그 사이에서 삶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삶이란 흔들리는 것이고, 균형을 잃었다가 다시 그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되돌아오는 불안정한 체계인 것이다. 오직 죽은 것만이 변하지 않는다. 변화는 삶의 원칙이다.

 

8 이 책의 그 장소들이 목줄이 풀린 내가 이리저리 떠돌던 바로 그곳이었다. 마흔여섯 살에 매일 아침 짐을 꾸려 여관문을 나와 커다란 베낭을 메고 날마다 두려움 속을 걸었던 그곳들이었다. 미래를 너무 두려워하지 않도록 미리 두려움 속을 걸어두게 한 그 장소들이다. 그렇게 매일 걷지 않았더라면 다리가 꺽여 이미 주저 앉았을 지도 모른다. 그 공간 속에서 비범하게 살았던 그 인물들의 외로운 숨결을 느끼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처럼 살지 못했을 거다. 영광 있으라. 외로움들이여.

 

초판 서문 아주 천천히, 달팽이처럼, 온몸으로

 

천지는 큰 아름다움을 지녔지만 말하지 않는다. (장자, 지북유 중에서)

 

숲에는 움직이지 않는 나무가 없고, 시냇물에는 멈춰 선 물결이 없다. (곽박 동진의 시인)

 

10 나는 느림을 찾아 떠났다. 고요한 한가로움, 내 마음의 변방과 오지를 찾아 천천히 걸었다. 그곳에 가면 어디엔가 마음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걸었다. 아주 천천히 달팽이처럼. 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에는 언제나 움직임의 궤적이 남는다. 온몸으로 걸어가기 때문이다.

 

12 여행은 그러나 도피가 아니다. 우리는 돌아오기 위해 떠난다. 버리기 위해 떠나는 것이고, 버린 후에 되돌아오는 것이다. 여행을 통해 우리가 얻으려는 것은 없다. 오직 버리기 위해 떠난다.

 

13 나는 여행을 통해 20년간 나를 지배해온 습관을 버리려고 했다. 출근하기 위해 아침마다 하는 면도, 평일 대낮의 자유를 비정상성으로 인식하는 사회에 대한 공포,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서 느끼는 심리적 압박, 월급에 대한 안심, 그리고 인생에 대한 유한 책임

 

 

1장 매화향기 가득하니, 봄이다.

 

기차 안에서 기차는 늘 시간 속을 달린다.

 

22 느긋한 여행자에게 기차가 달려가는 곳은 어떤 행선지가 아니다. 기차는 늘 시간 속을 달린다. 몇 년 전 어느 카페로 나를 데리고 가기도 하고, 느닷없이 어느 대화로 나를 끌어들이기도 한다. 혹은 부끄러움 속으로 혹은 아련한 그리움 곁으로 데리고 간다. 그런가 하면 나의 장례식으로 나를 데리고 가기도 한다.

 

24 전라남도 해안지역을 돌아다닐 것이라는 생각은 어디서 온 것인지 모른다. 마음이 끌리는 대로 따른 결정이다.

구체적인 일정표를 짜는 게 아니라 나침반만 가지고 방향만 정해서 일단 움직이는 여행. 글쓰기도 그런 게 가능하다고 그는 말한다. <마흔 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책에서. 그럼 첫 책쓰기라는 주제를 이런 식으로 접근을 해도 될 건가? 나는 신화, 여성, 통과의례 이 정도의 키워드를 가졌다. 관례에 대한 책을 구상했는데, 결혼1년차에다가 대단한 두려움을 가졌다는 나의 시기적 특징 때문에 관례가 아니라 통과의례로서의 결혼에 해당하는 신화 읽기가 시급하게 필요하다. 그 방향으로 가보려고 한다.

 

24 나무는 참을 수 없이 간절해지고 열렬해지면 꽃이 된다.

 

24 두 번째 인생은 절대로 바쁘게 보내지 않을 것이다. 첫째 더 자유로운 것이다. 오직 나만이 나에게 명령할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지게 할 것이다. 둘째 더 많이 배울 것이다. 때로는 진지하고 때로는 진지함을 버릴 것이다. 둘째 더 많이 배울 것이다. 셋째, 배운 것을 통해 기여할 것이다.  주제넘지 말 일이다. 내가 만족한 나의 삶만이 이 땅에서 내가 기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여행은 생략할 수 없는 새로운 시작의 상징이었다.

 

25 단언하건대 비효율적으로 한달 반을 보내게 될 것이다. 쓴 만큼 못 얻는다는 것이 비효율의 정의이다.

 

25 인생의 목적은 인생이다. 산다는 것이 바로 목적이다. 그래서 인생이 전부 경제와 경영일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랑도 해야 하고 눈물도 흘려야 하고 순수한 배움 자체가 즐거운 것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휴식이 중요하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가장 활동적이다. 철저하게 혼자일 때 가장 고독하지 않다. 이제 물리적으로 갈 수 있는 지리적 오지란 별로 없다. 마음 속의 오지가 더 넓다. 나는 나와 함께 있을, 타인으로부터 자유로운 비밀스러운 공간을 찾아간다. 나를 위해 아낌없이 시간을 쓸 예정이다. 햇빛이 들과 밭에 내리듯이, 산과 강과 바다에 쾅쾅 쏟아지듯이. 거기에 무슨 효율이 있는가?   

 

아아, 섬진강 섬진강을 따라 걸으면 나도 강물이 되어 흐른다.

 

27 섬진강을 따라 봄 길을 걸으면 나는 매화 꽃잎처럼 날릴 수 있다. 낮에 탁주 한 뚝배기 걸치고 이 길의 강둑을 따라 걷다 보면 내가 강물처럼 흐른다는 걸 알 수 있다. 천천히 물결 지며 여울져 흐른다.

 

27 마흔이 되기 까지는 매화란 그저 그림책 속의 그거려니 했다.

 

고흥 반도 봄은 늘 사람을 어쩔 줄 모르게 한다.

 

32 달빛초당 달빛 아래서 차 한 잔 하면 운치가 그만이겠다.

나는 차보다는 술

 

33 녹두빈대떡은 녹두로 만들어야 제 맛이 난다. 이 말처럼 쉬운 말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우리는 이런 쉬운 말이 여러 가지 이유로 지켜지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다.

 

36 남열 해수욕장의 바닷가 식당에서 라면 한 그릇을 먹었는데 라면은 짰지만 열무김치는 일미였다.

매일 기록하지 않았다면 이런 걸 적을 수는 없으리라.

 

37 자연 속을 걷다 보면 마음이 편해지고 피곤함이 사라지는 것은 내가 그들로부터 많은 에너지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39 팔영산은 오르막이 좋다. 흙이 두텁고 좌우로 나무들이 올망졸망하여 친근하다.

 

40 빠르게 걸으면 나이를 알게 되고 천천히 걸으면 주위를 감상할 수 있다. 그러나 속도를 일단 자동차 같은 기계에게 위임해주고 나면 나이도 경관도 살필 수 없게 된다.

 

40 차를 타고 갈 때 엉덩이가 약간 배긴다는 것은 지루하고 심심하다는 표시다.

 

40 차 안에서 심심함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자거나 먹는 것이다. 자거나 먹는 것의 공통점은 살을 찌운다는 것이다. 우리는 나이가 먹을수록 아무데나 살이 붙고 더 많은 트림을 올리고 더 많은 방귀를 뀌게 된다.

 

41 봉우리들이 영준하고 야무져 보이는지 오르기 어려울 것 같았다. 산이 늘 그렇듯 일단 속으로 들어가면 길을 내어 품어준다. 겉으로는 폐쇄적이고 무뚝뚝하고 말 걸기도 어렵게 보이지만 서로 친해지면 속을 내줄 것처럼 정이 뚝뚝 흐른다. 한국인은 산과 같다. 국토의 70퍼센트 이상이 산인데 어떻게 그럴 지 않을 수 있겠는가?   

 

42 변화는 변화하지 않는 것들과의 균형이라는 점이다.

 

지리산 불무장등 무착대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고 있네,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네

 

47 지리산 불무장등 무착대는 지리산답지 않게 섬세하고 아름답다. 지리산 속의 설악같다.

 

48 산에서는 나무숲 사이로 달이 뜬다. 동쪽 산 숲 뒤에서 달이 떠오르면 별들은 하나 둘 작은 것부터 스러지기 시작한다. 달빛 속에서 별빛은 죽어간다.

 

49 달은 얼마나 작은 별인가?

 

49 달은 아이와 같아서 늘 앞에 선다. 달이 그저 뽐내는 어린아이 같다면 별은 학예회날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부모들처럼 조용히 그 뒤에 선다. 조명은 늘 무대 위의 아이들을 비추고 부모들은 관객이 되어 어둠 속의 숨소리와 작은 기침 소리로 존재한다.

 

51 내가 시암스님을 좋아하는 이유는 중같기 때문이다. 홀로 움집을 짓고 씨 뿌리고 약초 뜯고, 나물 캐서 자기도 먹고 남에게도 선선히 준다. 누더기를 걸치고 살지만 막히는 것이 없고 소탈하다.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 중들이 차를 철배낭아라고 부를 때 자신은 등에 걸망을 지고 걸어 다닌다. 그래야 중이라고 믿는 그런 사람이다. 어찌 좋아하지 않으라.   

 

53 12쯤 되었기에 연곡사에 들러 점심공양을 했다. 떡도 먹고 차도 마셨다. 시암스님을 잘 안다했더니 특별히 매화차를 대접받았다. 차를 대접한 연곡사 선심화 보살은 나이가 쉰이라는데 피부가 여간 맑아 보이지 않았다. 물이 좋아서 그렇단다.

이런 세부사실. 당일 기록, 메모만이 건질 수 있다.

 

 

 

다압리 매화마을 꽃은 절정인데 매향을 들을 수 없다.

 

57 매화는 다른 꽃이 피지 않는 추운 시절에 먼저 꽃을 피우기 때문에 고고하다. 둘째는 늙은 모습이 아름답다. 늙어서 추해지지 않는 것은 모두가 바라는 바다. 노욕에 지지 않고 작은 일에 역정을 내지 않고 살수 있다면 오죽 좋으랴. 나이 먹은 매화나무는 살지지 않고 말라 있다. 절제하고 자제한 모습이 보인다. 또 매화는 꽃봉오리가 활짝 벌어지지 않는다. 꽃과 여인이 같은 개념이니 그 다소곳하고 조신한 모양새 때문에 찬사를 받았나 보다. 

살찌지 않고 말라 있다는 말이 가장 좋다. 살찌는 체질이고, 먹기 좋아하고 움직임이 느린 나는 살찌지 않을 때 가장 건강하다.

 

59 매화 향기는 코로 맡는 것이 아니다. 귀로 듣는 향기다.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만큼 마음이 잔잔해져야 향기를 느낄 수 있다.

 

59 향기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진정한 변화는 내면적이다. 본질을 닦음으로서 타고난 자기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60 좋은 변화는 주변에서부터 핵심을 향하는 내면화 작업이다. 쥐가 쥐임을 깨닫는 것이고, 주로서 사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특별한 동물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쥐가 되고 싶은 쥐. 이것이 변화의 화두이다.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 내가 무엇이든 그걸 깨닫고 자신을 만족히 드러내며 자신이 되는 삶

 

운주사 그러나 나는 쉬고 있는 부처가 좋다.

 

63 운주사에서 가장 유명한 석불은 대웅전 앞에서 보아 우측 산에 있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와불이다.

운주사는 비구니 스님의 절이다. 운주사의 새벽예불은 3시다. 거기 참예하고 싶다. 

 

65 우리는 충분히 쉬지 못한다. 늘 가장 하고 싶은 것이 푹 좀 쉬고 싶은 것인데 그러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는 휴식을 창조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휴식을 게으름과 소비로 인식한다. 한 개인이 이러한 사회적 시류에 반하여 살아가기는 어렵다 .그래서 사회의 전반적 수준 상승이 중요한 것이고, 지도층의 모범이 절실한 것이다.

 

65 서양인들은 휴가가 길다. 그들은 고부가가치를 가진 경제의 톱니바퀴이고 우리는 저부가가치의 톱니다. 그들의 톱니바퀴가 천천히 돌아도 우리의 톱니바퀴는 허벌나게 빨리 돈다. 이것이 경제 구조의 차이다. 부가가치가 높은 일을 하고 있는 사회는 쉬어야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 부가가치가 낮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몸이 고단해야 겨우 먹고살 수 있다.

저부가가치의 톱니바퀴이기 때문에 고단해야 먹고 살 수 있으니 휴식을 창조로 인식하지 않고 소비로 생각한다. 여행을 소비로 생각하듯이. 이게 내가 여행과 휴식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입관이다. 나도 이런 저부가가치의 삶을 헌신하여 자식을 기르고 가르쳤던 부모의 자식이다. 그런데 나는 한 달씩 휴가가 있는 직업에서 일한 지 10년이 넘었다. 그런데도 나는 한 달짜리 여행을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그냥 집에서 보낸다.   

 

65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경제적 구조의 차이만은 아니다. 바로 일상을 살아가는 문화적 차이이기도 하다.

 

66 어떤 일을 할 때 자아를 감시하는 정도가 지나치면 정신적 질환으로 이어진다. 사회가 집단적으로 이러한 질병을 앓고 있을 때도 있다. 이 때 그 사회는 구성원 모두에게 심한 스트레스를 주게 된다.

 

66 운주사의 전경을 잘 보려면 대웅전 뒤 작은 산에 올라 공사바위라고 불리는 커다란 바위 위에 서서 보아야 한다.

 

67 약수터 앞에는 아주 커다란 구상나무 하나가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데 그 건장함이 대견하다.

 

2장 옛 사람의 마음에 취하다

 

적벽 이제 달 뜨면 아름다울 이곳에 있지 못하리

 

72 베낭은 달팽이의 집과 같다.

 

74 달이 점점 더 높이 떠올라 이윽고 중천에 하얗게 머물며 호수에 비친 제 얼굴을 보는 모습을볼 수 있을 텐데. 적벽의 그림자도 호수에 제 모습을 비추어보고 스스로 그 아름다움에 취하게 될 것이다. 왜 옛사람들이 술과 안주를 챙겨 달밤에 배를 탔는지, 그리고 그 일이 아주 그럴 듯한 놀이인 줄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74 경치의 정점에 있기 위해서는 알맞은 때에 그곳에 있어야 한다. 어느 곳이든 가장 자기다울 때, 바로 그 때 그곳에 있어야 진수를 맛볼 수 있다. 이곳은 보름달 밤에 와야 한다.

사람도 역시 그러하다. 가장 자기다울 때가 가장 아름답다.

나는 언제 가장 아름다울까? 새벽푸른빛 일과를 마쳤을 때, 자연 속을 걷고 있을 때.

 

75 이서가든 메기매운탕, 남도 최고의 맛. 적벽에 와서 이곳을 들르지 않는다면 후회할 것이다.

 

75 노란 수선화가 피어 있는 작은 화분을 하나 사다가 장터해장국아주머니에게 건네주었다. 미안함의 표시로. 눈썹이 짙고 눈이 서글서글한 젊은 아낙은 꽃이 예쁘다며 받았다. 물론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언젠가 이곳을 지나게 되면 그때에 이 곳에서 밥을 한 끼 먹게 될 것이다.

마흔중반 남자가 섬세하고 다정하다.

 

해남 두륜산 대흥사 아름다운 고목과 청허당의 마음이 있는 곳

 

76 나무가 얼마나 아름다운 지 알고 싶으면 두륜산 대흥사로 가보라.

보고 싶다. 나무가 나는 좋다. 이 생을 잘 살아서 다음 생에는 나무로 태어나리라

 

76 나이가 많아지면서 아름다워지는 것 중 하나를 꼽으라면 바로 나무를 들겠다. 특히 수백 년 묵은 붉은 한국 소나무를 보면 웅장하고 늠름한 위용이 신령스럽게 느껴진다. 밑동에 가만히 손을 대고 위를 올려다보면 힘찬 기가 느껴진다. 굵은 허리를 껴안으면 기걸한 장부와 함께 있는 것 같다.

 

80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평양으로 피난하였다가 다시 의주로 피했다. 선조는 묘향산으로 사람을 보내어 나라의 위급함을 알리고 서산대사 휴정에게 나라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대사는 늙고 병든 승려는 절을 지키며 나라를 구해달라고 부처에게 기원하도록 지시하고, 나머지는 직접 통솔하여 전쟁터로 나갔다. 그리고 전국에 격문을 돌려 각처의 승려들이 궐기하도록 하였다.

 

81 서산대사는 입적하기 전에 의발을 해남 대흥사에 전하라고 하였다.

 

81 서산대사의 선교관의 핵심은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라고 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82 노산 이은상은 사상이라 하기에는 너무 문학적이고 문학이라 하기에는 뜻이 너무 깊다고 논평한 적이 있다.

전문분야의 책을 쓰는데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문화인류학 책인데 유려한 문장이었던 마가렛 미드의 책처럼, 국문학 책인데 일반인에게도 좋았던 정민 교수의 책처럼

 

83 대사는 어떤 경계를 당하여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을 나지 않음(불생)이라 하고, 나지 않는 것을 무념이라 하며, 무념의 상태를 해탈이라 한다고 했다.

 

83 불일암

깊은 산 속 절에는 붉은 꽃비 내리고

우거진 대숲은 푸른 연기라

흰구름은 산마루에 엉기어 자고

푸른 학은 중을 짝하여 조는구나

 

 

86 운유

발우를 씻고 향 사르는 일 외에는

인간사 모르네

줄 깃들인 곳 생각하거니

솔과 전나무 맑은 바람에 시끄러우리

나물뿌리 씹고 누더기 입었으니

꿈엔들 인간사에 이르지 않네

늙은 소나무 아래 높이 누웠으니

구름도 한가롭고 달 또한 한가롭네

 

만 권의 책을 지루하게 읽어

옛 일을 논하고 또 오늘의 일을 논하지만

학문을 씻음은 다른 재주 익히고자 하는 것 아니라

 

87 눈 내린 들판을 밝아갈 때에는

모름지기 그 발자국을 어지러이 하지 말라

오늘 걷는 나의 발자국은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88 위대한 정신은 세속의 명리와 기준에 묶이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세속을 떠나 홀로 고고하지 않다는 것이다. 중생을 가엾게 여기고 그래서 스스로를 갈고 닦아 도움이 되려 한다. 우리는 더 나아짐으로 더 이상 과거가 아니다. 우리는 어느 날 깨달음으로 예전과 다른 사람으로 변신한다. 이것이 불가에서 말하는 정진이다. 역시 <선가귀감>에 나오는 말을 인용한다.

 

이 일은 마치 모기가 무쇠로 된 소한테 덤벼드는 것과 같으니, 함부로 주둥이를 댈 수 없는 곳에 목숨을 한 번 걸고 뚫어보면 몸뚱이째 들어갈 것이다.

 

통쾌한 말이다. 모름지기 달라지려는 사람은 단 하나의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내가 목숨을 걸 하나의 일이란 무엇일까? 나는 알고 있다. 운명을 바꾸는 할머니가 되는 일이 그것이다. 가장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은 환골탈태’ ‘운명을 바꾸는 조상이런 말들이었다. 매일 새벽에 기도해서 흐름을 바꾸는 기점이 되는 것. 변곡점에 선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다.

 

강진 햇빛과 동백 그리고 예사람 그리운 백련사

 

89 나는 햇빛 속에서 강진에 도착했다. 강진은 햇빛 찬란한 곳으로 영랑의 생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89 남쪽의 토종 동백은 12월부터 하나씩 꽃을 피우기 시작하여 6월까지 피어 있다고 한다. 봄철에 남쪽의 동백을 보고 늘 놀라는 점은 꽃을 피우는 개수가 많지도 적지도 않다는 점이다. 흐드러지게 피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다.

 

90 다산이 처음 이곳으로 유배 와서 적당한 곳을 찾지 못하고 4년 가량을 동네 어귀 주막에서 보낼 수 밖에 없었던 것처럼 며칠을 보낼 만한 곳을 찾기가 지금도 쉽지 않다.

 

94 …조용한 밤에 낚시를 거두니 밝은 달이 배에 가득했다.

 

다산초당 천일각에 가서 보면 그가 뒷짐을 지고 구강포를 바라보고 서있네

 

96 자연만큼 변화무상한 것은 없다. 자연은 곧 생명이고, 생명은 곧 변화다.

 

97 겨를을 찾은 여유로운 산책

망연히 앉아 있다가 갑자기 처마를 이루고 있는 서까래의 개수를 세기 시작한다. 지붕의 다른 쪽도 세어보았다. 모두 열 네 개였다. 그러구나 천일각은 사방의 서까래가 열 네 개인 정방형의 누각이구나. 웃음이 나왔다. 아무 생각 없이 하늘을 보고 바다를 보고 바람소리를 듣다가 어째서 느닷없이 서까래 수를 세기 시작했을까? 한가함이다. 정신을 놓아두고 마음을 놓아둔 것이 얼마만인가?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틀들이 터지며 매미 허물 같은 육신을 이곳에 놓아두고 혼은 잠시 여유로운 산책을 하고 있는 것이다.

 

98 나뭇가지의 가벼운 진동을 따라 마음이 공명한다. 부산한 가운데 경쾌하다. 다망한 일상에서 적소로 유배 옴으로써 자신을 위한 겨를을 찾은다산처럼 나도 마음을 놓아둔다.

 

101 다시 집에서 보낸 준 밤 한 자루를 받고 한숨 짓는다.

 

한 자루 잗다란 이 밤알들이

천리 밖 배고픈 나를 위로해주네

내 생각 잊지 않고 마음 애틋하고

정성껏 묶어 맨 그 손길 생각나라

맛보려고 하다가 도리어 맘에 걸려

고향 하늘만 바라보네

 

다산은 이 곳에서 뒷짐을지고 서서 바다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부드러운 바람이 얼굴을 스쳐가는 것이 좋다. 눈을 감고 그 저 바람이 되어 보이지 않는 물결로 떠돈다.

 

104 어둠이 내려앉는 초당의 마당에 서서 잠시 고개를 숙이고 걸어보았다. 총명하고 심지가 바른 선비 하나가 역시 이 시간에 이 곳을 거닐었을 것이다. 정밀하고 치밀한 사고들이 이러한 산책을 통해 정리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책에 심서라고 제목을 지으며 한숨을 지었을 것이다. 다산은 <목민심서>의 서문을 다음과 같이 끝맺고 있다. “심서라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백성을 다스릴 마음은 있지만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지은 것이다.”

 

105 그가 정치판에서 멀리 물러나와 이 곳에서 18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냈기 때문에 우리 역사는 위대한 학자를 한 사람 가지게 되었다.

 

105 1822년에 쓴 자찬 묘비명에 역을 익히고 예를 연구하며 모든 경서에까지 미쳤는데, 한 가지를 깨달을 대마다 마치 신명이 말없이 깨우쳐주는 것 같아 남에게 고할 수 없는 것이 많았다라고 했다. 그의 공부는 신명의 도움을 받아 그 깊이를 알 수 없게 되었다. 몸과 영혼을 다하여 한 가지 일에 깊이 몰두하니 원래 총명한 사람의 깨달음이 그 끝을 알 수 없게 되었다.

 

106 하룻밤 쉬어 갈 좋은 민박집 하나를 소개해 달라고 했더니 초당 바로 밑에 농원이 있다고 가르쳐준다.

 

칠량 봉황리 가업을 이어가기는 어렵고, 세상은 아직 알아주지 않는다.

 

107 강진장은 3일과 8일에 선다. 시골 장터의 매력은 할머니나 아주머니들이 펼쳐놓은 몇 개의 바구니와 광주리 그리고 보따리들에 있다. 조나 수수, 고구마 한 바구니, 까놓은 마늘 한 양푼, 강아지와 고양이 몇 마리, 그리고 병아리나 오리 새끼도 얼기설기 엮은 그물망 안에서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해산물도 흔하다. 꽁꽁 얼어붙은 상어가 큰 입을 벌리고 있다. 1미터도 넘는 뱀장어가 얼음을 뒤집어쓴 채 좌판 위에 올라와 있다. 톱이나 낫을 파는 아저씨도 둘이나 있다. 팔기도 하지만 갈아주기도 한다. 목련도 팔고 사과나무도 판다. 작약은 물론 갖가지 약초도 있다. 대추, 천궁, 감초, 당귀, 이름을 알 수 없는 풀들. 사흘만 바르면 날 때부터 걸린 무좀도 직방으로 낫게 하는 무좀약도 있다. 그 옆에서 한 남자가 살까 말까 망설인다.

장구경을 자세히도 적었다. 이건 매일 기록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전작을 읽었다. 그 책들은 경영서이면서 인문학적인 향기가 가득했다. 그런데 이런 세부적인 묘사가 많은 건 아니었다. 여행기는 두루뭉수리한 사람들에게 세부사항에 그래도 좀 더 많이 주의하고 묘사하게 하는 훈련이 되는 듯 하다. 

 

110 하고 있는 일의 미래에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미래가 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절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하나의 일을 아직 잘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는 방황이다. 어떤 일에 깨달음을 얻어 밝아지면 자신이 곧 그 일의 미래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일을 아주 잘하려면 타고난 재능과 각고의 노력과 하늘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더욱이 천업이라 믿고 하나의 일에 평생을 매달려야 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제 생긴 대로 살겠다는 뱃심이 중요하다. 나약한 사람은 어떤 경지에도 이를 수 없다. 정진에는 용맹보다 나은 것이 없다. 백척간두에서 또 한 발을 내딛는 것이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   

옹기 만드는 일을 대를 물리는 젊은이를 보면서 저리 말한다.

나도 저렇게 내가 선택한 하나의 일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고 싶다. 아무것도 없는 마흔넘은 사람인 내가 초라하구나.

 

112 객지에서 배고프고 추우면 서럽다. 참 우스운 일이다. 도대체 산 속도 아니고 밤도 아니고 훤한 대낮에 왜 이렇게 곤란해졌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았더니 순전히 바람 때문이다. 바람이 얼굴에 있는 모든 구멍을 통해 머릿 속으로 들어가 하도 휘젓고 다녀서 머리에 바람이 든 모양이다. 바람든 무처럼 물기는 다 빠지고 섬유질과 구멍만이 남아 머리가 휑해진 모양이다. 춥고 배고파 화가 난 게 우스워졌다.

 

고금도 충무사 아무도 없는 늦은 오후 이곳에 오면 한 사람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116 임진왜란의 마지막 대규모 해전이었던 노량해전은 1598 11 18일 밤에 벌어졌다. 그리고 장군은 다음날 새벽 압도적인 승세를 타는 것을 보고 관음포에서 전사하였다. 일찍이 그는 신뢰하던 막하 장수 유형에게 속마음을 토로하였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대장이 만일 조금이라도 공을 이룰 마음이 있다면 대개는 몸을 보존하지 못하는 법이다. 나는 적이 물러나는 그날에 죽는다면 아무런 유감도 없을 것이다.”

 

117 사당을 찾기에 가장 적당한 시간은 아마 지금쯤인 것 같다. 5시가 조금 넘었다. 이끼 낀 돌계단에 앉아 잠시 충무공을 생각하였다. 여기 있는 나무들 중에 오래된 놈들은 충무공이 아침에 일어나 해변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충무공의 시신이 배에 실려오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많은 장졸이 통곡하는 소리도 들었을 것이고, 무덤이 파이고 관이 잠시 안치되는 것 또한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태연하게 서서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다. 그때의 정황을 이야기해줄 만큼 우리는 아직 친해지지 않은 모양이다.

 

오후에 이 섬을 지나게 되면 잠시 덕동에 들어 충무사를 찾을 일이다. 이곳에 와서 무엇을 보겠다고 기대하고 찾지는 마라. 아무 것도 볼 것이 없다. 이곳에 와서 무언가를 들으려고도 생각하지 마라. 그저 바람이 녹나무를 흔들며 지나는 소리 밖에는 없다. 그렇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의 마음과 그가 칼을 차고 언덕에 서서 그 둥그런 섬들을 그물처럼 섬세하게 보고 있는 모습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냥 그렇게 되돌아갈 수는 없으리라. 오후 5시에 이곳에 오면 충무공의 정기를 느낄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대가 그의 후예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120 못나게 살지 마라. 아들을 군대에 보내는 것을 마음 아파하지 마라. 군대도 좋은 배움터이다. 충무공은 싸움터에서 아들을 잃었다. 힘이 강한 자에게 무작정 기대고 아첨하지 마라. 명나라 진린은 거만하고 무례했지만 충무공을 알고부터 진심으로 탄복하고 마음으로 따랐다. 그에게서 최선을 다하는 한 인간을 보았기 때문이다.

 

120 그는 공의 천재와 인품을 잘 알고 지냈던 타국인이었다. 그는 거의 모든 지휘권을 충무공에게 양보하였고, 충무공도 전리품과 적의 수급을 명나라 수군에게 양보함으로써 진리느이 명분과 공로에 인색하지 않았다.

 

121 하루하루를 낭비하지 마라. 충무공은 싸움터에서도 하루가 지나는 것을 무심코 넘기지 않았다. 그 하루를 기록하여 그날이 그날로서 존재함을 잊지 않았다. 일이 닥쳐서야 어쩔 줄 몰라 하다 모욕을 당하는 일만큼은 피해라. 충무공은 이미 수년 전부터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준비하였다. 거북선을 만들고 선박을 축조한 것은 그가 전장에서 용감히 싸우다 죽는 것만을 최선으로 아는 일개 무장이 아니라 미래를 스스로에게 유리하도록 만드는 개척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스스로 미래를 만들어내는 것만큼 확실한 승리는 없다. 그는 왜적과의 싸움에서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어느 나라의 전사에도 이런 기록은 찾기 어렵다. 아마 없을 것이다.   

충무공의 유적을 둘러보면서, 홀로 보낸 그 남자를 기억하면서 저자는 하루하루를 기록하기를, 그리고 미리 대비하기를 다짐한다. 멋지다.

 

마량의 밤 여관에서, 그리움으로

 

122 마량 선착장 앞에도 여관이 하나 있다. 바다가 보이는 방을 하나 얻었다. 어둠이 깔리고 바다가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혼자 있다는 사실이 싫어졌다. 혼자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와 되는 대로 수염을 기르고 배낭 하나로 떠돌기를 바랐는데 지금 이 방안으로 찾아드는 외로움은 무엇인가? 내일 짐을 싸가지고 서울로 다시 올라갈까 하다가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에 웃고 말았다. 아이들도 보고 싶고 처도 보고 싶다. 만일 참으로 다시 돌아갈 곳이 없이 떠도는 나그네라면 그처럼 외롭고 지친 인생은 없을 것이다.

보드랍고 섬세한 중년 사내

 

123 누구도 사랑이라는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이렇게 다이내믹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둘러보라. 사랑만큼 환장하게 못살게 하는 것이 있는 지. 그릇된 사랑도 있고 인고의 사랑도 있다. 그것만큼 다양한 이야기가 또 있겠는가?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지닌 인생처럼 행복한 것은 없다. 그것은 축복이다.

 

123 힌두교의 창조신화 속에는 인간의 창조신화도 있다. 4000년 전의 이 창조신화에 따르면 신은 여자를 만들 때 무척 고심한 것 같다. 꽃의 아름다움, 새의 노랫소리, 일곱 가지 무지개색, 미풍의 부드러움, 파도의 웃음, 양의 온순한 성질을 짜내어 여자를 만들었다고 하니 그 정도로만 만들어놓았다고 하면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일이 지금처럼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신은 짓궂게도 다시 여자의 체내에 여우의 교활함, 구름의 고집, 소나기의 변덕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남자로 하여금 여자를 아내로 맞게 했다.

어느 날 남자는 신을 찾아왔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신이시여, 이 여자를 다른 곳으로 보내주십시오. 도무지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 신은 그 소원을 들어주었다. 그 후 며칠이 지나 이 남자는 다시 신을 찾아와 말했다. “신이시여, 그 여자를 돌려주십시오. 그녀 없이 저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신은 다시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이제 그는 다시 그녀와 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몇일 후에 다시 찾아와 그녀와 함께 살 수 없으니 그녀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했다. 그 남자는 4000년 동안 여전히 그러고 있다. 아직도 돌려달라고 그랬다가 다시 무르곤 했다. 변덕스러운 것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다.

 

124 박경리의 <토지>에 나오는 월선은 마음이 고운 여인이다. 깊은 심성이 그윽하고 간절하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나오는 무당 딸 소화도 곱다. 좁은 어깨를 가진, 속이 뜨겁고 조신하여 하얀 여인이다. 그녀들의 사랑은 모두 기다림과 그리움에서 온다. 함께 살며 몸을 맞대고 일상을 나누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125 나는 네 어머니의 지기인데 전에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내는 흠잡을 데가 없지만 다만 아량이 좁은 것이 흠이다.”

다산은 어진 아내와 오랫동안 떨어져 서로를 그리며 살았다. 아내가 어질어도 떨어져 살게 될 자신의 운명을 이 젊은 청년은 알지 못했다. 살아가는 것의 어려움이다.

그럼 그 여자는?

  

마량의 아침 산다는 건 망설임이며 차마 어쩔 수 없음이다.

 

129 나이가 들면 밝은 것이 좋아지는 모양이다.

 

130 아침에 일어나 마량의 거리를 걸었다. 이곳저곳을 걸으며 흥겨운 아침햇살을 즐겼다.

 

134 등대 위로 젊은 남녀 한 쌍이 손을 잡고 걸어간다. 남녀가 같이 있는 광경은 늘 보기 좋은 그림이다.

 

134 나는 마량이 좋다. 맑은 햇빛이 좋고 바다가 좋고 필부들이 살아가는 일상이 좋다. 지저분한 거리와 어지러운 간판이 언제 깨끗해지나 하지만 살림이라는 것이 늘 그렇게 지저분한 것 아니겠는가? 설거지통에 가득한 식기들, 여기저기 널려 있는 옷가지들을 그대로 둔 채 허겁지겁 직장으로 향하는 맞벌이 부부들처럼 마량의 아침도 아무 화장 없이 그렇게 햇빛 속에 서 있다.

 

135 산다는 것은 약간 우물쭈물 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망설이는 것이다. 그것은 어리석음이며 미련이며 우유부단함이다. 그러고는 나중에 그것을 후회하고 그것이 차마 어쩔 수 없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관산 방촌리 날은 미칠 듯 맑은데 오래 묵은 매화 한 그루 만발해 있다.

 

136 방촌리는 고려 인종의 비인 공예태후 임씨의 고향이다. 어떻게 이런 벽지에서 왕비가 간택되었을까? 임씨는 문하시중 이위의 외손녀이다. 그녀가 태어나던 날 이위는 중문에 걸려 있는 황색기의 끝이 선경전의 치미(대들보 위를 장식한 기와)와 얽혀 나부끼는 꿈을 꾸었다. 임씨가 열다섯 살 되던 해 평장사 김인규의 아들에게 시집가는 날 갑자기 신랑이 급사해 버렸다. 그녀의 집안은 곧 파혼했고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때 한 점술가가 그녀에게 앞으로 국모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종 4 1126년에 왕은 이자겸의 두 딸을 내치고 임씨를 맞아 연덕궁주로 삼았다. 3년 뒤 그녀는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다섯 명의 왕자와 네 명의 공주를 낳았다.

 

137 또한 방촌리는 정조 때의 실학자 위백규의 생가가 있는 위씨 세가의 마을이기도 하다.

 

137 방촌리는 내가 남도를 돌며 발견한 살고 싶은 마을 중 하나이다. 비록 조야하게 개량한 가옥일지라도 집집마다 오래된 동백 한 그루씩은 키우고 있다.

 

138 반 마루에 배낭을 부려놓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조용하기 이를 데 없다. 동백꽃 떨어지는 소리가 툭 하고 들린다. 대나무 가지에 바람이 이는 소리가 마치 물소리 같다.

 

139 날이 미칠 듯 맑고 밝은데 오솔길이 끝나는 곳에서 한 노인이 감자밭을 손질하고 있다. 가서 인사를 하였더니 얼굴이 허물어지도록 웃는다.

 

3장 바다와 바람 그리고 길

 

정환 일몰 바다가 하도 찬란해 쳐다볼 수 없다.

 

146 이런 사람은 아주 친절한 사람이다. 태워주고 자기가 더 줄거워할 사람이다. 자기가 한 일에 즐거워하고 그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다. 실속은 하나도 없지만 실속이 뭐 그리 중요한가. 자신이 즐거운 것보다 더 훌륭한 실속이 어디에 있겠나?

 

148 늘 속이 쓰린 사람은 24시간 자기의 위만 생각하듯이 사상적 질환에 걸려있는 정치가는 정치적 생명이 위협받을 때마다 언제나 공산당과 빨갱이 그리고 현존하는 남북의 긴장 관계와 이 소년의 죽음에서 연상되는 잔인함을 걸고 넘어진다. 그래서 이 소년은 죽어서도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여기에 이렇게 서 있다. 우리는 초등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걸까?

 

149 오늘 저녁에는 모처럼 약간의 호강을 해보고 싶어 매운탕 하나와 밥 한 공기, 소주 한 병을 시켰다.

 

149 나무가 많은 예쁜 장환의 앞산이 이미 뚜렷한 실루엣으로 보이고, 멀리 천관산의 섬세한 바위가 흘러내리는 바위로 커다란 해가 넘어가는데, 어찌나 찬란한 지 감히 볼 수가 없다. 그 아룸다움 위로 배 한 척이 떠 들어오는데, 어부 하나가 능숙한 몸동작으로 그물을 걷고 있다. 

 

150 시인이 되어 이 풍경을 읊고 싶었다.

장환 근처의 일몰을 보고서 하는 말

 

천관 초야 보면, 그대 아마 잊지 못할 것이다.

 

151 천관산은 여자 같다. 부드러운 능선이 이어지다가 섬세한 바위로 멋을 낸다. 멀리서 천관산 바위를 제대로 보려면 천관사가 있는 곳에서 보아야 한다

 

152 천관사에서 저녁 공양을 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일몰을 보며 밥을 먹기 시작했는데, 친절한 평등성보살의 음식 솜씨가 좋아 밥을 두 그릇이나 먹는 사이에 해는 이미 지고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152 새로 닦고 있는 큰 길을 따라 100미터쯤 내려오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천관산 자락이 부드러운 곡선으로 둥글게 낮아졌다가 다시 다른 산줄기로 검게 이어지는 그곳에 아직 푸른기가 남아 있는 하늘이 걸려 있었는데, 그 모습이 유난히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이 유별나 아직도 가슴에 역력하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었다. 장환의 일몰이 감동이었다면 천관의 초야는 평화로움이었다.

 

153 바라건데 기회가 있으면 이미 해가 져서 큰 길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할 때쯤 천관사를 한번 걸어 내려와 보라. 내려오다 좌측에 있는 천관산으로 오르는 오솔길 옆 등산로 표지판 아래를 조금 지나면 평생 잊지 못할 광경이 보일 것이다.

 

154 몇 시간이고 바다를 보고 있어도 여전히 바다가 그립다. 내 가슴 어디엔가 바다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하다. 나는 그렇게 태어났나 보다.

 

158 그는 귀족의 자제로서 사랑보다 세속의 명리와 명분을 따랐을 것이다.

 

158 정상의 부드러운 억새숲에 누워 봄볕을 즐기고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바다를 보며 몇 시간을 쉬다 보니 이 산이 지극히 여성적인 포근함으로 가득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159 이별의 아픔을 가진 사람은 천관산에 와 바다를 보았으면 한다. 바다 너머 그리움을 보라. 인생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도 이 곳에 와서 바다를 보았으면 한다. 이곳은 그리움의 산이다. 양근암과 금수굴이 서로 다른 등성이에 있어 만나지 못하는 것처럼, 이곳은 그리운 사람들끼리 만나지 못하는 그리움 가득한 산이다.

 

천관산 장천오미 숨겨두고 혼자 즐긴다는 말의 의미를 아는가

 

161 350년이나 묵은 노송이다. 소나무는 탈속의 멋이 있어 세상을 떠난 은둔자의 허허로움이 있지만 위엄 또한 잃지 않는다.

 

162 숨겨놓고 혼자 즐긴다는 의미를 아는가? 벽장에 숨겨놓은 꿀단지여도 좋고 바쁜 날 잠시 겨를을 내어 찾아가는 찻집이어도 좋다. 혹은 서가에 꽂혀 있는 소년 시절의 감명 깊었던 책 한 권이어도 좋다. 마담이 괜찮은 술집이어도 좋다. 아주 어릴 적 왠지 모르게 울고 싶을 때 저녁이 되어 어머니가 찾아 나설 때까지 숨어 있던 자기만이 아는 작은 비밀 장소처럼 그런 치유의 은밀한 장소와 시간 없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겠는가?

이런 곳, 이런 시간이 내 삶에도 있기를 소망한다. 새벽푸른빛과 노을 속에다 지으리라. 나의 비밀 아지트를.

 

163 천관산은 매력이 있다. 처음 왔지만 사흘을 이곳에 머물렀다. 동백도 바위도 작은 억새도 마음에 든다. 이 곳의 햇빛도 이 산을 떠도는 오래된 이야기도 장안사 보살이 담근 더덕과 칡과 대추를 넣은 달지 않은 술도 그렇다. 언제 또 오늘처럼 낮술에 취할 적이 있으랴. 햇빛이 동백에  가득한데 새들이 저희끼리의 말로 한가로운 봄을 지루해한다. 오늘처럼 즐거운 오후는 드물다.  오늘은 마음껏 동백을 즐겨볼 참이다.

 

166 선운사 동백은 4월 말은 되어야 만개한다. 거제도 동백은 좀 더 일찍 만개하는 것으로 기억한다. (2) 거문도 동백숲도 잊혀지지 않는다. 4월 초쯤 둘째 해언이를 데리고 그곳에 갔는데 이미 동백은 다 떨어져 늦게 핀 꽃 몇 송이를 보며 아쉬워했다. 강진 백련사 동백숲도 유명하다.

 

167 남도에 오면 특별한 곳에서 동백을 찾을 필요가 없다. 지천에 널린 것이 동백이다. 고목에 피어 있는 동백은 어디나 예쁘다. 한 그루가 있어도 예쁘고 떼지어 피어 있어도 예쁘다 동백은 남도 사람들의 울타리 속 꽃이다. 그들의 애환이고 장독대 옆의 일상이며, 간혹 밭일하다 허리를 펼 때 웃어주는 그런 꽃이다. 그들의 표현대로 암시렇지도 않은일상의 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안다. 동백이 피지 않으면 그들의 봄도 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가 그들의 마지막이라는 것도 안다. 그들이 알기 때문에 나도 안다.

 

천관사 장안사 아름다움이 바로 문 밖에 있으니 또 어디로 가랴

 

168 봄날의 아름다움이 바로 문 밖에 있으니 어디로 가랴. 취해 자다 또 일어나 읽고 버리고 기록한다.

 

170 내 생각에 꿈이란 지금의 자기 이외의 무엇이 되고 싶은 것이다. 현실적 불만족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부러움의 표현이다. 그래서 꿈에는 슬픔이 깃들어 있다. 어쩌면 약간의 질투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이미 되어 있는 사람이 있거나 가지려고 하는 것을 이미 취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꿈은 욕망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직 현실이 아니다. 그러나 꿈은 씨앗과 같아서 늘 그곳에서 싹이 트고 커다란 나무가 된다. 그러므로 꿈은 또한 현실이다. 아마 다람쥐는 다람쥐 이외의 것이 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간보다 더 행복할지 모른다. 저 한 쌍의 다람쥐들이 저렇게 미친 듯이 유희를 하고 있는 이유도 행복해서일 것이다. 

 

172 조금 익숙해지면 타성이 붙게 되는데, 그러면 내용은 없어지고 형식만 남게 된다. 이때 다시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불가에서 이것을 발심이라고 부른다. 발심은 초심보다 어렵다고 말한다. 옳은 말이다. 개혁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개혁이 진부해질 때 원래의 개혁으로 되돌아가기가 더 어려운 것과 같다. 인간의 습성이 고려되지 않은 개혁과 혁명은 허구이다. 그것은 학살이거나 기만이거나 지나친 망상이다.

절 하는 법을 이야기하다 나온 말

 

가지산 보림사 옛 사람들은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는데 요즘 사람들은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

 

178 천년대가람이 한국전쟁 때 불타버렸는데, 불을 지른 장본인이 바로 공산당 유격대를 토벌하러 온 군경토벌대였다고 한다. 이유는 공비들의 본거지를 없애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렇게 말하면 펄펄 뛰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179 당시 75세였던 한암은 불을 놓을 테면 놓아라. 나는 예서 그대로 죽겠다하고는 방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상원사는 오대산에서 전란 중에 불타지 않은 유일한 절이 되었다. 

 

179 보림사를 잘 보는 방법은 초대 해동선종의 조사인 도의선사와 2대 염거화상과 가지산 문을 연 보조선사 체징으로 이어지는 선종을 이해하는데 있다.

 

180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유능한 6두품 이하의 귀족은 신분적 제약을 뛰어넘고 싶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옹호할 새로운 이념을 모색했다. “문자에 의지하지 않고 (불립문자) 경전의 가르침 외에 따로 전하는 것이 있으니(교외벌전)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깨우쳐 (직지심경) 본연의 품성에 이르러 부처가 된다(견성성불)”는 선종의 가르침은 교리와 권위를 중시해온 종래의 귀족불교를 극복할 수 있는 혁신적 사상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깨우쳐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더 나아가 인간 본연의 마음이 곧 부처(자심즉불)’이라는 믿음은 기존의 체제와 질서보다는 깨우침의 능력을 더 중시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6두품과 호족도 능력이 있으면 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확장되었고, 결국 호족 출신인 왕건은 새로운 왕조를 세우게 되었다.

 

4장 아무 계획없이, 아무 목적없이

 

183 <조선불교윤신론>에서 만해 한용운은 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첨선은 스스로 밝히는 것이요. 철학은 연구이다. 참선은 돈오요, 철학은 점오라 할 수 있다. ..요즘 참선하는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옛사람들은 그 마음을 고요하게 가졌는데 요즘 사람들은 그 처소를 고요하게 가지고 있다. 옛사람들은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는데, 요즈음 사람들은 그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 처소를 고요하게 가지려면 염세가 되는 것뿐이며, 그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도선이 안 되려야 안될 수가 없다. 불교는 세상을 구하는 가르침이요, 중생 제도의 가르침일 터에 부처님 제자 된 사람으로서 염세와 독선에 빠져 있을 따름이라면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183 만공의 진전을 이어 수덕사 초대 방장이 되었던 혜암 역시 시끄러운 곳을 피하여 조용한 곳을 찾아서 공부해야 한다면 그것은 죽은 공부라고 단정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 일을 하며 마음의 공부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다가 깨닫기도 하고, 햄버거를 주문받다가 혹은 사무를 보거나 강의를 하다가도 갑자기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연애하는 마음처럼 간절히 공부하면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속인이 출가자보다 공부를 많이 한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188 장흥장은 2일과 7일에 선다. 아침에 보림사로 가기 위하여 이 곳에 왔는데 버스 시간을 맞추기 위하여 한 시간 가량을 기다려야 했다. 마침 탐진강 다리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장이 서서 두루두루 장 구경을 했다. 

 

188 점심으로 먹을 떡 한 덩어리를 샀다.

 

189 선거를 통해 대표자를 뽑는 방법은 그 나라의 가장 우수한 인재를 끌어모으는 방법으로는 적당치 않다. 지혜롭고 뜻있는 훌륭한 사람이 어찌 저 아수라장을 거쳐 선량이 되고자 하겠는가? 피곤한 일이다. 

 

189 이니 열댓 명 모이게 되고 버스는 왁자지껄 유쾌한 만남의 장소가 된다.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남녀가 얼굴이 쭈그러들 때까지 만나게 되니 흉허물이 없다.

 

190 버스는 나를 내려놓고 그네들을 태우고 더 먼 곳으로 간다. 나도 돌아가고 싶구나. 마구 자란 수염을 깎고

 

4장 아무 계획없이 아무 목적없이

 

땅끝 사자봉에서 보길도 격자봉까지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섬이 있다는데

나도 바닷길 따라 그 섬에 가고 싶다.

 

192 상징을 빼면 인간의 정신은 빈약해진다. 땅끝의 아름다움은 여기가 반도의 끝이라는 생각 때문에 비장하고 단호한 정취를 갖게 만든다.

 

193 바닷바람이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 넓은 해원을 몰아쳐온 가속도로 온몸을 던져 산에 부딪힌다.

 

197 나는 그러나 부를 마음대로 누리는 것에 대한 저항감이 있다. 지나친 호사는 신의 뜻에 어긋난다. 마음은 호사로움으로 위로받을 수 없는 것이다. 마음 자체가 부식될 뿐이다. 고산이 죽자 만세를 부르며 환영한 섬사람들이 있었다 하니 그 수발의 고충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만 하다. 위대한 정신은 검소하며 형식에 매이지 않는다. 나는 보길도에 있는 고산 유적을 찾아 보는데 일부러 시간을 내지 않았다. 보길도는 고산이 없어도 이미 충분히 아름다운 곳이다.

 

197 공재 윤두서는 윤선도의 증손자다. 조선시대 인물 중 자신의 얼굴을 가장 정확하게 후대에 남긴 사람 중 공재만한 이가 없을 것이다. 그이 자화상은 살아 있다. 이상하게도 그 초상화를 보면 표범 생각이 난다. 눈빛이 어찌나 강한지 사람의 눈이라고 보기 어렵다. 강한 야생성이 느껴진다그는 표면이 아니라 사물의 내면을 끄집어내어 그렸다. 그가 그린 것은 자신의 얼굴은 외모가 아닐 것이다. 그의 마음일 것이다. 분노일까?

 

윤두서는 혁명적인 인물이다. 숙종조에 살았던 그는 임진년과 병자년의 전란을 겪으며 조선 사회의 권위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목격했다. 변화와 개혁에 대한 모색이 요구되는 시기에 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낸 인물이다. 그는 관념적인 조선 회화 속에 현실을 담아내었다. 신선과 도사, 중국풍의 동자 머리, 남양의 물소 대신 조선 여인이 등장하고 조선의 소가 밭을 가는 모습을 그렸다.

 

보옥리 뽀족산 이곳을 놓치면 보길도를 보았다고 하기 어렵다.

 

201 오후 2시의 아주 강한 햇빛이 머무는 잔잔한 물결은 바람에 실려 반짝인다. 나는 그 잔잔한 일렁임이 좋다. 푸르고 환하고 잔잔한 반짝임. 수평선 끝에 커다란 배가 지나는데 참으로 천천히 고요히 움직인다. ..시간이 멎은 듯하다. 호흡도 멎은 듯하다. 일체의 미동도 없는 대낮. 내가 완벽히 쉬고 있는 듯 하다.

 

202 맥주 맛이 그만이다. 돌팔매질을 하며 맥주를 마시고 바다를 바라보며 몇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한 나이 많은 남자가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바위에 돌을 던지지 시작했다. 그가 나와 다른 점은 서서 바로 앞에 있는 바위에 돌을 던진다는 점이다. 나는 앉아서 멀리 있는 바위에 돌을 던지고.

 

204 들어갈 때 벗어놓은 신발이 며칠이고 그대로 놓여있다는 것이다. 나가봐야 갈 데도 없고 낯설기만 하여 나가지 않기 때문이란다.

 

205 섬과 산들은 이미 어두워져 있지만 하늘은 회청색으로 아직 푸르다. 별이 뜨기 시작하여 점점 더 또렷해지고 바다는 아직 푸른기가 남아있다. 그러나 하늘만큼 푸른빛이 더하지는 않다.

 

205 4. 맑음. 한라산 허리의 구름. 해안에 와닿는 바다의한숨, 바다 위에서 배가 만들어낸 하얀 자국, 하얀 포말, 동굴고 예쁜 차돌, 하염없는 태만, 시간의 정지, 할머니와 나눈 쓸쓸한 대화, 바닷바람 속에서 마신 대낮의 맥주, 아쉬운 일몰, 푸른기가 살아 있는 해진 뒤의 하늘, 섬과 산들의 실루엣, 어두어지는 시간의 추이, 그때 그 어둠의 농도, 가끔 지나가는 차의 불빛

이런 단어들로 하루를 기록해보고 싶구나.   

 

보길도 예송리 바다를 즐기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206 통리에서 예송리까지는 3킬러미터도 안된다. 아스팔트를 따라 걷기는 싫었다. 물이 빠지기 시작했으므로 바닷가 절벽을 따라 예송리까지 가기로 했다. 파도를 보고 그 소리를 들으며 가자.

 

207 길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미 누군가 건너간 길이다. 지금 나뭇가지를 잡고 천애의 절벽을 발밑에 두고 아슬아슬 건너가지만 내가 지나온 자리는 결국 나중에 길이 될 것이다.

 

208 걷는 것은 노는 것이다. 앉아서 쉬는 것 또한 노는 것이다.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으므로 나는 시간으로부터 자유롭다. 

 

208 아름다운 예송리 갯돌 해수욕장에 도착하자 자갈밭 위에 누웠다. 따뜻했지만 바람이 불어 가져온 옷 하나를 꺼내 걸쳤다. 그리고 작은 수건을 꺼내 얼굴을 덮었다. 수건 밖으로 해가 이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수건 위가 환하다. 창호지를 통해 햇빛이 비치는 것을 보듯 환한 명랑함에 즐거워진다.

 

209 오늘 산을 타고 넘으려던 계획은 지켜지지 않았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계획대로 되지 않았지만 아쉬움은 없다. 나는 오늘 하루를 아주 잘 보냈다. 내가 계획한 것은 산을 넘는 데 있다기 보다는 행복한 하루를 보내는 것이었다. 나는 행복했고 더 바랄 것이 없다.

 

210 완도에 가게 되면 꼬들꼬들 마른 생선도 좀 사서 부쳐야겠다. 뭘 사야 하나. 우럭, 민어 장어처는 이곳 바다를 주방에서 풀어볼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내가 남쪽 바다를 거쳐 갔다는 것을 알게될 것이다. 가벼운 그리움으로 그녀의 손끝이 조금 떨릴 것이다.

 

211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있는 지 모르겠다. 더 정확히 말하면 생각나는 대로 그것이 스쳐지나도록 놓아 두었다. 가만히 놓아두면 왔다가 그냥 간다.

 

완도 선착장 부두에 매여 있는 배들을 보면 자유로움을 느낀다.

 

215 바나나와 딸기를 조금 사가지고 돌아왔다. 저녁 먹기가 어려울 때 대신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 바로 과일이다. 바나나는 영양가가 많고 한두 개 먹어도 배를 편안하게 하는 가벼운 포만감을 주므로 등산과 여행 때 최고의 대용식이다.

 

215 여행 중 가장 곤란한 일 중 하나가 신발이 비에 젖는 일이다.

 

218 보내준 편지는 자세히 보았다. 천하에는 두 가지 커다란 기준이 있다. 하나는 시비의 기준이요. 또 하나는 이해의 기준이다. 이 두 가지 큰 기준에서 네 종류의 큰 등급이 생기게 된다. 옳은 것을 지켜서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높은 등급이다. 그 다음은 옳은 것을 지켜서 해를 받는 것이다. 그 다음은 나쁜 것을 좇아 이익을 얻는 것이며, 가장 낮은 등급은 나쁜 것을 좇아 해를 받는 것이다. 너는 지금 필천에게 편지를 보내어 항복을 빌라 하고, 또 강가와 이가에게 애걸하라고 한다. 이는 세 번째 등급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나 끝내는 네 번째 등급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내 가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하겠느냐내가 돌아가고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진실로 큰 일이기는 하지만 죽고 사는 것에 견주면 하찮은 일이다. 내가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는 것도 천명이고,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는 것도 천명이다. ..나는 사람이 닦아야 할 도리를 다했다. 사람이 닦아야 할 도리를 이미 다했는데도 끝내 돌아가지 못한다면 이 또한 천명일 뿐이다. 강가 그 사람이 어찌 나를 돌아가지 못하게 하겠느냐. 마음을 놓아라. 염려하지 말아라. 서서히 세월을 기다리는 것이 합당한 도리이니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아라. (병자년 5. 둘째 아들 학연에게 답함. 정약용)

 

 

장좌리 장도 바람과 파도 속에서 그때를 아쉬워한다.

 

220 폭풍주의보가 내려 청산도로 들어갈 수 없었다. 모든 배는 결항이 되었다. 어제 들어갔어야 하는데 쉬는 바람에 놓치고 말았다.

 

224

한동안 장보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에 대한 소개와 조사가 상세하다. 타이핑을 해둘까 말까? 넘 길어서 생략. 그런데 이 여행기가 45일 정도 달포에 걸친 여행을 그 해 내내 새벽마다 쓴 책이다. 여행보다는 여행기를 쓰면서 여행이 풍부해졌다.  

 

완도에서 녹동까지 아름다운 한려수도 푸른 뱃길을 따라

 

237 변화를 공부하고 싶으면 자연 속으로 들어가봐야 한다. 햇빛은 해가 떠서 질 때까지 한 번도 같은 적이 없다. 같은 2시의 햇빛도 계절에 따라 그 느낌이 다르다. 물빛 역시 봄에는 초록빛이고 여름에 파르스름한 녹색이다. 가을엔 푸르며, 겨울엔 검푸르다. 나무에 잎이 나고 지는 것을 보거나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보며 변화를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미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다. 조직이 왜 피어나고 또 왜 갑자기 활력을 잃게 되는지를 알고 싶으면 산에 가 보라. 봄이 되면 산 전체가 피어난다. 그리고 겨울이면 산 전체가 웅크리고 있다. 왜 그런가?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변하지 않는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인문학적 호기심이다. 변화의 능력과 경영은 인문학적 감수성과 이해 없이는 불가능하다. 인문학이 죽으면 경영학이 살아 있을 수 없다. 돈은 사람이 건강할 때 필요한 것이다.

 

하동 쌍계사 벚꽃은 이미 지고

 

240 벚꽃은 가장 비참한 시기의 일본 군국주의를 닮아 있다. 그들은 동양의 모든 나라를 괴롭혔고 굴욕을 겪게 했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가장 불행해진 나라는 바로 일본이었다. 일본의 여인들은 아이를 낳으면 군대에 바쳤고 그들은 사방에서 전쟁을 하면서 죽어갔다. 어머니들은 자식을 잃은 슬픔에 휩싸였고, 젊은이들은 피지도 못하고 죽었다. 그들의 정치가와 지도자들은 젊은 산화를 충성과 애국이라 가르쳤고 가미가제 특공대라고 치켜세웠다. 떼거리 정신을 부추겼고 확 피었다 확 가는 짧고 화려한 생애를 아름다움이라 불렀다. 벚꽃은 바로 그런 군국주의자들에게 이용당했다.

 

241 1908년 프랑스에서 온 한 신부가 한라산에서 자생하고 있는 왕벚나무를 처음 발견했고 1912년 독일의 식물학자에 의해 정식 학명이 세계에 등록됨으로써 한국이 왕벚나무의 자생지임이 확실해졌다. 나는 일제강점기의 군국주의자들이 일본 정신의 정화의 상징이 우리나라로부터 연유된 것을 어떻게 해명했는 지 모른다. 어쨎든 우리나라는 왕벚나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고 있다.

 

242 늑대는 사악한 짐승이라고 알려져 있어 늑대를 모조리 없애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미국의 한 젊은 산림청 직원은 평화로운 늑대 가족에게 라이플을 쏘아대었다. 늙은 늑대가 쓰러지자 가까이 다가간 그는 늑대의 눈에서 푸른 불꽃이 사라져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 늑대의 눈 속에 무언가 자신이 모르는 새로운 것, 즉 산과 늑대만이 알고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 후에도 그 일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결구 알도 리오폴드라는 이름의 그는 미국 환경 보호 운동의 주창자가 되었다.  

 

246 소비적이고 향락적인 문화는 우리의 휴식 시간이 짧다는 것과 대단히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짧게 끊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텔레비전 시청, 노래방, 그리고 짧은 여행은 향락적인 소비문화일 수 밖에 없다. 자유시간이 턱없이 짧기 때문에 클라이맥스는 빨리 맛보아야 한다. 뜸을 들일 시간이 없다. 짧은 시간에 농축되어야 하기 때문에 진해야 하고, 따라서 야만적이며 과격한 몸짓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처럼의 휴식은 또 다른 노동이 되고 만다.

 

246 문화는 쉽게 말해 잘 노는 것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고, 자기가 스스로의 삶을 조직하는 능력을 배양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자유시간이 부족하면 자기의 삶을 자율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낮아진다. 문화는 본질적으로 스스로를 유한계급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문화사회란 그러므로 일하는 시간을 줄여 그 시간을 자아의 실현을 위해 투여하는 사회이다. 노동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사람들의 자율적인 활동이 지배하는 사회가 바로 문화사회인 것이다.

 

목포 볼 것도 많고 먹을 것도 많다.

 

250 지는 해의 노을이 우리를 감동하게 하고 술을 잘 못하는 친구는 노을빛처럼 붉어진 얼굴로 몇 시간 전 떠나온 서울의 아내에게 전화를 한다. 즐거움을 나눈다는 것은 보기 좋은 일이다.

서울에서 친구가 찾아와 같이 시장에서 이것 저것 사서 노점상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이런 친구가 내게도 있을까?

 

251 오늘 다시 북항에 가는 이유는 게를 삶아 먹기 위해서다. 친구는 낮 기차로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 그는 게를 들통에 삶아 먹는 것을 좋아한다.

 

5장 아름다운 섬 이야기

 

흑산도 흑산도에는 아직 홍어가 있고, 예리 포구에는 옛날의 정취가 남아 있다.

 

258 다산의 형인 정약전은 이곳에서 15년간 유배 생활을 했다. 흑산도 근처의 물고기와 해산물 200여 종의 생태를 기록한 자산어보를 집필한 것도 길고 긴 유배생활 동안이었다. 이 서당 역시 당시 그가 이곳 사람들을 모아 가르치던 곳을 깨끗하게 초가로 복원해놓은 것이다. 이 서당 덕인지는 몰라도 모래미마을 사람 중 공부를 계속하여 공무원이 된 사람이 많다고 한다.

 

259 둘째 형님은 나의 지기였는데 전에 말씀하셨다. “내 아우는 흠 잡을 데가 없는데 사람을 포용하는 도량과 일처리 능력이 미흡한 것이 흠이다.” 언젠가 정조대왕께서 나와 약전 형님을 불러 함께 환담을 나누었는데 대왕께서 말씀하셨다. “아우가 형만 못하다

가까운 형제가 좋은 지기인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참 좋은 인연

 

261 모래미마을 박찬식

 

264 “왜적을 내치지 않을 것이면 대신 신의 목을 베소서라고 도끼를 등에 메고 상소를 하던 고지식한 선비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265 나는 면암이 지나치게 꼿꼿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타협도 융통성도 없는 도끼 같고 대 같은 사람이라 가까이 가기 어렵다고 여겼다. 여기 와서 그이 적거비를 보며 내가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동백 같고 해송 같은 사람이다. 붉디붉은 동백꽃잎이고 한아름 되는 오래 묵은 소나무 밑둥 같은 사람이다. 사람이 어떻게 꽃처럼 나무처럼 살다 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곳 흑산도의 한쪽 구석 마을에 그렇게 살다간 그의 숨결이 살아 있다.

 

266 인생은 길이다.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길 그 자체이다. 마음이 모질고 팍팍하여 한 구루의 나무도 자라지 못하는 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천촌리의 길처럼 솔잎이 깔려 있고 동백나무 우거진 아름다운 길일 수도 있다. 나도 인생의 어느 부분인가에 솔잎이 깔리고 주위에 꽃이 가득한 그런 부드럽고 포근한 길이고 싶다. 돌밖에 없는 길, 한 그루의 나무도 없어 뜨거운 햇빛에 머리가 벗겨질 것 같은 황막한 길, 파이고 강팍한 길, 그런 길이고 싶지는 않다. 아름다운 나무 가득하고 옆으로 작은 시내 하나 흐르는 그런 길이고 싶다.

 

266 천촌리 산길을 오르며 면암을 생각한다. 그도 아침 일찍 산책을 나와 이 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길은 그와 닮아 있을 것이다. 가슴에 핀 꽃이 붉어 남의 나라 대마도에서 굶어죽었을 것이다. 가슴 속에 굵은 소나무 기둥이 있어 나라라 무너진 그때 의병을 일으킬 수 있었을 것이다.

 

268 나는 좋은 길이 되고 싶다. 사람들로 하여금 천천히 걷게 하는 길이 되고 싶다. 평평하고 예쁜 바위가 몇 개 있어 좋은 날 사람들이 잠시 앉아 쉬어 갈 수 있는 그런 길이고 싶다. 깊은 정취가 있어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하면 감탄하는 그런 길이고 싶다. , 언제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나는 아직도 무엇이 되고 싶어하는 나를 좋아한다. 내가 아직 젊은 탓일까?

      

홍도 아름답고 슬픈 구녕섬

 

관매도 잘록한 허리에 천리향 향기로운 섬

 

279 관매도를 가고 싶으면 진도의 팽목에서 배를 타는 것이 좋다.

 

284 우리는 가난했다. 비오는 날 수건 하나를 들고 학교로 갔다. 교실에 도착해서 가방에서 수건을 꺼내 젖은 머리와 얼굴을 닦으면 그것으로 수건은 우산의 역할을 대신한 것이다. 학교는 늘 걸어다녔다. 몇 장 안되는 버스표는 어쩌다 급해진 등교길에 써야 하는 비상용이었다.

 

285 누나는 제일 깨끗한 유리컵을 선생님께 드렸다. 모양이 다른 유리컵 세 개 만큼 우리집의 가난을 명료하게 보여준 것은 없었다.

 

288 천리향은 수수꽃다리만큼이나 짙은 향기를 지나고 있다. 짙은 향기는 심복이 아내를 그리며 지은 <부육생기>를 생각나게 한다.

 

진도 용장산성과 제주 항파두리 항전 9개월, 2 700년 뒤

 

292 일정을 맞추어 서울에서 내려온 친구와 진도 친구의 형님과 함께 오후에 쌍계사와 남도석성 등을 둘러보았다. 

 

293 돌아오는 길에 작은 포구에 들러 숭어를 여러 마리 샀다. 친구 형님이 읍내의 잘 아는 식당에 맡겨 회를 뜨고 탕을 만들어달라고 하였다. 저녁에는 함께 어울려 술을 마시고 다음날 벽파에 있는 용장산성에 갔다.

 

293 1259 4, 고려와 몽고 사이의 강화 조약에 따라 고종의 맏아들인 왕식(원종)이 태자 신분으로 몽고의 조정에 들어갔다. 그때 쿠빌라이는 그를 일국의 왕으로 대접했다. 주위의 나라들이 모두 몽고에 항복했지만 고려만이 30년을 버티며 항복하지 않은 것에 대한 특별한 예우였다. 원종은 같은 해 6월 왕위에 올랐다.

 

이자겸과 묘청의 난 이후 정중부가 의종을 죽임으로써 시작된 무신정권은 고려 왕실의 권위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원종은 몽고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무신정권으로부터 권력을 되찾으려 했다. 원종이 즉위한 후 강화도의 무신정권은 10년을 더 버티며 장장 40년간 몽고와 싸웠다. 1270년 무신정권을 대표하는 임유무가 살해되자 원종은 그해 5 27일 개경으로 환궁했다. 원종은 무신 정권의 지지기반이었던 삼별초의 명부를 빼앗아 병권을 잡으려고 했다. 명부가 몽고인들의 손에 넘어가면 삼별초에 대한 대대적 숙청이 자행될 것이기 때문에 몽고와의 전쟁에서 핵심적 역할을 맡았던 삼벼초는 당연히 반발했다. 사흘 뒤인 6 1, 배중손은 승화후 온을 왕으로 받들고 반란을 일으켰다. 다시 사흘 뒤 1000여 척의 배에 인권과 재물을 싣고 남하하여 진도의 벽파진에 도착한 것은 8 19일이었다. 그들은 용장사에 행궁을 만들고 원래 있었던 산성을 개축하였다. 이것이 바로 용장산성이었다.

 

이듬해 1271 5, 개경 정부의 장수 김방경과 몽고 장수 홍다구가 이끄는 전선 400척과 1만의 군사가 총공세를 개시하여 10일간의 전투 끝에 진도 정부는 9개월 만에 끝이 나고 김통정이 남은 사람들을 이끌고 제주로 퇴각하여 항파두리에서 항전을 계속한다.

 

294 삼별초의 난은 단순한 군사 반란이 아니었다. 만일 그랬다면 그들이 비록 고려의 최정예부대였다고 해도 3년 반을 버티지는 못했을 것이다. 고려 왕실이 친몽적 경향을 띠고 삼별초를 진압하려는 것에 고려의 백성들은 비판적이었다.

 

295 삼별초는 고려의 하층민들과 일반 백성들에게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단순한 군사 반란이 아니라 고려 백성들의 항몽 자주 운동이었던 것이다.

 

295 나비는 그 부드러운 꽃잎 같은 모습 때문에 종종 시간 너머로 생각을 확장해 가는 것을 도와준다. 그 팔랑거림을 따라가다 보면 700여 년 전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 다. 저 나비들은 그때 그들인지도 모른다.

뒤에 저자가 상상한 김통정의 사랑이야기가 나온다. 무협지 같기도 하고, 드라마 같기도 하다. 재미나다. 여행기에 소설이 섞여 든다.

 

296 김통정은 그녀가 난초 같은 숨결을 가진 여인이라 생각했다. 별을 뿌려놓은 듯한 눈빛을 가진 여인이라 생각했다. 여인은 그가 별빛 사이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굵은 무사의 선을 가지고 있지만 선비처럼 섬세한 남자라고 여겼다.

 

297 제주인들 속에서 김통정을 닮은 아이를 낳았을 것이다. 제주인들이 가지고 있는 기개는 아마 그로부터 물려받은 것일 것이다.

고려 때 40여년간 항몽자주운동을 벌였던 삼별초의 후손들이 제주도를 이루었다면 그럴 지도 모르겠다. 제주도 언젠가 한 번은 1년 봄여름가을겨울을 살거나 1달쯤 머물고 싶은 곳.  

 

297 김통정의 삼별초가 여몽연합군에 의해 붉은 오름에서 전멸당한 지 70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제주의 중간산은 다시 미군과 국군토벌대에 의해 온통 핏빛으로 물든다. 제주 중간상은 매우 모호한 지명으로 해변에서 5킬러미터를 벗어난 한라산 중턱쯤을 가리키는 말이다. 1948년 제주도 4.3사건이 일어난 후, 그해 11월부터 약 4개월간에 걸쳐 중간산마을은 초토화되었다. 그동안 중간산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빨갱이가 되어 젖먹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49 4월 미군정보고서에 따르면, 같은 해 3월까지 약 1 5000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중 80퍼센트 이상이 토벌대의 손에 사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1954 9월 한라산에 대한 금족령이 해제될 때가지 6 6개월동안 죽은 사람들은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무장 봉기대의 공격이 있으면 다시 토벌대의 더욱 잔인한 보복이 뒤따랐을 것이다. 잔인성은 이렇게 재생산되었을 것이다. 중간산 일대의 평화로운 정적 뒤에는 기막힌 어리석음과 보복, 통곡과 억울함이 조용히 도사리고 있다.

 

298 비극은 늘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에게 찾아온다. 미국 흑인의 비극은 그들을 해방시킨 링컨이 흑인이 아니라는 것에서 연유하나. 해방 후 우리 민족의 비극은 우리의 힘으로 해방되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미군정이 시작되었고 국토는 나뉘었다. 일제의 경찰이 미군정 경찰로 옷을 바꾸어 입고, 친일파는 반공주의자가 되어 득세했다.

 

298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힘을 끌어내지 못하는 사람 역시 비극적이다. 그는 종속적이며 누군가가 시킨 일만 할 뿐이다. 하수인이 된다는 것은 몸은 몸대로 고되고 남에게 못할 짓을 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증오하게 되고 이를 견디기 위해 세속화된다. 그의 내면 어디에도 스스로를 위한 쉴 곳이 없기 때문이다친몽파든 친일파든 친미파든 외부에서 힘을 빌어오는 경우에는 늘 외부에 종속된다. 그런 경우는 자기일 수 없다. 외부의 힘에 따르고 적응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모르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적응은 어쩔 수 없는 차선책이라는 것이다. 변화의 핵심은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새로운 상황을 창조함으로써 스스로 그 주인이 되는 것이다. 성공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다. 중요한 것은 주체적인 자기로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이 허락한 대로

 

300 새처럼 유쾌한 창조물이 있겠는가? 나무에 돋은 푸른 잎마다 새소리가 묻어 참으로 싱그럽다. 오래 전 여기 살았던 이들의 고되고 억센 기백이 새소리와 함께 울려 퍼진다.

 

한라산 구름 속 눈 위의 산책

 

301 4 27, 나는 네번째로 한라산에 들었다.

 

302 오르는 길 내내 사람 하나 없다. 내가 유일한 인적이다. 한가롭고 한적하다.

 

302 나이가 들수록 붉은 소나무가 좋아진다. 나이가 많은 소나무에서는 향기가 난다. 나도 나이가 들어 저렇게 고울 수 있기를 바란다. 적송들 밑에는 조릿대가 가득하다. 영혼이 맑은 어린아이들처럼 경쾌하고 수다스럽다. 조릿대와 바람은 친하다. 속삭이는 듯 다정하다가 싸우듯 와삭대기도 한다. 아무엇도 아닌 일로 바람이 삐쳐 가버리면 조릿대도 실망해서 조용해진다. 바람이 웃는 얼굴로 다시 찾아오면 조릿대도 다시 유쾌해진다. 붉은 소나무는 정잖게 관망하며 소리나지 않게 웃고 있다. 아이들을 보는 어른처럼 그렇게 으젓하게 서 있다. 산속에서의 일상도 우리의 일상과 같다.

 

304 배낭 속에서 진도에서 사가지고 조금씩 마시다 남은 홍주를 꺼내 꿀꺽 한 모금 들이켰다. 40도나 되는 이 술은 속에서 무수한 작은 불꽃들이 되어 장작처럼 몸을 뜨겁게 해준다.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곳 구름 속에서 구름이 꽃이 된 설화를 보며 나는 행복하다.

 

305 관음사 길은 산을 느끼기에 좋다.

 

306 산행의 즐거움은 산을 즐기는데 있다. 산은 음악과 같다. 조용해야 들을 수 있다. 한적해야 피어있는 들꽃을 만날 수 있다. 호젓하지 않으면 온몸의 피부가 그 정적을 감지할 수 없다. 햇빛이 비치는 아름다운 바위 위에서 옷을 느슨하게 풀어놓고 땀을 식힐 수 있어야 청량한 계곡에서 생겨나 아름드리 나무와 고운 꽃잎을 만지며 푸른 하늘을 지나온 바람을 느낄 수 있다. 이름 모를 새, 그러나 그 울음은 익히 알고 있는 새소리가 반갑고, 얼마 남지 않은 산벚꽃잎 하나가 나비처럼 오래 공중에 머물다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으면 봄이 깊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일본의 한 하이쿠 시인은 마음을 쉬고 보면 새들이 날아간 자국까지 보인다라고 읊는다. 오랜 후에 산의 얼굴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에 핀 들꽃으로 다시 태어나도 좋을 일이다.    

 

귀환 다시 일상으로

 

 

308 제주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비행기를 타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장소의 이동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의 간격이 너무 짧아서였다. 한달 반 동안의 일탈은 그에 상응하는 귀환의 의식을 가져야 한다. 인간은 상징성을 벗어날 수 없다. 변화는 상징과 함께 나타난다. 결혼식은 두 사람이 만드는 하나의 세계를 상징하며 장례식은 삶과 죽음의 화해이고 이승에서의 이별이다.

 

308 한 달 반동안 나는 무엇을 하였는가? 내가 버리고자 했던 다섯 가지를 버렸는가? 아침의 면도, 대낮의 거리를 활보하는 자유를 비정상으로 취급하는 사회에 대한 공포, 지위에 대한 압박, 월급이 주는 안심, 그리고 인생에 대한 유한 책임. 아마도 그런 것 같다. 아닌지도 모른다. 두고 볼 일이다.

 

309 제주항에서 배를 탔다.

 

309 바다는 내 삶이 추구하는 상징이다. 아이들의 이름 속에 모두 바다를 넣은 것처럼 바다는 나의 미래이다. 그리고 꿈이다. 바다는 늘 늦은 곳을 선택하는 물의 승리이다. 바다는 모든 것을 그 안에 담고도 오직 하나의 색, 푸른빛을 유지하고 있다. 똥과 오줌, 신다 버린 신발, 동물의 시체, 어부인 남편을 잃은 부인의 눈물, 절망한 사람이 먹다버린 소주병, 부정직한 인간이 밤에 몰래 방류한 폐수, 탐욕스러운 인간이 밤새 퍼먹다 토한 오물을 다 쓸어안고도 푸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바다는 가끔 밑바닥을 뒤집어엎어 스스로를 정화한다. 태풍과 풍랑과 해일과 파도는 바다가 스스로를 정화하는 도구들이다. 바다가 바다일 수 있는 것은 스스로를 새롭게 할 수 있는 능력때문이다. 어찌 배우고 닮고 싶지 않겠는가?  

 

309 꿈은 개인의 삶에 생명을 준다. 꿈을 잃으면 생명의 힘은 해소된다. 그러므로 꿈을 잃은 사람은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다. 꿈은 일상과 유리되지 않은 에너지다. 꿈은 환상과는 다르다. 환상은 일상으로부터 유리된 에너지며, 일상과 만나지 못하므로 개인의 삶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구현하지 못한다. “여과되지 않는 환상을 신의 계시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신경증적 환자들이다.” “유치한 행복에 젖은 사람들과 진정으로 자유로운 무리 사이에는 엄청난 심연이 존재한다.” 나는 이런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311 모든 여행자가 영웅은 아니다. 대개는 필부에 지나지 않는다. 필부는 일상에 매여 사는 사람이다. 일상에 매여 살고 일상 속에서 울고 웃고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세상의 흥망에 책임이 있다. 명나라 말기에 살았던 사람 그래서 만주족의 청나라가 들어서는 것을 볼 수 밖에 없었던 망국의 고증학자 고염무의 말이다. 나는 이 말을 좋아한다. 나의 삶이 이 세상의 흥망과 관계가 있다는 생각이 좋아서다. 내가 필부라는 것을 내 아내도 알고 있고, 내 딸들도 알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세상의 어느 위대한 사람보다도 그들에게는 내가 훨씬 중요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314 공자는 보수와 권위와 구태의연이 아닌 적극성의 상징이다. 그의 본질은 뜻을 세워 공부하고 배운 바를 실천함으로써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노자와 상자는 마음의 평화이다. 물러나 곧 자연이 되어 문화적, 사회적 속박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반문화적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314 공자와 노자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아니고 우리의 삶을 서로 보완하는 한 사람으로 인식될 때, 우리는 세상에 나가서도 자신으로 돌아와서도 자유롭다. 나아가 세상을 바꾸고 돌아와 자신을 바꾸는 것이 자유가 아닐까?

 

315 긴 여행을 통해 가슴 속에 역력했던 산과 강, 바다와 구름, 바람 들은 속세에서 얻은 경험, 유용한 분별력 들과 갈등을 만들어낼 것이다. 나는 속세를 떠난 스님이 아니다. 혹은 사회적 가치에서 자유로운 탈속한 인물도 아니다. 잘 구워진 생선 한 접시에 코를 박고 술 한 병에 취한다. 책이 잘 팔리면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아이들의 일로 즐거워하고 또 고민할 것이다. 그리고 아내가 가는 곳이 어디든 따라가고 싶어하는 아이 같은 노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다. 나는 나아질 것이고 스스로가 더 좋아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바라건대 다른 사람들로부터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싶다. 다른 사람들의 불운과 불행 위에 나의 행복을 쌓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변화라는 주제 속에 내가 담아내고 싶은 인생이다.      

 

후기 자연과 사람 그리고 변화

 

316 24시간이란 아주 긴 시간이다.

 

316 21세기에는 공해로부터 자유로운 나라가 선진국이 될 것이다.

 

318 21세기의 화두는 자연과 사람들이다. 이를 염두에 두지 않는 어떠한 변화도 나는 거부하겠다. 기술이든 돈이든 이데올로기든 그 무엇 때문이든 간에 변화를 통해 자연이 황폐해지고 인간이 서로에게 소외된다면 그것은 부정적 변화다. 삶은 기술이 아니다. 삶은 돈이 아니다. 삶이 이데올로기가 아니라는 것 또한 우리는 잘 안다. 삶은 그 자체로서 중요하다.

 

319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의 내면적인 성찰이 요구된다. “체제에 충실하게 복무하는 평범한 인간들의 무관심에 의해 사회적 죄악이 방조되고 만들어진다는 것을 자각하는 사회야말로 위대한 사회다. 이런 사회는 나아질 수 있다. 올바른 변화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 이때 휴식과 성찰은 소비가 아니라 창조로 인식될 것이다. 지식은 데이터베이스가 아니다. 지식은 곧 사람을 의미한다. 전문적 지식뿐 아니라 그 지식을 오직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서만 사용하려는 가치관과의지를 가진 사람 그 자체를 의미한다. 사람은 쉬고 있을 때와 자신의 내면과 만날 때, 가장 자유로운 정신력을 가지게 된다. 그때 비로소 작은 이해와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다.

 

320 인간이 쉴 수 있는 곳은 자연뿐이다.

 

320 자연에 관하여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변화의 원칙이 있다. 그것은 보존이 곧 혁명이라는 절대절명의 원칙이다. 

 

321 나는 앞으로 휴식의 일환으로 여행을 계속할 것이다. 생각하기 위해서 걸을 것이고 쉬기 위해서 걸을 것이다. 버리기 위해서 떠날 것이고, 힘과 정열을 얻기 위해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시간을 거슬러 오르며, 위대한 정신들을 만날 것이다.

 

321 한 민족이 자신의 역사 속에서 위인을 인식하고 발견하는 방법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장점을 보고 배울 일이다.

 

322 한국의 산수 속에서 한국의 인물을 보고, 그 인물 속에서 그를 길러낸 한국 산수의 힘을 느끼는 것, 이것이 내가 여행이라는 매력적인 휴식을 통해 즐기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휴식을 통해 정신의 지평을 넓혀 가기를 바라고 있다.

 

322 휴식은 자신에게 선사한 따뜻한 시간이다. 자신에게 시간을 주지 않고 어떻게 더 나아질 수 있는가? 왜 우리는 늘 바쁘고 또 다른 사람을 바쁘게 하는가? 바쁜 사람은 바보다….휴식이 게으름이나 소비로 느껴지지 않을 때, 한 사회가 이에 진심으로 공감할 때, 우리는 훨씬 나아진 사회에 살게 된다. 우리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긍정적인 변화인 것이다.

 

사진작가의 말 익숙한 것과의 결별 그리고 떠남과 만남

 

323 내게는 두 사람의 멘토가 있다. 하나는 변신의 필요를 일깨워준 출발의 은인이고 다른 하나는 실행의 방법을 일깨워준 행동의 은인이다. 두 분의 이름을 말해야 한다. 구본형 소장과 태창철강 유재성회장이다. 섣부른 존경을 표현하지 않았던 나는 이들을 진정한 스승으로 삼았다.

 

323 새로운 출발의 기회는 축복이다. 출발이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실천해야 한다…10년이 지난 지금 난 행복하다.

 

323 목소리만 높은 경제경영서나 자기계발서를 쓴 저자의 치우친 확신은 위험하다.

 

324 욕망을 다스리는 것이 곧 경영과 자기계발의 핵심이다 간절한 욕망만 남기고 나머지를 거세시켜 시간을 더하면 원하는 것을 얻게 된다. 필요한 것은 지루한 반복과 연마 그리고 변화의 이유를 지켜야 하는 당위의 힘이다.

 

325 그는 학자풍의 선비를 연상시키고 나는 마초의 모습을 하고 있다.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의식과 행동의 공통점으로 친하다. 그가 나를 거부할 지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다. 다가서는 사람을 매몰차게 밀어낼 성품이 아니란 점을 이미 파악한 탓이다.

 

325 딱딱하고 건조한 동류의 책과 다른 인문학적 향기가 있고 문체가 있었다. 글 잘 쓰는 문인의 과잉된 감정을 절제한 담담함은 힘과 깊이의 양립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325 자기계발의 시작은 인간 속성의 정확한 파악이다. 그는 얄밉게도 정확하게 인간을 꿰뚫어보고 있다.

 

325 훗날 나는 그가 역사학도였다는 것을 알았다. 인류 전체를 관통하는 거시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지엽이 아닌 통합의 사고는 당연했다.

 

326 만나던 날의 설렘을 모를 것이다. 존경의 인물은 의외로 부드럽고 따뜻했다. 연희동의 한 음식점에서 코가 매캐할 정도로 삭힌 홍어를 씹으며 평소의 흠모와 애정을 고백했다. 대낮부터 소주잔을 기울인 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정체 모르는 나와 함께 일을 해도 좋다는 확신이 든 듯했다.  

 

327 다행히 구본형 선생의 강렬한 선동에 속아 무작정 바다에 뛰어들었다.

 

327 난 변화와 개혁에 성공했다. 이젠 과거의 안정과 얄팍한 자부심이 그립지 않다. 스스로 얻은 밥으로 세상을 살고 있는 맛이 더 좋다. 발목을 붙잡고 억압했던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328 후학의 이점은 선학의 발자국을 더듬어 참고하는 연유다. 설사 틀리더라도 손해볼일은 없다. 이것저것 보는 동안 방향은 더욱 선명해질 테니. 희망을 말하는 이는 허튼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328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는다. 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번 출발하면 되돌릴 수 없어 나아간다. 나간 길은 다음이 궁금해 끝을 보게 된다. 인간 구본형의 치밀한 여행 가이드는 이래서 모두에게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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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2 (No.14) 하워드 가드너[열정과 기질]북스넷-9기 서은경 file 서은경 2013.07.15 3616
1271 열정과 기질/ 하워드 가드너 file [1] 오미경 2013.07.15 4789
1270 [7월 3주] 열정과 기질_하워드 가드너 (박진희) file [1] 라비나비 2013.07.15 2430
1269 [그림책] 괴물들이 사는 나라 / 고 녀석 맛있겠다 한정화 2013.07.20 12192
1268 (No.13-1) 두번읽기1: 고운기 [삼국유사]현암사-9기 서은경 file 서은경 2013.07.21 2724
1267 (No13-1) 두번읽기2: 고운기[삼국유사]현암사-9기 서은경 [2] 서은경 2013.07.21 2565
1266 #12. 사기열전(두번읽기) / 사마천 file 쭌영 2013.07.22 3634
1265 두번 읽기_사마천 사기열전 file 유형선 2013.07.22 3131
1264 #12. 두 번 읽기 - 사기열전(상) - 사마천,민음사 [1] 땟쑤나무 2013.07.22 3349
1263 (No14-2)두번읽기-사마천 사기열전1 file [2] 오미경 2013.07.22 7841
1262 <사기열전> 사마천 지음 ( 2회 읽기 ) file jeiwai 2013.07.22 2902
1261 [7월 4주차] 사기열전 1_ 두번읽기 file 라비나비 2013.07.22 2447
1260 살인자의 기억법 - 김영하 한정화 2013.07.27 4625
1259 [2-9] 더 보스, 쿨한 동행 - 구본형 콩두 2013.08.01 8539
1258 [2-14] (소설) 허삼관 매혈기- 위화 한정화 2013.08.07 3188
» [2-10] 떠남과 만남 - 구본형 콩두 2013.08.08 3246
1256 [2-11] 마흔 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 구본형 콩두 2013.08.11 2423
1255 [2-12] 낯선 곳에서의 아침 - 구본형 콩두 2013.08.12 4418
1254 [2-15] 농가월령가 - 정학유 타오 한정화 2013.08.13 4155
1253 #14,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file 쭌영 2013.08.19 4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