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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10일 00시 26분 등록

J에게 : "연애를 만화로 배웠어요" 

요즘 '00을 만화로 배웠어요'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 말을 할 때마다 나는 쑥스러움에 속으로 웃는다. '연애를 책으로 배웠어요.'라는 말처럼 우스운 이야기가 있을까? 저저번주 교회에서 설교에 목사님은 젊은 청춘남녀의 짝짓기 프로그램을 이야기했다. 그날은 특집으로 모태솔로들만을 모았다고 한다. 연애를 책으로 배운 사람의 모습을 이야기해 주었다. 왜 모태솔로인지 알겠더라라고 말하면서, 책으로 배울 수 없는 게 사랑이라고 설교했다. 물론 신의 사랑은 책으로가 아니라 직접 그 순간순간 느끼며 경험하는 것이라고 말하려고 그 얘기를 꺼내신 것이다. 자기 삶에서 살아있는 신을 만나는 것을 자기 삶에 실체로 있는 이성친구를 빗대어서 얘기했었다. 내가 연애를 만화로 배웠어요라고 하는 건 그 모태솔로들이 하는 소리하고 같다. 

난 친구들이랑 이야기하다가 '00을 만화로 배웠어요'라곤 말하곤 했다. 아니, 지금도 한다. 그게 얼마나 우스운 이야기인지 알면서도 그게 나한테는 진실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나는 그 만화라는 걸로라도 접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연애를 직접 해봤다면 더 좋았을 껄. 만화로 노래를 배우기 전에 그냥 노래를 듣고 불렀으면 좋았을 껄. 그걸 누가 모르나, 가끔은 그런게 안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팝송을 듣기 전에 먼저 만화로 주인공이 그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에, 그 가사가 멋지더라라는 그 느낌에 끌려서 음악을 찾아서 듣게 되었다. 만화로 '퀸'을 들었다. 엊그제 '모든 영혼의 울림'이란 강좌에서 작곡가 선생님이 오페라 '토스카'를 이야기하는데, 나는 그것 또한 만화로 배웠다. <닥터 스바루>라고 하는 만화에서 오페라 스토리를 보았다. 주인공이 엑스트라로 그 오페라에 출연했기에 줄거리가 나왔다. <천일야화>를 보면서 오페라 '투란도트'를 알게 되었다. 내가 만화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오페라를 접할 수 있었겠냐. 

열대어 구피에 대한 것도 만화로 배웠다. 만화 <호문쿠루스>에서 주인공이 첫번째로 만난 사람의 내면의 모습, 그 사람의 아바타가 '구피'다. 

지금 사는 이곳으로 이사를 하고서는 만화를 보지 않았다. 집근처에 만화 비디오 대여점이 없다. 언덕을 하나 넘어 아파트 단지 앞에 가야 하나 있다. 일부러 거기까지 가기가 귀찮아서, 그리고 이제는 만화를 끊을 때도 되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만화를 좀 멀리했었다. 며칠 전 밤에는 미치도록 만화가 보고 싶었다. 너무나 무더운 밤이고,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뭔가가 집중하지 않고는 어떻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집중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만화를 정기적으로 보기 시작한 건 순전히 잠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잠이 오지 않아서. 


야근을 하고, 낮에 자다보니 밤에 잠이 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너도 그랬지? 난 식구들과 같이사는 너와는 달리, 비번인 날 낮에 깨어 있어야 했을 때도 천천히 흐르고 혼자 보내야 했던 그 시간들이 많아서였던 것 같다. 밖에 혼자 지내면서 내게 주어진 많은 시간을 혼자 보내야 한다는 것. 또 그것과 더불어서 내가 이야기와 그림을 모두 좋아한다는 것. 그것들만이 만화와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 계기였을까? 난 그 이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본다. 만화의 세계보다는 실체를 두려워하는 것도 한몫 했고, 실체를 접하기가 어려울만치 내 삶의 범위가 좁았던 것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내 프로세스에 영화관, 체육관, 도서관보다 가까이 있는 게 그 대여점이란 것이어서 그랬기도 했다. 그리고 만화 속에는 만화가가 만들어 놓은 세상이 하나씩 존재하니까, 나는 하고 많은 시간을 그 세상 속에 빠져서 지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만화가 통로가 되어서 중요한 것들을 하나씩 접해 나갔던 것이 아닐까. 만화 속 세상에 빠져서 실컷 놀다가 거기서 뭔가 하나씩 건져 나왔던 게 아닐까. 그래서 자꾸 다음 번에도 그 세계로 들어간 게 아닐까 한다. 그건 마치 시계 토끼를 따라 갔다가 이상한 나라로 들어갔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앨리스처럼 다음번에도 그 토끼를 따라가는 거지. 

나는 역시 만화로 세상을 배웠다라는 말이 쑥스럽지만, 나는 요즘은 그걸 나를 놀리는 말로 써먹곤 한다. 생각만해도 웃음이 난다. '만화로 팝을 들었어요.' '만화로 음악을 배웠어요.' '만화로 장강의 도도함을 알았어요.' '만화로 7가지 죄악에 대해서 배웠어요.' 만화로 기타를 투닝할 때는 소리굽쇠를 쓰고 그건 '라'는 것도 배웠지. 내가 기타를 한번도 튕겨보지 못한 사람이라도 만화는 그걸 알려주더라. 만화는 내게 그런 것이었다. 난 정말이지 만화 말고는 세상에 대해서 배우는 적당한 통로를 열어 놓지 못한 것 같다. 누구 하나 내 삶에 적극적으로 들어오길 머뭇 거릴 때 나는 만화 속 세계 먼저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 세계에선 열대어 구피에 대한 것도, 우주여행 꿈도, 기계의 작동원리도, 인간이 왜 로봇과 다른지도, 사업을 할 때는 영수증을 잘 챙겨야 하는지, 왜 남자 아이들이 힘이 센 영웅들에 열광하는지, 드래곤볼이 스토리와는 상관없는 야한 장면을 제일 타킷 독자들을 사로잡기 위해 그랬다는 것도 '바쿠만'이란 만화를 보면서 알았다. 만화는 요즘 애들이 폭력이나 담배에 얼마나 무감각한지도 일러준다. 만화는 여자를 예쁘게 그릴려면 어떤 포즈로 그려야 하는지도 알려준다. 


그런데, 그게 다 뭐냐? 내게 구피가 무슨 소용이고, 장강이 뭐고, 팬티컷이 뭐고, 투란도트가 뭐냐? 

'연애를 만화로 배웠어요.' 그게 뭐야? 


그런 것들이 지금도 중요한가? 

IP *.39.14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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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0 08:37:12 *.153.23.18

그림과 이야기를 모두 좋아하는 사람이 계속 만화를 보게 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지 않습니까?

끊지 마세요. 끊긴 왜 끊습니까? 금연, 금주 따라 금만화할 건 아닌듯해요.

하긴 난다씨 어쿠스틱 라이프를 사다 읽다보니

'만화가가 된 뒤 가장 좋은 점은 서점에서 만화를 대량 구입하고, 집에서 만화만 줄창 봐도 남들이 뭐라고 입대지 않는 점'이라더군요.

그리고 그 취미를 더 활활 태우도록 불싸지르세요.

모르긴 해도 가 볼만한 만화 박물관, 만화축제......부천에는 만화단지가 있댔는데 말입니다.

이런 게 많을 것 같아요. 만화가들과 만나고, 어쩌면 정화님이 만화를 그리게 될 수도 있구요,

정화님과 같이 만화 좀 보고 싶어요. 저는요.  

만화 끊지 마세요. 정화님. 만화로 연애를 배우든, 만화로 사랑을 배우든, 만화로 세상살이를 배우든 뭔 상관이랍니까?

만화가 있어서 다행이지 않습니까?

(아, 근데 저 왜 이리 흥분한답니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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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0 13:48:39 *.11.178.163
콩두님은 모닝페이지와 절을 끊으시면 안돼요. 전 만화를 꾸준히 볼랍니다. ㅋㅋㅋㅋ '경제고등학교 세실고'가 아직 완결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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