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경(旦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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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서 돌아오니 폭염과 함께, 그간 쌓인 집안일이 나를 기다린다. 피곤한 해외 여행 일정을 소화하고 집에 돌아올 때면 자동적으로 소망하는 게 한 가지 있다. 걸레질이 잘된 거실 마루 바닥에 누워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푹 쉬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런 소망은 내 것일 수 없다는 것을.
일주일 집을 비운 사이 이번에도 예외없이 집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여행을 떠나 있는 동안 나는 집안 일을 100% 잊는다. 어쩌면 그렇게 집안일을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는지 스스로도 신기하다. 아마도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을 인솔하면서 스스로 여행을 즐기기까지 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오랜 경험을 통해 두뇌가 먼저 알고 신통하게도 '자동 망각 프로그램'을 내 안에 장착해주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엉망인 집을 보면서 짜증을 내지 않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다. 나 없는 일주일을 아이들도 나름의 희생을 감내했다는 것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일일히 그 점을 떠올리는 것이다. 집에 있는 두 아이 중 첫째는 그 어느 때보다 바쁜 방학을 보내고 있다. 아무 것도 안하고 탱자탱자하는 것을 가장 큰 인생의 낙으로 삼던 아이가 졸업을 앞두고 마지막 학년을 보내며 마음이 달라졌다. 코너에 몰리면 누구나 위기감으로 바짝 긴장하게 돼있다. 아이는 내가 잔소리를 할 때는 꿈쩍도 안하더니 이제는 자청해서 노래와 연기 레슨을 받으며 토익까지 공부하고 있다. 나 없는 동안 잠 많은 녀석이 혼자 시간 맟춰 서울까지 먼 길을 오가느라 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더구나 동해(우리집 강아지) 똥 치우고 밥주는 일 뿐 아니라 늘어난 새 식구 PYG(새끼고양이)를 돌보는 일까지 혼자 책임지느라 애를 많이 썼을 것이다. 둘째 역시 아르바이트하랴, 공방 다니랴, 새로 시작한 토플 공부와 기타(우성군의 기타강습에 등록했다)까지, 몸이 두개라도 모자랄 방학을 보내고 있다. 재주는 좋은데 요령만 바라고 그 어느 것에도 열심을 내지 않던 이 아이 역시 올 방학에는 다각도로 도전을 좀 받고 있는 낌새다.
그런 아이들에게 집안 일까지 잘하길 기대하는 건 지나친 욕심이다. 그래도 아이들은 가끔 밥도 해먹고 평소에는 절대 하지 않는 음식물 분리 수거까지 해가며 나름 잘 지내주지 않았나. 늘어놓은 옷과 물건들로 오솔길을 내야할 지경으로 방이 지저분한 건 나의 문제이지 그들의 문제는 아니다. 그애들은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고 있다. 잔소리를 늘어놓아봤자 힘든 건 나 뿐이다.
아무도 없는 집안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미친 듯 반겨주는 건 언제나 7년차 우리집 강아지 동해다. 문을 열기도 전에 내 기척을 알아차리고 사정없이 짖어대기 시작한다. 그러나 동해를 안아주면서도 내 눈길은 집 안으로 향한다. 사실 집 떠나 있는 동안 가장 궁금하고 보고 싶었던 건 '삐야기'(PYG)였다. 삐야기는 3주전 길에서 데려다 가까스로 살려낸 새끼고양이다. 한참 이쁜 짓을 하던 녀석 모습이 몽골에 있는 동안에도 눈에 삼삼했었다. 나 없는 일 주일 동안 얼마나 변했을지 궁금한데 녀석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의아했다.
'삐야기, 삐야기~'
아무리 불러도 녀석, 대답이 없다. 동해가 해꼬지를 할 까봐 첫째가 제 방에 PYG를 가둬두고 나간 모양이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 다시
'삐야기, 삐야기~'하고 부르자 책상 구석에 놓인 제 집에서 자던 녀석이 목소리를 알아듣고 바로 '냐옹~냐옹~' 반응을 보인다. 더 커진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날 바라보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이제는 사물이 정확히 보이는 모양이다. 접혔던 귀도 그새 활짝 펴져서 세배쯤 커 보인다. 늠름한 귀 때문인지 애기 티를 많이 벗었다. 더이상 '애기'라고 하기엔 일주일 새 너무 커버린 것이다. 이 녀석 이제 몸을 세우더니 20센티도 넘는 제집 턱을 가볍게 넘어 내게로 온다. 다리까지 곧추 세우고 아장아장 달려온다. '어머, 어머~' 감탄이 내 입에서 쉴새없이 터진다.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모양이다. 미치겠다. 얼른 분유를 타서 녀석을 품에 안는다. 품에 안고 젖을 먹이는 즐거움은 짐승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이빨이 이제는 선연하게 올라와서 모두 자리를 잡았고 젖 빠는 힘도 몰라보게 좋아졌다.
저녁에 집에 돌아온 첫째는 그동안 PYG 돌본 경험을 끝도 없이 늘어놓는다. 목소리에 자부심이 가득하다. 쓰레기 봉지에 버려져 죽어가는 PYG를 발견하고 응급실에 데려가 치료를 시켜준 녀석이다. 그애의 자비심과 PYG의 생존 본능이 PYG를 살렸다. 그 이후 그애는 자연스럽게 PYG 엄마가 되었다.
'엄마, PYG가 보고 싶어서 집에 빨리 오게 되는 거 있지.'
'네가 제대로 엄마가 되었구나.'
'그 뿐만이 아니야. 날마다 새로운 걸 하나씩 보여주는삐야기를 보면서 맨날 감탄해. 어느날은 갑자기 제 집을 훌쩍 넘어 나오더니 혹시 몰라 만들어준 배변 상자로 가서 오줌을 싸는 거야. 그리고 두 발로 모래를 파서 덮는 거 있지. 나는 그런게 서서히 일어나는 일인줄 알았어. 그런데 어느날 느닷없이 일어나는 거야. 그리고 그런 걸 모두 엄마에게서 배우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때가 되면 제가 알아서 그 모든 걸 다 하는 거야. 너무 신기해. 이제는 잠은 덜 자고 나랑 노는 걸 더 좋아해. 고양이는 사람이 너무 만지면 싫어한다는데, 이 녀석은 내가 만져주는 걸 너무 좋아해. 정말 다행이야. 엄마 없이 자라서 불쌍하긴 한데 첨부터 우리랑 자라서 개냥이(개와고양이의좋은점을합한)가 된 게 오히려 좋아. 내가 있으면 내 옆에서 자려고 하는데, 내가 잊고 있으면 놀다가 혼자 제 집에 들어가 잔다. 신기하지.'
'그러게 이젠 애기가 아니야. 엄마 없는 동안 총각이 다 됬어. 엄마도 PYG가 그새 이렇게 큰 걸 보니 너무 신기해.'
'나 PYG 때문에 인생을 새로 배우고 있어.'
이 대목에서 내 눈이 크게 떠진다. 나를 가장 애태우던 녀석이, 네 놈 중에서 내 인내를 가장 크게 요구했던 녀석이 그런 말을 하니 당연하다.
'그으래?'
'일주일의 힘이 정말 놀라운 거 있지. PYG를 보니까 일주일이란 시간이 엄청난 거였어. PYG에 비하면 나는 시간 개념이 없어도 너무 없었던 거지. 일주일이 그렇게 위대한 시간인지 몰랐어. 맘 먹으면 시간이 우리에게 그토록 엄청난 걸 가져다줄 수 있는데, 난 몰랐던 거지. PYG가 나한테 그걸 가르쳐준거야.'
'그래 맞다. 일주일이 PYG에게는 애기에서 총각으로 변신하는 엄청난 시간이었다.'
'엄마,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PYG는 크고 있어. 오늘은 깡총깡총 두발을 함께 모아 뛰는 걸 새로 보여주더니 이것봐, 부드럽던 혓바닥도 이제는 껄끄러워졌어. 느껴지지?'
'그러네.'
일주일의 힘, 그 힘을 나는 아이의 고백을 통해 역으로 배운다. PYG가 기적을 매일 만들어내던 그 일주일, 우리는 몽골이라는 나라에 있었다. 머문 곳은 두 곳이지만, 이동이 적은 시간에 비해 많은 해프닝이 있었고, 우리들 안에 다양한 통찰이 일어났다. 새로운 환경에서 우리 역시 날마다 기적을 체험하며 일주일을 보낸 것이다.
여행에 대한 기대와 의미는 각자 달랐을 것이지만, 모두에게 짧은 일주일의 시간이 결코 짧지만은 않은 시간이었길 진심으로 바란다. 이질적인 생각과 시각이 우리 안에 들어와 기존의 것들과 잘 섞여 질적인 화학변화를 일으켰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하여 우리 삶이 어제보다는 오늘 조금 더 확장되었기를 바란다. PYG를 돌보는 우리 아이의 목소리에 자부심이 가득한 것처럼 내 안에서도 이 여행을 기획한 자로서의 자부심이 절로 솟아오르길 바란다.
이제는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우리 안에 남긴 흔적들을 반추하며 내면화해야할 시간이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너무 덥고 끈적거린다. 머리 속에 오가는 많은 생각과 여행의 여운을 빨리 정리해야하는데, 에어컨 없는 집에서 열과 싸우는 일은 피흘림없는 전투나 다름없다.
토요일 4시쯤 집에 도착해 그날 하루 그리고 어제 하루 밀린 집안 일을 하고 시장을 보고 또 대청소를 하며 더위와 일대 전쟁을 벌였다. 전신에는 사정없이 땀이 흐르고 머릿 속도 예외는 아니었다.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하는 동안, 아니 에너지를 써야하는 모든 일을 하는 동안 엄청한 땀의 댓가가 요구되었다. 줄줄 흐르는 땀을 그대로 느끼며 노동에 몰입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땀이 많이 흐를수록 내 안에서 희열도 그만큼 많이 솟아났다. 드디어 먼지 한 점 없는 마루 바닥에 몸을 누일 수 있게 되었다. 휴식을 하기엔 여전히 덥지만, 투입한 노동 대비 정직하게 말끔해진 집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이미 휴식의 시작이다.
오늘은 몽골 여행기의 한 챕터를 완성하는 것이 목표다. 먼저 시간 순서대로 일기처럼 일어난 일들을 적어보려 한다. 멋진 풍광 속에서 매일 아침 모닝페이지를 쓰려던 계획은 틀어졌다. 광고해서 같이 쓰려고 했는데, 그러지 않기를 잘했다. 사실 매일 밤 잠이 부족했다. 오직 이틀만 잠을 좀 잤고, 그럴 때만 다음날 이른 아침 노트를 들고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흡수골 호수는 도착하는 순간, 아주 조금만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래서 좀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하루 하루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고, 그때마다 합하는 감탄이 일어났다. 흡수골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시간과 함께 온 몸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아직도 여행의 여운은 내 안의 세포 곳곳에 숨어 있다. 싱싱한 언어가 퇴색하기 전에 얼른 그 시간들을 붙잡아두어야하는데...
제가 운영하는 모닝페이지 카페에 오래 글을 올리지 못해 그 부담감으로 일기같은 글 한편 올렸는데
다쓰고 나니 이곳에도 올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역시 여기에 글을 오래 올리지 못한 부담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몽골 여행기를 적어내려가기 전의 손풀기 쯤으로 봐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같은 여행이지만 각자가 가진 기대와 부여한 의미에 따라 다른 여행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9기 여러분과, 함께 했던 연구원 여러분들의 여행 칼럼 기다리겠습니다.
같은 여행을 다르게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건 언제나 저에게 흥미로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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