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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2월 25일 15시 53분 등록
여성동아(2000. 1)-권두 에세이
목욕시켜 분발라 놓은 아기는 예쁘다. 부드럽고 탱탱한 하얀 살에서 나는 냄새는 정말 좋다. 아기가 웃으면 엄마의 넋은 햇빛처럼 황홀하다. 그런 아기를 둘쯤 키워내고, 큰 아이가 징징거리기 시작하면 이미 서른의 중반이 넘어선다. 이 때가되면 삶은 정오를 넘어 땅에 제 모습을 투영하는 음영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아침에 허둥지둥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들 옷 입혀 유아원이나 학교로 보내
고 나서 잠시 눈을 부치고 일어나면 덩그마니 혼자 집에 남아있다. 멀거니
누워 천장을 쳐다보면 지금 왜 내가 여기 이렇게 누워있나 하는 생각이 물밀
듯 밀려온다.

아이들을 잘 키운다는 것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은
지금까지 여자들의 몫이었다. 어머니의 역할을 하는 동안 여자들은 남자들 보
다 사회적 경제적으로 얻은 것이 적다. 세상 일의 2/3은 여자들이 한다. 그
러나 여자들에게 돌아가는 보상은 세상 남자들에게 지불되는 모든 급여의 1/10
에 지나지 않는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부(富)의 99/100는 남자들 소유로
등록되어 있다. 여자 이름으로 되어있는 것은 오직 1/100 밖에 되지 않는다
고 한다.

어쩌면 아이들 때문에 계속하고 싶었던 학업을 포기하거나 연기하게 되었는
지도 모른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어야할 지도 모른다. 혼자 혹은 남편과
여기저기 마음 내키는 대로 떠돌던 자유를 잃게 했을 지도 모른다. 비록 많은
기회를 잃었지만 아이들 기저귀를 갈고, 머리를 빗기고, 먹을 것을 만들어 주
고, 함께 놀아주고 공부를 도와주며 보낸 몇 년만큼 여자들에게 행복한 시기는
없어 보인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피그말리온(Pygmalion)이라는 청년이 등장한다. 그는
여자는 결점 투성이라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 것을 결심한다. 그는 조각가였다.
언젠가 상아로 아름다운 여인상을 조각한 적이 있었다. 자신의 여인상이 너무
아름다워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제물을 바치
고 상아 처녀와 같은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다. 그의 마
음을 읽은 여신은 상아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다. 조각상은 그대로
살아 있는 여인이 되었다. 쉴러는 피그말리온의 기쁨을 시로 지었다.
...
그때 빛나는 자연도 나를 위하여 있었고
은빛 산개울도 노래로 가득찼으며 수목과 장미도 서로의 느낌을 나누더라
...
쉴러의 '이상과 생명' ( The Ideal and the Life) 중에서

아이는 상아로 만든 조각품이 아니다. 어머니의 피가 흐르는 살아있는 또
하나의 당신이다. 정성을 다하여 기원하고, 그 기원이 이루어지기 위해 어머니
는 무엇이든지 다할 준비가 되어있다. 정성을 다한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정성을 다함 속에는 내면적 절제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아이
의 삶은 어머니의 삶이 아니며, 오직 자신의 세계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떠나가는 존재들이다. 초등학교를 마칠 때 쯤이면 그들은 이미 자
신의 세계를 찾아 떠나간다. 원시사회에서는 그래서 통과의례(rites of
passage)가 중요하다. 태어나고, 이름을 갖고, 성년이되고, 결혼하고 죽는 의식
들이 그 중요성을 상징해 준다. 통과 의례의 핵심은 과거로 부터의 심각한 단
절을 의미한다. 어머니로부터 떠나가지 못하는 아이는 여전히 유아일 뿐이다.
결코 어른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떠나가야 하고 어머니는 놓아 주어야한다.
그래서 한 시인은 말한다.

오래 흔들렸으므로 너는 아름답다.
오래 서러웠으므로 너는 아름답다.
....
- 구 광본, 오래 흔들렸으므로 -


좋은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아이들이 헤맬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 준다는 것
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어머니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의 냄새를 맡도록 도와주
는 것이다. 자신의 삶이 비어 있는 어머니, 아이들에 대한 희생 밖에는 가지
고 있지 않은 어머니는 초라하다. 사회적으로 아무런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던
시대에 살았던 대다수의 우리들의 어머니들이 그러했다.

나에게는 꿈이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아이들을 자유롭게 놓아두고 싶다는
것이다. 9월 들꽃이 핀 풀밭을 지나는 섬세한 바람 같기를 바란다. 때로는 커
다란 나무도 흔드는 격정 같은 힘센 바람이었으면 한다. 바다를 지나는 푸른
바람이며, 꽃을 지나는 그윽한 향기이길 바란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어떤 때는 스스로를 못살게 구는 회오리바람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언젠가 나는 풍광이 좋은 서울의 교외에 작은 집을 하나 지어 살고 싶다.
그리고 방 하나는 늘 비워두고 싶다. 작은 침대와 작은 책상 하나를 놓아두고
싶다. 아이들이 언제고 회오리바람이 되어 힘들 때, 이 곳에 찾아와 잠시 쉰
후, 숲을 지나는 초록빛 바람이 되어 다시 자신으로 돌아 갈 수 있게 하기 위
하여.

아이들을 자유롭게 놓아 둔다는 것은 자신이 아이들로부터 자유로워 지는 것
을 의미한다. 사랑함으로 매어있고, 매어있음으로 배타적이다. 배타적 희생은
강요하거나 집착한다. 아이들에 대해 가장 보수적인 사람들은 그래서 대개 그
부모들이다. 이 대목이 바로 모든 부모가 빠지기 쉬운 오류의 늪이다. 좋은
부모가 된다는 것은 아이들에 대해 가능한 객관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렵지만 부모가 되어도 역시 배워야하고 스스로를 수양해야한다.

좋은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좋은 여자가 된다는 것과 같다. 자신의 삶을 가
지고 있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여자도 그렇고 남자도 그렇다. 아이를 사랑
하며, 또 아이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그 아이들이 웬만큼 커져 손이 덜 가게
되면 하게될 일을 준비하는 것은 그러므로 현명한 일이다. 이것은 단순한 취
미를 찾아낸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남은 인생을 걸 단 한가지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이루는 작업이다. 어려서부터 진심으로 하고 싶었지만 어찌 어찌하
여 못했던 일을 찾아 시작하는 것이다.

새로운 도전에 성공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두 가지 있다. 그 첫 번
째는 자신의 내면에 머무는 에너지를 끄집어내기 위한 암시와 주문(呪文)이다.
아이들이 아직 뱃속에 있을 때는 엄마와 한 몸이다. 엄마와 아이는 분리되지
않는다. 세상에 나올 때 아이가 보인 첫 번 째 반응은 울음이다. 왜 울음일
까 ? 어머니로부터 분리된다는 불안과 걱정 때문이다. 그래서 운다. 분리되
지 않고는 탄생할 수 없다. 탄생이 곧 울음인 이유이다. 이러한 단절과 울음
은 아이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어머니에게도 필요하다. 아이에게 바라고
있는 일은 어쩌면 자기 스스로 이루지 못한 것일 수 있다. 아이가 커서 의사
가 되고 판사가 되기를 바라는가 ? 그것이 스스로에게 바라고 있던 일이었는
가 ? 만일 아니라면, 그런대도 아이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면, 당신은
불행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피가 흐르고 있는 그 아이는 그
일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닐 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회적 통념이 모든 것을
지배하게 만들면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가장
취약한 사회이며 절대로 비전이 없다. 아이에게는 아이의 세계가 있다. 이
때 당신이 아이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바로 당신이 당신 스스로
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며, 자신의 꿈을 이룬 사람이 되었다는 점이다. 삶을
통해 삶을 보여준 선배는 존경스럽다. 아이에게 좋은 선배가 되는 것은 좋은
어머니의 조건이다. "내 일생을 건 프로젝트에 착수하여 성공하면, 내 아이도
자신의 삶에 성공할 것이다." 이것은 어머니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주술
이다.

이 때 기억해야할 점이 하나 있다. 여자들이 어머니의 역할 외에 스스로의
일을 가지고 자신들을 사회와 연결시키기는 남자보다 상대적으로 더 어렵다.
익숙하지도 않고 기회가 많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자에게 가장
큰 벽은 스스로를 여자로 규정하는 내면적 함몰에 있다. '나는 여자니까'라는
물러섬이 또한 지금의 사회적 좌표를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불평등은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여자로 길러졌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설득력이 있는 대목이다.

이미 다가 온 지식사회에서는 여자가 남자 보다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다.
남자는 잘라내고 떼어 낸 다음 그 조각 하나 하나에 생각을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단계적 사고(step thinking)에 익숙하다. 그러나 여자는 거
미줄 사고(Web-thinking)에 보다 적합하기 때문에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병
행하여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음식을 하면서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또 함께 숙제도 할 수 있으며, 노래도 들을 수 있다. 말하자면 다면
적으로 사고하고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멀티 테스킹
(multi-tasking)에 능하다는 것이다. 네트워크의 사회는 그렇다면 여자에게 유
리한 사회이다. 인간의 정신적 산물이 가장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사회, 소프
트웨어가 강조되는 사회, 인터넷을 통해 사업의 방법이 혁명적으로 바뀌고 있
는 사회에서 여성적 특성은 커다란 장점을 가지고 있다. 여자이기 때문에 불
리한 것이 아니라 여자이기 때문에 유리한 사회로의 이행이 눈에 보인다. 중
요한 것은 여자들 자신이 이 이행을 주도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미국 흑인의 인권이 아직도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흑인의 해방이 백인에 의해
이루어 졌다는 점에 있다. 여자들이 가지는 사회적 경제적 부상이 여자들에
의해 이루어질 때 당당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두 번 째는 하루의 시간을 조금 씩 헐어 준비하는 것이다. 시간은 적어도
두 가지 중요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시점이고 하나는 시간의 길이이
다. 우리는 자신의 혁명을 위해 지금 시작할 수도 있고, 언젠가 적당한 때에
시작하리라고 유보해 둘 수도 있다. 미루는 사람은 대개 무덤에 가서야
후회한다. 중요한 일은 지금 시작해야한다. 변화에 성공하는 사람은 몇가지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지금을 절박한 상황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능력이다. 절실한 사람은 지금 시작할 수 있고, 시작함으로 변화 속에
실제로 자신을 던져 넣을 수 있다.

시간은 솔직하다. 투여된 시간의 길이가 차이를 만들어 낸다. 열망하고 또
그 일을 잘 할 수 있는 재능이 주어져 있다면, 성과는 시간의 길이에 비례한다.
하루에 한 시간도 좋고, 두 시간도 좋다. 자신에게 시간을 내주어야만 자신
을 들여다보고, 숨은 욕망을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오래도록 묻혀져있던 상
대적으로 우월한 자신의 재능을 발견해 낼 수 있다. 아주 오래 된 사진을 보
듯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라. 거기에 아직 죽지 않은 꿈이 서성이고 있을
것이다. 그의 손을 잡아 밖으로 데리고 나오라. 매일 한 두 시간 그와 더불어
지내다 보면, 언젠가 그 꿈이 현실이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영원히 같이
있게 될 것이다.

아이들은 떠나간다. 등을 돌리고 떠나가야 자신의 세계에 도착할 수 있다.
그들은 늘 미래에 속하는 존재들이다. 어머니들 역시 아이들에 매어있지 않기
를 바란다. 아이들이 배우고자 한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 도
와주는 것이 좋다. 그러나 그 아이들에게 쓸 돈을 남겨 주기 위해 자신의 인
생을 소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자신에게도 그렇고 사회에도 바람직하
지 않다. 무리와 부정은 바로 이런 어리석음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어
머니는 자신의 삶을 좋아했다'는 것 보다 더 훌륭한 유산은 없다.

나는 아이들이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를 바란다. 어머니가 그들을 도와 줄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발견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세상을 이
해하고 또 세상을 만들어 가게하고 싶다면 어머니 자신의 삶이 그래야 한다.
IP *.208.14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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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5 19:24:45 *.212.217.154

자신의 아이를 올바른 하나의 인격체로 키워낸다는 것.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 내는것 만큼의 사랑과 노력이 필요하겠지요.


모든 남성, 여성이 '여자'인 어머니가 없이 존제할 수 없듯이

'여성' 이란 어쩜 생명 그 자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런 여성들이 차별받고 두려워 하는 사회가 아닌,

자신의 삶을 더욱 긍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가

정말 건전한 사회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그런 밝은 미래를 우리 다음 세대에 돌려주어야 하겠지요,

앞으로 여성적 가치가 지배하게 될 아름다운 미래를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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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5 12:57:38 *.212.217.154

작용과 반작용.


최근의 여권의 신장과 더불어,

여혐이나, 한남 같은 젠더혐오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졌습니다.


세상이 변화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는

당연히 이곳 저곳에서 파열음과 성장통이 터져나오기 마련이지요.


계급 차별, 인종 차별, 신분 차별 등등,

예전의 불합리한 관행들이 그러했듯이

큰 흐름으로 본다면 사회는 결국은 진보의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그 혼란스러움 속에서

여성의 가치, 그리고 남성의 가치가

서로 부딛쳐 싸우지 않는

조화로이 어우러져 함께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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