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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19일 01시 39분 등록

. 저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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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웨더포드 (Jack Weatherford)

그는 컬럼비아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많이 없지만 영특하고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또한 그의 문학과 사회 인류학에 대한 관심은 그의 학윈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1967년 사우스 캐럴라이나 대학을 졸업하였고, 1972년 사우스 캐럴라이나 대학에서 사회학 석사 학위를 받고, 1973년에 인류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77년에는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리고 현재는 미네소타 주 매칼래스터 대학교 인류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그는 일관되게 인류학과 사회학에 대한 관심을 가져왔고 뚜렷한 발자취를 남겨왔다.

 

부족민 연구 전문가로 활동했던 웨더포드는 어느날 비단길과 세계 교역의 역사에서 부족민이 차지하는 역활을 연구하던 중 칭기스 칸과 몽골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다. 하지만 소련의 문화말살 정책으로 인하여 몽골에 대한 접근할 수 있는 자료가 너무나 제한적이였다. 이때 웨더포드는 큰 결심을 한다. 마침 몽골의 개방정책과 맞물려 직접 발로 뛰면서 몽골의 문화를 이해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핍박받고 살았던 몽골 학자들과 15년간을 같이 발로 뛰면서 몽골을 이해한다.

 

8년 동안은 몽골의 옛 중심지를 답사하고 중국 베이징의 자금성부터 중앙아시아를 거쳐 이스탄불의 토프카피 궁전에 이르기까지 발굴현장과 도서관을 찾아다니면서 자료를 수집한다. 그리고 마침내 1988년 공개되지 않았던 칭기스 칸의 고향 부르칸 칼둔을 방문하게 된다. 서구 학자로는 최초로 칭기스 칸의 고향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800년 간 금지된 구역이였던 이곳에서 그는 칭기스 칸이 살던 지형과 이곳의 습성, 문화를 통해 칭기스칸을 더 이해하게 된다. 그 뒤에도 칭기스 칸을 더 생생히 체험하기 위해 해마다, 계절마다 이 곳을 방문하는 노력을 기울인다.

 

또 몽골 왕가의 비밀서책 몽골비사를 해석해 나가면서 마침내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뭉골 문화를 이해하게 된다. 몽골비사는 칭기스칸의 22대 조상 부르테 치노에서부터 칭기스칸의 셋째 아들 오고타이때까지를 기록한 역사서였다. 그리고 거의 유일하게 칭기스 칸의 어린시절을 담고 있으며, 신화로 남은 그의 인간적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 몽골비사를 번역하고 이해하는 작업과 함께 칭기스칸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 당시를 생생히 재현해 내고 있다. 이처럼 칭기스 칸의 유목민 생활과 이동 경로를 추측하는 고생스러운 탐사 과정은 그의 책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리고 그의 책은 2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몽골 문화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아 2007년에 몽골 대통령으로부터 몽골 최고의 훈장인 북극성 훈장을 받았다.

 

무엇보다 그의 책은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가학적이고 파괴적이기만 했던 몽골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해주었다. 그의 풍부한 탐사와 탄탄한 자료는 그의 주장을 더욱 견고하게 해주었다. 이제 우리는 불행했던 한 사나이가 어떻게 유럽까지 이르는 방대한 제국을 이루었고, 우리 인류사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볼 수 있게 되었다.

 

한국에 출판, 번역된 잭 웨더포드의 책들

2005,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사계절

2005, 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이론과 실천

2009, 돈 상식사전, 길벗

2012, 칭기스 칸의 딸들, 제국을 경영하다, 책과 함께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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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귀한 왕의 이름은 칭기스 칸이었으니 그는 당대에 큰 명성을 떨쳐 어느 지역 어느 곳에도 만사에 그렇게 뛰어난 군주는 없었다. –제프리 초서, ‘켄터베리 이야기

 

14, 몽골군은 25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로마군이 400년 동안 정복한 것보다 많은 땅과 사람을 정복했다.

 

15, 오늘날 세계 인구의 다수가 한때 몽골이 점령했던 나라에 살고 있다. 현대 지도에서 칭기스 칸이 정복한 땅은 30개구이며 인구로는 30억이 훨씬 넘는다.

 

16, 칭기스 칸의 제국은 주위의 많은 문명을 연결하고 융합하여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어냈다.

 

16, 몽골은 부와 보물을 축적하는 제국이 아니었다. 대신 칭기스칸은 전투에서 얻은 물자를 널리 분배하여 다시 상업적 유통망으로 들어가게 했다.

 

20, 몽골인은 과학기술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열지도 않았고, 새로운 종교를 만들지도 않았고, 책이나 연극도 거의 쓰지 않았으며, 세상에 새로운 작물이나 영농기술을 내놓지도 않았다. 몽골의 장인은 직물을 짜지도 못하고, 금속을 주조하지도 못하고, 도기를 만들지도 못하고, 심지어 빵을 굽지도 못했다. 그들은 자기나 도기를 제작하지도 않았고, 그림을 그리지도 않았고, 건물을 짓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군대는 여러 문화를 차례차례 정복하면서 이 모든 기술을 모아 이 문명에서 저 문명으로 전해주었다.

 

21, 몽골인은 정복자로서 지구를 휩쓸었지만, 문화의 전달자 역활에서도 달리 경쟁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24, 칭기스 칸의 초상이나 몽골의 기록이 없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자기 멋대로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나서 50년이 지나기 전에는 아무도 감히 그의 모습을 그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33, 책은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장소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39,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다니면 한 사람 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개인이다.

 

59, 몽골족에게 싸움이란 진짜 전쟁이나 지속적인 분쟁이라기보다 생계를 위한 일상적인 약탈에 가까웠다. 복수도 약탈의 구실이 되곤 했지만, 진짜 동기가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전투에서 이기면 약탈품을 가지고 와서 가족이나 친구와 나누었고, 나누는 물자의 규모에 따라 승자의 위신이 달라졌다.

 

66, 안다(의형제)는 자유롭게 상대를 택하기 때문에 피를 나눈 형제들보다 유대가 더 강했다. 자무카는 테무진이 평생 얻은 유일한 안다였다.

 

72, 훗날 테무진은 혈연적 유대가 아니라 자신에게 보여주는 태도와 행동을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게 되는데, 이것은 초원 사회에서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79, 부르칸 칼둔의 숲에 숨은 테무진은 그의 평생을 좌우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80, 전통적ㅇㅇ으로 남자만 매는 허리띠는 몽골 남자의 정체성의 핵심이었다. 테무진이 이런 식으로 허리띠를 푼다는 것은 자신의 힘을 제거하여 주위의 신들 앞에 무력한 모습을 드러내겠다는 뜻이었다.

 

84, 그러나 인생에서 흔히 그렇듯이 어떤 문제의 답은 다른 문제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88, 1181년 초여름 밤 두 청년 사이에 벌어진 균열은 이후 20년 동안 몰골의 중요한 전사로 성장한 두 사람 사이의 전쟁으로 발전했으며, 결국 두 사람은 불구대천의 원수 사이가 되었다.

 

90, 사람의 재능을 평가하고 혈통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과제를 부여한 것은 테무진 칸의 핵심적 업적으로 꼽을 수 있다.

 

92, 전투에서는 졌지만 자무카의 잔임함을 두려워하게 된 몽골 대중의 지지와 동정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테무진의 전사들은 참패했지만 다시 그들의 젊은 칸 뒤에 천천히 모여들게 된다.

 

96, 그는 이 아이들 전체를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인 것과 똑같이 정복당한 사람들 전체를 자신의 부족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에게도 미래의 정복에 참여하여 번영을 함께 나눌 기회를 준 것이다.

 

97, 유목민은 게르가 남쪽을 향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입구 깊숙이 남쪽 태양의 빛과 온기가 들어올 뿐 아니라 차가운 북풍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 물을 마주하기를 바라지만 너무 가까운 것을 원치 않는다. 걸어서 30분 정도 떨어져 있어야 인간의 폐기물이 물을 심하게 더럽히는 것을 막을 수 있다.

 

101, 목 부상 사건을 보면 테무진에게 깊은 의리에 기초한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초원 부족들은 조금만 자극을 받아도 편을 바꾸었고 병사들은 지도자를 버렸지만, 테무진이 전사로서 활동한 60년 동안 장군들 가운데 그를 버린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또 테무진 역시 장군을 벌하거나 장군에게 해를 준 적이 없었다.

 

118, 테무진은 여러 가지 작전을 짜놓았으며, 각 전사들은 그것을 알아야 했고, 명령대로 정확하게 주저없이 움직여야 했다. 몽골군에게는 이런 말이 있었다. “그가 나를 불로 보내건 물로 보내건 나는 간다. 그를 위해 간다.” 이것은 새로운 몽골군의 이상을 보여주는 말이 아니라 현실 그대로를 반영하는 말이었으며, 이 힘에 나이만은 곧 무너지고 말았다.

 

119, 테무진은 자무카와 적대 관계였지만, 그럼에도 다른 무엇보다도 의리를 높이 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무카를 데려온 사람들에게 상을 주는 대신, 그들이 배반한 지도자 앞에서 모두 처형해버렸다.

 

119, 태무진은 이제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자무카에게 복수를 하지 않고 오히려 다시 그와 힘을 합치려 한다. “우리 동무가 되자. 이제 다시 힘을 합쳐 잊었던 일들을 서로에게 일깨워주자. 서로를 잠에서 깨워주자. 그대는 멀리 있을 때에도, 나와 떨어져 있을 때에도, 여전히 행운과 축복을 잃지 않은 나의 형제였다. 물론 죽고 죽이던 시절에는 그대의 명치와 심장이 나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 물론 베이고 베던 시절에는 그대의 가슴과 심장이 나때문에 고통을 겪었다.”

 

121, 그는 자신보다 우위에 선 사람의 권위는 잘 견디지를 못했다. 그는 집안을 다스리려는 벡테르를 죽였다. 부인을 데려간 메르키트족을 죽였다. 아버지를 죽이고 몽골족을 초원의 쥐처럼 경멸한 타타르족을 주경ㅆ다. 그는 자신이 속한 몽골족의 귀족을 타도했으며, 타이치우드와 주르킨 등 상위의 몽골 씨족들을 하나씩 없었다. 자신의 동맹자이자 의부가 양가의 혼인을 허락하지 않자 의부와 그의 부족을 없애 버렸다. 나이만 왕비가 몽골족을 열등하다고 비웃자 이 부족을 공격하여 그녀의 남편을 죽이고 그녀는 자신의 부하에게 부인으로 주어버렸다. 마지막으로 테무진은 그가 평생 가장 사랑한 사람 가운데 하나인 자무카를 죽였고, 그것으로 귀족적인 자다란 씨족은 완전히 사라졌다.

 

122, 테무진 자신은 구르 칸이나 타양 칸 같은 예전의 부족적 칭호를 거부하고 대신 칭기스 칸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아마 그의 부하들이 이미 그 전부터 이 칭호를 사용했왔을 것이다.

 

126, 칭기스 칸의 첫 번째 새로운 법은 여자의 납치를 금지하는 내용이었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자신의 부인 부르테의 납치 경험에서 나온 것이 거의 틀림없다.

 

126, 칭기스 칸은 납치 금지와 더불어 몽골인을 노예로 삼는 것도 금지했다. 그는 타이치우드에게 잡혀 노예가 되었던 경험 때문에 노예로 강제 노동을 하는 고통을 직접 체험하기도 했으며, 이것이 전체 사회 구조에 해를 주고 부족들 간에 강한 적대감과 폭력을 낳는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129, 제국 전체를 다스리기 위해,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새로 생긴 많은 법률들을 기록하고 이제 그가 통치하게 된 광대한 땅에 그 법을 시행하기 위해, 칭기스 칸은 문자체계를 도입했다.

 

131, 칭기스 칸은 평화와 번영이 그 나름의 문제를 낳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6년간 평화가 지속되자 음모와 자잘한 경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니 평화가 그런 분위기를 조장하는 면도 있었다.

 

135, 칭기스 칸은 통제할 수 없는 것은 파괴했다. 그는 자신의 친척딀의 권력을 박탈했으며, 귀족 가문과 모든 경쟁하는 칸을 말살했고, 예전의 부족들을 없앴으며, 사람들을 재배치했고, 마지막으로 초원에서 가장 강력한 샤먼을 죽이는 것을 허락했다.

 

150, 병사들은 오늘날 초원지대에서 망르 타고 다니는 무리처럼 작은 무리를 이루어 말을 타고 다니면서 노래를 자주 불렀다. 몽골 병사들은 고향, 여자, 전투 등 병사들이 흔히 소재로 삼는 노래를 불렀을 뿐만 아니라 법이나 행동 규칙도 노래로 만들어 불렀다. 이런 내용들 역시 모두가 암기할 수 있도록 곡조를 붙여놓았기 때문이다.

 

152, 몽골군은 뛰어난 선전 능력을 보여주었다.

 

153, 몽골의 승리는 작은 무리를 지어 다니던 유목민이 수천 년 동안 다져온 단결과 규율에서 나온 것이며, 지도자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154, 몽골군은 전투에서 명예를 찾는 것이 아니라 승리에서 명예를 찾았다. 그들의 모든 원정의 목표는 오직 하나, 완전한 승리였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전술을 쓰든 상관없었다. 어떻게 싸우든 또 어떻게 싸움을 피하든 문제가 되지 않았다. 교묘한 기만책으로 이기든 잔인한 책략으로 이기든 이긴 것은 이긴 것이었으며, 전사들의 몽맹에는 아무런 오점이 남지 않았다.

 

157, 정찰, 조직, 선전이 다 우리어지고 마침내 공격할 때가 왔을 때 몽골군은 가능한 한 큰 혼란을 일으키고 파괴를 하려고 노력했다.

 

159, 결국 여름이면 원정을 거의 중단하고 군대와 말 대부분이 비교적 가까운 내몽골의 높고 시원한 초지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162, 그들은 마지막 남은 황동 단추 하나, 은 조각 하나까지 정확한 공식에 따라 나누었다. 그 공식은 칸에게 가는 10퍼센트에서 고아나 과부에게 가는 일정한 몫까지 빈틈없이 규정하고 있었다.

 

176, 몽골군은 항복하는 자들에게는 정의를 약속하고, 저항하는 자들에게는 파괴를 맹세했다. 주민이 친족 관계 제안에 화답하여 진짜 친척처럼 식량을 제공하면 몽골군은 그들을 가족 구성원으로 여겨 보호해주고 가족의 기본적인 권리를 부여했다. 물론 거부하면 적으로 상대했다.

 

177, 몽골 전사들은 적대적인 도시에서 약탈을 시작하기 전에 늘 비슷한 절차를 밟았다. 우선 병사들을 죽였다. … 몽골 장교들은 병사들을 처형한 다음에 사무관들을 보내 민간인을 직업에 따라 나누었다. …직없이 없는 사람들은 따로 모아 다음 도시 공격에 이용했다. 이들은 짐을 나르거나, 요새 공사에서 땅을 파거나, 인간 방패 역활을 하거나, 해자를 메우는 등 몽골군의 전쟁을 위한 자신의 목숨을 내주어야 했다. 몽골 전사들은 이런 일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죽여서 버리고 갔다.

 

179, 몽골군은 귀족을 죽임으로써 적의 사회 체제를 무너뜨렸고, 나아가서 미래의 저항 가능성을 최소화했다. 일부 도시는 귀족이 전장에서 죽고 그 가족이 몰사을 당한 뒤에 사회를 재건할 힘을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다.

 

181, 칭기스 칸이 승리를 거둘 때마다 새로운 선전물이 홍수처럼 퍼져나갔다. 더불어 칭기스 칸의 불패 신화도 퍼져나갔다. 시간의 거리를 두고 안전한 곳에서 들으면 터무니없게 들릴 이야기들이지만, 당시 중앙아시아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184, 이 시대의 문명화된 군대가 공포를 자아내는 행동을 하는 것과 비교할 때 몽골군의 행동은 잔인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이 공포를 자아낸 것은 특별히 잔혹해서가 아니라, 정복이 매우 빠르고 능률적이었으며 부자나 권력자의 목숨을 경멸했기 때문이다.

 

185, 칭기스 칸은 큰 어려움이 있거나 개인적인 고통에 직면하면 전투로 힘든 순간을 돌파했다. 슬퍼하지 말고 죽여라. 그는 괴로운 슬픔을 바미안 골짜기 사람들에 대한 큰 분노로 바꾸었다.

 

186, 칭기스 칸은 주민 살육자라기보다는 도시 파괴자라고 묘사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는 복수를 하거나 공포심을 자아내는 목적 외에 전략적인 목적에서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193, 칭기스 칸은 평생 친척을 불신하고 젊은 시절부터 함께 지내온 동료나 친구들에게만 의지했기 때문에 자식들이 사이좋게 지내도록 돕지 못했으며 그들을 자신의 후계자로 훈련시키지도 못했다.

 

194, 그는 오랫동안 자식들 교육을 태만히 하다가 한번에 모든것을 가르치려 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배운 교훈들, 또 머릿속에는 있지만 입밖에 낸 적이 없는 생각들을 분명하게 표현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는 명령을 내리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지 설명을 하는 데 익숙한 사람은 아니었다.

 

195, 어떤 생각은 다른 생각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195, 그는 자식들에게 나라를 정복하는 것은 군대를 정복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의 가장 중요한 교훈으로 꼽힌다. 군대는 전술과 전력만 우월하면 정복할 수 있다. 그러나 나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만 정복할 수 있다.

 

195, 호수 건너편에서 정복한 사람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통치해야 한다.

 

198, 아니면 자신의 제국은 끊임없는 정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개달았는지도 모른다. 그가 멈추면 왕실 내의 파벌주의가 제국을 갈가리 찢어버릴지도 몰랐다. 아마 그의 민족이 외부 물자의 꾸준한 유입에 의존하여 살아가게 되었다는 점이 훨씬 더 큰 압박 요인이었을 것이다.

 

199, 칭기스 칸은 여섯 달 뒤 탕구트 원정의 최종 승리를 불과 며칠 남겨놓고 죽었다. ‘몽골 비사는 그가 여름이 끝날 때 죽었다고 분명히 밝혀 놓았다.

 

202, 그는 자신이 역사상 다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하러 남쪽으로 갔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는 큰 일을 추진하고 있었다. ‘전 세계를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시키는 일이었다. 그는 이제 부족의 족장이 아니었다. 그는 해가 뜨는 곳에서부터 해가 지는 곳까지 모든 사람과 모든 땅의 통치자가 되려 했다.

 

202, 18세기 영국의 위대한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간결하게 말했다. 칭기스 칸은 천수를 누리고 영광이 최고에 이른 상태에서 죽었으며, 마지막 숨을 내쉬면서 자식들에게 중국 제국 정복을 완수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몽골인이 칭기스 칸의 바람과 명령을 이루려면 할 일이 아직 많았다.

 

205, 망르 타고 통치하는 것, 즉 권력의 중심이 옮겨다니는 것이야말로 몽골 성공의 제1요인으로 꼽을 만한 것이었다. 우구데이가 짧은 치세에 저지른 몇 가지 실수 가운데 첫 번째가 이 정책을 버리고 권력 중심과 제국의 행정부를 고정시키려 했다는 점이었다.

 

221, 몽골은 늘 똑같은 방식을 따랐다. 어떤 영토를 원정할 때면 먼저 공식 사절을 보내, 항복하여 몽골 가족에 합류하고 대칸의 봉신이 될 것을 요구한다. 상대가 동의를 하면 사절은 새로운 봉신을 적으로부터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할 뿐 아니라, 권력과 신앙을 유지하는 것도 허용했다. 다만 속국은 이런 보호의 대가로 모든 재산과 물자의 10퍼센트를 몽골에 조공으로 바쳐야 했다. 그러나 항복 제안을 받아들이는 도시는 거의 없었다.

 

240, 몽골의 남자들이 전장에 머물며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느라 바쁠 때 여자들은 제국을 운영했다. 유목 부족의 여자는 전통적으로 집안일을 관리했으며, 남자는 가축을 돌보고, 사냥을 하고, 싸우러 나갔다.

 

252, 뭉케는 진지한 사람으로 우구데이처럼 경박하지도 않았고 구육처럼 무모하지도 않았다. 그는 황금 가족의 구성원들 가운데는 거의 유일하게 알코올의 파괴적인 힘에 굴복하지 않았던 사람이기도 하다.

 

260, 상업의 세계에서조차 아직 지폐 거래에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뭉케는 화폐체계의 신뢰성과 무결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276, 몽골 제국은 뭉케 칸 치세에 가장 넓은 땅을 차지했다. 뭉케는 칭기스 칸의 후손 가운데 몽골 제국 전체로부터 대칸으로 인정받은 마지막 칸이었다.

 

277, 뭉케의 형제들은 가끔 원정에 나서기는 했지만 외부의 적고 싸우기 보다는 서로 싸우는 데 힘을 기울였다.

 

281, 카라코룸은 불과 30년 동안 몽골 제국의 수도 역활을 한 뒤, 몽골인 자신의 손에 의해 약탈을 당하고 파괴되어버렸다. 쿠빌라이의 명령이었다. 그러나 짧은 기간이기는 했지만 카라코룸은 세계의 중심이고 축이었다.

 

285, 결국 쿠빌라이는 할아버지가 야만적인 힘으로 이루지 못했던 과업, 즉 지상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중국 전체를 정복하고 통일하는 과업을 대중정치를 통해 이룰 수 있었다. .. 그는 중국인보다, 적어도 송나라 사람보다는 더 중국인처럼 보임으로써 중국을 통제할 수 있었다.

 

287, 쿠빌라이는 새로운 왕조의 황제이자 창건자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중국화하려 했다. 중국 백성이 자신을 받아들일 만한 사람, 나아가서 매혹적인 사람으로 여기게 하려는 것이었다.

 

298, 몽골인은 유교나 전족같은 일부 중국 문화는 일관되게 거부했다. 그러나 화폐제도를 세련되게 닫듬은 것을 보면 중국 문화의 다른 측면들은 옾이 평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쿠빌라이는 실용적 가치가 있는 사상이나 제도를 찾아 오래 전 중국 역사까지 뒤지는 사람이었다.

 

316, 몽골 정복의 시대는 끝이 났지만 몽골 평화의 시대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훗날 서구 학자들은 국제적으로 평화와 번영이 확대되어가는 엄청난 변화를 인정하여 14세기를 팍스 몽골리카또는 팍스 타타리카라고 명명했다.

 

323, 그러나 몽골은 상인을 강도보다 겨우 한 단계 높은 지위에 놓는 중국의 문화적 편견을 정면으로 공격하여 상인의 지위를 모든 종교와 직업보다 높은 자리로 격상했다. 상인보다 높은 지위는 이제 정부 관리밖에 없었다. 대신 중국 전통사회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했던 유교 학자들은 아홉 번째 지위로 낮추었다. 거지보다는 높지만 매춘부보다는 하나 낮은 등급이었다.

 

333, 유럽은 몽골의 직접 지배를 받은 적은 없지만 여러 면에서 몽골의 세계체제로부터 가장 많은 이득을 얻었다. 유럽인은 몽골 정복이라는 댁4ㅏ를 치르지 않고도 교역, 기술 이전, ‘세계 인식의 대전환에 따른 모든 혜택을 입었다.

 

353, 간신히 몽골로 돌아온 사람들은 전과 다름없이 목가적인 유목민 생활을 계속했다. 1211년부터 1368년까지 중국을 다스렸음에도, 그저 남쪽 여름 숙영지에서 조금 오래 머물다 온 듯이 다시 옛날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360, 볼테르는 프랑스를 투사한 몽골이 모든 사악한 것을 대표하게 만들어놓았다. 다른 작가들 역시 금세 볼테르를 따라 몽골을 셰게의 악의 상징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그 결과 몽골은 고아범위한 문학적, 학문적 공격의 피해자가 되었다.

 

365, 르네상스와 몽골 제국의 시대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칭기스 칸은 인간 역사에서 가장 낮은 수준으로까지 격하되었다. 근대 유럽은 새로 발견한 식민지 정복의 힘과 스스로 내세운 세계 지배의 임무 때문에 아시아의 정복자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기독교 식민주의자나 공산주의 인민위원을 가릴 것 ㅇ벗이 유럽인은 아시아인을 칭기스 칸과 몽골의 무리가 남긴 유산, 즉 야만적 독재와 처참한 미개 상태로부터 구해내려 했다.

 

365, 유럽 과학자나 정치가들과는 정반대로 이 이데올로기의 피해자인 아시아의 지식인과 활동가들은 칭기스 칸에게서 새로운 영웅을 발견했다. 인도에서 일본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새로운 세대의 아이사인은 유럽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소망 때문에 칭기스 칸과 몽골에서 아시아 최고의 정복자를 보았다. 이것은 유럽의 우월성이라는 교조를 반박하는 생생한 증거였다.

 

371, 칭기스 칸이 태어나고 나서 800년이 지난 1960년대 무렵 공산주의자들이 보관하던 술데, 즉 영기가 사라졌다. .. 그럼에도 일각에서는 술데가 어느 지하실이나 폐쇄된 방에 먼지가 쌓인 채 방치되어 있다가, 언젠가 다시 나타나 몽골인을 이끌어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고 있다.

 

372, 유목 문화와 도시 문화의 충돌은 칭기스 칸에게서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로는 한 번도 그때 수준으로 올라간 적이 없다. 문명은 부족민을 세계의 가장자리로 더 멀리 내몰았다.

 

379, 사실 그들은 여전히 황금 빛의 자식들이며, 이리와 암사슴의 후손이다. 몽골의 영원한 푸른 하늘의 성긴 구름 사이로 칭기스 칸의 영기는 지금도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424, 만일 독자가 역사라는 시줄에 인류학적 에세이라는 날줄이 교직된 이 묵직한 옷감에서 언뜻 땀 냄새를 맡았다면, 그것은 저자가 몽골 현지에서 흘린 땀의 향기라고 믿어도 무방하다.

 

424, 당시만 해도 유럽은 몽골의 입장에서 보자면 가져갈 것이 없어서 건드리지 않은 궁핍한 땅이었다. 따라서 높은 수준의 문물을 자랑하던 아랍은 몽골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은 반면, 유럽은 피해는 보지 않고 몽골이 뚫어놓은 길로 들어오는 문명의 혜택만 입었으며, 이것이 유럽이 주도하는 이른바 근대 셰게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 웨더포드의 지적이다. 몽골인이 몰고 온 머나먼 아시아 북부 초원의 차갑고 상쾌한 바람에 유럽이 오랜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저자가 15년에 걸쳐 억압받던 몽골 역사학자들과 함께 직접 몽골에 방문하여 기록한 책이다. 역자 말대로 발로쓴책인 것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목적은 지금까지 알려져 있던 몽골의 잘못된 이미지를 개선하는데 있다. 특히 유럽이나 서방권에서 아시아를 통치하기 위한 목적과 과거의 정복당한 수치를 없애기 위해서 조작되어진 기억들을 하나하나씩 바로잡는데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공로로 뭉골에서 최고 훈장을 받기도 한다.

 

인류학자, 역사학자로써 저자의 이러한 작업물은 새롭게 몽골을 세계에 알리고, 몽골인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흥미롭지만 알기 어려웠던 칭기스 칸에 대해서도 더 친근하고 인간적으로 다가설 수 있게 해주었다.

 

책은 크게 3가지 챕터로 나뉜다. 1부에서는 칭기스칸의 일대기를 재미있게 서술한다. 칭키스칸의 탄생과 그의 힘들었던 유년시절을 객관적으로 그린다. ‘몽골비사의 도움도 크게 었었다. 그리고 그가 권력을 잡고 몽골 유목민을 통합하는 장면을 그린다. 2부에서는 몽골의 세계 정복을 담고 있다. 칭기스칸이 죽고 나서 그의 자식들과 손자들이 어떻게 중국과 멀리 유럽까지 차지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몽골이 세계사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3부에서는 칭기스 칸의 손자 쿠빌라이가 원나라를 세워 칭기스 칸의 유언이었던 중국을 통치하게 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머리말-사라진 정복자

 

1-초원의 공포정치

1, 핏덩어리

2, 세 개의 강

3, 칸들의 전쟁

 

2-몽골 세계대전

4, 황금 칸에게 침을 뱉다

5, 술탄과 칸의 대결

6, 유럽 원정대

7, 왕비들의 싸움

 

3-셰게 인식의 대전환

8, 쿠빌라이 칸의 새로운 몽골 제국

9, 팍스 몽골리카

10, 환상의 제국

 

맺음말-영원한 푸른 하늘, 칭기스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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