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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19일 06시 12분 등록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9기 연구원 번외 1주차(김대수)

칭기즈 칸 (한길사,1999)”

 

1. 저자소개

* 라인홀트 노이만 호디츠(Reinhold Neumann-Hoditz, 1926년생)는 하이델베르크와 함부르크에서 동유럽 언어와 슬라브학을 전공했다. 12년간 외교부 편집장으로 근무했고, 모스크바에서 라디오 통신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함부르크에 거주하며 자유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기자로서 많은 여행을 하면서 저자는 칭기즈 칸과 그 후손들의 발자취를 추적했다. 1966년 그는 아시아에 대한 자신의 보도를 출간했다. 『중국의 은밀한 전선』(Chinas heimliche Fronten)이라는 책이다. 그리고 로볼트 출판사의 로로로 시리즈 가운데 『호치민』, 『솔제니친』, 『흐루시초프』, 『표트르 대제』, 『예카테리나 여제』, 『이반 4세』를 썼다.

 

2.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칭기즈 칸의 평가에 대한 견해 충돌

1. 러시아의 애국자인 이 예술가(바실리 베레슈차긴)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언젠가 문명화된 세계를 위태롭게 했고, 러시아뿐 아니라 많은 다른 나라와 민족들을 제압했던 동방의 정복자였다.(9)

2. 칭기즈 칸은 흔히 냉혹한 정복자이자 신의 채찍으로서 역사에 기록되었다.(9)

3. 러시아인들의 극복하기 힘든 역사적 상처, 즉 몽골에 의한 200년에 걸친 점령(타타르 압제)은 바로 이 제국의 건국자인 칭기즈 칸에게서 시작된다. (9)

4. 중국의 역사 기술에 따르자면 수백 년 동안 계속해서 중국으로 침략해 들어왔던 타타르족과 몽골족은 중국에 신선한 피를 수혈해주었던 것이다.(10)

5. 그렇다면 현대 몽골인들은 자신들의 잊을 수 없는 과거의 영웅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까? 이 문제에 대해 명백하게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칭기즈 칸이 작가들의 환상을 통해 가공되었을 뿐 아니라, 역사가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광활한 바다 같은지배자의 영향력이 이념가들의 목적 성취를 위한 수단이 됨으로써, 결국 몽골 민족을 지배하는 공산주의자들의 견해 충돌 속에서 그 역사의 윤곽이 지워졌기 때문이다.(10)

6. 이러한 상황(러시아와 중국의 영향을 받는 외몽골과 내몽골의 분리)은 상반된 정치적 위치와 관련된, 역사적이며 동시에 현실적인 충돌로 이어졌다. 이 충돌은 러시아와 중국의 힘 겨루기, 즉 서로 다른 방법으로 자신들의몽골을 선전하는 두 국가의 이념적 분열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또한 몽골인들 사이의 정치적인 입장 차이는 칭기즈 칸의 민족 의식적 유산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갈등을 반영하고 있다.(11)

7. 칭기즈 칸이 그의 등장 초기, 분리된 몽골의 분파들을 통합하려 애씀으로써 긍정적인 역할을 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후 그가 행사한 영향력은 전반적으로 지극히 반동적이었고, 낯선 나라들을 점령하는 쪽으로 작용했다. 그는 속국들의 민중에 대해 대량 학살을 자행했고, 그들이 만들어냈던 물질적, 문화적 가치들을 파괴했다. 칭기즈 칸의 약탈 전쟁은 결국 몽골 자체의 생산적인 힘을 퇴보시켰고, 몽골 민중을 무시무시한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다.(13)

8. “중국에서는 몇몇 역사적인 사건들의 성격과 학문적인 평가를 왜곡하려는 시도가 벌어졌다. 예를 들면 최근 중국 역사가들은 칭기즈 칸의 피비린내 나는 약탈 원정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왜 중국은 몽골족의 지배와 만주족의 비재에 대하여 새로운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는가? 왜 하필이면 현 시점에 와서 고집스럽게 몽골족, 만주족, 한족의 종족간의 통일, 국가적인 통일을 부각시키려 하는가? 이런 모든 것이 경제 발전이라는, 현재의 내무, 외교 정책상 중심 과제에 기인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여기서 더도 덜도 아니고 바로 깊이 감추어져 있는 영토 문제들에 주목해야 한다.”(14) – 러시아 당 선전선동부 의장인 레오니드 일리초프의 964 6  비판

9. 학자들은 중국 역사에 대한 칭기즈 칸의 정치적 영향력을 긍정적으로 인정한다. 그들의 언급에 따르면 칭기즈 칸은 경쟁 관계에 있는 몽골 부족들을 하나로 만들면서 분열된 중국의 통합에 간접적으로 기여했다. …… 중국은 몽골족을 중국을 형성한 여러 민족들 중 하나로 여기고 있고, 따라서 칭기즈 칸은 중국 소수 민족의 수장이라는 주장인 것이다.(16)

10. 서양의 몽골학자들은 현재 서양인의 척도를 가지고 그 정복자를 자리매김해서는 안 될 것임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칭기즈 칸은 초원의 원칙에  순응했고, 유목민과 정착 문화 민족 사이의 영원한 싸움의 법칙에 순응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저항하는 자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파괴했지만, 스스로 항복하는 적들에게는 관용을 베풀었다.(16~17)

11. 한편으로는 무력과 파괴,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애 대한 개방적  자세와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의 관용, 이런 모습으로 칭기즈 칸과 그의  후예들은 잔혹한 침략 전쟁을 이끌어갔고, 그럼으로써 여러 다양한 민족들의 물질적, 문화적 교류에 장애가 되었던 장벽들을 허물었다.(17)

12. 이후(몽골족의 세기) 극동 아시아는 또다시 경직되었다. (문화적) 중심 제국이었던 중국은 자기만으로 만족했고, 외부 세계에 대해 벽을 쳤다. 칭기즈 칸에 의해 시도되었던 유라시아 통합은 깨어졌다. 국가들을 연결했던 통로는 망각 속으로 파묻혔다. 그리고 이제 바다 너머로 진출하기 시작한 유럽인들이 세계를, 즉 그들의 시장을 정복했다.(18)

몽골비사

13. 자신의 삶이 다해감을 느꼈을 때, 오고타이는 몽골의 역사, 칭기즈 칸의 가문이 시조로부터 전개해온 역사, 그리고 아버지와 자신의 통치 시대에 대해 기술할 것을 명했다. 이 글은 서사시의 성격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칭기즈 칸의 가문과 어린 시절에 대해 값진 정보를 제공한다. 몽골의 모든 전기들은 바로 이 글에 근거하고 있다.(19)

14. 라시드의 공식적인 역사 관찰과 (검열을 거치지 않았던) 몽골비사를 비교해보면 왜 후자가 공공의 눈길로부터 감추어져야 했는지가 분명해진다…… 몽골비사 칭기즈 칸과 그의 추종자들, 그리고 몽골 장군들의 군사적인 성공사례들을 그 겪에 맞게 칭송하기는 했지만, 이 경우 작가는 정복자의 삶에 있어서 불명예가 될 만한 몇몇 행위들에 대해서도 서술을 회피하지 않았다.(21)

신성한 가문

15. 극동 아시아의 부족들에 의해 곤경을 당했던 유럽인들은 몽골인과 타타르인을 구별하지 않았다.(몽골 압제를 곧 타타르 압제로 이해했다.)  - 12세기에 타타르족은 케룰렌 강 남쪽에서 유목 생활을 했고, 그 지역의 가장 야성적이고 전투적인 민족들 중 하나였다. 그들의 영역에서 은이 살출됨으로써  가장 부유한 부족 연맹으로 인정되었다. ( 26)

16. 몽골족은 오르콘 강, 오논 강, 케룰렌 강으로 이루어진 하천 지역에서 유목 생활을 했고, 수많은 독립적인 씨족들(올로스, 즉 통치 영역)로 나누어져 있었다.(26)

17. 이전에도 이미 단일화 시도가 있기는 했지만, 비로소 칭기즈 칸이 목축 부족, 사냥 부족, 어엽 부족, 몽골의 하부 부족과 씨족들, 그리고 투르크-몽골 부족들응ㄹ 한꺼번에 하나로 만드는 일을 이루어냈다.(26)

18. 농작물 재배는 몽골족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거대한 가축 떼의 먹이를 마련해야 하는 타에 이 유목민들은 기름진 초지를 찾아 이곳저곳 옮겨 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26)

19. 몽골의 서쪽과 동쪽 사이에는 예로부터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었고 반목이 상존했다. 동쪽의 민족들은 자신들이 서쪽에 거주하는 민족들보다 우월하다고 느꼈다. 옛 몽골의 도덕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고산 지대인 서쪽은 정지된  상태로 고집스럽게 변화를 거부했기 때문이다.(29)

20. “칭기즈 칸의 시조를 높은 하늘에서 잉태된, 운명적으로 선택된 늑대였다. 그의 배우자는 하얀 암사슴이었다. 그들은 텡기스 호수를  건너왔으며, 보르칸 칼돈 산의 오는 강 발원지를 정착지로 정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바타치칸이라는 이름의 아이를 낳았다.”(30)

21. 몽골 비사의 저자가 대단히 강조하여 작품의 서두에 두었던 이 초자연적인 야이기는 칭기즈 칸 스스로가 자신을 위해 필요로 했던 신화에 걸맞는 것이었으며, 신의 의지에 따라 그가 지상의 여러 나라들을 지배하는 군주로 결정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30)

테무친의 성장기

22. 옛 몽골족은 거칠었다. 바토르 예수게이는 다른 사람의 아내로 결정된 여자를 빼앗아 자신의 아내를 삼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 그는 메르키트 족인 칠레두의 아내 허엘룬을 빼앗아 아내로 삼았다. 허엘룬이 칭기즈 카의 어머니이다. (32)

23. “저 남자들은 당신의 목숨을 원하는 것 같아요. 살아 남게 되면 당신은 다른 처녀, 다른 여인을 얻을 수 있을 거에요. 그녀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더라도 당신은 그녀를 허엘룬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의 목숨을 구하세요! 어서 여기를 피해요. 당신은 이것(웃옷)으로 나의 향기를 맡을 수 있어요.”(33)

24. “ 그 아이(테무친)은 태어날 때 오른손에 복사뼈 크기의 핏덩어리를 들고 있었다.”(34)

25. 테무친은 놀이 친구인 자모카와 특별히 굳건한 우정을 맺었다. 그들은 강이 얼었을 때 빙판 위에서 주사위 놀이를 하면서 의형제를 맺고, 어른들 세계에서 일반적으로 그러듯이 선물을 교환했다. 자모카는 테무친에게 노루 뼈로 만든 주사위를 주고, 동을 부어 만든 주사위를 받았다.(34)

25. (예수게이가 죽은 후) 허엘룬이 조상들에게 드리는 제사 때에 뒷전으로 밀려난 것을 불평하면서 큰 불화가 생겨났다. 키야트족의 친족인 타이치오트족이 주거지를 떠났다. 예수게이의 죽음을 통해 포획물과 전투적인 명성에 대한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37)

26. “테무친과 카사르는 앞뒤에서  과녁을 맞추듯 그(벡테르)를 쏘아 죽이고는 떠나갔다.” 형제 살해는 칭기즈 칸이 역사에 등장하는 신호가 되었다. 테무친은 형제가 자신에게 반기를 들려고 시도했을 때, 계획적으로 냉정하게 그를 살해했던 것이다. 정실이 낳은 장자인 테무친은 자연히 가족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초원의 법칙이었다. (38)

27. 테무친은 자신에게 입지를 제공할 수 있는 군주를 찾아 나설 수 있었다. 테무친은 케레이트의 영주인 토릴을 생각했다.(40)

28. 형제를 살해한 사건 이후 이 일(메르키드 족의 추격에 도주할 때, 부인 버르텔를 위한 말이 없었다는 사실) 은 젊은 칭기즈 칸의 삶에 있어서 새로운 오점이 된다. 가족의 우두머리가 자신의 유일한, 이제 막 아내가 된 여자를 복수의  일념으로 달려드는 적에게 내맡겨버렸던 것이다.(41)

29. 아마 테무친은 절저한 계산 하에 행동한 듯하다. 어머니와 테무친 자신은 죽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분명 그렇지 않았다. 버르테를 남겨놓은 것은 추적자들을 멈추게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계산은 실제로 들어맞았다. 비록 그것은 존귀하다 말할 수 없는 치사한 행동이었지만 테무친은 현실적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자기 자신을 구하는 것이었다.(41)

⇒ 테무친의 아내 버르테는 토릴과 자모카 그리고 테무친의 연합군 4만명의 메르키트족 공격/말살로 자유의 몸이 된다.

칭기즈 칸으로의 등극

30. 테무친은 자기 사람들을 정당하고 관대하게 대한다는 평판을 받고 있었다.(44)

31. 국가를 이끌고 몽골의 통합된 국민을 다스리는 것, 이는 그 당시 칭기즈 칸을 점점 더 사로잡았던 시대적 요구였다.(45)

32. 동년배 친구인 자모카는 테무친 자신과 마찬가지로 커다란 야망을 품고 있었으므로, 테무친의 잠재적인 경쟁자이며 그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다.(45)

33. “우리는 너를 칸으로 봉하고 싶다.” 이런 결정적인 말을 가지고 유력한 족장 세 명이 테무친에게도 향했다.(46)

34. ‘칭기즈라는 표현의 출처와 의미는 완전히 밝혀져 있지 않다. 대개의  학자들은 페리오의  주장을 정설로  받아들인다. 그는 칭기즈가 애양, 바다의 의미를  지닌 터키어 텡기스에서 파생된 말이며, 게다가 이에  상응하는 몽골 단어 달라이가 칭기즈 칸의 후계자들과 정신 세계의 큰 인물들에 대한 칭호가 되었다고(달라이 라마) 주장했다. 대양. 이것은 몽골족의 전설을 품고 있는 거대한 바다, 즉 텡기스(바이칼) 호수인 것이다.(48)

35. 물론 아직 30세가 되지 않은 칭기즈 칸이 이 시점에 벌써 모든 몽골인들의 지배가가 되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 이 칭기즈 칸이 실제로 모든 투르크-몽골 종족의  최고 통치자로서의 위치를 굳힐 때까지는 거의 2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48)

단독  지배를 위한 투쟁

36. (친구 자모카 진영과의 전투에서 패한 후) 칭기즈 칸은 고향으로 도주하여 금 제국에서 도피처를 찾았다. 몽골비사는 정치적, 군사적 상황이 칭기즈 칸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변화된 시점, 즉 금이 타타르에 대한 징벌의 의미로 벌였던 원정(1196년경)에서부터 비로소 다시 시작된다.(51)

37. 금의 편에 서서 출정을 계획했던 타타르가 약탁물 분배를 놓고 반발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금의 군대가 고비 사막을 지나 초원지역까지 타타르를 추격할 때, 자신의 세력을 다시 규합하고 있던 칭기즈 칸은 기회가 다가옴을 느꼈다. 그는 금 황제의 장군이 되었다. (52)

38. 그는 케레이트를 이끄는 토릴과 함께 타타르의 주둔지를 공격하여, 전투중에 타타르의 지도자 메구진을 죽였다.(53)

39. 칭기즈 칸은 비교적 만족스럽지 못한 보답을 받았다. 그는 자오트 코리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국경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는 위임권자였다. 이는 케레이트의 가신과 같은 등급이었다. 금의 황제에게 이 몽골인은 언제나 그 정도 인물로 보였던 것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오트 코리라는 칭호로써 장래 아시아의 맹주가 처음으로 강력한 금 제국의 연감에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위대한 정치로의 진입을 의미하기도 했다.(53)

40. 타타르에게 승리한 이후 곧바로 그는 주르킨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주르킨의 두 지도자인 세체 베키와 타이초는 그의 포로가 되었다.  그들은 즉각적인 경고의  본보기가 되었다.  칭기즈 칸이 직접 이  두 족장의 목을 자르고, 몸뚱이를 초원에 내던졌다. 그것은 법적으로 문제가 있는 처벌이었다. …… 위대한 카볼 칸의 수많은 후예들 중에서 적대적인 지도자가 존재하는 한 칭기즈 칸의 단독 지배는 자기의 씨족, 맹렬한 폭풍내부에서조차 보증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즈르킨 계파의 두 귀족 친적 역시 바로 이러한 적대자들 중 일부였다. 이런 적대자들을 제거함으로써 비로소 칭기즈 칸은 몽골 민족 전체에 대한 지배 권력의 획득을 생각해볼 수 있었으며, 그제야 비로소 가장 강력한 숙적 자모카에게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55)

41. 칭기즈 칸, 토릴, 자모카, 이 세 족장은 12세기말, 13세기초에 몽골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싸움을  벌였다. (57)

 

42. 자지라트의 지도자인 그(자모카)는 나이만, 메르키트, 오이라트, 심지어는 타타르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그들 모두는 칭기즈 칸에 대항하는 형식을 갖춘 연합군을 결성했다. 1201년 그들 초원 부족, 삼림 부족의 대표들은 에르군네 강변에서 집회를 갖고 자모카를 구르 칸으로 추대했다. 구르 칸은 전체의 지배자 혹은 단독 지배자를 의미한다.(58)

43. 칭기즈 칸은 헌신적으로 복종하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 젤메는 칭기즈 칸의 목에 난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빨아내고, 갈증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군주를 위해 한밤중에 적국 타이치오트의 진영으로 숨어 들었다.  그곳에서 그는 우유를 찾아내지 못했지만, 대신 달구지에 놓여 있던 응고 우유 한 접시를 손에 넣었다. 묽게 만든 응고 우유로 그는 군주의 갈증을 가라앉혔다.(58)

44. 개인적인 충성을 대해 칭기즈 칸은 항상 치하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설사 적진에서 행한 이러한 충성이 칸 자신의 이익을 거스리는 것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결과가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이라 하더라도 야비한 배신은 죽음으로 다스렸다.(59)

45. “적을 눌러 이겼을 때 우리는 전리품 곁에 멈춰 서 있지 않는다. 승리가 결정되면 전리품은 우리의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당연히 함께 나누게 될 것이다.”(61)

46. 결혼 계약이 케레이트령에 대한 영향력을 획득하는  데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보였다. 국익을 위한 결혼은 유목민의 세계에서도 역시 앞날을 내다보는 정치의 특효수단이었다.(64)

47. “하늘에는 두 개의 밝은 빛이 있을 수 있다. 해와 달이 있으니. 그러나 지상에 어찌 두 왕이 있을 수 있겠는가? , 우리 그리로 가서 까짓 얼마 안 되는 몽골족을 끌고 오자.” - 자모카가 포함된 나이만의 왕 타얀이 칭기즈 칸에 대한 공격을 결심하면서(68)

48. “그날 밤 나이만은 군대를 일으켜 포위망을 뚫으려 시도했다. 그들은 절벽에서 떨어졌다. 한 사람 뒤로 또 한 사람이 계속 밀려들어서는 한꺼번에 떨어졌다. 처참하게 으깨진 시체들이 쌓였다. 그들은 마치 넘어진 나무들이 널브러져 있는 것처럼 차곡차곡 쌓여 죽었다.”(70)

49. 칭기즈 칸은 승리했다. 그의 인품이 경쟁자들, 적들을 압도했기 때문이었다. 자모카는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몽골족의 다수를 지속적으로 자기 편으로 모으는 데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방인, 즉 나이만과 결탁함으로써 자모카는 몽골족의 이익을 배반했다. 그리고 칭기즈 칸은 그 몽골족이 수호자로 자리를 굳힐 수 있었다.(72)

군사 국가의 발흥

50. 이 시기(1206년 유일한 투르크-몽골족 국가 설립 및 쿠릴타이가 소집되어 군가 국가가 시작되었을 때)에 칭기즈 칸이 자기가 알고 있는 세계 전체를 정복하려 계획했던 징후는 없다. 그가 창설한 군 기구들은 오히려 그의 수하에 놓인 광범위한 궈력 체계 속에서 내부의 적과 외부의 잠재적인 적으로부터 칭기즈 칸 자신의 위치를 굳게 지키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74)

51. 30개 이상의 부족들로 이루어진 300만 인구, 그들 중 순수한몽골인은 40만이었다.(77)

52. 그는 귀족들에게 주거지를 배분한다. 귀족들은 다시 천인 부대의 대장에게 주거지를 정해준다. 그리고 천인 부대 대장은 백인 부대 지도자에게, 또 백인 부대 지도자는 십인 부대 지도자에게……. 그들은 이렇게 정해진 자리에서 정주해야하는 것이다.” 이러한 십진법의 지도 체계는 국가가 중앙집권화되도록 유도할 뿐 아니라, 가능한 한 빠른 명령 전달 체계를 확립했다.(79)

53. 나이만이 사용했던 위구르의 문자는 이제 몽골 전체로 전파되었다.(83)

54. 강도와 약탈은 유목민들의 삶에 있어서 전형적인 것이었고, 부족들 간에 벌어진 끝없는 복수 전쟁의 원인이었다. 강탈과 피의 복수를 종결짓기 위해서 칭기즈 칸은 준엄한 법을 공표했다. 살인, 강도, 간통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이었다. 간통 역시 피의 복수를 부르는 원인이었던 것이다. (86)

국경 너머의 세계

55. 인구가 약 300만명에 달했던 이 제국은 이제 시베리아의 타이가 지역에서 고비-알타이 지역에 이르기까지, 투르키스탄의 문턱에서부터 동쪽 만주 벌판까지, 남에서 북으로 1,500킬로미터, 서에서 동으로 3,000킬로미터에 이르는 대제국으로 발전했다.(91)

56. 술탄 무하메트 2세 알라 앗 딘(1200~1220년 통치)은 칭기즈 칸과 같은 시대를 살아가며 그의 경쟁 상대가 되었으며, 콰레즘을 단 몇 년 사이에 중동 지역의 최강국으로 만들었다.(94)

57. “…… 여진족은 그들의 숙적, 즉 칭기즈 칸에 의해 통일괸 몽골부족들에게 여러 차례 공격을 받았다……. 아시아와 동유럽 민족들에게 비극적이었던 이 시대에 몽골의 군대는 여진족의 문명과 민족 자체를 말살했다.” (101)

만리장성을 넘어

58. 몽골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한 이후 줄곧 칭기즈 칸은 중국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102)

⇒ 몽골의 중국에 대한 침략은 여러모로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군사적으로 몽골군은 안정되어 있어 이웃국가의 침략에 대해 탄력을 받을 수 있었고, 오랫동안 지속된 내무 싸움으로 가축 수가 줄어드는 등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해야만 했다. 또한 유목민의 약탈 욕구와 역사적인 복수심 등이 중국에 대한 침략을 합당하게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59. “칭기즈 칸은 요새를 지키는 장군에게 천 마리의 고양이와 만 마리의 제비를 제공받는 조건으로 포위를 풀겠다고 전했다. 장군은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도시 안의 모든 고양이와 제비를 잡도록 하여 이를 몽골족에게 넘겨줬다. 칸은 모든 고양이와 제비의 꼬리에 천을 묶고 그 천에 불을 붙여 풀어놓으라고 명령했다. 놀란 새는 빠르게 둥지를 찾아 날아갔고, 사나워진 고양이들은 그들이 숨어 지내던 구석으로 몰려갔다…… 금방 도시 곳곳에서 불길이 솟구쳤고, 동시에 몽골군은 총공격을 시작했다.”(103)

60. 물론 칭기즈 칸의 기본 원칙은 결코 전군을 한 전투에 투입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그는 이전의 기마 유목민들, 그리고 훈족과 차이를 보인다.) (108)

61. 양의 해인 1211 3월 케룰렌 강가에서 새로운 제국 의회가 소집되었다.  그는 중국 원정을 타당하게 만드는 몇가지 이유들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가장 먼저 언급된 것은 풍부한 전리품에 대한 전망이었다.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한 예방으로서의 공격이 제시되기도 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여진족과의 전쟁이 통일된 몽골 부족들 사이에 민족적 일체감을 강화시켜주리라는 사실이었다. 더불어 칭기즈 칸은 최근 역사를 논하기도 하고, 과거에 겪었던 치욕들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그런 치욕에 대해 복수하는 것은 민족적 의무라고 그는 말했다.(111)

62. 여진족과의 전쟁은 잠시 동안 중단을 포함하여 칭기즈 칸이 죽을 때(1227)까지 16년간 계속되었고, 그의 후계자인 오고타이에 의해 비로소 성공적으로 종결되었다.(1234)

63. (베이징을 포위하고 정복했을 때) 몽골족은 죽이고 불을 질렀다. 분명 사디즘 때문은 아니었다고 르네 그루세는 언급했다. 그들이 비이성적으로 행동했던 것은 달리 아무것도 할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베이징에서의 대량 학살은 이 초원의 거주자들이 세련된 문명을 보유하고 있는 전통의 도시를 과도기를 거치지 않고 소유하는 데 성공했을 때 얼마나 크게 당황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이 대도시를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를 전혀 몰랐다. 자기들의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그 도시를 이용할 수 있음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116)

⇒ 문화 충격, 또는 부적응…… 범죄자가 오랜 시간 감옥에 있다가 출소하여 세상에 나왔을 때, 어린 시절 부모와 분리되어 늑대와 함께 살며 성장한 늑대소년이 문명사회에 맡겨졌을 때의 그 충격과 같은 문화 충격을 몽골들 또한 느꼈으리라.

이슬람 제국들의 땅에서

64. 칭기즈 칸은 그가 알게 된 모든 세계를 전쟁을 통해 압도한다는, 다시 말해 이 나라 저 나라를 정복하여 그 굴복한 지역을 자신의 권력 세계로 편입시킨다는 확고한 계획을 단 한 순간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때그때의 정치적, 군사적 상황이 몽골군이 가야 할 길을 결정했던 것이다.(117)

65. 부카라는 본보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도시가 항복할 경우 주민들은 칭기즈 칸의 명령에 따라 용서되었다. 주민들이 저항할 경우에는 몽골군이 도시를 함락한 이후 피바다를 만들었다. 남자들은 난도질당했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끌려갔다. 기술자, 예술가, 학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다치지 않고 말짱한 피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칭기즈 칸은 이슬람 성직자들은 건드리지 않았다(특정 종파는 제외하고). 뒤떨어지기는 했지만 판단력이 없지 않았던 유목민들은 이들의 지혜외 재능을 이용할 줄 알았다. 또한 어떤 종교든 그 성직자들이 갖고 있는 영향력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126)

66. 몽골족은 다음 공격을 위해 진군할 때는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끌어 모아 피와 살로 이루어진 방패로서 선두에 세웠다…… 이 정복자 무리들로 하여금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게 했던 것은 상대의 저항만이 아니었다. 모든 전쟁이 가장 저질적인 본능을 일깨우고 현대의군인들까지도 원시적으로 만드는 것처럼, 그들이 치른 장기간의 전쟁이 그런 야만성을 부추겼던 것이다.(129)

동유럽을 향하여

67. “타타르 압제는 희생자로 전락한 러시아 민족의 영혼을 억압했을 뿐만 아니라, 수치를 안겨주어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왜곡시켰다.’ (카를 마르크스)(131)

68. 항복과 동시에 대부분의 영주들이 죽음을 당했다. 몽골족이 특별히 극악무도하다는 것에 대해 쓴 러시아의 연대기 학자들에 따르면, 몽골족은 70명의 고위 계층 포로들을 함께 모아놓고 줄로 엮었다. 그러고는 바닥에 내던져 그들 위에 널빤지를 올려 놓았다. 이 살아 있는 바닥 위에서 타타르인들은 술에 취해 승리의 축제를 벌였다.(133)

69. 정복된 러시아 영지들은 킵차크 한국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된, 몽골의 한 부속 국가에 포함되었다.(136)

70. 몽골인들은 러시아인들을 자신들의 압제 하에 두었을 뿐 아니라 고립을 강요하기도 했다. 러시아 남쪽과의 전통적인 연결이 끊겼다. 킵차크 한국이 넘어설 수 없는 장애물이 되어 그 길을 가로 막았다. 서쪽으로의 연결 통로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독일, 폴란드 등 서방에거 고딕이 최고조의 전성기에 있을 때, 러시아인들은 아시아 전제 군주의 신하가 되어 유럽의 발전과 정신적인 흐름들에서 단절되어 있었다. 인문주의는 러시아로 전파되지 못했다. 러시아는 유럽을 알지 못했다 서방은 폴란드 저 너머 동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다. 이는 서로간의 거리가 멀어지고 불신이 커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이런 상태는 오늘날까지 극복되지 않았다.(140)

마지막 원정과 죽음

71. “당신은 높은 산길을 오를 것을, 넓은 강을 건널 것을, 멀고 먼 원정의 길을 떠날 것을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높은 나무와 같은 당신의 몸이 쓰러지려 기울어지면 당신이 지배하는 이 민족을 누구에게 맡기겠습니까?” 칭기즈 칸의 부인 예수이의 말. (143)

72. 칭기즈 칸은 말에서 떨어지면서 입은 내상을 이겨내지 못했다. 1227 8, 몽골의 건국자이자 정복자는 생을 마감했다.

73. “칸의 시신을 운구하던 자들이 도중에 마주친 모든 사람을, ‘다른 세계로 가거라. 그리고 그곳에서 너희들의 돌아가신 군주를 모셔라라고 말하며 쳐죽이는 것은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그들은 그러한 방식으로 죽음을 당한 모든 사람들이 실제로 내세에서 그의 하인이 되리라 믿었던 것이다. 칸이 타던 말들도 비슷하게 처리되었다.”(151)

74. 많은 연구가들이 칭기즈 칸의 무덤을 찾으려 했으나 허사로 끝나고 말았다. 자연 자체가 그 비밀을 보호했다. 오늘날 몽골 민족은 오논 강과 케룰렌 강 사이에 위치한 여러 봉우리들의 기슭에서 민족적 영웅을 추모하고 있지만, 그 봉우리들 중 어떤 봉우리가 실제로 성스러운 산 보르칸 칼돈인지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몽골인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153)

주위 환경과 종교

75. “모든 신앙은 존중되어야 한다. 어떤 종교에 대해서도 다른 종교보다 나은 특권이 주어져서는 안 된다.” (159)

76. 물론 몽골의 지배자들이 정복자로서 실천했던, 종교 문제에 있어서의 관용은 정치적 전술과도 연관지을 수 있다. 칭기즈 칸은 아주 의식적으로 이를 효과적인 선전 선동의 무기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침략당한 모든 나라에서 신앙의 자유라는 자신의 확고한 원칙을 알렸다.(158)

77. 몽골족은 그들(샤면)의 예언 없이는 결코 군대를 일으키거나 전쟁에 나서지 않았다. …… 텝텡게리(가장 높은 하늘)라는 별호를 가진 샤먼 커커추는 특별한 권력을 향유했다……. 그는 명예욕도 강했고, 직접 지배하는 데 대한 엄청난 욕구를 갖고 있었다.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커커추는 지배자의 가족을 이간하려고 시도했다……. 국민을 자기 쪽으로 끌어모으고 심지어 칸의 부하들 사이에서도 추종 세력을 얻게 되었던 이 대샤먼은 힘겨루기에 나섰다…. 후일 지배자 칭기즈 칸은 커커추의 위험이 그 자신까지 위협할 정도임을 느께게 되었다. 테무게의 도움으로 그는 이 제사상을 덫에 빠뜨렸다. ‘강건한 남자 세 명이 잠복하여 텝텡게리를 기다리다가 그를 공격하여 허리를 부러뜨렸다. 칭기즈 칸은 그 시체를 숨기게 하고서, 범행을 지켜 보던 장소를 서둘러 떠났다. 새로운 제사상으로는 신뢰할 만한 남자가 임명되었다. 지상의 힘이 영적인권력을 눌러 이긴 사건이었다.(165)

인물과 업적

78. 칭기즈 칸은 위엄을 갖춘 모습이었다. 외국의 증인들은 그를 넓은 이마, 고양이의 날카로운 눈, 그리고 턱수염을 가짐 고귀하고 강건한 모습으로 묘사했다.(166)

79. 이 몽골의 지배자는 그가 다른 문화의 대표자들과 나눈 대화들에서 보여주듯 절대 독재적이거나 거만하지 않았다. 그가 갖고 있었던 호기심은 이 현명하고 또 무지한 야만인으로 하여금 낯선 땅으로의 원정길에서 부딪히는 문명 세계의 작품들, 그리고 그 발전의 성과와 관련하여 항상 새로운 의문을 제기하게 했다.(169)

80. ‘모순은 칭기즈 칸을 특징짓는 말이다. 인간적인 감성들, 쾌활함, 건강한 인간 이성들을 한편으로, 그리고 파괴적인 분노, 잔인함, 가차없는 복수욕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모순이다. 이러한 모순은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유목민 사회의 바탕에 깊숙이 깔려 있는 것으로, 이웃하고 있는 문명 민족들과 문명화되지 않은 초원 부족들 간의 대립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172)

81. 칭기즈 칸은 직계 후계자들과는 달리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광적인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대규모 연관 관계 속에서 원정들을 계획하면서 목표를 명확하게 직시하는 천재적인 산술가(히틀러를 가리키고 있다)와는 전혀 다른 모습인 것이다. 전쟁과 승리에 도취하여 칭기즈 칸은 계속해서 진군했다. 이는 대부분의 정복자들에게 해당하는 면모이며, 그들이 지나간 공포의 길 위에는 사자들의 해골로 이루어진 피라미드들과 집단 무덤들이 세워져 있다.(175)

82. 칭기즈 칸 이후 단지 두 세대가 지난 시점에, 모든 몽골인을 일치단결하게 만들었던 지배자의 발흥지는 역사의 그늘 속에 묻혀버렸다. 칭기즈 칸의 손자인 카간쿠빌라이는 베이징을 그가 정주하는 왕도로 선택했다. 카라코룸은 퇴락했다. 한제국의 중심으로서 짧은 영화를 누렸던 이 검은 모래의 도시는 거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몽골은 쇠퇴하고 중국의 영락한 한 지방으로 전락했다.(177)

83. 유목민 칭기즈 칸은 무력 사용을 통하여 널리 불행과 고통을 야기하기는 했지만, 이는 세계로 하여금 닫힌 문을 활짝 열도록 강요하는 것이기도 했다. ‘자사크는 이제 다시 자유롭게 된 민족들이 새로운 열린 길들을 평화로운 목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안전을 보장했다. 사신들과 상인들, 그리고 성직자와 선교사들은 이 길이 갖고 있는 큰 가치를 알고 있었다. 아시아를 가로지르는 무역 통로들이 안전해졌다. 지배자들과 그들이 이끄는 민족들은 접촉을 중요하게 여겼고 이방인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수백 년이 지나도록 찾아볼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발맞추어 유라시아 대륙의 상업이 활짝 꽃을 피웠다. 칭기즈 칸의 종족이 심어놓은 이러한 평화는 150년간 지속되었다. 유럽을 포함하여 인류 문명 전반의 발전에 기여한 평화였다.(178)

 

3. 내가 저자라면

<차례>

칭기즈 칸의 평가에 대한 견해 충돌

몽골 비사

신성한 가문

테무친의 성장기 

칭기즈 칸으로의 등극

단독 지배를 위한 투쟁

군사 국가의 발흥

국경 너머의 세계

만리장성을 넘어

이슬람 제국들의 땅에서

동유럽을 향하여

마지막 원정과 죽음

주위 환경과 종교

인물과 업적

 

* 감동적인 장절

너희들은 다 함께 나를 의심하면서, ‘내가 이 남자아이들을 낳았고, 어떤 어떤 사람에게서 얻었다고 말했다. 그렇다. 너희들의 악의에 찬 말은 옳다. 밤마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어떤 남자가 가죽 천막의 지붕 구멍으로 들어왔다. 그는 나의 배를 쓰다듬었고, 그의 빛은 내 몸 속으로 스며들었다. 천막에서 나갈 때 그는 마치 노란 개처럼 햇빛, 달빛을 타고 기어올라 갔다. 그런데 왜 너희들은 그렇게 부당하게 말하느냐? 가만히 잘 생각해보면, 이것은 그 아이들이 하늘의 아들이라는 증거운 셈이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너희들이 그들에 대하여 말할 수 있으며, 그를 검은 머리의 평범한 사람과 비교할 수 있단 말이냐. 만일 그들이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왕이 된다면 하찮은 평민들조차 그들을 알아보게 될 것이다.” – 바타치칸의 후손인 도본 모레겐의 아내 알랑 고아가 아들들의 의심에 항변하는 장면.

 

* 내가 저자라면

칭기즈 칸에 초점을 둔 책으로, 전반적인 내용을 잘 다룬 느낌이야. 칭기즈칸의 출생에 얽힌 이야기부터, 몇 명 인용구들과 신화 등등칭기즈 칸에 대한 시각이 좋다 나쁘다로 편중된 것 같지 않아 재미있게 보았다.

책의 제목처럼 칭기즈 칸에 초점을 두어 쓴 책이기에 그 이상을 바란다는 건 무리일지 모르겠다. 그 이상을 바라면, ‘칭기즈 칸이 아닌 칭기즈 칸과 몽골’, ‘칭기즈 칸의 후예, 몽골과 같은 전혀 다른 책을 택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얼마전 몽골을 갔다온 나에게 현재의 몽골과 과거의 칭기즈 칸과의 관계를 분리해서 생각하지는 쉽지가 않았다. 내가 저자라면, 과거의 영광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지금의 몽골과 연계하여 연구해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된다. 내가 본 지금의 몽골은 상상이상으로 낙후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디부터 손대야 할 지 모를 드 넓은 땅, 물과 전기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척박한 땅이긴 하지만, 같은 아시아인으로 적지않게 아쉬웠다. 아마도 현재의 몽골과 과거의 역사를 오가며 조명해보는 식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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