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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19일 08시 47분 등록

 

<북리뷰 4-1권 몽골탐색>                                                      2013.08.18.

                                                                                          : 서 은 경

 

 

 

 

(No. 15) 

 

르네 그루쎄 지음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사계절 (2012)

 

 

 

 

 

     

                                                               book cover.jpg   

                                                    @ 1998년 한국판 11@

 

 

 

 

 

 

 

 

1. 작가 소개

 

르네 그루쎄(Rene Grousset) 1885-1952

 

 

  rene grousset.jpg

 

 

프랑스인 역사학자다. 프랑스 아시아사 학계의 대표주자다.

티베트, 인도, 이란, 일본, 중국 등 아시아와 동양 문명들에 대해 깊이 연구하였다. 그는 세계를 제패한 초원 유목민들의 발자취를 추적하고, 중국 중세의 승려, 현장을 발자취를 따라 실크로드 이야기를 들려준다. 특히 동양의 극동지역의 역사와 예술, 지리 등을 연구하여 극서지역에 위치한 유럽 대륙에 동양 역사의 알리는 가교 역할을 한 학자이다.

 

 

1885년 그는 프랑스 가르 주 아우베이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의 몽펠리에 대학교의 역사 학부를 졸업했다. 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프랑스 군에 복무하였다. 1925파리 기메 미술관의 관리 위원(conservator)과 아시아 저널(Journal asiatique)을 겸임하였다. 1933부터 그는 파리의 세르뉘시 박물관장과 그 곳의 아시아 미술 소장품의 큐레이터를 겸임하였다. 그는 프랑스의 최고 지성 모임이라고 할 수 있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이다.

 

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친 독일 성향을 보였던 비시 프랑스 정부치하에서 그는 역사연구 관련 직위를 잃는다. 하지만, 전쟁의 와중에도 개인적으로 연구를 계속하며 역사 연구에 몰두하는 열정을 보인다. 그는 중국과 몽골에 대한 책들을 연이어 출간하였으며, 프랑스 해방 이듬해에는 다시 세르뉘시 박물관의 큐레이터로 복직한다.

 

르네 그루쎄는 아시아와 동양 문명들에 대한 책을 여러 권 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십자군의 역사(Histoire des Croisades, 1934-1936)유라시아 유목제국사(L'Empire des Steppes, 1939. 김호동·유원수·정재훈 옮김, 서울, 사계절, 1998.)이다. 이 두 책은 해당 학문의 고전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1952, 르네 그루쎄는 67세의 나이로 몽파르나스 공동묘지에 안장된다.

 

 

 

주요저서

[아시아의 역사] 1922

[동양 문명사] 1929

[극동의 역사] 1929

[극동의 예술] 1936

[초원의 제국] 1939

[몽골제국사] 1941

[아르메니아사] 1947

[중국과 그 예술] 1951 외 다수가 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5. 칭기스칸

 

@ 12세기의 몽골리아

 

[281]

12세기 말 아시아 지도는 다음과 같이 그려졌다.

 

: (한족 / 항주)

: (여진족=여직=퉁구스=말갈 / 북경)

-퉁쿠스(여진)+고조선/발해=말갈

-퉁쿠스(여진)+중국=거란족

서북: 탕구트족의 서하왕국(티베트인과 연관)

동북: 위구르인(돌궐=투르크족 / 투르판~쿠차)-불교와 네스토리우스교 문화로 개화된 투르크인들

 

시베리아-몽골 접경지대에서, 알타이, 항가이, 헨테이 산맥 쪽으로 펼쳐진 고비 북쪽의 초원에서, 유목민이며 알타이 민족의 3대 지파투르크, 몽골, 퉁쿠스 계통의 수많은 부족들이 떠돌고 있었다.

 

중앙아시아 유목민들 대부분은 언어는 달라도 동일한 기후에서 동일한 방식의 삶을 살았고, 이 지역을 여행한 사람 모두들 놀라게 한 인종적 유사성들을 지니고 있었다.

 

[282]

그레나르의 묘사

그들은 넓적한 얼굴, 납작한 코, 튀어나온 광대뼈, 째진 눈, 성긴 턱수염, 두툼한 입술, 그리고 곧고 검은 머리를 하고 있었으며, 피부는 볕에 그을리고 바람과 서리에 거칠어져 가무잡잡하였다. 그들은 키가 작았으며, 그들의 탄탄하고 무거운 몸은 활처럼 굽은 다리가 떠받치고 있었다.

 

[286]

몽골어를 사용하던 민족들 가운데 3세기의 선비, 5세기의 유연과 에프탈, 그리고 6세기에서 9세기까지 유럽의 아바르를 꼽았다. 8세기부터 12세기까지 큰 역할을 했던 거란이 비록 퉁구스 언어들과의 접촉으로 현저하게 구개음화되기는 했지만 몽골어 방언을 사용하였다는 점도 지적한 바 있다.

 

[288]

12세기 말의 몽골인들은 이론적으로는 그들의 생활방식에 따라 초원의 유목부족과 삼림의 수렵, 어로부족으로 나눌 수 있다.

 

그레나르는 몽골인들이 원래 초원종족이 아니라 오히려 숲으로 덮인 산지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숲에서 왔다는 것은 그들이 나무 수레를 널리 사용하는 데에서 알 수 있다. 오늘날에도 몽골인들은 초원의 카자흐인들과는 달리 가족통 대신 나무통을 사용한다.”

 

초원부족 특히 유목민들은 목지를 찾아 정기적으로 계절적인 이동을 아며, 그들이 멈추는 곳에 프랑스인들이(부정확하게) ‘유르트라고 부르는 모전천막을 세운다. 삼림부족들은 자작나무 껍데기로 만든 오두막에 살았다.

---> 바이칼호와 흡수골 호수가 있는 근처일까? 초원부족들은 물이 많고 침엽수림 우거진 흡수골 호수 인근에서 살았으리라. 11~12세기 당시 그 지역의 기온과 기후는 어땠을까 궁금하다. 요즘처럼 몽골지역이 사막화 되지는 않았을 거 같은데...?

[289]

러시아의 몽골 전문가들인 바르톨드와 블라디미르초프에 의하면............삼림부족들이 특히 샤먼의 지배 아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모든 투르크-몽골민족들에게서 샤먼이나 주술사들-투르크어로 캄, 몽골어로 부게 또는 샤먼, 한자로 전사된 퉁구스 여진어로는 산만-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칭기스칸 제국의 건국과 관련하여 샤먼 쿠쿠추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후술될 것이다.

 

원래의 몽골인들 가운데 타이치우트족은 삼림의 수렵인에 속했지만 칭기스칸은 유목민 부족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측된다. 게다가 이들 투르크-몽골인들은 방식에 차이는 있지만 모두 사냥꾼들이었다.

 

[290]

초원 귀족들은 매로 사냥하였다.

 

중부 고비의 위구르, 요하의 거란, 북경의 여진과 근접하여 이익을 보던 유목민들의 장벽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문명화된 삶과 접촉할 수 없었던 삼림부족들은 대체로 그런 이유로 인해 더욱 야만적이었던 것 같다.

 

민족지학자들은 삼림 몽골인의 조잡한 오두막이 유목민들의 게르 즉, 모전천막으로 바뀌어간 발전에 대해 주목하였다.

 

[291]

여하튼 12세기의 몽골 지방은 9세기와 비교하여 문화적으로 퇴보한 것이 확실하다.

)28. 일반적으로 투르크어가 몽골어보다 더 진화되었다.

 

@ 몽골인들의 최초의 통일시도

[292]

12세기 전에도 몽골인들 사이에서는 조직된 국가를 형성하기 위한 첫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 칭기스칸의 유년시절

[294]

1167년경 오논 강의 오른쪽 기슭에 델리운 볼닥 지역에서 태어났다.

 

[295]

칭기스칸은 키가 컸고 체격은 탄탄하였으며, 이마가 넓고 고양이 눈을 하였으며, 말년에는 수염을 길렀다. 유년기의 방황, 메서운 추위와 숨막히는 더위에 대한 저항력, 비상한 참을성, 패배, 후퇴, 포로상태에서 부상과 학대에 개의치 않음은 모두 칭기스칸의 놀랄 만한 생명력을 입증한다.

 

칭기스칸의 육체는 청년기부터 더할 수 없이 한랭한 기후와 한없이 불확실한 환경에서의 단련으로 가장 가혹한 시련에도 길들여져 있었다. 테무진의 정신은 자기가 받았던 시련으로 인해 처음부터 담금질되어 있었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를 철인, 세계를 놀라게 할 사람으로 만들게끔 되어 있었다.

 

테무진은 1167년경 겨우 열두 살쯤일 때 고아가 되었으며 사람들은 그가 통치하기에는 너무 약하다고 여겨 복종하기를 거부하였다. 어러니 후엘룬 에케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충성스러운 마지막 추종자들조차 테무진을 버리고 가축을 끌고 떠나버렸다.

 

[296]

사냥과 고기잡이로 연명해야 할 만큼 영락하였다.

 

테무진은 자기보다 더 뛰어난 동생 카사르의 활솜씨를 이용하여 집안의 재산을 복구하기 시작하였다.

 

@ 케레이트의 신하 칭기스칸

[299]

옛 왕가의 대표자들은 테무진을 더 전통적이고 더 온순하다고 보았던 반면 자무카의 활기찬 성격과 혁신적인 성향에 대해서는 불안을 느꼈기 때문에 새로운 왕가의 군주자리를 노리는 두 사람 가운데 테무진을 선호한 것으로 추측하였다.

 

테무진은 군주로서 칭기스칸이라는 이름을 취하였으며, 이것은 좀더 대중적인 역사책에서 칭기즈칸이라는 형태로 바뀌었다.

 

[305]

몽골리아가 들끓고 있었다. 자지라트의 수령 자무카가 왕칸과 칭기스칸이 확립하려고 애쓰던 주도권에 대항해 동맹을 결성하였다.

 

[306]

몽골제국은 이제 실현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문제는 두 사람의 경쟁자 칭기스칸과 자무카 가운데 누가 이기느냐였다. 이 대결에서 칭기스칸은 끈기, 정치적 기민성, 사람의 마음을 끄는 기술, 그리고 초기단계에서 케레이트 왕칸의 확고한 지지를 받는다는 점에서 유리하였다.

 

자무차에게는 조금은 일관되지 않지만 비범한 정력, 활기찬 마음, 그리고 천부적인 음모의 능력이 있었던 듯하다.

 

이 둘 사이의 균형을 깨뜨린 것은 왕칸이었다.

 

[307]

칭기스칸은 이제 몽골의 숙적이자 아버지를 암살한 차간 타타르와 알치 타타르에게 원수를 갚을 수 있게 되었다.

 

@ 왕칸과의 불화: 케레이트 정복

[308]

칭기스칸은 왕칸이 번번이 자기를 형편없이 대해도 그때까지는 주군에게 일관되게 충성하였다.

 

[309]

1203년 칭기스칸과 케레이트 간의 관계는 완전히 파탄에 이르렀다. 이같은 결별은 몽골 영우의 인생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지금까지는 왕칸의 유능한 2인자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1인자 자리를 위해 싸우게 된 것이다.

 

[312]

케레이트의 군주는 발작적이고 우유부단하고 약하고 겁이 많았으며 계속 측근들에게 시달렸을 뿐 아니라, 전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아들 셍군이 반란을 일으킬 위험성도 안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칭기스칸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313]

케레이트인들은 칭기스칸에게 투항하였으며 그 뒤로는 그에게 충성스럽게 봉사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케레이트를 용해시켜버리기 위해 케레이트 구성원드을 여러 몽골씨족들 사이에 분산배치할 만큼 조심스러웠다. 그는 잠카 감부의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배려를 하였는데, 자신은 자카 감부의 딸 이바가 베키와 결혼하였고 막내 아들 톨루이를 자카 감부의 또 다른 딸-후일 칭기스칸 가문에서 상당한 역할을 할 -소르칵타니 공주와 결혼시켰던 것이었다.

 

) 82. 칭기스칸은 훗날 꿈을 꾸고 나서 이바가 베키를 그의 가장 용맹스러운 부하들 가운데 하나인 우루우드씨의 주르치데이에게 넘겨주였다.

---> 이 시절 몽골에는 부인을 넘겨주는 것이 풍습이었나? 궁금하다.

 

 

@나이만 정복과 몽골리아의 통일

[314]

칭기스칸이 케레이트를 복속시키자 몽골은 유일한 독립세력이 남았으니, 그것은 타양의 아래 있는 나이만이었다.

 

이들 모두는 칭기스칸에 대한 전쟁을 준비하였다.

 

[318]

칭기스칸은 그들이 안다. , 의형제 사이였다는 점을 생각해 그로 하여금 왕자(자무카)답게 피를 흘리지 않고 죽게 해주었다. 블라디미르초프는 무속신앙에 의하면 사람의 피는 그 영혼의 자리이기 때문에 이것은 호의의 표시라고 하였다.

---> 몽골여행에서 염소를 잡는 과정이 있었다. 피 한 방울 안 흘리게... 척추뼈를 부려뜨리고...이것도 무속신앙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전 몽골리아가 평정되었다. 아홉 불꽃이 있는 칭기스칸의 깃발은 모든 투르크-몽골 사람들의 깃발이 되었다. 1204년 나이만 패망 후 타양의 금인 보관자인 위구르 사람 타타통아는 몽골인의 포로가 되어 칭기스칸을 위하여 봉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위구르인 관리들로 이루어진 몽골 관방의 싹이 트게 되었다.

 

@ 황제 칭키스칸

[320]

1206년 쿠릴타이에서 샤먼인 쿠쿠추(일명, 텝 텡그리)의 역할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쿠쿠추의 아버지인 현명한 노인 뭉릭은 칭기스칸의 인생에서 중요한 인물로서, 확실치는 않지만 과부가 된 그의 어머니 후엘룬 에케와 결혼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는 쿠릴타이에서 영원한 푸른 하늘이 칭기스칸을 모든 자의 카간으로 임명했다고 선언하였다.

 

블라디미츠초프는 칭기스칸의 기치, 9개의 야크 꼬리를 가진 흰색기치인 툭은 제국 또는 황극 씨족의 수호영령인 술데의 상징이자 거처로 간주되었고 이를 위한 특별한 제사가 있었다고 한다. 블라디미르초프는 몽골 사람들을 세계 정복으로 이끈 것은, 바로 깃발의 정령인 술데였다고 하였다.

 

[322]

샤먼인 쿠쿠추는 칭기스칸을 도와 그의 권력에 종교적기초를 확립하였다. 그는 자신의 주술적 능력과 황족 안에서의 자기 아버지의 위치 덕분에 분명 자신을 불가침의 존재로 여겼다.

 

그러나 샤먼은 게속해서 황가를 지배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이제 칭기스칸의 막내아우를 공공연하게 모욕하면서 적대하였다. 칭기스칸의 아내인 현명한 부르테가 남편에게 경고하였다.

당신 생전에도 당신 아우들이 모욕을 받게 된다면, 당신 사후에는 사람들이 당신 아들들에게 반역할 것입니다!” 이번에는 칭기스칸이 정황을 이해해 테무게에게 주술사를 없애라는 허락을 내렸다. 장면은 짧았다.

 

...테무게가 배치해둔 세 사람의 호위병이 피를 흘리지 않고그의 등뼈를 분질러버렸다.

---> 마치 양을 잡듯이... 깔끔하고(?) 무섭게 처리한다. 마치 영화 한 장면 같다.

 

@ 새로운 몽골 제국: 국가와 군대

[323]

샤먼 쿠쿠추는 제거되었지만 칭기스칸 일족의 새로운 제국은 여전히 그 종교적 토대를 보존하였다. 즉 고대 투르크-몽골의 애니미즘은 많든 적든 마즈다교적인 요소와 중국적인 요소와 혼효되었다. 대칸이 그 현현인 신은 여전히 텡그리, 즉 하늘 또는 하늘의 신이었고, 이는 이란의 오르마즈드Ormazd는 물론 어떤 점에서는 중국의 천() 사상과도 흡사했다.

 

칭기스칸의 후손들은 모두 지상에서의 텡그리의 대리자임을 자처하였으니, 그들의 명령은 텡그리의 명령이고 그들에 대한 반역은 곧 텡그리에 대한 반영기었다.

 

[324]

칭기스칸 자신은 오늘날의 헨테이 산맥 즉, 오논 강의 발원지역에 있는 부르칸 칼둔 산에 부여된 신성함을 특히 숭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 칭기스칸이 메르키트의 약탈시 아내가 납치당했을 때도 발빠른 말 덕분에 도망쳐 피신한 곳이 바로 부르칸 칼둔이었다.

 

[325]

하늘과 주문에 대한 그들의 미신적 두려움으로 인해 몽골인들은 자기네 샤먼뿐 아니라 신성의 대리자일 가능성이 있는 다른 사람들, 즉 케레이트와 웅구트인들 사이에 있는 네스토리우스교의 사제들, 위구르인과 거란인의 불교 승려들, 중국 도교의 도사들....프란체스코회 선교사들....초자연적인 힘에 인도된다고 여겨지는 모든 종파의 지도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다양한 종파의 대표자들에 대한 그들의 호의는 텡그리에 대한 재보험과 같은 것이었으니, 전반적인 미신적 공포가 그토록 일반적인 관용을 낳은 것이다.

--> 과연 그것이 미신적 공포만 있었을까? 조셉캠벨의 말처럼 모든 종교, 신화, 사상은 하나로 통하고 전달하는 방식만 다를 뿐이지 않던가? 몽골인들이 이러한 점에서 텡그리를 제대로 이해한 것은 아닐까? 미신적 공포일까? 나는 궁금할 뿐이다.

 

[326]

법은 너무도 가혹해 살인, 절도, 음모, 간통, 비적, 저주, 장물취득 등은 사형으로 규정되었다.

민간인이든 군인이든 불복종은 보통법 아래에서 범죄를 취급되었고, 야삭세계를 통치하는 데 유효한 규울 즉, 민법이자 행정법이었다. 법리적으로 야삭은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지혜즉 칭기스칸의 성훈으로 보완되었다.

 

[330]

몽골인들은 말과 떨어질 수 없었다. 사실 그들은 서로 닮았으니., 같은 초원에서 태어나 같은 기후와 토양에서 자라났으며 똑같은 훈련으로 길들여졌다.

 

몽골인은 키가 작고 탄탄하며 뼈대가 굻고 튼튼한 체격을 갖추었고, 스테미나가 엄청나다. 그들의 역시 작고 탄탄하며 우아한 데라고는 없다. “힘센 목, 굵직한 다리에, 가죽은 털이 뻑뻑하며, 불 같은 두지와 정력, 지구력, 꾸준함, 걸음걸이의 확실함은 경탄할 만하다.”

 

칭기스칸 왈

낮에는 늙은 늑대의 경계심으로, 밤에는 갈가마귀의 눈으로 지켜보아라. 전투에서는 적을 매처럼 덮쳐라.”

사슴 무리에 참을성 있게 몰래 접근하는 것은 사냥감인 적에게 들키지 않고 아무 소리 없이 보이지 않는 정찰조를 전방으로 보내는 방업을 가르쳐주었다. 초원에서 사냥할 때 몰이대형을 사용하여 달아나는 야생동물 무리의 방향을 바꾸게 하는 것은 그들에게 적군을 양익으로 포위할 수 있는 우회기동법을 가르쳐주었다.

 

[331]

그들의 화살은 200미터나 400미터, 심지어 그 이상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도 쏘아맞힐 수 있었다.

몽골군은 따라잡기 어려운 기동력에다가 당시로서는 유일한 전술상의 우위까지 갖고 있었다. 자신들의 강점에 대하여 자신감을 갖고 있던 몽골의 전위부대는 대형별로 자주 교체되면서 일제 사격을 퍼붓고는 빠져나갔다.

 

몽골 사람들은 그들의 체격, 추한 모습, 악취 등으로 인해 상대방이 갖게 되는 공포심을 백분 활용하였다.

 

@ 북중국의 정복

[333]

몽골리아를 통일한 칭기스칸은 이제 북중국 정복에 나섰다. 그는 먼저 탕구트 유목민들이 감숙, 알라샨, 오르도스에 세운 서하를 공격했다.

 

서하에 대한 이 공격은 정착문명 민족에 대한 몽골인들의 최초의 행동이었고.........칭기스칸은 서하 영토의 지배자가 됨으로써, 중국에서 투르키스탄까지 교통로를 장악하였고 동시에 몽골의 숙적인 북경의 금의 영토를 서쪽에서 포위하였다.

 

칭기스칸은 서하를 속국으로 만들고, 여진 왕국 즉, 북부 중국의 퉁구스계 왕조인 금나라로 향하였다.

 

[335]

칭기스칸은 몽골과 금 사이의 이 분쟁을 일종의 민족전쟁의 성격으로 만들었다. 그는 여진인들이 말뚝으로 찌르고 나무 당나귀에 못 박아 죽인 옛 몽골의 칸들을 상기하면서 엄숙하게 텡그리의 도움을 빌었다.

, 영원한 하늘이시여! 저는 금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한 제 아저씨 오킨바르칵과 암바가이의 피를 갚기 위하여 무기를 잡았습니다. 제가 하는 일을 인정하신다면 높은 곳에서 그대의 도움의 팔을 제게 빌려주십시오!”

 

동시에 칭기스칸은 북경의 옛 주인이었으나 금에 의해 대체된 거란인들의 복수자로 자처하였고, 거란인들은 그의 명분을 열렬히 지지하였다.

 

거란인들은 몽골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그들과 칭기스칸 사이에는 북경의 퉁구스 왕조에 대항하는 연합을 가능케 한 종족적 또는 친족적인 결속관계가 존재했던 게 틀림없다.

 

[337]

금은 칭기스칸에게 여진 공주와 동남동녀, , 비단, 3천 마리라는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였다.

 

[338]

몽골군은 도시를 점령하고 주민을 학살하였으며, 가가호호를 약탈하고 도시 전역에 불을 질렀다. 약탈은 한 달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유목민들은 대도시를 어떻게 처리한다거나 그것을 그들의 권력강화와 확대를 위하여 어떻게 이용하는 지에 대해 분명히 아무런 관념이 없었다. 그 결과 인문지리학도로서는 매우 흥미로운 상황이 벌어졌다.

 

초원 거주자들은 아무런 과도기적인 단계도 없이 도시문명을 가진 고대국가들을 소유하게 되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들은 잔인함 때문이 아니라 난감함 때문에 더 불을 지르고 더 살육을 하게 된 것으로, 그들은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몽골 수령들, 아니 적어도 야식을 충실히 준수하는 자들에게 약탈은 개인적 탐욕이 개입되지 않는 일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장군 시기 쿠투쿠는 금나라 창고의 아주 작은 부분조차 자기 몫으로 빼돌리지 않았다.

 

문명에 막대한 재난을 초래한 것은 바로 그 같은 당혹감을 바탕으로 해서 나온 행위.

--> 칭기스칸은 10만 대군으로 아프리카 대륙만한 크기의 세계를 점령하였다. 나는 그가 점령지에서 가져온 노획물이 지금 몽골에 남아있는 지 궁금했다. 몽골 역사박물관에 방문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칭기스칸이 노획한 물건은 없었다. 또한 몽골인들의 유물의 규모 자체도 양이 적었다.

 

몽골인 여행가이드에게 이 부분을 질문했다. 가이드 왈, ‘몽골인은 타지 정복시 또는 하나의 왕국이 멸망하고 다른 왕국이 들어설 때, 모든 문화재를 불 태웠다고 말했다. 그것이 자기네들의 관습이라고만 했다.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도대체 왜???

 

이 책의 저자의 말이 맞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유목 문명의 수준이 드러나는? 그들은 점령만 했지, 그 이후의 절차는 그다지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점령 후의 당혹감.....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정말 당혹감 때문이기만 했을까?

샤머니즘적 세계관에서 비롯한 사고방식이라든지, 무소유의 방식이라든지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몽골인들은 문헌에 나타나는 대로나 개개인을 고려해 볼 때 사악한 자들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은 명예와 존엄의 규범인 야삭-더러움을 용인한 부분은 별개로 하고-에 따라 행동한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앞서의 옛 유목민들, 특히 10세기의 거란이나 12세기의 여진 사람들과 비교해볼 때 확실히 뒤쳐져 있었다.

 

[339]

후자는 최소한 살육으로 곧바로 전 완조를 계승하였고 그 뒤에는 그들의 재산이 될 아무것도 파괴하지 않았다. 칭기스칸 국가의 몽골인들은 분명 선배들보다 더 잔인하지는 않았지만(실로 그들은 야삭에 의해 더욱 엄하게 훈련되었고, 그리고 칭기스칸의 개성 때문에 훨씬 더 침착했고 도덕률의 지배를 받았다), 훨씬 더 야만적이었기 때문에 무제한적으로 파괴했던 것으로, 그들에 앞선 흉노, 유연, 돌궐, 위구르처럼 실로 야만적 요소들이 총동원되었던 것이다.

 

칭기스칸 국가의 역사가 지닌 역설은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과 백성들의 행위를 건전한 상식의 격언과 잘 확립된 정의로 규제하는 현명하고 사려깊고 도덕적인 지도자의 성격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막 원시적인 야만상태에서 나타나 공포 말고는 적들을 굴복시킬 수단을 알지 못하고 사람의 목숨에 아무런 가치도 두지 않았으며, 도시와 농경문화를 지닌 정주 민족들의 생활이나 자기 고향인 초원에 없던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개념도 없는 유목민들의 야수적 반응 사이에 보이는 뚜렷한 차이다.

 

@ 몽골의 카라 키타이 제국 정복

[342]

위구르인들에게 항상 동정적이었던 듯한 칭기스칸은 이디쿠트에게 딸 알알툰 즉 알툰 베키를 시집보내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카라 키타이의 동북부 전역이 몽골인들의 예속지가 되었다.

---> 정복자들의 딸들의 운명. 고향을 떠나, 지금의 경우에도 비행기를 타고 몇 시간을 가야하는 곳으로 아버지의 명령(?)으로 알짜 없이 시집을 가야했던 그녀들의 운명. 나는 그들의 이야기와 삶에 관심이 간다. 몽골의 여인들에 관심이 간다. 제국이었을 때, 또한 이 이후, 몽골의 공산화 이전과 이후, 몽골 여인의 지위에 관심이 간다. 고려로 시집온 8명의 왕녀들. 그들의 삶이 궁금하다.

 

@ 호레즘 제국의 파멸

 

[346]

칭기스칸은 냉정하고 신중하고 끈기 있고 조직적이었던 반면 호레즘의 무하마드는 무책임한 혈기에 날뛰며 비논리적이고 조직에 대한 감각도 전혀 없었으니 구르조와 카라 키타이조에 대한 승리로 기고만장해 있었다.

 

두 사람 가운데 유목 야만인은 통치자였지만, 이란화된 투르크인으로 이슬람 국가들의 황제이자 정주 국가들의 군주는 정작 돈키호테에 불과했다.

 

[350]

호레즘 본토의 옛 수도 구르간지는 12214월에야 함락되었는데.......몽골인들은 이 도시를 아무다리아 강물에 잠기게 함으로써 파괴를 완결하였다.

 

몽골군이 트란스옥시아나를 정복하는 동안 호레즘의 술탄 무함마드는 자신의 무책임과 오만이 부른 재난에 놀라, 자만이 낙담으로 바뀐 채 숨을 죽이고 있다가 발흐로 도망쳤다.

 

[351]

칭기스칸은 호레즘의 술탄을 처리하고 난 뒤 1221년 봄 아무다리아를 건너 호레즘군의 잔당으로부터 아프가니스탄과 후라산을 정복하기 위해 나섰다. 그는 발흐를 점령하였는데 그곳 주민의 항복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도시에 전면적인 파괴(주민학살과 방화)를 가했다. 후라산에서 그는 아들 툴루이를 메르브로 보냈는데, 항복을 한 그곳 주민들 역시 거의 다 살해되었다. 톨루이는 메르브의 평야에서 황금 의자에 앉아 이 대량 학살의 관경을 지켜보았다.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이 분리되어 무리로 각 대대에 할당되어 목이 잘렸고, “장인 400명만 살아남았다.” 술탄 산자르의 능묘에는 불을 지르고 무덤을 파헤쳤다.

 

이곳에서는 토쿠차르의 과부가 학살을 주재하였다. 살아날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시체들은 목이 잘렸으며,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은 목을 각각 분류해 더미로 쌓아올렸다. “개와 고양이까지 죽였다.” 몽골인들은 칼리프 하룬 울 라시드의 능묘를 헐어벼렸다. 그와 산자르의 무덤, 그리고 찬란한 아랍-페르시아 문명의 영광을 이루던 모든 것이 체계적으로 파괴 되었다.

 

---> 칭기스칸 군대의 잔인성. 야만성.. 모든 것을 불지르고 죽이고 하였다. 고려에서는 어떻게 하였을까? 신라 황룡사 목탑도 몽골 침입으로 불 탔다고 하는데... 몽골의 고려 침입 때의 상황이 궁금하다. 100년 전쟁을 치루고 100년 몽골의 지배를 받았던 고려인들은, 압록강을 넘어 고려에 시집을 온 몽골의 황녀들을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고 했다. 그만큼 평화가 간절했으리라...

[353]

몽골인들은 분명히 중국에서보다는 비교적 수월하게 트란스옥시아나와 동부 이란의 요새화된 도시들을 함락시켰다. 그 까닭은 순전히 그들이 이 교도로서 또는 오늘날의 우리식 표현으로는 야만인으로서 일으킨 공포심이 여러 세기 동안 그들과 이웃으로 살아온 중국 영토 안에서보다는 무림들 사이에서 훨씬 컸기 때문이다.

 

[354]

이 끔찍하면서도 보편적인 관행은 몽골군의 훈련과 조직에 의해 완벽해지면서 그들의 가장 상습적인 전술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몽골인들이 질서에 대한 행정적 군사적인 감각이 없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주민 80퍼센트를 죽인 뒤 그들은 20퍼센트의 살아남은 사람들의 문제를 다룰 민간인 관리 다루가치를 남겨두고 떠났는데, 그들은 대개 위구르인이었지만 간혹 페르시아인도 있었으며, 그들과 함께 위구르어와 페르시아어로 장부를 관리할 유능한 서기들도 남겨 놓았다.

 

[355]

그는 종교전쟁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통치감각이 있던 사람이지만, 동시에 초원이 그의 생활방식에 적합하고 통치하기도 수월했기 때문에 도시 문명을 파괴하고 농경을 폐지하여(동부 이란을 떠나면서 그는 곡물창고들을 파괴하였다) 전답을 초원으로 바꾸려고 했을 정도로 정주 생활에 대해서는 불완전한 인식을 가진 유목민이기도 했다.

 

@ 제베와 수베에테이의 페르시아, 러시아 침공

 

제베와 수베에테이는 차리친 근처(스탈린그라드 볼고그라드)에서 볼가 강을 건너 카마 강가의 불가르인들과 우랄 산맥의 캉클리 투르크인들을 격파하는 것으로 환상적인 원정을 마친 뒤 칭기스칸의 대군과 시르다리아 북부 초원에서 다시 합류하였다.

 

[360]

@ 칭기스칸의 만년

1997년 여름 영하가 포위되어 있는 동안 칭기스칸은 오늘날의 평량 서북에 해당하는 용덕의 청수하 지역에 설영하고 있었다. 그는 그곳 평량의 서쪽에서 122781860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 뒤 적의 수도 영하는 함락되었고 정복자의 마지막 명령에 따라 전 주민이 살해되었다.

 

그는 노얀들과 장군들의 가문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 40명을 뽑았다. 그들은 화려한 옷과 값비싼 보석으로 가꾸어졌으며, 라시드 옷 딘의 말에 의하면 저승에서 칭기스칸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보내졌다. 이 야만스러운 경의의 표시에 더하여 훌륭한 말들이 희생되었다.

) 180 초원에서 장례식참가자와 말의 순장은 헤로도투스의 스키타이인들 이래 칭기스칸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었다.

 

 

@ 칭기스칸: 그의 성격과 업적

 

[361]

칭기스칸은 인류의 재앙 가운데 하나로 여겨져왔다. 그는 1200년 간에 걸친 초원 유목민의 고대 정주문명에 대한 침략의 화신이었다. 실로 그처럼 가공할 평판을 남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공포를 통치의 방법으로, 학살을 정교하고 조직적인 제도로 만들었다. 동부 이란의 파괴가 가져다 준 공포는 유럽이 앗틸라의, 혹은 인도가 미히라쿨라의 탓으로 돌린 그 어느 것보다 더 끔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잔혹성이 어떤 본성적인 사나움보다는 주로 그가 처했던 환경이 어떤 투르크-몽골인들의 경우보다 더 거칠었다는 데에서 생겨난 것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362]

몽골 정복자들이 수행한 집단적 처형은 전쟁체계의 일부가 되었다. 그것은 재빨리 항복하지 않은 정주민족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단 항복한 뒤에 다시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에게 가해진 유목민의 무기였다. 슬픈 일은 이 유목민이 농경과 도시경제의 본질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동부 이란과 북부 중국을 정복하고 나서 그는 도시와 전답을 파괴하여 이 나라들을 초원으로 바꾸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문명의 문턱과 오래 된 경작지 언저리에 대한 약탈이라는 천년의 유목 전통은 그가 최고의 기쁨에 대해 정의할 때 드러난다.

 

적들을 산산조각내고,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내고, 그들의 소유물을 빼앗고, 그들에게 소중한 자들의 눈물을 목격하고, 그들의 아내와 딸들을 끌어안는 것! 거꾸로 그는 손자들이 정주민족으로서의 삶을 위해 초원의 거친 삶을 저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슬픔에 잠긴다.

 

우리 뒤의 우리 종족들은 황금옷을 입을 것이다. 그들은 달고 기름진 음식을 먹을 것이고 멋진 준마를 탈 것이며, 그들의 팔로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안을 것이며, 그리고 그건 것들이 우리 덕택이라는 것을 잊을 것이다......”

 

) 181. 칭기스칸은 문맹이었을 뿐 아니라 많은 몽골인들이 알고 있던 투르크어조차도 할 줄 몰랐다.

 

1220-1223년 그 유명한 구장춘을 수행하여 정복자를 방문한 이지상이 기초하여 1219년에 새겨진 한 도교 석비에는 유목민 황제와 그의 생활 방식과 업적에 대해 자신이 받은 인상이 도교의 철학적 용어로 흥미롭게 표현되어 있다.

 

하늘은 중국의 지나친 사치에 환멸을 느낀다. (칭기스칸이 이르기를) 나는 북의 야생지역에 남아 있다. 나는 소박함으로 돌아가 한 번 더 절제를 모색한다. 내가 입는 옷과 내가 먹는 음식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소치기나 마부와 똑같은 누더기를 입고, 똑같은 음식을 먹으며, 병사들을 내 형제로 대한다.

 

100번의 전투에서 나는 늘 선두에 섰다. 7년 간 나는 큰 일을 했고, 육방의 모든 것이 유일한 통치에 복속한다.

 

[363]

칭기스칸은 그의 생활방식과 환경과 종족이라는 특 안에서 사려깊은 심성과 건전한 상식을 가진 놀랍도록 균형잡힌 사람이자 남의 말도 잘 경청하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우정을 굳게 지켰으며, 매우 엄격하면서도 관대하고 자애로웠다. 그에게는 진정한 행정가로서의 자질도 있었으나 그것은 유목민족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고, 정주민족의 경제에 대해서는 극히 미미한 개념밖에 없었다.

 

그의 성격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반역자들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다. 불운한 주인을 배반함으로써 그의 환심을 사려고 하였던 하인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처형되었다. 반면에 주군에게 끝까지 충성한 자들에게는 그 주군이 자신의 적일지라도 종종 상을 내리거나 벼슬을 내렸다.

 

그는 자신의 보호 아래 두었던 약한 사람들을 끝까지 지켰으며 평생 동안 흔들림 없는 신실함으로 그들을 보호했다.

 

[364]

과거 전쟁에서 격파된 적들인 위구르와 거란도 그가 가장 믿을 만한 보호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마치 훗날 그의 손자들이 시리아 기독교도들과 아르메니아인들을 더할 수 없이 확실하게 보호해주었던 것과 흡사하다.

 

칭기스칸은 자신의 정책에 확고하면서도 개화된 사람의 경험의 소리에도 귀머거리가 아니었다. 그는 많은 조언자들을 신뢰하였으니, 타타통아 같은 위구르인, 마흐무드 얄라바치 같은 무슬림, 야율초재 같은 거란인들이 그러하다.

 

나이만의 마지막 군주의 조정에서와 똑같은 일을 하던 타타통아는 칭기스칸의 아들들에게 위구르 글을 가르치는 가정교사였을 뿐 아니라 재상이 되기도 하였다. 마흐무드 알라바치는 트란스옥시아나 주민들에 대한 칭기스칸의 대리인, 즉 트란스옥시아나 최초의 몽골총독이 되었다.

 

[365]

.....이는 몽골인들의 야만성이 주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 르네의 관점인가? 아님 다른 역사학자, 특히 몽골학자 동양학자의 관점도 똑같은가? 무언가 종교적으로 세계관적으로 어떤 이유가 있는가? 몽골장수의 입장과 야율초재의 입장. 조세제도를 만들고 세금을 매기고......

 

(야율초재 왈 to 칭기스칸에게 조언)

토지에 세금을 매기고 상품에서 공물을 거둠으로써, 50만 냥과 비단 8만 필과 곡식 40만 석을 거두어들일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야율초재와 칭기스칸의 위구르 조언자들 덕에 온갖 대학살이 자행되는 가운데서도 몽골행저의 기초가 생겨났다. 이렇게 된 데에는 정복자 자신이 전반적으로 문화를 좋아하는 기질을 갖고 있었다는 점도 분명히 작용했을 것이다.

 

[366]

칭기스칸은 투르크-몰골 세계에서 가장 개화된 민족들인 거란과 위구르에 특히 끌렸던 것으로 보인다. 거란인들은 칭기스칸 일족의 제국에게 몽골인들의 민족성을 박탈하지 않고도 중국문화를 전수할 수 있었으며, 위구르인들은 오른콘과 투르판의 고대 투르크문명에서, 그리고 시리아와 마니교-네스토리우스교 및 불교적 전통이 남긴 모든 유산에서 그 일부를 몽골인들에게 전달해 줄 수 있었다.

 

실로 칭기스칸과 그의 바로 다음 계승자들이 그들의 관방 사무어와 문자는 물론 민간행정의 틀을 이끌어낸 것은 바로 위구르로부터였다. 훗날 위구르문자는 약간의 수정을 거쳐 몽골인들의 민족 문자가 되었다.

 

주앵빌그는 사람들이 평화를 유지하도록 하였다고 했다. 이 평가는 외면상으로는 역설적이다. 모든 투르크-몽골민족을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하고 중국에서 카스피해에 이르기까지 철의 기율을 강요함으로써 칭기스칸은 끝없는 부족전쟁을 억누르고 대상들에게 그들이 일찍이 알지 못했던 안전을 제공하였다.

 

아불가지칭기스칸의 치세 아래 이란과 투란(투르크인들의 땅) 사이에 있는 모든 나라들은 누구도 누구한테서도 어떠한 폭행도 당하지 않은 채 황금 쟁반을 자기 머리에 이고 해가 뜨는 땅에서 해가 지는 땅까지 여행할 수 있을 만큼 평화를 누렸다.”고 기록하였다.

 

그의 야삭은 전 몽골과 투르키스탄에 팍스 칭기스카나를 확립하였으니, 이것이 그의 시대에는 분명 무서운 것이었으나 그의 후계자들의 시대에는 부드러워졌다. 14세기 위대한 여행가들과 같은 성취도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 점에서 칭기스칸은 일종의 야만인 알렉산더로서 문명에 이르는 새 길을 열어젖힌 개척자였다.

 

 

 

 

3. 책 소개와 평가

 

세계지도를 펼쳐든다.

지금은 러시아 땅이 되어버린 바이칼 호, 그 근방에서 대제국, 몽골이 일어났다. 비단길 보다, 위도 상으로 하나 더 위에 위치한 초원길’. 이 책은 초원길의 주인공들의 이야기. 투르크(흉노, 돌궐, 위구르), 몽골(선비, 유연, 거란), 퉁구스(여진, 말갈, 만주)계로 대표되는 북방 유목민족이 그들이다.

 

중국의 중화에 영향을 받은 우리에게 그들은 오랑캐(?)’ 정도로 알려져 있다. 내가 배운 동양의 역사서에는 늘 중국이 중심에 있고 그들은 중국과 우리를 괴롭히고(?) 불편하게 하는 미개한 존재들로 기록돼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역사를 배웠다.

 

그런데 르네 그루쎄의 [유라시아 유목제국사]를 펼쳐보면서 나의 생각은 뒤집어졌다. 누가 주이고 누가 종인가? 중국이 주이기보다 북방 유목민족, 그들이 주가 되었던 적이 더 많았고 중국은 늘 그들에 의해 휘둘리고 있었다.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중국, 이란, 유럽의 정주민족을 침탈, 정복하거나 동화되고 분화하는 과정을 기록한 인류역사의 대서사시이다.

 

흑해, 코카서스, 볼가강, 텐산-알타이 산맥, 바이칼 호로 이어지며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광대한 초원, 사막과 산맥을 종횡무진하는 아틸라, 칭기즈칸, 티무르를 비롯한 유목민족의 영웅들!

 

그 시절 그들은 그 누구보다 빨랐다.

광활한 대륙을 말을 타고 달리며 기동성! 속도가 누구보다 빨랐기에 그들의 행동은 순식간이었다. 머무르지 않고 언제나 보따리를 싸서 앉은 자리를 털고 떠나야 하는 초원의 환경 속에 살았기에 머무름에 대한 집착도 미련도 없이 세상을 탐색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몽골의 영웅, 칭기스칸이 세운 대제국은 동서양의 문화를 연결하는 교두보가 되었다. 그는 동서양의 역사를 말말굽으로 찍으며 바꾸어 놓았다. 이 책을 통해 우리와 중국의 시각이 아닌, 나에게 한 때 오랑캐였던(?) 유목민족의 사고와 시선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 역사적 사고확장에 도움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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