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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19일 11시 33분 등록
관촌수필 [冠村隨筆]  
- 지은이 이문구

1. 차례
제1편 《일락서산(日落西山)》
제2편 《화무십일(花無十日)》
제3편 《행운유수(行雲流水)》
제4화 《녹수청산(綠水靑山)》
제5편 《공산토월(空山吐月)》
제6편 《관산추정(關山芻丁)》
제7편 《여요주서(與謠註序)》
제8편 《월곡후야(月谷後夜)》


2. 간략한 줄거리

일락서산 - 명절이 되어 고향에 다시 찾은 화자가 지난날의 할아버지와 고향에 대한 기억을 통해 집안의 몰락이야기를 함.

화무십일 - 6.25 피난길에 자신의 행랑채에 들어와 살게된 윤씨 영감네의 몰락 이야기. 서울사내와 눈맞아 야반도주한 며느리, 뒷산메 목을 맨 아들, 젖먹이 손주를 안고 집을 나간 며느리를 찾아서 상장시로 나선 윤영감.

행운유수 - 자신의 어머니가 시집올 때 따라와 어려서부터 부엌데기로 일하던 옹점이 이야기. 옹점이 시집을 가고, 남편이 징병가면서 시댁의 구박에 못이겨 친정으로 와서 나중엔 장돌뱅이 가수로 나선 옹점이를 먼발치로 지켜본 이야기. 
녹수청산 - 어린시절 같이 놀던 10살 연상의 옆집 사내 대복이 이야기. 대복이가 동네 처녀 순심이네 머슴이 된 사연
공산토월 - 성실하게 일하다간 요절한 석공 신씨이야기. 화자의 아버지와 석공의 인연이 훗날 화자로 이어지고, 신씨의 딸 정희와의 인연으로 이어짐.

관산추정 - 동네에서 잡일만 도맡아하고 가난하게 살던 자신의 아버지(유천만)를 꼭 닮은 고향친구 유복산와 변해버린 대천풍경 이야기 

여요주서 - 어리숙한 동창 용모가 친구 아들녀석이 덧놓아 잡은 꿩을 대신 팔아주려다가 밀렵으로 오해받아 재판 받은 이야기. 
월곡후야 - 동네 불미스런 사건을 해결하려는 청년들의 우격다짐을 목격한 것과 그중에 한 청년(친구의 동생)이 여자랑 동네를 뜨는 이야기

3. 관촌수필을 접하고, 읽고

관촌수필은 안정효의 <<글쓰기만보>>에서 언급한 것을 보았다. 어려서 한문을 공부한 작가답게 그 특성을 살렸으며, 만연체에 깃든 도도함과 토속어가 살아있는 소설이라고 했다. 처음으로 글쓰기 만보로 접했을 때는 특이한 소설이 있나보다 했었다. 그리고 그게 어떤 문체인지 궁금했었다. 그러던 중에 몇 년전에 대학로에서 친구와 함께 관촌수필이란 연극을 보게 되었다. 연극은  행운유수를 다루고 있었다. 옹점이와 재미난 놀이를 하고, 기차가 달리고, 옹점이가 나중에 가수가 되어 노래를 부르는 그런 것이었다. 연극을 보면서는 이런 내용을 어린이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었었다. 그건 지금과는 너무나도 다른 시대상황이었다. 소설 속의 풍광은 지금과는 너무나 다르다. 관촌수필 속 화자도 옛날 자신이 그곳에 살던 때의 대천과 명절에 산소에 성묘하러 갈 때 둘어보는 대천의 모습은 너무나도 다르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그보다도 30,40년이 더 지났으니 그 속의 사건들과 풍경(무대배경)을 자세히 묘사하지 않고 그것들의 연계성을 드러낼 수 있을까, 연출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할 수 있을까 의문이었었다.

 

그러나 소설은 연극과는 달리 다른 의문들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소설이 몇년전 연극과는 판이하게 다른 점이, 소설 속 화자 나가 풍광이나 사람들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어 개연성이 있어 사람에게 집중할 수 있게 한 점이다. 연극은 공연이라는 것을 고려하여 재미라는 요소 때문에 사람의 심리는 잘 보여주지 못했던 게 아닌가 한다. '관촌수필'이란 말로 검색해보니 몇몇 비평가들이 쓴 글을 찾게 되었는데, 그중에 눈에 띄는 것이 <관촌수필>을 평범한 사람들의 <~전>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관촌수필은 연작소설로 각편이 화자가 기억하는, 근래에 다시 만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이것을 비평가는 <사기열전>과 비교하기도 하였다.

 

읽는 중에 <피터드러커 자서전>도 떠올랐다. 그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을 중심으로 해서 자신의 자서전을 썼다. 어떤 어떤 사람들과 어떤 사건이 있었고, 어떤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사람 중심으로 섰다. 자서전을 이런 방식으로 써도 좋을 듯 싶다. 물론 이것은 자서전이 아니라 자전적 소설이다. 고향사람들의 통해서 자세히 들여다본 사람들의 모습과 변해버린 시대상을 담았다. 작가 이문구처럼 자신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제는 나이들어 삶에대해 한편으로 보면 무심한 듯 관망하듯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내게 이 이야기를 끌어온다면 내 주변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나를 정리하는 자서전 같은 것이 될 듯 싶다. 


꿈그림 관련 책을 쓸 때 구성을 사람 하나하나가 챕터가 되게 하고 싶다. 관촌수필과 같이 제목하나에 사람하나, 그리고 절달하고자 하는 이야기하나. 관촌수필의 각 편의 제목(소제목)은 여러가지 생각을 갖게하는 제목이다. 아는 한자어 사자성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사자성어를 풀이하면 주요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첫 책에 그림과 꿈과 사람이라는 다양한 요소를 한데 묶어서 각편을 구성해야 한다면 이러한 제목구성도 참고해볼 만하다.

 

===

일락서산 
9. 시골을 다녀오되 성묘가 목적이기는 근년으로 드문 일이었다. 더욱이 양력 정초에 몸소 그런 예모를 찾고 스스로 치름을 낳고 첫 겪음이기도 했다. 

9. 그러나 할아버지에 대한 결례(불효)를 저지르고 있다는 느낌을 나 자신에게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아주 어려서부터 이렇게 되기까지, 우리 가문을 지킨 모든 선인 조상들의 심상은 오로지 단 한 분, 할아버지 그분의 인상밖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내가 그리워해온 선대인은 어머니나 아버지, 그리고 동기간들이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색창연한 이조인이었던 할아버지, 오직 드 한 분만이 진실로 육친이요 조상의 얼이란 느낌을 지워버릴 수 없는 거였고, 또 앞으로도 길래 그럴 것같이 여겨진다는 것이다. 

10. 그 중에서도 맨 먼저 가슴을 후려친 것은 왕소나무가 사라져버린 사실이었다. 분명 왕소나무가 서 있던 자리엔 외양간만한 슬레이트 지붕의 구멍가게 굴뚝만이 꼴불견으로 뻗질러 서 있던 것이다. 

11. "이애야, 이 왕솔은 토정 할아버지께서 짚고 가시던 지팽이를 꽂아놓셨느디 니냥 자란 게란다. 그쩍에 그 할아버지 말씜은, 요 지팽이 앞으로 철마가 지나가거들랑 우리 한산 이씨 자손들은 이 고을에서 뜨야 허리라구 허셨다는 게여.... 그 말씜을 새겨들어 진작 타관살이를 했더라면 요로큼 모진 시상은 안 만났을지두 모르는 것을....... " 

12. 이젠 완전히 타락한 동네구나 - 나는 은연중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음을 스스로 깨달았다. 마을의 주인(왕소나무)이 세상 뜬 지 오래라니 오죽해졌으랴 싶기도 했다. 

19. "그래 너는 몇 살이나 되었다더냐?" 
그러자 그녀는 아무 어렴성 없이 아는 대로 대꾸했다. 
"지 에미가 그러는디 제년이 작년까장은 제우 여섯 살이었대유. 그런디 시방은 잘 모르겄슈." 
"늬가 늬 나이를 모른다 허느냐?" 
"예. 위떤 이는 하나 늘어서 일곱 살이라구 허던디 또 누구는 하나 먹었응께 다섯 살이라구 허던거유." 
* 옮겨적으면서 주의했다. 표준어 맞춤법을 지킨다면 충청도 사투리를 모두 제거해버릴 것 같아, 일부러 오타를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글을 읽으면서 참 재미나게 읽었고, 한자어까지 사투리 발음을 하는 것을 보고 놀래며, 키득키득 웃으며 보았다.

 

29. 마을을 아주 떠나던 날까지도 일가 손윗사람이 아닌 이에게는 무슨 경어나 존칭을 써본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의 지시였고 곁에서 배운 버릇이었다. 나이가 직수굿한 어른들한테는 으레껀, 김서방, 최서방 하며 성 밑에 서방이란 명칭을 붙여 불렀고, 어지간한 청장년들한테는 덮어놓고 아무개아무개 하며 이름을 부르곤 했었다. 그것은 동네 아낙네들한테도 마찬가지였었다. 아무개어머니 아무개아줌마니 하고, 그 집 아이의 이름을 빌러 썼던 것이다. 요즘 같으면 그처럼 되지 못한 수작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그때는 그것이 제격인 듯했고, 하는 편이나 듣는 쪽에서나 예사로이 여겼던 줄로 안다. 안팎 동에 사람의 거지반이 행랑이나 아전붙이였으므로 하대햐야 마땅하다는 것이 할아버지의 지론이요 고집이었던 것이다. 그결과는 안팎 삼동네를 다 뒤져도 친구할만한 친구가 있을 수 없었던 고적한 소년 시절이 비롯된 씁쓸한 것이었지만, 정말 친구가 생기지 않았다. 

31. 6.25 사변이 나기는 내가 2학년에 진급한 초엽이었다. 그 날리는 우리집을 완전히 쑥밭으로 만들어놓았다. 한 고들의 어른을 잃은 애석함은 일가붙이가 아니더라도 갈머리 사람이라면 마찬가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인간의 영고성쇠란 그처럼 무상한 일이란 걸 알게 된 동기도 그것이었고, 곁들여 집안에 어른이 없는데도 동네 아이들이 나와 접촉하길 꺼리던 사실에서, 인생의 생사를 한갓 띠끌에 견주던 전쟁이라는 막중한 참극을 겪고도 습관만은 허술하게 허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울러 깨우치게 되었다. 어쨌든 중학생이 된 뒤에도 마을 친구가 붙지 않던 것은 어느 모로나 적적하고 불편한 일이었다. 

52. 이제 생각해보다도 우스은 일은 음식을 대하는 자세를 훈계받고 실행했던 일이다. 그것은 천자를 배울 때부터 이미 실천했던 일이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채중개강을 설명하면서, 
"흔히들 소채 반찬일수록 생각 읎이 만들고 맛 모른 채 먹느니라. 그러허너 긤생려수허고 옥출곤강인 법, 이전버텀 군자는 푸성귀일수록 가려 먹으랬어. 부디 채즁개강이란 말을 닛지 말 것이니, 푸성귀 속에 게자와 새양이 안 들어가면 상것들 음석으로 예겨라." 
"예." 
나는 덮어놓고 대답하도록 배웠으매 저절로 나온 응답이었다. 
"이후 워디를 가 혹 음석을 먹는 일이 있더래두 게자 새양이 안든 음석이랑은 절대 입에 대지두 말으야 쓰느니라." 
그로부터 나는 사오 년 동안이나 남의 집 김치며 나물 따위를 먹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애썼던 것이다. 요즘도 이따금 채중개강이 문득문득 생각킬 정도로 애써 실행했던 것이다. 음식에 대한 할아버지의 자세는 그만큼 철저한 것이었다. 

55. 아버지는 어떤 면에서 보면 할아버지보다는 더 완고한 구석이 없지 않았던가 싶다. 곁들여, 할아버지에게는 부족했던 도량과 포용력을 넉넉하게 갖춘 사람이었다. 그것은 지하조직을 전문으로 했던 당시로서는 매우 적합한 처신책이며 처세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식들에 대한 훈육만은 서슬이 퍼렇게 냉엄했다. 
뿐만 아니라 세 고을(보령, 서천,청양군)의 지하당을 창설하고 이끌었던 책임자로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음에도, 매사에 지극히 의연하고 여유 있고 묵중한 자세로 일관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늘 어려워하고 있었다. 두려워하고 있었다고 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소문난 달변이면서도 집 안에서는 늘 과묵한 성격이었고, 그런 과묵과 침착 냉정한 거둥이 느껴질 때마다, 나는 인자함이나 너그러운 관용보다도 위엄과 투지를 엿보면서 방구석의 재떨이마냥 움츠러들기만 했던 것이다. 


화무십일 
63. 윤영감네 일가가 관촌부락에 들어온 것도, 그렇게 죽지 못해 삼동을 물리고 해가 원수같이 길어지기 시작한 어름이었다. 

65. 그들은 여러 가지를 요구 하고 있었다. 값지다거나 소중한 것도 아니었다. 간장, 된장, 소금, 고춧가루, 더러는 김치 맛보기를 원으로 하던 이도 있었다. 하룻밤 묵어가기로 작정한 경우, 아녀자들은 버덩이나 등성이 기슭, 그리고 논두렁과 바두둑으로 퍼져 새로 돋아난 나물들, 쑥, 냉이, 소루쟁이, 질경이 따위를 뜯어다 삶던 것이다. 
모든 것을 얻어다 먹던 우리 형편으로서는 어느 한 가지도 그들을 원하는 것을 나누어줄 수가 없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장독대에 가보았자 토 뜨는 간장 한 종지, 맛 가신 된산 한 덩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네들은 없다는 말을 곧이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렇듯 덩실한 집에서 박절하게 거절할 법이 없다던 거였다. 특히 적삼 위로 제법 가슴살이 오른 처녀나 여남은 살 된 계집애가 그릇을 들고 들어섰다 하면, 우리가 별소리를 다해서 빌려도 소용이 없던 것이다. 
"사람이 집 떠나면 독해진다더니 증말이구먼. 어쩌면 그리 비윗장이 좋게 끈적대는구." 
나그네라면 넌더리가 났던 어머니는 결국 그들의 끈기를 감탄해마지 않았다. 그렇잖아도 씁뜰한 쑥국을 맨탕으로 끓이면 어찌 먹겠느냐, 양념 없이 무친 들나물인데 간을 못 하면 짐짐해서 어찌 먹겠느냐, 그들은 그런 항의를 하면서 대문간이나 토방에 눌러 붙으면 물러갈 줄 몰랐다. 정말 없어서 못 주는 딱한 사정 - 지금 돌이켜 생각해봐도 웃을 일이 아니었다. 윤영감네 일가를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경우였다. 

77. 그러나 결말은 뜻밖으로 일렀다. 너무도 간단한 맺음새였다. 솔이 엄마가 줄행랑을 놓음으로써 답답하던 난제가 하루 아침에 마무리됐던 것이다. 오복여관에 하숙하고 있던 서울 사내가 없어진 것도 같은 날이었다. 솔이 엄마가 입은 옷 그대로 나갔듯, 그 사내도 새벽에 나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길래 알 수 없었던 - 그것은 그녀가 솔이를 데리고 나간 점이었다. 
젖먹이를 버릴 수 없는 한 가닥 모성애가 남아 있었던 것일까. 솔이를 업고 나가지만 않았더라도 일이 그토록 허망하게 뒤틀리지는 않았으련마는. 
너무도 애틋한 패가망신이었다. 남이 가문을 순식간에 파멸시킬 수 있었던 그 가증스러운 것 - 그것은 곧 여인의 마음이었다. 

행운유수 
84-85. "옹젬이 밑잇것은 애가 죄용허구, 노는 게 싹이 뵈던구나......" 
할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언년이에게 복점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즉흥적인 작명이었으나 보리밥 같던 언년이 생김새에 걸맞게 어울리는 이름 같았다. 복점이는 차분한 성질이었고 굼뜨되 능청스럽기도 하여 동복 자매 같지 않게 옹점이와는 퍽 대조적인 아이였다. 
"후제 시집가면 저 덜렁쇠보담 즉은 것이 더 낫으리라." 
그녀 자매를 놓고 어머니도 그렇게 보고 있었다. 
"큰것버덤 밑잇것이 낫어. 얼굴도 달싹허구 승질두 고분허구." 
마을 아낙네들도 같은 의견이었다. 그렇지 않다고 우긴 것은 나 혼자뿐이었다. 물론 정실이 지배한 판단이었지만 나는 언제나 옹점이 역성을 들었던 것이다. 
* 이 대목을 읽는 데, 걱정이 되었다. 이미 옹점이의 훗날을 알고 읽고 있으면서도 어른들이 옹점이를 이렇게 본다는 것을 앞에 넣은 것을 보면서, 옹점이의 인생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겠구나 했다. 그러면서 어른들이 날 보시며 했던 말도 떠오르고, 내 동생을 보시며 하셨던 것들도 떠올랐다. 그런 말은 대개가 틀리지 않다고 한다. 


91-92. 한바탕 북새를 치르고 난 뒤, 
"즈ㅐ는 주뎅이두 흠허더라. 야중 워떤 것이 저런 것을 데리다 살는지 걱정이 태산이랑께." 



그녀는 그만큼 입이 걸고 성질도 사나웠지만 늘 시원시원하고 엉뚱한 데가 있었으며 의뭉스럽기도 따를 자가 없었다. 육덕 좋은 허우대나 하고 곱게 쪽집은 눈썹과 사철 발그레하게 피어 있던 얼굴이며, 그녀는 안팎 모가비 총각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남달느 눈썰미로 한번 보면 못 내는 시늉이 없었고, 손속 또한 유별났으니 애써 가르친 바가 없어도 음식 맛깔과 바느질 솜씨는 어머니도 나무랄 수 없음을 진작에 선언한 정도였다. 
동냥을 주면 종구라기가 넘치고 개밥을 주어도 구유가 좁게 손이 컸다. 

92. "말꼬랑지 파리가 천리 가더라구 옹젬이가 그렇당께." 
부락 살마들은 그녀의 억척과 솜씨를 그렇게 비유하였고, 그녀는 그녀대로 그런 말 듣게 된 자신을 대견스레 여기는 것 같았다. 
그녀가 열여섯이라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안팎 동네의 머슴이나 품일꾼, 그리고 어리전이나 드팀전을 보아 제 몫을 하던 장돌뱅이 총각들이 눈독을 한몸에 받고 있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총각들은 장차 그녀를 아내로 맞고 싶어서 그러던것은 분명 아닌 것 같았다. 그 시절만 해도 혼사에 있어서만은 으레 근본의 어떠함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던 것이다. 양반 찌꺼기들은 말할 것도 없고 향품배 끄리머리만 되어도 집안이 이렇고 저러함을 가장 큰 구실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경우 교전비와 난봉난 행랑것 사이에서 태어났던 그녀의 신분은 누구라도 고개를 저을 커다란 허물이었다. 아무리 소견을 들어 됨됨이가 쓸만하고 살림에 규모가 있더라도 그녀의 내력을 번연하게 외던 근본 사람이라면 거들떠보려고도 않을 판이었다. 그러므로 아는 총각들이 그녀를 좋아한 것은 그녀의 빼어난 노래 솜씨, 그렇다. 그 노래에 반한 거였다. 

117. 그러나 시집 식구들이 그녀에게 집중적으로 가한 구박 뒤에는 무엇보다 그네들 나름의 절실한 것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자식 없는 며느리, 언젠가는 다른 사내 해가서 팔자 고필 젊은 며느리, 그것은 곧 남의 자식이었다. 어차피 남의 자식인데 구태여 없는 양식 축내가면서 먹여줄 필요가 있겠는가, 이왕 떠날 것이면 하루라도 일찍 없어져달라, 쌀 한줌 보리쌀 한됫박이 금싸라기 같던 판이었으므로 아마도 시집 식구들은 그런 생각을 밑바닥에 깔고 있었던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오기와 배차기로 장날이면 일부러 장에 나와 젓갈치 꽁댕이나 꽁치뭇을 사들고 들어가고 더러는 고깃칼도 들여다 먹었다. 
읍내의 장사치들은 대개가 토박이들이었으므로 십중팔구는 그녀가 우리집에 있을 때부터 얼굴이 익은 터였으니 모든 것을 외상으로 달아놓는다면 못 할 일이 없을 거였다. 그러나 식구들은 색다른 반찬이 상에 오르면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새래기국과 우거지찌개만을 원수대고 먹었으며, 그럴수록 옹점이는 보라는 듯이 자기 혼자서 그것들을 쓸어 먹어치웠다. 결과는 뻔했다. 옹점이가 견디가 못해 친정으로 되돌아온 거였다. 


녹수청산 
128. 대복 어메는 불씨 왕래에 관해선 한 번도 고자질한 적이 없다. 그네들 사이에 무슨 묵계 비슷한 수작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칫하면 옹점이와 원수지고 말게 됨을 잘 알고 있어서였으리가 싶다. 지게도 작대기가 있어야 일어나거늘, 옹점이와 원수져서 이로운 이 있을 리 있을 터인가. 
대복 어메의 손버릇에 대해서 위는 모든 걸 이해햊려고 한 셈이다. 그녀의 허물을 구설거리로 삼기 전에 가난으로부터 건져 줄 수 없음을 더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조가네는 가난에 찢어지는 살림을 하고 있었다. 무슨 수로도 헤어나기 어려울 애달픈 살림이었고, 그것은 마치 전생의 무슨 업처럼, 하늘과 땅으로부터 얻은 게 아무것도 없는 생활이었다. 열무 한 소쿠리 솎아 먹을 땅이라곤 없었고, 조패랭이가 이미 늙었으매 선새경이라도 당겨다 먹게 머슴 들일 집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네는 굶은 적이 없다고 했다. 삼순구식은 근근이 면했던 것이다. 쌀독에 거미줄이 서려도 곡기 걱정은 않게 되어 외려 타고난 먹을 복이란 소실 듣고 있었으니, 그것은 몸이 가볍고 부지런한 덕분이었다. 대복 어메는 하루의 대부분을 우리집에서 살다시피 했으므로 배곯을 리가 없었다. 들바라지, 터앝에 김매기, 빨래 다듬이질, 방아찧기와 잔심부름 등, 그녀는 안팎으로 나다니며 허드렛일이면 누가 시키기 전에 해치울 줄 알던 것이다. 

133. 철호보다도 옹점이가 더 미덥지 않은 말로 나를 타이르려고 하였다. 
"예비당이나 절 삼년 댕긴 사람허구는 마주앉지두 말라구 했단 말여......" 
하고 그녀는 말했다. 다시 목소리를 낮추어가지고, 
"장바닥 삼 년 쏘댕긴 늠이 여북헐깨미. 대뵉이는 순전 도둑늠잉께 상대두 말란 말여. 너 대뵉이 쫒어댕기다 순사헌티 붙잽혀가먼 워쩔래? 도둑늠이라고 대뵉이허구 하냥 묶어가버리면 워칙헐 티여......." 
* 예배당이나 절 3년 다닌 사람하고는 마주 앉지도 말라..... 요즘 그런 생각 든다. 변화경영연구소 홈페이지에서는 정치와 종교이야기를 금한다. 


155. "밤도적늠이 세상 뒤바뀡께 낮도적늠 되더랑께 ......" 
시달리다 못해 그렇게 막말하는 소리도 나는 들었다. 
"사람 되어분다는 풍신이 아주 버린 늠 되였버리니......." 
"그 자식 읎어지는 것 보구 싶어서라두 한 번 더 뒤집히야 허여......" 
오죽 보기 싫었으면 그런 위험한 말까지 입 밖에 냈을까. 
"제깟늠이 그러다 말지 뭐쩔라데유, 시국도 어채피 몇 조금 안가 엎어질 텐디......" 
"그 능깔 핏발서가지구 미친 가이마냥 쏘댕기는 거 보슈, 조심휴, 입바른 소리 허다 말버릇 고치게 되지 말구......" 

157. "평지에 지어두 절은 절인디, 대복이라구 보는 것처럼 허는 게 낮을 줄 모를 거여?" 
준배 아버지는 때복이 역성을 들고픈 눈치였다. 
"보리밥풀루 잉어를 낚자는 심뽀지, 츤헌 짐승일수록 새끼버텀 깐다더니 되다 만 것이 인저 사람 도둑질루 들어섰단 말여." 
"두엄에다 집장 띄워 먹구 흠친 떡 뒷간에 가 먹기지. 지집 사내 붙는 디 무슨 공부 무슨 학문이 필요혀?" 

159. 상술 어머니뿐 아니라 다들 잘 걸려들었다며 고소해했으나 오직 나만은 예외였다. 대복이를 두둔하고자 그런 건 아니었다. 이유가 있었다. 엉뚱하게도 나는 대복이와 순심이가 그 계제에 혼인을 해 버리면 제일 좋겠다 싶었던 것이다. 순심이마냥 마음결 곱고 예쁜 처녀와 신랑 각시 하고 살면 대복이도 착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대복이는 갇히고 달포 가까이 되는 데도 풀려나오지 못했다. 과거가 이러저하한 불측한 인간이니 단단히 족치고 닦달하도록 순심이가 뒷공작을 해서 그러는지 모른다고도 했으나 그것만은 근거 없이 나돈 말 같았다. 

163 그럴 즘이었던가보다, 언제나 사람을 놀래오온 대복이가 다시 하넌 온 동네를 들었다 노았던 것은. 
누구나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 사람들은 심지어 대복이의 정신 상태마저 의심하면서 입을 못 다물고 있었다. 그러나 놀라긴 마찬가지였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하며 옳은 일이라 여겼고, 혼자 흐뭇해하되 새삼스럽게 대복이가 좋아졌을 정도로 그를 지지하고 싶었다. 아, 그 놀랍던 일을 어찌 장황하게 늘려 말할 겨를이 있으랴, 대복이가 참봉집에 머습으로 들어갔던 일을. 

168. 만세와 군가는 그러부터 얼마 안 돼 이틀이 멀다고 되풀이하게 되었다. 휴전협정 반대 궐기대회나 중립국 적성 감시위원단 축출 궐기대회 때에도 수없이 불러야 했던 것이다. 우리들은 그 일을 그저 시키니 한다는 투로 무의미하게 반복했다. 하물며 군대에 나간 가족이아 당내간의 친척이 전혀 없었던 나의 경우임에랴. 다만 내게는 단 한번의 예외가 있었을 따름이다. 
단 한 번의 예외, 그것은 군대 보낸 가족들의 그 비절했던 심경을 한꺼번에 이해할 수 있었던, 그리하여 무릇 전쟁의 가증스러움, 목숨의 허무함, 인생의 무상함, 생활이란 것의 부질없음, 새월의 덧없음을 조금씩 깨우치기 비롯하고, 알면서 살고 싶은, 쉬운 말로 느낌을 가져온 계기이기도 하다. 
대복이가 출정하는 것을 지켜본 날, 예외란 바로 그날이었다. 


공산토월 
175. 이 나라에 천을 헤아리는 글쟁이 가운데 소설꿈난 해도 2백여명이 웃도는데 하필이면 나를 지목하는가. 인기와 네임 밸류라는 것이 전무한 무명초이눌 알면서 평소 안면이 있다고 만만히 보았는가. 아니, 나를 이름난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갸륵한 정실로 그러는 줄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경우 오히려 나에게는 백해무익한 노릇이다. 

178. 이해하기 거북할는지는 모르나 나는 어쩐지 나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 곁에 있으면 사뭇 불안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내가 좋아한 사람은 아무 이해 관계 없이 자기 성격에 의해 나를 좋아하던 사람임에 두말할 필요가 없다. 
더러 예외가 없을 수 없겠지만, 나는 누구보다도 아무 타산 없이 자기 천성으로 나를 좋아한 사람을 좋아한다. 애초 이렇다 할 인연도 없었고, 재산 권세 이해득실 따위를 개떡으로 알면서 그냥 그저 그렇게 명목 없이 좋아할 수 있던 사람. 다행스럽게도 나는 그런 사람을 많이 알고 있다. 멀리는 여러 백리를 상거하여 한 해에 고작 한두 번 만나볼 수 있던, 천리상봉 만리별의 선배들을 비롯하여 하루가 멀다하고 상종해온 서울의 그 사람들 -, 구체적인 예를 들어도 무방하다면 대전의 두 시인, 박용래씨와 임강빈씨를 들먹일 수도 있다. 어엿한 인연이랄 것이 없는 두 시인이지만, 실례를 무릅쓰고 과실에 빗대어 일컫기를 마치 홍시감과 같다고 하면 어떨는지 모르겠다. 홍시는 겉과 속이 한 가지 색깔이며 어루만지기 더없이 부드러운 피부를 가졌으되, 외부의 강압적인 폭력만 작용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물러터지거나 깨어짐이 없음에서이다. 

188. 쌀밥과 콜라와 포도가 먹고 싶어 살인 강도를 저지른 소년을 나는 끝내 증오하지 않을 것 같다. 

196. 그는 보통학교만을 겨우 마친 뒤 어려서부터 생일이 몸에 배었던 한갓 농투성이였으니까. 그태여 시체에 맞춰 석공에게 이름을 주자면 석재 수집가라고나 할는지. 그는 태깔과 크기가 저마다 다른, 일상에 쓸모 있는 돌들로만 모았던 것이며, 남의 집 아궁이 붓돌이나 방고래를 놓는데에, 더러는 이웃에서 굴뚝이나 담장을 쌓든가 장독대를 늘리는 데에 기꺼이 나눠주곤 하였다. 지금 생각이지만 그는 쓸모 있을 성부른 돌을 무조건 모아놨다가 필요한 이들에게 나눠주는 재미로 돌쟁이가 됐던 것 같았다. 

211. 누구 음성이렀을까, 생전 처음 들어본 그 구성진 가락은. 석탄백탄이 타는데, 연기만 펑펑 나는데에..... 이 내 가슴 타는데, 연기가 하나도 안 나는데.... 나는 키가 모자라 사람다리만 빽빽한 쪽마루에 비디대고 올라가 넘어다보았다. 그리고 놀랐다. 놀라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한 손으로 주안상 가장자리를 두들겨가며 앉아서 노래하는 어른, 코와 눈이 그렇게 크고 음성 또한 굵직한 신사, 그이는 아버지였다. 나는 가슴이 벅차올라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황홀하기도 하고 의심스럽기도 하여 얼마를 두고 뚫어지게 바라보았으나 분명 아버지였다. 당신으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에 도취된 모습이기도 했다. 우선 석공네 울안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현실 같지 않았고, 노래를 하는 것도 사실 수가 없으련만, 모든 것은 눈에 보인 그대로였다. 아버지는 동네 어느 누구네 집도 울안은 들어가본 적이 없는 터였다. 일가간인 한산 이가네로서 노인을 모시는 집안 이거나 당내간의 사랑이라면 더러 출입이 있을 따름이요, 그것도 울안에 발을 들인 일이란 한번도 없던 터엿으니, 하물며 전에 일갓집 행랑살이를 했던 사람네 집이겠는가. 신서방은 덩실덩실 춤을 추었고, 아버지의 맞츤 편에 꿇어앉은 석공은 연방 싱글벙글 웃어가며 솟음솟음하는 신명을 어쩌지 못해 답답한 표정이었다. 아버지가 술잔을 받아들자 신서방은 일어서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아, 나는 그때 또 한번 크게 놀라고 말았다. 다시 한번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음이니 그것은 아버지가 일어나서 어깨춤을 추기 시작한 거였다. 그때까지 내가 알고 있던 아버지는 그렇게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할아버지 앞에서는 항상 무릎 굻고 조아려 공손하기가 몸종과 다름없었지만, 처자 앞에서는 단란하고 즐거워 웃더라도 결코 치아를 내 보인 일이 없게 근엄하되, 한내천 백사장에 강연장이 설치되면 뜨내기 장돌뱅이까지도 전을 걷어치울 정도로 수천 군민이 모여들게 마련이었으며, 산천이 들렸다 놓인다 싶게 불 뿜듯 웅변을 했는데, 그때마다 청중들로부터 천둥보다 더 우렁찬 환호와 박수 갈채를 얻고 당신을 알던 모든 사람들한테 선생님이란 경칭을 받았던, 저만치 멀리로 건너다보이며 어렵기만 한 사람이었다. 어디 그럴 법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남의 집 울안 출입에 노랫가락과 어깨춤 ..... 신기함과 경이로움을 주체하지 못해 나는 몹시 당황했지만 그러나 그런 거북스러움도 슬몃슬몃 가셔지고 있었다. 멍석 가장자리로 둘러서 있던 모든 사람들이 덩달아 함께 어울려 춤을 추기 시작했던 것이며, 그 속에는 작대기 막대기와 새끼다래를 내던진 쌍례 아배와 복산 아매, 덕산이와 조패랭이가 섞인 채 누구보다도 흥겨워 몸부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흥겨움에 감싸여 흐른 밤은 얼마나 되었을 까. 모든 사람들의 배웅을 뒤에 두고 나는 아버지 뒤를 따라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아버지 그림자를 밟지 않기 위해 나는 이만큼 뒤처져 걷고 있었는데, 그림자가 너무 길다고 느껴져 불현듯 하늘을 우러르니, 달은 어느덧 자리를 거으 다 내놓아 겨우 앞치마만한 하늘을 두른 채 왕소나무 가지 틈에 머물고 있었으며, 뒷동산 솔수펑이의 부엉이만이 잠 돗 들어 투덜대고 있었다. 아버지는 사랑 앞에 이르도록 헛기침 한번 없이 여전 근엄하였고, 나는 버긋하게 지쳐놓은 대문을 돌쩌귀 소리 안 나도록 조용히 여닫으며 들어가 이내 곤한 잠에 떨어져버렸다. 이튼날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요 위가 질펀하니 한강이었고 아랫도리가 걸레처럼 척척했으나 부끄러워서 일어날 수도 없었다. 
"삼심 년을 모시면서 보기를 츰 보겄다. 아마 평생 츰이실걸....." 
어머니 음성이 들여오고 있었다. 
"지년만 츰인 줄 알었더니 아씨두유?" 
옹점이 대꾸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나중 안 일이지만, 어머니에게 평생 처음으로 보인 일이란 그날 밤에 아버지가 손수 행한 바의 모두를 말함이었다. 귀로에 한쪽 발을 헛디뎠던 일도 그 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양말 한짝이 마당가 우물 도랑물에 젖어 있었다던 것이다. 어쨌든 그날 밤에 있었던 아버지의 거동은 오랫동안 여러 동네의 화젯거리였은 줄 안다. 모두들 처음이며 아울러 마지막일 터임을 미루어볼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그랬지만 그 후부터 더욱더 신서방은 아버지 보기를 조심스러워한 것 같았고, 석공의 얼굴에선 어쩌면 자기 부모보다 우리 아버지가 훨씬 더 어려우면서도 가까이 뵙고 싶은 마음이 역연함을 엿볼 수 있었다. 
* 아버지에 얽힌 이야기다. 아버지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으로 옮겨적기에는 좀 길었는데, 이 부분이 화자가 아버지를 어려워하는 면과 아버지의 이력, 성격이 드러나는 부분인 것 같아 옮겨 적었다.


214. 할아버지께 석공이 큰절로 인사드릴 때, 그의 물색공단조끼 등허라 한복판에 무늬 널따란 모란꽃잎이 문창호 엷은 빗살에 윤기를 내뿜으며 빛나는 것도 보았다. 지게 멜빵밖엔 걸어본 적이 없던 그의 두 어깨였지만 생전 처음 걸쳐진 비단조끼였음에도 조금치의 어색함이 없음을 나는 아울러 발견했던 것이다. 석공은 명색이 자기 이름도 모를 만큼 무심했던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러 왔다고 했으나 그것은 한갓 구실이었을 뿐, 대취하도록 귀가했던 아버지에게 문안드림이 목적이었은 줄은 우리 가족으로서는 모르는 이가 없었다. 석공이 우리 울안 마루에 올라앉아 보기도 그날이 처음 아니었을까 한다. 

223.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 가지 이상한 것은 피의자가 잠적해버렸음에도 그 가족들의 신변이 무사하던 일이어었다. 신서방이 불리어가 다리가 부러졌거나 새댁이 닦달을 당해 어디가 어찌 되었다거나, 하여간 석공이 검거될 때까지는 남은 사람이 못살아 했어야 그 무렵의 상황에 걸맞을 일이련만, 그 흔한 가택 수색 한번 나온 것을 구경하지 못하겠던 것이다. 그런대로 석공 새댁은 머슴도 상머슴이 다 되어 손에 연장 놓을 때가 없었고, 논밭걷이와 씨앗뿌리기에 벗은 발 신발 찾을 새가 없었다. 두엄 져나르기와 돼지꼴 베어들이기는 지게로 했고, 가물 타 오갈든 김장밭에 물지게를 져나른 밤에도 보리쌀 대끼는 절구 소리로 이웃의 잠을 설쳐놓곤 했다. 

250. 내 소맷자락을 뜯어먹을듯이 거머쥐며 그는 울부짖었다. 
"정히 ... 훗년이면 그년두 중학 들어갈 텐디, 자네 후제라두 우리 정히 잊지 마소. 부디 그년 좀 배우게 해주야여. 자네 장가가 살림나면 자네 집에 데리다가 식모루 쓰소. 식모 시키면서 야간 핵교라두 보내주야 허여..... 자네가 책임지구 고등과까지만 가리쳐주어 ...... 애븨 읎이 큰 샊들, 글이나 넘들 반만침이라두 배우야지......" 
그는 그것으로써 유언을 한 셈이었다. 나에게 남긴 유언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251. 이젠 거들어주고 돌보아줄 일도 모두가 끝나버린 거였다. 차에 시동이 걸리니 아우와 매부 품에 안긴 채 동자 없는 눈을 했던 석공이, 택시 유리문 너머로 내가 어릿거리자 뜻밖에 터그로 나를 부르는 시늉을 했다. 나는 다시 택시 문을 열었다. 이젠 준비해두었던 말로 고별 인사를 하며 손을 내밀어 악수로 영결해야 될 차례였다. 내가 고개를 차 안으로 디밀며 입을 열려 하자, 석공이 먼저 꺼져가는 음성으로, 
"잘들 사는 걸 보구 죽으야 옳을 텐디, 이대루 죽어서 미안하네.... 부디 잘들 살어......" 
하며 움직여지지 않는 손으로 악수를 청했다. 나는 울었다. 


관산추정 
283. 유천만이가 동네 초상집에 밤샘하지 않은 적이 없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일이었다. 아는데가 많아 멀리까지 부고를 돌리며, 상여 앞에 공포잡이로 앞서고 돌아와 문간의 사잣밥을 치우는 것이 그가 즐겨하던 일이었다. 초상집 싸움판은 그가 끼여들어야 푸짐해졌으며, 대소상 제삿집에 온 거지들도 국수솥에 불을 때고 있던 그의 눈에 띄어야만 맨입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가 있었다. 

283. 내가 들키면 걱정 듣던 집안 어른 몰래 복산이의 어깨동무가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복산이가 그런 사람의 자식이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복산이도 좋은 아이였다. 그것이 대복이에 미치지 못했던 것은 나이 탓이었을 뿐, 마음 씀씀이는 작은 대복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너그럽고 자상했다. 그는 나보다 두 살이아 위였는데 하는 짓을 보면 천만이와 만만이를 반반씩 빼다 박은 꼴이었다. 손땀이 좋아 무슨 일이든 금방 익히고 이내 서툴지 않게 시늉해내던 재간만 해도 그랬다. 
복산이도 손이 두텁다는 것은 일찍붜 알려져 있었다. 
284. 해가 긴긴 여름이면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남의 콩밭으로 들어가 제 주먹보다 더 큰 개구리를 몇 마리씩 꿰미에 꿰어들고 나와 불을 피웠다. 논두렁을 뒤져 참게와 우렁을 잡아 구워먹고, 메뚜기는 물론 심지어 말잡자리도 잡으면 불에 얹었다가 먹었다. 
그러나 언제 보더라도 없이사는 집의 놓아먹이는 아이 같지가 않았다. 어른을 어려워하고 어린아이를 고루 겸애하였다. 남이 무슨 심부름을 시키건 얼굴빛이 조금도 없이 잘 들어주었고, 임자 있는 물건이면 부서진 장남감 한 조각 집으려 하지 않았다. 

294. 그 안개 속으로 상여를 뒤따르던 복산 어머니 울음 소리가 개펄에 빠진 여우의 그것처럼 새벽 소리로 들려왔다. 그 소리는 멀고 가늘었으며 자주 끊어지고 있었다. 안개, 여우 우짖는 소리 꽃상여의 행렬, 저승을 부르는 구성진 합창 - 그것은 너무도 여러번 보고 들었던 아주 낯익은 풍경이었다. 

295. 세월은 지난 것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새로 이룬 것을 보여줄 뿐이다. 나는 날로 새로워진 것을 볼 때마다 내가 그만큼 낡아졌음을 터득하고 때로는 서글퍼하기도 했으나 무엇이 얼마만크 변했는가는 크게 여기지 않는다. 무엇이 왜 안 변했는가를 알애내는 것이 더 중요하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관촌부락을 방문할 때마다 더욱 절실하게 느껴졌다. 

296. 도토리를 주워 중학교에 입학을 했던 그는 곧 성실성이 눈에 들어 학교의 온실지기로 일하게 되고, 그 대가로 사친회비를 면제받아 농업고등학교도 마치게 되었으며, 본디 땅뙈기라곤 되지기거리조차 없었건만 이젠 어엿한 섬지기 농군으로 자라 대강 셈평이 펴이고 있었다. 
그는 그러나, 음식을 첫째로 하고, 놀음 낮잠 색을 둘째로 치며, 농한기를 긴 명절로 보내되 먹을 양식이 있는 한 벌어 보태지 않거니와 혹 그런 것과 관계없이 부지런한 자는 벌어놓고 죽는다고, 누군가가 말했던 지난날의 농사꾼이 아니었다. 보리밥 한 그릇에 두 끼 물을 마셔 배를 채구고, 첫눈을 맞아야 여름옷을 벗는 도토리같이 야무진 일꾼이었다. 
그는 이틀 품을 하루에 쪄낼 만큼 근신골강하였고, 동냥 나온 걸인이 울안에서 쉬어가도록 결곡하고 겸용스러운, 정자나무 폭의 붙박이 그늘이 되어 있었다. 

* 고향동네 정자나무 같은 사람.

314. 복산이가 일어났다. 그제서야 그가 밤늦도록 낮에 입었던 작업복 그대로 이부자리 위에 앉아 있었던 것도 알 수 있었다. 복산은 입고 있던 봄스웨터 위에 낡은 예비군 옷을 끼어 입으면서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본 순간 문득 그 엣날의 유천만을 생각했다. 그가 곧 그의 부친이었다. 동네 들무새로 남의 뒷수쇄로, 남 못할 힘드는 일만 골라 자청해서 지다꺼리해주기 바쁘던 것 한가지만은 고스란히 대물림이 되어 있던 것이다. 

여요주서 
317. 어디서 무슨 일이 만나도, 그것이 남보매는 불나게 서둘러야 될 일임에도, 그래서 어서 부딪쳐 치를 것은 치르고 보라던 재촉이 빗발치고 성화 같아도, 당사자인 그는 언제나 내전보살했으며 해찰부릴 것 다 부리고 찾을 것 고루 챙겨 갖추는 늑장 끝에야 슬며시 집적거려보는, 생전 늙잖을 위인이 그였던 것이다. 
매사에 물렁하고 심지 좋던 용모의 성질은, 그러나 자발없고 방정맞은 것보다 정녕 낫다고만 할 수도 없었으니, 그것은 침착해서 삼가는 것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덧붙여 말하면 일의 얼거리나 시초를 알아서 함부로 덤비지 않았다근다, 등골이 다부지고 배짱이 알찬 값 하느라고 늑장을 부린 것이 아닐, 거지 반은 앞뒤가 어두워 일의 갈피를 모르고 어울러 대책을 못 세워서 뭉그적 거린 셈이었다. ....... 신경이 무디고 됨됨이가 헐렁하니 변변치 못했던 만큼이나 그의 뒤통수에는 여러 가지 별명이 덕지덕지 더뎅이져 있었는데, 그 여러 별명 중에서 욤오 자신도 뜻을 몰랐던 것이 한가지 있었으니 '장부식(장부식)'이 그것이었다. '늘 몰라'라는 뜻임은 풀어 말할 나위도 없으련만 막상 그 임자만은 새겨듣지 못하던 것이다. 

327. 용모의 멀쩡한 병신 노릇이 비롯된 것은 한 파수 전이었다. 

346. "예, 그러믄유. 여기는 바깥허구 달라서 여러 가지 것을 보호허는 법정이라 이런 말씀도 드릴 수 있는디 말입니다. 동물에 물격이 있으면 저두 인격이 있으니 말입니다, 저두 야생 동물 - 아니 그게 아니라, 야생 인간인디 말입니다. ...... 야생 인격이 물격보다두 거시기허면 말입니다...... 그럴 수는 읎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것이니다." 
나는 용모의 뒷모습을 지켜 보다가 문득, 물은 부드러우나 추운 겨울에 얼면 굳어져 부러진다던, 어디서 들은 말이 떠올랐다. 
판사가 기록집을 젖혀놓으며 판결했다. 
"피의자가 개전의 정이 전혀 안 보여.... 법정에 출두하는 데 술에 취해갖고 와서 횡설수설하고, 정상을 참작할 여지가 없으니까.... 이런 사람은 일벌백계로 다스려서 본보기를 삼아야 해요. 벌금 2만원 -" 


월곡후야 
348. 그에게도 꿈이 있었다. 비록 이루지는 못했으나 사춘기와 더불어 움텄으므로 열성을 다하여 가꾼 셈이었다. 그리고 꿈은 다만 잠결에서나 펼쳐질 수 있던 것으로 터득했을 때는 그의 나이 이미 서른도 넘은 뒤였다. 
그는 서른두 살로 접어든 해 정월부터 그 꿈을 허무와 바꾸어 지녔다. 그것은 김희찬이라는 괜찮은 이름값조차 스스로 저버린 속절없는 짓이었지만 그 주변머리로서는 그보다 더 윗길로 칠 다른 도리도 없었다. 

350. "나를 덤핑 인생으로 우습게 치면 국제적인 망신이라, 동서고금의 세계 명작을 모조리 가필, 보완해내는 이 국보적인 문장을 보통것으로 여긴다면 그건 국제펜클럽 총회에서 토의될 문제라구." 

351. 하다못해 공무원 ㅊ처러기라도 돼봤으면 했던 보잘것없는 꿈마저 꺽이자 희찬은 새삼스레 자기 분수를 재어보기 시작하고 더불어 자신의 가장 두드러진 결점과 병폐가 무엇이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담배값과 교통비를 대고자 주야로 독서한 탓에 쓸데없이 유식해졌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자기 생활과 무관한 지식 과잉 상태에 부끄러움을 알았고 늦은 후회도 했는데, 엇어도 살 만한 것과 있어서 불편한 것을 나름껏 적실하게 줄 그어서, 내내 지닐 것과 어서 버려야 할 것을 가르려고 노력하였다. 
그것은 그다지 어려워하지 않아도 뜻대로 되었다. 그는 낙향 곧 귀농을 마음했던 것이다. 

362. "아무리 거시기헌 사건이는 허지만 이미 위자료가 근너가구 사화(사화)를 해서 당국에서두 눈감아준것을 제네들이 워쩐다는 거여. 내가 이르겄는디 제발 그만들 두라구. 세상이 이럴수록 다다 냉정허구 침착허게 사리르 따져서 합리적으로 처신해야 쓰는겨. 그래야 배운 보람 있구 장차 큰 일두 헐 수 있는 게지 흥분버텀 하면 쓰겄나? 자네들 의기 몰라서가 아니라 세상 이치가 그것만 가지구는 안 된다 이거여. 당부허거니와 부디 그만들 두라구. 이 바쁜 때 이게 무슨 짝여. 당사자는 가만있는디 왜 옆댕이서 먼저 난봉난다나? 하여건 예는 그건 것 계핵허는 디가 아닝께 어서들 나가라구. 나두 야중에 무슨 일 생기면 뒷말 듣구 싶지 않으닝께." 
이윽고 우루루 자리 뜨는 소리가 들려왔다. 담배 꽁초로 어질러진 마당을 비질하며 희찬이가 중얼거렸다. 
"말려두 소용읎는디, 폭력을 박력으로 믿는 것들이니 대책이 읎는 거라." 

369. 희찬을 말끝에, 
"큰딸은 명실이라구, 열아홉 살, 그 밑엣 게 열일곱, 즤 어메는 마흔 다섯 - 헌디 그 중에서 내가 건드린 게 누굴 것 같니?" 
나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그야 10년 연상녀겠지" 
"술김에 한 서너 번 웃짝 노릇을 해줬더니 고마워서 그 담버텀은 나를 은인 대하듯 허는 거라." 
"은혜 갚을려면 사위 삼으라구 허지. 그게 젤 좋은 방법 같어." 
"고민이라. 까딱하면 사둔 허게 생겼다구. 수찬이란 늠이 그 집 큰딸 명실이허구 눈이 맞은 것 같어. 나만 몰랐지 벌써버텀 소문이 파다하다는 거리." 
"늙은 건 늙은 것끼리, 젊은 건 젊은 것끼리, 궁합은 괜찮게 맞었는디." 
"내가 지집애 에미허구 관계했다는 말두 함부로 못 허겄구, 그것들 떼놓을 무슨 좋은 방법이 읎을까? 지집애가 얌전허기만 해두 좀 들허겄는디 이게 또 이름난 그것이라는 거여. 읍내 어떤 녀석허구두 복잡했었다는 거라. 그런 걸 제수삼을 수 있겄남." 
희찬은 일껏 하던 말을 중동무이하고 주춤했다. 어디서 아낙네들끼리 악다구니를 쓰며 말다툼하는 소리가 들려오던 거였다. 

377. "김씨, 당신은 목숨 건지구 우리는 손에 피 안 묻히구, 생각 잘 헌거요. 당신은 속으로 이런 법이 없다구 여길지 모르나 저렇잖어. 이런 법을 뭐라구 하는 줄 아슈? 이게 바로 불문율이라는 거여. 한 번 더 다짐받겠어. 당신 내일 새벽 틀림없이 지집 새끼 몰아가지구 여기서 떠나는 거지? 유감없지?" 
김이 고개를 끄덕이며 몇 마디 중얼거린 것 같았으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가서 짐 챙기슈. 우리는 여기 있다가 당신이 떠나는 걸 보니께." 
수찬이 말을 마치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378. 나들이옷으로 말쑥하게 차려입은 수찬이 곁에는 스무남은 될락말락한 가무잡잡한 긴 머리 처녀가 붙어 있었다. 내가 알은체를 할 사이도 없이 수찬은 큼직한 여행가방을 들고 나갔다. 여자도 배부른 여행가방과 핸드백을 두 손에 나눠들고 뒤따라나갔다. 
마침 내 자리에도 음식이 놓이고 있어 나가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정거장으로 가는 것은 유리문 밖으로 내다볼 수 있었다. 
나는 식사를 마친 뒤에야 비로소 짐작이 갔다. 김선영이보다 수찬이가 먼저 종채리를 떠난다는 것, 그리고 그 여자가 주막집의 큰딸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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