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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19일 11시 36분 등록

No17

2013.08.19

글쓴이: 오미경

 

세계의 정복자 칭기즈칸의 생애

르네 그뤼쉐 지음/ 김정수 옮김, 간디서원

 

 

                                                                       칭기즈칸의 생애.jpg

 

먹이를 통째로 집어 삼키는 구렁이

자기 그림자를 덮치는 매

다른 물고기를 슬쩍 들이마시는 꼬치고기

자기 새끼의 발굽을 갉는 낙타의 수컷

폭풍우를 뚫고 먹이를 노리는 늑대

뒤따라오는 병아리를 잡아먹는 오리

움직일 수 없게 되면 사냥개의 무리에 에워싸여서도 자기 구멍을 파는 재거,

먹이를 끌고 가는 호랑이

 

제국은 ‘말에 의해 정복되었지만

‘말에 의하여 다스릴 수는 없다’

 

 

1. 저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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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그루세 (René Grousset, 1885년 9월 5일 ~ 1952년 9월 12일)는 1885년 그는 프랑스 가르 주 아우베이Aubais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의 역사학자로, 티베트, 인도, 이란, 일본, 중국 등지에서 연구했다.

몽펠리에 대학교의 역사 학부를 졸업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프랑스 군대에서 복무했다. 1925년에 파리 기메 미술관의 관리 위원(conservator)과 아시아 저널(Journal asiatique)을 겸임했다. 그의 아시아와 동양 문명들에 대한 대표작은 1930년 이전-「아시아의 역사, 1922)」「동양문명사, 1929-30)」「극동의 역사, 1929)」-에 출간된 것이었다. 1933년부터 그는 파리의 세르뉘시 박물관장과 그 곳의 아시아 미술 소장품의 큐레이터를 겸임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중세 중국의 승려 현장에 대한 책을 썼는데, 여기에는 그가 북인도에 있는 날란다의 불교 대학을 방문한 것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가 약간 담겨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에 그는 『십자군의 역사,1934-1936』와 『유라시아 유목제국사,1939』를 출판했다. 이 두 책은 해당 학문의 고전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비시 프랑스 치하에서 그는 직위를 잃었지만, 전쟁의 와중에도 개인적으로 연구를 계속해 중국과 몽골에 대한 책들을 출한했다. 프랑스 해방의 이듬해에 그는 세르뉘시Cenuschi 박물관의 큐레이터로 복직되었고, 기메Guimer 미술관의 큐레이터로도 임명되었다. 1946년, 르네 그루세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이 되었다. 1946년부터 1949년 사이에 그는 마지막으로 소아시아와 근동 지역에 대한 네 권-「극동의 예술, 1936)」「몽골제국사, 1941)」「아르메니아사, 1947)」「중국과 그 예술, 1951)」-의 책을 출판했다.

1952년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 몽파르나스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참고문헌: http://ko.wikipedia.org/wiki

 

2. 마음을 무찌르는 글귀

 

칭기즈칸의 선조들

[11] 푸른 이리와 숲속 암사슴의 아들들

이리와 암사슴! 청동이나 판금으로 바로 동물을 본 따 만든 조그만 상들은 중앙 시베리아의 미누신스크 지방에서부터 중국으로 이어지는 오르도스 대지 부근에 이르기까디, 그야말로 헤아릴 수 없이 발견되고 있다. 아마도 기원 전 7세기 경부터 중세에 걸쳐, 북아시아 주민이 남겨 놓은 예술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몽골인은 전설 속에서 이리와 사슴을 민족의 선조로 보고 있다.

 

[13-14]칭기즈칸의 선조이야기 - 하늘로부터의 손

선조가 이리라는 이상의 전설은 최초의 몽골 인이 숲속 사냥꾼이며, 적어도 숲과 들의 경계 부근에 사는 부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몽골의 시인들이 신화시대를 이야기할 때 수렵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 목축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16]“잘 들어두어라, 너희들이 제각기 따로 떨어지면 한 개의 화살이 쉽게 부러지듯이 각자가 금세 꺾기고 말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발로 뭉치면 아무도 너희를 쓰러뜨리지 못할 것이다.”

 

[19]막내 보돈차르

몽골의 시인은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은 그 부족을 덮쳐 가축과 양식을 빼앗고 그들을 노예로 삼았다.”

이 이야기는 미개인의 풍습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보돈차르는 형들에게 쫒겨, 그것도 제가 못난 탓으로 망명자의 생활을 해야만 했으나, 이제는 그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고 형들도 그를 추켜 올린다. 이 모두가 잘치우트 족의 마음씨 좋은 대접을 그가 가장 음흉하게 배반했기 때문이다. 그 뿐이 아니다. 이 사건을 아야기하는 몽골의 시인 역시 이 배반적인 불의의 습격을 가장 명예로운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보돈차르의 다음과 같은 말은 스텝의 불가피한 법칙을 가르쳐 주는 것으로서 이는 정글의 법칙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잘치우트 족은 문제없이 쓰러뜨릴 수 있다. 그들에게는 통솔하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전쟁의 지도자, 타고난 조직가, 이것이야말로 보돈차르의 자손이 놀라우리만큼 훌륭하게 보여 준 재능이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세계의 정복자’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먼저 알랑이 충고했듯이 몽골 인의 화살을 다발로 엮어 낱낱의 부족을 하나로 뭉치게 할 필요가 있었다.

 

[23]유목민의 비참함과 위대함

중국의 사서(史書) <몽골비사>에 의하면 카이두의 보호를 받고자 수많은 부족이 그의 주위로 차츰 모여들기 시작했고 신하의 대열에 끼는 가족의 수는 날로 불어났다. 이는 유목민에게서 볼 수 있는 통치의 전형으로서, 어떤 우두머리의 위광에 의지하여 갖가지 부족이 몰려드는 것이다. 분열되고 허기져 있는 씨족, 고립되어 보호자를 구하는 가족, 싸움터의 공명을 노리는 모험가, 어김없는 활솜씨로 사냥감과 전리품을 얻고자 하는 궁술가 등등.... 칭기즈칸의 왕권도 바로 그와 같은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26-27]금나라 궁정에서 잡혀죽은 몽골 왕 암바카이

몽골의 음유시인에 의하여 페르시아의 문헌에 전해진 것이지만, 중국의 연대기도 그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1139년과 1147년, 두 번에 걸쳐 금은 북방 몽골 민족에게 싸움을 걸었으나, 결국은 국경의 몇 개 지구를 내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1148년 이후 매년 북경 국정에서 몽골 인 부족들에게 소, 양, 비단 등을 보냈는데, 그것은 대흥안령 변경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선심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금나라 황제는 중국인다운 방식으로 적의 추장에게 몽골 왕이라는 그럴 듯한 칭호를 주면서도, 그 왕은 금에 의하여 보호받고 금을 돕는 자로 간주하게끔 만들어 놓고 있었다.

 

[32-33]사라지지 않는 증오, 암바카이의 처형

북경의 궁정에서는 몽골 인에게 영토를 빼앗긴 데 대해 몹시 화가 나 있던 참에 사로잡혀온 암바카이에게 잔인한 복수를 가했다. 즉 그는 나무로 만든 나귀 위에서 꼬챙이에 찔려 죽은 형벌을 받았다. 이는 ‘유목민의 반란자에게 가하는 모욕적 형벌’이었다. 선대의 칸, 카불의 장자 오킨 발카크도 타타르 인에게 잡혀 금나라의 손에 넘겨진 끝에 같은 형벌을 받았다.

이는 결코 잊지 못할 잔학 행위였다. 암바카이는 죽음에 임하여 용케도 사자를 보내어 선왕 카불의 아들들 중에서도 특히 용맹스런 쿠투라와 자기 자식들에게 유언을 전했다.

 

“나는 타타르 사람들에게 잡혀있다. 내 본보기를 교훈으로 삼아라. 그로 말미암아 활을 당기는 너희들 손톱이 다 빠져 달아나도록 손가락이 모두 닳아 없어지도록 반드시 내 원수를 갚아라!”

암바카이는 숨을 거두기전에 금나라 황제에 대해서도 가공할 복수가 내려질 것을 예고했다. 풀길 없는 원한은 몽골 인의 가슴 속에 엉겨 있었고, 훗날 칭기즈칸과 그의 자식들에게 의하여 저 타타르인의 마지막 피와, 금나라 왕제의 마지막 피로 보상받게 된다.

[35]몽골 인의 헤라클레스 쿠투라

쿠투라의 아내는 몽골의 서사시에 자주 나타나는 여장부의 하나로, 남편의 죽음을 밎지 않았다.

“푸른 하늘을 뒤흔드는 음성, 손이 곰의 앞발 같은 장사가 어찌 오루벤 족 따위에게 죽음을 당할 것인가?”

 

[36]

최초의 몽골 왕국은 어떤 조건하에선가 타타르 인과 북경의 궁정에 의해 멸망당했고, 부족은 재차 분열 상태에 빠진 것 같다.

몽골 왕국의 붕괴는 완전한 무정부 상태를 초래하여, 정치적 울타리뿐만 아니라 가족적인 울타리까지도 허물어지고 말았다. <몽골비사> 첫머리에 그려져 있는 배경은 인디언의 환경과 흡사하며 부족과 부족, 씨족과 씨족 사이에 되풀이되는 복수, 강탈은 쉴 새 없었다. 말의 약탈, 부녀 폭행, 형제 상잔은 일생의 다반사였다. 쿠쿠추스는 칭기즈칸의 자식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있다.

“여러분들이 태어나기 전에 몽골의 땅은 어지러울 대로 어지러워져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부족끼리의 싸움뿐이었고, 편안히 몸 붙일 곳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

 

칭기즈칸의 어린 시절

[46-47]용사 예수가이와 요한

토그릴은 용사 예수가이의 결정적인 도움 덕분에 케레이트의 왕위를 되찾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투우라 강가의 ‘검은 숲’에서 영원한 우정을 맹세했다. 토그릴은 다음과 같이 맹세했다.

“그대의 도움에 대하여 나의 감사하는 마음은 그대의 자식들, 그리고 그 자식들에 이르기까지 영원히 전해질 것을 거룩한 하늘의 신(디에게 텐게리)과 대지를 두고 맹세한다.”

이는 토그리과 예수가이가 의형제를 맺는 엄숙한 날이며, 장차 토그릴이 예수가이 자식의 보호자가 될 것도 약속하고 있다. 칭기즈칸이 처음 통치할 무렵, 1203년까지는 모든 것이 그 ‘검은 숲의 맹세’에 좌우되고 있다.

 

[48-49]예수가이와 커어룬을 차지한 이야기

몽골의 시인은, 이 정복에 신이 나서 형 네쿤 타이시를 선두로, 아우 다리타이를 옆에 거느리고 몸소 수레를 끌어 집으로 돌아가는 예수가이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가엾은 커어룬은 끌려가는 수레 속에서도 오직 비타에 잠겨 있다.

“그이는 지금까지 한 번도 머리칼을 바람에 쐰 적이 없었다. 스텝에서 배를 곯아본 적도 없는 분, 그 분이 지금 황급히 달아나면서 머리칼이 양쪽으로 바람에 나부끼도록 내맡기고 있다. 어째서 이 모양이 되었을까!”

 

그 말을 전하면서 음유시인은 다시 이렇게도 묘사하고 있다.

“메아리치는 울음소리는 오논 강의 잔물결을 어지럽혀 놓고 숲의 나무들도 설레게 했다.”

그러나 유괴자의 아우 다리타이는 수레 옆에서 말을 몰고 따라가며 가엾은 여인을 놀려 주듯 말했다.

“네가 품에 안고 싶어 하는 사나이는 이미 강을 몇 개나 뛰어넘고 멀리 달아나 버렸어. 네가 아무리 울어도 되돌아오지는 않을 테니 이젠 만날 수가 없을 거야. 발자국도 찾을 수가 없지, 자, 얌전히 하라고.”

 

그렇게 말하며 그는 단념하기를 권했다. 그 말대로 커어룬은 예수가이의 막사로 끌려 들어가자 그 날부터 분별이 있는 여자로서 몸과 마음을 그에게 바쳤다.

이 유명한 에피소드는 여러 가지 사실을 알려 준다. 족외혼(族外婚)을 대대의 규율로 삼는 몽골 인은 아내를 맞이하기 위하여 약탈혼의 수단에 의지해야 하는 경우가 너무나 잦았고, 이로 말미암아 부족간의 분쟁도 수없이 유발되었다. 오논 강 상류의 몽골 족과 메르키트 족 사이에는 여자의 유괴가 쉴 새 없이 되풀이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원한이 전해져서 끝내는 한쪽의 멸망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커어룬 부인은 정숙한 아내이며 지평선 저 너머로 사라지는 남편을 못내 애석하게 여기고, 개인적인 유품을 넘겨주는 지극히 자연스런 동작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녀는 남편을 분명 사랑했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미련 없이 단념해버리는 현실적인 여성으로서 남편에 대한 애정으로 자기와 헤어지게 된 것을 위로하며 목숨을 보전하도록 권하다. 그리고 일단 예수가이의 집에 들어와서는 다른 생각 없이 새로운 가정을 맺는다. 불운의 나날이 계속되던 끝에 예수가기아 사라지자 이번에는 남자 못지 않게 나서서 일가의 지휘권을 장악한다. 이렇듯 곧은 마음, 왕성한 기력, 정확한 분별력을 지닌 어머니가 없었다면 칭기즈칸의 생애도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51]칭기즈칸의 어린 시절

예수가이와 커어룬의 장남, 칭기즈만이 될 아이는 1167년 돼지해에 태어났다. 그 무렵의 일가는 오논 강 오른쪽 언덕의 데리운 볼다크, 즉 데리운의 고립된 언덕 가까이에 숙영하고 있었다. 태어날 때 아기는 오른손에 작은 뼈만한 크기의 핏덩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이가 태어날 무렵 타타르의 족장 테무친 우게를 생포한 것을 기념하여 아들에게 테무친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테무르치(대장장이)에 결부시키는 해석이 음성학적으로 올바른 것 같다. 우연한 일이지만, 훗날의 ‘세계의 정복자’는 아버지의 승리에 약속 받은 무쇠의 사나이로서 새로운 아시아를 단련시킬 사명을 띠고 태어난 것이다.

 

[56]

예수가이의 비극적인 죽음, 그 고통과 가족의 앞날을 염려하는 임종시의 비통한 외침은 훗날의 칭기즈칸, 테무친의 전기에 있어서 그 첫 장을 이루고 있다. 세계의 정복자는 그 얼마나 가혹한 조건 아래서 인생을 배워야만 했던가! 몽골의 숲과 스텝의 야만스런 풍습은 앞에서 보아온 바와 같다. 매복, 배반, 유괴, 살인 등이 횡행하는 사회에서는 사람까지도 야생의 나귀나 사슴처럼 사냥의 대상이 되었다. 대들보와도 같은 아버지를 여윈 아홉 살의 아들 테무친은 그와 같은 강철 같은 사회 속에 내동댕이쳐진 것이다.

 

[58]일족에게 쫓기는 아비 없는 자식들

“용사 예수가이가 없어졌다고 해서 당신들이 무슨 일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보군요. 아이들이 자라기 않고 언제까지나 그대로 있는 줄 아십니까? 아이들의 노여움을 두려워할 날이 언제고 오지 않을 줄 아십니까? 당신들은 제물 고기와 술을 나눌 때 나를 따돌렸소. 먹고 마신 다음에도 나에게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이 고장에서 떠날 작정이지요?”

물론 당시의 고대 종교, 샤머니즘의 신앙으로 미루어 볼 때, 커어룬을 제사나 제물을 나누는 자리에 초대하지 않았음은 사회적으로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었다. 우선 개인을 모욕하는 지극히 무례한 처사였지만, 실제로는 예수가이의 상속자들을 왕족 전체의 보르지긴 씨 공동체에서 따돌리고 그 미망인과 유자녀를 추방자로 만들자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59]

차카라 노인은 타이치운트 씨 일행을 급히 뒤쫒아 가서 커어룬과 함께 있어 달라고 번의하기를 재촉했다. 그러나 토도이엔 길테는 말했다. 그것은 결정적인 말이었다.

깊은 물은 말라 버렸고 빛나는 돌은 쪼개졌도다

 

[61]

용사 예수가이의 백성이었던 부족의 무리는 오논 간의 흐름을 따라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지고 커어룬 일가만이 버림받은 야영지에 남게 되었다. 네 명의 아들 테무친, 주치 카사르, 카치운, 테무게 그리고 딸 네무룬 외에 예수가이가 다른 여자에게서 낳은 아들 베르테프와 벨그테이 형제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커어룬은 모든 아이들을 공평하게 돌보아 주었다. 여기서도 그녀는 훗날 몽골의 시인이 ‘커어룬 어머니’라 부를 만한 일을 너끈히 해내고 있다. 이 미망인과 일곱 명의 아이들은 유목민의 주인 생활에서 하루아핌에 추방자 신세가 되었으며, 오논 강 상류의 가혹한 거장인 숲과 스텝 사이에 버려졌다. 그래도 여장부인 어머니는 기가 꺾이기는커녕 있는 힘을 다하여 시인으로부터 ‘현명한 커어룬’이라 불릴 만한 일을 해냈다.

 

[64]형제를 살인한 칭기즈칸

“너희들과 한 패가 되어 주는 것은 너희들의 그림자뿐이야”

특히 어머니는 일가에게 지원진 복수의 의무를 상기시켰다.

“너희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단 한 가지일 뿐이야. 타이치우트의 형제가 우리에게 준 모욕을 어떻게 앙갚음을 할 것인가. 그런데도 너희들은 저 잘생긴, 알랑의 자식들처럼 형제끼리 싸우기나 할 것이냐?

“우리는 서로 죽일 것이 아니라 힘을 합해 원수를 갚아야 할 처지가 아니냐. 우리는 우리가 받았던 치욕을 아직 갚지 못했어.... 너희들은 어째서 나를 눈 안에 든 속눈썹, 입안에 들어간 나무 조각처럼 보느냐?”

 

[66]

“이 살인자들아! 너희들 가운데 하나(테무친)는 태어날 때 핏덩이를 움켜쥐고 있었어! 또 하나는 이름 그대로 잔인한 카사르 개야(남러시아의 스텝, 카사르 지방의 개). 너희들은 바위 위에서 덤벼드는 범과도 같구나. 미쳐 날뛰는 사자와도 같구나. 먹이를 통째로 집어 삼키는 구렁이, 자기 그림자를 덮치는 매, 다른 물고기를 슬쩍 들이마시는 꼬치고기, 자기 새끼의 발굽을 갉는 낙타의 수컷, 폭풍우를 뚫고 먹이를 노리는 늑대, 뒤따라오는 병아리를 잡아먹는 오리, 움직일 수 없게 되면 사냥개의 무리에 에워싸여서도 자기 구멍을 파는 재거, 먹이를 끌고 가는 호랑이, 무턱대고 덤벼드는 짐승이냐, 아무리 그래도 자기 그림자 이외에는 자기편이라고는 없는 것이다. 너희들에게는 말총 이외에는 채찍조차도 없지. 그래 가고고서야 나치치우트의 모욕에 대해 원수를 갚을 수 없을 거야!”

 

“이처럼 커어룬 어머니는 옛 격언과 고인의 말을 빌려 아들 형제를 꾸짖었다. ”

그러나 아무튼 테무친은 오로지 정면으로 자기와 맞설 수 있었던 하나의 형제를 죽였기 때문에 아무리 나이가 적더라도 명실공히 한 집안의 가장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69]칼에 채워진 칭기즈칸

꼬박 사흘 낮 사흘 밤을 테무친은 숲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런 다음 탈출할 길을 찾아 나섰다.

그라 말고삐를 끌고 숲의 가장자리를 향해 내려가니 안장이 굴러 떨어졌다. 그는 뒤로 돌아가서 껑거지 끈을 살펴보았다. 안장을 매단 배띠에는 조금도 이상이 없는데 안장만이 아래로 떨어져 버린 것이었다. 까닭을 알 수 없어서 그는 하늘의 고시(告示)라 판단했다. 종족의 수호신 ‘쿠쿠 몽카 텐게리’가 그 이상 나아가는 것을 금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는 선선히 돌아서서 밀림 속으로 되돌아간 다음 다시 사흘 낮 사흘 밤을 지냈다. 그러나 결국에는 굶주림을 이겨 낼 수가 없어 그는 대차 탈출을 시도하였지만, 막상 숲 가장자리의 풀밭에서 벗어나려 하자 커다란 흰 바위- 시인의 말을 빌면 막사만한 크기의 바위-가 산마루에서 굴러 떨여져 그의 앞길을 가로 막았다. 이번에야말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영원의 하늘’이 나아가는 것을 금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채차 숲 속으로 되돌아가 다시 사흘 낮 사흘 밤을 견디어냈다.

 

[73] 칭기즈칸의 탈출

새가 새장에서 달아나 숲에 몸을 숨기면 숲은 새의 목숨을 구해줍니다. 애써 우리 집까지 몸을 숨기러 온 사람을 그렇게 대해서는 안됩니다.

 

[79]말을 약탈하다

그처럼 평범한 첫걸음, 스텝의 젊은이라면 누구에게서나 일어날 법한 일로부터 세계의 정복자가 될 사람의 행적은 시작되었다. 잘못하면 목숨을 잃거나 잘 돼봐야 종신 금고의 신세를 면치 못할 모험, 그것을 그는 용기와 침착성으로 극복해낸다. 그리고 말을 도둑맞았지만 그는 결단력과 의지의 힘으로 그것을 되찾는다. 아무튼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것은 그가 자기와 접한 사람들에게 끼친 인격과 매력이라 할 것이다. 그는 아주 젊어서부터 늠름한 인격과 이를 뒷받침하는 감화력을 지니고 있었다.

솔칸 시라의 말을 다시 새겨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는 달빛 아래 오논 강의 수면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테무친을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 위에 설 자가 지니는 눈의 매력에 마음이 끌렸다. 그래서 그는 자시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젊은이를 구해 주었던 것이다. 지금의 보올추도 처음 만날 때부터 테무친에게 자기 일신을 바쳤고 언제까지나 운명을 함께 하려 든다. 그 역시 ‘위대한 매력으로 빛나는 눈의 광휘’를 거스르지 못했던 것이다

 

[81-82]칭기즈칸의 결혼

디 세치엔의 집안사람들은 줄지어 신랑 신부를 케롤렌 강 하류의 우라크 죠르의 고지까지 전송해 주었다. 그의 아내 쇼탄은 딸 보르테를 따라 상구르 강가에 있는 테무친 일가의 집에까지 갔다. 그리고 돌아올 때 테무친의 어머니에게 훌륭한 흑담비 가죽을 선사했다. 이 가죽은 장차 젊은 추장의 외교에 이용된다. 그리고 얼마 후 테무친의 일가는 상구르 강가에서 케롤렌 강 원천에 가까운 부르기 예루기로 이주했다.

 

결혼하지 곧 테무친은 일족의 힘을 늘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먼저 ‘누클’인 보올추를 부르기로 하고, 그에게 아주 벨그테이를 보냈다. 보올추는 이번에도 아버지에게 알릴 겨를조차 없이 밤빛 말에 올라타고 회색 벨트의 외투를 안정에 감은 채 젊은 우두머리에게로 달려왔다. 그는 장차 ‘대몽골 군’이 탄생할 때 최초의 원수가 된다.

 

이 서사시에서는 또 신부 보르테가 큰 역할을 했다. 훗날 칭기즈칸에게 이 아내는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몽골 여성으로서 불가결의 조건인 건장한 아들 4형제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남편을 위해서도 분별력 있는 훌륭한 조언자가 된다.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일을 앞두고 칭기즈칸이 선택을 망설일 때는 보르테의 의견에 따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더욱이 그 의견은 선견지명이 있고 단호한 것이었다.

이 무서운 정복자도 아내 보르테만은 언제나 중히 여겼다. 물론 몽골의 다른 추장들처럼 칭기즈칸 역시 제2부인을 두기를 서슴지 않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보르테를 본국에 남겨둔 채 첩을 데리고 멀리 싸움터로 나가는 일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는 것은 보르테에서 난 자식들뿐이었다. 보르테만이 모든 사물을 젖혀 두고 중히 여겨졌다. 이 아내에 대한 남편의 경의는 아내가 메르키트 족에게 유괴되어 몇 개월 후 임신한 몸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변함이 없었다. .... 이 애처로운 상처를 칭기즈칸은 굳이 들추어내려 하지 않았다. 보르테는 마침애 대단히 존경받는 ‘왕후’로서 이 정복자의 기적적 서사시와도 같은 승리를 함께 한다.

 

[86]미녀 보르테의 유괴

그들은 300여명의 기마대로 예수가이 일가를 기습했던 것이다.그 옛날 예수가이가 메르키트 족 가운데 한사람으로부터 커어룬 부인을 탈취한 사건으로 인하여 쌍방간에는 풀리지 않을 원한이 쌓여 있었다. 메르키트족은 그 앙갚음으로 여자들을 사로잡아 가려 했으며, 먼저 테무친의 새색시를 노렸다.

 

[88]

그러나 그들은 묘한 복수심에서 보르테를 치르겔 부크라는 자에게 넘겨주었다. 이 사나이는 지난날 예수가이에게 아니 커어룬을 빼앗긴 예케 칠레두의 아우였다. 이처럼 복수는 부족에서 부족으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유괴와 폭력이 되풀이되면서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었다.....

 

[89]“코아크친 할멈의 족제비 같은 귀와 암여우 같은 눈 때문에 나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부르칸 산에 이르러 사슴의 길을 따라 말과 함께 숨어들 수 있었습니다. 나는 몹시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부르칸 산은 나를 구해 주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아침마다 산에 제물을 바치겠습니다. 내 아들, 내 손자의 대에 이르기까지 그 은혜는 잊지 않고 변함없이 받들게 하겠습니다.”

그는 몽골의 습관대로 태양을 향해 서서 허리띠를 목에 걸고 모자를 벗은 다음, 가슴을 치며 아홉 번 무릎을 굽히고는 제주(祭酒)를 바쳤다.

 

여기서 몽골의 원시 종교를 특징짓는 의식 중의 하나를 살필 수 있다. 부르칸 칼둔에 제물을 바치는 의식은 알타이 산맥의 주민이 산마루의 신들을 예배하는 풍습의 일부를 말하는 것으로, 7세기의 옛 투르크 인들도 캉가이 산맥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봉우리를 숭앙했다. 또 태양(나란)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은 보다 더 일반적인 예배로서, 몽골 인의 최고신인 ‘영원한 창공’을 받드는 의식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이 경우의 제물은 유목민이 즐기는 말젖을 발효시켜 만든 술, 마유주를 제주로 삼는 것이 보통이었다.

 

[93]미녀 보르테의 탈환

“메르키트 족이 나를 슬픔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뜨렸네, 내 아내를 납치해 간 것일세. 이제 내 잠자리에는 사람이 없고 내 가슴은 슬픔으로 두 조각이 났네, 우리 두 사람은 서로 같은 핏줄 사이가 아니었던가? 함께 이 원수를 갚지 않을 수 있겠는가?”

 

[97]

훗날 칭기즈칸은 아내가 메르키트 족의 유력자 가운데 하나와 강제로 동거 생활을 한데 대해서 눈감아 준다. 보르테 역시 그로 인해 죄책감을 느낀 것 같지는 않다. 남편의 집념과 강한 의지에 마음을 놓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98]

칭기즈칸을 노래하는 서사시는 모욕당한 남편의 보복으로 치르겔 부크가 겪었던 공포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검은 까마귀는 가죽 부스러기를 먹고, 말똥가리는 생쥐나 들쥐를 잡아먹어야 한다. 그 따위 새가 주제넘게 백조나 왜가리 정도를 동경하는 것은 미치광이 짓인 것처럼, 나는 내 신분이 낮은 것도 생각지 않고 고귀한 보르테에게 마음이 빼앗겨 나의 백성들에게 재앙을 가져왔다.”

 

[99]

세대를 바꿔가며 거듭되는 부녀자의 유괴에서는 칼날같은 증오심만이 싹틀 뿐, 어느 한 쪽 부족이 완전히 소멸 까지 수습의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101]유목민의 분열

‘안다’, 즉 맹세에 의한 형제인 이상 어떤 일에 있어서든 서로 돕는 것이 정식으로 맺어진 의형제의 우의였다. 두 사람은 전리품을 서로 교환했다. 테무친은 차무하에게 토쿠토아가 두르고 있던 금으로 만든 허리띠와 승용마, 즉 갈기와 꼬리가 검은 말을 선사했고, 차무하는 테무친에게 또 하나의 족장 다일 우순이 차고 있던 금으로 만든 허리띠와 승용마, 즉 양과 같이 흰 암말을 선물로 주었다.

 

[102]

두사람은 왕국을 2두 정치의 형태로 부활시키고, ‘안다’ 임을 앞세워 의형제의 유대에 신성 동맹의 성격을 나타냈다. 그러나 2두 정치란 원래가 불안정한 것이다. 사실 이 두 동맹자들은 훗날 제각기 스텝 제국의 부활을 추구하면서 서로 대립하게 된다.

 

[102-103]

“테무친 형제! 산에 바짝 붙여 설영합시다. 우리의 말치기들은 오두막으로 가게 합시다. 시냇가에 바짝 붙여 설영합시다! 우리의 양치기, 새끼 양치기들은 골짜기로 가게 합시다!”(산에 설영하면 말치기가 좋지만, 양치기는 시냇가에 좋다는 뜻)

몽골인은 원시인이 흔히 그러하듯 비유나 수수께끼 같은 말씨를 즐겨 썼다. 테무친은 차무하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잠자코 있었다. 그는 말을 세우고 커어룬 부인이 탄 수레를 기다렸다. 커어룬 부인이 오자 테무친은 차무하가 한 말의 뜻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이런 경우에는 늙은이의 경험에 의지하여 어머니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대답을 기다릴 것도 없이 아내 보르테가 의견을 말했다.

“안다인 차무하는 변덕이 심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젠 우리들에게도 싫증이 났나 봐요. 그 말은 틀림없이 우리들을 두고 한 것입니다. 오늘 밤에는 그 사람과 같은 곳에 머무르지 않기로 해요. 이 대열에서 벗어나 밤 동안만 멀리 떠납시다.”

 

[104]

쌍방이 모두 일마다 길조를 찾고 재수가 좋기를 바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샤머니즘의 전성기였으므로 누구나 중요한 일을 앞두고 샤먼의 입회 하에 결정하였지만, 자기와 관계없이 결정된 일을 그 다음에 가서 정당화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몽골계 바아린 족의 족장 코루치도 나중에 테무친 휘하로 달려와서는 차무하에 따르지 말라는 하늘의 계시가 있었다고 했다.

 

 

정복자 칭기즈칸

 

[109-111]몽골인의 왕이 된 칭기즈칸

이들 왕족인 알탄, 세체 베키, 타이추, 다리타이 등이 테무친을 왕으로 뽑고 그를 위해 칸의 칭호를 부활시키기로 결장한 것이다. 그들은 진심으로 임금을 받들고자 한 것이었을까? 결코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 점은 앞으로도 밝혀진다. 그들로서는 공동으로 병력을 동원하는 동안만이라도 전쟁 수행의 지도자가 필요함을 인정하고 예수가이의 아들을 그 적임자로 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

테무친은 왕가 출신임을 젖혀 두고라도 언제나 흔들림이 없고 뛰어난 평형감각과 타고난 정치력 등을 발휘했다. 그리고 짐승의 가죽을 두른 추장치고는 자기 동맹자들조차도 어엿한 귀인임을 느끼게 하는 무엇인가를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그대를 칸으로 선출하고 싶다. 그대가 칸이 되기만 한다면 그대를 위해 우리는 적을 향해서도 맨 먼저 말을 몰 것이다. 빼앗은 계집과 뺨이 아름다운 처녀는 그대의 올드 게르로 데리고 가겠다. 다리가 곧은 준마를 달음질쳐서 그대에게 끌고 가겠다. 싸움이 있는 날 만일 그대의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우리들의 제물과 아내를 빼앗고 우리들의 검은 머리를 땅 위에 떨어뜨려라. 평와의 날에 약속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우리를 처자 곁에서 멀리 떨어진 사막 저편으로 내어 쫓으라. 이와 같은 맹세의 말을 한 다음 일동은 테무친을 펠트의 융탄자 위에 올려 앉히고 칭기즈칸이라는 이름, 혹은 존칭과 함께 칸이 지위에 앉힐 것을 선언했다. 이 존칭의 내력은 힘의 개념과 결부되어 ‘흔들리지 않는’ 군주, 혹은 ‘불굴’의 군주임을 나타내는 것이리라. 혹은 전 세계의 지상권이라는 생각과 결부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케롤렌 상류의 초원 가운데의 어느 곳에서 12세기도 저물어가는 그 어느 날, 처음으로 환호의 소리와 함께 불리어진 이 이름은 훗날 몽골 민족이 외치는 찬탄의 소리가 되었고, 동시에 다른 민족이 퍼붓는 저주의 외침 속에 옛 세계의 전부를 휩쓸어 버리고 그 다음 세기에까지 남아 전하게 된다.

 

[112]

사람의 심복인 수부타이는 장차 몽골의 서사시를 통하여 가장 뛰어난 무장 가운데 하나임이 밝혀지지만, 당장은 칭기즈칸에 대하여 “ 그 재물을 쥐처럼 조심스럽게 지키고 새처럼 부지런히 힘써서 불어나게 하며, 펠트의 모포나 휘장과 같이 주군의 몸을 수호한다”고 맹세한다.

 

[116]끊는 가마솥으로 던져지는 포로

곧 ‘70의 늪’ 싸움에서는 칭기즈칸이 승리를 거두었고, 70개의 가마솥에다 포로를 삶아 죽인 것도 그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처럼 무의미한 만행은 역시 차무하의 소행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행위로 인하여 그는 곧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며, 이는 칭기즈칸에게는 싸움에서 승리한 것 보다도 더 유리하게 작용했다. ... 칭기즈칸은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라면 정당한 원한도 잊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117]

칭기즈칸 주위에 잇달아 부하들이 모여든 것은 그를 적으로 삼기보다 보호자로 삼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기이하게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칭기즈칸의 권위는 질서, 절도, 혹은 인정미 등을 갖추고 있었던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적들이 거의 갖추고 있지 못한 인격을 지녔기 때문이기도 했다.

유목민의 생활은 성찬과 기아 사이를 오간다. 배를 주린 씨족의 무리가 칭기즈칸과 그 이외의 우두러미 중 어느 편에 가담할지를 망설이다가 칭기즈칸이 지휘하는 사냥에 그들도 한 몫 끼워주기를 바라면 칭기즈칸은 두 말없이 그들을 받아들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잡은 것보다도 더 많은 사냥감을 나누어 주었다.

이러한 선심은 오로지 정치적인 것으로, 여러 부족들 사이에 널리 덕망을 얻고, 신하의 수를 늘리는 것을 겨냥한 것이었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고 그것은 확실히 성공을 거두었다. 젊은 왕의 도량, 고지식한 성의, 단호하면서도 너그럽게 왕권을 행사하는 태도 등은 다른 수장들의 야만스런 압정, 변덕, 잔인성과 비교되어 이 부족에서 저 부족에게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136]반칸 차무하와 칭기즈칸의 대결

우리들 중에서 맹약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이 흙과 같이 허물어질지어다. 이 나무와 같이 베어지리이다!”

 

[147]타타르 족의 전멸

칭기즈칸은 장병들에게 미리 다음과 같이 명령해 두었다. 완전한 승리를 거둔 다음이면 아무리 적의 물건을 빼앗아 나누어 가져도 좋지만, 승리를 거둘 때까지는 절대로 전리품에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 최초의 공격에서 후퇴를 하게 될 경우에는 어떤 희생을 각오하더라도 다시 공격을 되풀이해야 한다.

그러는 동안에도 중대한 군기 위반 사건이 발생했다. 칭기즈칸의 명령을 어기고 숙부 달타이, 종제 쿠차르, 선왕의 왕자 알탄 들이 작전의 종료나 전리품의 분배를 기다리지 않고 약탈을 자행했던 것이다. 그들이 집안을 믿고 자기들만은 칭기즈칸의 군령에 얽매이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왕족이기 때문에 더더구나 본보기가 필요한 것이며, 남의 위에 서는 자의 위법 행위는 아래로 전염될 우려가 있다. 특히 알탄의 불복종은 큰 위험을 안고 있었다. 그는 바로 옛 몽골 왕국의 마지막 칸 쿠투라의 친아들인 것이다. 그러한 그가 감히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것은 가까운 장래의 반란을 예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칭기즈칸은 충신 제베와 쿠빌라이를 시켜 당장 세 왕족이 빼앗았던 가축의 무리를 몰수시켰다. 이렇게 하여 그는 군기를 바로 잡았지만, 알탄은 물론 쿠자르와 달타이도 이러한 처사를 결코 잊지 않았다. 그들은 깊은 원한을 품고 칭기즈칸에 대한 반대 세력을 선동했으며, 머지않아 칭기즈칸의 대열에서 빠져나가 케레이트 군에 가담하여 칭기즈칸과 싸움을 벌이게 된다.

 

[150]타타르 인 예스겐과 예수이와의 결혼

칭기즈칸은 모든 타타르 인을 죽이거나 노예로 삼은 후 야외에서 큰 연회를 베풀었다. 칭기즈칸 자신도 언니 예수이와 동생 예스겐 사이에 앉아 두 신부와 함께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153-154]칭기즈칸이 제의한 혼담을 거절한 셍굼

옹칸은 칭기즈칸을 투우라 강가의 검은 숲에 초대하여 정식으로 양자의 인연을 맺었다. 부자의 인연을 말한다면 예수가이가 옹 칸의 안다(의형제)였던 것을 감안하여 칭기즈칸은 이미 오래전부터 옹 칸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어온 터였다. 즉 옹 칸의 종주권을 인정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이처럼 의식을 갖추는 것은 부자나 주종 관계 이외에 칭기즈칸에게 특별한 대우를 베풀 생각에서인 듯했다. 그들은 맹세의 말을주고 받았다.

 

“우리는 싸움터에서 함께 돌격해 나간다. 사냥을 할 때에는 손을 마주잡고 사냥감을 몰아낸다. 우리들 사이에서 남들이 불신과 불화의 씨를 뿌릴 때, 우리들 사이에 뱀이 다가올 때, 우리는 뱀이 물어 뜯을 틈을 주지 않고 우리들의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말을 서로 믿기로 한다.”

 

[157-158] 서약과 배반 사이에서

칭기즈칸은 조금도 의심하는 빛이 없이 10명 가량의 신하를 대동하고 초대를 받아 찾아 갔다. 가는 도중 돌아가신 아버지의 심복이었던 문리크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영리한 물히크는 칭기즈칸의 경솔함을 타일렀다. “당신이 상대편의 달 차울 베키를 며느리로 원했을 때 그들은 당신과의 혼사에 대해서 코웃음 쳤소. 그러다가 왜 이제 와서 새삼스레 약혼식 연회를 갖자는 걸까요? 실컷 무례한 짓을 해 놓고서는 왜 이제 와서 딸을 주겠다는 걸까요? 난 그 점을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번 초대는 거절하도록 하시오! 지금은 때가 봄이라는 것을 핑계 삼으면 됩니다. 말이 여위어서 목장에 매 둘 필요가 있다고 핑계를 대면서 말이 살찐 다음에 가도록 하세요.

 

[161-162]붉은 버드나무 땅에서 옹 칸과의 격전

“저기 테무친을 둘러싸고 있는 병사들은 누구요?”

“울우트 족과 방구트 족이 전진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투 중에도 저 대형을 절대로 흩트리지 않습니다. 대열이 방향을 바꾸어도 전열은 그대로 있지요. 그들은 아주 어려서부터 칼과 검을 익혀 왔습니다. 저들에 대해서는 절대로 방심해서는 안됩니다!

몽골 고래의 불문율에 의한 ‘안다’, 의형제임에 변함이 없으며 예로부터의 인연은 무슨 일이 있어서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그와 같은 어린 시적의 추억에 얽힌 묘한 의리감으로 말미암아 차무하는 칭기즈칸에게 케레이트 군의 배치와 공격 태세를 알려 주었다.

 

[169]옹 칸과 차무하에게 보내는 칭기즈칸의 호소

“우리는 퉁게 강 동쪽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이 고장의 풀은 풍성하여 우리들의 말은 살쪘습니다.”

이곳에 머무르면서 그는 옹 칸을 비롯하여 셍굼, 차무하, 알탄, 구차르 등에게 가신 두 사람 즉 알카이 카사르와 수케게이 제운을 보내어 자기가 하고자 하는 말을 전했다. 즉 문자가 없는 사회였으므로 호소의 말을 시의 형식으로 꾸며 두 사신에게 외우도록 했다. 이 ‘칭기즈칸의 호소’라 불리는 것에는 정의, 감동, 예로부터의 애정을 표면에 내세우면서 지극히 정치적인 발언을 담고 있었다. “오오, 칸! 나의 아버지, 그대는 어찌하여 저에게 화를 내시고 저를 위협하는 것입니까. 저의 의자는 넘어지고 저의 집 부엌에는 재가 사방에 흩어졌습니다. 지난날 조르칼쿤 산에 가까운 붉은 언덕에서 함께 주고받은 약속을 설마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비록 독사가 우리들의 결합에 이빨을 돌리더라도 그 독이빨이 파고들 틈을 주지 않으며 어떠한 감언에도 넘어가지 말고 서로 흉금을 터놓아 참다운 말의 증거만을 믿자하고........ 짐수레가 좌우의 채 가운데 하나를 잃으면 소는 수레를 끌 수 없게됩니다. 두 개의 바퀴 가운데 하나를 잃으면 수레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저 역시 그대라는 수레의 두 채 가운데의 하나, 두 개의 바퀴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습니까?”

 

[175]발주나 못의 쓴 물을 마시며 한 맹세

발주나 못에 거의 물이 없는 계절이었으므로, 후세의 페르시아 사자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칭기즈칸은 갈증을 덜기 위하여 진흙을 파서 얻은 물까지 마셨다고 한다.

“고난을 겪으면서도 이탈하지 않은 사람들의 충절에 감동되어 그는 합장하고 하늘을 우러러 앞으로는 일동과 고락을 함께 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리고 그 말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자기는 발주나 못의 흐린 물처럼 될 것이라고 했다. 동시에 그 흐린 물을 자진하여 마시고 잔을 돌리자 다들 그를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이들 칭기즈칸의 전우들은 훗날 발자나트라고 불리어지며 제각기 충절에 대하여 커다란 보상을 받게 된다.”

 

[177]

‘마지막에는 장신구의 가죽과 활시위를 뜯어먹을 만큼’ 고생을 거듭한 끝에 가까스로 발주나 못에 이르러 칭기즈칸을 만났다.

[188]나이만 왕 타얀의 전쟁 준비

칭기즈칸은 케레이트의 영토를 병합함으로써 동몽골에서 중앙몽골을 지배하게 되었다. 나머지는 나이만의 영토인 서몽골인데, 서몽골은 몽골 알타이와 이르티슈 강 상류 지대를 중심으로 킹가이 산맥에서 중게리아 산맥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189]

“하늘에는 해와 달이 함께 있을 수 있어도 땅 위에는 오직 한 사람만의 칸이 있을 뿐이다.

 

[193]나이만 군과의 결전

“이 끝없는 길은 흔히 상상하듯 살풍경한 곳이 아니다. 풀은 무성하고 꽃이 아로새겨져 있다. 선명한 황색의 미나리아재비와 십자화과의 꽃, 당아욱빛의 사향초과 총총이풀, 연미붓꽃 등이 핀 가운데 여기저기 새하얀 별꽃 등이 섞여 있다. 그 갖가지 빛깔의 꽃들을 감사하는 것은 무척 즐겁다.

 

투울라 강 남쪽에서 오르콘 강 동남에 걸친 시아리 케엘은 ‘나귀 등의 스텝’이라는 말 뜻이 가리키고 있듯이, 둥근 언덕이 이어져 있다.

“눈이 닿는 한 오직 노란 빛깔의 높고 낮은 언덕이 물결치듯 이어져 있을 뿐이고, 모래땅 여기저기에 시들어가는 풀들이 돋아나 있다.”

보다 더 서쪽으로는 “기복이 적은 누른 빛깔의 스텝이다. 여기저기 바싹 말라 소금을 뿜어내는 늪이 햇빛을 받아 흰 무늬를 반짝이고 있다.

 

[195]

“몽골 인의 수가 적다고 한 건 누구야. 야영의 화톳불이 하늘의 별보다도 더 많잖아.”

“몽골 군의 말은 발굽을 다쳤다고 들었는데 별보다도 더 많은 화톳불을 밝히고 있다”

 

[196]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결국 죽음에 이른다. 사람의 몸은 고통을 받게 마련인 것, 그것이 곧 세상사이다. 내 운명이 그리하다면 싸우는 수밖에 없지!”

 

[197-198]칭기즈칸의 네 마리 개 -제베, 쿠빌라이. 제르메, 수부타이

몽골의 전술 용어- 전진할 때의 대형은 ‘풀숲’과 같을 것, 그리고는 ‘호수’의 형으로 대형을 전개시킬 것, 다음에는 ‘송곳’ 모양의 돌격을 가할 것, 칭기즈칸은 몸소 선봉에 서서 지휘를 했으며, 본대는 아우 카사르에게, 예비의 기병은 막내아우 테무게에게 맡겼다.

몽골의 서사시는 나이만 왕이 평원에 그 모습을 나타내는 갖가지 적의 부대에 대해서 차무하에게 물어보는 대목을 훌륭한 시편으로 묘사하고 있다.

 

“저들은 나의 ‘안다’ 테무친의 네 마리 개입니다. 모두가 사람 살코기를 먹고 자랐으며, 쇠사슬에 매여 있습니다. 모두 이마는 청동같고 입은 끌, 혀는 송곳, 심장은 강철, 꼬리는 칼날과 같습니다. 밤이면 이슬로 목을 축이지요. 바람을 타고 달려갑니다. 싸움이 있는 날에는 사람 고기를 먹습니다. 지금 저들은 사슬에서 풀려나 기쁜 나머지 입에서 침을 흘리고 있습니다. 저 네 마리의 개, 그들은 제베와 쿠빌라이, 제르메와 수부타이입니다. ”

 

몽골제국의 선언

[217] 몽골 제국의 선언과 논공행상

샤먼인 쿠쿠추는 자신을 테프 텐게리라 부르게 하고 있었는데, 그와 같은 자격을 배경삼아 이상의 선언을 정식으로 인정했다. 진실로 칭기즈칸의 권력은 하늘의 뜻에 따른 것이며, 옛 투르크 인과 옛 몽골인의 최고신 ‘쿠쿠 몽카 텐게리’가 지상의 대리자로서 새로운 제위를 수여한 것이다. 칭기즈칸이야말로 ‘영원한 하늘의 신이 뽑으신 칸’이었다.

 

[222]

“밤에는 늑대와 같이, 낮에는 까마귀와 같이 조심을 게을리 하지 않는 쿠난”

 

[225] 근위대의 재편성

“오오, 나의 충성스럽고 용맹한 파수병들, 오래도록 나를 섬기는 자들이여, 너희들은 칠흑의 밤에도, 달밤에도, 눈보라칠 때 억수같이 비가 쏟아질 때, 견딜 수 없는 추위 속에서도 나의 막사 주위를 지키고 나를 편히 쉬게 해 주었다. 나의 진지 주위를 적이 배회할 때에도 너희들은 그 곳에 있었으며, 막사 주위에서 눈도 깜박이지 않고 들릴락 말락한 화살통 소리에도 벌떡 일어섰다. 나는 너희들 덕분에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226]

“나의 병사들은 수많은 나무가 울창하여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숲과 같은 것, 나의 소망은 그들의 입을 간 것으로 축여 주고 그들의 몸에 비단옷을 입히며, 훌륭한 말에 태워 상쾌하게 흐르는 물을 마시게 하고, 그들의 가축에게는 풍성한 목초를 먹이되 그 목장에는 가시나무 한 그루도 나지 않게 하는 일이다.!”

 

[227]

이 ‘푸른 몽골인의 이상은 유랑하는 사냥꾼의 이상을 그대로 드러낸 거이다. 여러 탐험가가 말하듯, 그리고 칭기즈칸 자신도 다음과 같은 말로써 분명히 밝혔듯이 순수한 면과 잔인한 면을 번갈아 드러낸다. “평소에는 두 살짜리 새끼사슴과 같고, 잔치 때는 망아지처럼 순진하게 날뛰지만, 일단 싸움에 임하면 매처럼 적을 덮친다. 낮에는 나이든 늑대처럼 방실하지 않으며, 어두운 밤에는 까마귀처럼 빈틈이 없다.

 

[232-234]샤먼들의 막강한 영향력

칭기즈칸은 초원의 유목민과 숲의 수렵만을 그의 세력 하에 통합하여 완전한 몽골의 주인이 되었다. 훗날 ‘제국은 말에 의하여 세워졌다’고도 일컫게 된다.

 

1206년 칭기즈칸의 즉위를 정식으로 승인한 것은 쿠쿠추였다. ‘하늘의 신은 칭기즈칸이라 일컫기를 그에게 명했다.’

칭기즈칸은 쿠쿠추의 도움을 중시했는지, 아니면 그의 신통력에 겁을 먹었는지, 아무튼 그를 어려워하여 어느 정도 그에게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상태가 언제까지나 계속될 리는 없었다. 샤먼은 영계의 힘을 믿고 몹시 거드름을 피웠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칭기즈칸과 대등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으로 자처하면서 예절도 갖추지 않은 채 토론까지 벌이기도 하였다. 쿠쿠추는 새로운 칸의 영달을 촉진한 것은 자기이며 즉위가 가능했던 것도 자기의 주술 덕분이라 믿었다. 따라서 남들이 보기에 자신을 황제와 대등하게 여기지 않는 지 의심을 받을 정도였다.

 

[242]탕구트 정벌

거의 해마다 ‘말이 살찌는 가을’이 되면 몽골의 기병이 그 사막 지대를 손쉽게 횡단하여 오늘날의 감숙성 들판에 약탈하러 모습을 나타냈다. 사막을 자나가면 눈앞에 펼쳐지는 오아시스에는 버드나무, 포플러, 과수원, 밀이나 조밭, 넓은 들이 펼쳐져 있어 유목민의 눈에는 흐믓한 광경, 뜻밖의 보물로 보였을 것이다.

 

[244-245]요복속

만리장성 북쪽에 전개 되어 있는 스텝,즉 현재의 내몽골 스텝에는 정착생활과 유목을 반반으로 하고 있는 민족, 투르크계의 온구트 족이 살고 있었다. 네스토리우스 파 기독교를 신봉하는 백성으로, 서구인의 흥미를 적잖이 끌지만, 몽골 인 역시 이 곳에 친근감을 느낀 듯 하다. 먼저 토지로부터가 몽골 인의 고향과 놀랄 만큼 흡사하다.

“나무는 없다. 끝없이 펼쳐지는 스텝, 그곳을 흐르는 강은 염수의 호수로 흘러든다. 그곳은 중국인의 ‘보리의 토지’에 대한 ‘풀의 토지’로 답답할 정도의 무인 지경을 가노라면 고작 열 내지 스무 개의 천막과 마주치게 되는데, 수백 마리의 낙타, 망아지, 1,000마리 정도의 양과 염소의 떼가 부근의 풀밭에서 풀을 뜯고 있다.”

 

[250]만리장성의 점령과 중원의 기마행

“적의 시체는 나무가 베여 넘어지듯 쌓였다.”

 

[255]북경 점령

칭기즈칸역시 그런 호기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다음해인 1215년 봄, 그는 중신 무하리를 보내어 마침내 북경 공략의 진을 펴게 했다. 전해에는 만전의 방비를 굳히고 있는 대도시의 공격에 별로 마음이 없던 정복자가 적진이 어지러워진 것을 보고, 또 주둔병의 일부가 없어졌음을 확인하자 공성전을 망설이지 않게 된다. 거기에서 칭기즈칸의 성격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그의 견실한 평형감각은 항상 가능과 불가능을 분간하고 그때그때의 힘에 걸맞는 일을 기도한다.

 

[256]

그 모든 것은 멸망되었다. 살육은 언제나와 같이 반복되었다. 몽골 병은 궁궐에 불을 질렀다. 불은 한 달 이상인 계속해서 타올랐다. 칭기즈칸은 중국의 여름철 더위를 피하여 만리장성 저편 드론놀이라는 호숫가에 물러나 있었는데, 정복의 광경을 보러 오려고도 하지 않았다. 어느 몽골 인이나 그러하듯, 그는 도시 경제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적어도 그 무렵에는 도회지를 정복해도 그것을 파괴하는 거시 이외에 다른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259-262]칭기즈칸과 중국 학자와의 해후

처음 칭기즈칸의 군대는 하북 땅의 싸움에서도 파괴만을 일삼았다. 초원의 목자나 숲의 사냥꾼은 문명과 문화를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징기즈칸 자신은 북경 점령시 투항했던 어느 중국 귀인을 통하여 문명에 접하게 되었다. 이 접촉은 몽골 제국의 문명에 실로 큰 영향을 미쳤다.

 

예류추짜이는 최후의 금나라 황제를 받드는 궁중의 고문관이었다. 예류추짜이는 단순한 점술가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무엇보다도 예지와 인자(仁者)의 마음을 갖춘 중국의 대학자였다. 그리고 칭기즈칸의 신뢰를 훌륭히 이용하기도 했다. 전쟁의 와중에서 정복자의 다른 무장들이 약탈만을 염두에 두고 있을 때 오직 예류추짜이 한 사람은 전리품 중에서 몇 권의 한서와 한약만을 가졌다. 그 약은 시체에서 전염병이 번져나갈 때 무수한 병자를 살렸다. 그의 덕분에 천년을 이어 내려온 문명은 칭기즈칸의 궁전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그는 칭기즈칸의 신뢰를 받았으며, 그 신뢰를 잘 이용했다. 때문에 은연중에 유목민의 야만스런 규율을 그가 폐지시킨 예도 적지 않다. 그는 유목민의 정복자를 설복하여, 경작지를 짓밟고 백성들을 몰살하기보다는 연공을 받아들이는 것이 이익이 되며, 도시를 파괴하여 거기 쌓여 있는 부를 송두리재 빼앗기보다는 부의 출처 그 자체를 보존하는 편이 제국을 위하여 더 현명함을 깨닫게 했다.

 

그는 훗날 칭기즈칸의 아들에게 제국은 ‘말에 의해 정복되었지만 ‘말에 의하여 다스릴 수는 없다’고 직언하고 있다. 그에게는 경세가의 소질이 있었다. 그것을 남보다 먼저 인정하고 그의 말을 잘 받아들이는 것은 바로 칭기즈칸이었다. 그것도 짐승의 가죽을 두른 우두머리와 북경 궁전의 전 고문관 사이에는 교양의 깊은 층이 가로놓여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알렉산더 대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이자 제자이기도 한 철학자 카리스테네스를 원정길에 데리고 갔다가 그를 죽였었다. 마케도니아의 대왕만큼 교양은 갖추고 있지 않았으나 칸은 중국 학자에 대한 애정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264-265]실크로드 지역의 위구르 왕 바루추크

위구르 인은 다른 투르크, 몽골 계의 다른 민족들에게 문명의 교사와고 같은 구실을 하고 있었다. 위구르인이 사용했던 투르크 어나 위구르 문자는 북아시아 일대의 행정어로서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

1204년, 칭기즈칸이 나이만 왕국을 멸망시켰을 때 항복한 자 중에는 타타통가라는 위구르 인 서기아 있었는데, 그는 황금 도장을 지니고 있었다. 칭기즈칸은 난생 처음 보는 물건이라 이상히 여겨서 그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저희 주군께서는 금전이나 곡물을 받아들일 때 혹은 가신에게 어떤 명령을 내릴 때,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 도장을 찍으셨습니다.”

 

요컨대 이 위구르 인 문관은 ‘국새상서國璽尙書’로서 나이만 왕을 섬겨왔던 것이다.

칭기즈칸도 같은 일을 시키기 위하여 타타통가를 신하로 삼았다. 그날부터 새로운 몽골 제국의 공문서는 위구르인이 사용하는 투르크 어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다. 칭기즈칸은 평생을 문맹으로 보냈지만, 네 명의 아들들에게는 어떻게 해서든 위구르 문자를 깨우쳐 주려고 했다. 그 이외에 친카이라는 문관도 타타통가와 더불어 칭기즈칸 정부의 사법부 창립을 위한 임무를 맡았다. 친카이 역시 케레이트 태생으로 위구르 인의 교양을 지니고 있었다. 친카이를 두고 서구의 여행자들이 ‘최고 비서관’이니 ‘사법장관’이니 하고 부른 것은 지극히 합당한 것이다. 이리하여 정복자 칭기즈칸이 살아있을 재부터 유목민의 궁전에도 ‘위구르 관청’이 생겨나고, 후계자 대에 이르러서는 큰 역할을 하게 된다.

 

[279]호라즘 원정에 앞선 후계자 결정

쿠쿠추스 노인은 칭기즈칸의 장남 주치와 차남 차가타이가 후계자 자리를 놓고 싸우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어울리는 말을 했다.

“오오, 차가타이 님, 왜 또 그처럼 거친 말을 하시는 거요. 당신들이 태어나기 전에 몽골 인의 땅은 어지러워질 대로 어지러워졌고, 곳곳에서 부족끼리 싸움을 벌여 편안하게 사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남의 물건을 훔치고 도처에서 유괴와 살인으로 날을 지새웠습니다.”

“ 그 당시 여러분의 부군께서는 제국의 기틀을 닦고 겠셨습니다. 그 거룩한 몸에서도 수많은 피를 흘리시며, 베개 삼을 것이라곤 오직 자신의 팔뿐이요, 갈증을 덜 것이라곤 입 안의 침뿐이고, 굶주림을 덜 것이라곤 이빨에 닿는 살뿐이요, 허구한 날을 싸움으로 지새우니 솟아나는 땀이 이마에서 바닥까지 적시는 형편... 어머님 역시 그 고생을 함께 하셨습니다. 당신들을 기르기 위해서 입에 넣었던 것도 오로 꺼내시고 , 당신들을 그 목에 매달리게 하면서도 생각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 훌륭한 대장부로 키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어머님은 여러분들의 키가 무사의 어깨와 군마의 볼기짝에 닿을 만치 양육하셨습니다. 우리들의 거룩하신 황후님은 태야처럼 밝고 추수처럼 맑은 마음을 지니고 계십니다.”

 

[281]

남달리 조심성 있는 칭기즈칸은 형제간에 불화가 생길 것을 예견하여 못 박아 두었다.

“너희들은 함께 살아서는 안된다. 땅은 넓어 하천은 얼마든지 있다. 나는 제국을 분할하여 너히 하나하나가 제각기 정부를 가지고, 그 아래 백성들은 저마다의 목초지를 가질 수 있게 해 주마.”

 

[293]

부하라에 입성하다 정복자는 말에 올라탄 채 이슬람교의 대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이것이 술탄의 궁정이냐고 물었다. 알라의 집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칭기즈칸은 이마무가 기도드리는 단 앞에서 말을 내려 설교단 위로 두세계단 올라간 다음 큰 소리로 말했다. “들은 짓밟혔다. 말에게 먹이를 주라 !”

 

[311]

복된 오아시스의 땅에 토루이 왕자와 유목민의 군사가 나타남으로써 인류 역사상 가장 처참한 참극 가운데 하나가 연출되었다. 정신적 문화의 파괴가 오아시스 지대 그 자체의 파괴, 곧 ‘대지의 죽음’과 함께 따라왔던 것이다.

 

[327]

두 회교도 학자에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한 사실은 정복자의 생애를 통해서 중요한 획을 긋는 일이었다. 그때를 경계로 하여 지금까지는 도시 문명의 조건을 전혀 알지 못했던 유목민의 수장은, 승리의 성과를 이용하여 옛 문명 제국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다. 그 제국을 불시에 찬탈한 자가 정복한 문명의 계승자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369]

칭기즈칸은 누구보다도 이해력이 풍부하고 건전한 상식의 소유자이다. 그러한 칭기즈칸이 가공할 잔학 행위를 방치해 둔 것은 당시의 몽골 인 환경으로 미루어 유목 생활이 아닌 생활 형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그 이외의 방법에 의한 전쟁은 전혀 몰랐으며, 정착민의 토지는 약탈이나 학살, 인간 사냥의 대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이외의 방법도 있음을 터득하게 되자, 칭기즈칸은 곧 예류추짜이에 명하여 정착민의 국토에 일정한 조세를 부과하는 등 규칙적인 행정의 방식을 갖추게 만들었다.

 

3. 내가 저자라면

 

칭기즈칸을 주인공으로 한 대서사시이자 소설이다. 몽고를 다녀오기전 읽을 때는 상상할 수 없는 풍경들이다. 하지만 7박 8일 일정으로 (8월 3일~8월 10일 )다녀온 후에 다시 읽어보니 저자가 말하는 풍경을 이해할 수 있으며, 눈앞에서 그림을 그리듯 상상이 되었다.

 

“나무는 없다. 끝없이 펼쳐지는 스텝, 그곳을 흐르는 강은 염수의 호수로 흘러든다. 그곳은 중국인의 ‘보리의 토지’에 대한 ‘풀의 토지’로 답답할 정도의 무인 지경을 가노라면 고작 열 내지 스무 개의 천막과 마주치게 되는데, 수백 마리의 낙타, 망아지, 1,000마리 정도의 양과 염소의 떼가 부근의 풀밭에서 풀을 뜯고 있다.”

그 광활한 초원위에서 펼쳐지는 한 사나이를 중심으로 한 대서사를 보는 마음은 담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정복한 나라에 대해 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무지함. 정복한 나라에 대해 모든 사람들을 살육하고 파괴했던 무지함을 몽골의 박물관을 돌아보면서 느꼈었다. 칭기즈칸이 글을 읽을 줄 몰랐지만, 금나라 황제 고문관 예류츄짜이를 만나면서 유목민의 야만스런 문화도 조금씩 폐지가 되었다.

 

 

1204년, 칭기즈칸이 나이만 왕국의 타타통가를 만나면서 문자에 대한 인식을 했다. 자국의 문자가 없어 기록할 수 없는 문맹의 무지가 남의 나라 언어를 빌어와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대한민국의 나라는 동방의 아주 조그만 나라지만, 나름대로의 문화를 유지하고 자국의 문자와 언어를 가진 자긍심을 가지게 했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주군에 대해 맹세를 하거나, ‘안다’라는 의형제를 맺거나, 상대방을 욕하는 언어속에 몽골에 스며있는 자연과 동물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다음 말은 칭기즈칸이 어렸을 때, 이복형을 죽이고 나서 어머니에게 들었던 말이다.

 

“이 살인자들아! 너희들 가운데 하나(테무친)는 태어날 때 핏덩이를 움켜쥐고 있었어! 또 하나는 이름 그대로 잔인한 카사르 개야(남러시아의 스텝, 카사르 지방의 개). 너희들은 바위 위에서 덤벼드는 범과도 같구나. 미쳐 날뛰는 사자와도 같구나. 먹이를 통째로 집어 삼키는 구렁이, 자기 그림자를 덮치는 매, 다른 물고기를 슬쩍 들이마시는 꼬치고기, 자기 새끼의 발굽을 갉는 낙타의 수컷, 폭풍우를 뚫고 먹이를 노리는 늑대, 뒤따라오는 병아리를 잡아먹는 오리, 움직일 수 없게 되면 사냥개의 무리에 에워싸여서도 자기 구멍을 파는 재거, 먹이를 끌고 가는 호랑이, 무턱대고 덤벼드는 짐승이냐, 아무리 그래도 자기 그림자 이외에는 자기편이라고는 없는 것이다. 너희들에게는 말총 이외에는 채찍조차도 없지. 그래 가고고서야 나치치우트의 모욕에 대해 원수를 갚을 수 없을 거야!”

“이처럼 커어룬 어머니는 옛 격언과 고인의 말을 빌려 아들 형제를 꾸짖었다. ”(66p)

 

보완점으로는 목차에 번화가 없다. 글씨의 크기로 대제목과 소제목을 겨우 구분하고 있다. 저자 서문도 없다. 저자가 어떻게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와 어떻게 썼는지, 자료는 무엇을 참고로 했는지에 대한 것도 없어서 글을 읽는 독자로서는 조금 답답함을 느꼈다. 몽골을 다녀와서 어렴풋이 짐작을 하면서도 이동 경로를 지도로 첨가하는 센스도 곁들였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목차

 

칭기즈칸의 선조들

푸른 이리와 숲속 암사슴의 아들들

칭기즈칸의 선조이야기

막내 보돈차르

유목민의 비참함과 위대함

금나라 궁정에서 잡혀죽은 몽골 왕 암바카이

사라지지 않는 증오, 암바카이의 처형

몽골 인의 헤라클레스 쿠투라

 

칭기즈칸의 어린 시절

용사 예수가이와 요한

예수가이와 커어룬을 차지한 이야기

칭기즈칸의 어린 시절

일족에게 쫓기는 아비 없는 자식들

형제을 살인한 칭기즈칸

칼에 채워진 칭기즈칸

칭기즈칸의 탈출

말을 약탈하다

칭기즈칸의 결혼

검은 담비의 가죽주머니

미녀 보르테의 유괴

미녀 보르테의 탈환

유목민의 분열

 

정복자 칭기즈칸

몽골인의 왕이 된 칭기즈칸

끊는 가마솥으로 던져지는 포로

잔치 후의 싸움

케레이트 왕을 돕는 칭기즈칸

금나라 황제를 섬기는 칭기즈칸

잇따른 왕족들의 처형

산 속의 기습

칭기즈칸의 넓은 도량

반칸 차무하와 칭기즈칸의 대결

칭기즈칸의 부상과 제르메의 충성

칸의 말을 명중시킨 명사수 제베의 투항

너희들의 주인을 내 손에 넘겼다면 나는 너희들을 베었으리라

타타르 족의 전멸

타타르 인 예스겐과 예수이와의 결혼

칭기즈칸이 제의한 혼담을 거절한 셍굼

서약과 배반 사이에서

셍굼의 기습을 알려준 두 목동

붉은 버드나무 땅에서 옹 칸과의 격전

칭기즈칸의 눈물

패퇴하는 칭기즈칸

옹 칸과 차무하에게 보내는 칭기즈칸의 호소

발주나 못의 쓴 물을 마시며 한 맹세

칭기즈칸의 야간 행군과 기습작전

케리이트 왕녀들의 운명

노상강도 노릇을 하다가 죽은 왕자 셍굼

나이만 왕 타얀의 전쟁 준비

나이만 군과의 결전

칭기즈칸의 네 마리 개

칭기즈칸의 포위작전과 타얀의 죽음

미녀 쿠란의 쳐녀 입증

철저한 메르키트 족 소탕작전

칭기즈칸과 친구 차무하

 

몽골제국의 선언

몽골 제국의 선언과 논공행상

근위대의 재편성

시베리아 밀림 정복

샤먼들의 막강한 영향력

대샤먼 문리크 아들 쿠쿠추의 처치

탕구트 정벌

요복속

만리장성의 점령과 중원의 기마행

북경 점령

칭기즈칸과 중국 학자와의 해후

실크로드 지역의 위구르 왕 바루추크

제베의 동투르케스탄 정벌

호라즘 국경에서 벌어진 대상(隊商)학살사건(무리를 이룬 장사꾼들)

호라즘 원정에 앞선 후계자 결정

 

칭기즈칸의 세계 정복

호라즘 정복

분노의 폭풍, 부하라 점령

사마르칸드 점령

불타는 도시 우르겐지

술탄을 쫒는 사람사냥

분노의 폭풍, 호라산을 휩쓸다

호라즘 왕국의 황태자 자라르 웃딘

이슬람교에 대한 관심

칭기즈칸의 죽음에 대한 문제

칭기즈칸을 만나기 위한 장춘의 서유(西遊)

칭기즈칸과 신선의 대화

칭기즈칸의 초원으로의 귀향

제베와 수부테이의 페르시아, 카르카즈, 러시아 원정

정복자의 휴식

중국 재정벌

최후의 탕구트 정벅

칭기즈칸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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