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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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 그 위대한 위안에 대하여, 고즈윈 원고, 2007년 4월 18일
나이가 쉰 살을 넘어 서면서 인생은 어딘지 어수룩하고 고즈넉한 쉴 곳을 찾고 있었다. 넋 놓고 바라볼 곳도 그리워 졌고, 자연이 못 견디게 예뻐졌고, 젊은이들이 귀여워 졌다. 나는 서서히 사람들이 그리워졌다.
회사를 나와 혼자 1인 기업을 만들어 운영하는 동안 조직에서 벗어나 홀로 천천히 느린 내 발걸음에 맞추어 살아가는 일을 매우 매력적이었다, 조직이란 여러 가지로 내겐 잘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나는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고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는 눈이 예민한 사람이다.
‘조직 속의 나’와 자유인으로 ‘내가 나를 보는 나’ 사이의 불일치를 잘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 간격이 크면 쉽게 감정적 소진이 일어나는 사람이라 가능하면 나는 나로 살아야 편안한 사람이다.
중국의 전국 시대를 끝내고 유방이 한나라를 세우는데 최고의 공신이 된 한신이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남의 수레를 타는 자는 그 우환을 제 몸에 지고, 남의 옷을 입는 자는 그 근심을 제 가슴에 품고, 남의 것을 먹는 자는 그의 일을 위해 죽는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은혜를 입고도 그 빚을 갚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셈이다.
조직 속에 있으면 그 속에서 밥을 먹고 옷을 입는 셈이다. 조직 속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에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인생을 살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나대로 편히 마음 껏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늘 불편했었다.
2000년 새로운 세기가 시작하자 나는 홀로 서기를 시도 했다. 마흔 여섯의 나이니 젊다고 할 수 없다. 나는 운이 좋았고 늦게나마 내가 살고 싶었던 인생을 즐기게 되었다. 쉰 살이 넘자 홀로 떨어져 지내는 외로움이 느껴졌다. 혼자만 잘 살면 무엇하랴는 생각도 들었다. 마침 그때 여러 젊은이들이 내게 길을 물었다. 대부분 책을 통해 나를 안 독자들이었다.
쉰 살이 넘어 나는 두 가지 프로그램을 시작하였다. 다양한 개인이 가장 자기답게 세상을 살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그들이 획일성의 덫에서 벗어 날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리하여 다양한 차이가 서로를 빛내주는 어울림으로 전환되기를 바랐다.
첫 번째 작업에 ‘내 꿈의 첫 페이지’ 라는 이름을 붙여 두었다. 의도는 명확했다. ‘하고 싶고 잘 할 수 있는 있는 일에 인생을 걸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을 뒤지는 작업을 도와주는 프로그램이다. 우리는 함께 자신의 기질과 재능 그리고 경험을 연결하여 ‘나만의 직업’을 만들어 내기 위한 2박 3일 동안의 여행을 함께 하곤 했다.
이 사람들은 전국 각지에서 한 사람씩 모여 들었다. 3 년 동안 모두 예순 명가량 모였다. 그들은 아직 어느 누구도 유명한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모두 평범하다 못해 스스로 시시한 사람들이라고 여기며 고민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그러나 언젠가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표현해 낼 수 있는 길을 찾아 낼 것이다. 나는 이들을 ‘창조적 부적응자’라고 불렀다. 자기네들 끼리는 ‘꿈벗’이라고 부르며 매우 가깝게 지내고 있다.
또 하나는 아주 작은 개인대학을 시작한 일이었다. 이제 세 돌을 맞이하여 세 번째 신입생을 받게 되었다. 신입생은 언제나 열 명 남짓했다. 내 홈페이지는 지금 봄꽃과 함께 그들의 향기로 가득하다. 그것은 여러 색깔과 모양으로 어울린 빛나는 꽃밭 같았다.
‘지금의 자신에게 분노하고, 자신과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 그리하여 삶을 한번 다시 시작하고 싶은 사람들‘은 학벌과 나이, 성별과 직업에 관계없이 응모하라고 말해 두었다. 멋모르고 가르침을 위한 ’시작을 시작‘한 셈이다.
처음에는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에 치중했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 나는 ‘무엇’을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자신의 관심사와 내면을 발견하기를 원한다. 내면의 요구와 관심을 알게 되면 결국 그들은 자신을 위해 가장 이로운 일을 하게 될 것이고, 자기 한 몸만큼 세상을 위해 아름다운 한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때가 되면 결국 자신의 빛깔로 아름다운 꽃이 되어 피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조금 흐르면서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답해 보려 했다. 서로 배우게 할 생각이다. 이 사람들 끼리 서로 ‘스승과 친구’가 되어 먼 길을 가게 하는 것이 최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경쟁’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어제의 나와의 경쟁’, 이것이 가장 훌륭한 배움의 방법이며, 서로 격려하고 마음을 써 줄 수 있는 배경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들은 함께 수련하고 수양하는 파트너이며 서로의 선생인 것이다.
요즘 들어 ‘누가’ 가르칠 것인가라는 질문에 막혀 있다. 느닷없는 질문으로 생각될 지 모른다. 그러나 이 질문은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게 스승이 한 분 계셨다. 나는 그 분에게서 역사학을 배웠다. 그것은 내가 다른 선생님에게서도 충분히 배울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를 감동시킨 것은 그 분의 삶에 대한 자세와 그 내면의 풍광이었다. 선생이 누구인가는 교육의 가장 핵심적인 대목이다. ’교육의 기술은 진짜 선생님이 나타날 때 까지만 유효한 것‘이다.
좋은 선생이란 어떤 사람일까 ? 가장 기초적인 바탕은 자신의 분야에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전문가여야 한다.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무엇’을 가르칠 지 저절로 안다. 그러나 지식만 있다하여 다 전달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선생은 학생들과 반드시 ‘정서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감정적 절연 상태에서는 지식이 스며들게 할 수 없다. 지식이 정신의 일부가 되어 체화되고 운용되게 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서로 좋아하여 찾게 되면 훌륭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연결’이 가장 좋은 교수법이다. 지식을 가지고 있고 정서적으로 학생과 연결되어 있는 선생은 좋은 선생이다.
좋은 선생과 훌륭한 선생 사이에는 높은 산이 하나 있다. 훌륭한 선생은 학생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이 일이 지극히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선생의 삶 자체가 가장 훌륭한 영감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래서 종종 아무 것도 모르고 너무 쉽게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음을 후회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스승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갈림길에서 늘 스승에게 길을 물어 내면의 빛을 충당해 왔기 때문에, 그만둘 수가 없다. 나이가 들어 커다란 짐을 지고 있다는 것이 즐겁기도 하고 고되기도 하다.
내가 젊은이들과 함께 배우고 즐기는 동안 몇 가지 사실들을 알아가게 되었다. 그들은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젊은이들이었지만 일상은 도처에서 넘어서는 안되는 굵고 검은 선으로 가두어져 있었다. 이 ‘굵고 검은 선’은 원래 우리를 양육해온 문화가 우리를 그 사회에 순응하는 사람으로 규제하기 위해 쳐 둔 것이었다.
처음에는 희미했던 이 선은 살아가면서 자발적으로 강화되면서 점점 굵고 선명한 규제의 마지노선이 되어간다. 말하자면 정신의 무한한 공간 중 익숙한 일부만을 허용하면서 그 선 너머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서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문명 마다 다른 인식의 틀을 가지고 있다. 한국 사회는 많은 21세기적 강점을 가지고 있지만 허용의 한도가 좁은 폐쇄성이라는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한국 현대사가 가장 고약한 길을 걸어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식민지의 생활 그리고 해방 후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독재정권은 사회의 다양성과 자유의 수준을 엄격히 제한했다. 허용된 범위를 벗어나는 사람들은 모두 ‘감시와 처벌’의 대상이었고 곤욕을 치뤘다.
결국 일정 범위 안에서의 생각과 행동만을 허용함으로써 오랜동안 우리는 사회가 허용하는 극히 한정된 질서 속에서 생활해 왔다. 이런 폐쇄성은 거의 모든 일상을 지배했다. 예를 들어 경직된 교육은 아직도 똑같은 국화빵을 찍어 내는 작업을 계속함으로써 창의성과 상상력이 결핍된 21 세기적 실업자를 대량 생산해 내고 있는 것이다.
20세기의 거의 대부분을 몸으로 살았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자신의 자서전인 ‘미완의 시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또래의 지식인들에게는 두 개의 조국이 있었다. 하나는 자기가 태어난 나라이며, 다른 하나는 프랑스였다. 마찬가지로 20세기에 서양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 아니 세계 어디든 도시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는 정신적으로 자기가 태어난 나라와 미국이라는 두 개의 조국이 있었다......미국은 굳이 발견될 필요가 없었다. 미국은 우리 존재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 예나 지금이나 하느님은 그렇게 멀 수가 없었고, 미국의 입김은 그렇게 강할 수가 없었다”
19세기 파리는 유럽의 수도였고, 20세기의 뉴욕은 세계의 수도가 되었다. 이 두 나라 두 도시의 힘은 어디서 왔을까 ? 19세기 프랑스는 그림과 조각, 빛나는 전통을 자랑하는 프랑스 소설을 제외하면 ‘세계최고’라고 말할 수 없었다. 프랑스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들도 셰익스피어나 괴테, 단테 그리고 푸슈킨보다 프랑스 작가가 더 훌륭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가장 독창적인 프랑스 음악도 비엔나의 음악을 따라갈 수 없었고, 프랑스의 철학은 독일의 철학보다 분명히 한 수 아래였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 그리고 세계의 젊은이들이 그때 파리의 허름한 호텔로 꾸역꾸역 몰려들기 시작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
홉스봄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프랑스에는 중요한 자산이 있었다. 그것은 원하는 외국인 누구에게나 자신의 문명을 선사해줄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누구도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장악한 이태리와 독일에 가고 싶어 하지 않았고, 영국에게는 섬나라의 편협성이 느껴졌다. 혁명이후 프랑스는 가장 폐쇄적인 궁정문화를 민주화 시켰고, 사람들은 확장된 귀족문화를 즐겼다.
가장 국수주의였던 이 나라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원칙을 수호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나라를 활짝 열었다. 19세기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많은 이민을 받아들인 나라였다. 파리는 국제문화의 중심지였고, 누구나 한 번은 살아 보고 싶은 도시였고, 살아 보았다고 자랑하고픈 선망의 도시가 되었다.
2차 세계대전 후 뉴욕의 힘과 미국의 힘을 만들어 낸 것은 미국인들의 힘이 아니라 미국을 선호하여 찾아온 세계인들의 힘이다. 미국자체가 그렇게 여럿이 모여 만들어진 나라다. 이미 실리콘 벨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1/3은 미국인들이 아니다. 가장 다이나믹하고 창의적인 세계인들에 의해 미국의 국부가 채워지고 있는 것이다.
개인은 자신이 속한 문화권이 어디냐에 의해 그 정신과 생각의 틀이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내가 누리고 있는 언어, 내가 쓰는 몸짓, 내가 내세우는 능력, 기능, 재치 모두 사회적 유산에 의해 길러진 것이며 심지어 꿈 조차 내가 만들지 않은 세계에 뿌리내리고 있다’ 라고 말한다.
사람이 커가면서 다양한 배움을 계속하지 못하면 일단 형성된 소아병적인 좁은 세계가 스스로 사고의 벽을 강화하면서 다름과 새로움에 배타적이게 만들어 놓는다, 새로운 사상에 낯설어 하고, 편견에 싸여있고, 개방에 인색하고, 자유를 그리워 하지만 또한 두려워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20년 동안 직장 생할을 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조직인간의 찌꺼기들이 내 마음의 기저에 깔려 있었다. 그후 10년 간 작가로서의 생활을 해 오는 동안 나는 훨씬 많이 열리게 되었다. 나중에서야 다양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름을 받아들이는 것은 끊임없는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이미 스스로를 규정해 버린 사람은 다름에 대해 완고하다.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함으로써 배타적이고 교조적으로 변하게 마련이다.
실제로 나는 작은 개인대학을 이끌어 오면서 다름의 인식과 수용이 쉽지 않은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올해 뽑은 연구원 중에 마흔 살 중반의 여인이 하나 있다. 지나온 삶이 평탄하지 만은 않아 아이들을 낳은 후 남편과 헤어졌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어두운 결혼 생활 그리고 홀로하는 10년 동안 그녀는 많은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원래 그녀는 천성은 매우 밝고 씩씩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연구원 생활을 시작하면서 과거의 어둠을 쏟아 내고 싶어 했다. 그녀의 천성적 밝음으로 15년의 어둠을 구석구석 밝혀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밝음이 종종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다.
그녀의 글은 일기 같았다. 종종 내밀한 내용이 여과없이 실리기도 했다. 그녀는 쏟아 붓듯 자신을 토해내는 것 같았다. 쓰면서 자신 안에 머무는 어둠을 토해내는 듯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만인이 보는 내 홈페이지에 더욱 특이한 글을 하나 올려 두었다. 매우 그녀다운 글이라고 스스로 평가하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 그냥 지나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일부만 여기 올려 그 글의 성격이 어떠한지 나누어 보자.
"구본형은 미친 여자다. 인간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요염한 치마를 들어올려 도발적Sex하려 든다. 그녀에게는 날마다 새로이 끊임없는 열정과 욕구가 샘솟는다.
구본형은 궁둥살이 빽빽하고 탐스런 발칙한 미시다. 그녀는 정신없이 엉덩이를 씰룩대며 사람들을 유혹하고 그녀의 튼튼한 자궁은 최소한 5천만의 꿈을 생산하고 기르려 든다.
구본형은 투박한 푼수 줌마다. 게으르거나, 한심하거나, 헤매거나, 야망이 있거나, 꿈을 찾거나, 시대를 사랑하거나 하는 세상의 참을 수 없는 부적응자들에게 우선 그들의 허기진 배와 가슴을 먼저 녹이고 귀 기울여 다독이며 손수 밥짓는 법을 가르친다. "
과장되었기에 민망함이 없지 않으나 나는 그저 재미있는 표현이라 여겼다. 그런데 이 글이 몇 사람의 선배 연구원들을 화나게 한 모양이다. 공식적인 홈페이지의 성격에 적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절제되지 못한 글이고, 선생에게 예의를 잃은 글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마 이 글로 인해 - 더 정확하게는 수시로 이와 비슷한 폭포수 같이 절제 되지 않은 글들이 마구 쏟아져 나옴에 대하여 - 그녀에게 충고와 조언을 했던 것 같다. 그게 그녀에게는 맘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느 날 또 폭포처럼 홈페이지에 대자보를 붙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왜 연구원에 지원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자신이 왜 이렇게 속을 뒤집어 토해내 듯 글을 쓰는 지, 자유롭게 말할 수 없음에 대하여, 조언이라는 이름의 강요와 통제에 대하여 긴 소회의 글이 붙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작은 필화 사건이 하나 생긴 셈이다. 그 글이 절절하여 내가 답 글을 달아 두었다.
"내가 너 사고 칠 줄 알았다. 그래서 너를 연구원으로 뽑은 것이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 것이고 다만 생긴대로 살게 되어 있다. 그게 잘 사는 것이다. 그동안 마음대로 살지 못해서 모두 여기에 모인 것 아니냐. 나는 그대 때문에 매일 웃는데, 그대는 힘들었던 모양이구나. 내가 그대를 좋아하는데, 그대는 그것을 아는지 몰라. 언젠가 창자를 뒤집어 내듯 다 쏟고 나면, 남해 푸른 바다물로 속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걱정 마라. 너의 바다가 가장 빛나는 바다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
이 정도에서 끝날까 했더니, 그러지 못했다. 가만히 보고 있던 어떤 구경꾼 하나가 또 뒤 늦게 끼어들었다. 그리고 다시 불길을 지피기 시작했다. 절제하지 못함에 대하여, 일기장을 거르지 않고 마구 올려 두는듯한 경솔함에 대하여, 그 속에 등장하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는 것을 공격하였다. 그녀와 그 구경꾼 사이에 다시 싸움이 시작되었고 그 다음 부터는 감정의 폭언들이 하늘 가득히 날아다니는 돌멩이처럼 적을 향해 투척되었다.
나는 이 작은 투석전을 보며 이 싸움은 곧 그칠 것이고, 서로 사과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며칠 지나 감정적 투석전을 막을 내리고 서로 사과하게 되었다. 마흔 살 중반의 이 여인은 ’미안합니다. 자숙하겠습니다‘ 는 메모를 남겼다.
아직도 꽤 유명한 이 필화 사건은 내 홈페이지의 어딘가에 기록된 채 남아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롭게 해결된 것 같지만 내가 보기에 이 일은 그저 겉으로 덮어둔 일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서로에게 감정의 찌꺼기를 남기고 서로에게 서로를 제약하는 힘으로 남게 되었으리라 추측한다.
결국 다름은 서로에게 틀림으로 인식된 채 남게 되었다. 마음은 여전히 열리지 않고, 과거의 인식의 틀은 더욱 공고해진 듯 보였다. 에릭 에릭슨은 정체성이란 물처럼 흐르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정체성이란 이미 만들어져 형성된 딱딱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기존의 정체성의 어딘가를 깨뜨릴 수 있는 다른 생각과 다른 세계는 적대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므로 편협된 사고의 틀 위에 축조된 가치를 고집하는 것은 배움의 최대의 적이다.
다양성이라는 것은 좋은 말이다. 그것은 개방이며 열림이며 포용이며 어울림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종종 다른 사람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무원칙으로 오해되고, 진실의 외면이며, 예의와 정의의 상실로 받아들여진다,
마음 속에 있는 감정은 이성화 되고 상대를 공격하는 또 다른 논리로 전환되면서 다름은 적으로 간주되는 폐쇄성으로 진행된다. 사람은 어쩌면 ‘합리적인 동물이 아니라 합리화하는 동물’이라는 주장이 그럴 듯해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홈페이지를 만들 때 나는 다음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곳은 간이역 같은 곳이다. 자기라는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되돌아오는 곳이다. 때로는 상처를 안고 돌아오고, 때로는 삶의 한 순간을 특별함으로 채우고 싶은 호기심 가득함으로 찾아든다.
이곳은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곳이다. 쉬고 싶은 사람들이 잠시 머무는 곳이다. 그러니까 폼새가 아늑한 주막 같은 곳이다. 홀로 와 구석자리에서 눈물과 함께 술을 마시거나 때로는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빛나는 수다를 떠는 곳이기도 하다. 때때로 울어 털어 놓고, 때때로 다시 삶의 흥분과 육체의 기쁨으로 들떠 쪽문을 열고 나서는 곳이다.
나는 그저 삶이 진득하게 지나가는 공간 하나를 만들고 싶다. 그리하여 이 세상이 좋은 곳이며, 살만한 곳이며, 그래서 나도 잘 살아보아야겠다고 결심하는 곳이며, 내 삶이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또 하나의 촛불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기를 바란다.
나는 간이역 주변의 풍광 좋은 곳 그윽한 주막집 주인이다. 혹은 바다, 구름, 바람이 지나는 것을 창문을 열고 바라 볼 수 있는 수평선 아득한 까페의 손님같은 주인이다. "
‘간이역 주막’이라는 상징성을 통해 일상을 떠나 온 다양한 사람들이 일상적 생각과 행동을 버리고 여행의 자유로움을 만끽하기를 바랐다. 자신의 내면과 만나는 특별한 자기 찾기 여정이기를 바랐던 것이다. 술을 마시다 보면 종종 사람들 사이에 목소리가 커지고 과거의 슬픔에 겨운 통곡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깨를 껴안고 함께 울어주는 따뜻한 광경이 낯설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 사회의 폐쇄성을 깨고 다른 이들의 가슴 속에서 생겨난 은밀한 꿈을 지지하고 후원하는 장소가 되기를 바란다. 실제로 이곳은 다른 현실적 장소 보다 훨씬 더 자유를 갈망하고 과거를 버린 준비가 된 사람들이 찾아 드는 장소다.
내가 성공이라고 받아들이는 유일한 기준은 ‘자기답게 사는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곳에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쏟아 붓다 때가 되면 육체가 가진 모든 것을 소진하고 왔던 곳으로 돌아 갈 수 있다면 그 보다 큰 성공은 없는 것이다. 우리가 같아 질 필요가 있을까 ?
이미 인류는 생물학적인 유사성으로 똘똘 뭉쳐있다. 거기에 문화적 동질성 까지 공유하다 보면 한국인들은 또 그 속에서 더 비슷한 유사성으로 고착된다. 우리에게 남은 이질성과 차별성은 이미 별로 자유로운 공간을 남겨 두지 않는다. 따라서 한 개체가 가지고 있는 상이성을 견디지 못하고 배척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기는 한지만 치명적 실수이기도 하다. 우리는 상이성을 서로 찾아 주고 그 상이성에 감탄하고 그 다름에 경이로워야 한다.
다양한 조화란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것을 수용할 수 있는 관용을 필요로 한다. 관용은 열려있는 상태이며, 문을 열고 자신의 에고 속으로 외부의 경이로운 세상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의미한다. 동시에 자신의 내면적 풍광을 세상에 쏟아 냄으로 세상의 다이나믹한 풍광의 한 부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릴케의 표현대로 내면은 ‘광대무변한 하늘이며, 새들이 힘차게 솟구치고, 귀향의 바람(風)으로 출렁이는 저 높고 그윽한 하늘’인 것이다.
사람은 나서부터 죽는 날 까지 외부 세계에 대하여 마음을 열어 놓아야 한다. 이것이 배움이다. 배울 때는 마음을 완전 무장해제할 수 있어야 한다.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낯선 것들이 몰려든다고 해서 마음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배움은 우리를 현명하게 만들고, 현명함은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뱉어내야하는 지를 알게 해 준다. 다양한 세상, 그것은 여러 색으로 어울려 활짝 핀 아름다움이다. 봄이 아름다운 이유는 여러 꽃들이 어울려 흐드러지게 피기 때문이다. 자신의 꽃을 피워라. 그리고 다른 꽃들과 함께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라.
IP *.128.229.9
나이가 쉰 살을 넘어 서면서 인생은 어딘지 어수룩하고 고즈넉한 쉴 곳을 찾고 있었다. 넋 놓고 바라볼 곳도 그리워 졌고, 자연이 못 견디게 예뻐졌고, 젊은이들이 귀여워 졌다. 나는 서서히 사람들이 그리워졌다.
회사를 나와 혼자 1인 기업을 만들어 운영하는 동안 조직에서 벗어나 홀로 천천히 느린 내 발걸음에 맞추어 살아가는 일을 매우 매력적이었다, 조직이란 여러 가지로 내겐 잘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나는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고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는 눈이 예민한 사람이다.
‘조직 속의 나’와 자유인으로 ‘내가 나를 보는 나’ 사이의 불일치를 잘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 간격이 크면 쉽게 감정적 소진이 일어나는 사람이라 가능하면 나는 나로 살아야 편안한 사람이다.
중국의 전국 시대를 끝내고 유방이 한나라를 세우는데 최고의 공신이 된 한신이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남의 수레를 타는 자는 그 우환을 제 몸에 지고, 남의 옷을 입는 자는 그 근심을 제 가슴에 품고, 남의 것을 먹는 자는 그의 일을 위해 죽는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은혜를 입고도 그 빚을 갚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셈이다.
조직 속에 있으면 그 속에서 밥을 먹고 옷을 입는 셈이다. 조직 속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에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인생을 살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나대로 편히 마음 껏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늘 불편했었다.
2000년 새로운 세기가 시작하자 나는 홀로 서기를 시도 했다. 마흔 여섯의 나이니 젊다고 할 수 없다. 나는 운이 좋았고 늦게나마 내가 살고 싶었던 인생을 즐기게 되었다. 쉰 살이 넘자 홀로 떨어져 지내는 외로움이 느껴졌다. 혼자만 잘 살면 무엇하랴는 생각도 들었다. 마침 그때 여러 젊은이들이 내게 길을 물었다. 대부분 책을 통해 나를 안 독자들이었다.
쉰 살이 넘어 나는 두 가지 프로그램을 시작하였다. 다양한 개인이 가장 자기답게 세상을 살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그들이 획일성의 덫에서 벗어 날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리하여 다양한 차이가 서로를 빛내주는 어울림으로 전환되기를 바랐다.
첫 번째 작업에 ‘내 꿈의 첫 페이지’ 라는 이름을 붙여 두었다. 의도는 명확했다. ‘하고 싶고 잘 할 수 있는 있는 일에 인생을 걸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을 뒤지는 작업을 도와주는 프로그램이다. 우리는 함께 자신의 기질과 재능 그리고 경험을 연결하여 ‘나만의 직업’을 만들어 내기 위한 2박 3일 동안의 여행을 함께 하곤 했다.
이 사람들은 전국 각지에서 한 사람씩 모여 들었다. 3 년 동안 모두 예순 명가량 모였다. 그들은 아직 어느 누구도 유명한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모두 평범하다 못해 스스로 시시한 사람들이라고 여기며 고민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그러나 언젠가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표현해 낼 수 있는 길을 찾아 낼 것이다. 나는 이들을 ‘창조적 부적응자’라고 불렀다. 자기네들 끼리는 ‘꿈벗’이라고 부르며 매우 가깝게 지내고 있다.
또 하나는 아주 작은 개인대학을 시작한 일이었다. 이제 세 돌을 맞이하여 세 번째 신입생을 받게 되었다. 신입생은 언제나 열 명 남짓했다. 내 홈페이지는 지금 봄꽃과 함께 그들의 향기로 가득하다. 그것은 여러 색깔과 모양으로 어울린 빛나는 꽃밭 같았다.
‘지금의 자신에게 분노하고, 자신과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 그리하여 삶을 한번 다시 시작하고 싶은 사람들‘은 학벌과 나이, 성별과 직업에 관계없이 응모하라고 말해 두었다. 멋모르고 가르침을 위한 ’시작을 시작‘한 셈이다.
처음에는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에 치중했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 나는 ‘무엇’을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자신의 관심사와 내면을 발견하기를 원한다. 내면의 요구와 관심을 알게 되면 결국 그들은 자신을 위해 가장 이로운 일을 하게 될 것이고, 자기 한 몸만큼 세상을 위해 아름다운 한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때가 되면 결국 자신의 빛깔로 아름다운 꽃이 되어 피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조금 흐르면서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답해 보려 했다. 서로 배우게 할 생각이다. 이 사람들 끼리 서로 ‘스승과 친구’가 되어 먼 길을 가게 하는 것이 최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경쟁’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어제의 나와의 경쟁’, 이것이 가장 훌륭한 배움의 방법이며, 서로 격려하고 마음을 써 줄 수 있는 배경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들은 함께 수련하고 수양하는 파트너이며 서로의 선생인 것이다.
요즘 들어 ‘누가’ 가르칠 것인가라는 질문에 막혀 있다. 느닷없는 질문으로 생각될 지 모른다. 그러나 이 질문은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게 스승이 한 분 계셨다. 나는 그 분에게서 역사학을 배웠다. 그것은 내가 다른 선생님에게서도 충분히 배울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를 감동시킨 것은 그 분의 삶에 대한 자세와 그 내면의 풍광이었다. 선생이 누구인가는 교육의 가장 핵심적인 대목이다. ’교육의 기술은 진짜 선생님이 나타날 때 까지만 유효한 것‘이다.
좋은 선생이란 어떤 사람일까 ? 가장 기초적인 바탕은 자신의 분야에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전문가여야 한다.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무엇’을 가르칠 지 저절로 안다. 그러나 지식만 있다하여 다 전달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선생은 학생들과 반드시 ‘정서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감정적 절연 상태에서는 지식이 스며들게 할 수 없다. 지식이 정신의 일부가 되어 체화되고 운용되게 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서로 좋아하여 찾게 되면 훌륭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연결’이 가장 좋은 교수법이다. 지식을 가지고 있고 정서적으로 학생과 연결되어 있는 선생은 좋은 선생이다.
좋은 선생과 훌륭한 선생 사이에는 높은 산이 하나 있다. 훌륭한 선생은 학생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이 일이 지극히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선생의 삶 자체가 가장 훌륭한 영감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래서 종종 아무 것도 모르고 너무 쉽게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음을 후회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스승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갈림길에서 늘 스승에게 길을 물어 내면의 빛을 충당해 왔기 때문에, 그만둘 수가 없다. 나이가 들어 커다란 짐을 지고 있다는 것이 즐겁기도 하고 고되기도 하다.
내가 젊은이들과 함께 배우고 즐기는 동안 몇 가지 사실들을 알아가게 되었다. 그들은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젊은이들이었지만 일상은 도처에서 넘어서는 안되는 굵고 검은 선으로 가두어져 있었다. 이 ‘굵고 검은 선’은 원래 우리를 양육해온 문화가 우리를 그 사회에 순응하는 사람으로 규제하기 위해 쳐 둔 것이었다.
처음에는 희미했던 이 선은 살아가면서 자발적으로 강화되면서 점점 굵고 선명한 규제의 마지노선이 되어간다. 말하자면 정신의 무한한 공간 중 익숙한 일부만을 허용하면서 그 선 너머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서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문명 마다 다른 인식의 틀을 가지고 있다. 한국 사회는 많은 21세기적 강점을 가지고 있지만 허용의 한도가 좁은 폐쇄성이라는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한국 현대사가 가장 고약한 길을 걸어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식민지의 생활 그리고 해방 후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독재정권은 사회의 다양성과 자유의 수준을 엄격히 제한했다. 허용된 범위를 벗어나는 사람들은 모두 ‘감시와 처벌’의 대상이었고 곤욕을 치뤘다.
결국 일정 범위 안에서의 생각과 행동만을 허용함으로써 오랜동안 우리는 사회가 허용하는 극히 한정된 질서 속에서 생활해 왔다. 이런 폐쇄성은 거의 모든 일상을 지배했다. 예를 들어 경직된 교육은 아직도 똑같은 국화빵을 찍어 내는 작업을 계속함으로써 창의성과 상상력이 결핍된 21 세기적 실업자를 대량 생산해 내고 있는 것이다.
20세기의 거의 대부분을 몸으로 살았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자신의 자서전인 ‘미완의 시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또래의 지식인들에게는 두 개의 조국이 있었다. 하나는 자기가 태어난 나라이며, 다른 하나는 프랑스였다. 마찬가지로 20세기에 서양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 아니 세계 어디든 도시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는 정신적으로 자기가 태어난 나라와 미국이라는 두 개의 조국이 있었다......미국은 굳이 발견될 필요가 없었다. 미국은 우리 존재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 예나 지금이나 하느님은 그렇게 멀 수가 없었고, 미국의 입김은 그렇게 강할 수가 없었다”
19세기 파리는 유럽의 수도였고, 20세기의 뉴욕은 세계의 수도가 되었다. 이 두 나라 두 도시의 힘은 어디서 왔을까 ? 19세기 프랑스는 그림과 조각, 빛나는 전통을 자랑하는 프랑스 소설을 제외하면 ‘세계최고’라고 말할 수 없었다. 프랑스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들도 셰익스피어나 괴테, 단테 그리고 푸슈킨보다 프랑스 작가가 더 훌륭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가장 독창적인 프랑스 음악도 비엔나의 음악을 따라갈 수 없었고, 프랑스의 철학은 독일의 철학보다 분명히 한 수 아래였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 그리고 세계의 젊은이들이 그때 파리의 허름한 호텔로 꾸역꾸역 몰려들기 시작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
홉스봄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프랑스에는 중요한 자산이 있었다. 그것은 원하는 외국인 누구에게나 자신의 문명을 선사해줄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누구도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장악한 이태리와 독일에 가고 싶어 하지 않았고, 영국에게는 섬나라의 편협성이 느껴졌다. 혁명이후 프랑스는 가장 폐쇄적인 궁정문화를 민주화 시켰고, 사람들은 확장된 귀족문화를 즐겼다.
가장 국수주의였던 이 나라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원칙을 수호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나라를 활짝 열었다. 19세기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많은 이민을 받아들인 나라였다. 파리는 국제문화의 중심지였고, 누구나 한 번은 살아 보고 싶은 도시였고, 살아 보았다고 자랑하고픈 선망의 도시가 되었다.
2차 세계대전 후 뉴욕의 힘과 미국의 힘을 만들어 낸 것은 미국인들의 힘이 아니라 미국을 선호하여 찾아온 세계인들의 힘이다. 미국자체가 그렇게 여럿이 모여 만들어진 나라다. 이미 실리콘 벨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1/3은 미국인들이 아니다. 가장 다이나믹하고 창의적인 세계인들에 의해 미국의 국부가 채워지고 있는 것이다.
개인은 자신이 속한 문화권이 어디냐에 의해 그 정신과 생각의 틀이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내가 누리고 있는 언어, 내가 쓰는 몸짓, 내가 내세우는 능력, 기능, 재치 모두 사회적 유산에 의해 길러진 것이며 심지어 꿈 조차 내가 만들지 않은 세계에 뿌리내리고 있다’ 라고 말한다.
사람이 커가면서 다양한 배움을 계속하지 못하면 일단 형성된 소아병적인 좁은 세계가 스스로 사고의 벽을 강화하면서 다름과 새로움에 배타적이게 만들어 놓는다, 새로운 사상에 낯설어 하고, 편견에 싸여있고, 개방에 인색하고, 자유를 그리워 하지만 또한 두려워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20년 동안 직장 생할을 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조직인간의 찌꺼기들이 내 마음의 기저에 깔려 있었다. 그후 10년 간 작가로서의 생활을 해 오는 동안 나는 훨씬 많이 열리게 되었다. 나중에서야 다양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름을 받아들이는 것은 끊임없는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이미 스스로를 규정해 버린 사람은 다름에 대해 완고하다.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함으로써 배타적이고 교조적으로 변하게 마련이다.
실제로 나는 작은 개인대학을 이끌어 오면서 다름의 인식과 수용이 쉽지 않은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올해 뽑은 연구원 중에 마흔 살 중반의 여인이 하나 있다. 지나온 삶이 평탄하지 만은 않아 아이들을 낳은 후 남편과 헤어졌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어두운 결혼 생활 그리고 홀로하는 10년 동안 그녀는 많은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원래 그녀는 천성은 매우 밝고 씩씩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연구원 생활을 시작하면서 과거의 어둠을 쏟아 내고 싶어 했다. 그녀의 천성적 밝음으로 15년의 어둠을 구석구석 밝혀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밝음이 종종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다.
그녀의 글은 일기 같았다. 종종 내밀한 내용이 여과없이 실리기도 했다. 그녀는 쏟아 붓듯 자신을 토해내는 것 같았다. 쓰면서 자신 안에 머무는 어둠을 토해내는 듯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만인이 보는 내 홈페이지에 더욱 특이한 글을 하나 올려 두었다. 매우 그녀다운 글이라고 스스로 평가하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 그냥 지나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일부만 여기 올려 그 글의 성격이 어떠한지 나누어 보자.
"구본형은 미친 여자다. 인간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요염한 치마를 들어올려 도발적Sex하려 든다. 그녀에게는 날마다 새로이 끊임없는 열정과 욕구가 샘솟는다.
구본형은 궁둥살이 빽빽하고 탐스런 발칙한 미시다. 그녀는 정신없이 엉덩이를 씰룩대며 사람들을 유혹하고 그녀의 튼튼한 자궁은 최소한 5천만의 꿈을 생산하고 기르려 든다.
구본형은 투박한 푼수 줌마다. 게으르거나, 한심하거나, 헤매거나, 야망이 있거나, 꿈을 찾거나, 시대를 사랑하거나 하는 세상의 참을 수 없는 부적응자들에게 우선 그들의 허기진 배와 가슴을 먼저 녹이고 귀 기울여 다독이며 손수 밥짓는 법을 가르친다. "
과장되었기에 민망함이 없지 않으나 나는 그저 재미있는 표현이라 여겼다. 그런데 이 글이 몇 사람의 선배 연구원들을 화나게 한 모양이다. 공식적인 홈페이지의 성격에 적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절제되지 못한 글이고, 선생에게 예의를 잃은 글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마 이 글로 인해 - 더 정확하게는 수시로 이와 비슷한 폭포수 같이 절제 되지 않은 글들이 마구 쏟아져 나옴에 대하여 - 그녀에게 충고와 조언을 했던 것 같다. 그게 그녀에게는 맘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느 날 또 폭포처럼 홈페이지에 대자보를 붙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왜 연구원에 지원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자신이 왜 이렇게 속을 뒤집어 토해내 듯 글을 쓰는 지, 자유롭게 말할 수 없음에 대하여, 조언이라는 이름의 강요와 통제에 대하여 긴 소회의 글이 붙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작은 필화 사건이 하나 생긴 셈이다. 그 글이 절절하여 내가 답 글을 달아 두었다.
"내가 너 사고 칠 줄 알았다. 그래서 너를 연구원으로 뽑은 것이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 것이고 다만 생긴대로 살게 되어 있다. 그게 잘 사는 것이다. 그동안 마음대로 살지 못해서 모두 여기에 모인 것 아니냐. 나는 그대 때문에 매일 웃는데, 그대는 힘들었던 모양이구나. 내가 그대를 좋아하는데, 그대는 그것을 아는지 몰라. 언젠가 창자를 뒤집어 내듯 다 쏟고 나면, 남해 푸른 바다물로 속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걱정 마라. 너의 바다가 가장 빛나는 바다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
이 정도에서 끝날까 했더니, 그러지 못했다. 가만히 보고 있던 어떤 구경꾼 하나가 또 뒤 늦게 끼어들었다. 그리고 다시 불길을 지피기 시작했다. 절제하지 못함에 대하여, 일기장을 거르지 않고 마구 올려 두는듯한 경솔함에 대하여, 그 속에 등장하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는 것을 공격하였다. 그녀와 그 구경꾼 사이에 다시 싸움이 시작되었고 그 다음 부터는 감정의 폭언들이 하늘 가득히 날아다니는 돌멩이처럼 적을 향해 투척되었다.
나는 이 작은 투석전을 보며 이 싸움은 곧 그칠 것이고, 서로 사과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며칠 지나 감정적 투석전을 막을 내리고 서로 사과하게 되었다. 마흔 살 중반의 이 여인은 ’미안합니다. 자숙하겠습니다‘ 는 메모를 남겼다.
아직도 꽤 유명한 이 필화 사건은 내 홈페이지의 어딘가에 기록된 채 남아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롭게 해결된 것 같지만 내가 보기에 이 일은 그저 겉으로 덮어둔 일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서로에게 감정의 찌꺼기를 남기고 서로에게 서로를 제약하는 힘으로 남게 되었으리라 추측한다.
결국 다름은 서로에게 틀림으로 인식된 채 남게 되었다. 마음은 여전히 열리지 않고, 과거의 인식의 틀은 더욱 공고해진 듯 보였다. 에릭 에릭슨은 정체성이란 물처럼 흐르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정체성이란 이미 만들어져 형성된 딱딱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기존의 정체성의 어딘가를 깨뜨릴 수 있는 다른 생각과 다른 세계는 적대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므로 편협된 사고의 틀 위에 축조된 가치를 고집하는 것은 배움의 최대의 적이다.
다양성이라는 것은 좋은 말이다. 그것은 개방이며 열림이며 포용이며 어울림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종종 다른 사람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무원칙으로 오해되고, 진실의 외면이며, 예의와 정의의 상실로 받아들여진다,
마음 속에 있는 감정은 이성화 되고 상대를 공격하는 또 다른 논리로 전환되면서 다름은 적으로 간주되는 폐쇄성으로 진행된다. 사람은 어쩌면 ‘합리적인 동물이 아니라 합리화하는 동물’이라는 주장이 그럴 듯해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홈페이지를 만들 때 나는 다음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곳은 간이역 같은 곳이다. 자기라는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되돌아오는 곳이다. 때로는 상처를 안고 돌아오고, 때로는 삶의 한 순간을 특별함으로 채우고 싶은 호기심 가득함으로 찾아든다.
이곳은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곳이다. 쉬고 싶은 사람들이 잠시 머무는 곳이다. 그러니까 폼새가 아늑한 주막 같은 곳이다. 홀로 와 구석자리에서 눈물과 함께 술을 마시거나 때로는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빛나는 수다를 떠는 곳이기도 하다. 때때로 울어 털어 놓고, 때때로 다시 삶의 흥분과 육체의 기쁨으로 들떠 쪽문을 열고 나서는 곳이다.
나는 그저 삶이 진득하게 지나가는 공간 하나를 만들고 싶다. 그리하여 이 세상이 좋은 곳이며, 살만한 곳이며, 그래서 나도 잘 살아보아야겠다고 결심하는 곳이며, 내 삶이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또 하나의 촛불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기를 바란다.
나는 간이역 주변의 풍광 좋은 곳 그윽한 주막집 주인이다. 혹은 바다, 구름, 바람이 지나는 것을 창문을 열고 바라 볼 수 있는 수평선 아득한 까페의 손님같은 주인이다. "
‘간이역 주막’이라는 상징성을 통해 일상을 떠나 온 다양한 사람들이 일상적 생각과 행동을 버리고 여행의 자유로움을 만끽하기를 바랐다. 자신의 내면과 만나는 특별한 자기 찾기 여정이기를 바랐던 것이다. 술을 마시다 보면 종종 사람들 사이에 목소리가 커지고 과거의 슬픔에 겨운 통곡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깨를 껴안고 함께 울어주는 따뜻한 광경이 낯설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 사회의 폐쇄성을 깨고 다른 이들의 가슴 속에서 생겨난 은밀한 꿈을 지지하고 후원하는 장소가 되기를 바란다. 실제로 이곳은 다른 현실적 장소 보다 훨씬 더 자유를 갈망하고 과거를 버린 준비가 된 사람들이 찾아 드는 장소다.
내가 성공이라고 받아들이는 유일한 기준은 ‘자기답게 사는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곳에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쏟아 붓다 때가 되면 육체가 가진 모든 것을 소진하고 왔던 곳으로 돌아 갈 수 있다면 그 보다 큰 성공은 없는 것이다. 우리가 같아 질 필요가 있을까 ?
이미 인류는 생물학적인 유사성으로 똘똘 뭉쳐있다. 거기에 문화적 동질성 까지 공유하다 보면 한국인들은 또 그 속에서 더 비슷한 유사성으로 고착된다. 우리에게 남은 이질성과 차별성은 이미 별로 자유로운 공간을 남겨 두지 않는다. 따라서 한 개체가 가지고 있는 상이성을 견디지 못하고 배척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기는 한지만 치명적 실수이기도 하다. 우리는 상이성을 서로 찾아 주고 그 상이성에 감탄하고 그 다름에 경이로워야 한다.
다양한 조화란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것을 수용할 수 있는 관용을 필요로 한다. 관용은 열려있는 상태이며, 문을 열고 자신의 에고 속으로 외부의 경이로운 세상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의미한다. 동시에 자신의 내면적 풍광을 세상에 쏟아 냄으로 세상의 다이나믹한 풍광의 한 부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릴케의 표현대로 내면은 ‘광대무변한 하늘이며, 새들이 힘차게 솟구치고, 귀향의 바람(風)으로 출렁이는 저 높고 그윽한 하늘’인 것이다.
사람은 나서부터 죽는 날 까지 외부 세계에 대하여 마음을 열어 놓아야 한다. 이것이 배움이다. 배울 때는 마음을 완전 무장해제할 수 있어야 한다.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낯선 것들이 몰려든다고 해서 마음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배움은 우리를 현명하게 만들고, 현명함은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뱉어내야하는 지를 알게 해 준다. 다양한 세상, 그것은 여러 색으로 어울려 활짝 핀 아름다움이다. 봄이 아름다운 이유는 여러 꽃들이 어울려 흐드러지게 피기 때문이다. 자신의 꽃을 피워라. 그리고 다른 꽃들과 함께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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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웅
‘사람과 사회 그리고 어떠한 현상’을 참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밟아온 발자취를 하나씩 살펴보는 것이 중요한 거군요. 그래서 어떠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배경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러 책에서 이야기하는 거네요. 이 글을 읽으니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고 살펴볼 수 있는 눈과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다름과 다양성’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생각해 보게 되고 배우게 됩니다.
“한국 사회는 많은 21세기적 강점을 가지고 있지만 허용의 한도가 좁은 폐쇄성이라는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한국 현대사가 가장 고약한 길을 걸어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식민지의 생활 그리고 해방 후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독재정권은 사회의 다양성과 자유의 수준을 엄격히 제한했다. 허용된 범위를 벗어나는 사람들은 모두 ‘감시와 처벌’의 대상이었고 곤욕을 치뤘다.”
특히 이 부분을 읽고나니 한국의 지나온 역사를 더 잘 이해할 필요성이 있다는 걸 느끼게 되고, 그래서 이기백 선생님의 ‘한국사 신론’이 더욱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한국 사회는 많은 21세기적 강점을 가지고 있지만 허용의 한도가 좁은 폐쇄성이라는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한국 현대사가 가장 고약한 길을 걸어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식민지의 생활 그리고 해방 후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독재정권은 사회의 다양성과 자유의 수준을 엄격히 제한했다. 허용된 범위를 벗어나는 사람들은 모두 ‘감시와 처벌’의 대상이었고 곤욕을 치뤘다.”
특히 이 부분을 읽고나니 한국의 지나온 역사를 더 잘 이해할 필요성이 있다는 걸 느끼게 되고, 그래서 이기백 선생님의 ‘한국사 신론’이 더욱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써니
지금에야 보았습니다. 알지 못했고 말해 주는 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마음이 아프셨을 것 같아 송구합옵니다.
연구원 이전에 저라는 사람이었기에, 설치기도 하지만 솔직히 저는 적잖이 아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아닌 스스로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가 무슨 어떤 말이나 표현을 해도 당사자가 어떻게 받아드리느냐가 수용의 폭이라는 것을 알지만 부덕함과 부족한 탓에 이 모양 입니다. 내심으로는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글을 쓰게 되면서 또한 저도 알지 못하는 제 자신의 부분이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받습니다. 그리고 현재 이렇게 밖에는 안돼는 한계를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참는 다고 참았고 삭힌다고 삭혀왔지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가라앉은 내면의 분노와 뒤틀림 꾸역꾸역 쳐넣어진 억눌림과 수많은 고통과 한스러움과 허허로움 그리고 가면우울증의 어색한 웃음들의 교합일런지 모르겠습니다. 영화 25시에서 안소니 퀸의 웃는 모습도 우는 모습도 아닌 얼굴 저는 늘 그 기억을 합니다. 웃는 만큼 울고 있는 것, 살아있는 만큼 죽어가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세상의 아무것도 아닌 그저 나 자신 이라는 것을 깨닫는 도리밖에는 없었습니다. 아직까지 그러합니다.
앞으로 제 삶의 방향이 더 나은 모습으로 바뀔 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글을 속이거나 변형할 마음은 없습니다. 그것은 현재의 제가 아닙니다. 저의 성격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고치지 않겠다는 말과는 다릅니다. 지금의 제 모습을 감추려 눈팅에 만족하거나 참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저의 기질이 아니기에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15년 동안 그렇게 찌들고 병들어서 찾아 든 곳이 여기라면 더럽다고 피하시렵니까? 저는 아직도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마지막 용기라고 생각하고 내 성격으로 할 수 없는 선택을 하여 변.경에 합류한 것입니다. 저도 다른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일방적이고 노골적인 공격을 계속 받아왔습니다. 그 직접적인 언사들을 댓구할 능력이 없기에 저는 글로 남기게 됩니다. 인식의 차가 크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 편으로 이해가 되는 것은 그러니까 글쟁이들이 아닐까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사부님께서 저에게 이르시는 말씀이 아니 듯 저도 사부님께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분명 감당할 수 없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올해 안에 해결되지 않고 혹은 내년에도 절망적일지 모르지만 제가 이곳의 가르침을 잊지않는 한 하늘이 허락하는 그 언젠가는 해결이 된다고 믿고 싶습니다. 저는 책을 내려 연구원이 된 것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그 전에 이 떠도는 마음부터 해결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부러운 것은 위대함이나 여러 당신들이 아닙니다. 내가 내 삶을 살지 못함이 안타까웠기에 미친듯 날뛰는 것입니다. 회복이 되지 않을 까봐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결국 해내지 못할 까봐 더 두려워했습니다. 잘 하고 있지 못한 것 알고 있습니다. 허나 희망은 가져봅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20년 후로나 미룬 일을 먼저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20년 후 멋진 책을 내게 된다손 치더라도 너무 늦은 깨달음을 안고 주검을 향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금! 언제 무엇이 어떻게 변할지 모를 지금을 선택하면서 모든 것을 다짐하고 잘 해보고 싶은 마음 누구보다 간절하지만 현재의 제 모습이 이것인 것을 감추고, 나 아닌 다른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별종일 지는 모르나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나도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많아요. 오늘 낮에 예배를 보게 되었는데 저는 전도자의 말은 듣지 않고 하느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 내놓으셨습니까? 하고요. 예배후 곁에 간호사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 양반은 독실한 신앙인인데 그분께서 하는 말이 주님께서는 다 합당하게 쓰시지요. 라고 하기에 답답한 한숨을 피식 내쉬며 커피 한 잔 얻어마시고 제 방으로 돌아왔답니다. 안 그래도 하느님께 따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열정을 주려거든 재능까지 함께 주시던가 세상에 내 놓았으면 제대로 만들어 살게 하실일이지 왜 요 모양 요 꼴로 만들어 내놓으신 겐지... 어쨌거나 저가 변경에 온 것도 그분의 주관이라면 무언가 천명을 주시지 않을까요?
이렇게 살다가 미치거나 초아선생님 말씀대로 소명을 찾거나 사부님 바람처럼 저 다운 삶을 살거나 누군가의 심보처럼 개코나...
연구원을 하면서 동물원의 개가 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비록 별 볼 일 없을 지 모르나 저로서는 최선인데 많은 사람들의 성에 안차서 쓸데없는 웃음거리로 까발겨지는 것은 아닌가 하고 난처하기도 합니다. 이게 내 삶에 무슨 덕이 된다고 이다지 절실하게 매달리는가 먹먹해 질때가 자주 있습니다. 정칙이란 것에서 빗겨간 장외 인간...
그러나 나는 한 순간 연극인도 되고 글쟁이도 됩니다. 우선은 나만의 놀이가 필요합니다. 아, 사부님께서 참으로 고통스러운 것을 압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의사가 환자와 떨어질 수 없듯이 팔자소관이라는 위로를 마음으로 드린 적이 있습니다. 어쨌거나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누군가 무언가에 의한 알 수 없는 이끌림, 그런 것 같지는 않으십니까? 끝으로 마음이 ...
염려가 되어 첨부합니다. 그저 덜 자유로왔다는 이야기지 앙금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진실로 그리 한가하지 않습니다. 내 인생에 해결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이 산적해 있고 능력부족으로 미뤄놓고 절절매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부님이나 초아선생님 그리고 저를 애석하게 생각해 주는 보이지 않는 힘들은 그저 제가 저 갈 길을 잘 가길 바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연구원 이전에 저라는 사람이었기에, 설치기도 하지만 솔직히 저는 적잖이 아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아닌 스스로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가 무슨 어떤 말이나 표현을 해도 당사자가 어떻게 받아드리느냐가 수용의 폭이라는 것을 알지만 부덕함과 부족한 탓에 이 모양 입니다. 내심으로는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글을 쓰게 되면서 또한 저도 알지 못하는 제 자신의 부분이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받습니다. 그리고 현재 이렇게 밖에는 안돼는 한계를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참는 다고 참았고 삭힌다고 삭혀왔지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가라앉은 내면의 분노와 뒤틀림 꾸역꾸역 쳐넣어진 억눌림과 수많은 고통과 한스러움과 허허로움 그리고 가면우울증의 어색한 웃음들의 교합일런지 모르겠습니다. 영화 25시에서 안소니 퀸의 웃는 모습도 우는 모습도 아닌 얼굴 저는 늘 그 기억을 합니다. 웃는 만큼 울고 있는 것, 살아있는 만큼 죽어가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세상의 아무것도 아닌 그저 나 자신 이라는 것을 깨닫는 도리밖에는 없었습니다. 아직까지 그러합니다.
앞으로 제 삶의 방향이 더 나은 모습으로 바뀔 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글을 속이거나 변형할 마음은 없습니다. 그것은 현재의 제가 아닙니다. 저의 성격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고치지 않겠다는 말과는 다릅니다. 지금의 제 모습을 감추려 눈팅에 만족하거나 참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저의 기질이 아니기에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15년 동안 그렇게 찌들고 병들어서 찾아 든 곳이 여기라면 더럽다고 피하시렵니까? 저는 아직도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마지막 용기라고 생각하고 내 성격으로 할 수 없는 선택을 하여 변.경에 합류한 것입니다. 저도 다른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일방적이고 노골적인 공격을 계속 받아왔습니다. 그 직접적인 언사들을 댓구할 능력이 없기에 저는 글로 남기게 됩니다. 인식의 차가 크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 편으로 이해가 되는 것은 그러니까 글쟁이들이 아닐까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사부님께서 저에게 이르시는 말씀이 아니 듯 저도 사부님께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분명 감당할 수 없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올해 안에 해결되지 않고 혹은 내년에도 절망적일지 모르지만 제가 이곳의 가르침을 잊지않는 한 하늘이 허락하는 그 언젠가는 해결이 된다고 믿고 싶습니다. 저는 책을 내려 연구원이 된 것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그 전에 이 떠도는 마음부터 해결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부러운 것은 위대함이나 여러 당신들이 아닙니다. 내가 내 삶을 살지 못함이 안타까웠기에 미친듯 날뛰는 것입니다. 회복이 되지 않을 까봐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결국 해내지 못할 까봐 더 두려워했습니다. 잘 하고 있지 못한 것 알고 있습니다. 허나 희망은 가져봅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20년 후로나 미룬 일을 먼저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20년 후 멋진 책을 내게 된다손 치더라도 너무 늦은 깨달음을 안고 주검을 향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금! 언제 무엇이 어떻게 변할지 모를 지금을 선택하면서 모든 것을 다짐하고 잘 해보고 싶은 마음 누구보다 간절하지만 현재의 제 모습이 이것인 것을 감추고, 나 아닌 다른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별종일 지는 모르나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나도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많아요. 오늘 낮에 예배를 보게 되었는데 저는 전도자의 말은 듣지 않고 하느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 내놓으셨습니까? 하고요. 예배후 곁에 간호사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 양반은 독실한 신앙인인데 그분께서 하는 말이 주님께서는 다 합당하게 쓰시지요. 라고 하기에 답답한 한숨을 피식 내쉬며 커피 한 잔 얻어마시고 제 방으로 돌아왔답니다. 안 그래도 하느님께 따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열정을 주려거든 재능까지 함께 주시던가 세상에 내 놓았으면 제대로 만들어 살게 하실일이지 왜 요 모양 요 꼴로 만들어 내놓으신 겐지... 어쨌거나 저가 변경에 온 것도 그분의 주관이라면 무언가 천명을 주시지 않을까요?
이렇게 살다가 미치거나 초아선생님 말씀대로 소명을 찾거나 사부님 바람처럼 저 다운 삶을 살거나 누군가의 심보처럼 개코나...
연구원을 하면서 동물원의 개가 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비록 별 볼 일 없을 지 모르나 저로서는 최선인데 많은 사람들의 성에 안차서 쓸데없는 웃음거리로 까발겨지는 것은 아닌가 하고 난처하기도 합니다. 이게 내 삶에 무슨 덕이 된다고 이다지 절실하게 매달리는가 먹먹해 질때가 자주 있습니다. 정칙이란 것에서 빗겨간 장외 인간...
그러나 나는 한 순간 연극인도 되고 글쟁이도 됩니다. 우선은 나만의 놀이가 필요합니다. 아, 사부님께서 참으로 고통스러운 것을 압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의사가 환자와 떨어질 수 없듯이 팔자소관이라는 위로를 마음으로 드린 적이 있습니다. 어쨌거나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누군가 무언가에 의한 알 수 없는 이끌림, 그런 것 같지는 않으십니까? 끝으로 마음이 ...
염려가 되어 첨부합니다. 그저 덜 자유로왔다는 이야기지 앙금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진실로 그리 한가하지 않습니다. 내 인생에 해결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이 산적해 있고 능력부족으로 미뤄놓고 절절매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부님이나 초아선생님 그리고 저를 애석하게 생각해 주는 보이지 않는 힘들은 그저 제가 저 갈 길을 잘 가길 바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파란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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