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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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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29일 00시 06분 등록

 

 

누구에게도 공유하기 어려운 깊은 상실을 어린 나이에 겪은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여고생이 된 그녀는 감수성 예민한 시절을 그 뭉근한 상실을 끌어안은 채 살아야 했습니다. 다행이도 그녀는 도서관의 서가 속에 묻혀 지내는 날이 많았습니다. 어떤 날은 소설을 읽고 어떤 날은 삶의 의미에 대해 탐독하는 책을 읽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날은 종일 시집을 들추며 보내는 날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아래에 옮긴 신경림 시인의 갈대라는 시를 만났습니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중략)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어느 여름 날 그녀는 자신이 속한 문학동인들이 참석한 시인 축제 행사에서 바로 그 시인 신경림 선생님을 만납니다. 시인들의 짧은 강연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하기 위해 단상 주변을 정리하는 사이, 그녀는 시인에게로 달려가 정돈되지 못한 언어로 자신을 소개하고 이렇게 부탁을 합니다. ‘한 번만 안아봐도 될까요? 선생님!’ 시인으로부터 그렇게 하라는 허락을 받고 그녀는 냉큼 그 시인을 포옹합니다. 일흔을 넘긴 할아버지 시인을 덥썩 포옹하며 감격한 것입니다. 자리를 옮겨 식사하는 자리에서 그녀는 시인 앞에 앉아 반찬으로 나온 생선을 손으로 발라 진상을 하듯 시인께 바쳤습니다. 시인으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를 들었을 것입니다.

 

이제 마흔 중반을 살고 있는 그때의 소녀는 며칠 전 있었던 자신의 이 사연을 내게 편지로 보내왔습니다. 그리고 편지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분을 만나 포옹하고 마주한 힘으로 앞으로 30년은 거뜬히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편지를 받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시란 무엇일까? 한 아이가 스스로 선택한 것 없이 억울하게 맞아야 했던 깊은 상실감을 어루만져 그 아이가 다시 세상에 글을 쓰고 사는 어른으로 성장하게 하는 힘을 가진 시, 시는 무엇일까?’

 

그녀가 참석한 시인 축제에서 신경림 선생님은 도저히 살 수 없는 환경에서 살고 있을 때 지르는 비명이라 했다 합니다. 기가 막힌 정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정의를 듣는 순간 나는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시인들이 지르는 그 진정함 가득한 비명이 밤 하늘 별이 되는 것이구나. 외로움 사무치는 날마다 올려다보는 어두운 밤 하늘에서 초롱초롱 빛을 보내어 외로움과 상실과 고단함에 서성이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다시 일어설 힘을 주는 그 별빛이 바로 시구나. 그러니 이제 나도 한 줄의 글을 쓸 때마저 비명을 토하려 애써야지. 길 잃은 어둔 밤 속의 생명에게 아침을 기다리게 할 수 있는 별이 되도록, 늘 비명으로 쓰려 애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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