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서연
  • 조회 수 4122
  • 댓글 수 2
  • 추천 수 0
2013년 8월 30일 21시 57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홍근(1957~  ) 문학평론가. 불교사상가.

 

부산에서 태어남.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 졸업, 동 대학원에서 중남미문학전공

스페인 마드리드 대학에서 멕시코의 시인 옥타비오 파스의 시론 연구로 박사학위 받음.

외국어대, 서울대, 고려대에서 강의, 문학평론가로 활동. 동양사상을 공부하기 위해 성천문화재단의 '동서인문고전 강좌'가 인연이 되어 15년간 성천문화재단의 기획연구실장으로 근무하며 고전 강좌 진행을 맡음. '다석사상연구회'의 총무. 다산사상연구회는 다석 유영모의 사상을 연구하는 곳, 다석은 우리 말로 철학을 한 선구자로 평가 받고 있으며 함석헌 선생의 스승이기도 함.

1994년 가을부터 육조사 현웅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실참에 몰두해 [현대불교신문] 인터넷 판에서 '김홍근의 참선일기'연재함.

 

저서

 

옥타비오 파스를 소개하는 [현재를 찾아서], 시론집 [활과 리라] [흙의 자식들]번역.

[보르헤스의 불교 강의]번역, [보르헤스의 미국문학 강의] 번역 [보르헤스 문학 전기]저술. [마음이 단순해지는 선화]

 

나에게 이 책은..

 

저자와의 인연은 20135월이다. 크리에이티브살롱 9에서 <불교란 무엇인가>강의를 들었다. "()은 자기탐구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은 무의식이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 , 칸트, 하이데거를 징검다리 삼아 참나를 밝혀보자. 심안(心眼)이 열리면, 청천백일 아래 만물이 수정처럼 빛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서양철학을 통한 선불교공부라는 슬로건으로 올라온 글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만났다. 한 달에 네 번 하는 강의에서 알듯 모를듯한 시간을 보내고 마지막 강의 후 돌아가는 저자와 전철역까지 같이 가면서 말문을 틔웠다. 무엇인가를 조금 알게 되면 질문이 생긴다. 강의를 듣고 느낌을 말하라고 하시는데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아도 머릿속은 하얗기만 하고 아무런 질문이 떠오르지 않았다. 강의 중간중간 말하던 "무의식정화는 어떻게 하는 가"에 대한 궁금증만 일고 있었다. 저자의 간화선연구소로 찾아 뵙겠다는 말만 남기고 헤어졌다. 6월말이 되어서야 저자와의 만남이 인사동에서 이루어졌다. 여자4명에 남자1명이 만났다. 궁금증이 일었다. 명상에 대한 관심이 여자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자들이 다양한 것에 관심이 많기도 하고 생각이 많아서 그렇지 않을까요? 차를 한잔 앞에 두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무의식정화프로그램을 한번 경험하게 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고 흔쾌히 일정을 잡아주셔서 8월 첫 주에 공주에 있는 불교문화원에서 이박 삼일 일정으로 공부를 하게 되었다. 공부일정을 잡고 오리엔테이션과 중간점검을 위한 오프모임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어떤 방법으로 진행되는지 전혀 문외한이었던 나는 오리엔테이션시간에 말씀하시는 화두를 듣고 다음시간까지 답을 가지고 오라는 말에 아무런 실마리를 찾지 못한 체 중간점검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중간점검을 하면서 우리들의 몸 상태를 체크하시는 것을 보고 들으며 아주 어렴풋하게 어떻게 진행되는 공부인지 감을 잡았다. 막연하기는 처음이나 그때나 같았고 머리는 떼어놓고 하는 공부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그냥 단어로 이해했다. 미리 읽어오라고 나누어주신 60페이지 분량의 원고를 서너 번 읽으면서 간단치 않은 공부를 하게 되겠구나. 나의 무의식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내심 두렵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 상태에서 문화원에 들어갔다. 아는 것이 별로 없는 나 같은 사람은 머릿속이 복잡하지 않아 오히려 잡념이 떠오르지 않는 것을 경험하고 나의 몸에서 일어나는 반응들을 바라보며 무의식청소가 되었는지 안되었는지 잘은 모르지만 그만해도 된다는 스승의 말에 따라 짧은 일정의 공부를 마치었다. 이것은 시작이고 맛을 한 번 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현실로 돌아와보니 다른 우주를 여행하고 돌아온 느낌이었다. 아득한 먼 세상에서 살다가 지구별로 온 듯한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무의식정화공부를 마치고 나서 나에게 있었던 변화는 그 동안 잘 하던 108배를 하지 않게 되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일단 너무 더웠다. 더운 여름에 108배를 하고 나면 온 몸이 땀으로 젖는다. 그것이 모든 이유가 되지 않겠지만 아마도 공부체험은 108배를 하는 행위에 의미를 두지 못할 만큼 내게 커다란 에너지 소모를 가지고 왔는지도 모르겠다. 가을 초입에 들어선 이제는 날이 선선해서인지 다시 현실로 돌아온 덕분인지 다시 108배를 시작할 마음이 생겨 시작하기는 했다. 내가 체험한 공부는 아주 일부분이고 [참선일기]는 저자가 100일 동안 참선공부를 하면서 매일 써 내려간 일기이다. 이미 절판된 책이었고 나는 구해서 읽을 생각을 그다지 못하고 있었는데 불교강의를 주관하던 연구원이 자신이 고서점에서 구입했다는 책을 나에게 며칠 전 건네주었다. 화두참선을 처음 접하면서 적은 이 일기는 이미 십 여년이 흘렀다. 저자는 그 동안 많은 공부의 진전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초기 처음으로 화두참선을 접하고 공부를 하는 과정을 기술한 내용이라 조금은 알아들을 수 있고 많이는 체험하지 못한 부분이라 글로 이해하며 읽었다.

화두참선은 불교에서 내려오는 선()공부법이지만 우선은 화두를 들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은 자신이 직접 체험해보는 수밖에 없는 공부이다. 종교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자신의 무의식으로 바로 들어가는 공부라고 했다. 어디서건 화두를 들고 앉으면 되는 공부이다. 앉는 것이 안정이 잘 된다는 장점 때문에 하는 말이지 자세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초심자에게는 무엇보다 머리를 떼어놓고 자신의 감각에 집중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그것을 충족시키기에는 잘 앉는 것이 좋은 시작이라고 생각이 되어진다. 자신의 감각에 집중을 하면 무의식을 들어가기에 제일 적당한 상태가 된다. 짧았던 공부에 이해의 도를 높여주는 책이었다. 물론 100일간의 일기를 모두 잘 알아들은 것은 아니다. 이제 다시 자리에 앉아볼까 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역할을 해주었다. 그리고 좋은 장소도 찾아야지 하는 마음을 일으켜주었다. 일터에서 가까운 곳에 앉기에 좋은 자리를 찾았고 책 말미에 적혀있듯이 직접공부를 해보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 과제만이 남았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들어가는 글

 

15 지혜의 가난에 대한 자각과 정신의 풍요에 대한 갈망! 이것이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 아닐까? 내가 발견한 인생의 비밀은, ‘모든 인간 안에는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욕망도 꿈틀거리지만, 욕망보다 더 깊은 아래에서도 무엇인가 꿈틀거리고 있다. 모든 사람은 살면서 그 꿈틀거림을 체험한다.

 

18 그날 법회에서 육조사 선원장인 현웅 스님의 법문을 듣는데, “배가 고프면 고픈 줄 아는 놈이 내 속에 있다.”라는 대목에서 딱 짚이는 것이 있었다.

 

1부 내 안의 문을 열다

 

21 글쎄 내 마음 속에는 아무래도 원숭이가 사는가 보다. 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한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다.

 

24 좌선은 공부를 좀 했다는 사람이 더 어렵습니다. 자기가 조금 알고 있는 것을 버리지 못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오히려 새로운 걸음을 떼어놓기가 힘든 것입니다. 몇 십년을 그 속에 들어앉아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자기가 맛본 그 잘난 경지가 스스로 대견하고 황홀하며 마냥 그것만 찾아 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 밝은 스승이 필요한 것이죠. 그런 경험을 다해보고 여러분의 시행착오를 교정해줄 수 있는 사람! 스승을 만나 제대로 해나가면 참선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어제의 뜬구름은 이미 흘러가 버렸는데 그것을 못 잊어 찾아 헤맸던 것이다.

 

선가에서는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고 말하곤 하지요.

 

26 일단 선심이 나서 참선을 시작했으면, 그 다음엔 바른 의정(疑情)이 중요합니다. 의정이란 '나는 누구냐'하는 의심이 똘똘 뭉쳐진 것을 말합니다. 의정이 강렬하고 탄탄할수록 깨달음도 강렬하고 탄탄해집니다. 의정이 익으면 마침내 터져서 깨달음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의정이냐? 즉 무엇을 의심해야 하나? 잘 들으시오! 무엇을 의심하는지!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 나도 연신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지금껏 꽤 여러 해 동안 이런 저런 선방을 기웃거렸고, 그때마다 선사들은 의정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결정적인 문제는 나에게 의정이 생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의정이란 의심 덩어리이다.

 

32 코앞에 있는데도 자기를 보지 못하니. 에잇, 어차피 못 만날 것, 방황하지 말고 그냥 여기 퍼질러 앉자. 그제야 마음이 안정되며 내가 지금 참선하고 있다는 게 실감났다.

 

"집착과 번뇌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하지만, 경계에서 흔들립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물질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바로 그 마음이 고요해지려는 마음을 깨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집착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갖지 말고, '집착하는 동안에도 그것을 자각하고 집착이 진리의 성품인 나와 같이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항상 나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을 때 집착하는 마음을 버릴 수 있습니다. 생각으로 번뇌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마치 나비가 거미줄에 걸려 발버둥 치면 칠수록 거미줄에 더 감기는 이치와 같죠. 사람은 누구나 깨달음(진리, 부처)과 같이 살고 있으나, 자기 밖의 보이는 데 마음을 두어 진리가 없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망상이요, 환상입니다."

 

선은 명상과 같은 것인가요?"

 

"명상은 고요함과 혼란함 사이를 왔다 갔다 하지만, 선은 그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비유컨데 파도와 물이 별개가 아니라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 공부를 하는 데 스승이 필요합니까?"

 

"스승을 믿을 때 문제의 반은 해결됩니다. 혼자 공부하면 자칫 공부도중 길을 잃고 헤맬 수 있습니다. 스승을 믿으면 필요 없는 노력과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막을 수 있죠. 모든 종교에서 믿음이 근본입니다."

 

39 로사리오는 진짜 속마음을 스님께 물어보았다. "밖에서 오는 고통은 어떻게든 견뎌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깊은 슬픔은 치유가 되지 않습니다. " 스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다른 무엇으로 그 슬픔을 치유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냥 슬픔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확실히 들어가 있게 되면 그 슬픔과 마음이 하나가 됩니다. 본마음에는 슬픔이 없기 때문에 슬픔은 저절로 떨어져 나가고, 우리 마음에는 슬픔이 없는 것을 경험하지요. 당신은 예술가니까, 이를테면 예술의 에너지 같은 것이라고 할까요. 인간은 생각이 많은데, 그 생각들을 혼자서 없앨 수는 없습니다. 생각으로 생각을 없애려면 자꾸 증폭되기 때문에 힘만 들지요. 그럴 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마음이 봅니다. 그러면 생각들이 지혜로 변하게 됩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그것을 번뇌가 곧 보리(지혜)라고 부르지요. 번뇌를 치유하는 길은 그것을 없애는 게 아니라, 지혜로 바꾸는 것입니다."

 

40 선사(禪師)가 춤꾼에게 물었다.

"춤이란 무엇인가요?"

춤꾼이 대답했다.

"허공에 몸을 선()으로 그려 나가는 것입니다."

이번엔 춤꾼이 선사에게 말했다.

"()이란 무엇인가요?"

선사가 대답했다.

"허공에 몸으로 선을 그려 나가는 자는 누구입니까?"

 

46 콘크리트 건물이 오페라라는 예술이 공연되면 선경으로 변하는 것처럼, 내 몸도 생명이 깃들었기에 아름다운 것이지요. 몸이 아니라 몸을 쓰고 있는 그 무엇이 중요합니다. 생명의 주인이 누구인지 숙고해봐야 합니다. 여러분을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어주는 '그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돌아보기 바랍니다.

 

50 비유하자면, 내가 바다를 건너는데, 내 힘으로 노를 저어가는 것이 소승이라면, 대승은 돛단배를 타고 바람의 힘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51 믿는다는 것은 나를 버린다는 것이다. 자아를 버리면 신기하게도 무언가가 깨어나 움직이기 시작한다. 보이지는 않지만 작용은 멈추지 않는 법, 그리고 그 무언가는 작용할 때, '자아'처럼 욕심을 내어 특별한 일을 꾸미지 않을 것이다. 정말 '평상심'대로 움직일 것이다.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평상시의 마음이 곧 도)가 딱 맞는 말이다.

 

55 생각이 멈춘 곳과 생각이 끊어진 곳, 이 둘은 구분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생각이 멈춘 곳은 정()한 상태이고, 생각이 끊어진 곳은 정定(고요함)과 혜慧(슬기)가 살아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과 혜가 살아 있는 곳은 중생 생각이 끊어진 곳이어서 사람의 생각이 접근할 수 없는 곳이고, 생각이 멈춘 곳에 있는 정(정지停止)은 일어날 수 있는 생각이 있으나 움직이고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의정이라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 끊어진 뒤에 오는 펄펄 살아 있는 약동하는 생명의 실상으로서 저절로 알 수 없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형상이 없고, 형상이 없어서 볼 수가 없고, 볼 수가 없으므로 크고 작은 것이 없고, 크고 작은 것이 없으므로 오고 감이 없고, 오고 감이 없으므로 생과 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만 작용 가운데 있으면서 눈만 살아 있습니다. ! ! 내 눈으로는 볼 수 없네!

가까이 하기에는 무서워라!

이 불()인가 중생(衆生)인가! 알 수가 없네.

이것을 의정이라고 합니다.

 

73 바람이었으면,

바람이었으면,

나뭇잎 살랑이는

그런 바람이었으면,

꽃이 피면 꽃잎에 앉아도 보고,

잎이 돋는 가지 위를 스쳐도 보는

나는, 나는 그런 바람이었으면....

 

75 왜 깨달아야 하는가를 확실히 알고 참선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속에서 간절한 마음이 일어나 법문을 제대로 듣는 귀가 생깁니다. 여러분, 스스로를 중생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무엇이 중생입니까? 자신이 타고난 지혜를 가리고, 그것을 등지고 밖으로 찾아 다니는 것이 중생입니다. 하지만 밖에선 지혜를 구할 수 없습니다. 밖의 일은 항상 새옹지마입니다. 상황에 따라 변화무쌍한 것입니다. 진정한 지혜는 안에 있습니다. 밖의 것들을 놓을 때 속에서 지혜가 나옵니다.

중생이란 바로 그 지혜를, 자기 안에 있는 지혜를 스스로 가려버린 사람입니다. 석가가 '일체 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깨달은 덕분에 무수한 도인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스스로 가려놓고 있는 내 안의 불성만 드러나게 하면 됩니다. 이것이 불교입니다. 가려진 헛것만 내려놓으면 됩니다. 헛것임을 알면, 세상에 있는 파도가 헛것을 건드려도 화낼 일이 없습니다. 참아서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자체가 껍데기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문제가 안됩니다.

 

76 세상을 살면서 옳고 그른 것을 많이 따지게 되는데, 그런 시비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닙니다. 여러분의 분별심과 상식 등 알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배고픈 줄 아는 그 자에게 마음이 가 있어야 합니다. 그게 참선의 출발점입니다. 번뇌 망상을 무조건 배척하지 마세요. 번뇌 망상을 그대로 두고 깨치는 것입니다. 시궁창 물을 그대로 두고 그 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입니다! 번뇌 망상이 끊이지 않는 사람은 언제나 그 번뇌가 배고픈 줄 아는 자성, 부처의 씨앗과 함께 있다는 것을 떠올리세요. 둘이 함께 있으면 번뇌 망상이 신심으로 변해갑니다. 그때 화두 공부를 시작하면 됩니다.

 

81 참선은 공중에 붕 뜬 공부가 아니다. 매일매일 순간순간, 내가 변화해가는 공부다. 그 누구도 스스로를 속일 순 없다.

 

88 근기란 무엇입니까? '바른 믿음'입니다. 따라서 근기의 강도는 곧 믿음의 강도와 비례합니다. 의정이 깊어지면 생각이 끊어진 상태에 있게 됩니다. 그렇게 깊어지면, 언젠가 인연 닿는 어떤 소리에 몰록 깨어나게 됩니다. 의정이란 근본에 눈길이 가 있는 것입니다. 의정 속에 있으면 망상이 저절로 접근 못합니다. 마지막 번뇌 망상이 끊어지고 나면 뿌리가 뽑히면서 몰록 깨치게 됩니다. 화두에선 바른 신심과 의심과 분심, 이 셋을 유지해가는 게 핵심입니다. 화두 참선을 하게 되면, 힘 있는 재미, 자신 있는 재미, 천하를 삼키는 재미를 맛보게 됩니다.

 

89 일반적으로 믿음이란 외부의 존재를 믿고 의지하는(타력 신앙)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것이고, 스스로의 힘으로 수행하는(자력 신앙)요소가 강한 불교에서는, 특히 선에서는 철저히 혼자 힘으로 공부해가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실참에 들어가니, 내 안에 자성불이 있다고 하는 믿음이 참선의 알파요, 오메가였다.

 

90 내가 불성과 함께 있다는 것을 믿는 데는 산에서나 시장통에서나 큰 차이가 없다. 산 속에서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오히려 잡념이 더 나지 않겠는가? 일상에서 바쁘게 사는 것이 나와 불성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데에 더 유리한 환경일 수 있다.

 

97 왜 참선을 하는가?

 

참선은

닫힌 마음의 문을

열어가는 길입니다.

마음이 열림으로 우리는 상대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마음이 너그러워져

세상 번거로운 일들이 줄어듭니다.

왜냐하면

번거로운 일들은

마음이 사물과 경계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일어나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 자신이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애매한 데 눈을 주고 있는  까닭에서 옵니다.

그러나 참선을 해서 스스로 깨달음이 오면

자신한테 머물러 있는 것들이

근거 없는 것인 줄 알게 되어

놓게 되고 놓게 되면

저절로 물러 떨어져 나가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 살아가다가 만나는

장애들마다 지혜와 자비로 대하게 되고

나와 남이 잘 살아가는 복된 삶이 됩니다.

 

103 서원(誓願)은 시간의 강이 흘러가는 길목에 댐을 세우는 것이다. 장래의 어느 시점에 목표를 정해서 댐을 쌓으면, 시간의 물은 그냥 흘러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댐에 차곡차곡 쌓인다. 지금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댐을 채우는 물이 되어 쌓여서, 후일 댐에 물이 넘실거리면 마침내 찬연한 의미를 바라며 되살아나게 된다. 그 물로 발전도 하고, 식수로 사용하며, 식물도 키우고, 공업용수로도 사용하는 것이다. 서원은 미래를 장래로 바꾼다. 미래(未來)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다. 하지만 장래(將來)는 장차 올 시간이다. 앞으로의 어느 시점을 정해 서원을 세우면, 그 힘에 의해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가지만, 서원은 장래에서 현재로 거슬러 내려오는 시간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미래 완료의 기적을 만든다. 가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때 그렇게 되어 있을 것이란 사실을. 그게 서원의 힘이다. 끝이 좋으면 과거의 모든 고생이 모두 찬란한 장래를 위한 준비였음이 드러난다. 장래에 세우는 서원은 현재의 의미를 부여하지만, 나아가 과거까지도 바꾸는 힘이 있다. 모든 시간의 자력(磁力)이 서원의 시점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나도 서원이 필요하다.

 

105 참선을 통해 무언가 체험도 하고 또 알게 되기도 해서 그게 대단한 것으로 여겼는데, 알고 보니 그런 것은 과정 중에 일어나는 일이더군요. 지금은 다 놓아버렸습니다. 공부는 자꾸 버려 나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다 버려지는데 '믿음'하나만은 갈수록 선명해진다는 것입니다. 믿음 하나만 믿을 만한 것이고, 다른 것은 모두 방해물 같습니다. 저는 참선이란, 뭔가를 알고 체험하는 게 아니라, 믿으니까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성불이 항상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을 믿고, 믿고 맡기니 마음이 편하고....그것으로 족합니다.

 

115 '내 식대로'의 반대가 '무심'입니다.

 

116 공부는 무엇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허물을 발견하고 지워가는 것입니다.

 

117 밖으로는 남을 배려하고 안으로는 수행에 정성을 들이는 기본이 되어야, 화두가 들리고 참선이 됩니다. 선방에만 앉혀두면, 사람 병신 만들기 십상입니다. 앉는 게 무슨 직업처럼 됩니다. 화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선을 하면 할 일을 알게 됩니다. 선지식이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의 가려진 것을 뚫어주는 것입니다. 아상이 없어지면 열리고, 열리면 트입니다.

 

121 화두가 잘 안 들릴 때는 억지로 들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럴 땐 쉬십시오. 화두는 배워서 하거나 억지로 하는 공부가 아닙니다.

 

126 어쨌든 숲 속에 들어오니 보이는 것은 바로 앞의 나무뿐이다. 계곡 길을 오르는 한, 정상을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전망이 가려진 오르막을 걷고 있지만, 등줄기에 흐르는 땀이 시원하게 느껴지는 것으로 봐서, 꽤 올라온 것이라고 믿는다. 조만간 중턱 고개쯤에서 다시 정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신발 끈을 단단히 조이고, 대응봉을 향한 도전에 나설 것이다. 태산도 하늘 아래 뫼이다!

 

127 오염으로 가장 피폐해진 자연이 바로 나다. 중생심에 속아 살아왔기 때문이다. 분심과 함께 참회하는 마음이 일었다. 몸은 운동으로 풀어야겠지만, 마음은 참회로 씻는 거로구나! 집에서 틈날 때마다 108배를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몸과 마음을 함께 참회하는 데는 절이 가장 좋으리란 생각이다.

 

133 참선을 하면서 문화답사를 하니까, 눈이 열려 나도 모르게 자꾸 ''을 하게 된다. 보이는 유적(손가락)을 통해, 그 너머의 정신()을 포착하게 되는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병산서원이란 거울을 통해 결국 나를, 내 안의 자성을 돌아보았다. 병산서원이란 기적적인 공간은 인간 안의 자성을 가시적인 건축 양식으로 표현해놓은 우리나라의 보물이다.

 

134 참선의 기초

 

참선은 깨달음을 가르치는 공부이기 때문에, 사상, 철학, 종교 등에 상관없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해야 하는 공부입니다.

 

앉기

 

참선은 앉는 게 다가 아닙니다. 앉으면 몸이 안정되고 건강에 좋기 때문에 앉는 것입니다. 머리 속에 복잡한 생각을 가지고 앉으면 힘만 듭니다. 얻으려고 하면 반드시 고통이 옵니다. 그냥 '쉰다' 혹은 '논다'는 생각으로 앉으면 편합니다.

 

화두법

 

배고픈 줄 아는 자가 있는데, 이 배고픈 것은 누구한테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것도 아닙니다. 또한 사람만 배고픈 줄 아는 게 아니라, 개나 모기도 압니다. 이것은 스스로 아는 것입니다. '스스로 아는 성질'이라고 해서 '자성(自性)'이라고 합니다. 스스로 있는 성품입니다. 자성이란 깨달음의 씨입니다.

 

143 계곡 길에도 절경이 숨어 있다. 정상에 서는 것도 좋지만, 그 기분은 정상에 오르면 그때 맘껏 즐겨도 늦지 않다. 계곡을 오를 때는 계곡자체를, 능선을 오를 때는 능선 길을 즐길 일이다.

 

147 바위 길이 나오면서부터는 긴장하기 때문에,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등산의 좋은 점이 이것이다. 자연 속에 들어가서 걸으면, 아무 생각이 없어 머리가 맑아진다. 구름에 가렸다 나타났다 하는 숨은 벽의 거대한 바위를 보며, 뜨거운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내려오는 길은 신선이 부럽지 않았다. 그러다 잠시 쉬는 시간에 하산 길의 계곡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비탈에 선 나무들을 볼 때면 언제나 불안정한 땅을 밟고 서 있는 청춘을 보는 듯한 싸함이 느껴진다. 머리 속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산으로만 들어가면 맑아진다. 문명에 찌든 인간은 역시 자연 속에서 본성을 회복한다. 등산은 최고의 행선行禪(움직이며 하는 선)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산에 가면 무슨 생각해요? 내 답은 늘 같다. 아무 생각 안 합니다. 산을 오르면서 생각을 안 하는 게 아니라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생각이 없어지면서 산과 함께 하는 시간이 좋아서 산에 가는 것입니다. 한참을 걷다 보면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한 두 가지 정도 생기기도 합니다. 그냥 떠오는 생각들은 언젠가 나에게 고민거리로 있었던 것들인데 문득 떠오릅니다. ...하는 느낌이 오는 순간입니다.

 

159 기준점은 허공이 아니라 항상 이 땅입니다. 땅을 잘 딛고 서야 합니다. 선은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정법입니다.

 

163 참선 하는 사람은 개념을 가지지 않는 게 좋습니다. 참 개념은 안 가지는 것이 참 개념입니다. 자기가 있는 둥 마는 둥 하는 게 좋습니다. 개념이나 관념은 필요할 때 잠시 가지고, 지나면 놓아버려야 합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항상 배운다는 자세로, 마음을 열어놓고 있어야 합니다. 절대 서두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바른 마음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번뇌 망상이 들끓어도, 내가 있는 한 불성도 함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이해가 되어야만 믿기 때문에, 제가 '불성을 관해가는 법'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불성은 작용을 하니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할 수 없이 불성이라고 이름 부르지만, 불성이라고 부르면 30방을 맞아야 합니다. 말에 얽메이지 말라고 30방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원래 형상도 이름도 없습니다. 뭐라도 이름을 붙이면, 그것은 중생이 붙인 것이기 때문에 틀립니다. 그래서 조주 스님이 '()'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름은 중요치 않습니다. 저는 틀린 줄 알면서도 방망이를 맞고 입을 여는 것입니다. 중생을 위해 입을 여는 것입니다. 중생은 솜옷을 입고 가시밭길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준비 안 된 상태에서 의욕만 앞세우기 때문에 마구 찔립니다. 스승과 도반과 도량을 갖추고 공부해야 합니다. 깨지는 것은 나중 문제입니다. 헐떡거리는 것만 쉬어도 좋습니다.

깨달음의 성품은 화날 때도, 번뇌 망상이 일어날 때도, 일할 때도 나와 같이 있습니다. 번뇌 망상만 들어내려고 하면, 그것을 이길 수 없습니다. 본래 뿌리가 없기 때문에 가만히 두면 자연히 사라집니다. 불성과 함께 있게만 해주면, 번뇌 망상을 관하게 되고, 그러면 안심이 되면서 마음이 단전으로 쑥 내려가 맑아집니다. 이 상태만 되어도 살 만합니다. 화두는 그런 다음 단계입니다. 번뇌 망상의 비밀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혼란스럽더라도, 불성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면 평온해집니다. 번뇌 망상이 더 이상 갈 데가 없어집니다. 오히려 번뇌에 의지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번뇌가 힘들다고 불평하지 말고, 껴안고 같이 살아보십시오. 고려 시대에 국사(國師)를 지냈던 보조 스님의 말씀에,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서라'는 말이 있는데, 이 뜻이지요. 역대 조사가 모두 신근(信根)을 먼저 갖추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관념보다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173 밥 하나 잘하는 것이 참선 공부의 지름길입니다. 밥이 질기도 하고 꼬들거리기도 하다가 중도가 딱 잡힙니다. 매상에 그렇게 중도를 잡아가는 것이 이 공부입니다. 생활 속에서 참선을 해야 합니다. 붕 뜨면 안 됩니다. 정성을 들이지 못하면 계속 밥 짓기에 실패하게 됩니다. 밥에 도가 있습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자신을 세우면 안 됩니다. 세우는 것은 고통의 씨앗입니다.

 

180 어제 저녁에는 아내와 오랜 만에 대화를 나누었다. 잠시 후 상대의 이야기는 듣지 않고 내 이야기만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습관이란 얼마나 끈질긴 것이냐! 평생 이런 나를 대하고 살아온 아내가 얼마나 답답했을지 소름이 끼쳤다. 내가 먹물귀신이 든 사람임을 알았다. '아는 체'로 평생을 살아온 것이다. 붕 떠서, 앞뒤가 꽉 막힌 사람! 달마가 몇 년을 면벽했다는 것도 통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아내 눈에는 내가 벽처럼 보였을 것이다. 남의 말 듣지 않는 고집 불통의 에고 덩어리. 그래 놓고, 뭔가에 흘려 밖으로만 떠도는 바람의 자식. 참회할 것이 너무나 많다.

 

182 "물방울은 만나기만 하면 하나가 된다." 요즘 나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하나가 되느냐'이다. 그러니 귀가 번쩍 뜨일 수밖에. 하나가 되는 핵심 비결은 '()'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만나면 바로 하나로 합쳐진다는 뜻에서, 물이야말로 그 최고의 상징이 아닐 수 없다. 공자나 노자가 물을 도()의 상징으로 삼은 것은 바로 이 뜻이 아닐까.

 

198 물이 갈리는 경계를 분수령이라고 한다. 공부 길도 이와 같다. 처음 내딛는 걸음이 이쪽이냐 저쪽이냐에 따라 장래가 천양지차로 달라지는 것이다. 참선 공부에서도 분수령은 바로 첫걸음이다. 공부를 시작하면서, '자기를 믿느냐, 아니면 아는 것을 믿느냐'에서 어디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공부 길은 천 리만큼 확 벌어지게 된다. 다시 말해, 자신 안에 깨달음의 씨앗이 있다는 것을 믿고 오로지 그것을 싹 틔우는 데만 전념하느냐, 아니면 듣고 일고 배워서 알게 된 지식을 믿고 그것에 의지해 공부하느냐의 차이가 하늘과 땅 차이만큼 벌어진다는 것이다.

 

199 공부가 좀 되면 꼭 그 된 것을 붙드는 것이다. 하지만 붙드는 순간, 그것은 고정되고, 고정되면 지식으로 변하고, 지식은 돌부리가 되어 나를 걸려 넘어지게 만들었다. 번번이 그랬다. 공부가 좀 되어, 그 된 것에 매달리는 순간, 그것은 '아는 것'으로 변하여, 분수령의 저쪽으로 나를 끌고 갔다. 아니, 끌고 간 것이 아니라, 그쪽이 좋아 보여 내 발로 달려간 것이다. 제대로 된 공부라면 갈수록 아는 것에 매이지 않게 되겠지만, 잘못된 공부는 갈수록 아는 것에 의지하게 된다. 그러니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아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기가 어려울 것은 자명한 이치다. 정말 아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치명적인 독이다.

 

209 오늘은 새해 첫 날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북악스카이웨이에 있는 팔각정으로 가서, 새해 첫 햇살을 맞았다. 동쪽 산 위로 떠오르는 찬란한 태양을 보고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흐릴 수 있다는 일기예보와는 달리, 맑은 하늘에 햇살이 강렬하게 눈이 부셨다. 뒤를 돌아보았다. 떠오르는 태양뿐 아니라 햇살이 가서 닿는 곳을 쳐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212 "생활이 참선이 되어야지, 참선이 생활이 되면 안 돼."

참 정곡을 찌른 말이다. 여자들은 본능적으로 지혜로운 것 같다.

무엇에 정신이 팔려 바깥으로 떠도는 사람이 나이기도 하다. 생활이 참선이 되라는 말은 내게도 정곡으로 와 박힌다.

 

215 내 마음이 여기 이 자리에서 벗어나 과거나 미래로 가면, 그것이 바로 망상인 것을 알았다. 앞에 보이는 사물을 통해 내 마음을 그대로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것이 그대로 의정이라는 것을 확연히 안다.

 

마음이 깨어 있으면 오직 '지금 여기'밖에 없다. 지금 여기를 떠나면 의정이 깨지고, 그것은 망상이 된다. 다시 돌아와 보고 듣는 것에 마음이 되비치는 것을 느끼는 순간, 그 마음을 주시하고 자연히 의정 속에 들게 된다.

 

219 참선을 한 이후로 사람들의 마음을 유심히 읽게 되는데, 그런 눈으로 보면 이런 지루한 시간도 의외로 공부하기 좋은 시간으로 바뀐다. 대합실에는 서양인들도 많이 있었는데, 그들은 예외 없이 책을 읽고 있었다. 모두 손에 두꺼운 책을 들었는데, 자세히 보니 주로 소설책이었다. 대부분의 서양인들은 혼자 있을 줄 모른다. 문명인의 전형적인 특징은 자기가 자기로 있을 줄 모른다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를 만나는 대신, 늘 의식을 다른 곳에 팔고 있다. 그들은 분열에 익숙하다. 가만히 있으면 불안해서 견디지를 못한다. 소설에 정신을 파는 것을 문명인의 교양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을 그럴수록 자기와는 멀어지는 것이다.

혼자 못 있는 것. 늘 손에서 무엇인가 읽을 거리를 가지고 다니는 내가 보인다. 나를 만나러 주말에는 산에 가야겠다.

 

220 이제는 '아는 만큼 보인다'가 아니라 '느낀 만큼 보인다'를 믿는다. 때로 아는 것이 느끼는 것을 방해할 때도 많다.

 

'아는 것을 가서 확인하는 관광'에서 '미지의 땅에서 낯설지만 놀라운 나를 만나는 관광'으로의 전환!

 

224 "보시는 산 부처에게 하는 것입니다"

 

225 먼동이 밝아오니 사람들이 모여든다. 마침내 황금 햇살이 천지를 비추기 시작한다. 무명(無明)의 어둠이 새벽 햇살에 걷혀가는 모습과 그 햇살에 수천 개의 탑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은 장관이었다. 스님도 그 모습에 감회가 새로운지 이렇게 말하였다.

"샛별이 전조를 보이다가 이윽고 지혜의 빛이 떠올라 무명이 서서히 걷혀가는 장면은 마치 우리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장면 같아 감회가 깊습니다. 태양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태양은 그대로인데 지구가 그쪽으로 돌아가서 태양을 맞이하는 것처럼, 우리도 마음속에 있는 진리의 태양 쪽으로 내 윤회가 돌아 들어가서 만나면 이렇게 찬란한 햇살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태양은 지평선 아래에 있고 중생은 무명에 잠겨 살지만, 우리가 태양 쪽으로 다가가면 언제나 지혜의 태양이 우리를 맞아줍니다. 마음의 눈이 떠지면 어둠이 걷히고 이렇게 황금 햇살 아래 빛나는 만물을 보게 되지요. 내 마음 속에서도 일출이 나와야지요.

 

230 ", 경계가 일어날 때만 배에서 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매 순간 배에서 내려야 하는군요. '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낸다' <금강경>의 도리가 바로 이 말이군요!" 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스님은 "그렇지요." 하신다. 그 순간 무엇인가 "부지직!"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매 순간 배에서 내린다'는 말의 뜻을 알아채는 순간, 마치 냉동고속에서 꺼낸 꽁꽁 언 컵에서 얼음이 녹기 시작하여 쩍 갈라지는 듯한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234 위빠사나에서는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어지러운 번뇌 망상과 졸음을 다스리는지 궁금했다. 30분 실습을 하고 나자, 아신 스님이 다시 말했다. "마음의 오고감과 다리가 저린 감각이 주로 일어나지요? 여러분의 집중력이 향상되면 번뇌와 저림을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엔 한국분들도 여려 분 계시는데, 그런 분들도 처음에는 한 시간으로 시작하지만 점차 여러 시간을 늘려갑니다. 왜 이런 수행을 합니까? 모든 것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을 직접 체험으로 느끼기 위해서입니다. 계속 일어났다 사라지는 이 무상이 멈춰지지 않기에, 삶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임을 체험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내 맘대로 이 고통을 멈출 수 없기에 이 몸도 나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238 모든 수행은 겸손해지자는 것인데, 그 때문에 사람이 좁아지면 안 되겠지요.

 

244 내가 내 안의 진리를 찾아야지, 밖의 것을 가지고 나를 조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248 진실한 공부인이라면, "내 공부가 이만큼 되었다."가 아니라, "난 언제나 초심이다'"가 되어야 할 것이다. 참선 공부의 비결은 '초심'에 있는 것 같다.

 

250 마음은 화장발을 받지 않는다.

옛 사람들은 불법을 물으면, "네가 부처인데, 부처를 왜 묻는가?"하고 때렸다.

 

251 주인이 너무 무리를 하니까, 몸이 좀 쉬게 해 달라는 것인가 보다. 비록 온몸이 지끈지끈 아프지만 이 고통은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다. 몸 아픈데 마음까지 아프지 말고 쉬면서 기다리자

 

252 얼마 전 쓰나미가 쓸고 간 인도네시아 아체의 사진에서 놀라운 발견을 했다. 모든 것을 다 쓸고 가도, 티끌 하나 손상 입지 않은 채로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바닥'이었다. 자연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더 깨끗해졌다고 하면 지나칠까? 마음에도 바닥이 있다. 후천적인 것을 내려놓아야 그 바닥이 보일 것이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정직하게 마음 바닥을 바라볼 때, 더 없는 자유와 안정을 느낀다.

 

257 기왕이면 난공불락으로 보이는 거봉에 덤비기. 지표면의 히말라야처럼,, 정신계에도 히말라야가 있는 법이다. 인간의 발자국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 한계 상황의 고독한 정상. 작가 중에서도 그런 정신적인 오지로 우뚝 선 거봉을 선택했다. 이번에 내가 문학 전기를 낸 보르헤스도 그런 사람이다.

 

258 저녁 참선 중에 생각이 일어났다 꺼져가고, 또 일어났다 꺼져가고 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내 인생도 그렇게 한 생각처럼 일어났다 꺼져가는 것임을 실감했다.

 

262 참선은 내 안에 '이미 있는 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미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작용하고 있다. 확실히, 생생히 작용하고 있지만, 다만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이 문제다. 왜 인지하지 못하는가? 오랫동안 배우고 익힌 마음이 그것을 덮고 있기 때문이다. 현웅 스님의 표현에 따르면, 피가 순수하지 못하고 콜레스테롤이 끼어서 혈액 순환이 잘 되지 않는 것과 같다. '이미 있는 마음'이 나오긴 나오는데, 딴 생각이 껴서 나오기 때문에 미처 그 존재를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265 "누구나 흐린 날이 있겠지요. 나는 큰 법문이나 방송에 임할 때는 '불성 관'으로 몸 상태를 조절합니다. 해보면 금방 효과가 나지요. 흐린 것도 분명히 불성과 함께 있으니까요. 흐리다 싶으면 기다리지 말고 바로 '불성 관'을 하세요." 그렇다! 흐리다 싶을 때 공부의 고삐를 더 바짝 죄어야 한다.

 

266 참선에서 그기류를 타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화두의정일 것이다. 화두로 의정에 들기까지의 과정이 내 힘으로 하는 노력이라면, 일단 의정에 들면 마치 기류를 타듯이 일사천리로 저편 언덕으로 날아가게 되는 것이다.

나는 것을 배우려면, 일단 혼자 힘으로 기류 타는 법을 알아야 한다. 참선을 하려면, 일단 혼자 힘으로 의정에 드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의정에 들려면, 화두를 알아야 한다. 화두를 하려면, 먼저 묘용을 감지해야 한다. 묘용을 감지하려면, 관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관하는 힘을 기르려면, 먼저 번뇌 망상 다스리는 법을 알아야 한다. 번뇌 다스리는 것을 알려면, 먼저불성 관을 해야 한다. 불성 관을 하려면, 먼저 발심을 내야 한다. 믿음을 가지려면, 먼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이미 내 안에 불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사실을 실감하려면, 밖으로 구하던 마음을 쉬어야 한다. 마음을 쉬려면, 내 공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결국 공부의 방향에 대한 자각이 참선의 첫 걸음이다.

오늘 읽은 어느 불교 신문의 기사에쉬면 깨닫는다는 말이 눈길을 끌었다. 이 말은 부처님의 말이라고 한다. 공부는 찰나 간의 차이를 깨닫는 일이다. 그 돌이킴에서 결정된다. 그러나 늘 찾아 다니는 관성 때문에 정작 쉬기가 어렵다. 내 안에 이미 있다는 믿음만이 마음을 쉬게 한다. 스승이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그래서 물으러 오면 몽둥이로 때렸다. 너에게 있는 것을 왜 남에게 묻느냐!”는 것이다.

 

268 90인간은 만남으로 자란다.

현웅 스님의 법문을 정리해본다.

 

*  만남 속에 불법이 있고, 불보살이 탄생한다.

*  인간은 만남으로 자란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을 자라게 하는 만남은 마음을 열고 만날 때 가능하다. 마음을 연다는 말은 곧 믿음이 있다는 말이다.

*  말 있는 곳에 뜻이 있고, 뜻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 마음을 연 만남은 참 사람끼리의 만남이 된다.

*  선 수행하는 사람은 사람이 오면 보살이 오는 것으로 본다. 사람의 상()을 보지 않고, 안에 있는 보살을 본다. 보살의 눈에는 보살만 보여, 서로 돌이켜 상생하게 된다. 남을 바꾸려 하지 말고 남을 보는 내 눈을 바꿔야 한다.

*  만남을 통해 깨달음을 배운다.

*  선 수행자는한 물건도 없는데, 내 공부 가지고 건방 떨었구나하고 겸손해야 한다.

*  참선은 내가 무너지는 공부요. 부처를 보는 공부요, 부처가 살아나는 공부요, 부처로 사는 공부다.

*  경지는 사람이 짐작으로 만든 것이다. 법에는 원래 경지가 없다.

*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것이 믿음이다.

*  머리로 이해해서 얼른 얻으려는 마음이 여우 마음이다.

*  이미 있는 구멍을 넓혀야지, 왜 그것을 메우고 밖으로 찾아나서는 가?

*  공부가 좀 되었다 하는 순간 막힌다. 이것을 미워해야 한다. 원수 보듯이 해야 한다.

*  머리에 이고 다니는 부처님 법을 내려놓아야 한다.

*  항상 모자란 듯해야 사람이 커진다.

*  큰 사람이란 마음 구멍이 큰 사람이다.

*  늘 부처하고 상의하라. 왜냐하면 가장 가까이 있으니까.

*  예술은 종교로 들어가는 사다리다.

*  예술은 도()를 도와주는 덕을 가지고 있다. 선객은 예술로 사람을 상대하면 좋다.

*  예술이 시공을 넘어 감동적인 것은 누구에게나 이미 있는 마음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  , 붓글씨, 음악, 미술도 불성에서 나와야 도()가 된다.

*  부처 마음은 알기 쉽지만, 오히려 중생 마음은 알기 어렵다.

*  참선이란 중생의 마음을 부처의 마음으로 바꾸는 것. 부처를 믿고 들어가면, 중생의 생각이 끊어지는 길에 들어선다.

*  믿음은 내 생각을 내려놓게 한다. 그리고 지혜를 탄생시킨다.

*  ()l? 중생 마음과 부처 마음이 맞닿아 있는 곳을 보는 것. 번뇌 망상이 뿌리가 없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는 것.

*  법문을 듣고 소견을 바로 세워야 공부가 시작된다.

*  조주의스스로 살아날 궁리를 해야지는 얼마나 깊은 생각인가! 남이 해놓은 것을 쉽게 얻으려고 하지 마라. 거품 선을 걷어내자!

*  알고 있는 것이 없어지는 것이 바른 공부 길이다.

*  법은 하나, 중생은 여럿

*  언제나 부처가 작용하는데, 내가 끼어들어 망친다.

*  <반야심경>은 부처가 깨닫는 속내를 밝힌 것

*  없는 것을 만들어 있다고 믿고 사는 게 중생.

*  일이 안 되면 일을 보지 말고 일을 대하는 자를 보라. 일을 대하는 자가 정리되면, 일은 따라서 정리된다.

*  아는 것 지키는 불교는 버리고, 체험하는 불교로 가야 한다.

*  불법은 이런 것이다라고 판단과 기준을 세우는 게 가장 위험하다.

*  우직한 믿음이 있어야 법문이 받아들여진다.

*  믿어야 단순해진다. 단순해야 법문이 들어온다.

*  깨달음은 내가 잘못한 것을 깨닫는 것이다.

*  생각 하나 잘못 일으킨 것이 오래 방황하게 만든다.

*  자기 생각을 믿지 마라. 기껏해야 작심삼일이다.

 

272 검도에서는 초심자에게 단순한 기본 동작을 수없이 반복하게 한다고 한다. 그리고 고수와 하수의 동작은 다를 것이 없는데, 오직 차이는속도하나뿐이라고 한다. 고수는 복잡한 초식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단순한 기본 동작을 빠르고 간략하게 하는 사람이라는 것. 속도의 차이에서 상대방은 베이는 것이다. 참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복잡한 지식은 방해만 된다. 간단한 기본기 하나 틀어쥐고 줄기차게 반복해서속도를 얻는 것.

 

275 가까웠던 가족이나 선생님들은 돌아가신 후, 대개 우리의 가슴에 하나의 이미지로 남는다. 그 분과 짙은 공감을 나누던 그 은밀한 순간의 모습이 각자의 가슴 속에영원히깊이 각인되는 것이다. 한 인간에 대한 추억은 그결정적 순간에 완성되어, 우리의 삶이 지속하는 한그대로온전히 보존된다. 대개의 사람들에게 있어결정적 순간은 언제일까? 내가 나가 되는 그 순간이 아닐까?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했을 때, 아니면 하나의 인생관이 세워졌을 때, 혹은 내가 나를 만났을 때.

 

284 삶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옛 성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석가는괴로움 고()’, 공자는어려움 난()’, 예수는고난(苦難)(십자가)’이라고.

생각해보니, 이런 말들이 품고 있는 비밀이 있는 것 같다. 인생이 괴롭고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으라는 것. 우리 인간은 해결되지 않는 고통을 통하여 갑갑한 현실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찾게 되고, 결국 현실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 누군가 나에게 인생을 단 한 자로 압축하라고 한다면()’라고 대답하겠다. 애벌레에서 나비로 변하는 것, 누에고치 속의 인생일 때는, 그저 깜깜한 곳에서 옴짝달싹 못하지만, 고치를 벗고 나비가 되면, 훨훨 맘대로 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참선은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는 과정이다.

 

290 “자기를 고상한 인격체로 보기보다, 차라리 동물이라고 인정하세요. 동물이면서 비로소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고 인정하세요. 자기를 자학하지 않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이지요.”

 

291 사람이 아래로 내려가면 다 놓기가 쉬우며 놓아져야만 삶의 진실이 보입니다. 놓는다는 것은 자각이 와야 되는 것이고 이 자각은 우리의 성품에서 오니 그 성품을 불성이라고 한 것입니다.

 

292 그리스의 크레타 섬을 여행했을 때, 그리스의 작가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 1883-1957)의 묘를 참배하고 얼마나 전율했던가! 작가의 양심에 따른 자유로운 종교적 발언 때문에 그리스정교로부터 파문 당했던 그의 묘에는 소박한 나무 십자가만 달랑 서 있고, 나지막한 묘비에는 단 석 줄의 글귀만 적혀 있었다.

 

나는 바라는 게 없다.

나는 두려운 게 없다.

나는 자유인이다.

 

294 참선의 목적은 철저히 인간의 자유다. ‘불성을 관하는 법을 하며, 내 안의알 수 없는 것과 대화를 하다 보니, 갈수록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그 동안 하도 많이 들어,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인자성(自性)은 스스로 있는 성품이다는 말! 스스로라는 말이 오늘 나의 가슴을 친다.

스스로있는 존재는 상대가 필요없다. 상대가 필요없으니, 상대에 얽매이지 않는다. 자성은 아무것도 필요치 않고 스스로 온전히 있으니, 자유롭다. 자유는 상대가 없다. 상대가 없으니, 바라는 게 없다. 바라지 않으니, 두려움도 없다. 두려움이 없으니 걸리는 게 없다. 옛 선사들이한 손으로 치는 손뼉 소리를 내봐라!’ 하거나, ‘짝이 없는 자를 아느냐?’하고 물은 것이 이해된다. 모두스스로 있는 것즉 자성은상대가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려는 말이다. 나는스스로라는 말에서자족(自足)’자유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 내 안에서 기쁨이 차오는 것을 느꼈다. ‘스스로 있는 것과 만나스스로가 되면 은은한 기쁨이 한 가득 삶을 채울 것이다.

 

이제 여러분이 직접 해보십시오

그리고 마음의 평화를 얻으십시오

 

직접 해보는 것. 이 책에서 저자가 제일 하고픈 말이지 싶다.

 

목차

 

머리말

 

1부 내 안의 문을 열다 ~21

2부 선의 오솔길 ~47

3부 마음을 보다 ~71

4부 내 안에 핀 꽃 ~100

IP *.39.134.221

프로필 이미지
2013.09.01 19:41:12 *.201.99.195

김홍근 선생님의 <보르헤스 문학전기>2005. 참 좋더군요.

<보르헤스의 불교강의>1997.도 사람들이 감탄하는 책입니다.

서연, 축하해요. 좋은 인연을 만난일을.....

프로필 이미지
2013.09.01 20:25:05 *.39.134.221

네...선생님. 보르헤스 문학전기를 읽어볼려고 합니다.

10월에 문학강의를 살롱에서 할건데 그때 아마 보루헤스를 강의하실것 같습니다.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252 유라시아 유목제국사/르네 그루쎄 지음 file 최재용 2013.08.19 3482
1251 #14. 칭기즈 칸 (라인홀트 노이만 호디츠, 한길사, 1999) 땟쑤나무 2013.08.19 2704
1250 북리뷰_칭기스 칸_라인홀트 노이만 호디츠 file 유형선 2013.08.19 2636
1249 (No15) 르네 그루쎄[유라시아 유목제국사]사계절-9기 서은경 file 서은경 2013.08.19 3365
1248 [2-16] 관촌수필 - 이문구 한정화 2013.08.19 6172
1247 세계의 정복자 칭기즈칸의 생애/ 르네그뤼쉐 file 오미경 2013.08.19 4154
1246 [2-13] 코리아니티 - 구본형 콩두 2013.08.20 2745
1245 [2-16] 관촌수필 - 이문구 (2/2) : 대복이와 복산에 대하여 한정화 2013.08.22 3102
1244 [구본형 다시읽기 1] 마흔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7] 한 명석 2013.08.29 1808
1243 [구본형 다시읽기]오늘 눈부신 하루를 위하여 [4] 박미옥 2013.08.30 2353
» #59_참선일기, 김홍근 [2] 서연 2013.08.30 4122
1241 [구본형 다시 읽기]월드 클래스를 향하여 [1] 오병곤 2013.09.01 1895
1240 [구본형 다시읽기 1]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 [3] 書元 2013.09.01 1723
1239 [구본형 다시읽기] 익숙한 것과의 결별 [3] -창- 2013.09.01 2731
1238 [구본형 다시읽기] 사자같이 젊은 놈들 [3] 해언 2013.09.01 2009
1237 #13. 카를 융 기억 꿈 사상(카를 융, 김영사) 땟쑤나무 2013.09.02 2937
1236 #16.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 카를 융 file 쭌영 2013.09.02 3855
1235 (No16) 카를 구스타프 융[기억, 꿈, 사상]김영사-9기 서은경 file 서은경 2013.09.02 2292
1234 <카를 융,기억 꿈 사상> 북 리뷰 file 최재용 2013.09.02 4348
1233 9월 1주차_융_기억 꿈 사상 (9기 유형선) file 유형선 2013.09.02 8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