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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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이 동양을 찾는 이유- 노자의 무위 철학 세 번 째 이야기
그대는 살면서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우주적 힘에 의해 무엇인가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가 ? 꽃이 그대에게 말을 거는 것을 느낀 적이 있는가 ? 나뭇가지하나를 자르다 그곳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가? 바다에서 파도가 밀려오고 새가 하늘을 차올라 올 때 그것이 바로 나라는 동일성을 느낀 적은 없는가 ? 슬픔에 쌓인 날 나무 가지에 앉아 우는 새가 바로 나라고 생각한 적은 없는가 ? 벤치에 앉아 가난한 삶을 비관하는 사람 옆에 낙엽 하나가 날아와 앉을 때 그것이 그를 위한 진정한 위로라는 것을 느낀 적은 없는가 ?
서양의 철학적 전통은 이원론이다. 오랫동안 정신과 육체, 물질과 영혼은 분리되어 있다고 믿어왔다는 뜻이다. 이원론적인 패러다임은 나를 다른 사람과 분리된 존재로 인식하게하며 자연 역시 나와 분리되어 있다고 인식한다. 그러나 노자의 도교나 불교의 사상은 모든 것이 하나 속에 혼융된 일원론적 기반 위에 서 있다. 일원론적인 동양의 사상은 '물질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다. 소나무를 껴안으면 소나무의 힘이 내 속으로 들어와 지친 내 몸에 활력을 준다고 믿는다. 바위에도 신의 섭리와 신성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이런 물활론적인 전통이 서양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기원전 6세기, 그러니까 초기 그리스 철학이 이오니아의 밀레토스 학파의 현인들에 의해 주도될 때 그들은 자연이라고 불리는 '피지스'(physis), 즉 사물의 본질의 진정한 구조를 밝히는 것이 목적이었다. 물리학을 가리키는 physics 는 여기서 유래하였다. 밀레토스학파의 세계관은 노자의 세계관과 다르지 않다. 탈레스는 모든 물질은 신성으로 충만하다고 말했고,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했다. 노자 역시 물의 미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강과 바다가 수많은 골짜기를 거느리는 왕이 된 것은 능히 수많은 골짜기의 아래가 되기 때문이니, 그 이유로 능히 수많은 골짜기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66장) 물이 왜 만물의 근원이며 왕인가에 대한 이유다.
그런가 하면 역시 이 시대의 대표적인 현인인 에페수스의 헤라클레이토스는 우주는 부단히 변화하고 영원히 생성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부단한 활동과 변화를 상징하는 것은 불이었다. 세상의 모든 변화는 대립자들의 역학적 투쟁과 주기적 상호작용에 의해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대립자의 쌍을 하나의 통일체로 인식했다. 대립의 힘을 내포하면서 동시에 초월하는 통일체를 로고스 logos라고 불렀다. 이것은 우주적 변화를 음과 양이라는 대립적이면서 보완적인 힘들에 의해 끊임없이 생성되어가는 것으로 인식한 동양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거의 동시대에 동서양의 지역적 격리에도 불구하고 아무 지적 교류 없이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 역시 우주적 공명이 아니었을까 ?
그러나 그후 서양사상은 마음과 물질, 육체와 영혼이라는 이원론에 이르게 되었다. 물질을 다루는 서양의 과학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체계화되었지만 그는 물질의 세계란 인간의 영혼과 정신의 세계에 비해 훨씬 저급한 것이라고 믿었다. 물질보다 훨씬 가치있는 영혼과 정신을 다루는 지적 전통은 기독교의 지지 아래 2000년 이상 서구 철학의 근저를 이루게 되었다. 서양의 과학이 본격화 된 것은 '물질은 죽은 것으로 인간과는 완전히 분리된 것'이라는 인식에 도달한 데카르트의 철학 위에서 이루어졌다.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은 자신을 영육의 전체적 유기체가 아니라 육체 속에 내재하는 고립된 자아로 인식한 선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마음으로 하여금 육체에서 떨어져 나와 그 육체를 제어하고 통제해야하는 헛된 과업에 시달리게 했다. 내부는 외부와 분리되었고, 다시 내부는 의식의 세계와 무의식의 세계 속에서 갈등과 분열을 계속하게 되었다. 인간의 내적 분열은 '외부 세계'를 자신과 분리되고 격리된 것으로 보는 관점을 정착시켰다. 자연은 이해집단들에 의해 착취되었다. 조각난 관점은 저마다 다른 국가, 인종, 종교로 분열되었다. 결국 우리를 자연과 인류동포로부터 소외시켰던 것이다. 자연을 부당하게 분배하는 과정에서 경제적 무질서를 야기시켰고, 오염된 환경 속에서 생명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병들어 가게 된 것이다. 데카르트의 분할과 뉴튼의 기계론적 세계관은 혜택인 동시에 유해한 것이었다. 고전 물리학과 기술의 발전에는 지극히 성공적이었으나 인류의 문명에는 치명적 부작용을 초래한 것이다.
21세기에 이르러 우리는 초기 그리스 철학과 동양의 사상 속에 천명된 일원론적 이데아로 다시 이끌리고 있다. 우리는 고립된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궁극적 실재인 우주와 공명하고 연결된 존재라는 인식에 공감한다. 우주란 영원히 움직이며 살아있고 정신적인 동시에 물질적인 불가분의 실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성에 대한 불교와 노자의 사상은 이 세계를 위에서부터 지배하는 별개의 통치자를 설정하지 않는다. 그대신 모든 사물을 그 내부에서 통제하는 하나의 원리가 있다고 이해한다. 그것이 바로 노자의 경우, '도'(道, Tao)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을 닮았다.
브리하드-아란야카 우파니샤드 Brihad-aranyaka Upanishad 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이 세상 모든 것들 속에 깃들어 있으나
이 세상 모든 것들과는 다르고
.....
그 속에서 모든 것을 다스리는
그는 네 영혼,
안에 있는 불멸의 통치자
유기적이고 생태적인 동양의 일원론은 분열된 기계론적 세계관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는 서구인들, 특히 젊은 층들에 의해 새로운 대안이 되고 있다. 요가나 명상이 나이든 사람들 보다는 오히려 젊은이들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서양의 문명은 심각한 불균형 상태에 있다. 그들은 협동보다는 경쟁을 선택했고 보존 보다는 확장을 택해왔다. 직관적 깨달음 보다는 합리적 지식을 추구했고, 융합보다는 자기 주장에 몰두했다. 이런 일방적인 발전은 생태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치명적인 위기에 다다르게 되었다. 서양이 그들 문명의 위기에 대한 대안으로 동양을 연모하여 접근하는 것을 노자식으로 표현하면 '양이 지극하면 음을 위해 물러난다' 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