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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2일 00시 29분 등록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9기 연구원 13주차

카를 융 기억 꿈 사상(김영사) “

 

1. 저자소개

* 칼 구스타브 융 (Carl Gustav Jung) : 의사, 심리학자 

출생-사망1875 7 26 (스위스) - 1961 6 6

스위스 출신의 의사이자 현대 정신분석학의 대가. 1875 7월 스위스 북부 투르가우 주의 케스빌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부터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부모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왔다. 어머니 에밀리는 예민하고 강하며 이중적인 성격을 소유자로 한동안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어머니의 부재중에는 보모의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의 부재는 훗날 융의 여성상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학교에서는 전형적인 모범생이었지만 꿈과 종교, 의식 심령현상 등에 심취해 또래와 어울리지 못했다. 한번은 어린 시절 엄마의 방에서 나오는 목없는 여성의 형체를 본 경험을 하기도 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기독교 신앙에 대한 회의로 인해 목사인 부친과의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특이한 꿈과 환상을 체험하며 품게 된 인간 내면에 대한 관심은 훗날 그의 인생 행보를 결정한 요인이 된다.

1986년 부친이 사망한 후 가장으로서 어머니와 여동생의 생계를 책임지게 되고 1900년 의사시험을 앞두고 크라프트에빙의 책을 일고 정신병은 일종의 인격의 병이란 사실에 충격을 받아 내과에서 정신과로 전향하게 된다. 이후 정신분열증이란 용어를 고안한 정신의학자 오이겐  블로일러 밑에서 연구와 치료에 전념하고 정신질환자 치료에 자유연상기법에서 단어연상기법을 제안해  주목을 받는다. 훗날(1907~1913) 프로이트와 학문적 동료이자 선후배(또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긴밀히 교류하지만 프로이트의 리비도 개념에 대한 이견과 권위를 중요시하고 자신의 이론을 일종의 교리화하려는 의도를 알게된 후, 더 이상 그와 동행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와 결별하게 된다. 프로이트와의 (학문적)결별 후, 사회적, 정신적인 전환기를 맞게 된 그는 케냐, 뉴잉글랜드, 인도 등을 여행하고, 신화, 연금술, 그노시즘(영지주의), 종교, 철학 등 학문적 범위를 넓히면서 그만의 정신분석학(분석심리학)의 토대를 마련해간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개념을 발견해냈다면, 융은 무의식을 범위를 확장시켰다. 그는 무의식에도 개인의 무의식뿐만 아니라 역사와 사회적 영향을 (계승)받은 집단무의식이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주창했으며, 그 집단 무의식의 내용을 원형이라고 일컬었다. 기타 자아의 어두운 면 또는 숨겨진 면을 그림자라 불렀고, 남성 내부의 여성적 인격을 아니마’, 여성 내부의 남성적 인격을 아니무스라고 불렀다. 융의 분석심리학은 이와 같은 자아의 무의식적 측면을 발견하고 통합하는 무의식의 자기실현 과정’, 즉 개성화 과정을 말한다.

정신분석학에서 융 보다는 프로이트가 더 유명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의 선구자라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융의 이론이 다소 비과학적이고 모호해 많은 해석과 오해를 낳았기 때문이다. 실제 신화와 종교 및 영지주의, 연금술, 만다라, UFO 등은 그가 심취했던 대표적인 분야였다. 정신의학자 앤터니 스토는 프로이트에 비해 융이 이처럼 도외시된 것은 그가 자신의 사상을 쉬운 용어로 잘 표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융의 저서로는 리비도의 변환과 상징(1912)’,  아이온(1951)’, 욥에게 보내는 답(1952)’, ‘현대의 신화(1958)’, ‘인간과 상징(1961)’, 등이 있다.

 

2.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서문

내가 평소에 가장 감명있게 읽은 책으로 추천하기도 하는, 자서전 문학의 백미인 융의 자서전을 원서로 읽어보고 번역해 보는 일은 내 일생에서 무척 귀중한 경험이 될 것 같아  얼마간의 망설임 끝에 번역 청탁을 수락했다.(7)

이 책은 융의 제자요 여비서인 아니엘라 야페가 융의 나이 82세가 된 1957년부터 5년 가까이 그와 줄기차게 대담을 한 결과 엮어진 자서전이다. (8)

융은 처음에는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자서전 출간을 거부했으나 자신이 죽은 후에 출간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고 동의했다.(9)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 실현의 역사다.’ 융은 80세가 넘은 나이에 자기 인생 전체를 돌아보면서 자신의 일생을 이 한 마디로 규정했다.(9)

자기 실현은 자아가 무의식 밑바닥 중심 부분에 있는 자기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그 소리를 듣고 그 자시를 받아 나가는 과정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 등 무수한 무의식 층이 겹겹이 가로막고 있어 자기의 소리가 자아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자기자아에게 꿈의 상징과  종교의 상징들을 통하여 그 소리를 전하려고 한다.(9)

80세가 넘은 나이에도 4세 무렵에 꾼 꿈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대목은 그저 놀라운 뿐이다.(9)

그는 신을 가리켜 위대한 위험이라고 규정했다. 섣불리 신에게 접근했다가는 어떤 위험스런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 법이다. 그렇게 위험스럽긴 하지만 신은 탐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위대한 위험인 것이다.(10)

나는 신을 압니다.”(10)

 

프롤로그 <신화는 과학보다 정확하다>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외부로 나타나 사건이 되려하고, 인격 역시 무의식의 조건에 따라 발달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려고 한다. 나는 이와 같은 형성과정을 표현하기 위해 과학적인 용어를 사용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나 자신을 과학적인 문제로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11)

내적 견지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이며, 영원의 관점에서는 인간이 어떤 존재로 보이는가는 오직 신화를 통해서만 표현할 수 있다.(11)

신화는 훨씬 개인적이며, 과학보다 더욱 정확하게 삶을 말해 준다. 과학은 평균 개념들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으로, 그 개념들을 각 개인의 생애가 지니고 있는 주관적인 다양성을 제대로 다루기에는 너무나 일반적이다.(12)

얼마 전까지 신화는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논리적으로 규명되지 않는 실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화가 신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그리고 인간사회의 근원을 말하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면서부터, ‘신화는 은유다라는 사실을 알면서부터, 신화가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면서부터 신화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아직 내공이 부족이 조셉캠벨이라 융처럼 신화를 100% 신뢰하지는 못하지만, 그들이 신화에 깊이 파고드는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은 자신을 무엇과도 비교해 볼 수 없다. 인간은 원숭이도, 암소도, 나무도 아니다. 나는 하나의 인간이다. 그런데 인간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12)

오직 신화적인 존재만이 인간을 넘어선다.(12)

사실 인간은 모든 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결코 알지 못한다(13)

언젠가 나는 인생은 뿌리를 통하여 살아가는 식물처럼 생각되었다.(13)

식물의 고유한 삶은 뿌리 속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다. 지상에 드러나 보이는 부분은 단지 여름동안만 버틴다. 그러다가 시들고 마는데 하루살이 같이 덧없는 현상이다.(13)

생명과 문화의 끝없는 생성과 소멸을 생각하면 전적으로 허무한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나는 영원한 변화 속에서도 살아서 존속하는 그 무언가에 대한 감각을 결코 잃어버린 적이 없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사라져갈 꽃이다. 그러나 땅속 뿌리는 여전히 남아 있다.(13)

내 생애의 외적 사실들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희미해졌거나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다른 실체와의 만남, 즉 무의식과의 충돌은 나의 기억에 생생하게 새겨져있다. 거기는 항상 충만한고 풍성하여 다른 모든 것은 그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14)

나는 나 자신을 내적 사건들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그것들이 내 생애의 특이성을 이루며, 나의 자서전은 그러한 내적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15)

 

[일생을 사로잡은 꿈]

검은 옷을 입은 남자

나의 기억은 두세 살 적부터 시작된다.(23)

나는 나무그늘 아래 유모차에 누워 있다. 화창하고 따뜻한 여름날, 하늘은 푸르다. 황금빛 햇살이 초록 나뭇잎들 사이로 비치고 있다. 유모차 덮개는 젖혀 있다. 나는 그 눈부신 아름다움에 막 눈을 뜨고 말할 수 없는 편안함을 느낀다. 나는 나무의 잎사귀와 꽃들 사이로 반짝이는 햇빛을 바라본다. 모든 것이 온통 경이롭고, 다채롭고, 그리고 찬란하다.(24)

집 뒤편에 언덕 밑으로 이어지는 덮개 없는 배수구가 있었는데, 거기서 피와 물이 졸졸 흐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거기에 온통 관심이 쏠리고 말았다. 그 무렵 나는 아직 네 살도 되지 않는 나이였다.(25)

⇒ 2세부터 4세까지의 기억이 이렇게 세밀할 수 있을까?! 처음 융의 기억을 더듬었을 때는 아마도 흐릿한 형상의 기억의 편린들이 산만하게 있었을 것이다. 융은 그것을 다듬고, 희뿌연 먼지를 겉어내고 그 기억의 편린들을 퍼즐을 맞추듯 맞추고 그런 기억의 퍼즐판을 자신만의 연대기순으로 정렬하였을 것이다. 그의 학문적 업적이 위대하고 천재적인 재능을 가져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무의식에 흐르는 수많은 꿈이 그의 인생을 차지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기억 또한 수많은 꿈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어디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녀는 검은머리와 올리브빛 피부를 가지고 있었는데 어머니와는 전혀 달랐다. 나는 머리털이 자라기 시작하는 그녀의  이마 주변과 심하게 그을린 피부의 목덜미, 그리고 그녀의 귀를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신비한 것들과 내게는 알려지지 않은 방법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소녀의 유형이 나중에 내 아니마의 한 측면이 되었다.(27)

예수는 크고 다정하고 자비로운 새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검은 프록코트와 높은 모자에 광택나는 검정 구두를 신고 검은 상자를 나르는 음울한 사람들과 연관되었다.(30)

그때 무엇이 내 안에서 말을 한 것일까? 누가 뛰어난 문제제기를 표현하는 발언을 한 것일까? 누가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함께 섞어, 나의 후반기 생애를 격렬하기 그지없는 폭풍으로 채운 그 모든 것의 기초를 제공했단 말인가? 하늘과 땅 양쪽에서 온 그 낯선 손님 이외에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37)

불화와 불확실성 속에서

여러 해 동안 나는 카톨릭 성당으로 들어갈 적마다 피와 넘어짐과 예수회 수도사들에 대한 은밀한 두려움을 느꼈다. 그것이 카톨릭 성당을 둘러싸고 있는 기운이요 분위기였다. 하지만 나는 늘 그런 것에 마음이 끌리기도 했다.(41)

어린이답지 않은 행동은, 한편으로는 예민한 감수성과 상처받기 쉬운 성격과 연관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특히 유년시절의 깊은 고독감과도 연관이 있었다.(42)

어느 날 밤, 나는 어머니방 문에서 흐릿하게 빛을 내는 모호한 형상 하나가 나오는 것을 보았다. 머리는 목에서 앞쪽으로 불쑥 두드러져 작은 달처럼 허공에 둥실 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새로운 머리가 생겨나 다시 그런 모양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이 예닐곱 번 반복되었다.(44)

그 유년시절에 나는 시골학교 학우들과 사귀는 동안 발견한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그들이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분리시켰다는 것이다.(45) ⇒ 융은 일종의 페르소나를 발견한 것이다.

돌 위에 앉아 있는 것이 나인가, 아니면 내가 돌이고 어떤 자가 내 위에 앉아 있단 말인가?’(46)

(필통 속 자에 성인 남자인형을 새기고 이를 다락에 숨겨놓고 비밀을  유지하는 것과  같은) 비밀을 소유한다는 것은 당시 나의 성격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50)

전통을 거치지 않고도 개인의 마음 속으로 침투해 들어올 수 있는 영혼의 고태적 구성요소가 있다는 확신이 처음으로 나에게 생겼다.(51)

사람들은 우선 행동을 하지만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거기에 대해 숙고해보는 것이다.(52)

 

[이제 반항아가 가까이 오도다]

신경발작증을 일으키다

나를 다른 길로 유혹한 것은 혼자 있고 싶은 열만, 고독이 주는 황홀감이었다. 자연은 내게 경이로 가득 찬 대상으로 보였고 나는 거기에 깊이 빠져들고 싶었다.(53)

아버지에 대해서 연민을 느꼈으나, 이상하게도 어머니에 대해서는 별로 연민이 생기지 않았다.(56)

주 예수에 대해서 긍정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 차츰 불가능해지기는 했지만, 열한 살 때부터 신의 관념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다. 나는 신에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모순이 없는 듯이 여겨졌으므로 어쨌든  나를 만족시켜주었다.(60)

(학교가기를 일시 중단한 이후) 무엇보다도 나는 신비로운 세계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 세계에는 나무들, , , ,  짐승들, 그리고 아버지의 서재 등이  속해 있었다. 모든 것이 경이로웠다. 하지만 나는 점점 그 세계로부터 멀어져가면서 어렴풋이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64)

모든 이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 차츰 기억이 어렴풋이 되살아났다. 그 수치스러운 사건 전체를 조정해온 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66)

자연은 내게 경이로 가득 찬 대상으로 보였고, 나는 거기에 깊이 빠져들고 싶었다. 돌 하나, 식물 하나, 그 모든 것이 생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고 형용할 수 없는 듯이 여겨졌다. (67)

너는 누구냐?

한순간 갑자기, 지금 여기에 가 있다는 의식과 함께, 내가 짙은 구름 속에서 막 빠져나온 듯한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안개 벽 같은 것이 나의 등뒤에 있었고, 그 벽 너머에는 아직 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순간 나에게 내가생겨났다. 이전에도 내가 존재하고는 있었으나 모든 이이 단지 우연히 일어났을 분이다. 그러나 지금은 가 이제 여기 있고, 내가 이제는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에는 무든 일을 할 때 내가 옆으로 밀려나 있었으나 지금은 가 스스로 하고자 한다.(68)

그때까지 얻은 별개의 인상들이 하나의 통일된 이미지로 완성되었다. 즉 나는 두 시대에 살고 있고 서로 다른 두개의 인격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결과에 혼란을 느끼고 깊이 숙고하게 되었다.(72)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하라는 것인가, 아니면 하지 말라는 것인가? 나는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도 지금 당장 나와 함께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지 알아내야만 한다.’(78)

자연과 사원

아버지가 하는 말들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자신은 전혀 믿지 못하거나 소문으로만 들어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할 때처럼 진부하고 공허하게 들렸다.(86)

내가 비난을 받는 모든  것은 나를 화나게 했으나, 나 자신을 돌아볼 때 그 비난들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나는 나자신에 대해 아주 조금 알고 있었고, 그 조금 알고 있는 것마저 모순되었기 때문에 선한 양심을 가지고는 어떤 비난도 거부할 수 없었다.(88)

사실 높은 산, , 호수, 아름다운 나무, 꽃 그리고 동물 들이 인간들보다 하느님의 속성을 훨씬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는 듯이 보였다.(90)

거기(교회)애서 나는 아무도, 심지어 목사까지도 그 비밀(하나님에 대한)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91)

두 인격의 어머니

어머니는 나에게 무척 좋은 분이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넓고 깊고 따뜻한 마음을 지녔고 무척 친절했으며 매우 살이 쪘다. (97)

그녀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온갖 인습적이고 전통적인 견해를 가졌으나, 그녀의 무의식적인 인격이 갑자기 돌출하곤 했다. 그 인격은 예상 외로 강력했으며,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지닌 어둡고 거대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조금도 의심이 없었다. 나는 그 어머니 역시 두 개의 인격으로 이루어졌다고 확신했다. 하나는 악의없고 인간적이었으며, 거기에 반해 또 하나는 으스스했다. 그것은 가끔씩만 나타났으나 그럴 때마다 예기치 못하고 있다가 깜짝 놀라곤 했다. 그럴 때 어머니는 독백을 하듯 말했으나 내게는 유용한 말들이었고, 보통 내 가장 깊은 곳을 찔렀기 때문에 나는 할말으 잃곤 했다.(98)

고태적이고 잔인했다. 진리와 자연과도 같이 잔인했다.(100)

내가 전혀 알 수 없는 어떤 일을 갑자기 알게 되는 일이 내 생애게 자주 일어났다. 그 인식은 마치 나 자신의 착상인 것처럼 나에게 다가왔다. 그것은 어머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몰랐으나, 그 목소리는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것 같았고 그 상황에 들어맞는 내용을 정확하게 말했다.(102)

성찬식의 실패? 그것은 나의 실패였을까? 나는 매우 진지하게 성찬식을 준비하고 은총과 계시를 체험하기를 기대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느님은 그 자리에 없었다. , 세상에!(110)

악의 기원

첫째로, 나에게는 자아라는 요소에 서로 모순되는 두 개의 측면, 즉 제1의 인격과 제2의 인격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형태는 저런 형태는 자아는 뭔가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113)

나는 생각했다. ‘드디어 여기에 악마를 진지하게 다루고, 완전한 세계를 창조하려는 하느님의 의도를 방해하는 힘을 가진 적대자와 피로 계약을 맺기까지 한 자가 있구나.’(117)

나로서는 파우스트가 그렇게 한쪽으로만 치우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좀더 현명하고 또한 더욱 도덕적이어야만 했다. 자신의 영혼을 그토록 경박하게 도박에 거는 것이 나로서는 유치하게 보였다. 파우스트는 분명히 허풍쟁이였다!(17)]

칸트와 쇼펜하우어를 읽다

나의 특이성은 차츰 불쾌하고 으스스하기까지 한 느낌을 야기하기 시작했다.(125)

동물들은 사랑스럽고 충직하며 변덕스럽지 않고 믿을 만하였으나, 인간들은 나에게 이전보다 훨씬 더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130)

그런데 나의 탐구가 가져다준 큰 소득은 쇼펜하우어였다. 그는 눈에 보이도록 여실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고통, 그리고 혼란과 고난과 악에 대해 처음으로 이야기한 사람이었다.(133)

나는 쇼펜하우어의 음울한 세계상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했으나 그의 문제해결 방법까지는 찬성하지 않았다.(134)

신의 세계라는 표현이 어떤 사람에게는 감상적으로 들리겠지만 나에게는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모든 초인간적인 것들, 눈부신 빛, 심연의 어두움, 시공의 무한성이 지닌 차가운 무감정, 비합리적인 우연세계의 으스스한 괴기성 등이 신의 세계에 속했다. ‘은 나에게는 모든 것이었지, 단지 교화적인 것만은 아니었다.(138)

자연과학 vs 신의 세계

여행과 환상, 매력적인 모험의 세계로!

나는 다양한 작은 술잔에 너무나 고무되어 예기치 않았던, 전혀 새로운 의식상태로 옮겨지는 것을 느꼈다. 그곳에는 더 이상 안과 밖에 따로 없고 나와 타인, 1의 인격과 제2의 인격, 조심스러움과 소심함도 없었다. 땅과 하늘, 세계와 그 안에서 기고날고’, 돌고, 올라가고, 떨어지는 모든 것이 하나가 되었다. 나는 부끄러워하면서도 기분 좋게 의기양양하게 술에 취했다. 그것은 마치 환희에 넘치는 깊은 생각의 바다에 빠진 것 같기도 했다. 격렬한 파도의 너울거림 때문에 나는 눈과 손과 발로써 모든 단단한  대상을 부여잡고 출렁이는 거리에서, 기울어지는 집과 나무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만 했다.(148)

나는 생각했다. ‘그래, 이것이야말로 세계다. 나의 세계, 고유한 세계요, 그 비밀이다. 이곳에는 선생도, 학교도, 해답 없는 문제도 없다. 사람들이 질문을 하지 않고도 있는 곳이다.’(149)

여기 하나의 운명이 닥쳐올 가능성이 있는 것인가?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이 단순한 우연이란 말인가? 시골 처녀와 운명적으로 만나는 일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152)

정신이란 물론 내게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였으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아주 희석된 공기와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고 여겼다.(156)

 

[아름다운 시간들]

나는 궁핍한 시절을 굳이 그리워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시절에는 하찮은 물건까지도 아끼는 법을 배우게 된다. 나는 언젠가 여송연 한 통을 선물로 받은 일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나는 왕자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161)

파우스트와 요한복음

1의 인격의 눈으로 바라본 나라는 인간은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 보통수준의 재능을 갖춘 청년으로, 허황된  야심과 세련되지 못한 거친 기질, 모호한 태도들을 지니고 있었다. 즉시 천진난만할 정도로 흥분하는가 하면, 또 금방 변덕스럽게 유치한 실망에 빠지기도 했다. 깊은 내적인 본질로는 세상에 등을 돌린 반계몽주의자였다.(167)

2의 인격은 제2의 인격을 까다롭고 배은망덕한 도덕적 과제, 종결되어야 할 일종의 숙제로 여겼다. 이런 과제는 일련의 결점으로 인하여 부담이 가중되었다. 그 결점이란 때때로 부리는 게으름, 의기소침, 침울, 아무도 가치를 두지 않는 이념이나 사물들에 대한 어리석은 열광, 혼자  착각하는 우정, 좁은 마음, 편견, 우둔함(수학!), 타인에 대한 이해부족, 세계관에 대한 모호성과 혼란, 기독교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독교인이 아닌 것도 아닌 이중성 등이었다. (167)

어린아이는 어른들의 말보다는 주위 분위기의 헤아릴 수 없는 미묘한 것들에 대해 훨씬 더 잘 반응한다. 어린아이는 그 분위기에 무의식적으로 적응한다. 즉 어린아이 마음 가운데 보상적인 성격의 상호작용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174)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만의 개인적인 삶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수세기에 걸친 집단정신의 고도로 수준 높은 대변자요 희생물이요 후원자인 셈이다.(175)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사실들이 있다. 그것이 무의식적인 것일수록 그 영향력은 더욱 크다.(175)

밖으로 나가지 말라. 진리는 내적 인간에 깃들어 있다!”

아버지의 죽음과 궁핍한 시절

모든 경험 중에서 가장 명백한 하느님에 대한 체험을 아버지가 갖지 않았다는 것은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178)

너를 위해서라는 말은 나에게 몹시 아프게 다가왔다. 나는 낡은 시대의 한 조각이 돌이킬 수 없이 끝나버린 것을 느꼈다. 다른 한편, 그 무렵 남자다움과 해방감이 조금씩 내 안에서 싹텄다.(185)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파우스트

그 모든 것은 적절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정원을 가꾸어야 한다.” 그 정원이란 자연과학을 의미하는 것이었다.(192)

도시의 세계는 학문적인 지식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으로는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196)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파우스트였다. 이제 나의 제2의 인격은 차라투스트였다. 물론 이것은 두더지의 흙두둑을 몽블랑산에 비교하는 격이긴 하지 말이다. 그런데 차라투스트라는 의심의 여지 없이 병적이었다. 그렇다면 나의 제2의 인격도 병적이란 말인가?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나를 공포감에 젖게 했다.(199)

나는 언제 어디선가 다이아몬드계곡을 지나온 것도 같은 데도 내가 가지고 온 광석표본이 자갈돌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확신시킬 수가 없었다. 그것을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나 자신까지도 확신할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202)

정신의학에서 길을 찾다.

어느 날 나는 내 공부방에 앉아 교과서들을 공부하고 있었다.(1898년 여름방학의 일이다). 옆방 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그 방에서 어머니가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그 방은 호두나로 만든 둥근 식탁이 놓은 우리집 식당이었다. ….. 그때 갑자기 권총이 발사된 듯 폭음이 들렸다. …… 어머니가 말을 더듬으며 식탁을 쳐다보았다. …… 식탁판이 한가운데를 지나서까지 갈라져 있었다. 갈라진 데는 접한한 부분도 아니고 완전한 통나무판이었다. ….. 나는 따지고 보면 기묘한 우연들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2의 인격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래, 뭔가 뜻이 있을 거야.” 나는 내키지 않게 깊은 인상을 받았고, 거기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화가 나기도 했다.(205)

⇒ 2010 3월 즈음, 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관에서 나의 스승님이 강연을 했다. 강연에 앞서 그는 이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청중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만난 지금 이순간이 융의 집에 통나무식탁이 갈라지는 듯한 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 간에, 그리고 여러분 안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러한 변화의 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2008년 그의 책을 처음 읽었고, 2010년 그의 강연에서 이 에피소드를 들었고 2013년엔 이제는 세상에 없는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가 내앞에서 이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던 순간은 내게 융의 통나무식탁이 부서지는 순간과도 같은 것이었다.

정신 의학 교과서들이 다소 주관적인 특색을 띠는 것은 아마도 그 분야의 특이성과 학문 형성의 불완전성에 기인하고 있을 것이다.” 몇 줄 더 나가자 저자는 정신병을 인격의 병이라 일컫고 있었다. 그깨 갑자기 가슴이 격렬하게 두근거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심호흡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210)

나는 아무도 나를 따라오려고도 하지 않고 따라올 수도 없는 옆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분명히 다시 한번 깨달았다.(211)

나는 나의 숙명을 정말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을 만큼, 그 정도로 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도 그럴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자서전이 흔히 저지르기 쉬운 잘못을 범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떻게 되었어야만 했느냐에 관한 환상을 엮어나간다든지 생애를 위한 변명을 쓰는 그런 잘못 말이다. 결국 인간이란 스스로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좋든 나쁘든 다른 사람의 판결에 맡겨진 하나의 사건인 셈이다.(217)

 

[상처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

환자들

무엇이 정신병자의 내명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프로이트는 나에게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히스테리와 꿈의 심리학에 대한 기본적인 탐구를 그가 했기 때문이다.(222)

(많은 환자들을 만난) 그후 난정신병 환자의 고통을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그들의 내적 체험의 의미있는 현상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247)

꿈의 분석

나는 환자들을 될 수 있는 한 모두 개별적으로 다루는 편이다. 문제 혈은 항상 개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원칙은 다만 최소한으로 설정되어야 한다.(248)

나는 의도적으로 체계적인 것을 멀리하고 있다. 나에게는 각 개인에 대한 개별적인 이해만이 있을 뿐이다.(249)

결정적인 것은 내가 인간으로서 또 다른 한 인간과 대면하고 있다는 점이다.(249)

꿈은 의식적인 태도에 대한 보상 바로 그것이다.(253)

집단무의식의 원형에 대하여

모든 질투의 핵심은 사랑의 결여에 있다.(260)

무의식에서 시간과 공간을 상대화함으로써  나는 전혀 다른 곳에서 실제로 일어난 어떤 일을 지각할 수 있었다. 집단무의식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으로, 고대에서 만물의 공감이라고 불렀던 것에 기초다. 이 사례에서는 나의 무의식이 내 환자의 상태를 알고 있었던 셈이다. 나는 이미 그날 저녁 내내 보통때의 기분하고는 유난히 달리, 이상하게도 마음이 어수선하고 신경이 예민했던 것이다.(261)

우리 시대에 이와 같이 마음의  분열로 희생된 자들은 단지 스스로 택한 신경증 환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표면적인 증상은 자아와 무의식 사이에 벌어진 틈이 메워지는 순간 사라진다.(270)

나의 생애에서 가장 아름답고 큰 성과가 있었던 대화들은 이름없는 사람들과의 대화였다.(272)

 

[프로이트와의 만남]

그 세계는 가장 깊은 의미에서 나 자신의 세계였으며 프로이트의 세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나의 전존재는 진부한 생활에 의미를 부여해줄 수도 있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그 무엇을 찾고 있었다. (273)

이론적인 불화

(프로이트의 이론 중) 나에게 흥미를 일으켰던 것은 신경증심리학에서 유래된 억압기제라는 개념을 꿈의 분야에 적용한 점이었다.(276)

(프로이트)는 억압의 원인을 성적 외상(Trauma)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나로서는 만족스럽지 않았다.(276)

프로이트가 말하는 것이 진리라면 나는 그와 함께할 것입니다.  연구를 제한하고 진리를 숨기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나는 경력 따위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겠습니다.”(278)

(프로이트와의 대화에서) 무엇보다도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보루교리같은 단어들이었다. 왜냐하면 교리, 즉 논의할 필요도 없고 신앙고백은 오직 의심을 단번에 눌러버리려고 할 때  사람들이 내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학적 판단과는 더 이상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개인적인 권력충동과 관계가 있을 뿐이다.(281)

한 가지 사실은 분명했다. 항상 비종교성을 강조해온 프로이트가 일종의 교리를 준비했다는 것이다.(282)

성욕은 역시 프로이트에게 신성한 힘이었으나 그의 용어와 이론에서는 성욕을 예외없이 생물학적 기능으로 표현해놓았다. 결국 그는 성용 역시 내면에서 보면 영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고자 했다.(284)

마음의 진동추는 바른 것과 그른 것 사이가 아니라 의미와 무의미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287)

모든 것은 지나간다. 어제의 진리가 오늘의 허위가 되며, 그저께 잘못된 결론으로 간주되던 것이 내일은 하나의 계시가 될 수도 있다……. 덧없을 정도로 작은 의식이 어떤 것을 인식해주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는 아직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288)

마치 나의 횡경막이 철판으로 되어 있고  그것이 벌겋게 뜨거워져 한껏 달아오른 둥근 천장처럼 변해가는 느낌이었다.(289)

리비도의 변환과 상징

하지만 나의 권위를 위태롭게 할 수는 없어!” 그 순간 그는 권위를 상실하고 말았다……. 프로이트는 개인적인 권위를 진리보다 더 내세웠다.(295)

프로이트가 이론과 방법을 동일시하고 그것들을 교리화하려는 의도를 밝혔을 때 나는 더 이상 그와 협력할 수 없었다. 나로서는 물러서는 길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309)

대개 근친상간은 고도의 종교적인 내용을 나타낸다. 따라서 그것은 거의 모든 창조신화와 그외 수많은 신화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문자주의 해석에 집착하여 상징으로서의 근친상간의 영적인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프로이트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309)

(프로이트)가 우리 문화에 준 충격은 무의식으로 통하는 길을 발견한 것이었다.(311)

 

[내 안의 여인 아니마]

신화와 환상

꿈은 우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할 사실이다.(316)

그런데 오늘날 인간은 어떤 신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너 자신은 그 신화 속에서 살고 있는가? 그럼 우리는 이제 아무런 신화도 가지고 있지 않단 말인가? 그러면 무엇이 너의 신화인가? 너는 어떤 신화 속에서 살고 있는가? (316~317)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나 자신의 환상에 주의를 기울이며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다.(318)

끔찍한 재앙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엄청난 황톳빛 물결과 물에 떠내려가는 문명의 파편들, 헤아릴 수 없는 수천의 주검을 보았다. 어느새 바다는 피바다로 변했다. 이 환상은 한 시간 가까이 지속되었다. 나는 혼란스럽고 역겨워지면서 나 자신의 연약함에 부끄러움을 느꼈다.(323)

8 1일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이제 나의 과제는 분명해졌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나 자신의 체험이 집단의 체험과 어느 정도까지 연관이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 힘써야만 했다.(324)

나는 낯선 세계 속에 속수무책으로 서 있었다. 모든 것이 내게는 어렵고 이해하기 불가능한 듯이 보였다. 나는 줄곧 팽팽한 긴장 속에 살았다. 마치 거대한 돌이 내게로 굴러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자주 받았다.(325)

나는 무의식이 스스로 선택한 양식으로 모든 것을 받아쓰는 수밖에 없었다. 자주 나는 그것을 귀로 듣는 것 같았고, 나의 혀가 말을 꾸미는 것처럼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스스로 중얼거리는  말을 나 자신이 듣는 경우도 있었다. 의식의 문턱 아래서 모든 것이 펄펄 살아 있었다.(326)

필레몬과의 대화

이 환상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형상이 무의식에서 떠올랐다. 그것은 엘리야의 모습에서 발전한 것이었다. 나는 그를 필레몬이라 불렀다. 필레몬은 이교도로 그노시스파의 색조를 띤 이집트적 헬레니즘의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335)

필레몬과 또 다른 환상의 형상들을 통해 나는 인간의 마음 속에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지는,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지닌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335)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 있는 사람을 구루로 삼지만, 늘 영혼을 구루로 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338)

나중에 필레몬은 내가 카(Ka)라고 부른 다른 형상이 출현함에 따라  상대화되었다…… 카의 표정에는 영기가 어려 있었다. 메피스토텔레스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필레몬은 불구의 발을 가졌지만 날개 달린 혼이고, 반면에 카는 일종의 흙이나 금속에 깃든 혼을 나타낸다. 필레몬은 정신적 측면, 이해력이지만 카는 이와 반대로 그리스 연금술의 안트로파리온(일종의 꼬마 난쟁이 요술사) 같은 자연혼이다. 이 사실을 당시에는 나도 잘 몰랐다. 카는 모든 것을 실재화하는 바로 그것이지만, 물총새의 혼, 즉 이해력을 덮어버리거나 아름다움, 영원한 반조로 대치한다.(338~339)

매일 저녁 나는 글쓰는 일에 매달렸다. 내가 아니마에게 편지를 쓰지 않으면 그녀는 나이 환상을 파악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적어놓은 것은 아니마가 왜곡할 수 없을 것이고, 그걸 가지고 책략을 쓰지도 못할 것이었다.(341)

무의식의 대변자인 아니마는 그 변덕스러운 이중성으로 한 남자를 형편없이 파멸시킬 수도 있다. 결정적인 것은 결국 언제나 의식이다. 의식이 무의식의 표현을 이해하고 거기에 대해 자기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런데 아니마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무의식의  이미지를 의식에 전달해 주는 것이  바로 아니마다.(343)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라. 그러면 받으리라.”(341)

죽은 자를 향한 일곱가지 설법

나는 그 많은 환상이 든든한 토대를 필요로 한다는 것과 내가 우선 인간적인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현실이란 나에게 과학적인 이해를 의미했다.(344)

삶을 대체할 만한 완전한 언어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언어가 삶을 대체하려고 시도한다면 언어뿐 아니라 삶도 망가지고 말 것이다.(345)

외람되게도 저 문을 열어젖혀라. 사람마다 통과하기를 주저하는 저 문을……”(345)

니체는 내면의 사상세계 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실의 발판을 잃어버렸다. 사실 그가 자신의 내면세계를 소유했다기보다 오히려 내면세계가 그를 소유한 셈이었다. 그는 뿌리가 봅혀 땅 위를 떠돌아다녔다. 그리하여 그는 과장하는 습성이 생기고 비현실성에 빠졌다.(346)

우리가 내적 인격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말하는지 주의를 기울인다면 마음의 고통은 사라진다.(353)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야 비로소 나는 미지의 어둠으로부터 차츰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두 가지 사건이 계기가 되어 어두운 대기가 밝아졌다. 첫째는 나의 환상이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나를 설득하기로 마음먹은 어느 부인과 절교한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건은 내가 만다라 그림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355)

만다라가 참으로 무슨 의미인지 나는 차츰 깨달아갔다. 그것은 형성, 변환, 영원한 마음의 영원한 재창조였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즉 인격의 전체성이었다.(356)

그 나무는 햇빛을 받고 서 있으면서 동시에 빛의 원천인 것 같았다.(359)

나의 내적 이미지를 추척하던 그 몇 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 기간에 온갖 본질적인 것이 정해졌다. 그무렵에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중에 세부적인 것은 단지 보충하거나 명료하게 하기만 하면 되었다. 내 후기의 작업은 모두 그 기간에 무의식에서 솟아나와 나를 휩쓸었던 자료들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는 데 있었다. 그것은 필생의 작업을 위한 원재료였다.(362)

 

[연금술을 발견하다]

연금술을 배워서 알게  되고 나서야 비로소 무의식이 하나의 과정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리고 무의식 내용에 대한 자아의 관계에 의해 정신 변환과 발달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

나는 인생 후반기가 시작되면서 무의식과의 대면을 시도했다. 무의식에 관한 나의 작업은 오랜 시간이 걸렸다. 20년쯤 지나서야 비로소 나는 내 환상의 내용을 약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365)

이를 나의 내일에 맞춰 풀어 쓴다면…… “나는 인생 중반기가 시작되면서 책과 글을 가까이 하기 시작했다. 책을 능숙하게 읽고 글을 자연스럽게 쓰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20년쯤 지나서야 비로소 대중이 인정하는 작가의 위치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연금술은 하나의 중세 자연철학으로서 한편으로는 과거 즉 그노시스주의에,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 즉 현대 무의식의 심리학에 다리는 걸치고 있었다. (366)

연금술 : 기원전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작하여 이슬람 세계에서 체계화되어 중세(中世) 유럽에 퍼진 주술적(呪術的) 성격을 띤 일종의 자연학을 말하는데 비금속(卑金屬)을 인공적 수단으로 귀금속으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서양에서 형상을 실체화하는 연금술 이론은 A.L.라부아지에의 실험적 원소개념이 확립되기까지는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네이버 지식백과] 연금술 [alchemy, 鍊金術] (두산백과)

그노시스적인  야훼와 창조주 하느님이라는 주제는 원초적 아버지와 음산한 초자아에 관한 프로이트의 신화속에서 새롭게 재연되었다. 프로이트의 신화에서 야훼는  실망과 환각과 고통의 세계를 만들어낸 데몬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물질의 신비에 몰두하던 연금술사들에게서 이미 나타난 물질주의적 경향은 프로이트로 하여금 그노시스의 보다 넓은 본질적 측면, 즉 보다 높은 신으로서의 영혼의 원초상을 보지 못하게 했다.(367)

그노시스의 전통에 따르면 인류에게 크라터(섞는 그릇), 즉 정신적 변환의 용기를 부여한 것은 바로 그 보다 높은 신이었다. 크라터는 여성의 원리로서 프로이트의 가부장적 세계에서는 자리잡을 데가 없었다. (367)

프로이트의 성이론은 양성이 아닌 남성만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 한계라는 비판을 받아왔고, 페미니즘 진영은 프로이트 본인이 남성이기 때문에 남성을 주로 여성을 종으로 놓아 남근선망;’같은 잘못된 추측을 내놓았다고 비판한다. 이는 당시의 남성중심주의를 반영한 시각이기도 했다.

연금술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상징의 하나는 물질의 변환이 완성되는 그릇이었다. 나의 심리학적 발견의 핵심도 이와 같은 내면의 변환과정, 즉 개성화(individuation)였다.(367)

괴테의 비밀은 그가 수세기 동안 지속된 원형적 변환과정에 사료잡혀 있었다는 사실이다(373).

나 자신의 무의식 이미지에 몰두하게 된 것이 그 출발점이 되었다. 그 시기는 1913~1917년이었는데, 그 후로는 환상의 흐름이 차츰 스러져갔다.(374)

나는 리비도를 물리적 에너지의 정신적인 유사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것을 거의 양적인 개념이라고 여겼고 따라서 리비도에 관한 질적인 본질 규정을 모두 배격했다.(376)

나는 인간의 본능을 에너지과정의 여러 표현으로 여기며, 열이나 빛들과 유사한 힘으로 본다. 현대 물리학자가 모든 힘을 이를 테면 열에서만 끌어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심리학자 역시 모든 본능을 권력이나 성의 개념 따위로 분류할 수 없다.(377)

성배전설과 동물상징

의학적 정신치료의 주된 문제는 전이다.(383)

그 꿈에서 가장 중요한 이미지는 유령들의 응접실과 물고기 실험실이었다. 전자는 융합 또는 전이를 좀 별나게 표현하고 있고, 후자는 그 자신이 물고기인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몰두를 보였고 있다. 둘 다 내가 10년 이상 줄기차게 탐구해온 내용이었다. …. 그 과제는 무의식에 잠재된 채 미래의 몫으로 남아 있었다. 나는 철학적연금술의 주요관심사인 융합의 문제를 아직 치열하게 다루지 못했고, 기독교인들의 중심인물(예수)이 내게 던진 물음에도 답하지 못했다.(387)

인간은 신적인 소명 앞에서도 결행을 유보하는 법이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의 자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자유를 위협하는 자를 위협할 수 없다면 그 자유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394)

<아이온>에서 다루어진 그리스도 문제는 결국 안트로포스, 즉 위대한 인물의 출현현상, 심리학 용어로 말하면 자기현상이 각 개인의 체험 속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문제로 귀착되었다.(396)

나의 저술들은 내 생애의 정류장들이라 여겨질 만하다. 그것들은 나의 내적 발달의 표현이다. 무의식 내용을 탐구하는 일은 사람을 만들고 그에게 변환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나이 생애는  내가 행한 것, 내 정신의 작업이다. 이것들은 하나하나 떼어놓을 수가 없다.(397)

 

[, 내 가슴에 두 영혼이 살고 있다]

죽은 자들과 소통하는 곳

처음부터 탑은 나에게 성숙의 장소였다. , 그 안에서 내가 현재의 나, 과거의 나, 미래의 나로 다시 존재할 수 있는 자궁, 모성적 이미지의 장소였다.

볼링겐에서 나는 나에게 어울리는 나 자신만의 고유한 본체로 존재한다…… 그는  시간 밖에 존재하며 모성적 무의식의 아들이다. 나의 환상 속에서  태고는 필레몬의 형상을 취했고 볼링겐에서도  활동하고 있다.(405)

시간은 어린이다. 이런이처럼 놀며 장기를둔다. 어린이의 왕국. 이것은 우주의 캄캄한 곳을 두루 다니며 별처럼 깊은 곳에서 빛나는 텔레스포로스다. 그는 태양의 문에 이르는 길, 꿈의 나라에 이르는 길을 인도한다. (407)

깬다는 것은 현실을 자각한다는 뜻이다. 그 꿈은 현실과 같은 상황을 연출하여 일종의 깨어 있는 상태를 만들어놓는다. 이런 종류의 꿈은 일반적인 꿈에 반해서 반복에 의해 강조된 뚜렷한 현실감각을 꿈꾸는 자에게 전하려는 무의식의 경향을 드러낸다.(412)

우리가 내적감각으로 지각하거나 예감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외부의 현실과 자주 상응하게 되는 것을 동시성현상이라고 한다.(413)

카르마

내가 석판에 족보를 새길 때 조상과 이어져 있는 숙명적인 연대성이 뚜렷이 인식되었다. 나는  부모나 조부모, 그리고 더 먼 조상들이 완성하지 못하거나 해결하지 못한 채 남겨놓은 일들과 문제들의 영향을 주고 받고 있음을 아주 강하게 느낀다. 부모로부터 아이들에게 넘겨진 비개인적 카르마(업보)가 가족에게 존재한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417)

파우스트가 오만불손과 자기도취에 빠져서 필레몬과 바우키스를 죽였을 때 나는 마치 나 자신이 두 늙은이를 죽이는 일에 끼어들기라도 한 것 처럼 죄책감을 느꼈다. 이런 특이한 상념에 나는 깜짝 놀랐다…… 훗날 새로운 소문을 알게 되었다. , 나의 조부 융이 괴테의 사생아였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환생을 믿지는 않았지만 인도 사람들이 카르마라고 부르는 개념은 본능적으로 신뢰하게 되었다.

칼 융의 경험(, 무의식 등)에 근거한 이론이 어떤 가설에 대한 결론에 도달하는 방식을 보면 상당한 비약이 있다. 파우스트를 보며 죄의식을 느끼는 것을 조부와 괴테와의 혈연관계에 대한 소문과 연결시키는 것도 그렇고, 이를 통해 카르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신뢰하게 되었다는 것도 사실 납득하기 어렵다. 자연과학자이자 심리학자이긴 하지만 종교적 색채가 강하기 때문에 가능한 논리 아닌가 생각된다. 나 또한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으며 죄책감을 느끼지만, 이를 나의 혈통이나 내 윗대의 조상이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차라리 집단무의식으로 인한 죄책감이라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사람들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미래의 약속에 의지하여 살고 있으며, 현재의 빛 속에서 살지 않고 미래의 어둠 속에서 살고 있다. 사람들은 그 어둠 속에서 적절한 때에 해가 솟아오르길 기대하고 있다.(421)

이 책에서 나는 나 자신의 주관적 세계관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423)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이 너무 뚜렷다면 우리는 오늘의 시간에 제약을 받아 우리 조상들의 혼이 오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는지, 다시 말해 무의식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감지할 수가 없다.(423)

 

[여행]

북아프리카, 순진한 인류의 청소년기로!

내 통역은 동성애가 일반적으로 많고 또한  그것이 당연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나에게 확인시켜주었다 그러면서 곧바로 나에게 거기에  해당하는 제의를 해왔다…… 나는 말할 수 없이 순진한 인류의 청소년기로 수세기를  거슬러 올라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429)

우리가 사하라로 들어갈수록 나는 시간이 점점 느려지는 느낌을 받았고 ,심지어 시간이 거꾸로 가도록 위협당하고 있는 듯했다.(431)

지난 변경연 하계연수를 몽골로 갔다. 몽골 흡수골이 한눈에 보이는 언덕위에서 나는 잠시 눈을 감아보았다. 그 순간 조금 전까지 불던 바람도 잠시 멈추었다. 흡수골은 고요해졌고 귓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 여행사 사장님의 말처럼 공중부양을 한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멈춰있는 듯 했고, 시간이 멈추길 바랬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격정으로 살고 있었다. 다시 말애 그 격정에 의해 그들의 생이영위되고 있다……. 아무튼 우리는 어느 정도는 의지와 숙고된 의도에 따라 자의적으로 행할 수 있다. 오히려 우리(유럽인)에게 필요한 것은 삶의 강렬함이다..(433)

발전에 대한 맹신은 그것이 우리의 의식을 과거로부터 멀리 떼어놓을수록 더욱더 유치한 미래의 꿈에 매달릴 위험에 처하게 된다.(437)

하지만 위험이 있는 곳에 또한 구원이 싹튼다.’(439)

살아 있는 정신구조에서는 단순히 기계적인 방식으로 일어나는 일은 없다. 모든 것은 전체적으로 관리되며 전체와의 관계성 속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특정한 목적과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의식은 전체에 대한조망이 없으므로 대개 이러만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사실확인으로 그쳐야 하며, ‘자기의 그림자와의 충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회답은 앞으로 진전되는 연구에 맡겨두어야 할 것이다. (440)

푸에블로 인디언, 자기 자리에 있는 사람들

다른 사람으로 인하여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모든 것은 나 자신에 대해 인식할 수 있도록 해준다.(441)

옥비에 비아노가 말했다. “우리는 그들(백인들)이 넋이 나간 사람이라고 확신하오.”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그가 대답했다. “그들은 머리로 생각한 것을 말하오.”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당신은 어디서 생각하오?” “우리는 여기서 생각하오.”그는 자신의 심장을 가리키며 대답했다.(443)

누구도 태양이 주는 엄청난 인상을 피할 수는 없지만, 이 성숙하고 위엄에 찬 남자들이 태양에 관해 말할 때 숨길 수 없는 감동에 사로잡히는 것을 본다는 것은 나로서는 깊은 울림을 안겨주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나는 인디언 남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젓한 자기 확신감과 위험이 어디서 나오는지 뚜렷이 알게 되었다. 그는 태양의 아들로 그의 생명을 우주론적으로 깊은 의미가 있다. (449~450)

비록 무의식적인 암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신과 우리라는 이러한 동등한 관계가 인디언들의 저 부러워할 만한 의젓함의 근거가 되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한 인간은 문자 그대로, 참으로 자기 자리에 있는 사람인 것이다. (452)

케냐와 우간다, 아프리카의 고독을 겪다

조물주의 손에서 나온 것은 모두 좋다. – 루소 (453)

곧이어 우리는 적도의 밤으로 빠져들어갔다.(454)

연금술에서는 자연이 불완전하게 둔 것을 예술이 완전하게 만든다라고 말한다. …… 인간은 창조의 완성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서 세계를 비로소 객관적 실재가 되게 하는 두 번째 세계창조자인 것이다.(457)

초콜릿빛 갈색 피부의 그려들은 날씬한 몸매에 걸어가는 모습도 우아하고 느긋하여 아주 매력적이었다.(466)

거대한 밤이 오면, 모든 것은 빛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그리움과 깊은 우수의 음조를 띠게 된다. 이것은 원시인의 눈빛에 들어 있고 또한 짐승의 눈에서도 볼 수 있다. 짐승의 눈에는 슬픔이 배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짐승의 혼인지 혹은 저 태초의 존재가 표현하는 간절한 마음인지 알지 못한다.(478)

이것이 아프리카의 분위기이며 그곳의 고독에 대한 체험이다. 그것은 태초의 어둠이며 모성적인 비밀이다. 그러므로 아침마다 태양의 탄생은 흑인들을 압도하는 경험이 된다. 빛이 되는 순간, 그것은 신이다. 그 순간이 구원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순간의 원초적 체험이다.(479)

아프리카 내륙에서 이집트로 향한 여행은 나에게 마치 빛의 탄생의 드라마와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나 자신과 그리고 나의 심리학과 아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었다. 그것이 나에게 계시되었지만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고 느껴졌다. (486)

나는 아프리카가 내게 무엇을 가져올 것인지 미리 알고 있지는 않았다. ….. .나는 아프리카가 나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알고 싶었고, 그리고 그것을 체험했다.(486)

인도, 이방의 문화에서 유럽의 뿌리로!

오직 나 자신으로 살아야 하고, 나의 내면이 말하는것이나 본성이 내게 가져다주는 것으로 살아야 한다.(489)

나는 인간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지도  않으며 나로부터도 자연으로부터도 그러고싶지 않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내게는 형언할 수 없는 경이이기 때문이다.(491)

나에게는 해방이라는 것이 없다. 내가 소유하지 않고 내가 행하거나 체험하지 않은 그 어떤 것들로부터도 나를 해방시킬 수 없다. 진정한 해방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했을 때,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을 헌신하여 철저히 참여했을 때 비로소 가능한 법이다.(491)

자유롭다는 것은 모든 것을 벗어나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품고도 걸림이 없는 것을 말한다.
-
자유롭다는 것은 (허허당) -

나는 부처의 삶을 개인의 인생 전체를 통해 스스로를 주장한 자기의 실현으로 이해했다. 부처에게 자기는 모든 신을 넘어서, 특히 인간실존과 세계의 정수를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로서 존재하는 측면뿐 아닐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그의 인식도 함께 포괄하고 있다. 부처는 인간의식의 우주진화론적인 위엄을 파악하고 이해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그는 만약 누군가가 의식을 빛을 꺼버린다면 세계는 ()’로 빠져들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쇼펜하우어의 불후의 공적인 이 사실을 다시금 인식했다는 데 있다. (495)

기독교에서는 더 많이 고통을 겪는 데 주안점을 두고, 불교에서는 더 많이 깨닫고 행하는 방향으로 나간다.(497)

인도는 어떤 자취도 없이 나를 스쳐지나간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영원에서 다른 영원으로 옮겨가는 자취들을 나에게 남겨놓았다.(503)

라벤나와 로마, 보이는 환상과 보이지 않는 실재

거기서 무엇보다도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실내에 가득한 부드러운 푸른 빛이었다. 나는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고 빛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빛의 근원이 없다는 놀라운 사실에 대해서도 생각이 전혀 미치지 않았다.(504)

남자의 아니마는 현저히 역사적인 성격을 띤다. 아니마는 무의식의 인격화로 역사와 선사에 깊이 물들어 있다. 아니마는 과거의 것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남성이 그 선사에 곤해 알아야 할 것들을 남성 속에서 대신 보충해주고 있다. 남성 속에 아직도 살아 있는, 이미 있었던 모든  삶이 아니마다.(507)

사람들이 이미 있던 무의식 내용을 의식에 통합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은, 아마도 말로 표현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단지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508)

라벤나 침례당에서의 체험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후로는  나는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처럼,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509)

 

[환상들]

생의 한계점에 이르러

나는 생의 한계점에 이르렀고, 내가 꿈속에 있었는지 황홀경에 있었는지 알 수 없다. (513)

나는 아주 높은 우주공간에 있는 듯이 여겨졌다. 저 멀리 아래쪽에 지구가 장려한 푸른빛에 싸여 떠올라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짙푸른 대륙을 보았다. 내 발밑 저 아래에 실론이 있었고 앞쪽에는 인도대륙이 놓여 있었다. 시야에 지구 전체가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것이 둥근 공 모양이라는 것은 분명히 인식할 수 있었다.(514)

나는 말하지만 객관적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 나는  내가  살아온 모든 것이었다…… 모든 것이 자니간 듯이 여겨졌다. 하나의  기정사실만 남았다. 이전의 일들과 다시 어떤 연관도 맺지 않고 말이다.  어떤 것이 떨어져나갔다거나 빼았겼다는 아쉬움은 이제 없었다. 그와 반대로 나는  나라고 하는 모든 것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오직 그것만을 가지고 있었다.(516)

융합의 신비

실망한 마음으로 나는 생각했다. 이제 다시 나는 저 작은 상자체제속으로 들어가야 한단 말인가!...... 삶과 모든 세계가 나에게는 감옥처럼 보였고 내가 다시 건강해지리라는 사실에 무척 화가  났다…. 내가 우주공간에 있을 때는 무중력상태였고 나를 잡아당기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은 다 지나가버렸다!(519~520)

인생이란 그것을 위해 이미 마련된 삼차원의 세계체제 안에서 전개되는 존재의 한 단면일 뿐이라는  생각만 들었다.(524)

사람들은 영원이라는 표현을 꺼려한다. 하지만 나는 그 체험을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하나인 무시간적인 상태의 지복이라고 밖에 달리 일컬을 말이 없다.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거기서 하나의 객관적 전체성으로 통합된다. 아무것도 더 이상 시간으로 쪼개질 수 없고 시간개념에 따라 측정될 수도 없었다. 그 체험은 우선 하나의 상태, 즉 사람들이 결코 상상할 수 없는 감정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어제와 동시에 오늘과 내일 존재한다고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어떤 것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다른 것은 너무도 분명하 현재이며, 그리고 또 다른 것은 이미 끝난 일이었으나 그 모든 것이 그래도 하나였다. 감정이 파악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은, 시작하는 일에 대한 기대와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한 놀라움, 그리고 지나간 일의 결과에 대한 만족이나 실망이 모두 포함된 하나의 총체, 다채로운 전체라고 해야할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빠져들어 있으면서도 완전한 객관성을 가지고 지각하게  되는 형언할 수 없는 하나의 전체였다.(525)

병을 앓은 후에 비로소 나는 자신의 숙명을 긍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았다. 그럼으로써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도 자아는 굴복하지 않게 되는 법이다.(527)

옳으냐 그르냐 하는 범주는 항시 존재하지만 그것은 구속력이 없다. 왜냐하면 생각이라는 존재가 주관적인 평가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평가 또한 존하는 생각으로서 억압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도 전체성의 현상에 함께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528)

 

[사후의 삶에 관하여]

꿈과 예감

엄밀히 말해 내 저작들은 이승과 저승의 조화에 대한 물음에 답을 주려는 늘 새로워지는 시도였다.(531)

나는 그 생각들(사후에 관한)이 옳은지 그른지에 관해서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런 생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내가 어떤 선입견으로 억누르지 않는다면 그 생각들은 진술될 수도 있음을 알고 있다.(532)

신화적인 인간은 그 너머로 나가기를 갈망하지만 학문적인 책임을 고려하는 인간은 그것을 허락할 수 없다. 이성의 차원에서는 신화화야말로 쓸모없는 사변일 분이다. 하지만 감정의 차원에서는 치유를 가져오는 활동력이며 인간존재에 광채를 부여한다.(533)

무의식은 우리에게 뭔가를 알려주거나 영상으로 암시하면서 하나의 기회를 준다. 무의식은 어떤 논리로도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우리에게 때때로 전해줄 수 있다. 동시성현상과 예언적인 꿈, 예감들을 생각해보라!(536)

신화,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

질문과 대답이 영원 속에 이미 옛날부터 존재해온 것이라면 나의 노력이 아무런 필요도  없을 것이고, 그것들은 어떤  다른 세기에 발견될 수도 있을 것이다.(545)

신화는 피할  수도 면할 수도 없는, 의식적 인식과 무의식 사이의 중간단계다.(551)

그 꿈(늑대의 출현)은 어머니의  영혼이 기독교적 도덕의 측면을 넘어 자기의 보다 큰 저승의 관계성 속으로, 다시 말해 대극의 갈등을 포괄하는  자연과 영혼의 통합 속으로 수용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555)

죽음은 역시 무섭도록 가혹하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하나의 즐거운 사건으로 여겨진다. 영원의 관점에서 죽음은 일종의 결혼이며 융합의 비의다. 영혼은 이를 테면 자신에게  결여된 반쪽에 도달하여 통합을 이루게 된다.(556)

단일성과 무한성

동양적 존재의 정신적 특성에 어울리게 출생과 죽음의 연속은 끝없는 현상이요, 목표도 없이 계속 굴러가는 영원한 운명의 수레바퀴로 여겨진다. 사람은 살고 인식하고 죽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559)

서양인이 세계의 의미를 완성하고자 하는 반면, 동양인은 인간 속에서 의미를 실현을 위해 노력하며 자신으로부터 세계나 존재를 벗어버린다. 이것이 바로 부처다.(560)

서양인은 외향적인 경향이 강하고 동양인은 내향적인 경향이 강한 듯하다.  서양인은 의미를 투사하여 객체에 의미가 있는 듯이 추정한다. 동양인은 그 의미를 자신 속에서 느낀다. 그런데 의미는 밖에도 있고 안에도 있는 법이다.(560)

재생의 관념에서 떼어낼 수 없는 것이 카르마의 관념이다. 결정적인 문제는 한 인간의 카르마가  개인적인 것이냐 아니냐하는 점이다. (560)

내가 먼 옛날에 살았고 거기서 지금도 여전히 대답할 수 없는 어떤 물음에 부닥쳤다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내게 부과된 과제를 풀지 못했으므로 다시 태어나야만 했다고 말이다.(561)

나의 존재의미는 인생이 나에게 물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 자신이 세계를 향해 던지는 하나의 물음이며, 나는 거기에 대한 나의 대답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단지 세계가 주는 대답에 의지할 뿐이다.(562)

하나의 믿음은 믿음의 현상을 증명할 분 그 믿은 내용을 증명해주지는 않는다. 내가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것이 경험적으로 나타나야 한다.(563)

내적 이미지는 개인적인 회고 속에서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막아준다. 외적 사건의 기억에만 얽매여 있는 늙은이들이 많다. 그들은 그  속에 갇혀 있는 반면, 자신을 성찰하고 이미지로 바꾸는 회고는 전진을 위한 후진을 의미하게 된다.(565)

만약 혼령이 어떤 통찰의 단계에 이르렀다면 그 혼령은 이승으로 다시 돌아올 필요가 없을 것이며, 고양된 통찰은 다시 몸을 입고 시은 욕구를 잠재울 것이다. 그러면 삼차원세계의 혼은 소멸되고 불교도들이 니르바나라고 일겉는 상태에 도달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카르마가 남아 있어 마무리를 해야 한다면 혼령은 다시 돌아오고 싶은 욕구에 빠지고 도로 삶을 취하게  된다. 심지어 무엇인가 더 완성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567)

, 그렇구나. 그 사람이 나를 명상하고 있었구나. (570)

당신이 무한한 것에 관련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이것이 인생의 시금석이다. 무한한 것이 본질적이라는 사실을 내가 알 때에야 비로소 나는 결정적인 의미가 없는 하찮은 일에 관심을 쏟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것을 모를 때는 개인적인 소유로 생각하고 있는 이런저런 지위들 때문에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인정받기를 고집할 것이다.(572)

 

[만년의 사상]

대극의 통합을 위하여

어둠에서 해방된 자의 눈으로 볼 때, 창조주는 그 어두운 특성을 벗어버리고 최고의 선이 되었다.(578)

빛에는 창조주의 다른 측면인 그림자가 따른다.(579)

윤리적 결단이 요구한다면, 버릇없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도덕적인 선이라고 알려진 것을 경우에 따라 피하고 악하다고 인정되는 것을 행할 수 있는 자유를 가져야 한다.  다른 말로 말하면 선악의 대극에 빠져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581)

우리는 오늘날 심리학을 우리의 본성상 필요로 하고 있다. 국가사회주의(나치즘)와 볼셰비즘의 현상 앞에서 우리는 당황하여 멍한 채 어쩔 줄을 모르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에 관해 알지 못하거나 단지 왜곡된 반쪽 관념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기 인식을 가졌더라면 그렇게 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583)

무의식은 사뭇 중립적이며 합리적인 개념이어서, 상상과정에서는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그 개념은 다만 학문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냉정한 관찰을 위한 것이다.(592)

신화는 결국 유일신교를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신화는 쿠자누스의 철학적인 대극복합과 뵈메의 도덕적 양가성을 받아들어야 한다.(593)

어떤 학문도 신화를 대체하지 못하고 어떤 학문도 신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아니라 신화가 인간 안에 있는 신적인 삶을 계시해주기 때문이다.(597)

원형, 그 역동적인 에너지

남들과 뒤섞이지 않도록 개인을 보호하는 데는 지키고자 하거나 지켜야 하는  비밀을  소유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다.(600)

비밀결사는 개성화에 이르는 중간단계다.(601)

동시에 두 가지를  다 하려는  사람, 즉 개인적인  목표를  따르면서도 집단성에 보조를 맞추려는 자는 누구나 신경증적인 사람이 된다.(604)

의무들의 충돌은 항상 훨씬 높은 책임의식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미덕이 집단적인 결정을 인정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외부세계의 법정이 내면세계로 옮겨지고, 잠긴 문 뒤에서 결정이 내려지게 된다. (605)

내적 대극과의 대결만큼 의식화를 증대시키는 것은 없다.(605)

자아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호조치의 도움으로 수천 년의 과정을 거쳐 서서히 이루어진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아라는 것이 가능해진 것은 모든 대극이 서로 균형을 이루고자 하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의식된 정신생활의 기초가 되는 에너지는 이런 현상들보다 먼저 존재하며,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무의식적이다.(607)

경험적 인간은 인생을 결정하는 힘의 원천을 소유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소유라는 말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이러한 에너지를 탈환하거나 소유하고자 시도하며 심지어 그것을 차지했다고 착각하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그 에너지에 사로집힌다는 것이다.(607)

무의식이 뭔가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의식적 정신의 발달사에 초기단계로 이루어져 있음이 틀림없다. (609)

의식은 계통발생학적으로나 개체발생학적으로 이차적인 것이다. 신체가 수백만 년의 해부학적 전사를 가진 것처럼, 정신체계도 그러하다. 그리고 현대인의 신체가 모든 부분에서 이러한 발달의 결과를 나타내고 어느 부분에서나 현재가 있기 전의 단계를 내비치고 있는 것 처럼, 정신도 또한 그러하다.(610)

정신은 자신을 뛰어넘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정신은 절대적 진리를 확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고유한 양극성이 진술의 상대성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613)

정신은 그 어디서도 진정으로 자신 밖으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없다.(614)

정신이 늘 자신에 관해 진술한다 해도 결코 자신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모든 이해와 모든 이해의 대상은 정신적인 것 그 자체이며, 그만큼 우리는 온통 정신적인 세계에 어쩔 도리 없이 갇혀 있다.(615)

되는대로 말하는 것, 즉 충분한 근거 없이 진술하는 것은 객관적인 입장에서는 금지되어 있지만, 객관적인 근거가 없는 것으로 보이는  경우에도  진술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 그것은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심리학적으로 객관적인 것이라고 이해되어야 한다.(616)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에로스는 우주의 생성원, 창조자, 그리고 모든 의식성의 아버지요 어머니다. 내게는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이라고 한 바울의 조건문이 모든 인식 중에서 최초의 인식이며 신성 그 자체의 진수인 것처럼 여겨진다.(619)

사랑은 그의 빛이며 그의 어둠이며 그 끝을 예측할 수 없다.(620)

 

[회고]

나는 내 인생이 그렇게 지나간 것에 만족한다. 내 인생은 풍성했으며 내게 많은 것을 가져다 주었다. 어떻게 내가 그토록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나 자신이  달라졌더라면 아마도 많은 일이 다르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되어야 하는대로 되었다.

비밀로 가득 찬 세계

사람들이 나를 현명하다거나 지자 智者라고 한다면  나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어떤  사람이 강에서 한 번 모자로 물을 가득 퍼냈다고 하자.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623)

강물을 기르려면 허리를 얼마만큼은 굽혀야 하는 법이다.(624)

아무것도 보지 못하면 또한 아무런 확신도 갖지 못하며, 아무런  결론도 끌어낼 수 없거나 자신의 결론을 믿을 수도 없다.(624)

고독이란 주변에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을 전할 수 없거나 자기는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황당무계한 것으로 간주될 때 생기는 법이다. 나의 고독은 어릴 적 꿈의 체험과 함께 시작되었고, 내가 무의식에 대한 연구를 할 시기에 최고조에  달했다. (625)

나에게 세계는  처음부터 무한히 크고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625)

나는 너를 좋아하고 너를 정말 사랑한다. 하지만 나는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것은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아픈 순간이다.(627)

나는 사람들을 다른 사람보다도 더 많이 필요로 하고 동시에 훨씬 더 필요로 한다고 말이다. 다이모니온(내적인 신의소리, 마음속으로부터의 경고)이 작용하고 있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항상 너무 가깝고 너무 멀다. 다이모니온이 잠잠해진 곳에서만 사람들과 중간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627)

모든 사람이 명석한데 나만이 흐리멍덩하구나

나는 나 자신과 내 인생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내가 온전히 확신할만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나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결정적인 확신을 결코 갖고 있지 않다. 나는  단지 내가  태어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다.(629)

인생은 의미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또는 인생은 의미를 가지기도 하고 가지고 있지 않기도  하다.(630)

노자가 모든 사람이 명석한데 나만이 흐리멍덩하구나라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이 늙은 나이에 느끼는 바다. (630)

[편집자의 말]

그는 망원경으로 자신의 영혼을 바라보았다. 온통 어지러웠지만 그것은 아름다운 별자리처럼 보였다. 그는 세계 속에 감추어진 세계를 그의 의식에 보태었다.(631)

 

3. 내가 저자라면

* 감동적인 장절

사람들은 영원이라는 표현을 꺼려한다. 하지만 나는 그 체험을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하나인 무시간적인 상태의 지복이라고 밖에 달리 일컬을 말이 없다.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거기서 하나의 객관적 전체성으로 통합된다. 아무것도 더 이상 시간으로 쪼개질 수 없고 시간개념에 따라 측정될 수도 없었다. 그 체험은 우선 하나의 상태, 즉 사람들이 결코 상상할 수 없는 감정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어제와 동시에 오늘과 내일 존재한다고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어떤 것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다른 것은 너무도 분명하 현재이며, 그리고 또 다른 것은 이미 끝난 일이었으나 그 모든 것이 그래도 하나였다. 감정이 파악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은, 시작하는 일에 대한 기대와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한 놀라움, 그리고 지나간 일의 결과에 대한 만족이나 실망이 모두 포함된 하나의 총체, 다채로운 전체라고 해야할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빠져들어 있으면서도 완전한 객관성을 가지고 지각하게 되는 형언할 수 없는 하나의 전체였다.(525)

나는 사후세계나 영원에 대해 믿지 않는다. 별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융이 표현한 영원또는 사후세계는 꽤나 그럴싸했다. 이런 곳은 과연 어떤 곳일까 머리 속으로 그려보기도 했지만 나로썬 역부족임을 다시 한번 느꼈다.

 

*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저자 융의 말년에 그의 비서 아니엘라 야페에게 구술로 써내려간 책이다. 모든 자서전이 그렇듯, 이 자서전은 철저하게 주관적인 관점에서 정리되었으며, 그로 인해 있을 부작용(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할 근거로서의 자료, 또는 자기 중심적 오류)을 저자 또한 감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융은 자신의 기억의 밑바닥까지 훑어 자신의 삶을 추적/회고/분석/분리/재결합/정렬하였고 그로 인해 독자들은 융의 관점에서의 융의 삶을 볼 수 있었다.(심지어 그의 기억은 2세때부터 시작된다.)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자기 자신 아닌가.

이 책은 자서전으로 가져야 할 요건을 충실히 갖추고 있다. 다만, 서두에서 작가가 말했듯 그의 인생에서 외부의 사람들은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기질적으로 그랬다. 그렇기에 자서전의 내용은 성장기를 비롯하여 노년기까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내면과 학문적 탐구에 맞추어져 있어 다소 아쉬움이 있다. 그의 학문적 탐구에 든든한 지원을 해준 엠마 융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는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내가 저자라면그를 가까이에서 보았던 사람(비서인 아니엘라 야페를 포함해)들이 본 융의 모습을 본 책의 뒷 부분에 붙이는 노력을 했을 것 같다. 융이란 인물이 워낙 주관적인 인물이기도 하거니와 신비체험을 비롯한 경험론에 기반을 둔 인물이기 때문에 주변의 증언이 있으면 이해가 조금 더 수월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융의 가족의 동의가 있어야 겠지만 말이다. 아울러, 책에 나오는 생소한 용어나 인물들 또는 이론 등에 대해, 마치 역자가 주석을 달 듯, 관련 내용에 대한 주석을 조금 더 풍부히하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정신분석/분석심리 측에 무게를 실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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