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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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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2일 05시 09분 등록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 A.야떼 편집/ 조성기 옮김

(원제 : MEMORIES, DREAMS, REFLECTIONS by C.G. Jung)

 

 

1.     저자에 대하여

 

이 책은 칼 융이 자신이 죽기 몇 년 전에 80이 넘은 나이에 쓴 자서전이다. 융은 자신의 자서전이 다른 자서전이 일반적으로 다루고 있는 외적인 경험, 즉 출생, 성장과정, 결혼, 갈등과 운명 등의 인생사를 거의 다루지 않고 내면의 자아 발달과정을 대부분 다루고 있어 자서전 요청을 처음에는 거절했다고 한다. 독자들이 이해를 할 수 없을 거라는 것이 거절의 중요한 이유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출간 후 독자들로부터 적잖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아마도 이 책 속에 60년 가까이 환자들을 상대한 경험, 자신의 내면 세계, , 환상 등에 관한 집념의 연구, 그리고 여러 나라 신화를 연구하기 위한 여행과 끊임없는 독서 등, 저자의 체험과 내적인 경험이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나 한다.

 

내 인생은 무의식의 자기 실현의 이야기이다

 

자서전의 첫 문장이다. 저자는 말년에 자신의 인생을 이 한마디로 표현했다. 융은 자신의 무의식 속에 있는 진정한 자신을 들여다보고 내면의 자아가 주는 신호와 메시지를 파악하고 그것을 스스로 체험했던 사람이었다.  

 

1)생애

 

어린시절

 

융은 1875 7 26일 스위스 투르가우주의 케스빌 사제관에서 개척교회 가난한 시골 교구 목사 파울 아힐레스 융과 에밀리 프라이스 베르크 사이의 넷 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융의 이름을 바젤대 교수를 지낸 융의 조부 이름을 따서 카를 구스타프 융 2세로 지었다. 융의 부모의 집안 내력은 저명한 성직자와 의사가 많았다. 아무래도 융이 훗날 심리학자이며 정신과 의사가 된 것도 이런 집안 내력이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짐작이 간다.

 

융의 어린 시절은 순탄치 않은 부모의 결혼생활로 행복하지 않았다.  융의 어머니는 결혼 후 얼마 안되어 불행을 겪는다. 융에 앞서 3명의 자식을 낳았지만 모두 사산하거나 태어난 지 며칠 안되어 죽었다. 이 충격으로 그녀는 대인관계를 기피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결혼 당시, 점잖고 내조 잘하는 여인에서 신경질 적이고 성마른 여자로 변했고 외모도 무관심해져 당시의 그녀는  뚱뚱하고 못생기고” “오만하고때로는 우울한 기분 때문에 고생한다 라고 묘사되었다.  부부가 서로 무관심해지고 방도 따로 쓴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밀리는 다시 임신을 했고 건강한 아들인 융이 태어나게 되었다.

 

부모의 긴장된 결혼생활,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어머니의 잦은 요양소 입원과 퇴원등으로  융은 어머니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어린 시절을 융은 주로 혼자 놀았는데 이는 마을의 부모들이 독특한 부모를 둔 묘한 아이와 자신의 자식들이 가깝게 지내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늘 혼자였던 이 시기에 어린 융은 꿈과 환상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그 가운데 당시 아버지는 융에게 구약에 나오는 영웅들의 모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아버지의 서재는 융의 놀이터 역할을 했다. 이러한 유년시절의 경험이 융이 내적인 삶으로 나아가게 했다. 3~4살 때 수직 남근에 대한 꿈을 꾸면서 영적인 삶에 대한 계시를 느끼게 되었다고 하니 아마 이 때가 내적인 세계로 들어간 첫 시기였던 것 같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런 꿈을 꾸고 그 꿈을 생생히 기억하는 지 믿기지가 않는다.

 

열 한 살에 융은 바젤시의 김나지움에 들어가고 신의 이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다음해인1887년 융은 길거리에서 어떤 소년으로부터 얻어 맞고 쓰러져 보도의 경계석에 머리를 부딪혀 그 충격으로 정신이 잃었다. 순간, 융은 더 이상 학교를 갈 필요가 없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융은 자신이 하고 싶지 않는 일을 해야 될 때나 부모가 무엇을 재촉할 때 의도적으로 기절을 해 상황으로부터 도피했다. 신경질적 발작을 이유로 반년 이상이나 학교를 가지 않았다. 그 기간에 공상에 잠기고 그림을 그리고 자연의 경이로움에 몰두했다. 하지만 시간을 빈둥빈둥 보내면서 그는 행복감을 느낄 수 없었고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음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그는 그의 병을 걱정하는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가 하는 예기를 듣게 되었다.  의사들도 그 아이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른다네. 불치병에 걸렸다면 끔찍한 일일세. 나는 얼마 안 되는 재산을 다 써버렸어. 만일 그 아이가 자립해서 살아갈 수 없다면 그 아이는 어떻게 되겠나? “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융은 이 말에 충격을 받고 공부에 집중했고 공부 중에 세 번의 기절 발작을 극복한다. 다시 학교에 들어갔으며 발작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융은 말했다.  나는 이것으로 무엇이 신경증 (노이로제)인지를 배웠다. “ 노이로제는 결국 자기소외의 징조였으며 융은 그것을 도피하지 않고 자신의 성실함으로 치유하였다. 융에 따르면 청소년은 살아 가면서 어렵거나 원치 않은 상황에 직면하는 데 이를 피할 때 자기소외가 생기고 이럴 경우 강인한 의지로 그것을 극복하고 삶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도움을 준다고 했다.

 

열 두 살 때 융은 어느 날 성당을 바라보며 성당 지붕에 내려 쪼이는 햇빛을 보며 감동하고 교회의 아름다움, 이 모든 것을 창조한 신, 하늘 멀리 황금의 왕좌 위에 앉아 있을 신을 생각한다. 동시에 해방감과 축복감, 신의 자애에 감싸인 행복과 감사의 마음이 오름을 느꼈다고 했다. 융은 이것이 하나의 계시이며 깨달음의 체험이라고 보았다.  열 두 살의 어린 나이에 자신을 둘러싼 외부적인 환경이나 조건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고 햇빛을 보고 감동하고 만물을 창조한 신을 생각한다고 하니 융은 심리학보다는 영적 지도자로서 길을 걸었어도 자신 만의 영역을 만들지 않았을 까 생각한다. 

 

청년 시절

 

16세부터 19세에 융은 자신에 대한 회의와 불만에서 빠져 나왔다. 영감의 세계보다도 의식적 의문을 체계적으로 추적하는 작업에 몰두했는데 철학 서적을 많이 읽었다. 그 중에서 피타고라스나 플라톤을 좋아했다.

 

대학 진학 시, 자연과학, 역사, 철학, 고고학 등에 관심이 있었는데 고고학은 돈이 많이 들어 집안 형편상 포기했고 조부가 의사인 점을 고려, 현실적인 타협안으로 의학을 선택하게 된다.

21세 때인 1896년 융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생계가 어려워 융은 대학의 조교를 하거나 골동품 상점에서 일을 하고 백부한테 돈을 빌려 공부를 했다. 이 시기에 융은 당대의 사상가들을 섭렵하고 수많은 책을 읽고 토론을 즐겼다.

 

의과대학을 졸업 후, 전공 과목을 놓고 융은 내과교수의 조교가 될 생각이었다. 하지만 크라프트 에빙( Kraft Ebing)의 정신과 교과서를 읽고 정신병을 인격의 병으로 정의한 저자의 말에 흥분을 느껴 보장된 내과를 버리고 아무도 거들떠 보지도 않는 정신과를 선택을 하게 되었다.

 

결혼 그리고 연인

 

1903년 융은 28세에 스위스의 부호의 딸인 엠마 라우센바흐와 결혼해 자녀 5명을 낳았다. 엠마와의 결혼은 1955년 엠마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엠마는 아서왕 전설에 관심을 갖고 성배에 대해 연구를 했으며 훗날 취리히 융 연구소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엠마는 융과의 결혼 생활 중 이혼을 3번이나 시도했다고 한다. 첫 번째는 넷째 아이를 임신하면서 무산되었다. 당시 엠마는 융이 사비나 슈필라인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고 난 후 부부의 결혼은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융은 곤경에 처하자 엠마의 모든 요구를 무조건 들어주는 것으로 위기를 넘어가게 된다.

 

정신과 의사로서 심리학자로서 그의 명성이 알려지자 유럽의 각 나라 그리고 미국에서 환자들이 그의 치료를 받기 위해 줄을 섰다고 한다. 융은 직업상 많은 여성 환자들과의 상담을 하게 된다. 그 중에 두 명의 여성과 혼외관계를 유지한다.

 

사비나 슈필라인 (Sabina Spielrein)은 여대생으로 융의 환자였다. 처음에는 지적 동반자로 만났다.

세 아들을 키우느라 정신이 없었던 아내보다 융은 자신의 불안과 근심을 사비나에게 털어놓는다. 잦은 만남은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넘어 연인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추문, 불륜, 그리고 둘 간의 격한 싸움 등의 소용돌이를 겪으면서 사비나와의 관계는 정리가 된다.

 

토니안나울프 (Toni Wolf)는 환자로 융을 처음 만난다. 융의 이름이 알려지자 딸의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토니 어머니가 융에게 데려온 것이다. 융은 그녀를 따스하게 대해 주었고 그녀의 관심사인 신화에 대한 얘기도 함께 나누었다. 융의 인도로 그녀는 자신의 지적 관심과 능력을 활용하여 분석 심리학에 기여하게 된다. 융은 남자는 밥 해줄 여자와 지성을 자극할 여자 , 두 여자가 필요하다고 얘기했는데 후자가 토니 임을 알 수 있다. 융은 치유 불가능한 여성 편력자로 알려져 있는데 많은 염문을 뿌리고 살았다고 한다. 융은 엠마와 토니보다 오래 살았는데 두 여인을 위해 기념비를 만들었다. 엠마의 것은 그녀는 나의 집의 기초였다’, 토니의 것은 그녀는 나의 집의 향기였다라고 새겨 넣었다.

 

융은 1961년 사랑하는 가족과 제자들에 둘러싸여 영면했다

 

2)    정신 의학

 

1900년 부르크흴츨리 취르히 대학 정신과 병원 당시 주임교수인 오이겐 블로일러의 조수로 들어간다. 1902년 제 1 조수가 되어 <소위 심령현상의 병리와 심리에 대하여>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다. 블로일러 교수의 지원과 프란츠 리클린과의 협동하에 단어연상에 관한 실험적 연구를 하여 무의식적인 콤플렉스의 존재를 발견했고 이는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설과 접촉을 갖게되는 계기가 된다.

 

융은 정신질환의 심인성 원인에 관심을 갖는다. 모든 환자들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며 여기서부터 치료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환자의 증세는 개인적인 이야기만 들어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단어 연상이나 꿈 분석을 통해 환자들의 무의식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프로이트와의 만남과 결별

 

융은 1900년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 관한 논문을 세미나를 통해 접하면서 알게 된다. 그는 프로이트의 인간심리를 사변적인 이론이 아닌 스스로의 체험을 통해 탐구해 가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의식 너머의 마음의 심층을 처음으로 과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에 매료되었다.  융은 자기가 프로이트의 성욕설을 이해 못하는 것은 경험이 부족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독일대학 교수사회에서 프로이트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음도 불구하고 그는 프로이트를 옹호했다. 융보다 스무 살 가까이 많은 프로이트는 융이 자기 학설을 지지하자 융을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융에게 국제정신분석학회 회장직을 맡기기도 하고 1909년에는 미국 클라크 대학교에 함께 초청되어 공동으로 강의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1912년 둘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프로이트는 융이 자신의 환자와 부정한 관계를 가져온 것을 알자 융을 심하게 비난했다. 이외에도 융은 무의식에는 억압된 성적인 욕구나 충동뿐만 아니라 종교적 원천과 같은 전혀 다른 창조적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이는 모든 인류에게 태초의 시간부터 내재하는 것이라 하여 이를 원형이라고 명명하였다. 프로이트의 권위의식과 성에 대한 당시의 프로이트의 집념으로 보아 융의 이견은 받아 들일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만난 지 6년 만에 헤어지고 말았다.

1913년 융은 국제정신분석학회의 회장직을 사직한다는 서신을 프로이트에게 보냈다. 또한 대학과 개업을 병행하던 생활을 청산하고 연구에만 몰두하기 위해 대학 강사직을 그만 두었다.

 

3)    내면세계 탐구

 

무의식

 

융이 대학에서 정교수가 될 수 있는 출세의 길을 포기하고 무의식 탐구에 전념하였다.

무의식과의 대면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1913년부터 1919년까지 6년은 융에게 고독한 탐구의 시기였다. 그는 모든 사회적 지위와 사교활동을 버리고 자기 자신의 세계를 관조하는 데 몰두 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의 무의식의 현상에만 관심을 가졌다. 이 시기에 그의 원형이론 Archetype이 틀을 잡는다.

 

융에게 무의식이란 인간 본성의 모든 요소인 밝음과 어두움,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 심오한 것과 어리석음 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었다. “ 의식의 있는 내용은 무의식 속으로 사라질 수 있지만 그대신 의식에 한번도 없었던 내용을 무의식에서 얻을 수도 있다고 했다. , 무의식은 단지 쓰레기 더미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신비한 것이며, 과거뿐 아니라 미래에 다가올 사건에 대한 풍부한 씨앗을 제공하는 것이며 개인적인 경계를 넘어 집단 무의식의 세계로 도달할 수 있게 한다고 보았다.

 

원형(archetype), 무의식 (unconscious), 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 .  이것들은 개성화 과정, 즉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삶에 적응하는 과정의 중요한 구성요소라고 보았다.

 

페르소나(persona)는 자아가 사회로부터 자신의 진짜 본성을 숨기기 위해 만들어 내는 가면 같은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공개적인 얼굴이며, 의도적이고 무의식적으로 만들어 지는 것이다. 이 가면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늘 사용한다. 가면의 모양은 우리가 속한 사회, 부모와 스승, 또래집단 등이 요구하는 기대치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항상 페르소나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신경증으로 발전되기 쉽다. 이들은 자아가 만들어 놓은 작은 역할 너머에 있는 삶의 더 넓은 측면을 결코 보지 못하게 되는데, 이는 정신적으로 너무나 숨막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융은 페르소나를 일종의 가짜 인격이라고 말하고 우리들 각자는 언젠가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했다.

 

집단 무의식

 

원형과 본능의 두 가지 요소를 갖는데 이는 개인의 정신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며 보편적으로 인식되면서 유전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원형은 그 대개 종교적인 성격을 띠며, 신비한 분위기를 동반한다. 융은 문명이 우리를 원시적인 본능으로부터 둔감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본능은 자주 억눌리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신경증, , 기억상실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고 보았다.

 

아니마와 아니무스

 

아니마는 남성의 인격에 무의식적으로 존재하는 여성적 측면이고 아니무스는 여성의 인격에 존재하는 남성적 측면이다. 융은 이러한 인격의 무의식적인 측면들은 인간의 행동을 규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았다.

아니마는 꿈속에서 원형적 인물로 나타난다고 하는데 이는 남자를 파멸에 이르도록 유혹하는 색녀이거나 창녀, 혹은 신성한 영적 지도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니마는 긍정적인 측면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남성의 의식세계에 무의식의 이미지를 전달하는 기능이다. 아니마는 특정한 여성이 아니며, 하나의 원형이다. 이는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여성의 의미와 관련된 모든 느낌들을 포함한다. 그 형태는 남성이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여성에 대한 지식에 따라 달라진다. 남성의 아니마가 실제 여성에게 투사되면, 열정적인 이끌림에 그는 사랑에 빠지게 되고, 아니마가 매우 약한 남성은 여성과의 관계가 어렵게 느껴지기 쉽다.

융은 자신의 경험한 수많은 일에 대해 대부분 만족했다. 그는 자서전 말미에서 괴로워하고 우울해 하고 환희에 젖으면서 자신의 삶에 놀라고, 실망하고, 기뻐했다융은 이 모든 감정이 합쳐진 존재였다.

 

 

융은 꿈이란 잠재된 생각이나 의도를 보여주며, 가끔은 무의식이 말하고자 하는 중요한 무엇인가를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4)    여행

 

1923년에서 1925년까지 융은 미국 아리조나와 뉴멕시코의 푸에블로 인디언을 답사한다. 그는 이 답사에서 유럽인과 대화에서 느낄 수 없었던 감흥을 느꼈다. “ 마치 낯선 깊은 바다 위를 자유로이 헤엄치고 있는 것과 같았다라고 말했다. ‘태고적부터 알려진,그리고 거의 잊혀진 것에서 통로를 발견하는기분이었던 것이다.

 

1925~1926 년 케냐와 우간다 답사한다. 원주민 마사이족을 탐험하였다. 무의식에서 얻은 근원적 심성의 체험을 원시 종족들은 어떻게 경험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1938년 융은 인도 주재 영국총독부의 초청으로 켈커타 대학 25주년 기념행사에 참여한다. ‘고도로 분화된 이질적인 문화와 처음으로 직접 접한다. 그는 여러 성자들과 만나는 것을 피했는데 이는 자기가 성자로부터 배우고 그 진리를 내 것으로 받아들였다면 그것은 마치 절도 행위처럼 여겼을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보자.

 

그들의 지혜는 그들에게 속한다. 그리고 내게 속하는 것은 오직 내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일 뿐이다. 유럽에서, 더구나 나는 동방에서 아무것도 빌릴 수 없다. 오직 내 자신으로 살아야 하고 내 내면이 말하는 것으로 혹은 본성이 내게 가져다 주는 것으로 살아야 한다. “

 

5)    기타

 

볼링겐의 탑

 

1923년부터 융은 취리히 호수에 위치한 볼링겐 Bollinggen  성탑을 짓기 시작했는데 융은 심리학적 명상과 연계하여 무의식의 내용을 형상화하는 심리적 실습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 탑은 30년이 넘게 걸린 1955년에야 완성되었다.

 

연금술

 

융은 최고의 물질을 만들려던 연금술사의 노력에 반영된 무의식적인 과정을 찾으려고 했다.

1944년 출간된 <심리학과 연금술>, 1946 <전이의 심리학>, 1955 < 융합의 비의>등이 그 성과물이다. 특히< 융합과 비의>는 융이 80세의 고령에서 저술한 것으로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을 지양하고 분리된 양극에 다리를 놓으려는 현대적 연금술사라 할 수 있는 마음의 의사, 융의 심오한 통찰이 담겨 있다.

 

연금술의 궁극적 목표는 연금술사의 정신에 내적 변환을 이루는 것인데 융은 여기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연금술적 사고와 무의식에 대한 융의 사고가 많은 부분이 일치했다.

 

에라노스

 

스위스인 후뢰배 부인의 후원으로 1933년 스위스 남부 아스코나에  서로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자유롭게 발표하고 토론하는 학술회의의 장인 에라노스가 만들어 진다.

융은 이곳에서 1933년부터 1951년까지 14회의 강연을 했다. 융의 강연은 많은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인도학자 하인리히 짐머, 신화학자 칼 케레니, 동물학자 아돌프 포르트만 등이다.

 

인간의 심리 유형

 

융은 인간 행동이 어떤 기본적인 유형을 따른다고 보았다. 이 유형들은 서로 배타적으로 작용을 하고 성장과정에서 나오는데 그 행동양식은 습관으로 되어 그 사람의 성격 특성이 되는 것이다.

 

내향성과 외향성 사람들을 정신적 에너지의 방향에 따라 분류한 것으로 융은 정확하게 하나의 유형에만 맞춰진 사람은 없다고 한다. 사람들의 인성은 다양하고 또한 무한히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두 개의 범주로 모든 사람을 정형화하는 것은 너무 제한적이며 단순하다. 또한 우리 모두는 두 가지 성향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 어느 쪽이 다른 하나를 지배하는 지 모호할 경우도 많다. 융의 이론은 개인적 심리를 설명하고자 시도한 것이 아니라 인간행위를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일 뿐이다.

 

인간의 본성을 이루는 데 네 가지 기능이 있다고 보며 이 기능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의 두쌍으로 이루어져 균형감을 유지한다. 사고, 감정, 감각, 직관이 그것이다. 사람의 의식 방향은 이들 네 가지 기능 중 하나로 향하게 된다. 이들 네 가지 기능은 각각 외향적 또는 내향적으로 나뉜다. 이로써 여덟 가지 심리 유형이 나오게 된다. 이 심리유형은 그 사람의 세계관을 결정하는 데 중대한 영향을 끼치며, 모든 상황과 관계에 처신하는 방법을 결정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소한 두 가지 유형이 혼합되어 있다. 사람들은 인격을 발달시키고 성숙시킴으로써 자신의 심리유형을 점차 바꿔갈 수 있으며, 한 인격 안에서 여러 가지 유형을 혼합하는 것은 개성화 과정의 목표라고 보고 있다.

 

6)    융을 둘러싼 논란 

 

융은 살아있을 때나 사후에도 많은 비평을 들었다.

 

독선적인 사람, 아내의 재산에 빌붙은 사람, 여성 편력자, 이기적 인간, 반유대주의자, 나치개입설, 등등 여러 비평으로 그 또한 불완전한 인간일 수 밖에 없던 사람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융은 심리학을 넘어 인문 사상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사상가로 평가되고 있다.

 

참고 서적 :

<분석 심리학> 이부영 지음, 일조각

<30분에 읽는 융> 루스베리 지음, 양혜경 옮김

<> 디어드리 베어 지음,정영목 옮김

 

 

2.     마음에 드는 문구 유첨 참조

 

3.     저자라면

 

옮긴이 서문에 언급한 것처럼 이 책은 융의 제자이며 여비서인 아니엘라 야페가 융의 나이 82세가 된 1957년부터 5년 간 융과 대담을 한 후 엮어진 자서전이다.  자서전이라고 하지만 융의 외적의 환경과 사건, 즉 성장 과정, 성공, 실패, 좌절, 운명 등의 생생한 인생사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대부분 융의 내면의 체험을 기록한 책이다. 다음의 편집자의 말로 이 책이 어떤 성격의 자서전인지 짐작하게 한다.

 

나는 종종 융에게 외적 사건들에 대해 물어보았으나 얻는 것이 없었다. 인생경험의 정신적인 정수만이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으며, 그것만이 애써서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책은 융의 요청대로 자신이 1961 86세에 죽은 다음해인 1962년에 출간 되었다.

 

책의 주요 내용

 

책은 저자 부모의 순탄치 않은 결혼생활,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고 예측 불가능한 어머니로 외롭고

가난했던 유년시절부터 시작한다. 이후 학창시절 때 겪은 의도적인 신경증적 발작과 극복과정,

대학시절 시, 정신의학도의 길을 선택한 한 과정, 프로이트와의 운명적 만남과 결별, 그리고 무의식, 신화, 원형의 대한 자신의 이론을 정립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시기별로 내면의 자아의 체험과 성장에 중점을 맞추어 기술하고 있으며 체험과 연구를 통해 얻게 된 융의 이론과 사상은 앞서 저자에 대하여에서 이미 다루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추가로 그의 생각과 이론을 책의 내용을 인용한다.

 

P 536 – 이성은 우리로 하여금 매우 좁은 한계에 매여 있도록 하며, 오직 이미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이미 알고 있는 삶을 살도록 요구한다. 마치 사람들이 삶의 진정한 범위를 알고 있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매일 매일 우리 의식의 한계를 훌쩍 넘어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이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비판적 이성이 우세할수록 인생은 그만큼 빈약해진다.

 

이성이라는 틀에 얽매여 인간의 행동과 삶은 제한을 받아 예측 가능하게 되지 않았나 한다. 이성이라는 이름아래 인간의 감정과 욕구는 억압되고 분출구를 찾지 못해 어느 순간 비상식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폭발하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  

 

P 565 – 내적 이미지는 개인적인 회고 속에서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막아준다. 외적 사건의 기억에만 얽매여 있는 늙은이들이 많다. 그들은 그 속에 갇혀 있는 반면, 자신을 성찰하고 이미지로 바꾸는 회고는 전진을 위한 후진을 의미하게 된다. 내 인생을 통하여 이 세계 안으로 이끌었고 다시 이 세계에서 밖으로 인도하는 그 줄 (노선)을 보려고 시도한다.

 

나이가 들면 자신의 인생사를 되돌아 본다. 인생의 희로애락, 굴곡진 인생사를 습관적으로 회고한다.  한때의 화려함과 행복함에 젖는다. 다시 현재 노년의 모습으로 돌아보면 거기에는 보고 싶지 않은 슬픈 자화상이 있다. 삶의 낙이 없어진다. 하지만 노년일수록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면 사념과 망상에서 벗어나 항상 의식적으로 깨어있는 를 발견하게 된다.

 

P 629 – 나는 나 자신에 관해 놀라고 실망하고 기뻐한다. 나는 슬퍼하고 낙심하고 열광한다. 또한 나는 그 모든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의 합을 계산할 수 없다. 나는 나 자신과 내 인생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내가 온전히 확신할 만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나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결정적인 확신을 결코 갖고 있지 않다. 나는 단지 내가 태어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어디에 실려 다니는 것과도 같았다.

 

융은 영적으로 깨인 사람이지만 아직은 완성이 안된 불완전한 인간임을 보여준다.  지금 현재에 모습에 만족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때로는 화나고 기뻐하고 슬퍼하지만 그 감정에 좌우되지도 않고 오래 머물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현재의 존재한다는 사실만을 확실히 알고 있을 뿐이다.

 

영향

 

융의 내적인 체험이 말하고 있는 것은 결국은 진정한 자신이 누구인지 발견하는 데 있지 않나

생각한다. 외적 사건은 그냥 덧없이 지나가지만 내적이며 영적인 체험과 탐험은 자신을 어쩌면 시공을 초월해 영원히 사는 길로 인도하지 않을까 한다.

 

보안점/느낀점

 

외적 사건 보완 필요

 

융이 아무리 자신의 인생을 자기실현의 역사라고 했지만 자서전이라고 하면 외적 사건을 중심으로 한 인생사가 어느 정도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융이 생전에 이 책을 직접 쓰다시피 했고 본인 사후에 출간을 요청하여 어쩔 수 없이 출간했다 하더라도 사후에 어떤 전기 작가가 융의 외적 사건을 추가하여 이 자서전을 보완할 필요가 있었지 않았나 한다.

 

일례로 융은 지독한 여성 편력가로 알려져 있다. 2 명의 여성과는 혼외관계를 유지한 것도 공공연한 사실로 되어있다. 융은 정신과 의사이며 준수한 용모의 건장한 남성이었다. 그의 명성이 국제적으로 알려지자 유럽 및 미국의 젊고 매력적이며 돈 많은 여성들이 그의 치료를 받기 위해 문전성시를 이루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당연히 남녀가 만나는데 자연스런 본능이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융은 자신과 자신의 사생활이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융 스스로 자신이 불완전한 인간이라고 했다면 그러한 사실이 알려져도 문제는 되지 않았을 까 한다. 그것이 더 인간다운 융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스스로 자신을 신비화 한 것은 아닌지,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은 그를 너무 보호해 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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