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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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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5일 00시 38분 등록

선유동계곡으로의 초대

 

8월이 참 좋았습니다. 딱 여덟 번 강의를 위해 외출했고 잡지사에 두 편의 글을 기고하는 것을 빼면 나머지 시간은 온전히 잘 놀았습니다. 그 어느 해 여름보다 무더웠지만 나는 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기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8월의 쉬는 시간 중 가장 즐거웠던 것은 선유동 계곡에 들르는 시간이었습니다. 선유동 계곡은 내 유년의 기억이 스며 있는 공간입니다. 선유동의 하이라이트는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로 이루어진 계곡의 풍경입니다. 바위가 오랜 시간 물을 만나 제 몸 위로 그들을 떠내려 보낸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습니다. 여기서 한강으로 흐르는 물이 발원하고 여기서 서해를 이루는 바다 빛이 일어선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내게는 이곳이 여름마다 그 바위 계곡을 미끄럼틀 삼아 발가벗고 물놀이를 하던 기억이 가장 중요하게 남아있는 장소입니다.

 

맛있는 책을 한 권 들고 찾아가 바위 계곡의 얕은 물을 저벅저벅 건너갔습니다. 소나무 그늘에 앉아 눈을 감았습니다. 물소리를 듣다가 아련한 기억이 찾아와 나를 소년으로 만드는 순간을 만났습니다. 아버지의 발가벗은 모습을 처음 보았던 곳, 수영복은 고사하고 팬티조차 귀했던 시절인데 바위 미끄럼틀을 타며 물놀이를 하느라 엉덩이 부분에 구멍이 나는 줄도 모르고 즐거워했다가 어머니께 싸리빗자루로 매를 벌었던 곳, 입술이 파래질 만큼 놀다가 뜨거운 바위에 귀를 대고 스며들어간 물을 빼내던 곳, 어떠한 걱정도 감히 녹아들 수 없을 만큼 맑고 푸른 물빛을 지녔던 곳...

 

옷을 벗고 다시 소년이 되고 싶었지만, 지금은 이따금 관광객의 발걸음이 있어 그럴 수 없었습니다. 대신 가져간 책을 날이 어둑해질 때까지 읽었습니다. 이따금 일어나 계곡 한 복판에 발을 담그고 서서 책을 읽었고, 이따금 조금씩 거닐어 물가에 자라는 나무와 풀, 그리고 맑은 물속을 오가는 물고기들에게 말을 걸어도 보았습니다. 늦은 8월에 찾았을 때는 구절초가 피어있었습니다. 바위 위 모래톱 위에 차마 향기조차 맡아보기 미안할 만큼 단아하게 피어있었습니다. 아마 아직도 그 자태 곱게 지켜내고 있을 것입니다.

 

9월이 열리자 바빠졌습니다. 어젯밤은 장호원에서 시작, 대전을 거쳐 대구에서 하루를 머물렀고 이 새벽은 서산을 향해 갑니다. 당진을 거쳐 대전에서 하루를 마감하는 일정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선유동 계곡의 물빛과 물소리, 바위와 산 그림자, 개울가의 수초와 꽃들이 보고 싶은 걸까요?

그대 한가로운 날 연락하세요. 선유동 계곡을 흐르는 물이 더 차가워지기 전에 그 바위에 앉아 오랫동안 함께 책을 읽고 싶군요. 이따금 수다도 떨고, 맥주도 한 두 깡통 마실 수 있으면 더 좋겠지요. 내 곁에는 그대에게 보여주고 싶은 선유동 계곡이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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