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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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는 멋진 뒤 안이 있었다. 어느 집이건 좁거나 넓은 뒤 안이 있었지만 산 아래 자리한 우리 집은 바로 산과 이어지는 넓은 뒤 안이 있었다. ‘뒤 안’이란 표준말로 하면 뒤뜰인 샘이다.
안채, 사랑채, 행랑채가 있는 대갓집에서는 뒤 안은 누구에게나 보여주지 않는 은밀한 곳이고 여자들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부엌에서 바로 출입할 수 있도록 문이 있었다. 그곳은 햇볕이 잘 들지 않아 습기가 많았고 바닥의 일부는 청색이끼가 끼어 있었던 것 같다. 그 이끼는 곰팡이처럼 생겨 잘못 디디면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장독대도 있고 습한 곳에서 잘 자라는 토란을 기르는 집도 있었다. 잘 쓰지 않은 물건을 갖다 놓기도 해 신기한 것도 많았다. 뒤 안을 구성하는 것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굴뚝이다. 굴뚝의 벽은 언제나 온기가 있었다.
동생과 내가 초등학교 다니며 집에 있을 때는 앵두가 익을 시간도 없이 다 따먹어 열매를 보기 힘들었다. 중학생이 되면서 집이 너무 멀어 학교근처에서 자취생활을 하였다. 주말에 집에 올라왔다. 앵두는 다른 과일이 익기 전에 빨리 익는다. 6월이면 탱글탱글 깨물어주고 싶은 앵두가 된다. 어느 한 주말은 집에 왔더니 아버지가 빨간 앵두를 커다란 그릇에 한 가득 따가지고 와선 먹으라고 주셨다. 무뚝뚝하신 아버지가 손수 그렇게 따서 갖다 주시는 것도 놀라웠지만 앵두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빨간 유리구슬 같이 반짝였던 기억이난다. ‘앵두 같은 입술’이라는 표현은 그것을 본 사람이 했으리라. 아버지는 우리 먹으라고, 우리 오면 준다고 다른 사람들 손을 못 대게 하셨단다. 동네에 아이들이 없으니 이제 이런 앵두 따먹을 사람도 없어졌다며 씁쓸해 하시기도 했다. 나는 앵두를 한 움큼 입에 털어 넣고 뒤 안으로 뛰어갔다. 앵두나무가 빨갰다. 잎사귀도 별로 없는 앵두나무에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앵두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그 이후로 앵두를 보면 아니 나무만 보아도 아버지가 생각난다. 빨간 앵두를 한 그릇에 가득 따다 주셨던 투박한 손의 아버지. 딱 한번 있었던 일이지만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다.
두 그루의 배나무도 있었다. 키가 큰, 그러니까 느티나무 만한 옛날 배나무이다. 담배를 찌는 황초실보다 키가 컸다. 배가 자두 열리듯 주렁주렁 열렸다. 배의 꼭지도 길었고 배의 크기도 어린 주먹만 했다. 우리는 애써 그것을 따려 하지 않았다. 태풍이 불거나 바람이 한차례 지나가면 후두두둑 떨어져 있었다. 그때 깨진 부분을 피해 옷에 쓱 한번 닦고는 베어 먹었다. 한 나무는 청색 배가 열렸는데 누런 배보다 훨씬 달았다.
배나무 옆에는 배나무보다는 키가 작지만 큰 사과나무가 있었다. 이 사과도 옛날 사과나무라 열매가 작았다. 나무의 색상이 배나무보다 어둡고 짙었다. 이 사과나무들은 과일 보다 이른 봄 예쁜 꽃을 선사해줬고 멋진 그늘을 주었다. 사과 나무아래는 널따란 바위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동생과 나는 거기서 소꿉놀이를 하곤 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언니랑 내가 한번은 엄청 싸웠다. 그때 어머니께서 회초리도 안 드시고 언니는 배나무에 나는 사과나무에 포로처럼 묶으셨다. 그러고는 실컷 싸우라며 들이 나가버리셨다. 언니랑 나랑 거기서 더 싸우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담하게 자리한 감나무도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나무다. 아담하고 건강하여 풍성하고 아름다운 밑동과 나뭇가지, 잎사귀와 꽃, 그리고 감을 열었던 나무. 그 단풍이 너무 고와 한 장 한 장 주워 모았던 나. 내가 가장 많이 쳐다보고 서성거렸던 나무이다.
그 뒤 안, 나에겐 비밀의 정원이었던 곳이다. 나는 이렇게 오래된 나무가 좋다. 노선사처럼 그윽하고 엄마처럼 푸근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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