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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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구성원 한명이 떠난 자리는 이상하게 티가난다. 특히 집 안에서
그 특유의 묘한 애잔함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니깐 그 방에 들어가면 ‘아
이방은 지금 주인이 없구나’라는 느낌이 든다. 머 간단하다. 소품들 배치가 너무 정돈되어 있다거나, 먼지가 쌓이지 않을 곳에
먼지가 쌓여있다거나 하는 식이다.
그런데 이게 조금 신기하다. 청소를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생각해보면 물건, 가구, 쓰던
소품까지 모두 그대로인데 딱 그 방에 들어가면 이상한 기운이 흐르는 것이다. 무채색 느낌의 아련함일까? 온기가 없다는 건 아니라, 그냥 그 공간 안에 있으면 허전함이 느껴진다.
예민해서 그런걸지도 모르지만 주인 없는 방에 가면 어릴적 할머니의 가구가 생각이 난다. 초등학교 시절, 할머니가 몸이 안 좋으셔서 우리집에 같이 살게 되었다. 방이 부족해서 난 할머니와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안그래도 작은
내방에 할머니를 위한 작은 가구들이 들어오면서 방이 더 좁아지게 되었다. 방이 좁아지는 게 싫지는 않았다. 나전칠기가 박힌 늙은이 취향의 가구들 역시 싫지 않았다. 난 정말로
할머니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할머니에게 상냥하지 않은 모든 이들을 공격했고, 가끔 할머니 먼저
수저를 드는 아버지에게 훈계를 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무조건 내 편이였고, 나 역시 무조건 할머니 편이였다. 용돈을 받으면 할머니를 위한 화과자나
흥부전같은 판소리 태잎을 사오기도 했다. 내 선물들이 할머니의 취향이 아니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뭔가를 해드리고 싶었다. 더운 여름날은 할머니는 밤새도록 부채질을 해주셨는데, 어쩌면 그런 희생에 대한 보답을 해야 한다고 느꼈던 것 같다.
할머니의 병세가 약회되시고 병원에 들어가시게 되었을 때, 내 방에
있는 할머니의 가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이였다. 난 대학 때문에 곧 이 방을 떠날 계획이였고, 할머니는 다시는 이 방에 못 오실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였다. 이미
그 시점에는 가족들 모두 할머니를 하늘로 보내드릴 각오를 하고 있었다. 어쨌든 난 절대 가구는 버리지는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대학 때문에 서울에 올라왔다. 이곳 낯선 곳의 생활이 재밌었는지
할머니에 대한 생각도, 집에 가는 것도 무심했다. 잘하는
게 없어서 그랬는지 난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할 것도 많았다. 나의
게으름과 별도로 끊임없이 불안해 했다. 그리고 어정쩡한 대학생활을 하다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장례식 때문에 오랜만에 돌아온 내 방은 모든 게 그대로였다. 침대, 책상과 책장의 책까지 전부 그대로 있었다. 혹시 아들을 그리워 하는
엄마의 이상한 취미인 건 아닐까 싶었지만 엄마는 그냥 귀찮아서라고만 대답하셨다. 오랜만에 보는 할머니의
가구 역시 그대로였다. 그 특유의 나전칠기 문양 역시 그대로였다. 그날
난 그 안에 있는 할머니의 소품들을 꺼내보면서 할머니를 추억했다. 내가 사다드린 테잎들과 할머니의 싸디싼
조악한 소지품들을 한참을 보았다. 왜 불편한 참빛을 쓰시는 건지, 파스는
왜 잘게 잘라서 사용했는지 생각할수록 마음이 먹먹해졌다.
할머니의 장례식은 슬펐다. 지금까지 어떤 장례식보다 가슴이 아팠다. 엄마가 우는 모습도, 그리고 내가 남들앞에서 울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할머니의 가구는 곧 버려졌다. 내
방은 내가 떠나고서 몇년동안 보존되었지만 할머니 가구는 장례식을 기점으로 버려졌던 것이다.
엄마가 할머니의 가구를 버린 이유는 나는 모른다. 아마 쓸 이유도
없고 공간도 부족해서 였을 테다. 그리고 당시에 내가 가구를 지키지 않은 이유 역시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더이상 그 방에서 지낼 이유가 없어서 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후회가 된다. 할머니의 많은 부분을 너무 쉽게 포기한 느낌이 든다.
할머니의 가구는 할머니가 아니다. 내방 역시 그 시절의 내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이성적인 것과 별개로 주인 없는 방과 주인없는 소품은 가끔 그 존재로 의미가 있기도 하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 그리로 그 풋풋한 그 시절의 우리를 기억하게
해준다. 할머니의 가구는 어쩌면 나에게 할머니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꾸려나갈 가족중 누군가 먼저 내 곁을 떠나게 된다면 난 그 방을 그대로 보존하고 싶다. 그건
버려버린 할머니의 가구에 대한 내 마지막 보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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