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땟쑤나무
- 조회 수 2016
- 댓글 수 2
- 추천 수 0
퇴근 길, 오늘도 직장에서의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조금 버겁다. 그냥 뿅하고 사라졌다가 뿅하고 나타나면 내가 집에 있었으면 좋겠다란 생각을 했다. 버스에서 내렸다. 집으로 가는 길에 우연히 친구 둘을 만났다. 윤성이와 성진이. 그 둘은 초등학교 동창이다. 대학교 1학년때 즈음, 아니면 대입을 앞둔 97년 2월 즈음인 것으로 기억이 나니, 녀석들을 본게 마지막이니 너무나 오랜 시간이 흘렀다. 친구들에게 너무나 반갑게 인사를 건냈다. 그리고 그동안 하지 못했던, 궁금했던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요즘 뭐하고 지내? 결혼은 했어? 직장은 어디야? 부모님들은 잘 지내셔?!'
쉴 새 없다. 윤성이는 그나마 가뭄에 콩나듯 안부를 물었왔고, SNS 를 통해, 그가 변리가사 된 것도, 두 아이의 아빠란 것도 알고 있는 터였다. 하지만, 성진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기에 나의 관심은 성진이에게로 쏠려 있었다. 녀석은 공대를 졸업하고 S 전자에 취업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오늘 내게 건낸 명함은 당췌 정체를 알 수 없는, 아니 알듯 모를 듯한 업종의 명함이 이었다. 'S 컨설팅 대표 이성진' 이 정도였던 듯 하다. 기억이 흐릿하다. 가물가물하다. 얼마나 흘렀을지 모를 시간, 친구들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나는 이들을 배웅했다. 그 날따라 버릇 정류장이 안개가 낀듯 뿌옇다. 아니 전체적으로 잿빛이 흐르는 듯 했다. 난 아쉬움을 뒤로 하고 버스를 타고 떠다는 그들을 보았다.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들과의 아쉬운 이별 뒤에 집으로 돌아서는데 또 다른 친구 필성이를 만났다. 우연일까......난 화들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이직을 위해 강릉에 있어야 할 필성이가 우리 집앞에 있다니....... 난 필성이에게 도대체 왜 여기에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러자,필성이가 나에게 반문한다.
"너야 말로, 여기는 어쩐 일이냐. 재수씨랑 애는 어떻게 하고 여기 온거야?!"
어리둥절했다. '이 녀석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거야?!' 어리둥절한 그 녀석과 나, 안개 낀 도시, 너도 오랜만에, 너무도 우연히 만난 윤성이와 성진이... 갑자기 이 모든 상황이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제서야 그곳이 나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눈앞에 보이는 모습은 집앞의 그것과 비슷하였지만 나와 필성이가 서 있는 반대쪽으로는 내 어린시절을 그와 함께 보낸 곳, 강릉의 어느 일부분이란 것을 알았다. 그제서야 나는 이 모든게 꿈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괴테의 자서전 '시와 진실'을 읽고 있었다. 괴테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꽤 방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가족의 이야기부터 자신을 둘어싸고 있는 사람들의 외모와 성격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들까지도 다루고 있었다. 또한 그는 조각이나 건축에 대한 조회가 깊은 것으로 보이는 듯 건축물 조목조목 뜯어보고 묘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그가 자신의 어린 시절 뛰어놀고 돌아다니던 도시 프랑크푸르트를 묘사하는 부분이었다. 만년에 그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생동감 넘치는 도시의 모습을 활자로 담아낸다니....... 나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난 그의 책을 읽으면서 나 또한 어린 시절 자랐던 내 고향 속초와 강릉이 떠올랐고, 갑자기 그곳이 몹시도 그리워지고 보고싶어졌다. 잠시 잠깐 짬을 내어 그 시절 그곳을 떠올려보았지만 쉽사리 그려지지가 않는다. 돌이켜보니 지난 수년간 난 내 어린 시절의 기억과 그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장소를 단 한번도 떠올리지 않았다. 갑자기 서글퍼졌다. 난 어린 시절에 대한 변변한 사진도 메모도 없으니, 만년에 시간이 된다한들 그 시절 그 곳을 괴테와 같은 생생한 묘사는 어려울 것이란 사실을 알게되었다. 아마도 지난 며칠간에 걸쳐 내 꿈속의 그곳들은(난 이틀에 걸쳐 고향의 꿈을 꾸었다. 한번은 변경연 가족과 구본형 선생님이 함께한 속초의 풍경이었고, 또 한번은 위에 얘기된 친구들이 나온 강릉의 풍경이었다) 내 무의식 안에 있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반영이었을 것이다. 융과 괴테의 자서전이 내 무의식 속 그것을 의식의 수면위로 올려놓았으며, 그리고 꿈이 이를 그린 것 뿐이란 생각이 든다.
20대 초반, 마음맞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사적인 이야기를 하면 나는 곧잘 나를 이렇게 소개하고는 했다.
'추억을 먹고 사는 아이'.
예전에 나는 추억을 먹고 사는 아이였다. 중학교 땐 초등학교(그 당시에는 국민학교였다) 전학오며 헤어진 친구와 좋아했던 꼬마숙녀를 몹시도 그리워했고, 고등학교 때는 중학교 시절 친하게 지낸 친구들을 그리워했고, 대학 때는 운동장에서 하루종일 농구만하며 살았던 고등학교 시절을 그리워했다. 친구들도 그런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마치 '맞아, 넌 그럼 놈이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군대를 갔다온 뒤 나의 모든 행위와 시간들이 '밥벌이'와 연결되어있다고 깨달은 뒤부터 나는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오직 졸업과 동시에 취업이 목표였고, 취업 후에는 평균이상의 성과를 내 조직내에서 인정받기를 원했다. 그와 동시에 한 사람과 사랑하여 가정을 꾸렸고, 그 사이에 둘을 똑 닮은 아이도 낳았다. 한 회사의 구성원으로, 한 가정의 가장이나 남편이자 아빠로, 그리고 때때로 아들로서의 역할을 해야하는 나에게, 수많은 페르소나로 살아야 하는 나에게 '추억'이란 것을 현실세계로 끌어들이는 것은 사치라 생각한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괴테나 융의 일생을 그린 자서전을 보며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나의 오늘은 단순이 오늘만이 아닌 것이다. 나의 오늘은 곧 나의 어제들이 모여 존재할 수 있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나의 내일은 나의 어제와 오늘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내일 더 잘 살기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듯, 같은 맥락에서 오늘을 잘 살기 위해 어제를 잊는다는 것도 어리석은지도 모른다. 그렇게 산다면, 우리의 인생은 오직 '오늘'만 존재하게 될 것이고, 개인의 역사도 인류 전체의 역사도 없어질 것이다.
인생이란 우리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이루어지는 것이다. 괴테는 자신의 일생의 모든 개별적 사항(괴테는 이를 '진실(Wahrheit)'이라 부르고)에 노년에 가능했던 자신의 인생관(괴테는 이를 '시(Dichtung)'라 불렀다)을 결합시켜 그의 멋진 자서전 '나의 인생 시와 진실'을 만들어냈다. 조금 늦으감 없지 않으나, 이제부터라도 난 오늘의 한 장면 한 장면을 부지런히 찍어 내 기억의 사진관에 보관하려 한다. 사소한 그 무언가 - 예를 들면 '지금 내 앞 창가 의자에 반쯤 누워서 스마트폰을 뚤어저랴(아마도 오락을 하고 있을 것 같다) 쳐다보고 있는 어떤 꼬마 숙녀, 그 옆에서 개인적인 목적이든, 회사에서 원하는 조건이든 간에, 매주 일요일 아침 중국인으로 보이는 강사와 함께 중국어 과외를 하고 있는 어떤 여자'와 같은....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장면들과 사람들 -를 기억에 담고 노트에 적어 놓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이 모든 사소한 것들이 퍼즐 조각이 되고, 그 퍼즐 조각들을 모아 끼워맞추면 결국엔 '인생'이란 그림이 완성될 수 있지 않을까...... 인생이란 그런 퍼즐 맞추기 일지도 모른다.
매일 큼지막한 공책에다가 글을 몇 줄씩 쓰십시오. 각자의 정신상태를 나타내는 내면의 일기가 아니라, 그 반대로 사람들, 동물들, 사물들 같은 외적인 세계 쪽으로 눈을 돌린 일기를 써보세요. 그러면 날이 갈수록 여러분은 글을 더 잘, 더 쉽게 쓸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특히 아주 풍성한 기록의 수확을 얻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눈과 귀는 매일 매일 알아 깨우친 갖가지 형태의 비정형의 잡동사니 속에서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골라내어서 거두어들일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사진작가가 하나의 사진이 될 수 있는 장면을 포착하여 사각의 틀 속에 분리시켜 넣게 되듯이 말입니다. < 미셸 투르니에, 외면일기>
대수씨의 결심을 응원하며 내가 좋아하는 구절 하나 놓고 갑니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3672 | 낙타의 노래 [4] | 유형선 | 2013.09.09 | 2239 |
» | #17. 인생이란 이름의 퍼즐맞추기 [2] | 땟쑤나무 | 2013.09.09 | 2016 |
3670 | #4_고통 바라보기 [1] | 서연 | 2013.09.09 | 2075 |
3669 | #17. 구선생님의 서재에서 할머니가 떠올랐다. [2] | 쭌영 | 2013.09.09 | 2109 |
3668 | 방문판매 세일즈 - 1. TAXI 법칙을 기억하라 [1] | 書元 | 2013.09.08 | 1991 |
3667 | 맞다. 우리 집에는 뒤 안이 있었다. [1] | 정야 | 2013.09.05 | 2334 |
3666 |
변화는 나의 벗 ![]() | 효인 | 2013.09.05 | 2111 |
3665 | #3_가치투자? 나는 개뿔이라고 생각한다. [2] | 서연 | 2013.09.03 | 3952 |
3664 |
[No.5-1]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아니야...-9기 서은경. ![]() | 서은경 | 2013.09.02 | 2342 |
3663 | 삶은 세상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 [4] | 오미경 | 2013.09.02 | 2084 |
3662 | '내 속의 나'와 벌이는 숨바꼭질 [4] | 유형선 | 2013.09.02 | 4512 |
3661 | #16. 김기덕과 그림자 [4] | 땟쑤나무 | 2013.09.02 | 1812 |
3660 | [9월 1주차] 먼저 인간이 되어라~~! [5] | 라비나비 | 2013.09.02 | 2475 |
3659 | #16. 인간처럼 행동하는 컴퓨터 만들기 [2] | 쭌영 | 2013.09.02 | 2311 |
3658 | Blooms day party 2부 | 레몬 | 2013.09.02 | 2622 |
3657 | 나안의 다른 나 [1] | 최재용 | 2013.09.02 | 2318 |
3656 |
Blooms day party 1부 ![]() | 레몬 | 2013.09.01 | 2583 |
3655 | 흥보가에 왜 양귀비가 나올까 [2] | 한정화 | 2013.08.30 | 2235 |
3654 |
[산행기] 천태, 이름에 하늘을 담은 자 ![]() | 장재용 | 2013.08.30 | 3515 |
3653 | 나는 자연보호를 모른다 [2] | 정야 | 2013.08.29 | 24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