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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10일 17시 57분 등록

구본형의 마지막 편지

어제보다 아름다운 오늘을 살고 싶은 그대에게,  휴머니스트, 2013

 

1. 잡다한 일로 꼭 하고픈 일을 못하는 p에게

솔직히 나는 네 편지를 읽으며 화가 났다…그래도 한 번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생각해 이 편지를 쓴다. 그러나 행간에 숨어있는 나의 분노와 안타까움을 놓치지 말고 함께 읽어주면 좋겠구나. 13

너는 성공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이것이 내가 본 현재 너의 위치 좌표다. 너 스스로를 잡다하게 쓰고 있기 때문이다. 너는 이 일도 저 일도 하면서 또 다른 일을 벌이기 시작한다. 이 일과 저 일이 서로 도우며 삶으로 결집되어 하나의 형체로 수렴되는 모습이 아니라 에너지가 사방으로 분산되는 모습이다. 힘과 힘이 만나 서로 돕지 못하고 갈라져 흩어지더니 이내 소진되는 모습을 나는 지켜본다. 힘이 모아지지 않으니 내가 가지고 있는 공력을 제대로 쓸 수 없는 것이다. 14

늘 글을 쓰니 나는 너를 작가라고 부르고 싶지만, 한 권의 책도 없으니 사회는 너를 작가라고 부르지 않는다. 제대로 완성된 작품이 하나도 없으니 너를 조각가라고 부를 수도 없다. 이제 막 연극을 시작했으니 너를 배우라 부를 수도 없다. 너는 분산되어 어디에도 온전한 네가 없다.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어느 것도 딱 떨어지게 마땅한 직업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15

프로가 되려면 오래해야 한다. 오랜 집중과 반복되는 훈련을 거쳐야 한다. 어느 영역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자기가 좋아하는 영역을 고르라는 것이다. 좋아하므로 그 길고 오랜 여정을 견딜 수 있고 그리하여 고된 수련이 주는 깊어지는 숙성의 기쁨을 얻으라는 것이다. 16

너는 ‘절망적 용기’라는 이 기묘한 말의 뜻을 알겠느냐. 그것은 마치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나는 이제 되돌아갈 수 없다. 무엇이 나를 기다리더라도 나는 모든 장애를 물리치고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는 인식이다. 내가 택한 길을 따라 여러 언덕과 험준한 장애를 넘어갈수록 나는 내길 에서 물러설 수 없게 된다. 나는 나의 영웅이 될 수 밖에 없다. 스스로 용기를 낼 수 밖에 없다.  16-17

이것저것 쉬운 단계에서 잠깐의 열정으로 다른 사람보다 조금 빨리 습득되는 작은 재주를 자랑해서는 안된다. 아마추어의 다양한 재미는 결코 프로의 깊은 맛을 따를 수 없다. 그래서 운명이 널 찾아오면 그 일에 너를 던지라는 것이다. ‘나는 이 길을 갈 것이다. 이것이 나의 뜻이다. 나는 나를 던져 이 일로 유명해지리라’ 이런 전사의 서원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니 잡다한 일로부터 너를 정리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17

일단 프로가 되려는 뜻을 세우면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워 지켜야한다. 17-18

첫째, 매일 일정한 시간을 하나의 일에 집중 투입해라. 이때는 반드시 이를 지원하는 습관의 힘을 빌려야 한다. 둘째, 번거로운 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라. 정신과 몸의 건강을 지켜주는 너만의 쾌락을 구하도록 해라. 그러나 그 외의 것들로부터는 자유로워지는 것이 좋다. 셋째, 필요한 만큼의 금전은 벌어야 한다. 집중하기 위해서는 생활에 너무 쪼달리면 안된다. 프로의 길로 들어서는 길에서 이익이 나면 좋겠지만 그 과정에서 돈벌이가 신통치않다면 먼저 절제해야 한다. 동시에 그 일이 부업 정도는 되도록 간단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두는 것이 좋다. 

너는 바짝 당겨 그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너는 골키퍼 밖에 없는 문전에서 슈팅을 포기한 꼴이 되었다. 너는 두려움에 진 것이다. 작가의 필연적 고뇌와 집중 과정에서 너무도 쉽게 물러난 것이다. 19

네 안에 있는 무수한 아마추어들에 맞서라…이런 사람들은 겨우 몇 달의 경험 수준을 여기저기서 반복하면서 영원한 아마추어로 남게 된다... 좋은 재능을 가지고도 즐거움을 주는 가벼운 앞 단계에 그치고 만다. 이들을 결국 프로가 되지 못한다. 좋아하는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불안하다. 재주가 많은 팔방미인이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은 모두 이런 것을 경계하라는 교훈이다.  19-20

나이가 들수록 좋은 의도로 필요한 조언을 해주는 사람의 수는 줄어들게 마련이다. 조언은 어떤 모습이든 나의 모자람에 대한 충고이니 불쾌한 요소를 품고 있게 마련이다. 그러니 조언이란 참 어려운 것이다. 어린아이도 싫어하는 조언을 왜 내가 어른에게 하겠느냐. 나는 그것이 바보 같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바보 같은 일을 지금 하는 것은 꼭 한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너는 그 동안 네 재능의 반짝임과 재치로 나를 웃게 했고 기쁘게 했다.  

나는 네가 내게 준 그 즐거움을 고마워한다. 그래서 꼭 한 번만 바보짓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20

맹자에 <불영과불행不盈科不行>이란 말이 나온다. '물이 흐르다 웅덩이를 만나면 그 웅덩이를 다 채운 다음에야 비로소 앞으로 나아간다'는 말이다. 네게 꼭 한 마디를 해야 한다면 이 말을 해주고 싶다. 21

작가로 살겠다고 마음 먹었으니 매일 글을 쓰고 그 글들이 페이지마다 연결되어 같은 방향으로 물길이 되어 흐르게 해라. 혹 커다란 웅덩이가 나타나 물길이 막히고 고여 나아가지 못할 때도 쉽게 던져버리고 다른 주제, 다른 영역, 다른 재미로 도망가지 말고 매일 그 웅덩이를 조금씩 채워가거라. 그 거대한 웅덩이가 다 차면 그 때 비로소 호수가 만들어진다. 웅덩이가 클수록 호수도 더 커진다. 채우는 시간이 길수록 수량이 더 풍부한 호수가 되는 것이다. 21

기억해라 신은 누구에게나 공헌할 수 있는 특별한 역할을 맡겼다. 너를 잡다하게 써 낭비하지 말아라. 너를 딱 맞는 네 일에 집중해 쓰도록 해라. 그리하여 오래 그 일을 배우고 좋아하고, 이윽고 그 일로 먹고 살고 즐길 수 있는 통달한 경지에 이르기를 바란다. 21

2. 세계 여행의 마지막 여정을 앞둔 B에게

방랑을 할 때는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면 안된다. 특히 다음 두 가지에 대해서는 결코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는 굶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이다. 방랑하는 시간은 긍정적이다. 성취에 대해서는 생각해서는 안된다. 27

지금까지의 네 삶을 돌아보아라. 지난 삶 자체가 하나의 줄거리를 이룬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시절, 그 순간에는 그야말로 혼란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뜻밖의 일이 또 다른 뜻 밖의 일을 뒤따르듯이 말이다. 그러나 ‘나중에 돌아보면 그야말로 완벽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모든 것이 그야말로 ‘뜻 밖이며 그야말로 적시’인 것이다. 이 패러독스, 나는 이것이 삶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그러므로 순간순간 삶의 떨림과 충만함을 따라가라고 조언하고 싶구나. 28

‘나는 살아있다, 고로 존재한다’ 이것이 젊은이의 모토여야 한다..30

자신을 떨리게 한 우연한 각성에 다다른 사람들은 모험이 없는 인생은 로망이 없는 연애처럼 지루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31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시인이 아니다. 그러나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시인도 시인이 아니다.-파블로 네루다 31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마음 속에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품자 –체 게바라 32

현실은 우리가 리얼리스트가 되도록 한다. 그러나 꿈을 꾸자. 하늘로부터 받은 모든 영감을 동원하고 지혜를 빌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일을 기도(企圖)해보자. 32  

꿈은 미래를 지향하고 마음은 현재의 살아있음을 감지할 때 삶은 올바른 방향으로 지금을 음미하며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33

, 인생을 하고 싶은 일로 가득 채우는 일, 그 일보다 신나는 일이 어디 있겠느냐.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보내기에도 너무 짧은 인생인 것을. 33

3. Y에게, 젊음은 미리 늙지 않는 것이다

그 때 문득 이 밤이 나쁘지 않다는 느닷없는 생각이 들었다네. 봄 눈이 미친 듯이 쏟아지는 이 밤. 눈길을 걸어 집에 가도 나쁘지 않으리라. 옷깃을 세우고 잠시 망설이는 나를 몰아 눈길을 걸어보기로 했네. 마음을 먹자, 그 길은 즐겁고 특별한 작은 모험처럼 여겨졌다네. 내가 그런 우스운 시도를 하게 된 것은 아마 불과 몇 시간 전에 그대들 젊은이들을 대학 캠퍼스 안에 수백명 모아놓고 ‘젊음은 젊음으로 살아야한다’고 말하고 난 뒤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네. 38

나는 젊음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바로 ‘아주 많은 우연한 사건들’ 속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용기라고 생각하네. 지나고 보니 인생은 결국 여러 크고 작은 사건들로 짜여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계획대로 일이 이루어져 기쁘기도 하고, 오래 준비하고 바라던 일이 무산되어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는 삶에 당황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지내기도 하지만 결국 그 사건들이 곧 인생의 내용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네. 41

누군가의 삶이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가 되려면 그 사건들이 흥미진진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커다란 사건들만 추구하라는 뜻이 아니라네. 중요한 것은 어떤 사건이든 그것을 훌륭하게 재해석해낼 수 있는 힘에 달려 있네. 41  

잘 생각해보게. 사건의 크기가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해 전해지는 깨달음의 크기가 인생을 바꾸는 것이라네. 사건을 해석하는 힘을 키우고 그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우주가 천둥처럼 전하는 그 목소리를 놓치지 말게. 43

젊음은 젊음으로 인생에 기여한다네. 너무도 쉽게 늙지 말게. 위대한 것이 그대의 가슴 속에서 자라나는 것을 받아들이고 우주와 공명하며 자신에게 맡겨진 ‘그 일’을 반드시 해내게. 44 

4. 결혼을 앞둔 J를 위하여

봄이 시작되었네. 봄은 꽃으로 시작하네. 시작하자마자 끝나는 계절이 봄이지. 봄의 끝자락보다 더 덧없는 것은 없다네. 그러나 봄의 아름다움은 바로 그 단명한 아쉬움에 있다네. 49

인간의 삶은 슬프다네. 그 단명함 때문에. 청춘인가 했더니 벌써 내 귀밑머리가 속절없이 희어졌네. 하루가 저무는 속도가 화살 같고, 일 년이 촌음 같아. 결국 오늘이 마지막인 듯 살아야만 가장 잘 사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네. 49

오늘 죽을 것처럼 살아보자 하니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어 보이네. 사랑하라. 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 이 말이 얼마나 좋은지. 지는 꽃이 추하다는 것은 그 꽃이 아름다웠기 때문일 것이니, 아름다울 때 마음껏 사랑하는 것이 사는 법인가 하네. 50

모든 상처는 인생의 약이 되나니,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꽃이 온 들판에 가득할 때, 커다란 모자를 쓰고 반바지를 입고 그 환한 들판을 쏘다닐 때조차 다리엔 온통 억새가 만들어낸

크고 작은 상처로 따갑다. 가장 아름답고 즐거울 때조차 그 순간을 지나는 상흔과 자취가 남는 것이니 아픔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것이 살아있음이니. 54

인간은 실제 필요에 충실한 동물적 인간성과 ‘잉여의 신성한 아름다움’(

이 표현은 미국 캘리포니아의 시인 로빈슨 제퍼스가 쓴 표현이라네)을 즐길 줄 아는 문화적이고 정신적인 인간성을 한 몸 안에 모두 가지고 있다네. 이 둘이 한 몸속의 두가지 속성이라네. 결혼은 이 두 가지 속성이 생활의 공간에서 적나라하게 부딪치고 조화하는 삶의 현장이라고 생각하네. 53

그러니 나는 두 가지를 당부하고 싶네.

하나는 싸움을 잘하라는 것이네. 부딪치지 않고 조화할 수 없다네. 두 물결이 만나면 파도가 만들어지고 두 손바닥이 마주치면 소리가 난다네. 바로 이 것이 두 존재가 함께 존재하는 방식이라네. 하나가 늘 피하고 양보하고 눌러두면 다른 사람에게는 편할지 몰라도 참는 사람에게는 질곡과 억압이지 않겠는가. 그것은 진정한 관계가 아니라네. 결혼이 아니라네. 차이를 받아들이면서 서로 잘 어울리기 위해서는 창조적 불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네. 나는 이 불협화음을 튜닝이라고 부른다네. 53

크고 작은 사건이 생길 때마다 마치 연주자가 튜닝을 하듯 서로의 감정과 생각을 조율하도록 하시게. 그렇게 해서 점점 서로의 악기가 되어가는 것이 나는 관계라고 생각하네. 많이 싸우시게. 그러나 악기를 거칠게 다루어서는 안되네. 그것이 튜닝이라는 것을 잊지 말게. 결혼은 ‘관계라는 제단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임을 늘 기억해주기 바라네. 54

또 하나는 결혼을 통해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네. 종종 결혼을 자유의 억압과 축소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네…사랑은 상대방을 꽃피게 하는 것이라네. 상대방이 그 사람의 길을 가도록 도와주는 가장 훌륭한 스폰서가 되어주는 것이라네. 튜닝의 과정을 거친 후 비로소 악기는 연주할 준비가 되어있으니 훌륭함은 그 때 만들어진다네. 연주되지 않는 악기,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니 훌륭한 연주를 할 수 있도록 서로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네. 54

자신이 만일 하나의 악기라면 어떤 악기이고 싶은지 상상해보게. 어떤 음색, 어떤 방식으로 연주되는 악기인지 생각해보게. 그리고 상대가 어떤 악보에 따라 어떻게 연주할 때 최고의 연주가 될 수 있는지 서로 잘 튜닝하고 연습하고 끝없이 연주하게. 그대들 두 사람의 삶을 지켜보는 우리는 음악회에 온 청중이네. 우리를 아름다운 선율로 감동시켜 주게. 그리하여 ‘부라보’를 외치게 해주게. 55

5. 남자 고르는 법에 대하여, 사랑에 빠진 L에게 

남자를 고르는 첫 번째이며 절대적 기준은 ‘착한 놈이 좋은 놈’이라는 것이다. 착하다는 것은 일종의 지능이다. 지능은 타고나는 것이지. 착한 사람은 가시적으로 자기 성찰을 할 능력을 반드시 가지고 있다. 이는 자신을 탐험하는 힘이다. 악은 자기 성찰이 부족한 곳에서 생겨난다. 착한 사람이야말로 자기 식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이것이 가장 중요한 선택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62

남자를 고르는 두 번째 기준은 당연히 ‘가슴이 따뜻한 훈남’이다. 내가 보기에 종종 멀쩡한 여자도 나쁜 ‘남자 증후군’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차가운 인간에게서 날타로운 지성의 힘을 느끼기도 하고 폭력적인 남자를 증오하고 두려워하면서도 빠져들며, 이기적인 사내에게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느끼기도 한다. 그것은 악어를 타고 강을 건너는 것처럼 위태롭고 전갈을 등에 태운 개구리처럼 불운한 운명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이런 남자를 고르는 여인은 인형과 노예 역할을 맡아야 한다. 62

남자를 고르는 마지막 기준은 자신의 재능으로 먹고 살 수 있는 남자이다. 사람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자기다울 때다. 잘 맞는 일에 몰입하고 있을 때 사람은 아름답다. 가수가 노래할 때, 춤 꾼이 춤출 때, 화가가 그림을 그리고 작가가 그 글에 빠져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이 가장 멋진 최고의 풍광 속에 놓여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직 젊기에 충분히 꽃피지 못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재능이 무엇인지 알고 그 일로 성공하기 위해 잘 준비하는 남자라면 그 분야가 무엇이든 이미 충분히 매력적이다. 64-65

그 사랑이 사랑이려면 둘이 잘 어울려야 한다….그 사랑이 아름답다고 여겨지려면 같이 있을 때가 홀로 있을 때보다 더 고와야 한다. 그러니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된 듯 여겨질 때 그 사랑은 빛나는 것이다. 65

서로 사랑하지 않고 아름다운 사랑이 될 수는 없다. 부디 남자를 잘 고르도록 해라. 마음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알고 너를 자신보다 아껴 사랑이 빛나게 하며 스스로 가장 잘하는 것으로 유혹할 수 있는 남자는 사귀어 깊이 빠질 만하다. 그 외의 것들은 다 허상이다. 있으면 좋은 것들이나 그것에 기대지 마라. 허당이다. 기대는 순간 무너져내려 쓰러지게 될 것이다. 66

세상이 만들어주는대로 살지 마라. 재미없다. 너로 인해 세상의 한 조각이 기뻐하게 해라. 그러니 네게 걸맞은 사람을 만나면 그를 기쁘게 만들어라. 잘 어울릴 것이다. 어울리지 않고 아름다운 것이 있더냐. 잘 만나 아껴라. 지극한 사랑이 아름다운 것이니 봄이 꽃을 그리워하듯, 그리 살아라. 66  

6. 제발 떠나게, 일 밖에 모르는 M에게

한 마디로 여행이란 젊디젊은 뛰는 흥분으로 새로운 공간으로 자신이 확장되어가는 짜릿함을 즐겨야한다고 말하고 싶네. 73

자네는 모든 것을 뒤로 미루는 못된 버릇이 있네. 마치 인생의 끝에 모든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말이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네….젊어서는 돈을 벌기 위해 젊음을 쓰고 나이 들어서는 젊음을 되찾기 위해 돈을 쓰는 바보 같은 짓을 하지 말라는 뜻이네. 그때그때 미루지 말고 그때의 정신으로 그 순간 인생에 찾아든 기쁨을 추구하라는 말이네. 74

우리 집에 들어오는 사람은 두 번 놀란다네. 한 번은 이렇게 높은 곳에도 사람이 사는구나 하는 경이로움이고 또 한 번은 서울 시내에 이렇게 경관이 좋은 곳이 있구나 하는 감탄이라네. 내가 아침마다 감탄과 함께 새날이 밝아오는 것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을 가지게 된 것이 순전히 여행의 덕이라면 자네는 믿겠는가. 그러나 사실이라네. 공간에 대한 새로운 의식이 그 때 열렸던 것이라네. 75

여행지란 얼마나 낭만적인 생각으로 가득한가. 나를 모르는 곳에서 전혀 일상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된 듯, 정녕 살아보고 싶은 그 모습으로, 남들이 일하는 벌건 대낮의 의무로부터 벗어나 조금 튀는 옷을 입고 선글라스 속의 눈초리로 지나가는 예쁜 여인에게 미소를 던질 수 있다는 것은, 혹은 낯선 거리를 지나며 모르는 남자가 부는 유혹의 휘파람 소리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76

나는 매년 두 번의 제법 긴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네. 매년 두 번의 여행,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곳으로 훌쩍 떠나는 한 달도 못되는 선물을 내게 주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77

내가 어려서부터 알아온 그대가 그대의 모든 것이라면 그대는 탐사할 매력을 잃은 별에 불과할 것이네. 올해는 휴가를 제대로 내서 정말 괜찮은 여행을 떠나도록 하게. 자네라는 별을 다면적으로 관찰할 지구상의 여러 천문대를 찾아 떠나보게. 그 여행에서 돌아와 자네는 감사할 것이네. 분명히 그리 될 것이네. 78

7. 생전 처음 쓰는 아버님 전상서

이제는 제 마음에 어떤 생각이 찾아오면 가능하면 그 생각대로 실천해보려고 합니다. 그것이 인생을 즐기는 훌륭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83

나이가 들어 아이를 키워보니 자식에게 무심한 부모가 어디 있겠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무관심은 아마 어찌어찌 잘 풀려가겠지, 사람 사는 일이 제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제 운명대로 가는 것이니 잘 풀리겠지 하는 낙천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는지요. 그게 어쩌면 되는 일 하나 없는 그 때 그 세상을 산 아버지가 어려운 세월을 견딘 철학은 아니었는지요. 86

집을 나서 아버지 친구 분을 만나러 혜화동으로 갔지요. 그 때 우리는 지금의 대학로 위 낙산 꼭대기에 살고 있었으니 천천히 걸어가면 되는 거리였습니다.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명료한 그 환한 여름날, 하얀 모시옷을 입고 앞서가는 아버지는 참 멋지셨어요. 그래서 저는 조금 떨어져 걸으며 ‘저 분이 내 아버지다’ 라는 즐거운 생각에 젖어 제법 긴 그 길을 내려갔습니다. 그게 제가 기억하는 아버지에 대한 최고의 명장면입니다. 89  

이제 제가 그 흰 모시옷을 입은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저는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습니다. 좋은 아버지, 전 그게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빛나는 순간을 아주 많이 기억하는 사람, 저는 그런 아버지가 좋은 아버지가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이들에 대해 아주 많은 아름다운 심상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간혹 그 아이들에게 그 아름다운 장면을 이야기해 줄 수 있으면, 그리하여 스스로 그 아름다운 순간을 거쳐왔음을 잊지 않게 해줄 수 있다면 아주 멋진 아버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89

하얀 모시옷의 멋스러운 아버지를 기억하듯, 저도 제 아이들의 기억 속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고 싶습니다. 그것보다 훌륭한 유산이 있을까요…아름다운 심상이란 단지 겉모습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뒷모습’처럼 아주 많은 사연을 담고 그 사연과 함께 녹아내리고 혼융되어가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기억으로 채색된 오래된 도자기 같은 것이 아닐까요. 90

8. K야 원하는 일에 너를 던져라  

너를 보면 사람의 타고난 재주란 바지 속에 넣으면 뾰족한 끝이 주머니를 뚫고 나올 수 밖에 없는 송곳 같은 것임을 떠올리게 된다. 스스로 자랑하지 않아도 감출 수 없는 것이 타고난 재주 아니겠느냐. 95  

내게도 그런 일이 벌어지곤 한다. 기쁨이 기쁨에 연이어 손을 잡고 나타나고 마치 오랫동안 그 일이 예견된 것처럼, 한 일이 벌어지면 연이어 그 일의 다음 단계가 저절로 열리는 듯할 때가 있다. 그 때는 그 흐름을 따라가야 한다. 그것은 우주가 오래 기다리다가 일을 도와주기 위해 스스로 펼쳐지는 것과 같다. 100

물질이란 결국 기본적으로 전체 속에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있으면서 국소적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놓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존재 자체가 개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 데이비드 봄 104

나는 내 속에 분리되지 않은 우주를 기억하고 있네. 그러니 어느 날 불현듯 우주적 공명에 내가 떨림을 느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어느 날 알 수 없는 기쁨에 내 영혼이 환호하는 이유도 그렇다. 숨이 멎을 듯이 아름다운 어느 풍광에 압도되어 오직 감탄 만이 내 입술에 머물 때도 나는 우주적 존재로서의 나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102  

하나의 일이 벌어지면 그 것과 연관된 사람들과 사건들이 하나씩 펼쳐져 등장하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 나오는 신비한 단어 ‘마크툽(maktoob: 미리 쓰여 있다)’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마음이 감응하는 것이다. 102

바야흐로 너의 인생이 펼쳐지기 시작하는구나. 이 때는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이 일에 너를 던져 넣어야 한다. 헌신이란 그런 뜻이다. 헌신이 필요하다. 당분간 회사를 다니는 일을 빼고는 모든 시간을 여기에 쏟도록 해라. 이윽고 때가 되면 너는 오직 이 일만을 하면 살게 될 것이다. 기쁨으로 축하한다. 이 일로 너는 삶을 즐기게 될 것이다. 103

9. 졸업을 앞둔 S에게, 직장 구하는 법에 대하여  

직장은 마치 천직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이 머무는 연옥과 같아서 그 속에서 수많은 회로애락을 거치게 되고 이 일 저 일을 맛보고 수련하기에 적합한 장소다. 나는 이 직장에서의 수련이 천직으로 가는 길로 이어지는 또 다른 통로라는 것을 알고 있다. 108

구직의 과정 역시 인생을 사는 방식과 별로 다르지 않다. 내가 생각할 때 가장 괜찮은 성취의 정신은 ‘전심전력을 다해 목표를 향해가는 자유, 그러나 통제하거나 억지로 만들어내지 않고 삶의 창조적 흐름에 나를 맡겨둘 자유’를 동시에 존중하는 것이다. 동양인들은 그것을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불러왔다. 인간으로서 해야할 일을 다하고 나서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108

구직과정 역시 인생의 즐거운 과제이니 한 번 스스로 즐겨볼 만 하다. 몇 가지 게임의 원칙을 알려줄 테니 네 취향에 맞게 변형하여 써보도록 해라.

첫째 취업은 삶에 대한 자세와 재능을 파는 것이라는 새로운 원칙을 이해하는 것이 좋다. 대우가 좋은 대기업은 경쟁이 심한 곳이다. 전형적인 레드오션이다. 만일 이곳에 성공적으로 입사하려면 자신의 특별함을 팔아야한다. 109

둘째, 발품을 팔아야 한다. 시선을 다양하게 돌려, 잘 알려져 있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지원하는 곳은 아니지만 아주 괜찮은 (중소)기업을 찾아보는 것이다…다른 업체에서 3년 정도 근무한 후 이런 곳(글로벌 기업이나 대기업)으로 전직하는 것도 중기 전략으로 쓸 만하다. 111

셋째, 아주 강력한 자기소개서를 써두라는 것이다. 취업을 원하는 젊은이들은 대부분 학교를 막 마친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에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경험 위주로 쓰다 보면 자기소개서가 대부분 천편일률적으로 보이게 마련이다. 그러나 어떻게 쓰고 무엇을 강조하며 어디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아주 다른 각도의 자기소개를 할 수 있다. 111  

내가 보기에 가장 잘 쓴 자기소개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어야 한다.

*너의 가치관과 직업관을 인상적으로 보여줄 수 있도록 명시하는 것이 좋다.

*네가 이룬 가장 훌륭한 성과와 경험을 드러내라. 네가 누구인지를 긍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차별적인 경험이 있다면 놓쳐서는 안된다. 가시적인 것도 물론 좋지만 사적이고 정신적인 도약이 이루어진 순간도 빼놓지 말거라.

*강점과 재능을 강력하게 어필해라. 특히 특정 부서를 마음 속에 두고 있다면 앞으로 맡을 일과 너의 강점과 재능이 어떻게 결합되어 시너지를 낼 수 있는지 잘 연결해두는 것이 좋다.

* 지원 동기 및 자세 역시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왜 이 회사를 선택했고 이곳에 들어와 어떤 자세로 헌신하고 기여할 것인지를 열정적으로 밝힐 수 있다면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112

덕이 재능보다 나은 사람과 재능이 덕보다 나은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늘 갈등한다. 내가 보기에 오랜 기간을 두고 잘 쓸 수 있는 인물은 덕이 재능보다 나은 사람이다. 타고난 재능의 크기는 바꿀 수 없지만 지식과 경험이 늘면 능력도 커지기에 덕이 있는 사람들은 점점 더 좋은 인재로 계발해 쓸 수 있다. 그러나 재주는 있으나 사람의 심장이 작고 소인이면 그것을 바꾸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니 재능이 덕보다 훨씬 승한 사람은 아깝기는 하지만 중용하기 어렵다. 덕이 재능보다 나은 사람을 고르는 것이 더 나은 결정이라는 것을 웬만한 경영자들은 경험적으로 다 알고 있다. 114

이제 너는 사회로 나가게 되었다. 조직에 헌신하다 보면 개인의 자유는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나쁜 것만은 아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함께 일하는 방법을 배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닥의 맛을 보아라. 그러나 많이 웃어라. 그리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간으로부터, 밑에서부터 배우도록 해라. 건투를 빈다. 114

10. 마침내 화가가 된 A에게

표정 하나, 자네는 화가가 되는 것이 유일한 꿈이었지. 다른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었지. 그러나 화가도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찾아온 현실을 해결해야 했지…그림 옆에 있었으나 화가는 되지 못한 사람, 그것은 마치 아직 사랑을 고백하지는 못했으나 마음으로 짝사랑한 애인이 다른 남자를 좋아하는 것을 지켜보는 아픔 같이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지. 120

표정 둘, 일을 끝내고, 그래 밥을 벌어야 하는 시간을 끝내고 휴식이 찾아오면 팔레트와 붓을 들고 이젤 앞에 앉아있는 그대를 상상했지만 그대는 밤이 되면 그대로 쓰러져 잘 수 밖에 없는 생활인으로 살고 있었지. 다음날 아침 회한으로 스스로를 미워하고 그날이 저물면 그림 그리기가 두려운 자신을 다시 만났을 것이네…나는 그 때 그대의 얼굴에서 ‘떠난 자의 시절’. 바로 방황과 무기력과 일상이 지배한 그대의 ‘범벅 표정’을 보았네 121-122

표정 셋, 그것은 ‘어떤 결심을 품은 자의 얼굴’이었네.  자네는 내게 편지를 보내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에 다시 참석하고 싶다고 했지. 사람이 다 찼으니 다음에 오면 어떻겠냐고 했을 때 자네는 꼭 이번이어야 한다고 말했네. 그 때 자세는 앞으로 벌어질 아름다운 10개의 풍광을 그려가기 시작했네. ‘매일 그리자. 천 개의 얼굴을 그려보자. 그러면 마음이 본 것을 손이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바로 얼마 전 꽃이 피기 시작한 봄에 있었던 일이네. 122-123

표정 넷, 나는 아직 이 표정을 보지 못했네… 자네는 3년이 지나는 동안 ‘천 개의 얼굴’을 그려보게 될 것이네. 이것은 마치 이미 일어난 일처럼 확실한 미래가 아니겠는가. ‘현대인의 표정전’이라는 자네의 아름다운 풍광 중 하나는 아직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으나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확실한 미래가 된 것이네. 나는 이것을 확신하네. 왜냐하면 나는 이미 ‘매일의 맛’을 알고 있기 때문이네 123-124

매일 글쓰기를 시작한 지 13년이 흘렀네. 그동안 나는 17권의 책을 내게 되었네. 1 1책’이라는 내 꿈의 풍광은 내가 매일 새벽 글쓰기를 하는 한, 이미 일어난 과거처럼 거의 확실한 일이 되었네. 미래도 과거처럼 확실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매일의 힘과 습관이라는 것을 알고 또한 믿고 있기에 나는 ‘매일 그리기’가 ‘얼굴의 화가’라는 그대의 꿈을 이루게 해주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네. 124 

가족의 얼굴들이 한 화면에 들어간 다이내믹한 그림을 그려 보고 싶을 때, 내게 알려주게. 나는 모두 정면을 쳐다보고 있는 사진 같은 그림은 원하지 않네. 각자 자신의 세상을 바라보고 있지만, 서로의 세계를 애정으로 지켜보는 가족의 사랑을 그려주게. 그것이 내가 만들고 싶은 가정이라네. 매일 그리는 자네라면 나를 감동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하네. 지금 주문하니 때가 되면 그려주게. 125

어떤 일은 바랐으나 이루어지지 않고, 어떤 일은 바라지 않았으나 뜻밖에 이루어지기도 한다네. 그리고 알게 되지. 그 바라지 않았던 일이 사실은 마음을 다해 바라던 바로 그 일이라는 것을 말일세. 125

나는 지금의 내가 좋네. 나는 자유와 독립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네. 내가 되기 위해 나는 그 긴 세월을 둘러왔네. 그 둘러온 인생이 바로 내 삶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네. 126

삶과 예술은 분리될 수 없네. 만일 그렇게 산다면 그것의 예술가의 삶이 아니라네. 이제 자네는 진정한 화가로 입문한 것이네. 비로소 세월 속에 그대를 담게 되었네. 축하하네. 126

11. 좋은 사장이 되고픈 H에게 

내가 오늘 본 데이비드 로렌스의 시에 이런 귀절이 있더군요. 들어보세요.

혁명을 하려면 웃고 즐기며 해라. 너무 진지하게 하지 말라. 그저 재미로 해라. 노동자 계급을 위한 혁명을 하지 마라. 우리의 자력으로 괜찮은 귀족이 되는 그런 혁명을 해라… 노동은 이제껏 우리가 너무 많이 해온 것 아닌가. 우리 노동을 폐지하자. 우리 일하는 것에 종지부를 찍자. 일을 재미로 하자. 그러면 일은 노동이 아니다. 우리 노동을 그렇게 하자. 우리 재미를 위한 혁명을 하자. 132

그래요 우리는 한 권의 시집과 포도주 한 병과 빵 한 덩어리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기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 가지려고 싸우는 전쟁의 와중에도 놓아두고 나누는 정신을 키운다면 멋지다 할 수 있지 않을는지요. 132

H사장, 당신은 내가 만난 기업가들 중에서 가장 진정성이 강한 사람입니다. 그게 당신의 가장 큰 매력이며 강점입니다…전정성이란 무엇일까요. 최근에 이 진정성에 대한 좋은 정의를 발견하였습니다. 제임스 길모어라는 사람은 진정성을 ‘스스로의 이미지에 일치하는 내면과 외면의 조화’라고 규정합니다. 외면적 이미지와 내면적 자아가 일치하면 좋겠지만 사회적 인간은 그럴 수 없어요. 가면을 벗는 순간, 벌거벗는 것이 되니 문명사회에서 그렇게 벌거벗고 살 순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완벽한 일치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외면적 이미지와 내면적 자아 사이의 적절한 균형과 조화가 중요한 것입니다. 135

나는 진정성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비즈니스의 발전 모델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가장 초보적인 단계의 기업은 순수한 자본주의적 원칙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경쟁이 지배원리입니다. 서로를 동료라 부르지만 실제로는 ‘그들’이라고 부릅니다. 대부분의 기업은 이 수준에 머뭅니다. 그 다음 단계는 ‘운명공동체’라는 인식을 나누는 기업입니다. ‘우리’라고 부릅니다. 서로 동등한 동료로 인식하고 배려하는 문화 속에서 가장 많이 받는 사람과 가장 적게 받는 사람의 격차가 줄어들게 됩니다. 이 단계에 도달한 조직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세 번째 수준에 오른 기업은 그 지역사회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됩니다. 기업은 뿌리를 내린 지역 사회의 도움으로 자신의 번영과 성장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인식합니다... 마지막 도약의 단계는 인류에 대해 책임을 지는 수준에 이르는 것이지요. 기업은 진정성에 기초한 지속 가능한 경영의 원칙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게 됨으로써 사회적의 선()의 철학을 가진 조직으로 도약하게 되는 것이지요. 135-136

<포춘>지가 선정한 가장 일하고 싶은 회사 1위에 오른 SAS라는 소프트웨어 회사는 아주 재밌고 소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행복한 젖소가 더 많은 우유를 생산한다’라는 것이지요. 직원이 행복하면 고객이 행복하고 사회가 행복하며, 따라서 인류의 행복에 기여할 수 있다는 믿음이지요. 138  

먼저 정신과 영혼을 다듬는 아카데미를 만드세요… 일터는 우리가 스스로 알아가는 현장입니다. 헌신함으로써 자신을 찾아가는 모험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해야합니다. 일에서 기쁨을 발견하고 성과를 창조할 수 있도록 일과 관심사를 연결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내면적 동기가 여름의 숲처럼 무성해집니다. 일터라는 대지에서 스스로가 심은 꿈이 쑥쑥 커나갈 때 그 개인들은 그 숲을 이루는 건강한 나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게 됩니다. 138  

리더십이란 ‘우리가 함께 해냈다’라고 외치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공 뒤에 ‘우리’라는 명료한 실체가 있어야 합니다. 누구도 성공으로부터 소외되지 않고 각자 그 성공의 한 부분이 될 때 ‘우리’가 만들어집니다. 희생이야말로 자발적 헌신을 막는 가장 비참한 단어입니다…헌신하면서도 행복한 직원들만이 유일하면서도 차별적인 최고를 만들어냅니다. 사회적 선의와 본업을 통해 사회와 인류에 기여할 때, 우리는 그 기업을 위대한 기업이라고 부릅니다. 138-139   

삶이 인생의 전부입니다. 그러니 매 순간 살아있어야 합니다. 삶은 과거처럼 이미 결정된 것도 아니고 미래처럼 머릿 속에 정형화된 완벽도 아닙니다. 삶은 지금이며, 생명의 출렁임이며, 거친 호흡이며, 구름처럼 불완전한 끊임없는 변이입니다. 그래서 흥미롭습니다. 이 긴 편지를 쓰며 당신을 생각합니다. 139

12. 대범하고 거침없이, 다시 그대에게  

이 도시(피렌체)를 아끼고 아껴두었지요. 유럽을 다 돌면서도 이탈리아 반도의 몇 개 도시들은 늘 가보지 않은 그리움의 대상으로 남겨두고 그 옆을 스쳐 지나가곤 했으니까요. 나는 인류의 문화로 가득한 도시들을 몇 개 남겨놓음으로써 늘 가슴에 여행에 대한 신선함과 호기심, 그리고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한 욕망을 남겨두었지요. 143

그곳을 돌아보며, 역사는 결국 인물이고 인간일 수 밖에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유일한 인간들의 무한한 투쟁, 이곳에 잠들어 있으나 그 업적으로 삶의 유한함에 도전한 인물들의 영혼에 감읍하며 팡파르가 나를 깨울 때까지 그 계단 앞에서 넋을 놓고 서 있었지요…이름만으로 르네상스를 느끼게 했던 거장들의 숨결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느껴본다는 것이야말로 여행만이 줄 수 있는 현장의 기쁨이 아닐는지요. 144-145

이윽고 나는 로렌초 일 마니피코(Lorenzo il Magnifico, 1445년경-1510)의 초상 앞에 섰습니다…이 사람이 그 유명한 메디치가의 로렌초입니다. 마키아벨리가 그를 두고 ‘운명으로부터, 신으로부터 최대한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고 쓴 바로 그 사람입니다. 145

그는 할아버지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 1389-1464)로부터 남다른 유산을 물려받았지요. 할아버지 코시모와 손자 로렌초의 재력과 지원이 없었다면 피렌체에 그 많은 천재가 몰려들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 도시가 당시로서는 꿈꿀 수도 없는 웅장한 규모의 르네상스 발원지가 되지도 못했을 겁니다. 이 초상화 앞에서 나는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경영자이고 돈도 많이 벌었지요. 그 많은 돈을 어디다 쓸 것인지요. 146  

코시모 데 메디치는 이렇게 말했지요..

“나는 이 도시의 기분을 알고 있다. 우리 메디치가가 쫓겨나는 대 50년도 걸리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은 가도 물건은 남는다. 147

실제로 그의 예상대로 메디치가가 피렌체를 이끈 시기는 60년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500년이 지난 지금도 피렌체는 관광객으로 붐빕니다. 바로 여기에 있을 수 없는 역설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남겨진 물건 뿐 아니라 그 물건을 만들어낸 위대한 인물들이라는 점입니다. 147  

영원한 도시, 그 압도적 풍광으로 나를 전율하게 한 로마의 시가지를 돌아보며 깨닫게 됩니다. 다양성의 존중이란 참아야하는 갈등과 불편이 아니라, 특이성과 차이에 대하여 전혀 개의치 않는 대범한 정신이라는 것을. 150

‘아리오소(arioso), 대범하고 거리낌없이’라는 말은 영원한 로마의 정신을 가장 훌륭하게 대변하는 단어입니다. 오늘 생각합니다. 자기 경영은 세상에 대한 아리오소입니다. 모든 방향에서 불어오는 다양한 바람에 몸을 싣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솟구치는 것이며 마음을 좇는 것이며 새로운 차원과 공간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4차원과 5차원을 지향함으로써 경계를 넘어 새로운 정신세계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150

나는 당신이 르네상스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문화와 예술에 당신의 부를 모두 쓰고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역사는 결국 사람일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 경영은 내 속에 묻혀 있는 인간을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르네상스지요. 151

13. 신이여 저를 다 쓰소서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신을 아는 것은 오만을 낳고, 신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 - 파스칼 팡세 155  

당신이 보내주신 사제와 포도주를 마시다 보니 날이 저물고 눈이 내리기 시작했지요. 이내 평펑 쏟아져 온 천지가 하얗게 변하고 말았습니다. 이 때 마음 속으로 운명처럼 신앙의 길을 걷겠다고 약속했으니 그 과정은 느닷없는 것이었으나 가장 ‘저다운 방법’으로 제게 은총을 베풀어주신 것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156

문득 모든 것은 미리 쓰여있는 것이니 때가 되면 감이 떨어지듯 그 일은 생기게 마련이구나 했습니다. 그것이 당신께서 역사하시는 방식이니까요. 156

제 손을 잡고 그날 밤 함께 눈길을 걸어오신 것을 기억합니다. 믿음의 생활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기에 새로운 생활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 안에 신을 모시는 것이니 유리처럼 투명할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당신께서는 이미 제 마음을 아시니 이 두려움을 어루만져주실 것입니다. 157

저는 그 동안 <눈뜬> 믿음을 원해왔나 봅니다. 신에 대한 믿을 수 있는 근거, 객관적 확실성을 가진 증거들을 찾아 그것들이 당신에 대한 믿음으로 저를 이끌기를 바랐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학실한 것을 따라 걷는 것은 재미없습니다. 인생 전부를 건 모험이 되지 못하니까요. 신앙이란 믿을 수 없는 지점에서 믿는 것이며 영적 모험은 바로 이렇게 시작된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159

파스칼 팡세는 당신이 어떤 분인지 이렇게 전해줍니다.

신은 그를 찾는 이에게는 그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고 명확히 나타나기를 원하시지만 /진심으로 피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감추기를 원한다/. 그를 찾는 사람은 그를 알 수 있고 /그를 찾지 않는 사람은 그를 알 수 없다. /오직 보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충분한 빛이 있고 /이와 반대되는 마음을 가진 이에게는 충분한 어둠이 있다. 159

정말 그렇습니다. 제가 당신을 찾지 않을 때는 당신은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득 바람처럼, 달빛처럼 제가 당신의 존재를 느끼자 당신은 온 세상에 가득합니다. 1년 내내 피지 않았던 난 꽃이 제 생일에 피었습니다. 그날 눈이 쏟아진 것은 오직 저를 위해서였습니다. 오지 않던 전화가 걸려온 것도, 뜻밖의 선물이 예기치 않은 순간에 전달된 것도 모두 당신의 현존입니다. 어찌하여 우리는 이렇게 달라지는 것인지요. 오직 보기를 원하면 도처에 불빛이 켜지고 모든 우주가 밝아집니다. 160

오늘 또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한 아침, 당신께 앞으로 살고 싶은 삶에 대하여 세 가지 뜻을 적어봅니다. 저는 당신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음을 제가 믿으니 몸과 마음을 아름답게 가꾸도록 하겠습니다. 저에 대한 탐욕은 줄이고 마음의 평화를 지키며 낮은 정신으로 살도록 애쓰겠습니다... 저는 또한 가정이 사랑으로 충만하도록 애쓰겠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작은 공간이지만 진심으로 사랑하고 진심으로 서로에게 힘이 되는 가정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힘을 다하겠습니다. 저는 또한 제 길을 열심히 가겠습니다. 그것이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주신 재주를 남김없이 다 발휘하여 주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희망을 갖도록 돕겠습니다. 161-162

이제 마지막으로 한가지를 기도합니다.

저를 힘껏 당기소서 /부러질 것 같아 두려워하더라도 /저를 당기소서 /받은 것을 다 소진하고 당신의 품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저를 남김없이 다 쓰소서 그리하여 저의 모자람에 절망하게 하소서 /그러나 당신께 절망하지는 말게 하소서. 162-163

14. 나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

여름을 갓 넘긴 바로 이쯤에서 나는 나를 되돌아본다. 여름의 무성함으로 다시 전환을 모색해야겠다. 어떻게 할까. 나는 내게 편지를 쓰기로 한다. 앞으로 10년은 내 속의 나와 화해하고 깊어지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167

이 사나이 헤라클레이토스에 따르면 만물은 대극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야. 하나는 숨어 있지. 여기 한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 죽음이 시작되지만 죽음은 삶에 가려 숨어 있지. 그러니 죽음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니야. 그것은 언제가 삶 속에 숨어 있었고 삶이 익어감에 따라 그것도 익어가고 있었던 것이야. 그게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이도 하지. 169

난 이제 이 무성한 여름의 한 복판에서 앞으로 10년을 너와 잘 지내보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 자 내게 바라는 것은 딱 두 개다. 첫째 나는 한쪽 끝에 서있을테니 너는 반대쪽 끝에 서 있어라. 우리의 목적은 투쟁과 전투가 아니다. 나는 현실을 볼 테니 너는 이상을 보아라. 나는 사회를 볼 테니 너는 개인의 욕망을 보아라. 나는 늘 깨어 의식할 테니 너는 늘 잠자며 원형의 무의식으로 남아있어라. 나는 부드러운 웃음의 가면이 될 테니 너는 가면 뒤에 숨어 있는 진심이 되어라. 화해는 투쟁의 한 가운데 있음을 명심하자. 둘째, 우리는 인간의 변화를 다루자. 봄이 되면 눈은 녹아 사라지고 나뭇가지에 잎이 나고 꽃이 매달인다. 있던 것이 사라지고 없던 것이 나타나는 것을 변화라고 한다면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불완전한 존재’가 어떻게 완전한 존재로 전화해가는지를 연구대상으로 삼자. 너와 내가 통합된 더 큰 나를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의 10년 프로젝트다. ‘시처럼 산다(life as a poem), 이것이 우리의 목표다. 173-174  

나는 이성의 밝은 빛을 따라 삶을 설계할 것이다. 너는 열정이라는 에너지로 마를 지원해다오. 너는 나를 늘 경계로 이끌어다오. 그 경계에서 한 발을 더 내디뎌 내 한계를 넘어 다른 세상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도와다오. 나를 떨리게 하고 내가 우주적 메시지에 접할 수 있도록 너의 깊은 원형적 무의식을 통찰력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해다오. 그리하여 우리 삶이 조화로웠다 말하게 하자. 174

어제는 느지막하게 산에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폭우를 만났다. 내가 걷던 좁은 길이 금새 물길로 변하고 흙탕물이 작은 급류를 이루어 흐르는데 발 디딜 틈도 없어 그저 물 속을 절퍽거리며 긴 길을 따라 내려왔다. 온 몸은 다 젖고 숲은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로 요란한데, 내 영혼은 바람과 빗물에 온 몸을 흔들어 춤추는 잎처럼 즐거웠다. 그러고 보니 모든 나무가 들고 일어나 머리를 풀어헤치고 격렬하게 몸을 흔들며 춤추는 듯 했다. 나도 춤추듯 걸었다. 갑작스러운 소나기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으며 그것처럼 당황스러운 것도 드물지만 일단 젖고 보면 그것처럼 즐거운 하나됨도 없다. 나는 너를 비처럼 받아들여 흠뻑 젖을 것이다. 너는 나를 나무처럼 춤추게 하라. 그리하여 우리는 비온 뒤의 숲처럼 되자.  174-175

감사의 편지  

“내 책을 읽어준 독자들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해주게. 내게 나의 독자는 ‘이름 없는 대중’이 아니었네. 그들이 곧 나였고, 내가 그들이었네. 그들과 나는 어제보다 빛나는 오늘을 살고자 매일 맞이하는 일상에서 함께 했던 친구였다네 그들에게 고맙다며 포옹으로 인사하고 싶네. 그들로 인해 내 삶은 한 편의 시가 되었다네. 177

 

정리를 바치며

받은 것을 다 소진하고 당신의 품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저를 남김없이 다 쓰소서 162

이렇게 고백하는 사부를, 신은 어찌 그리도 일찍 거두어 가셨는지요. 그것이 정녕 신의 섭리라는 겁니까. 모든 일이 우연처럼 오지만 필연인 거라고 사부는 말했지요. 뜻 밖이지만 '적시'인 것이라고요. 최근 책들에 그 말씀이 자주 눈에 띕니다.  아직도 실감 조차 할 수 없는 일을  '어떤 의도된 계획보다 더 훌륭한 우주적 안배였다고 깨닫게 되는 날이 올까요. 정녕 그럴까요.

인터넷으로 주문하기도 전에 살롱9에서 이 책을 먼저 만났습니다. 반가웠습니다. 그러나 반가움 뒤에는 미묘한 감정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습니다. 책을 펼쳤으나 편지를 차마 마주할 수 없었습니다. 서문만 겨우 읽고 얼른 뒤 쪽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뒤의 네 편지를 차례로 읽고나서야  용기를 내서 앞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굳은 얼굴을 펴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편지를 열었습니다. 책으로 나오기 전에 미옥씨가 원고를 보내줘서 이미 한 번 읽은 편지입니다. 더는 눈물이 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다시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사부가 그 편지를 보내주었던 때를 기억합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해 도둑이 제 발 저린 심정으로 사부에게서 멀리 달아나기만 하던 때입니다편지를 연 순간, 와락 거대한 손에 뒷덜미를 잡히는 기분이었습니다

이제는 제대로 보입니다사부의 분노 속에 얼마나 큰 사랑이 녹아있는지 굽힘 없이 보입니다. 자책의 눈물 대신 기쁨의 눈물이 흐릅니다. 조바심을 내지 않아도 될 일을 왜 그리 조바심을 냈는지요. 내 보폭으로 정직하게 걸으면 되는 일을 왜 그리도 이 외침, 저 외침에 휘둘리며 흔들린 것인지요이제는 보여지는 자신에 집착하지 않겠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단순한지 알면서도 그 길로 걷지 못했던 건그리고 스스로를 기쁘게 할 일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유독 그 일에만 소홀했던 건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였습니다

홍지동 언덕, 차로 한 시간 반이면 도착하는 곳에 계실 때의 사부는 참 멀게도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이제야 저는 얼굴을 맑게 닦고 사부 가까이로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디로 가든  사부는 거기에 계십니다. 이제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겠습니다모든 일에 ''가 있는 것이라면 지금이 '그 때'이면 좋겠습니다.  솔직히 요즘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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