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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16일 07시 26분 등록

No20

2013.09.

글쓴이: 오미경

 

러셀자서전(상) Bertrand Russell autobiography   송은경 옮김/ 사회평론

 

러셀상.jpg       러셀상하.jpg

 

 

이디스Edith에게

오랜 세월을 두고

나는 평온을 찾아 애썼노라.

환희를 맛보았고, 고뇌도 겪었노라.

광기와 마주쳤고,

외로움에 떨었노라.

심장을 갉아먹는 고독의 아픔도 알았노라.

그러나 끝내 평온은 찾지 못하였노라.

이제 늙어 종말에 가까워서야,

비로소 그대를 알게 되었노라.

그대를 알게 되면서

나는 희열과 평온을 모두 찾았고

안식도 알게 되었노라.

그토록 오랜 외로움의 세월 끝에

나는 인생과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아노라.

이제, 잠들게 된다면,

아무 미련 없이 편히 자련다.

 

러셀은 나이 90이 넘어 이것을 진실된 마음으로 고백한다.

70이 넘어 마지막 연인으로 만난 이디스(Edith)에게 러셀은 자서전의 첫 장에서 감동적인 시로 사랑을 표현한다.

 

 

1. 저자에 대하여 : 버트란드 러셀( 1872. 5. 18 ~ 1970. 2. 2 )

 

러셀.jpg

 

거짓과 더불어 제정신으로 사느니, 진실과 더불어 미치는 쪽을 택하고 싶다.

영국의 논리학자·철학자이며 수리논리학 분야의 저작들과 평화운동, 핵무장 반대운동을 비롯한 사회정치운동으로 유명하다. 195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1-1. 러셀의 부모님에 대하여

러셀의 부모는 1864년에 결혼했다. 당시 둘다 22살에 불과했다. 아버지 앰벌리 경은 총리를 2번 역임하고 러셀 백작 1세가 되었던 존 러셀 경의 셋째 아들이었다. 앰벌리Amberley경 과 어머니 캐서린은 1867년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의 모든 급진주의자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향한 열정에 갈채를 보내고, 노예제도 반대를 외치는 용기에 찬탄을 보냈다. 아버지 앰벌리경은 철학적이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속되지 않고 침울한 기질이었다. 그는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의 제자이자 친구였다. 아버지는 자유사상가로서, 방대한 책을 한 권 저술했다. 사후에 <종교적 믿음이 분석 An analysis of religious belief> 란 제목으로 출간했다. 앰벌리경은 초기 교회 교부들의 저작물들과 불교 관련 서적, 유교에 관한 글 등이 망라된 대형 서고를 갖고 있었다.

 

어머니 캐서린은 정력적이고 생기 넘치며 재치 있고 사려 깊고 독창적이고 담대했다. 그녀는 회합에 나가 여성의 투표권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곤 했다. 러셀의 어머니와 이모 조지 하워드 부인은 각자 살롱(대저택 응접실에서 열리는 사교 모임)을 만들어 경쟁적으로 운영했다. 하워드 부인의 살롱에서는 라파엘Raphael 전파(화가 라파엘 이전의 이탈리아 예술 양식과 정신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1848년에 졀성된 영국의 예술가 단체) 화가들을 모두 볼 수 있었다. 러셀 어머니의 살롱에서는 밀 이후의 영국 철학자들을 모두 만날 수 있었다. 러셀의 부모가 산아 제한과 여성 투표권을 지지하게 된 것도 존 스튜어트 밀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1-2. 초기 생애

러셀은 1872년 와이 강의 가파른 제방 바로 위쪽 숲속에 위치한 레이븐스 크로프트 라는 아주 외진 집에서 태어났다. 러셀이 태어나고 사흘째 되던 날, 러셀의 어머니는 외할머니께 편지를 써서 러셀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 아기 몸무게가 3.96킬로그램이고 키는 53.3센티미터인데, 대단히 통통하고 못생긴데가, 멀찌감치 떨어진 파란 두 눈이며, 별로 튀어나오지 않은 턱이며, 모두들 프랭크(러셀형)를 쏙 빼닮았다고 합니다. 정말이지 젖먹이 시절 프랭크와 똑같아요. 저는 지금 젖이 많이 불어 있는데, 젖을 즉시 물지 못하거나 뜻대로 안 나오거나 하면 아기는 엄청나게 성을 내며 파르르 떨면서 소리를 질러대고 발길질을 해댑니다. 달래주어야만 겨우 잠잠해지지요..... 아기가 고개를 빳빳이 들곤,s 아주 활기차게 주위를 살피곤 해요.”

 

러셀이 두 살 때 어머니와 누이가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다. 1년 반 (18개월) 이후 곧 아버지 앰벌리경이 폐결핵으로 돌아가셨다. 앰벌리경이 사망하면서 형 프랭크와 러셀의 후견인으로 스폴딩과 코브던샌더슨을 지명했다. 아버지는 종교적 양육의 폐해로부터 아들들을 보호하고 싶었다. 그러나 당신 아들의 서류를 정리하시던 조부모님이 며느리 캐서린과 관계된 서류를 발견하면서, 아들의 유언을 뒤엎고 본인들이 후견인이 되었다. 러셀과 형 프랭크는 결국 할머니 밑에서 자라게 되었다. 할머니는 독실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자유로운 생각을 가진 청교도였으며 엄격한 개인적 양심과 정확한 원칙을 가진 사람이었다. 러셀은 혼자 교육받았기 때문에 또래 아이들과 사귈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는 지식의 확실성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담긴 이상주의적 정서와 형이상학적 깊이(나중에 그는 이것이 부분적으로는 승화된 성욕의 산물이었다고 설명했음)로 가득 찬 치열한 내면적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11세 때 이미 종교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했다.

 

형을 통해 수학의 확실성을 알고 기뻐했으나 그와 동시에 기하학의 공리(公理)가 증명할 수는 없고 믿어야만 하는 것임을 알고 크게 실망했다. 이러한 상황은 러셀의 철학활동의 전형이 되었다.

 

1-3 초기 결혼생활

 

첫 번째 부인 앨리스와 러셀은 1894년 12월 13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의 가문은 200년 넘게 필라델피아 퀘이커 교도로 살아왔으며 그녀도 여전히 친우회 society of Friends(1650년경 영국의 조지 폭스가 창시한 기독교의 한 파로서 보통 퀘이커라 부름) 신자였다.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로건 피어솔 스미스(<트리비아 Trivia>의 저자)의 동생이자 진보적 사상을 가진 필라델피아 출신의 퀘이커교도였다.

 

결혼 생활은 행복했으며 연구 작업도 충실하게 진행되었다. 감정상의 애로가 전혀 없었으므로 나는 모든 에너지를 지적인 작업에 쏟아 부을 수 있었다. 결혼한 첫해에 러셀은 수학과 철학 양 분야에서 폭 넓은 책들을 읽었다. 저작의 양도 어느 정도 늘어나 훗날 다른 작업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아내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여가 시간에는 독서를 많이 했는데 주로 역사에 관한 책들을 읽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아내와 번갈아가며 책을 읽어주곤 했는데, 이런 방법으로 기본적인 역사책들을 다수 읽어냈다. 이런 식으로 읽은 것 중에 마지막 책은 아마 그레고로비우스Gregorovius의 <로마 시사History of the City of Rome>였을 것이다. 이때가 러셀의 생애에서 지적으로 가장 풍성한 수확의 시기였으며, 그것을 가능케 해준 내 첫 아내에게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아내는 여성 투표권이나 절대 금주 지지 연설을 하기 위해 종종 외부로 나가곤 했다. 나는 아내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절대 금주가가 되었으며, 그것이 습관이 되어, 최초의 동기가 더 이상 내게 의미가 없어진 후에도 계속 금주가로 남았다.

 

주요저서로는 <서양철학사>, <결혼과 성>,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행복의 정복>등 다수가 있다.

 

2. 마음을 무찔르는 글귀

 

1. 유년기

[13-14] 프롤로그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나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열정들이 마치 거센 바람과도 같이 나를 이리저리 제멋대로 몰고 다니며 깊은 고뇌의 대양 위로, 절망의 벼랑 끝으로 떠돌게 했다.

 

나는 사랑을 찾아 헤매었다. 그 첫째 이유는 사랑이 희열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얼마나 대단한지 그 기쁨의 몇 시간을 위해서라면 남은 여생을 모두 바쳐도 좋으리라 종종 생각한다. 두 번째 이유는 사랑이 외로움 -- 이 세상 언저리에서, 저 깊고 깊은 차가운 무생명의 심연을 들여다보며 몸서리치도록 만드는 그 지독한 외로움 --을 덜어주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성인들과 시인들이 그려온 천국의 모습이 사랑의 결합 속에 있음을, 그것도 신비롭게 축소된 형태로 존재함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추구한 것이며, 비록 인간의 삶에서 찾기엔 너무 훌륭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나는 결국 그것을 찾아냈다.

 

내가 똑같은 열정으로 추구한 또 하나는 지식이었다. 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보고 싶었다. 하늘의 별이 왜 반짝이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삼라만상의 유전( 流轉) 너머에서 수(數)들이 힘을 발휘한다고 설파한 피타고라스를 이해해보고자 했다. 그리하여 나는 많지는 않으나 약간의 지식을 얻게 되었다.

 

사랑과 지식은 나름대로의 범위에서 천국으로 가는 길로 이끌어주었다. 그러나 늘 연민이 날 지상으로 되돌아오게 했다. 고통스러운 절규의 메아리들이 내 가슴을 울렸다. 굶주리는 아이들, 압제자에게 핍박받는 희생자들, 자식들에게 미운 짐이 되어버린 의지할 데 없는 노인들, 외로움과 궁핍과 고통 가득한 이 세계 전체가 인간의 삶이 지향해야 할 바를 비웃고있다. 고통이 덜어지기를 갈망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해 나 역시 고통받고 있다.

이것이 내 삶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만일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꺼이 다시 살아볼 것이다.

 

[23]

펨브로크 로지에는 약 45제곱 킬로미터나 되는 정원이 있었으나 대부분 방치되어 황폐해져 있었다. 이 정원은 내가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내 인생에서 아주 크나큰 역할을 했다. 서쪽으로는, 엡섬 다운스에서 윈저 성에 이르는 널따란 풍경이 펼쳐지고, 그 중간에 힌드헤드와 리스 언덕이 있었다. 나는 넓은 지평선과 거침없이 펼쳐지는 일몰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이후 나는 그 두 가지 없이는 결코 행복하게 살 수 없었다. 정원에는 빼어난 수목들이 많았다.

 

[24-26]

어린 날의 중요하고도 또렷한 인상들은 아이다운 소일거리에 열중해 있는 어느 한 순간 의식에 떠오를 뿐, 어른들한테 그것을 얘기하는 일은 없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불과 여섯 살이었다.

할아버지보다 23세살이나 어린 할머니는 내 유년기를 통틀러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할머니는 스코틀랜드 장로교인 이었고, 정치적 종교적으로는 자유주의자였지만, 도덕적 문제에는 매사에 극단적일 만큼 엄격하셨다. 할아버지와 결혼할 당시 할머니는 어리고 수줍음을 많이 타셨다. 할아버지는 친자식 둘과 의붓자식 넷이 딸린 홀아비였는데 할머니와 결혼하고 나서 몇 년 후에 수상이 되셨다.

 

할머니는 모든 것을 빅토리아 시대적 정서라는 안개를 통해 보도록 요구하셨다. 할머니는 자기 시대 기준에 맞는 교양을 쌓으셨고, 불어와 독일어, 이탈리어를 액센트상의 작은 흔적도 남기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구사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사유(思惟)와 관계된 것은 할머니의 교육에서 완전히 생략되어 있었다. 조국애, 공공심, 자녀 사랑은 칭찬 받을 만한 동기고, 금전욕, 권력욕, 허영심은 나쁜 동기였다.

 

[28]

내 인생관의 형성에서 할머니가 지닌 중요성을 나이가 들수록 더 깊이 깨닫곤 했다. 그 분의 두려움 없는 태도, 공공 정신, 인습에 대한 경멸, 다수의 의견에 대한 무관심이 내게는 늘 좋게 보였으며, 따라해볼 만하다는 인상을 남겼다.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지어다” 란 구절을 강조하신 덕분에 훗날 나는 소수에 속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29]

윌리엄 할아버지가 “즐거움을 누리는 인간의 능력은 해가 갈수록 줄어든다. 너도 지금은 저무는 하루를 즐기고 있지만, 오늘 같은 여름날의 즐거움은 두 번 다시 맛보지 못할 것이다. ” 라고. 그 분의 말이 잔인했을 뿐 아리라 진실도 아니었다는 것을 그 후의 경험이 내게 가르쳐주었다.

 

[40]

당신 자녀들(할머니)에게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한 병적인 성향이 바로 자신의 책임이란 사실을 전혀 모르신 채.

 

[44]

어린 시절을 통틀어 내게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시간은 정원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었으며 따라서 내 존재의 가장 강렬한 부분은 항시 고독했다.

나는 석양이 대지를 붉게 물들이고 구름을 금빛으로 바꾸는 것을 지켜보았다. 바람 소리에 귀 기울였고 번갯불에 좋아 날뛰기도 했다. 유년기를 거치면서 외로움도 커져갔고, 더불어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을 행여 만나려다 기대하다 절망하는 일도 많아졌다. 완전히 실의에 빠진 나를 구해 준 것은 자연과 책과 (좀 더 나중에는) 수학이었다.

 

[53-55]

열한 살이 되자 형을 선생 삼아 유클리드 기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 인생의 큰 사건 중에 하나였고, 마치 첫사랑처럼 현혹적이었다. 세상에 그처럼 감미로운 것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순간부터 내 나이 38에 화이트헤드와 함께 <수학 원리 principia Mathematica>를 완성하기까지, 수학은 나의 중요 관심사이자 행복의 주 원천이었다.

내가 제일 좋아한 것은 수학이었고, 수학 다음으로는 역사를 좋아했다.

 

2. 청년기

[82]

양심은 진화와 교육의 복합적인 결과물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성이 아닌 양심을 따른다는 것은 분명 어리석은 짓이다. 따라서 내 이성은 내게, 최대의 행복을 낳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다른 어떤 방식보다 낫다고 말한다. 이러한 방식말고 다른 목적을 취할 수는 없을까 하고 찾아보았지만 실패했다. 이때 행복이란 나 개인의 특정한 행복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행복을 의미하며, 나 자신과 친척, 친구, 완전한 타인을 구분하지 않는다.

 

[89-90]

어릴 때 학교에 다니지 않았던 것이 다행스럽다. 만일 그랬더라면 나에게도 힘이 좀 있었으면 하고 아쉬워했을 것이고, 근본적인 생각을 해볼 시간은 없었을 것이다. 사색이 내게 많은 고통을 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사색을 통해 나는 내가 머무를 곳을 발견하고, 고민이 닥쳤을 때는 나를 지원하는 강력한 존재를 만난다.

 

3. 케임브리지 시절

[115-117]

한번은 범신론에 대해 읽고 친구들 앞에서 내가 신(神)이라고 선언했다. 그러자 친구들이 내 양 옆에 촛불을 켜놓고는 숭배 행위를 흉내내기도 했다. 나는 철학이 아주 재미있었다. 그리고 위대한 철학자들이 심상에 제공해 주는 세상을 이해하는 기묘한 방식들을 즐겼다.

 

내가 케임브리지 시절에 누린 가장 큰 즐거움은 아나 ‘소사이어티The society' 그룹과 관령되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자체 회원들이 부른 명칭이고, 우리 모임의 존재를 아는 외부인들은 ’사도회The Apostles'라 불렀다. 각 학년에서 평균 한두 명씩 참가하는 작은 토론 모임으로, 매주 토요일 밤에 만났다. 1820년부터 존재했던 모임이기 때문에 그때 이후 케임브리지를 다닌 사람들 가운데 좀 뛰어나다 싶은 사람은 대부분 이 모임의 회원이었다. 모임은 비밀리에 운영되었다. 회원으로 선발될 만하다고 평가되는 사람들이 그 사실을 미리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알고 지내면 아주 좋은 사람들을 내가 그렇게 빨리 사귀게 된 것도 ‘소사이어티’가 있었기 때문이다.

 

금기나 제한을 두지 않는다. 어떤 말이 나와도 놀라지 않는다. 절대적인 사색의 자유를 가로막지 않는다’는 것이 토론의 원칙이었다. 훗날의 삶에서는 기대하기 힘들 초연함과 관심이 배어 있었다.

 

[148]

‘신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해야 한다.’ - 조지 엘리엇

‘신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할 필요가 없다.’- 마이어스

 

[151]

로건 피어솔 스미스가 작성한 ‘군자교’의 규율 중 일부

 

좌우명 : 당신이 군자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1. 드러나지 않게 스스로를 자제하고, 자신의 경제 사정에 대해 말하지 말라.

3. 남들과 있을 때는 항상 예절을 지켜라.

5. 기회가 생기는 대로 좋은 음악을 듣고, 좋은 그림이나 행동을 보라.

6. 이런 점들에 있어, 항상 자신의 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되도록 많은 이익이 되게 하라.

 

[154]

인간의 본성이란, 아니 나의 본성만을 놓고 보더라도, 자기 자신에 대해 언제나 관대한 법이라네.

 

[156]

사람이 노력하지 않으면 얼마나 무디고 우둔해질 수 있는가를 새삼 깨닫게 되네.

 

[158]

문명이란 것은 그것을 세우고 가꾼 자들이 이미 깔아놓은 정서에 맞는 노선과 방법에 따라 발전해야 하는 법이네.

 

[174]

“이처럼 아름다운 오후를 장차 두 번 다시 즐기지 못하게 될 것” “사람의 즐거움은 나이가 들수록 강도와 순수함이 약해지기 때문” -할아버지 민토경

 

[179]

기하학을 내 첫째 목표로 삼고 경제학을 두 번째 목표로 삼겠다고 썼어...

 

[182]

어떤 종류의 것이든 내가 학생이나 이론가로 남이 있는 한 외부 세계에 대한 의무는 지지 않을 거야. “그런 부류의 사람은 작은 일들에서는 이기적인 삶을 사는 게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의 능률이 높아질 뿐 아니라 작은 예절 따위를 지켜가며 일하는 여느 선량한 사람보다 엄청나게 중요한 일을 하기 때문이다. ”

 

[195]

연인들에게 감미로운 접촉이 다반사이듯“ 인간에게도 수줍음은 다반사다.

 

[227]

스승으로서 화이트헤드는 매우 완벽했다. 그는 자신이 관계해야 할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졌으므로 그들의 강점과 약점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제자에게서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이끌어내곤 했다. 학생들을 억압하거나 빈정대거나 잘난 척하거나, 기타 저급한 선생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을 그는 한번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도 그랬지만, 자신과 만나게 된 좀 더 유능한 모든 청년들의 가슴에 아주 진실하고 지속적인 애정을 불러 일으켰다.

 

[234]

당시의 나는 편협한 섬나라 근성의 브리튼족답게 우월감으로 미국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학계의 미국인들, 특히 수학자들과 만나본 결과, 거의 모든 학문에 있어서 영국보다 독일이 앞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엇다. 그리하여 알 가치가 있는 것은 케임브리지가 다 안다는 믿음이 여행 과정에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서서히 무너졌다. 이런 측면에서 그 여행이 아주 유용했다고 볼 수 있다.

===> 여행은 나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다. 남의 삶으로 내가 스며든다. 내가 나를 내려놓고 타인의 삶으로 들어갈 때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나온다. 그리하여 나도 모르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여행은 또 다른 나를 만나게 한다. 러셀의 우월감이 여행하면서 또 다른 세계를 본 것이다. 부럽다. 유럽에 있는 대륙들은 서로 붙어 있어서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 서울에서 강원도로 가는 것과 같이 이웃 나라를 지방 드나들듯이 하니 지리적 여건이 사람을 개방성과 포용감을 갖게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237]

우리는 두 해 연속 가을을 베니스에서 보냈으므로 그곳에 대해 훤히 알게 되었다. 결혼한 첫해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까지 이탈리아에 가지 않았던 해가 없었던 것 같다. 어떤 때는 걸어서, 어떤 때는 자전거를 타고 갔으며, 부정기 화물선을 타고 작은 항구들을 일일이 거쳐 베니스에서 제노어까지 가본 적도 있었다. 나는 작고 외진 마을들과 아펜니노 산맥의 산악 풍경을 특히 좋아했다. 전쟁이 터진 후로는 1949년이 되도록 이탈리아 땅을 다시 밟을 수 없었다. 1922년에 회의 참석차 이탈리아에 가려 했으나 당시 아직 ‘쿠테타’를 완수하지 못했던 무솔리니가 회의 주최자들에게 연락을 취하여 나한테는 아무 해도 입히지 않겠으나 내게 말을 거는 이탈리아인은 모조리 암살당하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내가 떠난 자리마다 혈흔이 남겨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 나라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무솔리니가 더럽혀 놓았으나 나는 그 나라를 지극히 사랑했으므로.

 

6. 수학원리

[258-259]

화이트헤드 부인은 고통 때문에 모든 사람과 모든 것으로부터 차단된 듯 보였는데 바로 그때, 인간의 영혼은 모두 고독하다는 느낌이 느닷없이 나를 사로잡았다. 결혼한 후로 나는 정서상으로로는 조용하고 피상적인 생활을 영위해 왔고, 좀더 깊은 문제들을 모두 잊은 채 가벼운 지식인으로 만족해왔다. 그런데 갑자기 발 밑에서 땅이 무너지는가 싶더니 완전히 다른 영역에 들어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 5분의 시간에 나를 스친 생각은 이러했다. ‘인간 영혼의 외로움은 견디기 힘들다. 종교적 스승들이 설파한 것과 같은 지고의 강렬한 사랑 외에는 어떤 것도 그 외로움도 간파할 수 없다. 이 동기에서 나오지 않은 것들은 모두 해로우며 잘해 본들 무용하다. 따라서 전쟁은 잘못된 것이고 사립 학교 교육은 옳지 않으며 폭력의 사용에 반대해야 한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는 각 개인이 가진 외로움의 응어리 속으로 파고들어가 호소해야 한다. ’

 

오랜 세월 정확성과 분석에만 매달려왔던 내가, 미에 대한 신비한 감정, 아이들에 대한 깊은 관심, 인간의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줄 철학을 찾아내고자 하는 부처님 못지 않게 깊은 열망으로 충만해 있음을 발견했다. 야릇한 흥분감이 날 사로잡았는데, 거기에는 강렬한 아픔도 담겨 있었지만 승리감도 약간 배어 있었다. 내가 고통을 지배하고 내 생각대로 주물러 지혜로 가는 통로를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승리감이었다.

 

[264]

만일 창조주가 여자였다면 알코올 문제 따위는 없었을 거란 게 장모의 생각이었다.

===> 창조주가 남자인가. 하느님으로 표현된 그림이 남성상으로 표현되어서인가?

창조주는 남자도 여자도 모두 가진 양성이 아닐까?

 

[267]

“증명을 간략하고 말끔해 보이게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심지어 책의 목적까지 희생시켰다.” 내 저작의 이러한 결함은 정신 상태의 도덕적 결함에서 온 것이었다.

 

[269]

"1907년에서 1910년까지, 나는 1년에 8개월 정도 매일 10시간에서 12시간씩 작업을 했다. 원고가 점점 방대해지자 산책길에 나설 때마다 집에 불이 나 원고가 타버리지 않을까 염려하곤 했다.... 마침내 그것을 대학 출판부로 옮겨가게 되었을 때, 양이 얼마나 엄청났던지 낡은 4륜 마차까지 대령시켜야 했다."

 

[279-280]

실제로도 우리는 사물의 색이나 모양을 보듯이 사물 속에서 선이나 악을 봅니다. 양심에서 일반 좌우명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은 십계명이 키워낸 실수 같습니다. 저는 차라리 경험으로 확인된 사실들에서 나온 추론, 다시 말해 삶에 열린 눈을 가진 사람들에게 인생이 제공하는 저 도덕 실습실에서 얻어지는 것에서 윤리학의 진정한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보고 싶습니다.

 

[287]

현대의 생활은 너무나 힘듭니다. 차라리 고행 셔츠 차림으로 십자가를 베개삼아 자는 수도원 생활을 하고 싶어집니다.

===> 첼시여, 말로만 그러지 말고 차라리 그냥 아무말 없이 수도원으로 들어가 체험해보렴. 그럼 네가 지금 한 말이 얼마나 사치스런 말인지 바로 증명이 될 터이니.

 

[289]

자기 희생(남들을 희생시킨 적도 너무 많았지만)이 어떤 것인지, 의지의 완벽한 분투가 어떤 것인지. 본질적으로 최선의 것조차도 억누를 만큼 가혹한 엄격함이 어떤 것인지, 당신이 과연 이해할는지 모르겠어. 크든 작든 책을 쓰려면 그러한 것들이 필요하기 마련이지.

 

[290]

예술가들에게는 강렬한 열정이 있지만 자신의 욕망을 탐닉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속이지. 글쓰기는 기술에서 나온다는 주장 역시 크게 잘못된 것이야. 글쓰기란 것은 정복할 수 없는 듯하면서도 결국 정복되고 마는 감정으로 가는 출구니까. 나는 두 가지 점이 키워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첫째는 감정의 고상함, 둘째는 감정을 비롯한 모든 것을 의지로 조절하는 능력이야.

 

[291]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충고하자면, 가장 최고의 문학을 모두 철저하게 이해하라. 그리고 나머지는 최대한 철저하게 무시하라.

 

[292]

‘과거’는 자신이 지닌 영우너한 미의 거의 전부를 ‘삶’에 제공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끔찍한 ‘신’이지.

 

[293]

인생이란 것은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만들지 선택하는 과정이며, 이상이란 것은 그것이 다른 형태이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에게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법이지.

 

[294]

당신의 인생은 당연히 종이 인생이며 거기에서는 경험이 직접 오는 게 아니라 책을 통해 오지. 이런 병은 책을 더 많이 본다고 치료되는 것이 아니야. 오직 진정한 삶만이 치료약인데 그러나 받아들이기가 힘들지. 진정한 삶이란 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 있는 것을 의미해. 이렇게 본다면 호더의 열정적인 삶에는 전혀 현실성이 없지. 달리 보면 진정한 삶이란, 종교와 시의 재료를 만드는 감정들을 본인이 직접 경험한다는 의미도 되지.

 

‘십자가에 못박혀라.’ ‘그리고 셋쨋 날에 다시 일어나라.’

만일 이 두과정을 겪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현실의 삶에 충실하면 돼, 그러나 현대의 세계에서는 흔히 본인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십자가를 짊어지기 때문에 새로운 시련의 기대에 부응하여 다시 일어나려면 상당한 의지력이 요구되지. 내가 볼 때는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는 진정한 사람들이 당신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이 힘들어하는 것 같아.

[295]

호더의 경우를 봐서도 알겠지만, 기혼자들과 밀통한다고 해서 현실적인 삶이 얻어지는 것은 아니야. 만일 평범하지 않은 경험을 원한다면, 조금 더 포기하고 조금 더 의무를 수행해봐. 이 세상의 훌륭하고 자유로운 열정을 모두 합친 것보다 훨씬 더 진귀한 감정을 맛보게 될 거야. 하지만 책 속의 삶에는 커다란 고요와 평온이 담겨 있지. 뭔가 좀더 진한 것에 대한 갈증이 밀려올 때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은 자책과 공포와 고통과 해로운 후회에서 벗어날 살 수 있어. 내 경우엔 내면의 영혼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정신적 수도원을 짓고 있는 한편, 외면의 그림자는 세상과 만나기 위해 나가지. 나는 이 마음속 성전에 앉아 영혼의 생각들에 잠기지.

 

[296]

결국 사람이란, 인생에 대한 자기 자신의 감정보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는 없는 법이지. ‘경험’을 애기한 것이 아니라 감정에 대한 내면의 지식을 생각하고 한 말이야. 그 같은 지식을 얻고자 할 때,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아주 최소한의 외적 상황만 있어도 계기로 삼을 수 있어. 또한 그것은 인격의 성장과 어느 정도의 글쓰기도 요구되는 작업이지. 그러나 사람이 감정을 지배하여 의인화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면 감정을 느껴본들 아무 이득이 없어.

 

[297]

글쓰는 사람에게는 외래의 경험을 해석하는 열쇠로서 큰 불행에 대한 당사자의 지식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청하지 않아도 오기 때문에 찾아나설 필요가 별로 없어. 이러한 열쇠가 일단 확보되면, 이따금 가능한 대목에서 격려의 말을 해주면 될 뿐 직접 참여하지 않더라고 희망하고 고통받도 죽게 되는 사람들의 기묘하고 비극적인 요술 환등기가 저절로 돌아가기 시작하지.

인간은 사고할 때에만 하느님일 뿐, 행동과 욕구에서는 환경의 노예들이야.

 

[298]

한 사람에게 애정을 지나치게 집중해 쏟는 것은 위험스러운 일이야. 왜냐하면 애정이란 항상 방해받기 쉽고, 인생 자체가 유혹에 빠지기 쉬운 것이니까. 사람은 해가 갈수록 자기 삶의 짐을 보태는 동시에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되지. 그 중에서 으뜸은, 자신의 모든 사랑을 완전히 관조적인 성격으로 만드는 능력이라고 생각해.

 

상실에도 대단한 이점이 있다는 건 확실해. 애정의 폭이 넓어질수록 타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통찰력을 습득하게 되니까 말이야. 인간의 삶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깨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동안은 각자 영혼의 기묘한 외로움을 느끼게 마련이지.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타인들에게서도 똑같은 외로움을 발견하면서 새롭고 기묘한 유대감과 커지는 연민을 느끼게 되는데, 상실한 것을 거의 다 보상받을 만큼 따뜻한 감정들이지.

말로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 나도 잘 알아. 하지만 당신의 처한 상황에서 온정이 찾아오리라 생각하면 불행이 훨씬 더 견디기 힘들어질 뿐이야. 그리고 실제로도, 익숙한 피난처를 벗어나 홀로 세상과 직면하는 것이 지혜와 용기의 첫걸음이 되지. 세상은 너무도 위함한 곳이어서 때로는 겸양과 훌륭한 매너도 장애가 되지.

 

[300]

어디서든 비통한 기분으로 빠져든다는 것은 검정에 고장이 났다는 신호야. 이럴 때 마음을 좀더 크게 가지고 자제력을 발휘하면 본능적인 아픔의 절규가 들어설 자리에 고요한 가을날의 비애가 자리잡곤 하지. 문학이 큰 위안이 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 비극들이 모두 과거 속의 것이어서 우리의 노력이 미치지 못한다는 데서 오는 완결과 정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야. 슬픔이 점점 격렬해질 때 그것을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인 양 바라보는 것, 그리고 상상 속에서, 지금도 계속 돌아가고 있는 저 거대한 기계에 목숨을 잃은 척칙한 영혼들의 애도 행력에 동참해 보는 것이 가장 건강한 방법이야. 과거라는 고즈넉한 전원에서는 지친 방랑자들이 모든 흐느낌을 멈추고 휴식하고 있지.

 

[301]

자신이 쓸모가 있음을 발견하는 것은 청춘을 잃은 데 대한 커다란 보상이야.

결혼처럼 깊은 관계 속에는 고통의 가능성이 정말 무한히 담겨 있어. 그럼에도 나는 사람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 좋다고 믿어.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알아두면 좋을 많은 것들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되거든. 세상에 고통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또 그것이 인간의 동료 의식을 키워 결국 남들이 다 겪는 고통으로 몰고 간다는 이유만으로 모른 척 살 수는 없는 거야.

‘참으로 인간은 고통을 먹고 사나니.’ 나 자신을 위해서나 남들을 위해서나 행복을 너무 중시하지 않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어.‘

 

[318]

만사가 불확실하고 우연에 좌우되는 것 같아 보여서, 잃어버릴까 두려운 모든 좋은 것들에 대해 냉정을 유지하기가 힘들 정도였지. 게다가 불운이란 게 흔히 그러하듯, 그 일로 인해 과거에 이미 매듭지었다고 생각했던 묻혀진 슬픈 기억들까지 모조리 하나둘씩 차례로 무덤을 헤치고 튀어나와 마음 속 황량한 빈 터에서 통곡을 했어.

 

[319]

나보다 훌륭한 삶을 살면서도 한순간도 약해지지 않고 길고도 힘든 과제를 척척 해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내가 잘 알거든. 다만 일을 가지고 호들갑을 떨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침묵 속에 수행하고 있는 과업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사람들이 알지 못할 뿐이지.

 

[323]

삶과 일에 바치는 노력은 대단하기 때문에 완전히 기력이 쇠하면 결국 그러한 노력들이 정말 사람의 정신을 정복해 버리기 쉽다. 나는 진정으로 중요한 것들을 제외시켜 버리고 하루하루 해야 할 일에 대한 생각들로 마음을 채우는 방식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어. 불가피한 현상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유감스러운 일이며, 비로 그런 것이 사람을 점점 둔하게 만든다고 생각해. 하지만 이렇게 하면 일하는 데는 놀라우리만큼 효과가 좋아.

 

[326]

수학은 평화의 천국 그 자체여서 그게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살았을까 싶어. 나 자신도 효과를 느끼지 못하는 충고를 해줄수밖에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지.

 

[327]

당신이 언급한 명성에 대해 얘기하자면, 딱히 그것을 갖고 싶다는 생각은 없는데, 옥스퍼드 사람들이 나를 실속없이 젠체하는 형식주의자로 본다는 건 확실해. 하지만 남들이 내 작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지금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 예전에는 내가 칭찬에 초연한 것이 좋다는 사실을 충분히 확신하게 되기 전까지는, 사실 신경이 쓰였지. 지금은 칭찬을 받아도, 차라리 화장한 하루를 맞는 기쁨이 더 크지.

 

[328]

‘철학자들과의 교섭’뿐 아니라 ‘성인들과의 영적 교섭’이란 것도 있으니, 내가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대체로 그런 것들 덕분이야.

어쨌거나, 사람이 혼자 있을 때 얼마나 깊이 자신한테 몰두할 수 있는가 하는 거야!

‘끝이 좋으면 다 좋다.“ 내가 만일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사람이 된다면 내 묘비 비문은 이렇게 새길 거야.

===> 내 묘비 비문은 “인생 뭐 있어? 내 계획대로 안될때도 있지만 우주의 깊은뜻이 있겠지.”

 

[330]

종교와 예술은 모두 우주를 인간화하려는 시도들이야.“

 

[336]

철학은 종교를 결코 제공할 수 없다. 철학은 실로 지적 관심 그 이상의 것이다. - 벗 골디-

 

[337]

나는 그가 벌겋게 단 쇠판 위에서 춤추는 지옥의 영혼이라고는 생각지 않아. 질병에 찌든 허영과 조소에 대한 병적인 두려움이 그의 지옥이라고 봐.

 

[338]

“지식에 의해 아직 정복되지 않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한 합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진실이 내게 불리하게 증언할지언정, 나는 믿는다.”

‘진실이 내 편에서 증언해 주지 않을지언정, 나는 믿는다.“

 

[339-340]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내 글을 이런 식으로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쓰고 또 써야만 해.

 

[345]

‘사람은 결국 먼 장래에 타인들의 복지에 가장 크게 이바지하게 될 만큼의 재산에 대해서만 권리를 가진다’고 하는 금언도 있지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재산과 여가를 가졌으면서 그러한 정신에 따라 산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야.

 

7. 다시 케임브리지로

[371]

루소는 “인간은 사슬에 묶여 태어나지만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보았다. 콘래드였다면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인간은 충동을 풀어놓거나 통제받지 않고 되는 대로 삶으로써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고집 센 충동을 좀더 우위의 목적에 복종시킴으로써 자유로워진다.”

[387]

어느 한 사람을 기쁘게 해주는 말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고통이 되는 경우가 다반사니까요.

[397]

내 평생 꼭 했어야 했던 일이 무엇인지. 결국 일생을 헛되이 낭비했구나 하는 것을 죽는 순간에야 비로소, 그러나 너무도 뒤늦게 깨닫게 될 것만 같아. 열정과 용기로 가득 찬 삶은 그 자체로도 훌륭해 보이지.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목표에 그처럼 많은 열정을 바치는 데는 망상적인 요소도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해.

 

제 2부 1914~1944

8. 제1차 세계대전

 

[410]

“오늘은 어제가 아닙니다.”

[411]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른 무엇보다도 돈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으나, 돈보다 파괴를 훨씬 더 좋아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성인은 으레 진리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으나. 인기보다 진리를 더 사랑하는 지성인은 10퍼센트도 안 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415]

<인간은 왜 싸우는가 Why Men Fight> 이 책에서 나는, 의식적인 목적보다 충동이 인간의 삶을 빚어내는 데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믿음에 근거하여 정치 철학을 제시했다. 나는 충동을 소유욕의 충동과 창조적인 충동으로 이분하고, 창조적인 충동 위에 세워지는 것을 최선의 삶이라 보았다. 소유욕의 충동이 구체화된 예로는 국가, 전쟁, 빈곤을 들었고, 창조적인 충동이 구현된 예로는 교육, 결혼, 종교를 꼽았다. 나는 창조성의 해방이 개혁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처음에는 그 책을 강의용으로 썼다가 나중에 출판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책이 즉각 성공을 거두었다. 읽혀지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고 신념의 고백 차원에서 썼을 뿐인데, 그것이 내게 막대한 돈을 벌어다 주어 향후 나의 모든 수입의 발판이 되었다.

 

[439]

나는 감방 생활이 여러 모로 만족스럽다는 것을 알았다. 지켜야 할 약속도 없고, 어려운 결정을 내릴 필요도 없도, 어디서 불러낼까 걱정할 필요도 없고, 작업을 방해하는 것도 없었다.

 

[443]

우리 세대가 약간 미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왜냐하면 우리 세대는 진실을 엿보았지만 그것은 공허하고 제정신이 아니며 소름 끼치는 진실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많이 볼수록 정신 건강은 더 나빠지지요. 빅토리아 시대(의 고귀한 영혼들)가 건전하고 성공적이었던 이유는 진실의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거짓과 더불어 제정신으로 사느니 차라리 진실과 더불어 미치는 쪽을 택하고 싶습니다.

===>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실일까. 사람은 자신이 믿는 것이 진실이고, 자신이 믿지 않는 것은 거짓으로 생각한다. 똑같은 현상을 두고도 누구에게는 진실이고 누구에게는 거짓인데.

러셀은 자신이 믿는 것이 진실이니까 그 진실과 더불어 미치는 쪽이 더 낫다는 말인가.

 

[444]

남다른 정력은 모두 남다른 허영에서 비롯된다는 얘기 말입니다.

 

[446]

그날 나는 밤늦은 시각까지 혼자 거리를 돌아다니며 4년 전 8월에 그랬듯이 군중의 분위기를 관찰했다. 군중들은 여전히 경박했다. 공포의 세월동안 아무것도 배운 게 없는 듯, 잔보다 더 경솔하게 쾌감을 붙잡는 데 여념이 없었다. 나는 마치 다른 행성에서 우연히 떨어진 유령처럼, 환호하는 군중 속에서 기묘한 고독을 느꼈다. 기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나의 기쁨과 군중의 기쁨 사이엔 아무 공통점도 없었다. 열광하는 군중들이 느끼는 그 일체감을 대규모의 사람들과 어불어 느껴보고 싶은 것이 내 평생의 바람이었다. 종종 그 갈망이 지나친 나머지 나 자신을 자기 기만으로 몰아갈 정도였다. 그 동안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평화론자를 거쳤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해 왔으나. 사실 진정한 의미의 어떤 주의자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항상 회의하는 지성이 내게 의심의 말을 속삭였고, 타인들의 손쉬운 열정에서 나를 떼어내어 황량한 고독으로 옮겨놓았다.

 

[447]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어떤 일을 하든 어떤 기쁨을 느끼든 저변에 깔린 고독의 아픔을 느꼈다. 사랑의 순간에는 그 고통에서 거의 벗어났으며, 돌이켜보면 그런 순간의 탈출 역시도 어느 정도 착각에 좌우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유령을 사랑해왔으며, 유령을 사랑하는 과정에서 내 깊은 내면의 자아가 유령처럼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나는 그것을 인생에서 만나는 명랑함과 애정과 기쁨의 단층들 저 밑으로 깊이깊이 매장해 버렸다. 그러나 내 감정 중에 심각한 것은 대부분 고독 속에 남겨졌고, 인간사에서는 어던 동지도 찾아낼 수 없었다. 황무지의 비다와 별과 밤바람, 내겐 이런 것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보다 더 큰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에 인간의 애정은 근본적으로, 신을 찾으려는 헛된 소망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447]

사람들은 대개 깊은 불행에 빠져 있어 파괴적인 발작에서 배출구를 찾으려 했다.

 

[448]

세상의 슬픔을 보며 느낀 깊은 연민이 나를 거기에서 구해냈다.

 

[450]

전쟁이 끝나자 내가 해온 모든 일이 나 자신 외에 누구에게도 완전히 무용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단 한 생명도 구하지 못했고, 단 1분도 전쟁을 단축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참전국들의 범죄에 공범자는 아니었으며, 개인적으로는 새로운 찰학과 새로운 젊음을 얻어다.나는 교수 자리나 청교도주의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렸다. 오랫동안 홀로 서 있는 과정에서 평형 감각 비슷한 것도 얻었다.

 

9. 러시아

[560]

나는 1920년 한 해 거의 전부를 여행하는데 보냈다.

[578]

정치란 히죽대는 악마의 부추김 속에, 정력적이고 눈치 빠른 사람들을 대상으로, 돈이나 권력이나 이론을 얻고 싶으면 순종하는 대중을 괴롭히라고 가르치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소.

10. 중국

 

[606]

상하이에서는 끝없이 사람 만나는 데 시간을 썼다. 중국인들은 물론이고 유럽인, 미국인, 일본인, 한국인들까지, 우리를 만나러 온 가지 각색의 사람들은 대체로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사이였다. 예를 들어, 폭탄 투척 사건으로 추방된 한국의 기독교인들과 일본인들 사이에 사교적 관계란 있을 수 없었다.

 

[607]

나는 그때까지도 개화된 중국인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세련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쑨원도 나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으나 그락 제의한 날이 우리의 출발 날짜 뒤엿던 탓에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두고두고 아쉽다.

 

[610]

도라는 교사 양성 기관인 여자 보통 학교에 나갔다. 학생들이 결혼과 자유 연애, 피임 등등에 대해 온갖 질무을 하면 그녀는 아주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유럽의 여자 대학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자유로웠지만 전통작인 행동 관습에 묶여 있었다.

 

[616]

내게 삶은 항없이 달콤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620]

나는 죽은 사람이니 인텨뷰를 할 수 없다.

 

3-1 이 책의 저자가 되어 이 책의 목차와 전체적 뼈대를 논하라

러셀의 열정과 고백록이 담긴 한편의 서사시이다. 진실을 말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처럼 -“거짓과 더불어 제정신으로 사느니, 진실과 더불어 미치는 쪽을 택하고 싶다.”-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으로 이 세가지가 러셀삶의 화두였다. 자서전이 작가의 모든 기술 중에서도 가장 위험하고 힘든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치부를 사실적으로도 가감없이 드러냄으로써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임을 느끼게 한다. 인간은 자신이 인정하는 진리를 위해 피 흘리며 죽어갈 수도 있다. 러셀은 바이런이 이것을 ‘불후의 구절들’로 표현했다고 지적한다.

 

슬픔은 지식이다; 가장 많이 아는 사람들은

숙명적 진리 앞에서 가장 깊이 애도해야 한다.

지식의 나무가 생명의 나무는 아니다.

 

러셀의 자서전을 가리켜 “서구의 사상, 지식, 과학의 보고와도 같은 책‘이라고 표현했다. 수학 공식처럼 명쾌하고 꺌끔한 문체, 재기 넘치는 표현, 위대한 학자치고는 너무나 진솔하고 따뜻한 인간성, 사실과 감정의 정곡을 찌르는 그의 글스기는 1950년 노벨 문학상이 입증해 주었다.

제1부 프롤로그에서 그는 세상과 우주와 인간을 이해해 보고 싶었노라고 밝혔다. 학문에 매진할 수 있는 외적,내적 조건은 완벽했으까. 청소년기의 내적 갈등을 거쳐 전통과 종교이 굴레에서 벗어난 그는 수학을 공부하고자 케임브리지 대학에 진학했고, 더 넓고 자유로운 세상에서 당대의 천재들과 더불어 역사를 만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 분야의 기념비적 저서인 <수학원리(화이트헤드오 공저)와 <수학의 원리>가 완성되기까지 그이 모든 노력은 학문에 바쳐졌다. 그런데 <수학 원리> 집필에 들어간 1901년, 스승이자 학문 동료인 화이트헤드의 부인이 병고를 치르는 것을 지켜보다 신비한 정신적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순간, “발 밑에서 땅이 무너지면서 완전히 다른 영역에 들어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고 그는 표현했다. 모든 인간의 영혼은 근본적으로 고독하며 지고지순한 사랑만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학문적 분석이 아닌 감정의 채널로 그에게 밀려왔고, 그 몇 분이 지나자 그는 “제국주의자에서 친보어파, 평화주의자, 휴머니스트”로 변해 있었다.

이어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이 그의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그는 죽음의 쇼를 지켜보면서 인간 본성에 대한 생각을 바꾸ㅡ었고, 세상의 슬픔과 고통에서 오는 연민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새로운 사랑을 확인했다. 이때의 심경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상심하는 젊은 세대를 생각하면 연민으로 가슴이 저리가. 그것은 내가속한 세대의 어리석음과 탐욕 때문에 생겨난 상심이다.” 근 학구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인류를 위해 새로운 책들을 쓰기로 결심한다.

 

그 후 러셀은 국내외이 여러 대학에서 틈틈이 강의하는 한편, 강대국들의 음모를 폭로하고 저직과 권위와 전통에 억눌린 개인의 해방을 부르진고 인류 공영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사히는 작업에 헌신했다. 사상가, 수학자, 교육 실험가, 지성과 사회와 성(性) 해방의 옹호자, 평화와 시민권과 인권을 주창한 운동가- 그이 이름 앞에 이처럼 많은 수식어가 붙는 것은 그가 세계와 인류를 위해 여러 방면으로 활동을 펼쳤음을 나타낸다.

러셀은 남녀의 육체적 정신적 상호 보완성을 인정하면서 “나의 연인들이 없었다면 나는 훨씬 더 편협해졌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 같은 사상과 몸소 보여준 자유로운 결혼 생활과 연애생활 소위 막장 드라마 같은 불륜을 함으로써 입에 담기도 힘든 비방과 고초를 감수했다. 하지만 그는 철저한 남녀 평등을 고수했다.

 

제1,2차 세계 대전 이후 동구와 서구가 대립하는 이데올로기 냉전시대로 넘어오면서 그는 인류의 사활이 걸린 핵전쟁 문제에 만서 온몸으로 투쟁한다. 세계 각지의 영토 분쟁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정치적으로 탄압받는 수감자 구명 운동과 소수 집단을 위해서도 일했다. 새로이 등장한 미국의 패권ㄹ주의를 우려하여 격하게 성토하고 나선 것도 그였다. 그의 이러한 모든 활동은 말년에 ‘버트란트 러셀 평화 재단’ 설립으로 결실을 맺음으로써 젊은 세대와 함께[하는 새로운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 그의 운동은 근본적으로 휴머니즘에 기초해 있었기 때문에 이데올로기나 당파성, 국경을 초월한 숭고하고 보편적인 운동이었다.

천재 물리학자이자 평화주의자였던 아인슈타인은 러셀을 가리켜 “자신의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대중의 계목과 교육에 활용해 온 사람”이라고 평했다.

 

목차

제1부 1872~1914

프롤로그 /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나

1. 유년기

2. 청년기

3. 케임브리지 시절

4. 약혼

5. 첫 결혼

6. <수학 원리>

7. 다시 케임브리지로

제 2부 1914~1944

8. 제1차 세계대전

9. 러시아

10. 중국

 

3-2.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인간은 사고할 때에만 하느님일 뿐, 행동과 욕구에서는 환경의 노예들이야(297p)

당신의 처한 상황에서 온정이 찾아오리라 생각하면 불행이 훨씬 더 견디기 힘들어질 뿐이야. 그리고 실제로도, 익숙한 피난처를 벗어나 홀로 세상과 직면하는 것이 지혜와 용기의 첫걸음이 되지. 세상은 너무도 위함한 곳이어서 때로는 겸양과 훌륭한 매너도 장애가 되지(299p)

나보다 훌륭한 삶을 살면서도 한순간도 약해지지 않고 길고도 힘든 과제를 척척 해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내가 잘 알거든. 다만 일을 가지고 호들갑을 떨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침묵 속에 수행하고 있는 과업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사람들이 알지 못할 뿐이지.(319p)

 

3-3. 내가 저자라면

러셀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쭉 느꼈던 것은 그의 능력이었다. 어렸을때부터 길러진 사색과 공부에 대한 열정이 그를 능력있는 사람으로 키웠다. 이웃을 위해 사회를 위해 국가를 위해 봉사하고 사람들에 대한 연민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것은 러셀의 능력이 뒷받침해주었기 때문이었다. 하루 10시간씩 공부에 매달려 진을 뺐다는 것은 어느 학자라면 하겠지만, 그 능력을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세상을 위해 자신을 사용했다는 부분이 감동적이었다. 물론 많은 여인들과의 염문을 뿌린것은 사생활이지만, 어느 누구에게 인간의 완벽함을 요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자서전은 보통 자신의 장점과 업적을 쓰려고 하지만, 내면의 깊은 울림으로 고백적이고 그때 느낀 감정을 그대로 표현함으로써 한 인간으로서의 약함이 그를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으로 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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