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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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날 때 그대는 얼마나 큰 짐을 들고 가는가? 짐의 크기가 여행에 대한 그대의 두려움의 크기다. 나는 나만의 짐 싸는 방법이 있다. 여행을 가기 며칠 전부터 가방 하나를 서재 바닥에 놓아둔다. 활짝 열어 놓는다. 그리고 생각날 때 마다 그 속에 들어가야할 것들을 던져 넣는다. 책도 넣고 작은 수첩도 넣는다. 우산도 넣고, 속옷도 챙겨 넣는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모자도 넣어둔다. 이것저것 넣다 보면 하루 이틀 지나 가방이 제법 찬다. 그곳에서 하고 싶은 것을 상상하는 동안 짐은 조금씩 늘어난다. 비치를 상상하면 수영복을 챙겨넣고 썬크림도 추가한다. 상상의 크기가 짐을 늘인다. 이렇게 짐들은 가방 속에서 살림이 늘듯 점점 쌓이게 된다. 막상 떠나게 되는 전 날, 내가 하는 일은 불필요한 것들을 다시 빼내는 것이다. 얼마까지 줄일까 ? 가방 크기의 반, 이것이 내 목표다.
내가 이런 짐싸기를 즐기는 이유가 있다. 첫째는 내 스타일이 그렇다. 정해진 시간 내에 엄청난 효율성으로 일을 처리하는 스마트한 재능이 나에게는 없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제 생긴대로 짐도 싼다. 둘째, 여행의 반은 떠나기 전의 설레임의 맛이다. 여기를 떠난다는 것, 그 자체가 커다란 기쁨이다. 그러니 가방을 펼쳐 놓고, 그곳에서 있을 일을 상상하며, 생각나는 것들을 던져 넣는 자유의 기쁨을 만끽하는 것이다. 셋째, 가방 크기의 반만 채우는 이유는 여행을 가서 뭔가 채워오기 위해서다. 꼭 상품을 사오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곳의 공기도 좋다. 그저 내가 가는 그곳에 대해 내 정신은 가방만큼 열려 있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나만의 상징적 의식이다. 나는 떠나기 전에 불편과 필요에 대비하기 위해 절대로 가방을 꽉 채우지 않는다. 내가 엉성하듯 내 가방도 늘 엉성하다.
아직도 종종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멀쩡한 회사를 나오는 것이 두렵지 않았느냐고 말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얻는 두 가지 병이 있었다. 하나는 불면이었다. 알 수 없는 불면이 종종 며칠 씩 나를 덮친 적이 있었다. 겉으로는 태연한 듯 했지만 내 무의식은 사회 속에 홀로 던져진 내 가족에 대한 근심으로 가득했나보다. 불면은 그런 모습으로 몇 년을 갔다. 또 하나는 닥치는 대로 신간 서적을 읽어대는 것이다. 아마추어에서 돈을 버는 프로로 옮겨가면서 나는 변화와 관련된 모든 책, 새로운 트랜드와 연관된 모든 책, 직장인들이 보는 모든 책을 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어떤 해는 천 권쯤 읽은 것 같다. 책읽기는 즐거움이 아니라 서류를 읽고 도장을 찍어야 하는 사람의 의무가 되었다. 그렇게 또 몇 년이 갔다. 한 마디로 덮어둔 두려움의 횡포 시대였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 모든 책을 읽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나는 다시 독서의 즐거움으로 되돌아 갔다. 읽고 싶은 책을 읽고, 한번 본 책을 여러번 보고, 한꺼번에 여러 권의 책을 이리저리 보는 제멋대로 독서를 즐기고 있다. 물론 잠도 잘 자고 있다. 왜냐하면 걱정한다고 이미 쓰여진 일이 일어나지 않거나 반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알게 되었다. 변화를 할 때는 두려움을 즐겨야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일종의 흥분이며, 삶의 엔돌핀이며, 살아있는 떨림이라는 것을 말이다. 일이 꼬이면, 비로소 어떤 기막힌 스토리가 나를 찾아오려는 조짐이라 생각하라. 가난이 두려워 질 때는 10년을 기약하라. 한 두번의 실패나 실수로 불운의 예감에 시달릴 때는 성패는 이미 쓰여져 있다는 진리를 믿으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 반대로 일이 계획대로 잘 되면,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면 된다. 인생은 봄처럼 짧다. 인생을 잘 사는 법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하면 된다. 두려움은,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으로만 증폭된다.
(Change 2010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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