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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21일 20시 56분 등록

고은 [순간의 꽃]

이성복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그 여름의 끝] [래여애반다라] 중에서 입니다.

 

시집 한 권의 가격을 알고 있는가?

2006년에 발간된 시집은 6천원, 2012년 발간된 시집은 8천원이다.

보통의 한끼 식사값 정도이다.

100쪽에서 150쪽 정도의 분량이다.

그렇다고 시인이 다작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시집을 잘 읽지 않는다. 읽지 않는다기 보다 읽지 못한다.

시가 어려운 것은 시를 읽어낼 감정이 없기 때문이다.

시는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느낀다면 그것은 시가 아니라 뉴스다"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시인이 밥벌이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다른 책은 몰라도 시집만큼은 열심히 사서 읽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 이다.

역시 연애시가 제일 좋다.

나의 기준을 말하는 거다.

2013년 추석휴일이 좀 길었다.

다른 좋은 일들도 많지만 가끔 시읽기 리뷰를 써보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처음으로 작업해본다.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역시 시는 읽기 어렵다.

한 수를 읽고 떨림이 오면 책을 덮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

 

시인 고은(高銀)

 

1933년 전북 군산에서 출생. 1958(25) <현대문학>에 봄밤의 말씀, 눈길, 천은사운 등을 추천 받아 등단.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저자의 프로필을 적는다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생각. 아직 정정하시니 오래 살아 노벨문학상을 받으시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한다. 몇 달 전 저자의 강의를 들을 기회를 생겼다. 어떤 기대를 가지고 갔을까? 아무런 생각 없이 참석했다고 하는 편이 맞을 듯하다. 동행하자는 사람과의 시간이 더 좋았을지 모른다. 저녁을 먹고 조금 넓은 강당에 앉아 강사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눈에 익은 모습의 그 분이 나타나셨는데 작고 얇은 분이셨다. 허스키한 목소리는 또랑또랑하게 말을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급기야 동행자는 스피커아래에 가서 듣고 나는 자리에 앉아서 온 신경을 다 쓰면서 들었다. 두 시간 강의를 정정하게 해 내시는 모습도 반짝이듯 명료한 그분의 생각도 대인(大人)의 모습을 만나는 기회였다. 금년(2013) 팔순이 되는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한 열정을 느낄 수 있는 자리였다. 강의장을 나오면서 생각했다. 지금도 충분히 연애를 할 수 있는 남자구나 하는 느낌(?)이 드는 멋진 어른이었다.

 

[순간의 꽃] 2001년 작품이다. 무당기운으로 시를 썼다는 구절이 있다. "새벽까지 술타령한다고 인내심 많은 아내한테 혼나는 일도 여러 번 이었다. 도무지 철이 들지 않는 질병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철들지 않는 질병을 가지고 살다가 철이 들면서 이세상이 아닌 유일한 다른 세상으로 옮겨 앉는 것은 아닐까...

 

[순간의 꽃] 중에서,   고은

20014월 출간

 

 

한쪽 날개가 없어진

파리가 엉금 엉금 기어가고 있다

 

오늘 하루도 다 가고 있다              8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다보았다        13

 

 

길 한복판

개 두 녀석이 붙어 있다

 

나는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17

 

 

부들 끝에 앉은 새끼 잠자리

온 세상이 삥 둘러섰네                21

 

 

소나기 맞는 민들레

입 오므리고 견디는구나

 

굳세어라 금순아                      24

 

 

지렁이 한 녀석도

산울림 들으며 자라난다

아기 무덤도

파도 소리 들으며 어른이 된다         31

 

 

할머니가 말하셨다

아주 사소한 일

바늘에

실 꿰는 것도 온몸으로 하거라

 

요즘은 바늘구멍이 안 보여            39

 

 

고양이도 퇴화된 맹수이다

개도 퇴화된 맹수이다

나도 퇴화된 맹수이다

 

원시에서 너무 멀리 와버렸다

우리들의 오늘

잔꾀만 남아                          43

 

 

어쩌란 말이냐

복사꽃잎

빈집에 하루 내내 날아든다            49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50

 

 

하도 하도 심심하던지

거미줄 풍뎅이 껍질

찬바람에 그네 타네                   53

 

 

저쪽 언덕에서

소가 비 맞고 서 있다

 

이쪽 처마 밑에서

나는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다

 

둘은 한참 뒤 서로 눈길을 피하였다   55

 

 

이런 날이 있었다

길 물어볼 사람 없어서

소나무 가지 하나

길게 뻗어나간 쪽으로 갔다

 

찾던 길이었다                       56

 

 

설날 늙은 거지

마을 한 바퀴 돌다

 

태평성대 별것이던가                 61

 

 

곰곰이 생각건대

매순간 나는 묻혀버렸다

그래서 나는

수많은 무덤이다

 

그런 것을 여기 나 있다고 뻐겨댔으니 62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위로의 말인가

푸른 잣나무 가지에

쌓인 눈덩이

떨어지는 소리                       67

 

 

구름 속 보름달이 나타난다

도둑놈이 화들짝 놀라 달아난다

개들이 놀라 짖어댄다               70

 

 

방금 도끼에 쪼개어진 장작

속살에

싸락눈 뿌린다

 

서로 낯설다                       70

 

 

개는 가난한 제 집에 있다

무슨 대궐

무슨 부자네 기웃거리지 않는다                        72

 

 

저 어마어마한 회장님 댁

거지에게는 절망이고

도둑에게는 희망이다                              74

 

 

급한 물에 떠내려가다가

닿은 곳에서

싹 틔우는 땅버들씨앗

 

이렇게 시작해보거라                              76

 

 

온종일 장마비 맞는 거미줄

너에게도 큰 시련이 있구나                         77

 

 

무욕(無慾)만한 탐욕(貪慾)없습니다

그것말고

강호 제군의

고만고만한 욕망

그것들이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의 진리입니다

 

자 건배                                            80

 

 

나는 고향에서

고국에서

아주 멀리 떠난 사람을 존경한다

 

혼자서 시조(始祖)가 되는 삶만이

다른 삶을 모방하지 않는다

 

스무 살 고주몽                                    86

 

 

비 맞는 풀 춤추고

비 맞는 돌 잠잔다                                 86

 

 

재가 되어서야

새로운 것이 될 수 있다 하더이다

10년 내내

제 불운은 재가 되어 되어본 적 없음이더이다

 

늦가을 낙엽 한 무더기 태우며 울고 싶더이다                                  95

 

 

겸허함이여

항구에 돌아오는 배

오만함이여

항구를 떠나는 배                                                          101

 

 

실컷

태양을 쳐다보다가 소경이 되어버리고 싶은 때가 왜 없겠는가

그대를 사랑한다며 나를 사랑하였다

이웃을 사랑한다며

세상을 사랑한다며 나를 사랑하고 말았다

 

시궁창 미나리밭 밭머리 개구리들이 울고 있다                                 109

 

시인 이성복은

 

1952년 경북 상주출생. 서울대 불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졸업. 1977년 겨울 [정든 유곽에서]를 계간 <문학과 지성>에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남해금산][그 여름의 끝][호랑가시나무의 기억]등과 산문집으로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했는가]등이 있다. 제2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래여애반다라(來如哀反多羅) 중에서   이성복

2013.1월에 출간

 

입술                     13

 

입술을 유리창에 대고 네가 뭐라고

속살일 때 네 입술의 안쪽을 보았다

은박지에 썰어 놓은 해삼 같은 입술

양잿물에 헹궈 놓은 막창 같은 입술

쓰레기통 속 고양이 탯줄 같은 입술,

이라고 말하려다 나는 또 그만둔다

애인이여, 내 눈엔 축축한 살코기밖에

안 보인다, 내 꿈에 낀 백태 때문에

 

 

식탁                    15

 

아이들이 한바탕 먹고 떠난

식탁 위에는 찢긴 햄버거 봉지와

우그러진 콜라 패트병과

입 닦고 던져놓은 종이 냅킨들이 있다

그것들은 서로를 모르고

가까이 혹은 조금 멀리 있다

 

아이들아, 별자리 성성하고

꿈자리 숭숭한 이 세상에서

우리도 그렇게 있다

하지만 우리를 받아들인 세상에서

언젠가 소리 없이 치워질 줄을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다

 

 

절취선                19

 

대개 참석 여부를 알려 달라는

초대장 아래쪽 절취선은 점선이다

 

박음질 한 것처럼 아예 구멍을

내놓은 것도 있지만,

 

대개 점선에 자를 대고

찢도록 되어 있다

 

절취선이 꼭 점선이어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 점선인 것은

실선에는 없는 어떤 것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실선에는 있는 어떤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선생1                  23

 

오늘 어느 잡지에서

선생이란 자기 말과 반대로 사는 사람이다

뭐 그런 구절을 발견하고

 

그만 하면 나는 참 좋은 선생이구나,

하고 무릎을 쳤다

 

초겨울 늦은 오후 바람 부는 창가에서

돌아가신 장모님 스웨터로

시린 무릎을 감싸며, 나는 또 생각한다

 

지금 내 생은 서리 내린 야산

무밭에 겅중겅중 솟은 순무 같구나

 

그거 한번 뽑으려면

동네 사람 다 달라붙어야 하고,

 

그게 쑥 뽑혀 나가면

동네 사람들 죄다 엉덩방아 찧으며

멀쩡하게 생긴 게 사람 잡는다고 투덜거리는,

 

속속들이 바람 든 순무 같구나

어제 내 어리석음은

 

 

선생2             25

 

종강하던 날 영문과 여학생이 준

사탕 봉지에 카드가 들어 있었다

 

선생님께서 그토록 열심히

가르쳐 주셨건만, 형편없는

시만 쓰고 졸업하게 되었군요

 

그래, 그건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좋은 선생님들 밑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공부했지만,

되도 않은 시나 쓰면서

그게 바로 시라고 가르쳐 왔으니

 

제사 때마다 나 글 잘 쓰게 해달라고

빌던 어머니 보시기에도,

지 애비 신문 났다고 무슨 경사

난 줄 아는 자식 놈들 보기에도

 

나는 부끄러운 시만 써왔으니,

오래도록 영문과 여학생의 말은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 이 시를 읽다가 투병중인 스승이 생각나서 메세지를 보냈다. 왜 눈물이 날까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으셨지만, 내가 왜 눈물이 나는지

왜 이 시를 읽으며 당신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알고 가셨겠지요....

 

시에 대한 각서               31

 

  고독은 명절 다음 날의 적요한 햇빛, 부서진 연탄

재와 삭은 탱자나무 가시, 고독은 녹슬어 헛도는 나

사못, 거미줄에 남은 나방의 날개, 아파트 담장 아래

천천히 바람 빠지는 테니스 공, 고독은 깊이와 넓이,

크기와 무게가 없지만 크기와 무게, 깊이와 넓이 지

닌 것들 바로 곁에 있다 종이 위에 한 손을 올려놓고

연필로 그리면 남는 공간, 손은 팔과 이어져 있기에,

림은 닫히지 않는다 고독이 흘러드는 것도 그런 곳

이다

 

죽음에 대한 각서                35

 

겨울에 죽은 목단 나무 가지에서 꽃을 꺾었다 끈적한 씨방이 갈라지고 터져 나온 꽃, 죽은 딸을 흉내 내는 실성한 엄마처럼 꽃 떨어진 자리도 꽃을 닮았다 여름 꽃을 보지 못했어도 우리는 겨울 꽃이 될 수 있다 희부옇게 타다 만 배꼽 같은 꽃, 제사상에 올리는 문어 다리 꽃, 철사로 동여매도 아프지는 않을 거다 그 꽃잎 마른 번데기처럼 딱딱하고, 눈비가 씻어간 고름 자국 찾을 수 없다, 죽음이 불타버린 꽃

 

 

남지장사2                   116

 

우록 마을 다음에는 백록 마을이 있고

백록 마을 끝나는 곳에서 옆으로 돌아가면

남지장사가 있다 본래 이 절은 신라 때

청건되어 임진왜란 때 불탔다 하나,

원효나 의상이 지었다는 소문 없으니

그들도 딴 절 짓느라 정신이 없었나 보다

어떤 사람 말로는 이곳 최정산 남지장사는

팔공산 동화사의 말사인 북지장사와 짝을

이룬다 하고, 한때 그의 부친이 북지장사

신도회장이었다 하니, 그도 남지장사와는

사돈척이 되는 셈이지만, 비록 제 짝지가

몇 십리 밖에 있다 하여도 붉으락푸르락

화장으로 떡칠한 남지장사는 좀 외롭고

쓸쓸해 보인다 일찍이 제 스스로 남쪽으로

내려온 적 없어도 그냥 지장사는 될 수 없고,

북쪽 어딘가에 제 배필이 있다는 풍문이

있어도 천 년 만 년 찾아갈 도리 없으니

봄안개 가을비에 홀로 늙어가다가, 덜 꺼진

담뱃불에도 속수무책 불타버리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 절이 여러 번 중건된 것도

그 속절없는 사연을 어쩌든지 복원하려는

것이나, 누구나 한 번쯤 찾아와 두고두고

가슴 아파해야 할 일이다 더욱이 절 앞에

흐르는 샘물은 기막히게 맛이 좋아, 어떤

갓난애는 그 물로 분유를 안 타주면 젖병을

내던진다 하니, 언젠가 靑苔 낀 샘가에서

그 물을 곱씹으며 아, 생각하면 생각사록

죄 많은 한 청춘이 잊혀지지 않을까 싶다

 

 

북지장사 느티나무식당2         120

 

이건 또 복지장사와는 상관없는 느티나무식당

이야기인데, 어느 해 근처 오리농장에서 키우던

토끼 한 쌍을 가져가라 해서, 채마밭 옆에 철근을

박고 비닐을 둘러 집을 지어 두었더란다 머구든

돌미나리든 잘도 먹어치우던 토끼 부부는 핸드폰

마스코트 같은 새끼를 일곱 마리란 낳고, 그 작은

입으로 핥고 깨물고 이뻐서 난리더니, 어느 날은

한밤중에 땅굴을 파고 집단탈출을 했다고 한다

마침내 산으로 돌아간 토끼 일가는 새끼가 또

새끼를 낳고 이른바 피보나치 수열로 불어나

기슭의 콩밭, 상추밭, 마늘밭을 쑥밭으로 만들고

견디다 못한 사람들이 덫을 놓고 올무를 놓아도

좀처럼 잡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지난 일요일

아내와 함께 느티나무식당에 들렀더니 토끼가

살던 비닐집은 예전 그대로고, 몇 년이 지나도

먼지 앉은 토끼똥은 여전히 정갈했지만, 토끼

그림자도 없는 야산엔 새잎 돋아난 콩밭이 푸르고,

먼산 뻐꾸기도 가끔은 울면서 지나갔다 가끔은,

견고한 울타리 넘어 돌아오지 않는 것이 토끼

일가만 아니어서, 몇 해 전 해일이 들이닥쳐 바다로

돌아간 횟집 수족관의 도다리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오다, 서럽더라1                   125

 

그날 밤 동산병원 응급실에서

산소 호흡기를 달고 헐떡거리던 청년의

내려진 팬티에서 검은 고추, 물건, 성기!

이십 분쯤 지나서 그는 숨을 거뒀다

그리고 삼십 년이 지난 오늘 밤에도

그의 검은 고추는 아직 내 생속을 후벼 판다

못다 찌른 하늘과 지독히 매운 성욕과 함께

 

 

來如哀反多羅3                132

 

이 순간은 남의 순간이었던가

봄바람은 낡은 베니어판

덜 빠진 못에 걸려 있기도 하고

깊은 숨 들여 마시고 불어도

고운 먼지는 날아가지 않는다

깨우지 마라, 고운 잠

눈 감으면 벌건 살코기와

오돌토돌한 간처녑을 먹고 싶은 날들

깨우지 마라, 고운 잠, 아무래도

나는 남의 순간을 사는 것만 같다

 

기파랑을 기리는 노래              141

 

언젠가 그가 말했다, 어렵고 막막하던 시절

나무를 바라보는 것은 큰 위안이었다고

(그것은 비정규직의 늦은 밤 무거운

가방으로 걸어 나오던 길 끝의 느티나무였을까)

 

그는 한 번도 우리 사이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내색하지 않았다

우연히 그를 보기 전엔 그가 있는 줄 몰랐다

(어두운 실내에서 문득 커텐을 걷으면

거기, 한 그루 나무가 있듯이)

 

그는 누구에게도, 그 자신에게조차

짐이 되지 않았다

(나무가 저를 구박하거나

제 곁의 다른 나무를 경멸하지 않듯이)

 

도저히, 부탁하기 어려운 일을

부탁하러 갔을 때

그의 잎새는 또 잔잔히 떨리며 속삭였다

_아니 그건 제가 할 일이지요

 

어쩌면 그는 나무 얘기를 들려주러

우리에게 온 나무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무 얘기를 들으러 가다가 나무가 된 사람

(그것은 우리의 섣부른 짐작일 테지만

나무들 사이에는 공공연한 비밀)

 

 

[그 여름의 끝] 중에서     이성복

1990 6월 출간

 

만남               13

 

내 마음은 골짜기 깊어 그늘져 어두운 골짜기마다 새

들과 짐승들이 몸을 숨겼습니다 그 동안 나는 밝은 곳만

찾아왔지요 더 이상 밝은 곳을 찾지 않았을 때 내 마음은

갑자기 밝아졌습니다 온갖 새소리, 짐승 우짖는 소리 들

려 나는 잠을 깼습니다 당신은 언제 이곳에 들어오셨습니

 

                23

 

우리 육체의 집을 지어도 그 문가에서 서성거리는 것

은 마음의 집이 멀리 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의 집을 찾

아가도 그 문가에서 머뭇거리는 것은 우리가 집이라 부르

는 그것도 제 집을 찾아 멀리 떠났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비울수록 무겁고 다가갈수록 멀어라!

 

 

易傳 1                 58

 

  며칠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눈물 흘리는 짐승들이

슬퍼졌지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기를 먹었습니다

넓적넓적 썰은 것을 구워먹으니 맛이 좋았습니다 그날 아

침 처형당한 간첩의 시체라고 했어요 한참을 토하다 고개

들어보니 입가에 피범벅을 한 세상이 어그적어그적 고기

를 씹고 있었습니다

 

易傳 3                 60

 

  속옷만 입은 우리 아이가 밖에서 놀고 있는데 아이가

무섭다고 기겁을 하는 것을 보니 아이보다 훨씬 큰 멧돼

지 한 마리 화살통 같은 입을 세우고 달려오기에 엉겁결

에 몽둥이를 들어 심하게 내리쳤지만 꿈쩍도 않아 누가

옆에서 갖다준 도끼로 여러 번 찍고, 또 찍고 그러고 나

서 들여다보니 도끼가 찢긴 어깻죽지에 피 묻은 속옷이

너덜거리고 정말 그것은 피투성이가 된 우리 아이의 무참

한 모습이었습니다.

 

비단길 5               69

 

  비 온 뒤의 웅덩이처럼 당신은 내 기다림 뒤에 계십니다

  기다림 저편에 진흙을 기는 무지렁이나, 비 온 뒤 개인

하늘을 비추는 빗물이거나......

  그 모든 사소로운 것들이 당신의 눈짓인 줄 이제 알겠

습니다

 

그대 가까이 2            71

 

자꾸만 발꿈치를 들어보아도

당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때로 기다림이 길어지면

원망하는 생각이 들어요

까마득한 하늘에 새털구름이

떠가고 무슨 노래를 불러

당신의 귓가에 닿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만나지 않았으니

헤어질 리 없고 헤어지지

않았어도 손 잡을 수 없으니

이렇게 기다림이 깊어지면

원망하는 생각이 늘어납니다

 

          83

 

  이렇게 발 뻗으면 닿을 수도 있어요 당신은 늘 거기 계

시니까요 한번 발 뻗어보고 다시는 안 그러리라 마음먹습

니다 당신이 놀라실 테니까요  그러나 내가 발 뻗어보지

않으면 당신은 또 얼마나 서울해하실까요 하루에도 몇 번

씩 발 뻗어보려다 그만두곤 합니다.

 

            88

 

  당신이 내 곁에 계시면 나는 늘 불안합니다 나로 인해

당신 앞날이 어두워지는 까닭입니다 내 곁에서 당신이 멀

어져가면 나의 앞날은 어두워집니다 나는 당신을 잡을 수

도 놓을 수도 없습니다 언제나 당신이 떠나갈까 안절부절

입니다 한껏 내가 힘들어하면 당신은 또 이렇게 말하지요

"당신은 팔도 다리도 없으니 내가 당신을 붙잡지요" 나는

당신이 떠나야 할 줄 알면서도 보내드릴 수가 없습니다

 

            89

 

  하루 종일 나는 당신 생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 길은 끝이 있습니까 죽음

속에 우리는 허리까지 잠겨 있습니다 나도 당신도 두렵기

만 합니다 이 길은 끝이 있습니까 이 길이 아니라면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이 나의 길을 숨기고 있습니까 내가

당신의 길을 가로막았습니까 하루 종일 나는 당신 생각으

로 가득차 있습니다 거울처럼 당신은 나를 보고 계십니다

 

1              93

 

가라고 가라고 소리쳐 보냈더니

꺼이꺼이 울며 가더니

한밤중 당신은 창가에 와서 웁니다

 

창가 후박나무 잎새를 치고

포석을 치고

담벼락을 치고 울더니

 

창을 열면 창턱을 뛰어넘어

온몸을 적십니다

 

숨길 수 없는 노래 2                  106

 

  아직 내가 서러운 것은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

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봄하늘 아득히 황사가 내려 길도

마을도 어두워지면 먼지처럼 두터운 세월을 뚫고 나는 그

대가 앉았던 자리로 간다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

우지 못하면 서러움이 나의 사랑을 채우리라

 

  서러움 아닌 사랑이 어디 있는가 너무 빠르거나 늦은

그대여, 나보다 먼저 그대보다 먼저 우리 사랑은 서러움

이다

 

그 여름의 끝    117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

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

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퐁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

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중에서, 이성복

200111월 발간

 

8 여태껏 우리 시대만큼 물질이 정신에게 치명타를 준 적은 없다.

물질과 정신을 서로 싸우게 만든 책임까지 우리 시대에 돌아올지

모른다. 물질의 근본 속성은 평등이다. 우리는 서로 동등해지려 하

면서 물질화된다. 신에게서 버림받은 정신이 물질의 잠을 거부하

고 상징의 숲으로 잠적하고 싶은 까닭도 여기에 있다.

 

9 예술에 있어서 새로운 주제란 없다. 영원한 주제의 새로운 체험

만이 문제된다. 예술가에 대한 새로운 체험의 지배 형식이 곧 예술

의 형식이다. 얼마나 진부한 이야기인가. 그러나 일단 형식 쪽에

윙크를 해줌으로써, 사유(思惟)의 난봉질에 일침을 가할 수 있다.

 

12 낭만주의자들은 집에다 싸움판을 벌여놓고 가출한다. 그들은 본

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만한 힘이 없기 때문에, 이미 제기된 문제를

미루거나 포기하고 새로운 문제를 찾아나선다. 그들이 신비에 정

통한 듯이 행동하는 것도 그곳에서는 안심하고 나태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16 입으로 먹고 항문으로 배설하는 것은 생리이며, 결코 인간적이

라 할 수 없다. 그에 반해 사랑은 항문으로 먹고 입으로 배설하는

방식에 숙달되는 것이다. 그것을 일방적인 구호나 쇼맨십으로 오

해하는 짐승들!

 

*사랑은 항문으로 먹고 입으로 싸기이다. 사랑이 힘든 이유이다.

 

17 신은 우리와 같은 공단(工團)에서 일하는데, 언제나 야근을 도맡

아 한다. 그에게는 애인도, 누이도, 고향도 없다.

 

20 더 흘러나오지 않는 피를 빨며 네 상처의 근원에 이르지 못하고

되돌아선 신(), 신의 푸른 입술에 대해 기억할 것. 오래 그를 네

수치 속에 파묻어 우엉처럼 싹이 나게 할 것. 그에 대해 헤프게 이

야기하지 말 것, 다만 그를 보살필 것, 그리하여 어느 날 슬퍼하지

말고, 그가 객사하도록 떠나보낼 것.

 

21 나무가 '되기 위해' 씨앗이 자라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 된 것들

은 또다른 무엇이 되기 위해, 영원히 무엇이 되지 않기 위해, 끝내

는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목적 때문에 생을 망쳐서는 안

된다.

 

24 계율_허무라는 길손을 맞기 위해서는 여분의 방과 깨끗이 풀

먹인 침구를 언제라도 준비해둘 것.

 

27 기쁨과 슬픔 사이 그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여백을 위해 우리는

몸짓을 다해 땀 흘린다.

 

31 세계는 죽음의 눈길이 닿을 때마다 천국으로 변한다.

 

33 '본다'는 것은 이미 편견을 가지기를 택했다는 말이다.

 

35 잔치에 흠뻑 빠져들어가지 않는 사람만이 잔치를 기록할 수 있

. 기록_영원화

 

40 쓴다는 것은 불행히도 '잠깐'동안만 어린이나 미치광이가 되는

것이다.

 

모든 내기를 시에 걸자. 들려오는 기차 소리와 늙어가는 어머니

까지도......사랑은 죽음으로 이루어지리라.

 

41 현실과 상상력은 원래 하나이다. 그것이 곧 근원이며, 고향이며,

변형의 원동력이며, 삶의 흐름을 흐름이게 하는 것이다. 현실은 상

상력 자체이며, 서로 비교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비교한다는 것은

원래 하나인 것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47 _기차역과 사창가의 인접성 혹은 인척성.

 

51 사랑은 언제나 구체적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좁은 문'이다.

 

53 관념은 도피 혹은 도피처다. 예술은 '구체적'이 아니다. 예술은

'구체'. 더할 수도, 뺄 수도 없는 그것!

 

54 이별_예리한 칼날, 난자당한 기대, 꿈결 같은 패주(敗走), 출렁

거리는 말의 바다.

 

55 _불꽃을 투기며 타들어가는 도화선. 재가 되는 시간, 지금

무엇이 파괴될 준비를 않고 있는가.

 

56 시는 그리움의 소멸이다. 비정하라!

 

59 무엇을 버려도 그것은 버려지지 않는다. 다만 버리려는 마음이

사라질 때 그것도 함께 사라진다. 그리고 다시 돌이킬 수 없음이여!

 

62 모든 것은 육체가 조종한다. 그러나 정신에 의해 단련될수록 육

체에서는 더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온다.

 

  우리는 시를 통해 연속적으로 산다. 혹은 우리는 시를 통해 온전

한 시간의 흐름을 회복한다. 이것은 허구가 아닌 현실이다. 배설이

나 식사, 잠 이상으로 현실적이다.

 

63 사랑이 없는 곳에 지옥도 없다.

 

69 사랑의 방법을 찾는 것은 이미 사랑에 대한 배반이다.

 

83 강조하는 것은 이미 진실을 배반하는 것이다.

 

86 인식(認識) 은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바꾸어놓을

수 없다. 인식의 즐거움은 노는 즐거움이 아니다. 놀리는 즐거움

이다.

 

87 사랑은 처음에 온다.. 지혜가 끝에 오는 것과 같이. 처음이든 끝

이든 모든 공식은 감옥이다

 

89 열거는 사랑의 방법이 아니다.

 

96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은 고통의 응축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마치

전압이 극도로 오르면 퓨즈가 끊어지듯이.

 

97 나무는 초록에서 빨강으로 건너간다. 혹은, 나무는 빨강에서 초

록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서 있다.

 

99 시인이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가 진실을 드러내기 위

해 유사(類似)진실을 형상화함으로써, 진실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진실을 고통이라는 말로 바꾸어보아도 동일한 결과가 된다.

                                                                    

101 사실 어떤 대상에 대한 불만은 어떤 대상에 내가 준 관념, 즉 나 자

신의 일부에 대한 불만이다. 적은 언제든지 내 편이다.

 

103 내가 죽음을 잊고 난 다음부터 삶은 슬프고 괴로운 것이 되었다.

죽음은 삶의 눈이다. 슬픔과 괴로움은 일종의 안질(眼疾)같은 것

이다.

 

109 위험부담이 없는 해답은 올바른 답이 아니다.

 

112 상처의 상처다움은 '돌이킬 수 없음'에 있다.

 

113 사랑_어떤 도립(倒立). 오목렌즈를 통해 보는 뒤집힌 세상.

랑한다, 네 구두창 뒤축에 진득이는 햇빛까지도......

 

114 진실을 행하는 방법이란 있을 수 없다. 진실이 곧 방법이기 때문

이다.

 

115 나는 아무것도 썩게 하지 않았는데 내가 집는 것들은 모두 썩어

있다. 썩은 것들을 썩었다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썩은

것들은 적어도, 썩을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116 사랑의 방법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가. 방법

을 가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사랑 속에 포함되어 있

기 때문이다.

 

116 이 불안이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 다른 불안과 손잡고......

 

118 글이 씌어지는 것은 사랑이나 증오의 한복판에서가 아니라,

것들의 뒤집힘, 혹은 돌이킴에 의해서이다. 뒤집힌 것들은 뒤집힐

수 있는 것들이고, 그러므로 끊없이 뒤집혀야 한다.

 

119 사랑의 전제(前提)는 떨어져 있음이다. _간신히 맞붙은 상

처를 다시 한번 찢어발기기.

 

사과가 썩은 것은 사과 잘못이 아니다.

 

121 상처의 깊이는 사랑의 깊이다. 한줌의 독()이 세상 모든 우물

을 더럽히듯이, 한치 깊이의 사랑은 세상 온 마음을 적실 수 있다.

사랑_상처의 반전(反轉)

 

122 상처받지 않은 것들은 치유될 수도 없다. '이 세상이 얼마나 신

비로운가!' 하는 감탄은 '상처받지 않는 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생

겨먹었을까?'하는 탄식과 다른 것이 아니다.

 

123 사랑은 언제나 죽음을 낳는다. 죽음이 있는 곳에 삶이 있다.

리는 셋이서 산다_너와 나, 그리고 파산(破産) 혹은 끝장.

 

127 '사이'라는 것. 나를 버리고 '사이'가 되는 것. 너 또한 '사이'

된다면 나를 만나리라.

 

135 나는 쇄빙선(碎氷船)이다. 내가 조금 더 늦게 오면 그대의 바다

는 얼어붙으리라.

 

138 그는 위대하다. 상처받지 않을 만큼 위독하다.

 

147 너는 육체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때 정신의 너의 육체

. 육체이면서 동시에 정신인 혼신(渾身). 이분화된 것들의 재결

. 재결합의 시간과 장소로서의 문학_죽음만큼 깊은 사랑에 닿

으려는 문학.

 

151 고독은 가장 비겁하지만, 가장 확실한 자기 방어의 방법이다.

 

153 산다는 것은 점차적으로, 부단히 자기가 발 디딘 곳을 파괴해나

가는 것이다.

 

154 이 삶에서 나의 근본적인 질문은 '도대체 어떻게 소생할 수 있을

'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 죽었던가?

 

156 행복은 이미지이고, 그것은 시선(視線) 때문에 태어난다. 시선

은 언제나 거리를 필요로 한다. 예술이 삶에 대한 배반이고, 형식

이 내용에 대한 왜곡일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 거리 때문이다.

 

159 시는 심연에 대한 두려움이고, 심연의 깊이에 대한 불안이고,

연으로의 추락에 대한 망설임이고, 추락한 뒤 다시 솟아오를 수 있

을까 하는 의구심이다.

 

160 _심연으로 급히 떨어지며 물위를 스치고 날아오르는 새의

날개에 묻은 물기

 

나의 손이 너의 손을 잡는다. 조금 있다 떼어보면 고름이 흐른

. 이 고름은 누구의 것인가?

 

161 마음을 기대 놓으면 곧이어 썩은 냄새가 풍긴다

 

결혼, 가족, 문명은 상처와 죽음을 괄호로 묶는 것이다.

 

162 절망_행복과 시의 모두(冒頭).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칼 끝

에 베여 그 상처가 열려 있음, 입 벌리고 있음을 뜻한다.

 

172 눈 덮인 길을 보는 것은 즐겁다. 전부가 길이기에 다른 어디로도

갈 수 없고, 갈 까닭도 없다.

 

176 자기 폐쇄는 자기 보호의 가장 뛰어난, 그러나 가장 비겁한 방법

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한 발짝도 정든 유곽에서 떠나지 않는 것.

그리고 차츰차츰 혹은 힘을 다하여 삶의 가능성을 좁혀가는 것.

 

176 속지 않겠다는 집념의 한량없는 어리석음!

 

183 나는 추억의 집이다. 나는 공터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184 집은 유곽이다. 나의 기쁨은 벌레 먹고, 나의 애인은 남의 아이

를 배었다. 사랑의 땅을, 다만 두 발 디딜 만큼의 땅을!

 

185 집은 보호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문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우리의 비극은 우리가 세계에 준 관념을 세계라고 생각하는

있다. 그러므로 이해는 오해의 일정이다.

 

197 자살이 타살보다 행복하게 보이는 것은 의식이 여전히 자기이기

를 고집하기 때문이다.

 

198 반성하지 않는 사랑은 폭력이다.

 

199 극단의 괴로움, 극단의 슬픔, 극단의 사랑에 의해 너는 정화될 것

이다. 결정적으로는 죽음에 의해, 정화는 언제나 공포를 동반한다.

 

203 시는 닫힌 문이다. 그 문을 열면 우리는 사람 온기가 남아 있는

낯익은 방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210 지치거라, 지치거라, 마음이여.....오늘 이곳에 머물러도 마음

이 차지 않는 것은 본래 그대 마음이 낯선 여관이기 때문이다.

 

211 삶은 추락의 체험이다. 그리고 사랑은 갈라진 벽의 금처럼 시작

된다.

 

213 한 절망에 대한 위안은 더 큰 절망에 있다.

 

214 '사실' '느낌'사이의 불연속성_그 사이에 '망각'이 가로놓

여 있다. 우리는 망각 때문에 살 수 있고 망각 때문에 죽을 수 있다.

 

215 망각은 느낌의 죽음이기 때문에, 삶의 은인이며 원수다.

 

225 삶과 외줄타기의 동일성. 아래를 내려다보면 너는 떨어지고 만

. 다만 삶의  심연을 바라보지 않는 것만으로 사람은 살 수 있다.

 

226 모든 고통은 환희의 일시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쉽사리 너 자신

이 고통의 껍질을 벗겨 환희를 찾으려 들지 말 것. 기다릴 것. 조급

하게 속단하지 말고 기다릴 것!

 

230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확신만이 내가 제대로 살 수 있는 가능성

의 지표가 된다.

 

형벌이 찾아오면 기쁜 마음으로 영접할 일이다. 깊숙이 칼이 들

어올 때 무가 반항하는 것을 보았는가.

 

231 사람은 괴로움을 어찌할 수 없지만, 그러나 받아들일 수는 있다.

 

233 아 삶의 전부는 내 문학의 거대한 밥상이다. 너무 역겨워 좀처럼

상보를 걷을 마음이 나지 않는다.

 

235 나는 안다. 내가 언제 변절했고, 어디서 비겁했고, 어떻게 타락

했는지를.

 

244 생각해보라,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251 문제는 내가 타락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타락으로부터 벗

어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잃었다는 데 있다. 타락_희망의 상실.

 

253 _마치 물고기의 아가미처럼, 삶이라는 숨쉴 수 없는 공간을

향해 열린, 그러나 지금은 퇴화해버린 우리들의 아가미.

 

262 모든 경계는 결국 의식의 경계일 뿐이다.

 

263 우리가 괜챦은 여자를 보고 입맛을 다시는 것은 식욕과 성욕이

하나의 방법을 통해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육체는 가난하다.

 

265 당신은 아직 내가 내딛지 못한 한 발 허공이다.

 

271 때로 내 논리를 내 삶이 따라잡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나는 내가 쓴 글들을 오래 들여다본다. 논리와 삶의 간극 사이에 내

가 있다. 나는 '지향(指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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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22 01:51:56 *.108.69.102

와우!   대단한 열정이네요.

서연이 굵게 처리한 부분만 읽기도 숨이 차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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