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해 좌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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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21 만나고 걷고 웃고 마시고 보고 헤어지고
오늘 그랬다. 아침 10시에 만났다. 미영과 햇살은 그렇게 상명대에 와 있었다. 오늘은 시작부터 운이 좋았다. 672번 버스가 건널목을 건너자 곧바로 내 앞에 와서 섰다. 다시 서대문 우체국 , 환승하는 자리에서 또다시 건널목을 건너니 153번이 왔다. 다시 상명대 입구에서 건널목을 건너니 마을버스 3번이 왔다. 오늘은 운수 대통이다. 조금 더 기다리니 인건이 왔다. 츄레이닝 바지를 입고 왔다. 연구원 면접보러 가던 날, 철이가 입고왔던 츄레이닝 바지가 생각이 났다. 우리 모두를 즐겁게 했던 그 츄레이닝 바지, 물론 그날 철이가 운전을 하고 싸부댁까지 우리를 태우러 왔었다. 싸부는 우리에게 집으로 들어오라고 했고 우린 달걀 후라이와 불루베리를 많이 먹었다. 철이가 츄레이닝을 입었던 정확한 날짜가 분명하진 않지만 하여튼 오늘 츄레이닝바지를 입고 나타난 인건은 그런 싸부와 얽힌 일화를 생각나게 했다. 우린 천천히 산을 향해 올라갔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자며 싸부댁 앞으로 갔다. 지금이라도 소리쳐 부르면 싸부가 나와 아, 좌샘, 들어오세요! 라고 말할 것 같은 그집앞. 오가며 그집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운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시작부터 너무 센치해졌나? 어쨋든 그렇게 우리는 싸부가 걷고 또 걸었을 그 길을 천천히 함께 걸어 올라갔다. 오늘 보니 그 길은 혼자서 걸어야 할 그런 오솔길이었다. 봄꽃은 다 사라지고 녹음이 무성하다. 이제 곧 차거운 바람이 불어오면 잎은 지고 나무는 줄기만 남겠지. 그러면 하늘은 더 맑게 보이고 산 능선은 더 선명하게 경계지워 지겠지. 묵묵히 걸어 올라갔다. 말없이 앞장서서 걷던 싸부가 생각난다.
연휴의 끝이어서인지 산에는 사람들이 너무너무 많았다. 숫제 줄을 서서 올라가고 있었다. 늘 호젓하게 걷던 산길이었는데 이런 소란이 낯설고 불편하다. 우리는 쉬지않고 서둘러 걸었다. 싸부가 나와 혜향이를 안내했던 그 자리엔 이미 다른 세사람이 먼저와서 환담을 즐기고 있었다. 그곳에 조용히 앉아 싸부는 호랑이 프로젝트의 서문을 이야기 해 주었다. 그 곳, 앉은자리에서는 앞산의 바위가 정갈하게 우리의 얘기를 듣는 듯 했었다. 이제는 다시 되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버린 싸부를 추모하며 남은 사람들끼리 내 마음속의 스승에게 마음편지를 보냈다. 언젠가는 싸부가 답신을 보내오리라 믿는 마음은 한결같다. 우리는 같은 방향을 보고 함께 걸었으므로 사제동행이다. 그 길의 끝에 언젠가 우리는 닮은 모습으로 거울에 비춰질거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다. 그렇게 믿고 바라면 이루어지게 되어있다. 오늘처럼, 건널목에서 모든 운이 맞아 떨어지는 것처럼 그런 날이 가까운 시간안에 찾아오면 좋겠다.
단순히 하루의 일과를 기록해보려고 했는데 생각이 깊어진다. 향로봉 앞에서 구기동으로 가는 길로 접어 들었고 그 산길의 끝에서 장독대를 찾아 들어갔다. 이곳에서는 건너편 북악산의 능선이 보인다. 로이스와 함께 밤늦게까지 그곳에서 즐겁게 얘기했던 생각이 난다. 그곳은 이번 추석동안 호황을 누린듯 했다. 손님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산길의 끝에 처음 나타나는 카페여서 특수를 누리는 것 같다. 이 곳에는 부산 동래산성의 밀주가 그 근원인 산성 막걸리가 있다. 주인이 부산사람이기 때문에 그 산성막걸리를 알고 있는 것이다. 파전과 막걸리, 그리고 라면을 먹었다. 콩나물과 깨잎을 종종 썰어넣은 라면, 참 담백하고 맛있었다. 인건은 계속 동영상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질문이 "내년에는 뭐하실거예요?" 코 앞에 카메라를 갖다대고 인터뷰를 하는데 잠시 방심하는 사이에 무우김치를 으적으적 먹는 장면도 찍은 것 같다. 내년엔 프로방스 갈 계획이다, 그래서 불어를 공부하려고 한다고 대답했는데 이 대답이 인건의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다시 "내년엔 뭐할거예요?"라고 묻는다. 햇살과 미영은 깔깔웃는다. 30대 젊은 이들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공중으로 울려 퍼진다. 카메라를 싫어하는 마음과 그래도 잘 찍혀야지 하는 마음이 같이 있어서 헷갈렸다. 언젠가는 입장을 바꿔서 내가 인건을 인터뷰해야 겠다. 미영은 사진 안찍는다고 애기처럼 찰랑찰랑 머리카락속에 얼굴을 감춘다. 햇살은 리허설을 하고 온 것처럼 의젓하게 잘 대답을 한다. 인건은 계속 찍어대는데 나는 몹시 궁금하다 그가 어떻게 편집을 하고 어떤 결과를 남길지가 말이다.
우리는 기분 좋게 산길을 다 내려와서 천천히 구기동길을 걸어서 구기터널 앞까지 왔다. 인건은 사우나를 하고 싶다고 하고 미영은 밥을 먹고 싶다고 해서 우린 인건에게 자유를 주고 남은 셋은 구기동 옛날 두부집으로 갔다. 콩비지와 북어구이를 먹었다. 만족스런 맛이다. 다시 종로 3가 까지 갔다. 인건이 강추한 영화 <관상>을 보러 갔다. 표가 없을꺼라는 예상을 뒤엎고 현장 판매를 하고 있었다. 3시 표를 구입했다. 영화는 재미 있었다. 그러나 과도한 육체적 활동으로 초반엔 좀 졸았다. 심각한 메시지가 있을만한 주제인데, 대중성 있게 만든 영화다. 흥행은 성공적인듯 하다. 몇가지 대사는 음미를 해보고 싶은데 잘 들리지 않았다. 나도 이제 노년기로 접어 드는게 아닐까? 이런 어두운 생각은 하지말자. 궁금하면 도서관에 가서 시나리오를 찾아보면 되는거다. 영화관 앞에서 헤어지고 미영과 햇살은 집으로, 나는 이문학회로 갔다. 아무도 없는 텅빈 서실, 한옥에서 바라보는 먼하늘에 회색빛 구름이 몰려 있다. 음악을 들을 기분도 글씨를 쓸 기운도 없다. 그냥 집으로 왔다. 괌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아들이 쓸쓸할까 염려하며 집으로 왔는데, 아직 안들어왔다. 나는 오늘도 달린다. 이렇게 달작지근하게 달린다. 나는 달려라 작가에 합류하여 달리는 중이며 오늘은 달작 오프라인 달리기를 하는 날이었다. 한 달을 잘 달려와서 하루를 이렇게 즐겁게 지내는 것은 보너스, 충만한 추석 선물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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