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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22일 22시 08분 등록

<백범 일지> 백범 김구 자서전

도진순 주해

 

1.     저자에 대하여

 

백범 김구는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위해 몸을 바친 민족 지도자로 평가 받는다. 여기에 이견을 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좀 의아스러운 점이 있다. 민족의 위대한 영웅이며 지도자라고 하면 비범한 출생이나 탁월한 재능, 또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백범한테는 이러한 조건을 찾을 수가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몰락한 양반 집안이라지만 가난한 평민출신이고 같은 마을 양반들한테는 천대를 받았다. 그렇다고 어릴 때부터 눈에 띄는 재능도 없고, 교육도 중국의 역사를 다룬 <史略>, 배움의 기초 책인 <大學>, 그리고 병법서, 유학, 철학관련의 책을 읽었을 뿐, 특별히 공인된 교육기관에서 수학한 경험도 없다. 백범이 자서전에서 얘기한 것처럼 타고난 건강 하나만큼은 자랑할 만할 뿐,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것 없는 평범한 사람, 白凡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민족의 영원한 스승이며 겨레의 등불로 추앙을 받는다. 왜 그럴까? 그의 생애와 사상을 들여다 본다.

 

1)생애

 

유년 및 청년기

 

백범 김구는 1876년 음력 711일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아버지 김순영과 어머니 곽낙원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당시는 일본의 함포 위협 속에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어 나라가 강제로 개항을 하는 암운의 그림자가 드리운 시기였다. 아버지는 성격이 호탕하고 의협심이 강해 술이 취하면 마을에서 양반 세도를 부리던 진주 강씨와 덕수 이씨를 패주어 자주 감영에 갇히기도 했다.

백범의 기질 중에서도 훗날 일본 중위를 살해한 것이나 불의를 참지 못하는 것은 아버지의 유전적 기질 때문인 것 같다.

 

12세 때 양반 갓을 쓰지 못하는 상놈의 현실을 개탄하며 양반이 되기 위해 공부를 결심했으나 13세 때 아버지가 뇌졸증으로 전신불수가 되자 병을 고치기 위해 어머니는 유명한 의원을 찾아 떠돌면서 백범은 친척 누이 집에 맡겨졌다.

아버지의 병세가 호전되자 백범은 다시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아버지의 권유로 토지문권실용문서를 배우면서 또한 <자치통감>,<사략>, <대학> 및 한당시(漢唐詩) 등을 공부했다.

 

1892 17세에 慶科에 응시하나 낙방하고 매관매직의 부패상을 보고 과거공부를 포기한다. 양반이 되긴 틀린 세상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대신, <孫子兵法 >, <三略>, <六韜>등의 병서들을 탐독했다.

 

동학

 

18세 때, 오응선의 동학 강론을 듣고 동학의 평등주의에 매료되어 동학에 입도했다. 이때 이름을  창암에서 창수로 개명했다. 동학포교에 전념해 불과 몇 개월 사이에 동학 신도수가 수백 명으로 증가했다. 백범의 소문이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에 퍼지면서 백범은 어린 나이에 많은 신도를 가지게 되어 애기접주로 불리게 되었다. 1894 19세 때, 동학의 2 세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接主의 첩지를 받으면 동학도의 간부로 공인되었다. 전라도 전봉준의 봉기를 시작으로 백범 휘하의 700여명의 동학농민군은 일본군과 탐관오리들 척결에 나섰다.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끝났으나 백범은 동학을 통해 양반의 허위와 위선, 평민의 중요함, 그리고 평등사상을 깨닫는 계기가 되고 이를 평생 간직하고 발전시키게 된다.

 

유학

 

1895년 백범은 신천의 청계동 진사 안태훈 (안중근 의사 부친)을 찾아가 몸을 의탁한다. 그곳에서 고능선이라는 유학자를 만나 그를 통해 성리학을 배우고 충효와 의리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당시의 망해가는 나라의 현실을 듣고 그의 위정척사 사상의 영향을 받았으며 백범은 그의 가르침을 따라 청국으로 가게 된다.

 

의병부대 참가

 

1895년 만주에서 김이언이 조직한 의병부대에 들어가 일본군과 싸우다 참패한다. 갑오개혁 실패로 백범은 귀향 중 황해도 안악으로 향한다. 1896년 치하포 객주집에서 일본군 밀정 쓰치다를 만나자 민비 시해 원수를 갚기 위해 그를 죽이고 만다. 이로 인해 백범은 체포되고 1896 7월 인천 감리영의 감옥에 들어간다. 감옥 안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자살을 시도하지만 다른 죄수에 발견되어 생명을 건지게 된다.

감옥에서 그는 <泰西新史>, <世界地誌> 등을 읽으며 국제정세를 이해하게 되고 위정척사만으로는 나라를 지킬 수 없음을 알게 된다. , 세계의 정치, 문화, 과학 기술들을 연구하여 대한 민국도 실력을 길러야 함을 깨닫게 된다.

 

1897 22세때 쓰치다 살인으로 사형판결을 받는다. 국사범으로 국왕의 결재를 받아야 하는 데 국모 원수를 갚은 사람이라 고종은 그를 특사를 내려 사형을 면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일본 공사의 압력으로 백범은 석방되지 못한다. 이에 백범은 1898 3월 간수가 술에 취한 틈을 이용해 탈옥을 한다.

 

승려생활

 

탈옥 후 백범은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며 피신하는데 나중에는 공주 麻谷寺로 들어가 스님이 된다.

圓宗이라는 법명을 받고 승려생활을 시작한다. 그 후 서울, 해주를 거쳐 평양으로 가서 대보산 영천암의 주지가 되어 부모와 함께 생활을 한다. 그러나 승려생활이 적성에 맞지 않아 1899년 가을  환속하여 해주로 귀향하였다.

 

기독교 입교와 애국 계몽활동

 

1900 25세때 김두래라는 가명으로 강화도에 들어가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교육과 계몽활동을 한다. 그 후 여러 곳을 전전하며 애국지사를 만나고 전라도 무주에서는 유인무의 집에 머물때 그의 작명으로 이름을 거북 구金龜로 개명한다

1903 28세때 기독교에 입교해 교사가 되어 교육활동을 한다.  1904년 기독교 신자인 최준례와 결혼한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일본의 국권침탈이 가속화되었고 백범은 신교육 구국운동을 전개하며 애국 계몽 강연을 한다.

1907년 안창호, 이동녕 등을 중심으로 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가 창립되자 백범은 이에 가입하여 황해도 총감이 된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강점하자 백범은 해외 무관학교와 독립군 기지를 창설한다.

1911년 안명근 사건으로 일본군에 체포되어 17년의 징역형을 선고 받는다. 감옥에서 그는 거북 구자를 아홉 구자로 바꾸었다. 1914년 일제의 새 왕 즉위 기념하여 감형되어 그 해 7월에 가출옥으로 석방되었다.

 

임시정부

 

1919 3.1 운동이 일어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서 4년간 경무국장의 직책을 수행한다. 이 시기에 임시정부 내부에서도 좌.우익으로 내분이 일어날 조짐이 보인다.

1923년 김규식을 수반으로 한 새로운 임시정부가 만들어 지고 김구는 내무총장을 맡는다. 이 시기에 백범은 아내와 어머니를 중국에 초청하여 함께 지내며 둘째 아들 신()이 태어났다. 그러나 산후조리 중 아내를 병으로 잃는다.

임시정부 내분이 지속되는 가운데 1926 12월 백범은 국무령으로 선출되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수반에 오르게 된다.

 

1928년 가족을 볼 수 없을 것으로 보고 이 해 3 <백범일지>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1931년 일제의 이간질로 길림성 만보산 사건이 발생하면서 한.중간 두 민족의 연대가 붕괴되고 중국인들 사이에 한국인들에 대한 증오와 적대행위가 발생한다.  이로 인해 임시 정부의 독립운동이 위기에 직면하고 동시에 재정궁핍으로 백범의 어머니가 버려진 배추 잎을 모아 죽을 만들어 국무위원들이 연명하는 정도였다.

 

백범은 이 시기의 위기를 극복하기 한인 애국단을 조직한다. 이봉창 단원의 일본 천황 암살 시도를 하였다. 1932년 일본이 상해를 점령하자 상해 임시정부가 고립되자 백범은 윤봉길 의사를 보내 상해 홍구 공원에서 거행 예정인 일본 왕의 생일기념 행사에 폭탄을 투척하게 하였다. 일본군 사령관 수뇌부들이 사망하면서 이 사건은 한민족 독립운동을 고양시키고 중국민족에게도 감동을 주었다. 만보산 사건으로 인한 중국인의 한국인에 대한 악감정은 사라지고 한민족 독립운동에 협조를 하게 되었다. 또한 장개석 국민당 정부로부터 원조를 받게 되었고 해외 동포들도 독립운동 자금을 송금하게 되었다.  장개석과 협의하여 낙양군관학교에 한인 장교 양성반을 설치하여 독립군 장교를 양성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청천, 이범석이 교관이 되었으며 이는 광복군 창설의 주역이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장사, 광주, 남해, 기강을 거쳐 1939년 중경으로 옮겼다.

백범은 이 시기에 아들 위해 헌신해온 어머니가 사망했다.

1938 5 7일 백범은 반역자 이운한의 총격을 받고 중상을 입었다. 1940 9 17일 백범은 임시정부의 직할 무력조직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참모장으로 이범석을 임명하였다.

1941 12 8일 일제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백범은 대일선전포고를 한다. 이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항일전에 참가하기 위해 국제적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1942년 백범 주도하에 임시정부의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발표하며 이는 임시정부 내부 좌우익의 지지를 받으며 백범은 국가수반으로서 지위를 정립하였다.

 

광복군은 연합군과의 작전 수행을 추진하고, 1944년 광복군은 주중국 미공군 사령관 웨드마이어의 원조를 얻어 미국 전략 정보처 (OSS)와 합동 광복군의 국내 진입작전을 위한 훈련을 한다.  

국내로 진입할 모든 준비를 갖춘 상태에서 1945 8월 백범은 서안으로 가서 광복군의 제 1진을 국내에 진입시키기 위한 부대들 시찰하였다. 그러나 시찰 도중에 일제 항복의 보고를 받아 진입계획은 실행을 옮기지 못하고 말았다.

 

1945 11 23일 백범은 조국에 들어와 국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같은 해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백범은 반탁운동을 벌였다. 1948 3월 유엔 소총회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결정하자 이는 남북 분단을 고착화시키며 동족 상잔의 내전을 예견하여 반대하였다. 

1948 4월 조국 통일을 위해 김규식과 평양에 가서 <남북정당사회단체협의회>에 참석하여 남북협상을 가졌으나 통일의 꿈은 무산되고 말았다.

1948 8 15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남한 단독 정부가 수립되고 뒤 이어 그 해 9월 북에서는 김일성 북한 정권이 수립되자 백범은 정계에서 은퇴하여 칩거에 들어갔다.

 

1949 6 26일 친일 매국노의 잔당들과 권력추구 모리배들의 음모를 꾸며 안두희라는 하수인을 고용하여 백범을 살해했다. 평생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몸을 바친 애국자이며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백범은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강점

 

독립 투사로서의 강인한 신체와 민첩성

 

청년시절, ‘애기접주로서 동학혁명과 의병 전투에 참전한 점, 국모살해 대가로 일본군 중위를 살해 한 점, 국내외의 숱한 독립운동 내력, 상해 임시정부 시절 경무국장으로서의 임무 수행, 경호원 훈련, 숱한 고문을 견뎌낸 점등은 그가 투사로서의 적정 조건인 탁월한 신체 능력과 기민함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성찰 능력

 

백범은 끊임없이 자신, 민족, 그리고 국가가 처한 상황을 인식하고 그에 대한 해법을 찾고 과감히 실행에 옮긴다

 

어릴 때 양반이 되지 못하고 상놈이 된 것에 충격을 받고 이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글공부에 전념한 점, 만민 평등을 주장하는 동학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점, 상해 임시정부시절 시들어 가는 독립운동의 활력을 찾기 위해 만세 운동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요인암살에 나선 점 등은 성찰의 결과가 아닌가 한다.  <나의 소원>에서도 저자가 말한 것처럼 자유, 평등을 기반으로 한 자유 민주주의와 외세의 개입 없는 완전한 자주 독립과 남북한 완전한 통일만이 우리 민족이 지향할 바라는 것을 역설한다. 

 

 대인관계 형성

 

백범은 상해 임시정부 시절, 좌우로 분열된 내부 조직을 정비하고 해방 후 남북한 협상 대표로 평화 통일 운동을 제창하는 등 그의 친화적인 재능이 발휘된다.

 

3) 백범에 영향을 준 사람들

 

부모의 격려와 용기

 

아버지는 어려운 가정환경에서도 백범의 글공부를 위해 서당선생을 부르고 과거를 보는데 필요한지필묵을 구해주었다. 아들에게 풍수와 관상공부를 추천하고 백범이 일본 중위 살해범으로 투옥되자 아들을 따라 인천으로 가 옥바라지를 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60년 동안 헌신적인 뒷바라지를 했다. 인천 감옥에 있는 아들을 면회가면서 나는 네가 경기 감사를 한 것보다 더 기쁘게 생각한다라고 말하며 격려와 용기를 주었다.

 

동지

 

교육가이며 독립운동가인 안창호, 일상의 동고 동락을 같이한 후배 엄항섭과 안공근, 

그 외에 김형진, 이재명, 최광옥, 김홍량, 이시영, 김규식 등 김구와 뜻을 같이한 동지였다

 

임시정부와 관련 단체, 장개석과 국민당 정부, 여운형 등은 김구가 민족주의자로 이름을 빛내게 해준 동지들이다

 

스승

 

오응선 양반과 상민의 평등함을 강조한 동학 정신을 알게 해 주었다

고능선 김구에게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다양한 시각으로 개인과 현 상황을 볼 수 있도록 사고의 틀을 마련해 주었다

 

이봉창과 윤봉길 의사

 

침체된 임시정부의 존재가치를 알리고 김구의 이름을 만천하에 알린 계기가 된 두 사건이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 거사이다. 두 의사의 거사로 김구는 민족 독립 운동가로 거듭나게 되었다.

 

백범 김구는 국가가 일제에 강점되었을 때 민족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일신의 영달을 버리고 조국을 향한 애국정신과 독립을 위한 그의 실천과 노력은 겨레의 등불이라 불릴 만큼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였다.

 

<참고도서>

 

<백범 김구의 사상과 독립운동> 신용하 지음

<백범 김구를 성장시킨 인적환경> 류숙희 지음

 

 

2.     마음에 드는 문구 유첨

 

3.     저자라면 

 

73년 한 평생을 몽매한 국민들을 계몽하고 일제의 병탄 후 해방되기 까지 조국의 독립만을 위한 헌신한 김구의 파란 만장한 삶이 눈물 겹다.

 

출간사 에서도 저자가 말했듯이 상권은 상해 임시 정부의 주석이 되어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같이 살 수 없는 어린 두 아들에게 아버지로서 자신이 걸어온 길을 알려주기 위한 유서 대신 쓴 글이다.

 

영향

 

백범의 과감한 결단력,의협심, 따뜻한 민족애, 계몽운동, 일본 순경을 살해한 독립투사로서의 당당함, 남을 위한 배려 등 비록 눈에 띄는 비범한 재능은 없지만 그의 조국과 민족을 위한 진심 어린 사랑에 가슴이 뭉클하다.

 

나라가 없으면 민족이 없으며 외세의 간섭이 없는 완전한 자주 독립만이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이라고 외치는 그의 음성이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우리의 삶도 그러하지 아니한가.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고 간섭 받지 않고 명실 공히 홀로의 힘으로 우뚝 섰을 때만이 우리가 그토록 고대하던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 자유는 방종의 자유가 아닌 책임이 있는 자유다. 하지만 그 자유는 어느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 스스로 결정하는 자유이다.

 

P 15- 내가 이 책을 발행하는 데 동의한 것은 내가 잘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못난 한 사람이 민족의 한 분자로 살아간 기록으로서이다. 백범이라는 내 호가 이것을 의미한다. 내가 만일 민족독립운동에 조금이라도 공헌한 것이 있다면, 그만한 것은 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백범은 자신이 못나고 평범한 사람으로 독립운동은 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한다.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은 굳은 마음과 조국과 민족을 위한 애국심만 있으면 가능할 것이다라는 말이 뒤에 생략된 듯 하다.

 

P 323 – “ (이봉창)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31년을 더 산다 해도 과거 반생에서 맛본 방랑생활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

 

31세의 젊은 나이에 남은 인생은 영원한 쾌락을 위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하나 뿐인 목숨을 내 놓겠다는 이봉창 의사의 말이 감동적이다. 일본어가 익숙해 일본에서 일본인 행사를 하며 편안히 살수도 있을 텐데 그 일신의 영달을 포기하고 국가라는 추상적인 존재에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보완점

 

하권이 1947 11월에 완성이 되었는데 해방 후 좌.우익이 난립하는 상황을 자서전에 좀 넣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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