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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22일 22시 58분 등록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9기 연구원 16주차(김대수)

백범일지(김구,돌베개)”

 

1. 저자소개

 

김구(1876.7.11~1949.6.26,), 독립운동가

 

1876년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부친 김순영과 모친 곽낙원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남.

이명으로 창암, 창수, 두래, 구, 호는 백범이다.

선천적으로 강인한 체질과 대담 솔직한 성격이었으나 외아들로 말동무나 같이 놀아줄 친구가 없는 외로움과 가난은 선생이 과묵한 성격을 가지게 된 요인이었다. 선생의 강직함은 가난한 처지에도  강한 자존심과 저항정신의 소유자인 부친과, 강한 신념과 인내심을 소유자인 모친으로 부터 물려받은 선천적 기질이겠다.

가난하고 천한 신분으로 양반들로부터 멸시를 받았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 과거시험을 준비했다.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매관매직 등의 타락상을 보고 과거를 과감히 포기하고 관상을 배웠고 최시형 대수주를 만나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병사를 지휘하기도 했다. (그는 동학에 입도한 후 몇 달 만에 연비가 수천명이 되어 ‘아기 접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을미사변이후 국모보수를 위해 일본인 쓰치다를 서슴없이 죽이고 투옥하여 쓰치다 살해의 이유가 국모보수임을 당당하게 밝히기도 했다. 1898년 탈옥 후, 마곡사에서 중이 되기도 하였으나, 공부를 이유로 마곡사를 떠나 에버트청년회 총무(1905), 양산학교 소학부담당(1908) 등을 통해 계몽 활동을 한다. 1911년 안악사건( 안명근 검거 이후, 황해도 일대 민족주의자 총검거 사건) 으로 15년형을 선고받지만 이듬해 일왕 명치 사망후 5년형을 감형된다. 1915년 8월 가출옥 후 동산평 농장의 농감이 되어 소작인들을 계몽하고 학교를 세우기도 했지만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해로 망명, 9월 상해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이 된다. 이후 국무령으로 임시정부를 이끌고, 1932년 이봉창, 윤봉길 의거, 1940년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업적을 남겼지만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소식에 개탄을 금치 못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미소공동위원회 불참성명, 남북협상 희망, 백범학원 설립 등의 정치 교육활동을 하지만,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육군소위 안두희의 총에 맞아 운명한다.

선생은 오로지 민족과 국가만을 생각하는 행동가였다. 그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었고, 그러한 실천적 강직함으로 사람들을 이끌었다. 국모보수를 이유로 쓰치다를 처형했으며, 탐관오리 척결, 척양척왜를 위해 동학운동을 이끌기도 하으로, 결국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임정의 큰 지도자로 활동하며 자주독립의 의지를 놓지 않았다. 말보다는 행동이었고, 세상을 바꾸기 위한 강직한 의지로 가득찬 민족의 지도자 였다. 그의 스승 고능선이 말했던대로 백범 김구선생은 세상을 놀라게 만든 한국의 호랑이와도 같았다.

 

2.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백범출간사

애초에 이 글을 쓸 생각을 낸 것은 내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내 몸에 죽음이 언제 닥칠는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나의 지난 일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에서 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의 상편이다.(13)

애초에 이 글을 쓸 생각을 낸 것은 바람 한번 훅 불면 지나가고 잊혀지는 것이 인생이라는 뒤늦은 깨달음에 나의 인생을 부여잡고자 했던 순간의 노력들이었다. 그 순간의 노력들이 한참 전에 잊혀졌던 내 기억들을 끄집어 내었고, 나는 내 인생을 회고할 수 있었다. 그저 평범한 한 인간의 기록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하편은 윤봉길 의사 사건 이후 중일전쟁의 결과로 우리 독립운동의 기지와 기회를 잃어, 이 목숨을 던질 곳이 없이 살아 남아서 다시 오는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으나, 그때 내 나이 벌써 칠십을 바라보아 앞날이 많지 않으므로 주로 미주와 하와이의 동포를 염두에 두고, 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나의 경륜과 소감을 알리려고 쓴 것이다. 이것 역시 유서라 할 것이다.(13)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것이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과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뢰하고 저희끼리는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14)

내가 이 책 상편을 쓸 때 열 살 내외이던 두 아들 중에서, 큰 아들 인은 그 젊은 아내와 어린 딸 하나를 남기고 중경에서 죽었고, 작은아들 신이가 스물여섯 살이 되어 미국으로부터 돌아와 아직 홀몸으로 내 곁을 들고 있다.(14)

우리는 우리의 시체로 성벽을 삼아서 우리의 독립을 지키고, 우리의 시체로 발등상을 삼아서 우리의 자손을 높이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서 우리의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는 맺어야 한다.(15)

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15)

나는 내가 못난 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해온 것이다. 이것이 내 생애요, 내 생애의 기록이 이 책이다.(15)

사람이 잘나고 못나고는 머리 속의 해박한 지식이나 화려한 배경 또는 학벌이나 능력이 아니다. 한 인간을 하늘처럼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의 겸손함과 강직함, 그리고 한결같음이다. 백범은 아마도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위대한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백범일지 상권

.신 두 아들에게

지금 일지를 기록하는 것은 너희들로 하여금 나를 본받으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너희들 또한 대한민국의 한 사람이니, 동서 고금의 많은 위인 중 가장 숭배할 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배우고 본받게 하려는 것이다.(19)

1. 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

1) 조상과 가정

우리는 안동 김씨 경순왕의 자손이다.(21)

우리 조상이 텃골로 들어오던 시기는 조선시대의 전성기로 양반과 상민의 계급 차별이 엄밀하였던 시기이다. 우리 조상들은 멸문의 화를 면하기 위해 김자점의 족속임을 숨기고 일부러 상놈 노릇을 하였다.(22)

어머님께서는 푸른 밤송이에서 크고 붉은 밤 한 개를 얻어 깊이 감추어 둔 것이 나의 태몽이라고 늘 말씀하셨다.(24)

2)난산의 개구쟁이

나는 병자년(1876), 할머니의 기일인 7 11일 자시에 할아버지와 큰아버님이 사시는 텃골 웅덩이 큰집에서 태어났다. 앞으로 내 일생이 기구할 조짐이었는지 나의 탄생은 유례없는 난산이었다. (24)

나는 서너 살 때 천연두를 앓았는데, 어머님께서 보통 종기를 치료할 때와 같이 대나무침으로 따고 고름을 파내어서 내 얼굴에는 마마자국이 많다.(24)

우리집은 적막한 산 입구 호랑이 길목에 있어서 밤에는 종종 호랑이가 사람을 물고 우리 집 문 앞으로 지나가므로 문 밖을 나갈 수 없었다.(25)

나는 곧 집으로 돌아와 부엌칼을 가지고 아이들을 다 찔러 죽일 결심을 하고 그 집으로 달려갔다.(25)

아버님은 한마디 말도 없이 빨랫줄로 나를 꽁꽁 동여 들보에 달아매고 매질하기 시작하셨다.(26)

아버님은 마치 [수호지]에 나오는 영웅처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능멸하는 것을 보면 친하고 친하지 않음에 관계없이 참지 못하는 불 같은 성격이셨다. 이로 인해서 인근 상놈들은 다 아버님을 경외하고 양반들은 피하였다.(27)

결국 준영 삼촌을 결박하여 집에 가두어 놓고, 집안 식구끼리 운구하여 장례를 치르고, 종증조부 주최로 가족회의를 열어 앉은뱅이로 만들기로 결의하고, 준영 삼촌의 발뒤꿈치(단근형)를 잘랐다. 홧김에 가족회의에서는 그러한 결정을 내렸지만, 다행히 힘줄이 상하지는 앉아 병신은 되지 않았다.(29)

3) 궁핍한 배움길

수강료로 쌀과 보리는 가을에 모아주기로 하고 청수리 이생원을 선생으로 모셔왔다.(30)

밥 벌어먹기는 장타령이 제일이라고, 너도 큰 글 하려고 애쓰지 말고 실용문서에나 주력하여라.”(33)

왕후장상의 씨앗이 어찌 따로 있으리오”(33)

아버님이 정씨에게 부탁하셔서 나는 수강료 없이 배우는 면비학동이 될 수 있었다. 너무도 만족하여 나는 매일 밥구럭을 메고 험한 고개 깊은 계곡을 쏜살같이 넘나들어 그곳에 기숙하는 학생들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때 도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34)

2. 시련의 사회진출

1) 과거 낙방

과거장에는 노소 귀천이 없어 무질서한 것이 내려오는 풍습이었다.(36)

위의 몇 가지 (부패한) 현상만 보아도 과거가 무슨 필요가 있으며 무슨 가치가 있는가?

과거장에서 얻은 비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관상서를 공부했는데 오히려 과거장 이상의 비관에 빠져 버렸다(39)

그러나 마음 좋지 못한 사람이 마음 좋은 사람으로 되는 방법이 있는가 스스로 물어보니 역시 막연하였다.(39)

2) 동학의 세계로

“…… 동학의 종지로 말하면 말세의 사악한 인간들로 하여금 개과천선하여 새백성이 되어 장래 참주인을 모시고 계룡산에 신국가를 건설하는 것입니다.”(42)

당시 양반들은 동학에 가입하는 자가 드물었던 반면, 내가 상놈인 만큼 상놈들이 동학으로 많이 쏠려 들어왔다.(43)

3) 팔봉 접수

나를 선봉으로 임명한 것은 비록 나이 어리지만 평소에 병법을 연구하였고, 또한 나의 접이 산포수로 잘 무장되어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의 이면에는 자신들이 총알받이가 되기 싫다는 이유도 있었다(48)

나는 즉시 참모회의를 열고 논의한 결과 나를 치지 않으면 나도 치지않는다.’, ‘어느 한쪽이 불행에 빠지면 서로 돕는다.’는 밀약이 성립되었다.(51)

나는 (죽은)이용선의 머리를 껴안고 통곡하다 저고리를 벗어 이용선의 머리를 감싸고 동네 사람들을 지휘하여 정성껏 묻어주게 했다. 그 저고리는 어머님이 내가 동학 접주로 지도자 노릇 한다고 처음으로 지어 보내신 명주저고리였다.(54)

4) 청계동 안진사

안진사는 나를 시험하기 위해 종종 질의로 하고 담론도 하였지만, 당시 나는 유치한 수준의 행동이 많은 때였다.(56)

중근은 영기가 넘치고 여러 군인들 중에도 사격술이 제일로, 나는 새 달리는 짐승을 백발백중으로 맞추는 재주가 있었다.(57)

특히 안진사는 눈빛이 찌를 듯 빛나 사람을 압도하는 기운이 있었다.(58)

5) 스승 고능선

자네가 매일 안진사 사랑에 다니며 놀지만, 내가 보기에는 자네에게 절실히 유익한 정신 수양에는 별 도움이 없을 듯하니, 매일 내 사랑에 와서 나와 세상사도 논하고 학문도 토론함이 어떻겠나?”

당시 나의 심리 상태는 매우 절박하였다. 먼저 과거장에서 비관적인 생각을 품었다가 희망을 관상서 공부로 옮겼고, 나 자신의 관상이 너무도 못생긴 것을 슬퍼하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리라 결심을 했었다. 그러나 마음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 또한 묘연하던 차에 동학당의 수양을 받아 신국가, 신국민을 꿈꾸었으나, 이제 와서 보면 그도 역시 바람 잡듯 헛된 일이었다. 이제 패전한 장수의 신세가 되어 안진사의 후의를 입어 생명만은 안전하게 지키게 되었지만, 장래를 생각하면 가연 어떤 곳에다 발을 디뎌야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던 참이었다.(62) ⇒ 백범 김구가 스승 고능선을 만날 즈음의 상황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라 할 수 있다.(64)

“…… 지금의 망국이란 나라의 토지와 백성의 주권을 강제로 집어 사미는 것이네. 우리나라도 필경은 왜놈에게 망하게 되었네. 소위 조정대관들은 전부 외세에 영합하려는 사상만 가지고 있고, 러시아를 친하여 자기 지위를 보전할까. 혹은 영국이나 미국을, 혹은 프랑스를, 혹은 일본을 친하여 자기 지위를 견고히 할까. 순전히 이런 생각들 뿐이라네…… 나라가 망하는 데도 신성하게 망하는 것과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더럽게 망하게 되겠네.”(65)

일반 백성들이 의를 붙잡고 끝까지 싸우다가 함께 죽는 것은 신성하게 망하는 것이요, 일반 백성과 신하가 적에게 아부하다 꾐에 빠져 항복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일세……”(66)

3. 질풍노도의 청년기

1) 북행 견문과 청국 시찰

그런데 호통사들은 중국어 몇 마디 배워가지고 중국사람에게 붙어서 동포들에게 별별 무리한 학대를 다하는데, 여자들의 정조를 유린하고 돈과 곡식을 억지로 빼앗는 등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악행을 허다히 행하였다.(74)

2) 김이언 의병

두령인 김이언은 (용력은 월등히 뛰어난 반면) 일 벌이기를 좋아하는 성벽이 있는 만큼, 자신감이 지나쳐 다른 사람의 도모를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도량이 부족해 보였다.(80)

3) 인연 없는 스승의 손자사위

“……내가 보건대 창수는 범상입디다. 인중이 짧은 것이라든지 이마가 두툼한 것이라든지 걸음걸이라든지, 자래 두고 보시오. 범의 냄새도 풍기도 범의 소리도 질러서 세상을 크게 놀라게 할는지 알겠소?”(86)

모름지기 의리 있는 선비라면, “목을 자를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 “저승에서 머리없는 귀신이 될지언정 이승에서 머리 깎는 사람은 되지 않겠다고 생각할 때였다.(88)

4) 복수 의거, 치하포 사건

나는 혼잣몸에 빈손이 아닌가? 섣불리 손을 썼다가 내 목숨만 조놈의 칼 아래 끊어 보내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되면 내 의지와 목적은 세상에 드러내지도 못하고, 도리어 도적놈의 시체 하나만 남기고 죽고 말 것이다. 또 내가 빈손으로 단번에 저놈을 죽일 수는 없다. 만약 죽을 결심을 하고 대들더라도 방안에 있는 사람들이 만류하면 그 틈을 타서 저놈의 칼이 내 몸에 들어오고 말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생각하여도 이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94)
치하포에서 일본인 쓰치다를 죽이기 전, 홀로 독백

나는 그 왜놈을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점점이 난도질했다.(96)

겉으로는 태연자약하였으나 마음속으로는 매우 조급하였다. 만약 동네사람들이 가지 못하게 막는다면, 사실을 설명할 기회도 없이 왜놈들이 와서 나를 죽이고 말 것이다.(99)

사람의 일은 모름지기 밝고 떳떳하여야 하오. 그래야 사나 죽으나 값이 없지, 세상을 속이고 구차히 사는 것은 사나이 대장부가 할 일이 아니오.”(100)

내 집이 흥하든 망하든 네가 알아 하여라.”(100) ⇒ 그 아들에 그 아버지/ 그 아버지에 그 아들

5) 첫번째 투옥

사령들이 내 두 발과 두 무릎을 한데 찬찬히 동이고, 다리 사이에 붉은 몽둥이 두 개를 들이밀었다. 한 놈이 몽둥이 한 개씩을 잡고 좌우로 힘껏 누르니 단번에 뼈가 허옇게 드러났다.(102)

다 같은 자식으로 태어나, 이창매는 부모 죽은 후까지 저렇듯 효도한 자취를 남겼으니, 그 부모 생전에는 어떠했을지 알 것 같았다. 나의 뒤를 허둥지둥 따라다니시느라 넋이 다 빠져서 내 옆에 앉아 하염없이 한숨만 짓고 계시는 어머님을 차마 뵐 수가 없었다.(103)

덕분에 어머님은 하루 세 끼 감옥에 밥 한 그릇씩을 갖다주기로 하는 조건으로 고용되셨다…..불서에 말하기를, “부모와 자녀는 천 번을 태어나고 백 겁이 지나도록 은혜와 사랑을 끼치며 사는 인연이라고 한 말이 헛말이 아니었다.(106)

6) 역사적인 심문

 본인은 일개 시골의 천민이지만 신하된 백성의 의리로 국가가 수치를 당하고, 푸른 하늘 밝은 해 아래 내 그림자가 부끄러워서 왜구 한 명을 죽였소. 그러나 나는 아직 우리 동포가 왜인들의 왕을 죽여 복수하였단 말을 듣지 못하였소. 지금 당신들은 몽백을 하고 있는데, 춘추대의에 나랏님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몽백을 아니한다는 구절도 읽지 못하였소? 어찌 한갓 부귀영화와 국록을 도적질하는 더러운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시오?”(109)

7) 사형수의 옥중생활

이때부터의 옥중생활을 대략 들어쓴다면 다음과 같다.

첫번째. 독서.

문을 굳게 닫아 걸고 자기 것만 지키려는 구지식, 구사상만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가 없소. 세계 각국의 정치, 문화, 경제, 도덕, 교육,산업이 어떠한지를 연구해 보고, 내 것이 남만 못하면 좋은 것을 수입하여 우리 것으로 만들어, 이 나라와 백성의 살림살이를 유익되게 하는 것이  시대 과제를 아는 영웅의  할 일인 것이오. 한갓 배외사상만으로는 이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오…….”(115)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격으로, 내 죽을 날이 당할 때까지 글이나 실컷 보리라 하고 손에서 책 놓을 사이 없이 열심히 글을 읽었다.(115)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115)

두번째. 교육.

세번째. 대서

그러니(억울한 송사도 많고 돈들여 곤란을 당하는 경우도 많으니) 내가 대서하면 서로 상의해서 인지만 사다가 써 보내면 되니 편하기도 하고, 또 비용 한 푼 없이 성심껏 소장을 지어주는 탓에 김창수가 쓴 소장은 거의 다 승소한다고 와전이 되어. 옥내에서는 물론이고 심지어 관리의 대서까지도 한 일이 있다.(117)

네번재. 성악

그런데 이 때 입시하셨던 승지 중 한 사람이 각 죄수의 공건을 뒤적이며 보던 중, 국모보수 넉 자가 눈에 띄므로 이상하게 여기고, 이미 재가裁可 수속을 끝낸 안건을 다시 꺼내 임금께 보여드렸다.(121)

눈서리가 내리다가 갑자기 봄바람이 부는 듯하였다. (121)

8)파옥

지금 정부대관들은 모두 눈에 구리녹이 슬어서 돈밖에 보이는 것이 없으니, (124)

왜놈을 죽이고 내가 죽어도 한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내가 힘이 부족해서였다. …… 나를 죽이려 애쓰는 놈은 왜구들뿐인데, 내가 그놈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옥에서 죽는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지 않겠는가?(128)

나는 심사숙고하다가 탈옥하기로 결심하였다.(128)

살고자 하는 백석이보다 살리려는 네 마음을 믿을 수 없다.(130)

4. 방랑과 모색

1) 서울로 도피

탄탄대로로 나왔다. 봄날인데 밤안개가 자욱한데다가 연전에 서울구경을 하고  인천을 지나가 본 적은 있으나 길이 생소하였다. 어디가 어디인지 지척을 분간 못할 캄캄한 밤에 밤새도록 해변 모래밭을 헤매다 동쪽 하늘이 훤할때에야 빌로소 살펴보니 감리서 뒤쪽 용동 마루터기에 당도해 있었다.(133)

나는 허술한 것이 오히려 실속 있고, 실속 있게 한 것이 도리어 허술한 격으로 그 솔포기 밑으로 두 다리를 들이밀고 반듯이 드러누웠다. 드러난 얼굴은 솔가지를 꺾어서 가렸다.(134)

남의 사표가 되어야 할 사람의 마음이 그처럼 교만하니, 어찌 아동들을 잘 가르칠 수 있겠소?(137)

가뜩이나 가슴 속이 울적한데다가, 세상에 아무 죄 없는 어린 아이를 죽이게 하였으니 얼마나 큰 죄악인가. 일생을 위하여 심히 비관된다.(142)

2) 삼남견문록 : 삼남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말한다.

3) 출세간의 길

한 걸음씩  한 걸음씩, / 혼탁한 세계에서 청량한 세계로, /  지옥에서 극락으로, / 세간에서  걸음을 옮겨 출세간의 길을 간다.

출세간 : 세간, 즉 속세를 벗어남.

중이 되려면 제일 먼저 자기 마음을 낮추어야 한다고 하며, 사람에게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금수나 곤충에게까지 지가 마음을 낮추지 않으면 지옥의 고통을 받는다고 하였다.(154)

망명객이 되어 사방을 떠돌아다니던 때에도 내게는 영웅심과 공명심이 있었다. 평생의 한이던 상놈의 껍질을 벗고, 평등하기보다는 월등한 양반이 되어 평범한 양반에게 당해온 오랜 원한을 갚고자 하는 생각이 가슴 속에 가득하였다. 그런데 중놈이 되고 보니, 이상과 같은 생각은 허영과 야욕에 불과한 것이었다.(155)

4) 장발의 걸시승

불가에서 소위 말하는, “손에는 돼지머리를 들고, 입으로는 거룩하게 경전을 왼다는 구절과 가깝게 되었으니, 평양에서는 시쳇말로 걸시승이라 하였다.(161)

유가 천년이면 불가도 천년이요 / 내가 보통이면 그대들도 보통이다.(162)

작은 아버지의 관찰이 사실은 발로 본 것이었다. 만일 글을 몰랐다면 동학두령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인천 사건도 없었을 것이다. 텃골의 순전한 한 농군으로 땅 갈아먹고 우물 파 마시며 살았을 것이다. 세상을 요란케 할 일은 없었을 것이 명백하다.(165)

5) 동지를 찾아서

군자는 알고도 속아 줄 수 있다”(171)

뱀의 꼬리를 붙잡고 올라가면 용의 머리를 볼 수 있을터이지요.”(173)

조금 누락된 것이 있다. 창수라는 이름이 쓰기 매우 불편하다 하여 성태영과 유완무가 이름을 고쳐지어 주었다. 이름은 김구라 하고, 호는 연하, 자는 연상이라 고쳐서 행세하기로 하였다. (174)

6) 스승과의 논쟁

내 나라 오랑캐도 배척을 못하면서 어찌 남의 나라 오랑캐를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178)

진실로 온나라의 백성들은 거의 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이라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이 이익을 좇으니, 자기의 권리와 의무는 모르고 마땅히 탐관오리와 토호의 업신여김과 학대를 받아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179)

만고 천하에 끝없이 존속하는 나라가 없고 만고 천하에 끝없이 장생하는 사람이 없다네. 우리나라도 망할 운명인 바에야 어찌하겠나?(180)

이야기하는 동안 자연히 신구의 충돌이 생겼다.(1180)

30여 년 동안 내 마음을 쓰거나 일을 할 때, 만에 하나라도 아름다이 여기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당시 청계동에서 고선생이 나를 특히 사랑하시고 심혈을 다 기울여 구전심수하시던 훈육의 덕일 것이다.(180)

7)부친상, 미혼처의 죽음

첫째 재산을 따지지 않는다. 둘째 처녀는 학식이 있어야 한다. 셋째 직접 상면하여 서로의 마음이 맞으면 결혼한다. 이렇습니다.(183)

나는 깜짝 놀라 즉시 처가에 갔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낭자는 병세가 위중한 중에도 매우 반가워했다. 병은 만성감기인데 약을 쉽게 구하기 어려운 산중이라, 2,3일 후에 마침내 죽고 말았다.(186)

8) 교육자의 길, 그리고 결혼

(순형)은 나와 같이 예수교에 전력하기로 마음을 같이 하고서, 학생을 가르치며 예수교를 선전하였다.(187)

나는 신호의 쾌활하게 결단하는 도량을 보고서 더욱 흠모하게 되었으나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189)

1904년 결혼 당시 백범은 29, 최준례는 16세 였다.(192)

5. 식민의 시련

1) 을사늑약과 구국운동

을사년(1905,30)에 이른바 신조약(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193)

2) 안악 양산학교와 하기 사범강습

나는 종산에서 첫아기로 딸을 낳았다. 태어난 지 며칠 만에 모녀를 가마에 태워와서 찬기운을 많이 쐰 탓인지, 딸아이는 안악에 도착한 후 바로 죽고 말았다.(198)

작은아버지 보시기에 저의 난봉은 위험하지만, 난봉이 아니라고 보는 사람도 더러 있는 게지요.”(202)

성장한 청년 중에 쓸 만한 인재가 있는가 살펴보았지만, 모양만 상놈이 아니고 정신까지 상놈이 되고 말았다. 그이들은 민족이 무엇인지, 국가가 무엇인지 터럭만큼의 각성도 없는 밥벌레에 불과했다. (203) ⇒ 고향에 가서 만난 장년의 청년들을 보고 안타까워하며……

나라가 죽게 되니까 국내에서 중견 세력을 가지고 온갖 못된 위세를 다 부리던 양반부터 저 꼴이 된 것 아닌가.(203)

나는 인근 양반 상놈을 다 모아놓고, 환등회 석상에서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라고 절규하였다.(204)

4) 재령지역 교육운동의 추억

뉘가 알았으랴, 그가 며칠 후 경성 이현에서 군밤장수로 가장하고서, 충천하는 의기를 품고 이완용을 저격하여 조선 천지를 진동하게 할 이재명 의사인 줄을.(213)

이현에서 이의사는 군밤장수로 가장하고 길가에서 밤을 팔다가 이완용을 칼로 찔렀다.(214)

5) 신민회와 안악 사건

나부터 망국의 치욕을 당하고 나라없는 아픔을 느끼나, 사람이 사랑하는 자식을 잃으면 슬퍼하면서도 살아날 것 같은 생각이 나는 것처럼, 나라가 망하였으나 국민이 이치 분발하면 곧 국권이 회복될 것같이 생각되었다.(215)

6) 세번째 투옥과 고문

왜놈이 한국을 강점한 후 첫번째로 국내의 애국자를 망라하여 체포한 것이다.(219)

장차 불란을 일으킬 싹을 잘라버리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나라를 남에게 먹히지 않게 구원하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를 한꺼번에 삼키고 되씹는 저 왜구와 같이 밤을 세워 일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  스스로에게 물어보니, 온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듯이 고통스런 와중에도, 내가 과연 망국노의 근성이 있지 않은가 하여 부끄러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찼다.(221)

나는 결심에 결심을 더하여 나의 혀끝에 사람의 생사가 달렸다는 것을 각오하였다.(222)

나의 생명은 빼앗을 수 있거니와, 나의 정신은 빼앗지  못하리라.”(225)

토지를 사들인 지주가 논밭의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냐?(226)

나를 논밭의 자갈돌로 알고 파내려는 그대들의 노고보다, 파내어지는 나의 고통이 더욱 심하니 내가 자결하는 것을 보라!(226)

7) 기약없는 15년형

8) 서대문감옥으로

태산처럼 크게보이던 왜놈이 그때부터(와타나베가 X광선 운운하며,  김창수를 기억하지  못할때부터) 겨자씨와 같이 작아보였다.(238)

무릇 일곱 차례나 매달려 질식된 후 냉수를 끼얹어  살아나곤 하였지만,  마음은 점점 강고해져  왜놈에게 국권을 빼앗긴 것은  일시적  국운 쇠퇴요, 일본은 조선을 영구 통치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불 보듯  확연한 사실로 생각되었다.(239)

인간은 모래를 먹고 살 수 없는데 내가 먹은 한 그릇 밥에서 골라낸 모래가 밥의 분량만 못하지 않으니, 이것을 먹고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기왕 죽을진대 징역이나 중하게 지고 죽는 것이 영광이다. 1년도 종신이요, 종신도 종신이 아닌가?”(241)

나는 처음에 그 자들을 하등 잡범들로만 알았다가, 허위의 부하라는 말을 듣고서는 심히 통탄하였다. 저런 자가 참모장이었으니, 허위 선생이 실패하였을 것은 불 보듯 뻔한 것 아닌가(243)

그처럼 서릿발 같은 절의를 듣고 생각해보니 부끄럽기 끝이 없었다. 정신은 정신대로 잘 보존하지만, 왜놈에게 소, 말이나 야만인 대우를 받는 나로서 당시 의병들의 자격을 평론할 용기가 있을까?(244)

오랜만에 모자 상봉하니 나는 반가운 마음과 더불어, 저같이 씩씩한 기절을 가지신 어머님께서 개 같은 원수 왜놈에게 자식을 보여 달라고 청원하였다고 생각하니 황송한 마음 그지 없다.(246)

9) 옥중의 의식주

표면으로 나도 붉은 옷으로 나도 붉은 옷을 입은 복역수이나, 정신상으로 나는 결코 죄인이 아니다.  왜놈의 이른바  신부민(식민백성)’이 아니고, 나의 정신으로는 죽으나 사나 당당한 대한의 애국자이다.  될 수 있는 대로 왜놈의 법률을 복종치 않는 실제 사실이 있어야만, 내가 살아 있는 본뜻이 있는 것이다.(249)

10) 기인과 영웅

3일 굶어 도적할 마음이 생기지  않을 자  드물다  하나,  마음만으로 도적이  될 수는 없다. 한두 명의 좀도둑은 가능하지만 수십 명 수백 명의  집단체가 되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데에는 반드시 지휘 명령을 보내는 기관과 주동인물이 있어야  이끌 수 있을 것이다.(258)

조선의 은총과 국록을 먹는 자, 백성을 착취하는 소위 양반이라는 족속과 부유한 자의 재물을 탈취하여 빈한한 백성을 구제하였는데, 나라에서 도적이란 이름을 붙여 가지고 500여 년 동안 압박,도살하여 온 것이외다.(259)

그 자격자라는 것은 첫째, 눈빛이 굳세고  맑은 것, 둘째, 아래가 맑고, 셋째,  담력이 강실할 것, 넷째, 성품이 침착할 것. (261)

그리하여,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 () 하고, 호를 백범’ (白凡)이라 고쳐서 동지들에게 언포하였다. ()를 구()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民籍을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를 백범白凡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267)

11) 다시 인천감옥으로

무술년(1898) 3 9일 한밤중에 옥을 깨뜨리고 도주한 이 몸이, 17년 후에  철사에 묶여서 다시 이곳에 올 주 누가 알았으랴.(268)

나는 출입시 종종 마음으로 절하고 지냈다. (271)

6. 망명의 길

1) 출옥, 고향으로

단상에 나가니 가출옥으로 방면한다는 뜻을 선언한다. 나는 꿈인 듯 생시인 듯 좌중 수인들을 향해 점두례를  하고 곧 간수의 인도로 사무실에 나가니, 벌써  흰 옷 한 벌을 내준다.(272)

너는 오늘 살아오지만, 너를 심히 사랑하고 늘 보고 싶어하던 네 딸 화경이는 서너 달 전에 죽었구나……”(273)

아내는 극히 수척한 모습으로 여러 부인들과 같이 잠시 내 얼굴을 보는지 마는지 하고 음식 준비를 하였다.(273)

이 시대 부부관계란, 이 시대의 아내란 남편에 대한 정이 깊지 않은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그저 집안에서 정해준 사람과 같이 살면 그것이 운명이거늘 생각했지, 사랑 때문에 결혼하는 사람이 많았으랴. 하물며, 김구는 결혼이후에도 줄곧 밖으로 떠돌아다녔으니 부부간의 정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어린 딸아이 은경이가 사망하고 처형 역시 사망하여 그 땅 공동묘지에 매장하였다.(281)

무오년(1918, 43) 11월에 인이 출생했다.(282)

3) 상해망명

독립은 만세만 불러서 되는 것이 아니고 장래 일을 계획, 진행하여야 할 터인즉 나의 참, 부참이 문제가 아니니, 자네들은 어서 만세를 부르라.”(283)

4) 경무국장에서 국무령까지

그 때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 이에 대하여는 국사에 자세히 기록될 것이므로 생략한다 나는 내무위원의 한 사람으로 피선되었다. 그후 안창호 동지는 미주로부터 상해로 건너와서 내무 총자으로 취힘하고 정부제도는 차장제를 채용하였다.(285)

아내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인이도 병이 중하여 공제의원에 입원 치료하다가 아내  장례 후  완전히 나아  퇴원하였다. 신이는 겨우 걸음마를 익힐 때요, 아직 젖을 먹을 때였다. 먹는 것은 우유를 사용하나, 잘 때는 반드시 할머님의 빈 젖을 물고야 잠이 들었다. 차차 말을 배울 때는 단지 할머님만 알고 어머니는 무엇인지 몰랐다.(288)

5) 내 인생을 돌아보며

대개 사람이 귀하면 궁함이 없겠고 궁하면 귀함이 없을 것이나, 나는 귀해도 궁하고 궁해도 궁한 일생을 지냈다.(289)

국가가 독립을 하면 삼천리 강산이 다 내 것이 될는지 모르겠으나, 천하의 넓고 큰 지구면에 한 치의 땅, 반 칸의 집도 내 소유가 없다. (289)

내 일생에서 제일 행복이라 할 것은 기질이 튼튼한 것이다. 거의 5년의 감옥 고역에 하루도 병으로 일 못한 적 없었고 인천감옥에서 학질에 걸려 반나절 동안 역을 쉰 적이 있을 분이다.(291)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지 1년이 넘은 민국 11(1929,54) 5 3일에 종료하였다.(291)

 

백범일지 하권

하권을 쓰고 나서

지금 하권을 쓰는 목적은 내가 50년 동안 분투한 사적을 기록하여, 숱한 과오를 거울삼아 다시는 이 같은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다.(296)

외교로 말하면, 임시정부 원년(1919) 이후 국제 외교에 꾸준히 노력하였으나, 중소미 등 정부 당국자들의 비공식적인 찬조가 가끔 있었을 뿐 공식적인 응원은 없었다.(297)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을 하고 죽는 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하와이 동포들을 만나보고 돌아오다 비행기 위에서 죽으면 시신을 아래로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 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뱃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298)

대한민국이 독립된다면 미련없이 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대한민국이 독립되어서 미련없이 세상을 떠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김구.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298)

1.상해 임시정부 시절

1) 상해에서 첫출발

상해에 모여든 여러 청년들 중심으로 정부조직이 운동 진전에 절대 필요하다는 소리가 안팎으로 점차 높아져, 각 곳에서 상해에 온 인사들이 각각 대표를 선출하고 임시의정원을 조직하여 임시정부를 만드니,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이다.(301)

2) 경무국장 시절

범죄자 처결하는 것을 요약하면, 말로 타이르는 것 아니면 사형이었다. (302)

나의 신조는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고,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조로 인하여 종종 해를 당하면서도 천성이라 평생 고치지 못하였다.(307)

3) 사상 갈등과 국민대표대회

기미년 즉 대한민국 원년(1919)에는 국내외가 일치하여 민족운동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세계 사조가 점차 봉건이니 사회주의니 복잡해지면서, 단순하던 우리 운동계에도 사상이 갈라지고, 음양으로 투쟁이 전개되었다. 임시정부 직원 중에서도 공산주의니 민족주의니 하는 분파적 충돌이 격렬해졌다. 심지어 정부의 국무원 중에도 대통령과 각 부 총장들 간에 민주주의냐 공산주의냐로 각기 옳다는 주장을 좇아 갈라졌다. 그 대강을 거론하면 국무총리 이동휘는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대통령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주창하였다.(309)

우리 독립운동이 우리 한민족의 독자성을 떠나서 어느 제3자의 지도,명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자존성을 상실한 의존성 운동입니다., 선생은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배되는 말을 하심이 크게 옳지 못하니, 제는 선생의 지도를 따를 수 없으며 선생의 자중을 권고합니다.”(310)

스스로 업신여기면 다른 사람도 나를 업신여기게 된다.”(315)

그 중 시카고의 김경 같은 이는 집세를 주조 못해 정부 문을 닫게 되었다.”는 보도를 보고, 즉시 공동회를 소집하여 미화 200여 달러를 모금하여 보내준 일도 있었다. 김경 씨는 나와 한번도 만난 적 없지만 애국심 하나로 이와 같이 한 것이다.(320)

2.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1) ‘일본영감이봉창

(이봉창)는 말에 절반은 일어이고, 동작 또한 일본인과 흡사하였다. 그래서 특별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323)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다시 산다 해도 과거 반생에서 맛본 방랑생활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323)

2) 일본 천황 불행부중

저는 영원한 쾌락을 향유코자 이 길을 떠나는 터이니, 우리 두 사람이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으십시다.”(326)

나무판자 틈으로 붉은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목격하고 가슴 가득한 열성으로 경의를 표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우리도 어느 때 저와 같이 왜와 혈전을 벌여, 본국 강산을 충성스런 피로 물들일 날이 있을까?(329)

3) 윤봉길과의 짧은 만남

“’뜻을 품으면 마침내 일을 이룬다했으니 안심하시오…….”(331)

4) 홍구공원의 쾌거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윤군이 차창으로 나를 향하여 머리는 숙이자, 무심한 자동차는 경적소리를 울리며 천하영웅 윤봉길을 싣고, 홍구공원으로 질주하였다.(336)

역사적인 인물들의 이별의 순간. 가슴이 먹먹해진다.

3. 피신과 유랑의 나날

1) 위기일발의 상해 탈출

2) 광동인 장진구

3) 시골 농부의 민족주의

우리나라에서 하는 줄모가 일본인의 발명인 줄 알았으나, 중국에서 고대로부터 줄모를 심었던 것은, 김매는 기계를 보아도 가히 알 만했다.(351)

우리 민족의 비운은 사대사상의 산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질적인 국리민복을 도외시하고, 주희학설 같은 것은 원래 주희 이상으로 강고한 이론을 주창하여 사색 당파가 생겨 수백년 동안 다투기만 하다 민족적 원기는 다 소진하고, 발달된 것은 오직 의뢰성뿐이니, 망하지 않고 어찌하리오.(352)

정주의 방귀를 향기롭다고 하던 자들은 비웃던 그 입과 혀로 레닌의 방귀는 달다하니, 청년들이여, 정신을 좀 차릴지어다. 나는 결코 정주학설의 신봉자가 아니고 마르크스와 레닌주의 배척자도 아니다. 우리나라 특성과 백성들의 수준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연구, 실시하려고 머리를 쓰는 자 있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353)

이후 아주 선중생활을 계속하였다. 오늘은 남문 호수에서 자고 내일은 북문 강변에서 자고, 낮에는 땅 위에서 행보나 할 뿐이었다.(354)

4. 다시 민족운동의 전선으로

1) 장개석 면담과 낙양군관학교

특무공작으로 천황을 죽이면 천황이 또 있고, 대장을 죽이면 대장이 또 있지 않소? 장래 독립하려면 군인을 양성해야 하지 않겠소?”(356)

2) 5당 통일운동

그로부터 소위 5당 통일회의가 개최되니 의열단, 신한독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미주대한인독립단이 통합하여 조선민족 혁명당이 탄생하였다.(358)

3) 폭격 속의 남경생활

노구교 사건으로 중국은 일본에 대한 항전을 개시하였다. 한인의 인심도 불안케 되었는데, 5당 통일로 된 민족혁명당은 족족 분열되어 조선혁명당이 또 한 개 생기고 미주대한인독립단은 탈퇴하고, 의열단 분자만이 민족혁명당을 차지하게 되었다.(360)

뒷방에 같이 사는 이들이 흙먼지를 헤치고 나오는데, 뒷벽은 무너지고 그 밖에는 시체가 헤아릴 수 없었다. 각처에서 불빛이 하늘로 높이 치솟아 하늘색은 마치 붉은 담요와 같았다.(361)

양반의 집에 화재가 나면 사당에 가서 신주부터 안고 나오거늘, 혁명가가 피난하면서 국가를 위하여 살신성인한 의사의 부인을 왜구의 점령구에 버리고 오는 것은, 안군 가문의 도덕에는 물론이고 혁명가의 도덕으로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군의 가족도 단체생활 범위내에 들어오는 것이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본의에 합당하지 않겠는가?”(362)

4) 어머님에 대한 추억

어머님은 주야로 상해에 있는 자손을 잊지 못하시고 생활비에서 절약하여 약간의 금전도 부쳐 보내셨지만, 그것은 타오르는 화로 속의 한 점 눈송이처럼 별 보탬이 되진 못했다.(365)

나는 지금부터 시작하여 라는 말을 고쳐 자네라 하고, 잘못하는 일이라도 말로 꾸짖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네. 듣건대 자네가 군관학교를 하면서 다수 청년을 거느리고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나도 체면을 세워주자는 것일세.”(367)

강직하신 어머니, 김구선생이 어머니를 닮으신 것 같다.

5) 가슴에 박힌 총탄

자네의 생명은 상제께서 보호하시는 줄 아네. 사악한 것일 옳은 것을 범하지 못하지. 하나 유감스러운 것은 이운환 정탐꾼도 한인인즉, 한인의 총을 맞고 산 것은 일인의 총에 죽은 것보다 못하네.”(371)

5. 중경 임시정부와 광복군

1) 전시수도 중경으로

2) 7당 통일회의

다시 거슬러 올라가서 서술하면, 내가 중경에 처음 도착하여 추진한 일은 세 가지였다. 중국 당국과 교섭하여 차량을 얻고 이사 비용을 마련하여 유주로 보내는 일, 미주, 히와이의 각 단체에 임시정부와 직원가족을 중경으로 이주시킨 것을 통지하고 원조를 요청하는 일, 그리고 각 단체의 통일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377)

어머님은 50여 년 고생하다가 자유 독립되는 것도 보지 못하고 극히 원통하게 돌아가셨다. 대한민국 21(1939) 4 26일 손가화원 안에서 영영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셨다.(379)

임시의정원에서는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개선하고, 국무회의 주석을 종래와 같이 돌아가며 하던 윤회주석제를 폐지하고, 주석에게 회의 주석 외 대내외에 책임을 지는 권한을 부여하였다.(381)

3) 광복군 창설

상덕 포로수용소에는 한인 포로가 30ㅇ 명이고 일본인은 수백 명인데, 한방에 같이 섞여 있는 한인과 일인 포로들 사이에서도 한인은 일인의 지휘를 받았다. 운동체조에도 일인이 명령, 지도하고, 일체 사물에 대해서도 일인이 권리가 더 많았다. 그런데 신봉빈은 극단으로 일인의 지휘와 간섭을 받지 않고 오히려 유창한 일어로 일인에 대해 극렬히 항쟁을 전재하였다.(385)

4) 대가족과 대륙에 묻힌 영혼

비통하고 슬프도다! 하느님이 진정 무심하신가. 어린 아들, 어린 딸도 왜의 마수에 목숨을 잃었단 말인가. 이러고도 인간이란 말인가.(387)

선생(이동녕)은 재덕이 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서 선두에 내세우고, 스스로는 남의 부족을 보충하고 고쳐 인도하는 일이 일생의 미덕이었다.(390)

6. 해방 전후의 대륙

1) 한국독립당과 광복군

몇 개월 동안은 광복군이 유명무실하여 연합국의인기를 끌 만한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홀연 우리 임시정부 정청으로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일제히 애국가를 부르며 들어서는 일단의 청년들이 있었다. 이들은 화북 각지의 왜군 부대를 탈주한 한인 학병 청년들인데, 부양으로 탈출하여 오는 것은 제3지대장 김학규의 지령으로 정부에 호송한 것이었다.(395)

⇒ 1945 1 31일 하오, 장준하, 김준엽 등의 학병 출신들이 중경 임시정부에 도착했다.

2) OSS 국내침투훈련

군대식사 한 가지만 왜병과 비교해 보더라도 왜적이 질 것은 명확한 사실이라 하겠다.(397)

풍성한 미군 전투식량을 보고

3) 왜적의 조기항복

왜적이 항복한답니다.”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399) ⇒ 수년간 자주독립을 목표로 준비한 것이 허사로 돌아감을 허탈해 하는 김구선생.

우리 광복군은 계획하였던 자기 임무를 달성치 못하고 전쟁이 끝나 실망 낙담하는 분위기에 잠기었고, 반면 미국 교관과 군인들은 매우 기뻐하여 질서가 문란한 것도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399)

4) 중경생활 회고

다음 가족생활에 대한 관계를 말하자면, 내 일생을 통하여 가족을 모아서 가정생활을 한 적은 시간으로도 짧다.(402)

우리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인이지만, 대의를 위해 가족과의 삶은 거의 포기 하다시피 한 김구선생. 한 인간으로 아이러니 하면서 나는 어땠을지 고개를 가우뚱해본다.

그후(왜적 비행기의 습격 후) 문 밖을 나가보니 정차장 있는 곳에 시체가 형형색색으로 흐터져 있는데, 앉아서 죽은 자, 누워서 죽은 자, 혹은 반동강 시체 등 참혹한 광경은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지경이었다.(403)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404)

5) 해방 직후의 상해

7. 조국에 돌아와서

1) 감격의 귀환

고국을 떠난지 27년 만에 기쁨과 슬픔이 뒤엉킨 심정으로 상공에 높이 떠서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며, 상해 출발 3시간 만에 김포 비행장에 착륙하였다. 착륙 즉시 눈앞에 보이는 두 가지 감격이 있으니, 기쁨이 그 하나요 슬픔도 그 하나이다. (409)

비단 서울뿐이랴. 인천,개성 등 지방 각지에서도 임시정부 환영회를 일제히 거행하였다. 그러나 38선 이북에서는 이와 반대로 환영회 대신 무쌍한 욕설을 반포한다 하니 참으로 탄식과 쓴웃음이 나올 뿐이다.(410)

물러나 속세의 일을 돌아보니 / 마치 꿈속의 일만 같다.(412)

3) 삼남지방 순회

4) 서부지방 순회

그러나 문득 뒤를 돌아보니 그 옛날 나를 따라오시던 어머님 얼굴만은 뵈올 길이 없으니, 앞이 캄캄하여 쏟아지는 옛추억의 눈물을 금할 길 없었다.(421)

지금, 사람과 땅이 생소한 서촉 화상산 남쪽 자락에 손자와 같이 누워 계신 것을 생각하니, 슬픈 마음을 금할 길 없다. 영혼이라도 고국에 돌아오셔서 이 몸과 같이 환영을 받으신다면 다소 위안이나 되지 않을까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하였다.(421)

 

나의 소원

1) 민족국가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할 것이요,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423)

옛날 일본에 갔던 박제상이, “내 차라리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왕의 신하로 부귀를 누리지않겠다한 것이 그의 진정이었던 것을 나는 안다.(424)

피와 역사를 같이 하는 민족이란 완연히 있는 것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못 됨과 같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 없는 것은, 마치 형제도 한 집에서 살기에 어려움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둘 이상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서 명령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근본 문제가 되는 것이다. (424)

철학도 변하고 정치, 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어니와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 민족은 필경 바람 잔 뒤의 초목 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고 한 수풀을 이루어 살고 있다.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425)

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425)

2) 정치이념

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426)

자유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 일개인에서 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고 하고, 일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427)

어느 한 학설을 표준으로 하여서 국민의 사상을 속박하는 것은 어느 한 종교를 국교로 정하여서 국민의 신앙을 강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옳지 아니한 일이다. 산에는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 한다. 여러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 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428)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 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국민교육이다. 그러므로 좋은 민주주의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될 것이다.(430)

나는 어떤 의미로든지 독재정치를 배격한다.(430)

3)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431)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431)

동포간의 증오와 투쟁은 망조다.(432)

정치인들 싸우는거 보면, 한참 전에 망했어야 할 한국……. 용하다 용해.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주장하되, 그것은 짐승들과 같이 저마다 제 배를 채우기에 쓰는 자유가 아니요. 제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 살게 하기에 쓰이는 자유다. 공원의 꽃을 꺽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432)

우리 말에 이른바 선비요 점잖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게으르지 아니하고 부지런하다. 사랑하는 처자를 가진 가장은 부지런할 수밖에 없다. 한없이 주기 위함이다. 힘드는 일은 내가 앞서하니 사랑하는 동포를 아낌이요, 즐거운 것은 남에게 권하니 사랑하는 자를 위하기 때문이다.(432)

 

3. 내가 저자라면

 백범일지는 일종의 유서로서 쓰여졌다. 상권은 임시정부 주석이 된 후, 신변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아들들에게 남기는 유서격이었고, 하권 또한 동포들에게 자신의 민족운동에 대한 경륜과 소감을 알리려고 쓴, 이 또한 일종의 유서이다.

백범은 행동가였다. 천한 집안에서 신분상승을 위해 과거준비를 하였지만, 과거를 둘써한 사회의 부패한 단면을 보고, 자신의 진로를 바꾸었다. 관상을 공부하기도 하고 동학의 수령으로 활동하였으며, 을미사변으로 인해, 국모보수를 위해 변복한 일본인 쓰치다를 죽여 투옥하기도 한다. 그는 결국 자주독립을 위해 독립운동가로 활동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경무국장을 거쳐 국무령에 까지 이른다.

백범일지는 책의 집필 동기와 그의 이런 거침없는 행동가적 성향에 맞게, 자신의 인생과 행적을 기록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다보니, 지금까지 접했던 자서전의 집필자(칼 융, 니체, 러셀)들과 달리 내면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 또는 자신의 내면을 세세히 묘사하는 점은 상당히 부족한 듯 보였다. 물론 자기 자신의 내면탐구와 학문적 성취가 가장 중요하였던 세 명의 위인과, 자기 자신보다는(심지어는 가족보다도) 오로지 국가의 독립을 위해 살았던 위인이니(심지어는 나이도 70전후였으니……), 이런 깊이 있는 내면탐구를 바라는 것은 내 욕심이자, 성향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내가 저자라면’ 자신과 독립운동을 둘러싼 사람들의 사실적 기록과 더불어, 나 자신의 내면탐구 또는 심리상태를 조금 더 밀도있게 서술해보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아마도 내가 저자라면, 내면에 탐구부분을 조금 더 비중있게 다루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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