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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23일 00시 29분 등록

.저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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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1876.08.29 ~ 1949.06.26)

황해도 해주읍 백운방 텃골 출생으로 보통사람, 평민의 자식이다. 그에 대한 어릴적 기록이 거의 없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였는데, 다행히 백범일지를 통해 그의 어린 시절을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그의 부친은 김순영, 그의 모친은 곽낙원이다. 그의 부친은 원래 양반집안이였다.(안동 김씨 집안) 하지만 그의 직계자손이 조선후기 김자점의 난에 직접적으로 연류되게 되었고, 실패한 난을 피해 황해도로 피난하게 되었다. 그리고 세대가 흘러 신분이 상놈이 되어 버린 것이였다. 그의 부친 김순영은 특히 의협심이 강하고 호기로웠는데 술만 마시면 양반행세를 하는 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주사가 있었다.

 

특히 김순영은 굉장히 효자였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백범의 조모) 새끼 손가락을 잘러 어머니 입에 피를 넣어드리는 엽기적인 일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 때문인지 3일을 더 살게 되었다고 하니 과연 효과가 있었나보다. 나중에 김순영이 위태로울 때, 백범역시 자신의 허벅지 살을 도려내 김순영의 입에 피를 넣는 행위를 반복한다. 하지만 김순영은 더 오래 살지 못하였고, 백범은 자신의 희생이 너무 작았던 것은 아닌지 자책하게 된다.

 

그의 모친 곽낙원 여사는 유명한 독립운동가였다. 김구를 17살에 나았는데 너무 어릴적에 애를 낳아서 난산을 하였다고 한다. 김구가 인천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는 아들을 위해 인천의 수감소 근처 주막에 식모로 들어가게 된다. 아들에게 사식을 넣는 조건을 걸고, 모든 것을 팽개치고 온 것이다. 당시 보통사람도 하루 세끼를 연명하기 힘들었던 시대였지만, 김구는 감옥에서 어머니가 넣어주는 사식을 먹고 버틸 수 있었다.

 

그녀의 강단있는 행동에 대한 몇가지 일화를 소개한다. 김구가 출옥하자 그의 친구들은 잔치를 벌인다. 이때 기생을 불렀는데, 곽낙원 여사는 아들이 기생을 끼고 노는 것을 보고 내가 여러 해 동안 고생을 한 것이 오늘 네가 기생을 데리고 술 먹는 것을 보려고 한 것이냐?”라며 아들을 호되게 꾸짖는다. 또 신민회 사건으로 수감되었을 때는 네가 여기 있는 것이 경기감사를 하는 것보다 기쁘게 생각한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 나중에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당시 김구의 동료들이 곽낙원 여사의 생일 잔치를 준비해주자 이역만리에서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생일잔치가 다 무엇이냐?”라며 핀잔을 하기도 한다. 그녀는 그들에게서 생일 선물로 현금을 요구하고 그 돈으로 총을 사서 돌려준다. 이처럼 배짱이 두둑하고, 국가와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어머니를 보고 자랐던 백범 김구가 위대한 민족 지도자가 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였는지도 모른다.

 

이제 백범의 일생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백범은 4살때 천연두를 앓아 얼굴에 곰보가 생긴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그의 사진들을 보면 얼굴에 곰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5살 때에는 강령으로 이사를 가게 되는데 친구들이 촌놈이라고 놀리자 집에 있는 식칼을 들고 대들기도 하였다. 어쩌면 위험한 행동일지도 모르지만 기백이 대단하다. 될 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백범이 조금 자라자 아버지는 백범의 교육에 힘쓴다. 김순영은 동네에 서당을 열고 이웃 아이들과 함께 백범을 공부시키게 되는데, 백범의 성적이 가장 좋았다. 이웃마을에 정문재라는 학자는 백범을 눈여겨 보고 백범을 본격적으로 가르치게 된다. 백범은 17세에 과거 시험을 치르게 된다. 이 과거시험이 우리나라에서 시행한 마지막 과거시험이였다. 그는 이 시험에서 자신의 이름 대신 아버지 이름을 적는다. 효심과 따뜻한 성품을 느낄 수 있다.

 

백범이 과거시험을 낙방한 충격은 꽤 컸다. 그는 자신이 원래 신분이 양반이였다는 사실, 그리고 어려운 가정환경을 과거 시험을 통해 해결해 보려고 했다. 신분상승을 꿈꾸며 열심히 공부하였는데 그 꿈이 좌절된 것이다. 당시 과거 시험은 아주 형식적인 시험이였다. 시험의 합격자는 대부분 정해져 있었던 시험이였던 것이다. 돈이나 신분으로 말이다. 부정부패의 온상이였던 과거시험을 통해 김구는 훗날까지 탐관오리를 비롯한 조정의 관리를 비난한다.

 

과거시험에 낙방한 김구는 관상학을 공부한다. 무엇이 그를 관상학으로 이끌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년 넘게 관상학을 공부하면서 그는 스스로 성공할 수 없는 관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인 것이다.

 

관상학을 그만두고 나서는 18세에 동학에 가담하게 된다. 김구는 신분제도에 울분하고 있었다. 그가 원래 출신성분과 현재의 그의 성분의 모순 사이에 많은 갈등을 했던 것이다. 그런 김구에게 만인이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동학은 한줄기 빛과 같았다. 이때 그의 이름을 김창암으로 변경한다. 그리고 포교활동에 힘쓴다. 당시 동학은 수많은 포교를 한 사람에게 높은 지위를 주는 시스템이였다. 김구는 해주에서 꽤 성공한 포교활동을 하였고 접주가 되기에 이르른다. 접주란 그 지역의 가장 높은 신분으로 해주 책임자가 되게 된다. 그의 이런 성공은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고 동학전쟁시 해주 싸움에서 선봉장이 되기도 한다.

 

당시 토벌군에는 안태훈이라는 적장이 있었다. (안태훈은 안중근의 아버지이다) 안태훈은 특히나 김구를 아꼈는데, 이미 기울어가는 동학 단체에 김구가 묻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안태훈은 적인 김구에게 밀사를 보내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충고를 하기도 한다. 이 밀사는 일종의 평화협약이였다.

 

백범의 나이 20세때, 결국 동학은 실패하게 된다. 갈 곳이 없어진 백범은 안진사(안태훈)의 집으로 들어가 식객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 어렸을 적 안중근과도 알게 된다. 그 둘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김구는 안중근의 동생들과 사이좋게 지냈었다.

 

이 시기, 백범은 당시 유학자였던 고능선을 알게 된다. 최초의 진정한 스승이라고 생각하고 그에게 많은 것을 배운다. 훗날 백범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의 스승 고능선을 생각하곤 한다. 그의 가르침이 김구의 큰 뿌리가 된 것이다.

 

21세때, 백범은 청나라를 가려다가 의병 소식을 듣고 다시 해주로 돌아오게 된다. 정말이지 나라를 사랑하는 젊은이가 아닐 수 없다. 그는 대동강 치하포에서 수상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를 일본인 밀정으로 여기가 그를 죽이게 된다.(그는 일본말을 쓰고 일본도를 가지고 다녔다) 그가 일본인을 죽인 이유는 하나였다. 일제에 의해 국모가 살해당한 치욕스러운 을미사변을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시신을 훼손하고 그 위에 국모보수(국모를 복수했다는 내용)라는 포고를 붙이고 집에서 기다린다.

 

그가 도망가지 않고 순사를 기다린 이유는 그의 행동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였다. 3개월 후 순사들이 그의 집으로 찾아와 그를 잡아갈 때도 그는 의연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당시 김구에 의해 죽은 일본인은 쓰치다라는 일본인이였는데 백범일지에서는 육군 중위로 나오지만, 일본 자료에서는 일반인 그것도 상인이라고 나오고 있다. 한쪽에서 김구를 테러리스트라고 주장하는 의견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쓰이기도 한다.

 

해주 감옥에 갇힌 김구는 가혹한 고문을 당한다. 그리고 인천감옥으로 이송되게 되는데 여기에서 장티푸스로 고생한다. 그는 손톱으로 충이라는 글자를 새기고 자살을 시도하는데 자살을 실패한다.

 

일본은 이 사건에 대해 단순 죄물약탈로 몰아가려고 한다. 비록 돈을 훔쳐 그자리에서 나눠줬지만 800전을 훔친 것도 사실이였기 때문이다. 일본은 김구에게 거짓 진술을 시키려고 심문을 한다. 국가를 위한 정의로운 행동이 아닌 시정잡배나 하는 모리배 짓으로 몰아가려고 한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한번 김구의 진가가 나타난다. 그는 관리들에게 호통을 쳤고, 특히 조선 관리들을 감시하던 일본 순사 와타나베에게도 호통을 친다. 결국 반성의 기미가 없다고 판단한 일본은 김구에게 사형선고를 내린다.

 

이 당시 김구는 감옥에서 독서 삼매경에 빠진다. 독서를 통해 신세계를 경험한 것이다. 독서를 통해 수많은 간접 경험들을 하고 많은 것들을 배웠는데, 신학문, 서양문물, 유학등 다양한 학문을 익히게 된다. 특히 사형 집행되기 몇시간 전까지도 태연스럽게 책을 읽는 호기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김구의 사형집행은 극적으로 취소가 된다. 당시 고정황제가 사행취소 명령을 내리게 되는데 판결 2시간 전의 일이였다. 당시 최초로 서울에서 인천까지 전화선이 개통되었는데 이를 통해 빠르게 소식을 알릴 수 있었던 것이다. 고종 역시 국모를 위해 살인을 했던 김구를 그냥 죽게 할 수는 없었던 일이였다.

 

1989.3 9, 김구는 결국 탈옥을 하게 된다. 더 큰 일을 하기 위함이였다. 김구가 탈옥함으로써 김구 아버지였던 김순영이 대신 감옥에 가게 되는데 이 사실을 몰랐던 김구는 남도를 기행하게 된다. 아마 사실을 알았다면 효자였던 김구가 반드시 되돌아왔을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였다. 이 당시 누군가 탈옥을 하게되면 그 가족이 대신 투옥해야 한다는 법이 있었던 것이다.

 

남도를 기행하던 김구는 이듬해 가을 쯤 승려가 된다. 호는 원종이였다. 그가 얼마나 종교에 진지하게 대했는지 알 수 없으나 1년쯤 되어 절에서 나오고 이름을 김구로 개명하게 된다. 이 시기에 교육과 개몽사업에 매진하고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위해 힘쓰게 된다.

 

27세가 되던 해 17세 여옥이라는 처녀와 맞선을 보게 되는데 당시 그는 부친 삼년상을 치러든 상황이였다. 그로 인해 약혹만 하고 결혼이 미뤄졌는데 삼년상 기간중에 여옥이 사망하게 되었다. 김구의 로멘스는 비극적이다. 그는 안창호 동생과 약혼했다가 파혼하는 등 4번 정도 파혼을 겪게된다. 28세 기독교에 심취하게 되고 29세때 18살 최준례와 결혼하게 된다. 이 시기 보광학교를 건립하여 교장이 되는데 장덕준이 그의 학교에서 숙식을 한다. 장덕준의 동생 장덕수는 나중에 암살을 당하게 되는데 김구가 배후로 지목되게 된다.

 

1907년 신민회를 개설하고 독립단체를 이끈다. 교육을 통해 나라를 구하고 독립군을 양성한다. 또 학교와 신문사 군대를 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신민회는 105인 사건으로 와해되고 안악사건과 함께 김구는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게 된다. 이 곳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되는데 박팽년의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는 구절을 기억하면서 참아내게 된다.

 

이시기 호를 백범으로 짓는다. 백범은 천한 계급,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참으로 그와 어울리는 소박한 호가 아닐 수 없다. 3 6개월을 복무하고 출옥하는데 그 사이 딸 화경이 죽게 된다. 7살 밖에 안된 화경은 김구가 걱정할까봐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하기도 한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로 들어가게 된다. 안창호를 찾아가 임시정부의 문지기라도 좋으니 제발 임시정부에 넣어달라고간청한다. 1920년 부인과 가족을 데리고 온다. 1923년 임시정부 권한이 약화되는데 김구는 이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또한 이 시기에 다른 항일 단체들이 많이 생기는데 김구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박은식 선생이 국민대표자회의를 만들었을 때 이를 맹비난 한 것도 한 곳에 힘을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였다. 그리고 김구에게는 그 단체가 바로 임시정부였던 것이다. 박은식의 아들은 자신의 아버지를 맹비난한 김구를 찾아오지만 김구는 폭력을 휘두르는 에피소드도 있다. 결국 임시정부가 내부분열이 일어나자, 김구는 직위를 이용하여 국민대표자회의를 해산시켜버린다.

 

김구는 임시정부로 뭉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주장에 반하는 행동과 발언을 하는 사람들과 많은 트러블이 있었다. 작은 나라의, 작은 힘들이 나뉘어서는 힘을 한데 모을 수 없다. 김구는 끝까지 한 곳의 힘을 모을 것을 주장했다. 권력욕이 아니라 순수한 바램이였다.

 

28살의 나이로 부인 최준례가 둘째 아들을 낳다가 사망하게 된다. 김구는 최준례가 죽고 나서는 계속 혼자 살게 된다. 1926년 임시정부의 국무령에 오르고 김구는 대통령제에서 내각책임제로 바꾼다. 이때 이승만과의 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이승만은 내각제를 반대하였다. 이유는 권력을 장악하고 싶었기 때문이였다. 당시 미국은 이승만을 밀어주었다. 그를 새로운 지도자로 새우길 원했던 것이다. 그런 이승만에게 내각책임제는 눈에 가시였다.

 

김구는 권력의 분산을 주장했다. 집단지도체제를 구성하는 것을 주장했다. 김구는 이승만과 달리 자신의 권력을 나눠주는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이미 이시기의 그는 개인적 욕심보다 나라와 민족만을 생각하는 정신적 지도자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김구는 두 아들에게 편지형식으로 유서를 쓰는데 이게 백범일지였다. 이 당시 임시정부는 극심한 재정난을 격었다. 당시 월세 내기도 힘들 정도였으며 많은 이들이 모였다가 떠나가게 된다. 당시 미국에 있었던 이승만은 임시정부에 돈을 보냈지만 아주 조금만 보냈다. 중간에 많은 돈을 가로챘던 것이다. 곽낙원 여사는 중국인이 버린 배추를 모으면서 임시정부를 도우려고 했는데, 결국 입이라도 하나 줄일 요량으로 손자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1931 11월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결성한다. 한인애국단은 김원봉의 의열단과 쌍벽을 이루는 투쟁조직이었다. (김원봉은 당시 일본에 의해 현상금이 가장 높은 사람이였다), 그리고 한인애국단은 거의 매달 의거를 일으키게 되는데, 이봉창, 안중근 열사등 많은 이들이 한인애국단을 통해 조국 광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이봉창 열사는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졌다 실패하였고, 윤봉길 의사는 홍커우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지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박헌영과 이승만은 이를 맹비난하게 되는데, 그들의 논리는 이러한 방식으로는 자주 국방을 이룰 수 없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중국의 태도가 변한다.

 

당시 중국의 장제스 정보는 윤봉길 의사의 항저우 폭탄 테러를 보고 마음을 움직이게 되었다. 중국은 임시정부를 지원하게 되었고, 자금난에 허덕이는 임시정부의 숨통을 트이게 하였다. 하지만 자진해서 몇차례의 테러를 자신이 주모했다고 알린 김구는 도망자 생활을 하게 된다. 당시 그에게는 현상금 60만원이 맥여졌고(현재 가치로는 600억원 이상), 김구는 결국 임시정부를 떠나 도망다니는 신세에 빠진다.

 

김구가 상해를 탈출하면서 주애보라는 뱃사공을 만나게 된다. 5년간 그들은 함께 생활하면서 사실혼 관계를 갖는다. 주애보는 김구와 가짜 부부생활을 하면서 중국의 검문을 피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김구는 주애보와 헤어질 때 곧 만날 줄 알고 약간의 노자금만 주고 헤어졌는데 결국 둘은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다. 김구는 훗날 이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고 아쉬워한다.

 

중국의 지원을 받았지만 임시정부의 힘은 갈수록 약해진다. 그만큼 일제의 외압이 심했던 이유였을 것이다. 임시정부의 힘이 약해지면서 새로운 단체들이 생기게 되는데 장제스와 김구는 임시정부로 힘을 합칠 것을 계속 주장한다. 1938년 민족주의 계역의 3당 합당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청년단 이운환에게 총을 맞게 된다. 김구는 사경을 해매다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된다.

 

1940년 김구는 마침내 임시정부의 주석이 된다. 그리고 이듬해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게 된다. 당시 조선의용대가 있었는데 한국광복군은 독자적인 우리부대였다. 조선의용대는 병사는 우리국민이였지만 중국 부대 밑에 있는 기관이였던 것이다.

 

1941년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했을 때, 임시정부는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선전포고는 대한민국을 국가로 인정해달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으로 편입시키고 그 세력을 확장시켰다.

 

하지만 1945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면서 일본은 항복을 선언하게 된다. 당시 미국과 연합작전을 하는 둥, 조선진격 계획을 세웠던 김구에게서는 참으로 아쉬운 일이였다. 원자폭탄 대문에 외세에 의해서 독립을 하게 되었으며 결국 승전국의 권한을 가지지 못하게 되어 남북으로 분할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김구는 훗날 이 사건을 두고두고 아쉬워 한다.

 

1945 11, 해방을 맞이하고 3개월 후 김구는 한국으로 귀국한다. 당시 미국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김구는 임시정부의 수령자격이 아닌 개인자격으로 귀국하게 된다. 당시 열렬히 환영을 받으며 미국에서 귀국을 했던 이승만과 비교되는 일이였다. 또 이곳에서 조선일보 복관 축하 인사도 하게 되는데, 유지사 사경성(뜻이 있으면 끝내 성취할 수 있다)이라는 말을 신문에 기고했다. 조선일보와 김구의 이런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훗날 10만원 화폐에 김구를 넣지 말자는 조선일보의 주장은 모순적이기도 하다.

 

모스크바 삼상회의를 통해 신탁통치를 결정하게 되고, 1945 12월 공동성명을 통해 한국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그 정부 및 사회단체와 협의하여 신탁안을 결정하는데 그것은 최고 5년으로 한다.’고 발표하게 된다. 이때 김구는 울면서 신탁 통치만은 안된다고 읍소하게 된다. 반면 송진우는 신중론을 들어 신중할 것을 주장하는데 그날, 한현우에게 암살당한다. 이 배후에 김구가 있다는 음모론이 제기 된다.

 

1947 12월 장덕수가 암살된다. 장덕수 암살 배후에 있다고 김구가 있다고 판단한 미국은 김구를 법정에 세우는데 김구는 이승만을 찾아가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을 한다. 김구의 부탁을 이승만은 무시하고 이를 계기로 둘 사이는 멀어진다. 후에 남북협상 이후에는 완전히 갈라서게 된다.

 

당시 이승만은 김구를 정치가라기 보다는 혁명가라고 판단했다. 또한 장덕수와 송진우 암살 배후에 김구가 있다는 것도 믿고 있었다. 사실 김구의 살해지시는 이번 뿐이 아니라 과거에도 많이 자행되었다.

 

1922, 220만불, 레닌이 독립운동 하라고 준 돈을 같은 동료 한형권, 김립이 40만불 횡령한 일이 있었다. 김구는 이 둘을 사살명령을 내린다. 또한 같은 독립운동가 옥관빈을 죽인 것도 김구였고, 임정 초기 맴버 옥관빈 살해지시한 것도 김구였다. 안중근의 아들이지만 나중에 일본의 앞잡이가 된 안준생도 살해지시하였다. 실로 김구는 대단한 혁명가이며 수많은 전과가 있었던 것이다.

 

이 둘이 본격적으로 틀어지게 되는 것은 1946 6월 이승만의 정읍발언이였다. 이 발언에서 이승만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새울 것을 주장하는데, 1948년 김구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함이라는 단독정부 반대성명을 발표한다.

 

김구는 이 반대성명을 발표하고 김일성과 남북협상에 참여하게 된다. 사실 남북협상은 김일성에게 이용당한 측면이 강하고 정치적으로 실익이 없었다. 그렇지만 김구는 민족 분단만은 막겠다는 일념하에 김일성을 만난 것이였다. 당시 김구가 김일성에게 이용당할 것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였다. 별 실효없이 돌아온 김구에게 김구의 반대파들은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정치스타일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분명 김구 역시 이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천년을 넘게 같이 살아온 한민족이 분단이 되게 생겼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남북협상을 마치고 돌아온 1949. 6.26일 김구는 자택인 경교장에서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총격 당하여 사망한다. 이 사건은 역사적으로 참으로 비통하고 안타까운 사건이였다. 그리고 이 사건은 친일파, 당시에도 기득권을 가지고 이승만과 함께했던 친일파들이 저지른 사건이였다.

 

당시 김구의 사망은 친일청산을 방해하는 친일파들의 최후 발악이였다. 1948년 소장파 정치인들 중심으로 반민특위법이 만들어지는데 김구와 소장파가 지지했다. (이승만은 반대했다) 반민특위법은 민족에 반하는 친일파를 청산하는 법이였다. 그리고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소장파 정치인들이 대거 구속된 후 김구가 암살된 것이다. 김구 암살 관련자들은 전부 친일파였다. 결국 김구가 암살되고 반민특위법은 와해되고 친일파가 득실하게 된다.

 

당시 김구의 암살사건은 여러모로 의심스러운 정황이 많다. 우선 장은산 포병대령이 안두희에게 김구에게 지시한다. 안두희는 범햄당일 경교장 근처 자연장 다방으로 갔는데, 11시 다방에 헌병들이 깔리기 시작한다. 당시 친일파 헌병장교 전봉덕이였는데, 안두희는 헌병, 경찰에게 검문당하지 않으면서 김구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안두희가 김구에게 총을 쏜 시간은 1~2분이 되지 않는다. 총소리를 들은 헌병이 달려오고, 안두희를 경찰에 인계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또한 안두희와 김구가 의견차이로 인해 순간적으로 살해되었다고 국방부가 발표하는데 이는 단순 치정으로 몰아부치기 위한 계략이였다.

 

안두희는 처음에 무기징역을 받지만, 1951년 완전 면제를 받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군에서 승승장구하게 되고 나중에는 군납업체를 운영하여 강원도 최고 부자가 되게 된다. 안두희의 면제는 미국이 완벽하게 예상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김구 서거 9일만에 조문에 참석하고, 장례식은 불참하였다. 또한 김구를 공산주의자로 모함하였고, 미국대사관은 김구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으로 썼다. 특히 미국대사관 무초와 김구는 사이가 안좋았다.

 

이승만이 김구를 죽였다는 정황상 증거들이 많다. 미국의 비밀자료에 보면 미군이 철수하고 나올 경우를 대비하여 호전적인 김구를 미리 처리하였다는 기록도 발견되었다. 또한 단독정부에는 참여하지 않았던 김구지만 다음 선거에는 참여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과연 이승만이 다음 선거에서 김구를 이길 수 있었을까?

 

우리는 김구라는 이름은 알지만 그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잘 모른다. 그는 강직하게 나라를 사랑했고 해방을 위해 몸으로 뛰었고, 분단을 막기 위해 노력한 분이였다. 우리는 김구를 이름많이 아니라 그 안의 정신과 살아온 길을 더욱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 그가 끝내 해내지 못했던 친일파 청산, 권력에 붙어있는 기회자들의 모습을 세계 경제 10위안의 나라가 되어도 우리는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

 

그는 결코 공산주의자도 아니였으며 정치력이 없는 것도 아니였다. 그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높은 문화력에 힘쓰는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들은 우리의 큰 자산이였다. 우리의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 백범 김구선생은 자라나는 젊은이들에게 더욱 더 큰 귀감이 되기를 바란다.

 

참조

1) 쉽게 읽는 백범일지, 돌배게

2) 김구, 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EA%B9%80%EA%B5%AC)

2) 이이제이 팟캐스트 방송(http://www.youtube.com/watch?v=CLz6dgFmsto)

3) 김구, 엔하위키 (http://mirror.enha.kr/wiki/%EA%B9%80%EA%B5%AC)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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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내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언제 죽음이 닥칠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나의 지난 일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에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4, 오늘날 우리의 현상을 보면 더러는 로크의 철학을 믿으니 이는 워싱턴을 서울로 옮기는 자들이요, 또 더러는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의 철학을 믿으니 이들은 모스크바를 우리의 서울로 삼자는 사람들이다.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우리의 서울은 될 수 없는 것이요 또 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니, 그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일제시대 동경을 우리 서울로하자는 자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5, 이 책에 나오는 동지들 중에는 생존해서 독립 사업에 헌신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이도 많다. 무릇 난 자는 다 죽는 것이지만, 개인이 나고 죽는 중에도 민족의 생명은 늘 있고 늘 젊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시체로 성벽을 삼아서 우리 민족의 독립을 지키고, 우리의 시체로 발판을 삼아 우리 민족의 자손을 높이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서 우리 민족의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앞서 세상을 떠난 동지들이 다 이러한 일을 하시고 간 것에 대해 나는 늘 감사한다. 나도 비록 늙었으나 앞으로 이 몸뚱이를 헛되이 썩히지는 아니할 것이다.

 

6, 이 책을 발행하는 데 동의한 것은, 잘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못난 사람이지만 민족의 한 분자로 살아간 기록이기 때문이다. 하층민 백정과 평민인 범부를 의미하는 백범이라는 내 호가 이것을 의미한다. 내가 만일 민족의 독립운동에 조금이라도 공헌한 것이 있다면, 그만한 것은 대한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6, 나는 우리의 젊은 남녀들 속에서 참으로 크고 훌륭한 애국자와 빛나는 큰 인물이 쏟아져 나올 것을 믿는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누구나 저마다 이 나라를 제 나나로 알고 평생 이 나라를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니, 이러한 뜻을 가진 동포들에게 이 범인의 자서전을 보내는 것이다.

 

17, 너희들이 다 자랐으면 부자간에 따뜻한 대화라도 나누겠지만, 세상일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내 나이 벌써 쉰셋인데 너희는 겨우 열 살 전후의 어린아이들이니, 너희들의 나이와 지식이 더할수록 나의 정신과 기력은 약해질 따름이다. 또한 나는 이미 일본에 선전포고하여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다. 이 일지를 기록하여 전하는 것은 너희들에게 나를 본받으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나는 너희들이 역사상 많은 위인들을 배우고 본받기를 원한다. 나를 본받을 필요는 없지만, 너희들이 성장하면 아비의 삶을 알 길이 없겠기에 이 일지를 쓰는 것이다. 오래된 사실들이라 잊어버린 것이 많아 유감스럽지만, 일부러 지어낸 것은 없으니 믿어 주기 바란다.

 

31. 아버님이 관상서인 『마의 성서』한 권을 빌려다 주셨다. 나는 독방에서 이것을 공부하였다. 관상서를 공부하려면 먼저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부위와 개념을 익힌 다음, 다른 사람 얼굴로 확대 적용해 나가는 것이 제일 빠른 길이다. 나는 두문분출하고 석 달 동안 내 얼굴을 면밀히 관찰하였다.

 

46, “선생님! 저는 불과 스무 살에 실패를 많이 경험하였습니다. 선생님이 저의 자질과 품성을 밝히 보시고 좋은 점이 있으면 사랑해 주시고 교훈도 해 주십시오. 그리하지 못한다면, 저늬 발전은 고사하고 선생님의 높으신 덕에 누가 끼치고 말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도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48. 그날부터 나는 밥을 안 먹어도 배고픈 줄 모르겠고, 고선생이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날마다 고선생 사랑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선생은 책을 차례대로 가르치지 않고, 나의 정신과 재질을 보아 떨어진 곳을 기워 주고 빈 구석을 채워 주는 구전삼수의 방법을 이용하셨다. 선생은 주로 의리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아무리 뛰어난 재주와 능력이 있어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그 재능이 도리어 화근이 된다는 것, 사람의 처세는 마땅히 의리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일을 할 때에는 판단 실행 계속의 세 단계를 밟아 성취해야 한다는 것 등, 여러 가지 가르침을 주셨다. 특히 선생은 과단성 없는 것이 나의 가장 큰 결점이라 여기셨는지, 과단성이 없으면 모든 일이 쓸데없다 하시며 다음 구절을 힘주어 설명하셨다.

 

49, "백성들이 의를 붙잡고 끝까지 싸우다가 함께 죽는 것은 신성하게 망하는 것이지만, 백성과 신하가 모두 적에게 아부하다 꾐에 빠져 항복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일세. 지금 왜놈의 힘이 대궐까지 파고들어 대신들을 마음대로 내치니, 우리 나라를 제2의 왜국으로 만든 것 아니겠는가? 그런즉 자네나 나나 죽음으로 나라에 충성하는 일만 남았네.“

 

63, 나도 매우 걱정스러웠다. 모름지기 의리 있는 선비라면목을 자를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 “저승에서 머리 없는 귀신이 될지언정 이승에서 머리 깎는 사람은 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옳다고 여기던 때였다. 그러니 안진사가 단발할 의향까지 보였다는 것은 의리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게다가 안진사가 위리나라 동학을 토벌하면서 서양 오랑케의 서학을 믿겠다는 것도 괴이하였다.

 

69, “그렇다. 그러나 지금 나는 한낱 도적의 시체로 남게 될까 미리 걱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이때까지마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은 다 거짓이고, 사실은몸에 이롭고 이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는 것이 아닌가?”

 

73, 집으로 돌아와 아버님께 물씀드리니 부모님 역시 피신할 것을 권하셨다. 그러나 나는 이번 일이 사사로운 감정 때문이 아니라 나라의 수치를 씻기 위해 행한 일이니 정정당당하게 대처하겠다고 말쓸드렸다. 아버님도 다시 강권하지 않으시고 집안이야 흥하든 망하든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말씀하셨다.

 

78, 옛사람들이슬프다, 부모님께서 나를 낳으시느라 고생하셨었다고 노래하였지만, 부모님은 내가 태어날 때도 많은 고생을 하셨고, 나를 먹여 살리기 위해 또 천배 만배의 고생을 더..

 

82. “전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므로 나를 강도로 대우해도 잠잠히 입 다물고 있었다. 허나 오늘 정당하게 내 뜻을 말했는데도 이렇게 함부로 대하느냐? 땅에 금만 그어 놓고 감옥이라 해도 나는 도망가지 않을 것이다. 당초 도망할 생각이 있었다면 왜놈 죽인 그 자리에 내 주소와 성명을 밝히고, 또 내 집에서 석 달이 넘도록 잡으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겠느냐? 너희들이 왜놈을 기쁘게 하려고 내게 이리 나쁜 대우를 하느냐?”

 

87, 나 역시 척왜척양이 당연한 도리라 생각하고 이에 반대하는 자를 짐승처럼 여겼다. 그런데 서양의 역사를 기록한 신서적 『태서신사』 한 권만 보더라도, 저 눈이 푸르고 코가 우뚝한 서양 오랑캐들이 오히려 더 선진적인 법규로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다스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높은 갓을 쓰고 넓은 요대를 두른 우리 나라의 탐관오리들에게는 오히려 오랑캐라는 이름조차 아깝다는 사실을 개닫게 되었다.

 

90. 해방 후 고종릉을 참배하는 백범(1946 7 24) 백범의 사상적 궤적은 동학, 의병, 애국계몽운동 등을 거치면서 고종과 왕실에 대한 인식에 일정한 변화를 겪는다. 치하포 사건은 왕실의 복수를 하는 것이었고, 고종도 교수형을 최종 재가하지 않아서 김창수는 탈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감옥에서 개화사상을 접한 김창수는 탈옥 이후 스승 고능선을 만나 임금과 탐관오리를 맹렬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는 동안 국권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면서, 백범은 환등기로 고종 대황제의 어진을 보이며 사람들에게 국궁을 시키는 등 우호적인 입장으로 다시 바뀐다.

 

91, 눈서리가 내리다가 갑자기 봄바람이 부는 듯하였다. 밤에 옥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 벌벌 떨던 죄수들은 이 소식을 듣고 좋아서 죽을 지격인 모양이었다. 방망이로 차꼬 등을 두들기며 온갖 노래를 다 부르고 푸른 바지저고리 죄수복 차림으로 춤도 추면서 하룻밤을 지내는 것이 마치 배우들의 연극장 같았다.

 

101. 나는 시흥 가는 길을 택하여 경성으로 갈 작정이었다. 내 행색은 누가 보든 도적놈으로 보였을 것이다. 감옥에서 장티푸스를 앓은 후 머리털이 전부 다 빠져 소위 솔잎상투로 꼭대기만 노끈으로 졸라매고 수건으로 동인 채였고, 옷은 두루마기도 없이 바지저고리 바람이었다. 의복만 본다면 가난한 사람은 아니지만, 새로 입은 옷에 보기 흉하게 흙이 묻어 있어, 스스로 살펴보아도 평범해 보이지는 않았다.

 

102. 그런데 동네 가운데 디딜방앗간이 있고 그 옆에 볏짚단이 있었다. 볏짚을 안아다가 방앗간에 깔고 누우니, ‘인천감옥 특별방에서 2년 동안 지낸 연극의 제1막이 내리고, 이제 방앗간 잠으로 제 2막이 열리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106. ‘오늘 살인을 하고 가는구나. 그자가 밤에 내 얼굴을 대하면서 심히 무서워하더니 제 자식을 안아다가 강변에 버리고 도망한 것 아닌가?’

 

111. 하룻밤 사이, 청정법계에서 속세의 만 가지 생각이 다 없어진 듯하여 중이 되기로 승낙하였다. 얼마 뒤 사제 호덕삼이 칼을 가지고 왔다. 냇가로 나가 삭발진언을 쏭알거리더니 상투가 모래 위로 툭 떨어졌다. 이미 결심은 하였지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115, 인사 후 다소간 문답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 길고 아름다운 수염에 위퉁당당한 전효순이라는 노인이 있었다. 최재학은 전효순 노인에게이 대사는도리를 아는 스님이지, 대보산 영천암의 방주 자리를 내어주시면 아들들과 외손자들 공부에 도움이 되겠습니다. 영감 의견은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전씨는 무척 기뻐하였다.

 

149, 1895년 백범은 청계동에서 세 살 아래인 안중근을 처음 만났다. 백범이 애국계몽운동을 하고 있던 1907, 안중근은 연해주로 망명하여 주로 무력투쟁에 참가하였다. 1909냔 안중근은 동지 11명과 손가락을 끊어, 죽음으로써 구국 투쟁을 벌일 것을 맹세하는 비밀결사를 결성하였고, 그해 10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현장에서 체포된 그는 여순 감옥에 수감되었고 이듬해 3 26일 사형되었다. 현재 효창원에는 안중근 의사의 허묘가 있다. 사진 상단에 적힌 일본인 추종자의 글에안중근의 한 방이 천지를 진동시켰다는 구절이 있다.

 

158, 세 놈이 나를 들어다가 유치장에 눕혔을 때는 이미 동창이 밝아 있었다. 신문실에 끌려간 것은 전날 해가 진 후였다. 처음에 신문을 시작한 놈이 불을 밝히며 밤을 새운 것과 그놈들이 온 힘을 다해 자기 일에 충성하던 것을 생각하니 자괴감이 들어 견딜 수 없었다. 나는 평소에 무슨 일이든 성심껏 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구하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를 삼키려는 저 왜구들처럼 밤새워 일한 적이 과연 몇 번이나 있었던가? 온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듯 고통스런 와중에도, 혹시 내게 망국노의 근성이 있지 않은가 하는 부끄러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찼다.

 

184, 그러므로 내가 다시 세상에 나가는 데 대해 걱정이 적지 않았다. 만일 나 역시 석회질을 품은 뭉우리돌이면 차라리 만기 이전에 깨끗한 정신을 품은 채로 죽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고도 생각했다. 그리하여 굳은 의지를 다지는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라고 하고, 호를백범이라 고쳐 동지들에게 알렸다. 고친 것은 왜의 호적부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우리 나라가 완전한 독립국이 되려면 조선의 하등사회, 곧 백정 범부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복역 중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을 때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로 하여금 그 집의 뜰도 쓸고 창도 닦는 일을 해 보고 죽게 해 달라.

 

188, 무거운 짐을 지고 사다리로 올라가면서 여러 번 떨어져 죽을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같이 쇠사슬을 맨 자가 인천항에서 구두 켤레나 담뱃갑을 도적질한 죄로 두세 달 징역 사는 가벼운 죄수라 그자까지 죽이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생각다 못해 아무 잔꾀도 부리지 않고 죽을힘을 다해 일했다.

 

190, “너는 오늘 살아오지만, 너를 극히 사랑하고 늘 보고 싶다던 네 딸 화정이는 서너 달 전에 죽었구나. 네 친구들이 네게 알릴 것 없다고 권하기로 기별도 하지 않았다. 일곱 살도 안 된 어린 것이 죽을 때나 죽었다고 감옥에 계신 아버님께는 기별하지 마십시오. 아버님이 들으시면 오죽이나 마음 상하시겠소하더라.”

 

212, 애초에 나는 임시정부의 문지기 되기를 청하였으나, 끝내는 경무국장, 내무총장, 노동총판, 국무령, 구무의원, 주석으로 중임을 거의 다 역임하였다. 이것은 나 개인의 발전 때문이 아니라, 임시정부의 인재난과 경재난 때문이었다. 명성이 쟁쟁하던 집안이 몰락하면, 그 고대광실이 걸인의 소굴이 되는 것과 비슷한 형편이었다.

 

223, 그러나 하권을 쓰는 지금까지 비천한 나의 목숨은 아직 살아 있고 자식들도 이미 성장하였으니, 상권처럼 자식들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할 필요는 없게 되었다. 지금 하권을 쓰는 목적은 내가 힘써 싸운 자취를 남겨, 이를 보고 숱한 과오를 거울삼아 같은 잘못을 밟지 말라는 것이다.

 

226, 칠십 평생을 돌이켜 보니, 살려고 해서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다. 죽으려 해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228,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31년을 더 산다 해도 늙은 생활에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영원한 즐거움을 얻기 위해 독립운동에 몸을 던지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234, 1932 1 28일 상해사변을 계기로 상해의 동포 청년들도 비밀리에 나를 찾아와 나라에 몸을 던질 일감을 달라고 간청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윤봉길군이 조용히 나를 찾아왔다. 그는 우리 동포의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한 적이 있고, 홍구시장에서 채소장사를 하고 있었다. “제가 날마다 채소바구니를 등에 메고 홍구 쪽으로 다니는 것은 큰 뜻을 품고 상해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동경 사건과 같은 계획이 또 있을 줄 믿습니다. 저를 지도하여 주시면 죽어도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254, 예전부터 우리 사신들이 중국을 왕래하였건만, 우리 선조들은 눈먼 사람이었던가. 이렇게 유익한 것을 소개하지 않았으니, 어찌 통탄스런 일이 아니리오. 문익점은 면화 씨를, 그 아들 문래는 물레를, 손자 문영은 면포 짜는 법을 중국에서 수입하였다. 그러나 그 후로는 말마다 중국을 오랑캐라 일컬으며 그들의 문물을 돌아보지 않았다. 또한 명나라 때 불편하고고통스런 망건이나 갓 등 망할 놈의 의관문물만 중국에서 들여왔으니, 생각만 하여도 이가 시리다.

 

255, 청년들은 중국 정자와 주자의 방귀조차 향기롭다는 옛사람들을 비웃지만, 같은 입과 혀로 러시아 레닌의 방귀는달다하니, 정신 차릴지어다. 나는 결코 정자, 주자 학설의 신봉자도 아니고 마르크스, 레진주의의 배척자도 아니다. 우리 나라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위해 머리를 쓰는 자 있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있으랴.

 

259,  “특무공작으로 천황을 죽인다 해도 천황은 또 나올 것이고, 대장을 죽인다 해도 대장이 또 나올 것이오. 그러니 앞으로 독립을 하려면 군인을 키워야 하지 않겠소?”“감히 부탁할 수 없었으나 그것이 내가 진실로 바라는 바요. 문제는 장소와 재력이오.”

 

302, 가는 길에 효자 이창매의 묘를 배알하러 갔다. 시골 늙은이에게 길을 물어보니 전과 변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묘 앞에 도착하여 이창매가 남긴 발자국을 따라 밟으며 참배하고, 50년 전 인천감옥으로 이감되던 길에 이 묘비 앞에서 쉬었던 일을 깊이 되새겨 보았다. 그런 다음 눈짐작으로 당시 어머님이 앉으셨던 자리를 차아 보았다. 묘와 산천은 옛 모습 그대로이고, 좌우에 따르는 경관들도 그때 나를 호송해 가던 경관들과 비슷했지만, 그 옛날 나를 다라오시던 어머님 얼굴만은 뵈올 길이 없었다. 앞이 캄캄하여 쏟아지는 눈물을 멈출 길 없었다.

 

306,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거니와, 그것은 우리 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309, 나는 우리나라의 청춘 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기꺼이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를 바란다. 젊은이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 힘을 쓴다면 30년이 못되어, 남들이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볼 정도로 우리 민족은 대대적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312, 나는 노자의 무위 사상을 그대로 믿는 자는 아니지만, 정치에 너무 인공을 가하는 것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대개 사람이란 전지전능할 수 없고 학설이란 완전무결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한 사람의 생각, 한 학설의 원리로 국민을 통제하는 것은 일시적으로는 빠른 진보를 보이는 것 같지만, 끝내 병통이 생겨 그야말로 변증법적인 폭력의 혁명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모든 생물에는 다 환경에 순응하여 자신의 보존하는 본능이 있으므로 가장 좋은 길은 가만히 두는 것이다.

 

315, 나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318, 이상에서 말한 것은 내가 바라는 새 나라의 용모의 일단을 그린 것이다. 동포 여러분! 이러한 나라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 자손에게 이러한 나라를 남기고 가면 얼마나 만족하겠는가. 옛날 한 나라 지역의 기자가 우리나라를 사모하여 왔고, 공자께서도 우리 민족이 사는 데 오고 싶다고 하셨으며 우리 민족을 인을 좋아 하는 민족이라 하였다. 옛날에도 그러하였거니와, 앞으로 세계 인류가 모두, 우리 민족의 문화를 이렇게 사모하도록 하지 아니하려는가. 나는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나라의 젊은 남녀가 다 이 마음을 가진다면 아니 이루어지고 어찌하랴!

 

 

 

 

.내가 저자라면

자서전은 진실되어야 한다. 그리고 살아온 삶이 모범이 되어야 한다. 힘든 삶, 올바른 삶을 살았던 사람은 그 삶 자체가 감동이 되고 모범이 된다. 자서전은 이게 전부인 것 같다. 어떤 형식도, 어떤 목차구성도 중요하지 않다. 정말 진실된 삶이였는지, 멋진 삶이였는지 그게 전부다. 그래서 좋은 자서전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상권

1. 황해도 벽촌에서의 어린 시절

 1.상놈의 된 집안 내력과 양반에 대한 울분

 2.난산으로 태어난 개구쟁이

 3.양반의 꿈, 궁핍한 배움길

 

2. 파란만장한 실패와 달련의 성장기

 1.과거 낙방, 양반의 꿈은 무너지고

 2.동학 이분으로 다시 태어나다

 3.동학군이 동학군에 패하다.

 4.적장의 집에서 만난 스승 고능선

 5.의병의 국제연대를 찾아 청나라로

 6.김이언 의병도 실패하고

 7.인연 없는 스승의 손녀사위

 

3. 질풍노도의 복수 의거, 치하포 사건

 1.치하포 단독 의거

 2.첫번째 투옥, 인천으로 이감

 3.신문장에서 영웅이 되고, 옥중에서 왕이 되다

 4.신지식을 접하고 교수형을 면하다

 5.탈옥, 조롱을 박차고 나가다

 

4. 5년간의 방랑과 모색

 1.동지를 찾아서

 2.고기 먹고 시를 짓는 장발의 걸시승

 3.뜻이 있으면 어디선들 만나지 못하리

 4.스승, 아버님, 미혼처와 영원히 이별하다

 

5. 새로운 사상, 새로운 교육

 1.근대적 교육사업에 투신하다

 2.을사늑약 반대 투쟁과 사연 많은 결혼

 3.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4.황해도 순회 교육운동과 두번째 투옥

 5.이재명 의사에 대한 회한

 

6. 일제의 모진 감옥에서 백범이 되다.

 1.세번째 투옥, 고문에서 얻은 교훈

 2.기약 없는 15년형, 교육 건국의 꿈은 무너지고

 3.마음가짐의 대변동, 계몽운동을 넘어서

 4.도적에게 결사의 비법을 배우다

 5.이름을 구로, 호를 백범으로

 

7. 전격적인 망명과 상해 임시정부

 1.마흔 살에 가출옥하다

 2.농장 감독으로 뜻을 숨기고

 3.임시정부의 문지기가 되고 싶소

 4.사상 혼란기의 내무총장

 5.무정부 상태의 국무령

 6.혈혈단신이 되어 육십 평생을 돌아보니

 

하권

8. 대륙을 진동시킨 이봉창과 윤봉길

 1.’일본영감이봉창의 영원한 즐거움

 2.불행히 명중하지 못했으나

 3.윤봉길 의사와의 잛은 만남

 4.홍구공원의 쾌거

 

9. 피신과 유랑 속의 민족운동

 1.위기일발의 상해 탈출

 2.별장 생활과 산수 구경

 3.여뱃사공 주애보와 선상 생활

 4.장개석 면담과 낙양군관학교

 5.9년 만의 모자 상봉

 6.혁명난류의 총탄을 맞다

 

10. 전시수도 중경의 임시정부와 광복군

 1.광주로, 다시 중경으로

 2.공동묘지의 지하회장이 되신 어머님

 3.한국광북군과 국내 침공 작전

 4.왜적의 항복,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

 5.중경 생활 7년의 회고

 

11. 조국의 산천과 동지를 찾아서

 1.감격의 귀국

 2.삼의사 유골 봉안

 3.제주도와 삼남 순방

 4.서부 지역 순방

 

나의 소원

민족국가

정치 이념

내가 원하는 우리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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