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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23일 05시 44분 등록

<북리뷰 5-4주차>

 

2013. 9.22.

: 서 은 경

 

 

(No. 19)

 

김구 글,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2003)

 

 

 

 

 

 

                                                                   책표지.jpg

 

 

                                                                    @ 19977월 초판 1쇄 발행 @

 

 

 

눈 오는 벌판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찬찬히 살펴보며 걷겠습니다.

 

먼저 간 앞 발자국

발걸음 걸음

 

당신께서 새겨놓은 그 뜻 받들어

발걸음 헛되지 않는

아름다운 나라, 아름다운 후손 되겠습니다.

 

* * *

 

 

 

 

 

1. 작가 소개

 

 

 

 웃는 미소 김구.jpg

 

    백범 김구 (1876~1949)

                    -----교육가, 독립운동가, 민족의 큰 스승

 

 

 

발자취를 따라가다

 

1세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아버지 김순영과 어머니 곽낙원의 외아들로 태어나다.

18 동학에 입도, 접수가 되다. 입도 후 몇 달 만에 신도가 수천 명에 달하다.

21 치하포에서 조선국모시해에 대한 복수로 일본인 쓰치다를 죽이고 투옥되다.

29세 최준례와 결혼하다. 이후, 슬하에 22녀를 낳다.

33 황해도에 교육자들과 함께 해서교육총회를 조직, 계몽운동을 전개하다

36세 일제의 황해도 일대 민족주의자 총검거로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투옥, 5년 옥살이하다.

44 독립운동 위해 상해로 망명, 9월에 상해 임시정부의 경무국장 되다.

51세 상해 임시정부 국무령에 선출되다.

53 백범일지 집필 시작하다.

70세 일본이 전쟁에 패하여 조선이 해방되다. 194512월 상해 임시정부 인사들 귀국하다.

71 남북을 둘로 나누는,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 반대를 위한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다.

73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발표, 4월 남북 연석회의 참여하다.

74세 경교장에서 육군소위 안두희의 총에 맞아 운명하다.

 

 

 

 

에너지 넘치는 열정의 소유자 김구

 

건전지도 강하고 오래가는알카라인 건전지가 더 오랫동안 밝은 빛을 낸다. 씨앗도 쭉쟁이보다 단단한 알곡이 생명력이 강하여 좋은 열매를 맺는다. 사람도 강한 기상을 타고나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타고난 기운이 약하여 엷은 빛을 발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김구는 강한 빛이다.

그의 아버지도 삼촌도 술을 좋아하고 호방한 다혈질의 소유자였다. 아버지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능멸하는 것을 보면 친하든 친하지 않든 관계없이 참지 못하는 정의로운 분이었다. 하지만 술을 먹으면 동네 양반들을 만나는 대로 때려서 곤란한 경우도 있었다. 또한 그의 넷째 삼촌 준영은 끓어오르는 기운과 성격을 주체 못하여 동네 사람 꽤나 때리고 다니는 김구 집안의 문제아였다.

 

김구의 집안은 반역죄로 몰락한 양반 집안이다. 윗대 조상은 멸문의 화를 막기 위하여 일부러 상놈노릇을 하며 숨어 지냈다는데, 그러다가 완전히 판 박힌 상놈의 집안이 되었다. 대대로 내려오는 신분적 억울함(?)’에 더욱 화를 주체 못한 것일까?

 

어린 시절의 김구 역시 에너지가 넘쳐났다.

조금이라도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몹시 화를 내고 분을 참지 못했다. 그가 5살 때, 이유 없이 자신을 때린 양반 친구 패거리에 복수하기 위해 부엌칼을 집어 들고 그 집을 향했다는 일화는 순간 끓어올랐던 그의 분노 에너지를 짐작하고도 남는 대목이다.

 

자고로, 내 안의 에너지 조절을 잘 해야 큰 인물이 되는 법이다.

어린 김구 역시 까닥 잘못했으면 그의 아버지처럼 또는 삼촌처럼 가끔씩 난동(?)을 부리며 동네를 시끄럽게 하는 인물이 됐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행히 김구에게는 현명한 어머니가 있었다.

 

너희 집에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로 해서 생기니 너마저 술을 먹는다면,

나는 단연코 자살하더라도 그 꼴을 안 보겠다.”

 

아들이 바르게 자라기를 원했던 어머니는 아버지 기질을 빼닮은 김구에게 단호하게 잘라 말하였다. 어린 김구는 이 말을 마음 깊이 새겼고, 이후 자신의 넘치는 에너지를 상놈을 벗어나는배움의 길에 쏟는다.

 

 

 

 

확고한 신념, 강한 추진력, 자기 성찰의 힘

 

그의 어린 시절을 보면, 부당하게 누군가를 때려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 확고하다. 이러한 신념은 나는 존중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확고한 자아 형성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김구는 한학을 만나고, 동학을 만나며 배움의 깊이를 더할수록, 신분차별 없이 누구나 존중 받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보다 큰 신념을 갖게 된다. 이러한 신념은 그가 어떤 일이든 주도면밀하게 생각하고 행동하게 하는 강력한 추진력의 불쏘시개가 되었다.

 

 

 

 

강인한 체력과 인간 중심의 리더십

 

김구의 체력은 대단하다.

21세 때, 치하포에서 일본인 염탐군을 맨손으로 제압하는 기상은 타고난 신체적 힘과 자신감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2번에 걸친 5 여 년 동안의 옥살이와 가혹한 고문에도 살아남은 것을 보면 그는 심신이 모두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개인 김구에 머물지 않고 민족이라는 큰 자아 향해 나아가면서 존경받는 리더십을 보여준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강했던 김구는 다른 사람의 용기를 복 돋우고 이끌어가는 능력이 탁월했다. 18세 어린 나이에 동학에 입도하여 무리를 이끌 때는 단기간에 가장 많은 연비(신도)를 확보한 접주가 되어서 아기접주라는 별명을 얻어 전국에 이름을 날렸다.

 

그의 남다른 리더십은 그냥 생겨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디서나 눈높이를 맞추어 사람과 교감하며 배우고 또 배운다. 감옥에서 만난 도적의 우두머리, 함께 뜻을 하는 동지들, 여행 도중 오며 가며 만나는 사람 등등 누구를 만나더라도 친구가 되어 그의 면면을 살폈다. 그리고 그의 능력과 기질을 꿰뚫어 보며 배울 점을 취하고 또한 그에게 필요한 것을 기꺼이 도와주었다.

 

김구 자신도 말했듯이 누군가를 한번 믿으면 그냥 믿고 나가는 기질이 그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그 때문에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어려운 위기를 몇 번이고 겪었지만, 그의 인간에 대한 애정과 믿음은 존경받는리더십의 원천이 아닐까?

 

 

                                                                             * * *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사진3.]

1930년대 전후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힘이 되어 주었던 미주 동포들

이들은 1940년 한국독립당 하와이지부의 중심이 되었다.

 

---> 상하이 임시정부는 미주 동포들의 노력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미주동포들의 미국 이민사는 정말로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가슴 아리는 이야기다...... 나는 김구의 백범일지를 읽으면서 독립운동의 젖줄이 되었던 미주 동포들의 이야기가 내 입 안에 맴맴 돈다.

 

100년 전 겔릭호의 고동소리와 함께 한인의 미국 이민사가 시작된다.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서 거의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을 한 이주 한인들 중 일부는 특유의 부지런함과 끈기, 그리고 목숨을 건 싸움 덕분에 미국 캘리포니아 중가주 지역 다뉴바에 농작지를 하와이의 농장주로부터 얻게 된다. 다뉴바 리들리 지역은 포토를 비롯해 복숭아, 오렌지, 사과, 수방 등 과일 생산지로 유명하다. 1920년 대부터 이곳에서는 한인 400~500명이 새로운 한인사회를 개척한다.

 

상하이 임시정부에 거금의 독립운동자금을 대었다는 김형순’, ‘김호.

이들은 이 당시 재미 한인 최초로 백만장자 대열에 오른 주인공이다.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김구와 그들 사이에는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을까? <백범일지-하권>도 미국 한인들을 위해 썼다고 김구가 말하지 않았던가? 독립운동 이야기를 미국 한인의 시각에서 보면서 한번 다뤄보고 싶다.

 

2012년 미국 캘리포니아 농경지, 다뉴바 지역 여행 중에 나는 우연히 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여행을 돌아온 후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2007, ‘현실문화연구에서 나온 <100년을 울린 겔릭호의 고동소리-미주한인이민사100년의 사진기록>이라는 자료에 그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두 사람은 다뉴바 리들리 지역에 김형제상회(Kim Brothers Company)를 세운다.

과일농장과 더불어, 농산물 운송 및 묘목사업을 하면서 세계 최초로 복숭아 통조림-넥타인(Nectarin) 개발에 성공한다. 이들은 곧장 통조림 넥타 특허를 내고 미국 전역에 판매를 하는데... 한인 노동자 200여 명을 고용할 만큼 김형제상회는 캘리포니아 일대에서 가장 큰 농장과 통조림 넥타 공장을 소유한다.

 

김형순, 김호는 또 다른 한인교포인 김용중, 김원용 등과 함께 리들리 그룹(Reedly Group)이라 불리며, 국민회의 중도개혁세력으로 자리 잡는다. 리들이 그룹은 막강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미국 한인사회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한편, 재미동포들과 유학생을 위한 육성사업과 문화사업에도 힘쓴다.

 

또한 이 지역에서 벼농사의 왕라 불렸던 또 다른 대부호 김종림윌로스 한인 전투비행 양성학교설립에 재정적 뒷받침을 하였다. 이곳 윌로스 한인 전투비행 양성학교 졸업생이 궁금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오페라를 작곡한 독립운동가 김형석할아버지가 여기를 나오시지 않았나 짐작한다. 더 조사하여 알아보고 싶다. 형석 할아버지의 아내가 아직 살아계시니.... 한번 꼭 만나 뵙고 싶다. 그리고 김구의 둘째 아들 신도 미국의 비행 장교였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비행을 배운 것일까?

 

독립운동과 관련한 임시정부의 공군들 그리고 넥타 개발한 김형순씨, 나의 파이프 할아버지 김형석 할아버지의 빛을 보지 못한 이야기를 꼭 발굴해서 잊혀지지 않게 기록하고 싶다. 그들은 정말로 배짱 두둑하고 독립정신 투철했으며 스케일 큰 우리의 조상들이다.

 

이미 잘 알려진 김구뿐 아니라 감추어진 그들의 이야기를 찾아내고 발굴하고 갈고 닦아서 세상에 드러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조선족 강용권 선생도, 일본인 사토 쇼닌도, 재일교포 김정미씨도.

김구 만큼이나 소중한 사람들. 고마운 사람들....

 

조금은 평범한 사람들이 지켜낸 역사 이야기는 어떨까? 그래 평범하지 않는가? 평범에서 비범으로 가는 길은 절실함이다.... 모두가 평범에서 시작한다.

 

[사진6]

19451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환국 기념

 

[사진8]

반탁 집회에서 연설하는 백범

---> 이렇게 많은 군중이 모였고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는데, 자기 이익에만 급급한 극우들의 모략으로 김구선생은 암살당하고 우리나라는 둘로 나눠지고..... 지금의 정치도 그때와 별만 다르지 않다. 역사는 반복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사진11]

1947320일 백범은 건국운동의 주력이 될 인재 양성을 위해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설립하였다.

 

[사진12]

1949127일 금호동에 세운 백범학원 개원식

---> 단체사진, 100 여 명의 사람들. 앞쪽에 초등학생 정도의 아이들이 3줄로 조르르 앉아 있다. 아이들 수가 한 60여 명 되려나? 독립 운동가들의 특징은 고국에 돌아와서 바로 학교를 세워 교육에 힘썼다는 것이다.

 

부산 고향에 돌아온 독립운동가 한형석 할아버지도 없는 돈을 끌어 모아서 아이들을 위한 음악학교 비슷한 곳을 만들었다. 역사의 페이지에 기록되어 있진 않지만 김구선생 만큼 그 역시 대단한 활약을 했던 인물이었고 그는 한국보다 중국에서 훨씬 더 유명한 오페라 작곡가이자 배우이자 팔로군/대한독립군이었다.

 

그에 관한 기록이 얼마나 남아있을까.... 독립운동을 하고 돌아온 이들에 의해 세워진 학교, 유치원 등등 의미 있는 모든 곳들은 발굴되어야 한다. 역사학자들은 발 벗고 나서야 하는데.... 엉덩이가 무거운 그들.... 그리고 식민사관을 뒷받침하는 뉴 라이트가 판을 치는 지금의 세태는 정말 가슴이 무너져 내릴 만큼 속이 상하고 슬프다. 학자가 되었던 그 누가 되었던 발로 뛰고 취재하고 기록해야 한다. 이미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고... 아직 생존한 분들이 있을 때 사료를 발굴 해야 한다.

 

[사진13]-김구의 글씨

눈 오는 벌판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발걸음 함부로 하지 말지어다

오늘 내가 남긴 자국은

드디어 뒷사람의 길이 되느니

 

분단 전후 백범이 가장 즐겨 썼던 서산대사의 선시(禪詩).

눈보라치는 조국의 위기에 당면하여 일신의 안위나 현실 정치의 이해관계보다

후손들에게 남겨줄 역사를 강조하였다.

----> 함께 수업하는 초등 6학년 아이가 백범일지를 읽고 가장 기억 남는 문장이라며 뽑아서 내게 들려준 것이 바로 이 선시다. 그 순간, 좀 지루하고 재미없을 수 있는 백범일지를, 아이가 의미 있게 읽음에 정말 감사했다. 김구선생의 바람대로 백범일지는 우리 아이들에게 눈 속의 발자국이 되어 선명하게 남아있다. 눈 속의 발자국..... 어떤 발자국을 찍을 것인가... 부끄럽지 않은.. 한 자국이라도.

 

 

[사진14]-김구의 글씨

맑은 창공 밝은 달 아래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어도

불나비는 유독 촛불만을 쫓는다.

맑은 물 푸른 숲에 먹을 것 가득하건만

수리는 유난히도 썩은 쥐를 즐긴다.

! 세상에 불나비와 수리 아닌 자

그 얼마나 될 것인인고?

 

백범이 생을 마치는 1949년에 즐겨 쓴 시로,

불나비와 같이 덧없는 영화를 쫓거나 수리와 같이 눈앞의 이익만 탐하는 무리

질타하는 내용이다.

 

[사진15]

194841938선에 선 백범

---> 내 가슴에 남는 역사의 한 장면, 역사수업할 때 이 장면을 묘사하였지.....통일은 언제쯤.. .

 

[사진19]-<백범일지>원본

백범은 1928~1929년 상권을, 1942년 하권을 집필하고 이후 앞부분을 다시 정비하였다.

 

 

 

교감원칙

[5]

1. 현대성의 원칙

일반 독자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국한문 혼용의 어렵고 난삽한 고문을 쉬운 현대문으로 교열하였다.

2. 순수성의 원칙

원본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것, 즉 원문의 감동과 내용을 털끝만큼이라도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현대성의 원칙 이상으로 중요하게 고려하였다. 백범의 호흡이 긴 문체는 살리고.......

3.비평성의 원칙

원본의 한계를 수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서회고록 등 여러 자료들을 광범위하게 사용하여 원문의 내용을 보완하고 비평하였다.

 4. 현장성의 원칙

여리 가지 시작 매체를 활용, 현장성을 더욱 높혔다.

5. 보완성의 원칙

원자료의 추적을 통해 정리된 새로운 내용을 기초로 하여 <백범 연보>를 전면적으로 교정하였으며, <인물 찾아보기> 또한 전면적으로 정비하였다.

---> 주해를 한 도진순 선생은 참으로 꼼꼼하다. 역사사료, 전기, 자서전 따위를 정리할 때 참고할 만한 원칙이다. 나도 어떤 작업 글을 쓸 때, 이런 원칙을 정리하여 앞에 넣어야 겠다.

 

 

일러두기

 

백범 출간사

[13]

어린 두 아들에게 나의 지난 일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에서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을 상편이다.

 

하편........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를 염두에 두고, 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나의 경륜과 소감을 알리려고 쓴 것이다.

 

우리의 완전한 독립국가가 선 뒤 이것이 지나간 이야기로 동포(미주/하와이)들의 눈에 비춰지기를 원하였다.

----> 그런데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고국에 이 내용을 출판하여 고국의 동포 앞에 내 놓게 되었으니..... 독립운동에 큰 힘이 되었던 미주, 하와이 동포.... 그 때문인가? 김구선생이 어떤 계기로 미주 동포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쓰게 된 것일까?

 

[14]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과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뢰하고 저희끼리는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우리의 서울은 될 수 없는 것이요. 또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만일 그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예전 동경을 우리 서울로 하자는 자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최광옥, 안창호, 양기탁, 현익철, 이동녕, 차이석, 이들은 모두 이제 없다.,

무릇 난 자는 다 죽는 것이니 할 수 없는 일이거니와, 개인이 나고 죽는 중에도 민족의 생명은 늘 있고 늘 젊은 것이다.

[15]

우리는 우리의 시체로 성벽을 삼아서 우리의 독립을 지키고, 우리의 시체로 발등상을 삼아서 우리의 자손을 높이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서 우리의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나보다 앞서 세상을 떠나간 동지들이 다 이 일을 하고 간 것을, 나는 만족하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 비록 늙었으나 이 몸뚱이를 헛되이 썩히지 아니할 것이다.

 

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 삼천만이 저마다 이 이치를 깨달아 이대로 행한다면, 우리나라가 독립이 아니 될 수도 없고, 또 좋은 나라 큰 나라로 이 나라를 보전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나 김구가 평생에 생각하고 행한 일이 이것이다.

 

나는 내가 못난 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해온 것이다. 이것이 내 생애요. 내 생애의 기록이 이 책이다.

 

내가 이 책을 발행하는 데 동의한 것은 내가 잘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못난 한 사람이 민족의 한 분자로 살아간 기록으로서이다. 백범(白凡)이라는 내 호가 이것을 의미한다. 내가 만일 민족독립운동에 조금이라도 공헌한 것이 있다면, 그만한 것은 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동시에 그보다도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저마다 이 나라를 제 나라로 알고 평생 이 나라를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니, 나는 이러한 뜻을 가진 동포에게 이 범인의 자서전을 보내는 것이다.

 

단군기원 사천이백팔십년 십일월 십오일(1947.11.15) 개천절날

 

 

 

상권

 

신 두 아들에게

[19]

그간 내가 겪어온 바를 간략히 적어 몇몇 동지에게 맡겨 너희들이 아비의 경력을 알고 싶어할 정도로 성장하거든 보여주라고 부탁하였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너희들 또한 대한민국의 한 사람이니, 동서고금의 많은 위인 중 가장 숭배할 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배우고 본받게 하려는 것이다.

 

 

1. 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

 

1) 조상과 가정

[23]

우리 집안의 내력을 살펴보면 문사(文士)도 없진 않았으나 높이 떨친 경우는 찾아볼 수 없고 대체로 불평분자가 많았다. 내 증조부는 가짜 어사질로 체포되어 해주 관아에 구속되었다가, 어느 서울 양반의 청탁 편지로 겨우 형벌을 면하였다고 한다.

 

아버지님은 네 형제 중 둘째로 가정 형편이 반한하여 장가들지 못하고 노총각으로 지내다가 스물네 살에 삼각혼(三角婚)이라는 괴이한 혼인제도로 결혼하였다. 삼각혼이란 세 성()이 혼기의 자녀를 서로 교환하는 제도.

 

8) 교환혼의 일종. 세 집안이 딸을 바꾸는 것. 즉 갑이 을에게, 을은 병에게, 병은 갑에게 딸을 주는 것이다. 혼비를 절약하고자 하는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크며 주로 하층사회의 혼인 풍속이다. ‘물레혼인’ ‘물레바꿈’ ‘옷혼인이라고도 한다.

----> 교환혼을 하면 왜 혼비가 절약 되는 거지? 그 제도가 궁금하다. 이 제도의 문제는 뭔가? 괴이하다는 이유는? 예전에는 애정없이 그냥 부모가 정해주면 결혼하지 않았나?

 

...부모님 내외의 정분은 좋으셨다.

 

[24]

어머님께서는 푸른 밤송이에서 크고 붉은 밤 한 개를 얻어 깊이 감추어 둔 것 나의 태몽이라고 늘 말씀하셨다.

 

 

2) 난산의 개구쟁이

 

...나의 탄생은 유례없는 난산이었다.

상황이 자못 황급해지자 집안 어른들은 아버님께 소길마를 머리에 쓰고 지붕 용마루로 올라가 소 울음소리를 내라고 했지만 아버님은 선뜻 따르지 않았다. 할아버지 형제분들이 다시 호통을 쳐서 아버님이 시키는 대로 하고 난 후에야 내가 태어났다고 한다.

 

10) 난산의 경우 산모와 고통을 나누기 위한 의식의 하나. 평안, 해서 지방에서 볼 수 있다.

---> 아름다운 의식이네. 그런데 왜 소 울음소리를 냈을까? 소가 의미하는 것은?

 

우리 집안이 극히 빈곤한데 나이 겨우 열일곱에 아이를 얻으니, 어머님은 항상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한탄하셨다 한다.

 

[25]

하루는 그 집(동네 신풍 이생원 댁) 사랑방에서 놀고 있는데 그 집 아이들이 해줏놈 때려주자고 공모하여 이유 없이 매질하였다. 나는 곧 집으로 돌아와 부엌칼을 가지고 아이들을 다 찔러 죽일 결심을 하고 그 집으로 달려갔다.

---> 분노.... 분노를 자제하지 못하는...? 아니, 분노 에너지를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

[26]

(돈 훔쳐 떡 사먹으러 간 사건)

아버님은 한마디 말도 없이 발랫줄로 나를 꽁꽁 동여 들보에 달아매고 매질하기 시작했다.

.....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재종조부 장현 할아버지......“어린 것을 그다지 무지하게 때리느냐”.....매를 빼앗아 아버지를 한참동안 때리셨다.

 

나는 장련 할아버지가 고마웠고, 아버님이 매 맞으신 것이 퍽 시원하고 고소하였다. 할아버지는 나를 등에 업고 들로 가서 수박과 참외를 실컷 사 먹이고, 할아버니 댁으로 업고 가셨다.

----> 아이에게도 인권이 있지만 그 시절에는 어린이 인권이라는 개념도 없었지. 어린이 김구의 생생한 심정이 느껴진다. 펄펄 살아있는 어린아이. 착하게 죽어사는 아이보다 펄펄 살아있는 아이가 일을 내어도 크게 낸다. 어린 시절 이야기는 누구의 이야기나 다 재미있다. 한 마을이고 종가의 모든 식구들이 함께 모여 사는 동네.... 모두가 서씨이거나 김씨인 동네.... 정겨운 풍경이다.

 

26) 백범은 가난하지만 사촌들이 일찍 죽어 가문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나중에 치하포 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때 백범과 그의 부모는 ‘7대 독자라고 주장하였다.

 

[27]

아버님의 학식은 겨우 이름 석 자 쓸 줄 아는 정도였지만, 기골은 준수하고 성격이 호방하셨다. 음주는 한량이 없고 취하시면 양반 강, 이씨를 만나는 대로 때려, 1년에도 여러 번 해주 관아에 구속되는 소동을 일으키셨다.

아버님이 사람을 잘 때리셨던 것은 술기운 때문만은 아니고 순전히 불평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버님은 마치 <수호지>에 나오는 영웅처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능멸하는 것을 보면 친하고 친하지 않음에 관계없이 참지 못하는 불 같은 성격이셨다. 이로 인해 인근 상놈들은 다 아버님을 경외하고 양반들은 피하였다.

 

[29]

....아버님과 넷째 준영 삼촌은 특이하셨다.

 

....종증조부 주최로 가족회의를 열어 앉은뱅이로 만들기로 결의하고, 준영 삼촌의 발뒤꿈치를 잘랐다.

 

21) 발꿈치 힘줄을 자르는 고문을 단근형(斷筋刑)이라고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러한 추태는 상놈의 본색이요 행위라 하겠다. 그때 어머님은 나에게

너희 집에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로 해서 생기니 너마저 술을 먹는다면, 나는 단연코 자살하더라도 그 꼴을 안 보겠다.”

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겼다.

---> 대단한 집안이다. 어머니의 말 덕분에 김구는 분노 에너지를 바른 길로 잘 사용하지 않았나 싶다.

 

 

3) 궁핍한 배움길

[30]

그 사람들은 어찌하여 양반이 되었고, 우리 집은 어찌하여 상놈이 되었습니까?”........

진사는 어찌하여 되는가요?”......

진사 급제는 학문을 연마하여 큰 선비가 되면 과거 보아 되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들은 후부터 글공부할 마음이 간절하여 아버님께 어서 서당에 보내 달라고 졸랐다.

 

결국 아버님은 문중과 인근 상놈 친구의 아동을 몇 명 모아 서당을 새로 하나 만드셨다.

.....이생원을 선생으로 모셔왔다. 그분은 양반이지만 글이 넉넉지 못하여 양반의 선생으로 고용하는 사람이 없어 우리 같은 상놈의 선생이 된 것이다.

---> 영화의 한 장면으로 만들면 어떨까? 코믹 버전. 이생원의 성격과 생김새... 그리고 글공부 열의가 투철한 김구 그리고 그밖의 상놈 아이들.... 상놈 서당가기....

[31]

이 때 내 나이 열두 살(1887)이었다. 나는 개학하던 첫날 마상봉한식’(馬上逢寒食)이란 다섯 글자를 배웠다.

 

....누구보다 먼저 선생님 방에 가서 글을 배우고, 밥구럭을 메고 멀리서 오는 동무들을 내가 가르쳐 주었다........배운 것을 외우는 시험에서는 늘 내가 최우등이었다.

 

[33]

그러나 <통감-(통감절요)>, <사략-(십팔사략)>을 읽을 때

황후장상의 씨앗이 어찌 따로 있으리오라던 진증의 말, 칼을 뽑아 뱀을 베었다는 유방의 행동, “빨래하는 부인에게 밥을 얻어먹었다는 한신의 사적(사기-회음후열전) 등을 볼 때 나도 모르게 양어깨가 들썩거렸다.

 

 

 

2. 시련의 사회 진출

 

1) 과거 낙방

[39]

과거장에서 얻은 비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관상서를 공부했는데 오히려 과거장 이상의 비관에 빠져버렸다. 짐승과 같이 살기 위해 산다면 모르지만 인간으로서 세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그런데 <상서>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相好不如身好)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身好不如心好)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종전에 공부 잘하여 과거하고 벼슬하여 천한 신세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은 순전히 허영이고 망상이요, 마음 좋은 사람이 취할 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마음 좋지 못한 사람이 마음 좋은 사람으로 되는 방법이 있는가 스스로 물어보니 역시 막연하였다.

 

2) 동학의 세계로

[43]

김창수(동학 입도하면서 아명, ‘창암김창수로 개명)”가 한 길 이상 공중에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황해도, 평안도의 동학당 중 나이 어린 자로 가장 많은 연비를 가졌기 때문에 별명이 아기 접주였다.

 

3) 팔봉 접주

 

4) 청계동 안진사

[57]

(사진)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 안태훈 진사.

동학 접주로서 피신중인 백범을 청계동에 머물게 하고 극진히 대우했다.

 

진사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맏아들은 중근으로 당년 열여섯에 상투를 틀었고 자색 명주수건으로 머리를 도이고서 돔방총을 노인당과 산상동으로 날마다 사냥을 다녔다.

 

75) 안진사는 1884년 갑신정변 당시 경성에 머물면서 박영효가 모집한 해외파견 유학생 70명에 선발되었다. 그런데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박영효가 일본으로 망명하자 안태훈도 몸을 피해 해주로 내려왔다. 안태훈은 출세의 길을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가 구름과 달과 더불어 살기로 결심하고, 아버지 인수의 승낙을 받아 가산을 정리하고 70~80명 대가족을 이끌고 청계동으로 피신하였다. 그때 안중근의 나이는 예닐곱 살이었다.

 

5) 스승 고능선 (주목절)

[60]

고선생 왈

자네가 매일 안진사 사랑에 다니며 놀지만, 내가 보기에는 자네에게 절실히 유익한 정신 수양에는 별 도움이 없을 듯하니, 매일 내 사랑에 와서 나와 같이 세상사도 논하고 학문도 토론함이 어떻겠나?”

 

[61]

당시 나의 심리 상태는 매우 절박하였다. 먼저 과거장에서 비관적인 생각을 품었다가 희망을 관상서 공부로 옮겼고, 나 자신의 관상이 너무도 못생긴 것을 슬퍼하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리라는 결심을 했었다. 그러나 마음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 또한 묘연하던 차에 동학당의 수양을 받아 신국가 신국민을 꿈꾸었으나, 이제 와서 보면 그도 역시 바람 잡듯 헛된 일이었다. 이제 패전한 장수의 신세가 되어 안진사의 후의를 입어 생명만은 안전하게 지키게 되었지만, 장래를 생각하면 과연 어떤 곳에다 발을 디뎌야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던 차였다.

---> 이 장의 제목이 [시련의 사회 진출]이다. 방황하며 자신의 꿈을 찾아 좌충우돌 모험을 떠나온 청년 김구의 고뇌가 엿보인다.

 

[62]

김구왈

선생님.....저는 불과 스무 살에 일생의 진로에 대하여 스스로를 속이고 그츠쳐 허다한 실패를 경험한바 민만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선생 왈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번 길을 잘못 들어서서 실패나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 그 마음 변치 말고 끊임없이 고치고 나아가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지금은 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63]

아무리 발군의 뛰어난 재주와 능력 있는 자라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재능이 도리어 화근이 된다는 것과, 사람의 처세는 마땅히 의리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일을 할 때에는 판단실행계속의 세 단계로 사업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 등, 여러 가자 좋은 말씀을 들려주셨다.

 

고선생은 경서를 차례로 가르쳐 주는 것보다 나의 정신과 재질을 보아 떨어진 곳을 기워주고 빈 구석을 채워주는 구전심수의 교법이 가장 빠른 길이라 여기신듯하였다.

 

85) 구심심수(口傳心授)교법:

문헌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절실히 필요한 바를 파악하여 말과 마음으로 전수하여 주는 것을 말한다.

 

고선생이 나를 겪어보시고 가장 결점으로 생각한 점은 과단력이 부족한 점인 듯하였다. 항상 무슨 일이나 밝히 보고 잘 판단하여 놓고도 실행의 첫 출발점이 되는 과단성이 없으면 다 쓸데없다는 말을 하시면서

---> 김구의 산중 생활은 일종의 휴지기로 김구가 뜻을 세우는데 도움이 되었다. 스승을 만나고 자신을 알아주는 안진사를 만나고.... 젊은 시절 좋은 인연이다.

 

[65]

선생 왈

“....나라가 망하는 데도 신성하게 망하는 것과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더럽게 망하게 되겠네.”

 

“......지금은 누가 그런 뜻을 가진 사람인지 알 수 없으니 자네 한 사람이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유익하겠다 싶으면 그대로 실행하여 보는 것 뿐이지.“

 

 

3. 질풍노도의 청년기

 

1) 북행 견문과 청국 시찰 (주목절)

[74]

(참빗장사, 김형진이랑 떠난 통화현성 등 구국의 여행 소감)

이런 곳들을 두루 다니는 중에 가장 밉게 보이는 것은 호통사들이었다.

이곳에 사는 우리 동포들은 대개 갑오년 난리(청일전쟁)을 피해 낯설고 물설은 외국으로 넘어와 중국사람들이 살지 않는 산속 험악한 곳만 택해서 화전을 일구고 조와 강냉이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호통사들은 중국어 몇 마디 배워가지고 중국사람에게 붙어서 동포들에게 별별 무리한 학대를 다하는데.......

[75]

곳곳에 두세 집 내지 여남은 집까지 모여 산림을 개척하고 오막살이를 짓고 거주하는데, 인심이 극히 순후하여 거기 말로 앞대 나그네(고국인)’가 왔다 하면 무척 반가워들 하였다.

 

지세로 말하면 파저강 좌우에 설인귀, 연개소문의 관루 흔적이 남아 있고, 도처에 천연의 요새가 있었다. 그 천연 요새들은 한 사람이 막으면 만 사람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므로 여진, , , 고구려의 발원지라 한다.

---> 몇 해 전 백두산&고구려 유적지 답사를 갔을 때 통화에서 잠을 잤다. 고구려와 발해의 땅. 그곳에는 우리 동포, 조선족이 살고 있었다.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우리의 유적들이 중국의 유적, 역사로 둔갑하는 현실에 분노를 감출 수가 없었다. 어찌할 것인가? 중국은 몽골, 원나라의 역사까지도 자기네 역사로 바꾸려 한다는데.....

 

2) 김이언 의병

3) 인연 없는 스승의 손자사위

 

4) 복수 의거, 치하포 사건

[99]

오늘 새벽 치하포 나루에 어떤 장사가 나타나서 일본사람을 한 주먹으로 때려 죽였다지.”

그래, 그 장사하고 같이 용강에서부터 배를 타고 왔는데 사람을 만났는데, 나이 스물도 채 못되어 보이는 소년이더라는군. 강 위로 빙산이 몰려와서 배가 그 사이에 끼여 다 죽게 되었는데, 그 소년 장사가 큰 빙산을 손으로 밀어내고 배에 탄 사람들을 다 살렸다던데. 게다가 그 장사는 밥 일곱 그릇을 눈 깜짝할 사이에 다 먹더라는걸.”

----> 청일전쟁에, 단발령에... 국치를 당하는 조선. 아마도 조선 백성은 영웅이 나타나길 기대했을 것이다. 김구의 행동은 영웅적인 행위였다. 그래서 조금씩 과장되어 영웅담이 되어가고...

 

5) 첫 번째 투옥

[106]

부모와 자녀는 천 번을 태어나고 백 겁이 지나도록 은혜와 사랑을 끼치며 사는 인연이라고 한 말이 헛말이 아니었다.

 

6) 역사적인 심문

[113]

이제 왜놈이 국모를 살해하였으니 온 나라 백성에게 크나큰 대치욕이오. 뿐 아니라 왜놈의 독해는 궐내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오. 당신의 아들들과 딸들이 필경은 왜놈의 손에 다 죽을 터이니 나를 본받아서 왜놈을 보는 대로 만나는 대로 다 죽입시다.

 

7) 사형수의 옥중생활

[115]

1. 독서

신서적을 보고 깨달은 것......안진사가 양학을 한다고 하여 절교한 일이 그리 잘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 교육

3. 대서

4. 성악

[119]

내게 음식을 얻어먹던 도둑 죄수들과 내게 글을 배우던 감옥 제자들, 그리고 내게 소송에 대한 지도를 받던 여러 죄수들이 얼마나 애통해 하며 울던지......

 

[121]

감리서 주사 왈

“.....사람들이 돈을 가지고 오면 거기서 모인 돈으로 한 사람의 몸값을 쳐주되, 부족한 액수는 32객주가 담당하고 김창수를 살리자고까지 하였소. 그러나 지금은 천행으로 살았고, 아마 며칠이 못 되어 궐내에서 은명이 계실 터이니 아무 염려 마시고 계시오.“

 

밤에 옥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 벌벌 떨던 동료죄수들은 이 소식을 듣고서 너무 좋아서 죽을 지경인 모양이었다.

 

산골방맹이로 차꼬 등을 두들기며 온갖 노래를 다 부르고, 푸른 바지저고리 차림으로 춤도 추고 우스운 짓도 하며 하루밤을 지내는 양이 마치 청의배우들의 연극장과 같았다.

----> 감옥에서도 최선을 다하며 타인을 위해 힘쓴 김구의 열정과 사람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완전히 영화 쇼생크 탈출의 인간적인 주인공 느낌..

 

[122]

사형 정지 이전에는 순전히 나의 젊은 의기를 애석하게 여기고 뜨겁게 동정하던 사람들이 나를 찾아왔었지만, 이번에는 내가 머지않아 대군주의 소명을 입어 영귀하게 될 줄 알고, 그때 세도를 얻으면 다른 수가 생기리라 생각하고 아부하는 사람도 있었다.

----> 김구는 사람 보는 눈 남다르다. 아부하는 사람, 의로운 사람 등등 꿰뚫어보는 지혜가 있다.

 

8) 파옥

[128]

그 때부터는 부지불식간에 내 마음이 요동을 쳤다. ‘나를 무한정 놓아주지 않는데도 옥에서 죽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당초에 내가 왜놈을 죽인 것이 우리 국법에 범죄로 인정된 것을 아니었다. 왜놈을 죽이고 내가 죽어도 한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내 힘이 부족해서였다. 왜놈에게 죽든지, 충의를 몰라주는 조선 관리들에게 죄인으로 몰려 죽든지 한이 없다고 결심했던 것이다..그런데 나를 죽이려 애쓰는 놈은 왜구들뿐인데, 내가 그놈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옥에서 죽는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지 않겠는가?

 

[131]

(조덕근 등 죄수들을 데리고 가며)

사람이 현인군자에게 죄인이 되어도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부끄러운 마음 견대기 어렵거든, 하물며 저와 같이 더러운 죄인의 죄인이 되고서야 죽을 때까지 그 부끄러움을 어찌 견디랴?

 

[132]

약 한 길쯤 되는 몽둥이를 가져와 몸을 솟구쳐 담 꼭대기를 손으로 잡고 내리 뛰었다. 그때는 최후 결심을 한 때였으므로 누구든지 내 갈 길을 방해하는 자가 있으면 결단을 내버릴 마음으로 쇠창을 손에 들고 정문이 삼문으로 바로 나갔다.

 

 

4. 방랑과 모색 (주목장)

 

1) 서울로 도피

[136]

인천감옥 특별방에서 2년 동안 지내던 연극의 1막이 내리고 지금은 방앗간 잠으로 제2막이 열리는구나

 

나는 흥겨운 마음이 생겼으나, 장량이 흙다리 위를 조용히 걸었던 일화에 비하면 보잘것없다고 생각을 하고 미친 사람 모양으로 욕설을 함부로 하다가 잠이 들었다..백범을 사람들이 거지 취급 하지 않는 데에 흥겨운 마음이 생겼으나, 이내 자신의 거지 흉내가 장량에 비하면 어림없다고 반성하고 일부러 미친 흉내를 내었다는 이야기이다.

 

[139]

(조덕근 집에 찾아갔으나...안면 피하는 조덕근)

이미 출옥한 바에는 다시 보아 이익이 없다고 생각하고 잡아떼는 수작이었다. 새삼 내가 퍽도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그 사람의 행실인 즉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2) 삼남견문록

3) 출세간의 길(주목절)

[153]

하루밤 사이 청정법계에서 만 가지 생각이 다 재로 돌아가버린 듯한 터였다. 나는 중이 되기로 승낙하였다.

 

[154]

중이 되려면 제일 먼저 자기 마음을 낮추어야 한다고 하며 사람에게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금수나 곤충에게까지 자기 마음을 낮추지 않으면 지옥의 고통을 받는다고 하였다.

 

전날밤 나를 찾아와 자기 상좌가 되어 달라고 할 때에는 지극히 공손하던 하은당(스님)부터

, 원종아를 기탄없이 부르고, “생긴 것이 미련스러워서 고명한 중은 되지 못하겠다. 얼굴이 어쩌면 저다지도 밉게 생겼을까? 어서 나가서 물도 긷고 나무도 쪼개거라한다.

 

[155]

나는 깜짝 놀랐다. 망명객이 되어 사방을 떠돌아다니던 때에도 내게는 영웅심과 공명심이 있었다. 평생의 한이던 상농의 껍질을 벗고, 평등하기보다는 월등한 양반이 되어 평범한 양반에게 당해온 오랜 원한을 같고자 하는 생각이 가슴 속에 가득하였다.

 

그런데 중놈이 되고 보니, 이상과 같은 생각은 허영과 야욕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야말로 불씨(佛氏) 문중에서는 추호도 용납할 수 없는 악마와 같은 생각이었다.

 

하도 많이 돌아다녔더니 나중에는 별세계 생활을 다 하겠다.’

이런 생각에 혼자서 웃다가 탄식하다가 하였지만 순종하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156]

용담스님도 하은당스님의 가풍이 괴상한 것을 알고서 글을 가르치다가 종종 위로를 하였다.

견월망지’(見月忘指)의 오묘한 이치를 말하고, 칼날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참을 인’()자의 해석을 하여 주었다.

---> 이 말이 김구에게 참을 인을 가르쳐 주었다.

 

65) 달을 보되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생각지 말라. 어떤 목적을 세웠으면 그 목적을 이루는 동안 생겨나기 마련인 자질구레한 일에 얽매이지 말라는 뜻.

---> 그런데 이 말은 어떤 측면에서는 목표지향주의, 과정 무시다. 목표 이루었을 때의 나에게 올 결과를 생각하면서 과정 속 순간 선택에 신중하며 과정을 즐기면 목표를 이루게 되는데....나는 이 런 과정이 더 좋다.

 

그러나 나는 풍진 세상과의 인연을 다 끊지 못하고 있었다. 망명객의 임시 은신책으로든 어떻든 간에, 오직 청정적멸의 도법에만 일생을 희생할 마음은 생기지 아니하였다.

 

4) 장발의 걸시승

[165]

아버님은 내게 원대한 뜻이 있음을 짐작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는 창수가 장성하였으니 스스로 알아서 할 수 밖에 없다.”

 

작은 아버지(준영)의 관찰(글공부 시킨 죄)이 사실은 바로 본 것이었다. 만일 긍를 몰랐다면 동학두령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인천 사건도 없었을 것이다.

---> 교육 그대를 자유롭게 할 지니....!

 

5) 동지를 찾아서(주목절-아름다운 만남/같은 뜻의 사람들)

[166]

강화에 도착하여 김경득의 집을 찾아......“형님이 집을 나간지 벌써 3,4년이 지났는데.....소식 한 장 없고....”

 

내가 형님의 소식을 모르고 가기가 매우 섭섭하니, 사랑에서 윤태에게 글자나 가르치고 지내면서 형님 소식을 같이 기다리면 어떻겠는가?”

 

[167]

한 달이 못 되어 그 크나큰 세 칸 사랑에 30여 명의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나도 무한한 흥미를 가지고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171]

군자는 알고도 속아 줄 수 있다는 말과 같이 내가 이만치 알고도 끝까지 피하거나 종적을 감춘다면 그 역시 의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김구의 성품이 드러난다. 정말 군자다. 실천하는 영혼.

 

[173]

유완무 왈 to 김구

뱀의 꼬리를 붙잡고 올라가면 용의 머리를 볼터이지요.”

 

[174]

창수라는 이름이 쓰기 매우 불편하다 하여 성태영과 유완무가 이름을 고쳐 지어주었다. 이름은 김구(金龜)라고 하고, 호는 연하(蓮下), 자는 연상(蓮上)이라고 고쳐서 행세하기로 하였다.

 

6) 스승과의 논쟁

[180]

(고스승과) 이야기 하는 동안 자연히 신구(新舊)의 충돌이 생겼다.

 

그때 올렸던 절이 마지막 이별이 될 줄이야. 그 후에 전하여 들으니, 고선생은 제천 동문의 집에서 객사하였다 한다.

 

, 슬프도다! 이 말을 기록하는 오늘까지 30여 년 동안 내 마음을 쓰거나 일을 할 때, 만에 하나라도 아름다이 여기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당시 청계동에서 고선생이 나를 특히 사랑하시고 심혈을 다 기울여 구전심수하시던 훈육의 덕일 것이다.

 

7) 부친상, 미혼처의 죽음

[181]

아버님은 열나흘 동안 내 무릎을 베고 계시다가 경자년(25)129. 애써 내 손을 잡으시던 힘이 풀리더니 먼 나라로 떠나셨다

 

나는 허벅지 살을 베어내기로 결심하고, 어머님이 계시지 않을 때를 틈타 왼쪽 허벅지에서 살조각 한 점을 떼어내었다. 고기는 불에 구워 약이라 아뢰고 잡수시게 하고, 흐르는 피는 드시게 하였다.

 

손가락이나 허벅지를 베어내는 것은 진정한 효자나 하는 것이지, 나와 같은 불효자가 어찌 효자가 되랴.’

 

[184]

지금 약혼을 한다 하여도 내가 탈상 후 결혼할 것이니, 그 동안 낭자가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한문 공부를 정성껏 한다는 조건입니다.“

 

...지금 세상에는 여자라도 무식해서는 사회에 용납될 수 없고, 여자 공부는 20세 이내가 적당한데 1년이라도 허송하는 것은 안된다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나는 곧 <여자독본>(女子讀本)과 같은 책자를 대강 만들고 지필묵까지 준비하여 미혼의 처를 가르쳤다.

---> 대박, 김구 멋지다. 역시 깨인 사람은 틀리다.

 

[185]

당시 나는 가사도 돌보아야 했고 신교육에 헌신할 결심을 하고 문화의 우종서 목사, 송종호, 당시 김선생........등과 신교육 실시를 협의.....

 

당시 애국사상을 지닌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수교 신봉자임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186]

우종서는 그때 전도조사였다. 나와 여러 해 친교한 때문에 예수교 신봉을 힘껏 권하였다. 나도 탈상 후에는 예수도 믿고 신교육을 장려하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계묘년(1903, 28)........장연 텃골 미혼처의 집에서 급보가 왔다. 낭자의 병세가 위중.....2,3일 후에 마침내 죽고 말았다. 내 손으로 직접 염습하여 남산에 안장하고 묘 앞에서 영별하였다.

----> 예전에는 이런 일이 흔했나보다. 우리 할아버지도 혼약 되었던 처녀가 죽어서 다시 혼처를 잡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 처녀 제사를 우리가 지낸다. .

 

8) 교육자의 길, 그리고 결혼

[186]

이 해 2월에 장련읍 진사 오인형이 자기가 산 사직동 집과 대지, 산림과 과수, 그리고 20여 마지기의 전답을 모두 내게 맡겨, 나로 하여금 집안일에 대한 염려없이 공공사업에만 전력케 한 것이었다.

 

[187]

인형의 셋째 동생 순형은 지극히 너그럽고 후덕한 성품으로 근면하였다. 그는 나와 같이 예수교에 전력하기로 마음을 갗이 하고서, 학생을 가르치며 예수교를 선전하였다.

 

1년도 채 안되어 교세도 크게 일어나고 학교도 점차 발전하였다.

 

최광옥은 안신호 양과 약혼할 것을 권고하였다. 신호는 안창호의 누이동생으로 그때 나이 20여 세였는데, 사람됨이 매우 활발하고 처녀 중에 명성이라고 한다.

 

[188]

신호 자신의 처지로서는 도의상 양주삼이나 김구 중에 누구를 고르고 누구를 버릴 수 없으니 양쪽을 다 버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청혼을 받고도 몸이 약한 것을 꺼려 승낙하지 않았던, 어려서부터 한 동네에서 같이 자란 김성택을 택하고, 김 양 두 사람은 거절하기로 결심하였다 한다. 어쩔 수 없지만 일의 모양새나 정리상으로는 매우 섭섭하였다.

 

시간이 지나 신호는 나를 찾아왔다.

나는 지금부터 당신을 오라버님으로 섬기겠습니다.....”

 

[189]

신호의 쾌활하게 결단하는 도량을 보고서 더욱 흠모하게 되었으나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190]

오진사는 어선업을 개시한 지 두 해 만에 가산을 몽땅 날려버리고, 이 일로 인해 병을 얻어 작고.....내가 살던 사직동 집과 대지를 유족에게 돌려주었다.

 

가사를 맡타보던 사촌 형 태수.....뜻밖에 뇌출혈로.....갑자기 사망했다. 사촌 형수를 자기 본가로 보내어 개가(개가)를 허락하고, 나는 사직동에서 떠나 장련읍내로 이주하였다.

---> 개가 금지가 사람들 사이에서 보편적이었던 이 시대에 김구의 생각은 정말 깨어 있다.

세조 때 한명회가 과부개가를 허가하자고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명회처럼 자기 이익을 잘 챙기는 관리가 왜 과부개가를 허가하자고 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 국문소설 장끼전도 과부개가 문제를 다루고 있다. 조선에서는 여자에게는 금기시하는 사항들이 참 많다. 그 사상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지금 그 사상이 있는 한, 지금도 조선시대 연장이다. 가부장제와 조선시대, 여성지위... 그 삼각관계가 궁금하다. 왜 조선은 그랬을까?

 

신천 사평동 예수교회의 영수 양성칙이 그 교회 여학생 최준례와 결혼하라고 권유했다. 최준례는 그 동네에 거주하는 의사 신창회의 처제였다.

 

[192]

준례는 당시 18세로 뜻에 맞는 남자를 골라 자유결혼을 원하고 있었는데, 양성칙이 나에게 의향이 있는지를 물은 것이다.

 

나는 당시에 조혼(이웃동네 강성모와 허혼된 상태/준례 거부)으로 인한 여러 가지 폐해를 절감하던 터여서 준례에게 지극한 동정심이 생겼다.

 

나는 최준례를 사직동 내 집으로 데려가 굳게 약혼하고 난 뒤, 경성 경신학교에 유학 보냈다.

 

처음에는 교회의 금지 권고를 듣지 않는다 하여 교회가 책벌을 선언하였으나, 끝내 불복할 뿐 아니라, 구식 조혼을 인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것은 교회로서 잘못이고 사회악풍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항의하였더니, 군예빈이 혼례서를 작성하여 주고 책벌을 해제하였다.

 

146) 1904년 결혼 당시 백범은 29, 최준례(1889~1924)16세였다.

 

 

5. 식민의 시련

 

1)을사늑약과 구국운동

 

[195]

(1905년 을사조약과 애국운동)

다섯 사람만 상소한 것은, 상소하면 반드시 사형될 것이요, 사형되면 다시 다섯 사람씩 몇 차례든지 계속할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 눈물 난다. 만일 나였다면 그렇게 죽을 수 있을까?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도 많지만, 의롭게 나라를 지켜낸 애국투사들도 많았다. 그들의 구국의 의지. 구사상을 지닌 의병이나 신사상을 지닌 교회신도든 참으로 고맙고 힘이 되는 분들이다. 그들이 지켰기에 후손은 자존감을 잃지 않을 수 있지 않겠는가? 잘났던 못 났던 나, 내 가족, 내 식구, 내 나라는 잘 지켜내고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리고 내 것이 소중한 만큼 타인, 다른 나라도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다.

 

다섯 사람이 일시에 왜놈 순사에게 달려들어 내정간섭을 규탄하였다. 즉각 대한문 앞에는 왜놈의 칼이 번쩍번쩍 빛났고 다섯 지사는 맨주먹으로 싸움을 시작하였다. 근처에서 호위하던 우리들은 소리를 벽력같이 지르며,

왜놈이 국권을 강탈하고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는데, 우리 인민은 원수의 노예가 되어 살 것인가 의롭게 죽을 것인가하는 격분한 연설을 곳곳에서 하니 인심이 흉흉해졌다.

---> 노예로 살 것인가? 의롭게 죽을 것인가? 딸린 남편, 자식이 없어야 한다. ㅋㅋ

 

그날 민영환(1861~1905)이 자결하였다.

---> 눈물 난다. 100 여 년 전 일이다. 조선은 지켜졌는가? 제대로,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고 통일을 이루고..... 부끄럽지 않은 후손이 되어야 할텐데... 요즘 정치 돌아가는 걸 보면 정말 답답하다. 이승만의 부활...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보수 수골 세력은 절대 나라 전체, 백성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나라도 팔아 먹기 때문이다.

 

[196]

아무리 급박하여도 국가흥망에 대한 절실한 각오가 적은 민중과 더불어서는 무슨 일이나 실효있게 할 수가 없다. 바꿔 말하면 아직 민중의 애국사상이 박약한 것이다.

 

7년 묵은 병에 3년 쑥을 구한다는 격으로 때는 늦었으나마, 인민의 애국사상을 고취하여 인민으로 하여금 국가가 곧 자기 집인 줄을 깨닫고, 왜놈이 곧 자기 생명과 재산을 빼앗고 자기 자손을 노예로 삼을 줄을 분명히 깨닫도록 하는 수밖에 다른 최선책이 없다고 생각했다.

---> (속담) 평소에 미리 갖추어 놓지 않고 필요한 때 급히 구하면 얻지 못한다는 뜻

 

동지들 사상으로 헤어져서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신교육을 실시....

나도 황해도로 돌아와 교육에 종사하였다.

 

 

2) 안악 양산학교와 하기 사범강습

서명의숙의 교사가 되어 농촌 아동을 가르쳤다.

그러다가.....신설한 사립 양산학교의 교사가 되어 근무하였다.

 

 

[198]

11) 안창호가 “13개 도마다 안악군 같은 고을이 하나씩만 있으면, 이 나라는 10년 안에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격찬한 바와 같이 당시 안악군은 신교육의 선구지대였다.

 

[203]

모양만 상놈이 아니고 정신까지 상놈이 되고 말았다. 그이들은 민족이 무엇인지, 국가가 무엇인지 터럭만큼의 각성도 없는 밥벌레에 불과했다.

---> 그래서 교육이 중요하다. 교육이 그대를 구원할지니... 그런데 교육이라 해도 제대로 된 주체성이 있는 교육이. 어린 시절, 할머니께서 내가 뭘 잘 못하면 그렇게 하면 상놈이다는 말씀을 하루에도 여러 번 하셨다. 양반 정신과 상놈의 정신... 각기 장단점이 있으니...ㅋㅋ

 

 

20) 원문: 내의 집안에 상농의 상농이나 그대의 양반인 상놈이나 상놈 맛은 일반(一般)이라고 생각된다.

 

[204]

저주하리로다, 해주 서촌 양반들이여! 자기네가 충신 자손이니 공신 자손이니 하며, 평민을 소나 말처럼 여기고 노예시하던 기염은 오늘 어디에 있느냐!

 

....이제는 재래의 썩은 양반보다 신선한 신식 양반이 될 수 있지 않은가!

 

구식 양반은 군주 일개인에 대한 충성으로도 자자손손이 혜택을 입었거니와, 신식 양반삼천리 강토의 이천만 민중에게 충성을 다하여 자기 자손과 이천만 민중의 자손에게 만세토록 복음을 남길지라.

 

나는 인근 양반 상놈을 다 모아놓고, 환등회 석상에서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라고 절규하였다.

 

 

3) 각 군 순회 교회운동

[206]

그때 왜놈이 수비대나 헌병대를 군마다 주둔시켜 관아를 빼앗았지만, 유독 배천군만은 전군수가 완강히 거부하여 빼앗기지 않았다......전씨의 본뜻은 군수를 영화로운 자리로 알아서가 아니요, 군수의 권한을 가지고 교육에 힘을 보태고자 함이었다.

[207]

...소화읍의 광경을 보았다. 해서의병을 토벌하던 요새인 읍내 관사는 거의 대부분 왜가 점령했다. 수비대 헌병대 경찰서 우편국 등 여러 기관이 꽉 들어차고, 개인 집을 군청으로 하여 근무하는 광경을 보고 분한 마음이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 을사조약 후, 서서히 조선 전 국토를 장악해가는 왜의 침략 마수가 느껴진다. 이 당시 우리나라에 들어온 일본인의 수는 얼마쯤일까? 그리고 1910년대 조선의 인구는?

 

[208]

하얼빈 전보로, 이토 히로부미가 한인 은치안에게 피살되었다는 신문을 보았다.

--->은치안은 중국식 발음 잉치안’..... 안응칠, 곧 안중근..... 각지에서 선구적으로 들고 일어나는 의사들의 목소리..

 

4) 재령지역 교육운동의 추억

[213]

이재명 의사(1890~1910)

경성 이현(종현의 착오)에서 군밤장수로 가장하고서 충천하는 의기를 품고 이완용을 저격하여 조선 천지를 진동하게......자기는 이재명이고 수개월 전에 미주로부터 귀국하였다고 했다. 평양의 오인성이란 여자와 결혼하여 지내는바,......장모가 딸 셋을 데리고 지내는데 가세가 풍족하여 딸들을 교육시켰지만, 국가의 대사에 충성을 바칠 용기가 없고 구차하게 안일에만 빠져 자기의 의기와 충성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다.

 

37) 이재명 의사의 부인은 거사 전 마지막 작별에서 울지도 않았고 만류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 정말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부부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지 못할지라도 한쪽이 간절히 바라는 바를 이해하고 조금이라도 지지했었으면 좋았을 걸... 이재명 의사... 참으로 마음 아프다. 나이도 얼마 안 되었는데...

 

5) 신민회와 안악 사건

[215]

국가가 합병의 치욕을 당한 당시의 인심은 매우 흉흉하였다. 원로대신과 내외 관리들 중 자살하는 자도 많았고 교육계의 배일사상이 극도에 달했다. 오직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농민들 중에는 합병이 무엇인지, 망국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자도 많았다.

 

나부터 망국의 치욕을 당하고 나라 없는 아픔을 느끼나, 사람이 사랑하는 자식을 읽으면 슬퍼하면서도 살아날 것 같은 생각이 나는 것처럼, 나라가 망하였으나 국민이 일치 분발하면 곧 국권이 회복될 것같이 생각되었다.

---> 깨달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가? 교육이다. 주체성이다.

 

그렇게 하려면 후세들의 애국심을 앙양하여 장래에 광복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되어, 계속하여 양산학교를 확장하고 중소학부에 학생을 늘려 모집하면서 교장의 임무를 다했다.

 

이에 앞서 국내 국외를 통하여 정치적 비밀결사가 조직되니, 신민회였다. 안창호는 미주로부터 귀국하여 평양에 대성학교를 병설하여 청년을 교육하는 것을 표면의 사업으로 내세우면서.......400여 명 정수분자로 조직된 단체, 즉 신민회를 훈련 지도하였다.

 

[216]

만주에 이민계획을 실시할 것무관학교를 설립(19103)하고 장교를 양성하여 광복전쟁을 일으킬 것, 이를 준비하기 위해 이동녕을 먼저 만주에 파송하여 토지 매수, 가옥 건축과 기타 일반을 위임하고, 그 나머지 참석한 인원으로 각 지방 대표를 선정하여.....

 

6) 세 번째 투옥과 고문

[220]

국가가 망하기 전 구국사업에 성의 성력을 십분 발휘하지 못한 죄를 받게 된 것으로 자인했다.

 

[221]

처음에 성명부터 신문을 시작하던 놈이 불을 밝히고 밤을 새우는 것과 그놈들이 온 힘을 다해 사무에 충실한 것을 생각할 때에 자괴심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나라를 남에게 먹히지 않게 구원하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를 한꺼번에 삼키고 되씹는 저 왜구와 같이 밤을 새워 일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 스스로 물어보니, 온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듯이 고통스런 와중에도, 내가 과연 망국노의 근성이 있지 않은가 하여 부끄러움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찼다

---> 갖은 고문에 몸이 아파 정신이 없을 지경일텐데 저 순간에도 힘을 다해 나라 지키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자기성찰에 빠진 김구.... 정말 대단한 의지력이다. 좋은 세상에 사는 지금, 강대국에 휘둘리며 아직도 정신적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우리...그 일에 정성을 다하지 않고 있는 내가 부끄럽다.

 

[222]

나는 결심에 결심을 더하여 나의 혀 끝에 사람의 생사가 달렸다는 것을 각오하였다.

 

[228]

나의 육체를 욕보일 수 있을지언정 나의 정신을 뺏을 수 없다.”고 같이 수감된 동지들에게 주창하던 기개와 절개를 생각하면서, 이러다가 인간의 본성은 사라져 없어지고 짐승의 본능만 남는 것이 아닌가 자책하던 때, 아카시의 방에서 나를 극진히 우대를 하면서 신문한 것이다.

 

[229]

사식은 방 밖에서 먹는 것이 원칙......

종록(같은 방 이종록, 나이 어린 청년)이 먹고 싶어하는 형상은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나는 방 밖에서 밥을 먹다가, 고기 한덩이와 밥 한덩이를 입에 물고 방안에 들어와서 입 안에서 도로 꺼내 먹여, 마치 어미새가 새끼에게 물어 먹이듯 했다.

 

7) 기약없는 15년형

[233]

나는 할 수 없이 얼레빗 참빗을 사다두고 매일 몇 시간씩 학생들 머리를 빗겼다. 점차 아동수효가 늘어남에 따라 학과 시간보다 머리 빗기는 시간이 많게 되니, 그 다음 수단으로 하나둘씩 부모의 승낙을 얻어 머리를 깎아주었다.

 

8) 서대문감옥으로

[238]

나의 심리 상태가 체포된 이전과 이후에 큰 변동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태산처럼 크게 보이던 왜놈이 그때부터 겨자씨와 같이 작아보였다.

 

[239]

일본 고등관 왈 to 김구

네가 그런 줄 안다만 전답을 사들인 지주로서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것이 상례 아니냐?

 

김구 왈

오냐, 나는 죽어도 몽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

 

 

[244]

네가 어려서부터 늙어서까지 스스로 농사 짓지 않고 스스로 옷을 짜지 않아도 대한의 사회가 너를 입히고 먹였는데, 금일 왜놈이 먹이는 콩밥이나 먹고 붉은 의복이나 입히는 데 순종하라고 먹이고 입혔느냐?

 

9) 옥중의 의

[249]

(수인들에 내 밥 나눠주다가...)

선을 행함이 도리어 악을 행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 동지들은 인격과 재능에서 뛰어나고, 50~60명이 정신적으로 단결되어 누구도 멸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와 다른 사건이라도 똑똑한 분자는 모두 우리와 정의를 통하고 지내는 터였으니, 엄연히 수인의 영도적 기관이 되어 갔다. 수인의 표면은 감독은 왜놈이 하고, 정신상 지도는 우리 동지들이 하게 되었다.

[254]

지난날 이승만 박사가 자기 동지들과 같이 투옥되었을 때, 서양인 친구들과 연락하여 옥중에 도서실을 설치하고 우리나라와 외국의 진귀한 서적을 구입하여 5,6년간 긴 세월 옥수에게 나라를 구하고 부흥시키는 방도를 강연하였던 그것이다.

 

10) 기인과 영웅

[264]

김진사의 말을 듣고 나는 생각하여 보았다. 내가 국사를 위하여 원대한 계획을 품고 비밀결사로 일어난 신민회 회원의 한 사람이지만, 저 강도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리의 조직과 훈련이 아주 유치한 것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 조직 관리, 비밀결사 규율 등등을 목단설, 추설 강도에게서 배우는 김구.... 역시 대단한 인물이다.

 

당시 옥중의 수인들 중에도 이같은 강도의 인격이 제일이므로, 왜놈에게 의뢰하여 순사나 헌병보조원 등 왜관리를 하다가 들온 자는 감히 수인들 중에 머리를 들지 못하고, 사기 절도 횡령범들도 강도 앞에서는 옴짝을 못하기 때문에 수인계의 권위를 강도가 잡고 있었다.

 

[267] (감동구절) *****

그럭저럭 내가 서대문감옥에서 지낸 것이 3년이고, 남은 기간은 불과 2년이었다. 이때부터는 마음에 확실히 다시 세상에 나가 활동할 신념이 생겼다.

 

나는 본시 왜놈이 이름지어준 뭉우리돌이다. 뭉우리돌의 대우를 받은 지사 중에 왜놈의 가마솥인 감옥에서 인간으로 당하지 못할 학대와 욕을 받고도, 세상에 나가서는 오히려 왜놈에게 순종하며 남은 목숨을 이어가는 자도 있으니, 그것은 몽우리돌중에도 석회질을 함유하였으므로 다시 세상이라는 바다에 던져지면 평소 굳은 의지가 석회같이 풀리는 것과 같다.

 

나는 다시 세상에 나가는 데 대하여 우려가 적지 않았다. 만일 나도 석회질을 가진 뭉우리돌이면 만기 이전에 성결한 정신을 품은 채로 죽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 나는 단단한 몽우리돌인가 석회 몽우리돌인가? 김구같은 몽우리돌이 있어서 이 나라가 아직 존재하는 것이다. 이승만같은 석회 몽우리돌은.......? 의지와 신념이 있어야 뜻과 나라를 지킨다.

 

그리하여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라 하고, 호를 백범’(白凡)이라 고쳐서 동지들에게 언포하였다.

 

()를 구()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民籍)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蓮下)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백정(백정) 범부(범부)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113) 민적은 호적(호적).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호적제도의 불완전을 보완하기 위해 대한제국은 19093월 근대적인 호적법인 민적법을 시행하였고, 1923년 일제가 그것을 [조선호적령]으로 대체하였다. 근데 호적제도의 특징으로는, 모든 사람이 인적사랑이 민적에 등재되며, 개명은 10일 이내 신고하지 않으면 처벌받게 되었다.

 

11) 다시 인천감옥으로

[268]

호랑이같은 와타나베 놈을 통렬히 규탄하던 경무청은 매춘녀의 검사소.......

----> 1910년에 다시 인천감옥으로 이동 수감되었는데..... 매춘녀의 검사소라..... 군위안부의 검사소일까? 1910년에는 군위안부는 없었으니.... 중일전쟁 이후부터.......하지만 같은 맥락으로 관리되는? 일본 공창의 관리 체계 자료에 있겠지? 군위안부와 매춘녀.... 일본, 그들에게는 똑같은 것이니.

 

 

 

6. 망명의 길

 

1) 출옥, 고향으로

[273]

7세 미만의 어린 것이 죽을 때 나 죽었다고 옥에 계신 아버지께는 기별하지 마십시오. 아버지가 들으면 오죽이나 마음이 상하겠소하더라.

 

[275]

어느 서양여자가 아내의 학비를 부담하고 공부를 시켜주마 하였으나 설움에 파묻힌 어머님과 어린 화경이를 돌볼 결심으로 공부도 못하였노라고, 종종 자기 의사와 맞지 않을 때 아내는 반드시 이런 말을 하여 나를 괴롭게 했다.

 

2) 농감생활

3) 상해 망명

[283]

독립은 만세만 불러서 되는 것이 아니고 장래 일을 계획진행하여야 할 터인즉 나의 참, 불참이 문제가 아니니, 자네들은 어서 만세를 부르라.

 

4) 경무국장에서 국무령까지

[287]

나는 이 것 한 가지 일을 보아도 우리 민족의 애국정성이 족히 장래에 독립의 행복을 누릴 수 있으리라 예견한다.

 

5) 내 인생을 돌아보며

[289]

대게 사람이 귀하면 궁함이 없겠고 궁하면 귀함이 없을 것이나, 나는 귀해도 궁하고, 궁해도 궁한 일생을 지냈다.

 

과거에는 영욕의 심리를 가지고 궁을 면하려고 버둥거려 보기도 하고, 독장수셈도 많이 하여 보였다...자식들에게 대하여도 아비된 의무를 조금도 못하였으므로 내가 아비라 하여 자식된 의무를 주기를 원치 않는다. 너희들은 사회의 은택을 입어서 먹고 입고 배우는 터이니, 회의 아들이라는 심정으로 사회를 부모처럼 효로 섬기면 내 소망은 이에서 더 만족이 없을 것이다.

 

[291]

독립 전에는 절대 비밀로 할 것이므로 너희들에게 알려주지 못함이 극히 유감이다.

 

 

 

하권

 

하권을 쓰고 나서

[295]

젊은 나이에 글공부를 걷어치우고 예순이 되도록 큰 뜻을 품은 채, 나의 보잘것없는 역량과 고루한 재주를 돌아보지 않고 성패와 영욕에도 연연하지 않으며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30여년 분투하였으나, 하나도 이룩한 것이 없었다.

[296]

철혈남아들을 물색하여 테러운동을 계획하던 때 상권을 기술하였다.

 

내가 50년 동안 분투한 사적을 기록하여, 숱한 과오를 거울삼아 다시는 이같은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다.

 

[298]

나 자신으로 말하면 날마다 늙어가고 병드니, 상해시대를 죽자꾸나 시대라 한다면 중경시대는 죽어가는 시대라 하겠다.

 

세상은 고해라더니 살기도 어렵거니와 죽기도 또한 어렵다.

 

나의 칠십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1. 상해 임시정부 시절

 

1) 상해에서 첫출발

2) 경무국장 시절

[302]

그 주요 임무는 왜적의 정탐활동을 방지하고, 독립운동자의 투항 여부를 정찰하여, 왜의 마수가 어느 방면으로 침입하는가를 살피는 것이었다.

 

[307]

나의 신조는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고,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조로 인하여 종종 해를 당하면서도 천성이라 평생 고치지 못하였다.

 

[308]

(한태규)

우리는 한이 돈을 물 쓰듯하며 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십중팔구 정탐꾼이라고 추측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309]

그런 악한을 절대 신임하였던 나야말로 세상에 머리를 들기 어렵다는 자괴감으로 지냈다.

 

3) 사상 갈등과 국민대표대회

[313]

레닌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식민지운동은 復國운동이 사회운동보다 우선한다고 발표하였다. 이 말이 한번 떨어지자 어제까지 민족운동 즉 복국운동을 비난조소하던 공산당원들이 돌변하여 독립민족운동을 공산당의 당시로 주창하였다.

 

[315]

순박한 동포들도 우리 무장대오의 지나친 위력과 침탈을 당하게 되자 점차 반발심이 생기게 되었다.

 

[315]

스스로 업신여기면 다른 사람도 나를 업신여기게 된다.

 

4) 무정부상태의 국무령

[317]

집세문제로 집주인에게 종종 소송을 당하였다.

 

민국 6년에 처를 잃었고, 7년에는 모친께서 신을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가셨다. 그 후 상해에서 나 혼자 인을 데리고 지냈는데, 모친의 명령에 의하여 인이마저 본국으로 보냈다. 그림자나 짝하며 홀로 외롭게 살면서, 잠은 정청에서 자고 밥은 직업있는 동포들 집에서 얻어먹으며 지내니, 나는 거지 중의 상거지였다.

 

그가 불란서 공무국에 취직한 목적 : 월급을 받아 우리에게 음식을 제공해 주는 것, 왜영사관에서 우리를 체포하려는 사건을 탐지하여 피하게 하고 우리 동포중 범죄자가 이을 때 편리를 도모해 주는 것

 

[318]

원년(1919)에서 3~4년을 지내고 보니, 열렬하던 독립운동자 가운데 하나 둘씩 왜놈에게 통항하거나 귀국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319]

매년 크리스마스에는 적어도 몇 백 원어치의 물품을 사서 불란서 영사와 공무국, 그전의 서양인 친구들에게 선물하였다. 어떠한 곤란 중이라도 14년 동안 연중 행사로 실행한 것은 우리 임시정부가 존재한다는 흔적을 그들에게 인식시키려는 방법이었다.

 

[320]

임시정부는 사정을 자주 알려주지도 않아서 해외동포들이 정부를 믿지 않았던 것이다. 나의 통신이 진실성이 있는데서 점차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321]

그때부터 민족의 생색될 일이 무엇이며,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2.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1) ‘일본영감이봉창

[323]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31년을 더 산다 해도 과거 반생에서 맛본 방랑생활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 이 대목은 정말 눈물난다. 31세의 이봉창의 말.... 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아야 한다.

 

2) 일본 천황 불행부중

[326]

불란서 조계지에서 한걸음도 나서지 못하는 선생께서는, 제가 이 돈을 가지고 가서 마음대로 써버리더라도 돈을 찾으러 못 오실 터이지요. 과연 영웅의 도량이로소이다. 제 일생에 이런 신임을 받은 것은 선생께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

 

저는 영원한 쾌락을 향유코자 이 길을 떠나는 터이니, 우리 두 사람이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으십시다.

 

[329]

서신이 태평양을 건너 눈송이같이 날아들었다.

 

 

3) 윤봉길과의 짧은 만남

[331]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마땅히 죽을 자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선생께서는 동경사건과 같은 경륜이 계실 줄 믿습니다. 저를 믿으시고 지도하여 주시면 은혜는 죽어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뜻을 품으면 마침내 일을 이룬다.

 

저는 이제부터 가슴에 한 점 번민이 없어지고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334]

포수가 꿩을 쏠 때에도 날게 하고 쏘아 떨어뜨리고, 숲 속에서 자고 있는 사슴은 달리게 한 후 쏜것이 사냥의 진정한 맛이오.

 

[335]

이제부터 가슴에 한 점 번민이 없어지고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것은 성공의 확실한 증거라 믿소..윤군은 내 말을 가슴에 새겨듣는 안색을 보였다.

----> 젊은 윤을 죽음으로 보내는 김구의 속 심정은 어떠했을까?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도 성공해야 한다. 부끄러운 역사가 되지 않아야 한다.

 

4) 홍구공원의 쾌거

[336]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338]

이후로 군 등의 집안 생활을 내가 책임질 테니, 오로지 우리 사업에만 전념하라.

 

 

 

3. 피신과 유랑의 나날

 

1) 위기일발의 상해탈출

[342]

어찌 여러 사람들을 다 만족시킬 수 있겠는가?

2) 광동인 장진구

[348]

나는 우리 일행이 이렇게 산을 넘어가는 모습을 활동사진기로 생생하게 담아 영구 기념품으로 제자가여 만대 자손에게 전해줄 마음이 간절하였다.

 

[348]

나는 상해에서 한걸음도 밖으로 나서지 못해 산천이 극히 그립던 차에 매일 산에 오르고 물에 나가는 취미는 비할 데 없이 유쾌하였다.

 

[350]

가흥에 돌아와 작은 배를 타고 날마다 남호 방면으로 나가 뱃놀이로 일을 삼고, 시골가서 닭을 사다 배 안에서 삶아먹으니 맛이 대단하였다.

 

[352]

농촌을 시찰한 나는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리에서 한, 각 시대에 관개사절이 중국을 왕래하였다. 북쪽지방보다 남쪽 명조시대에 사절로 다니던 우리의 선인들은 대부분 눈먼 사람이었던가. 필시 환상으로 국가의 계책이나 민생이 무엇인지를 생각지도 못하였을 것이니, 어찌 통탄스런 일이 아니리오.

 

[352]

명대 시절 우리나라 의관문물은 모두 중국제도에 따른다 하고서, 실제는 아무 이익도 없이 불편하고 고통스럽기만 한 망건갓 등 망할 놈의 기구만 들여왔으니 생각만 해도 이가 시리다.

 

슬프도다. 오늘날도 청년들은 늙은이들을 노후니 봉건잔재니 하며 비판하는데, 긍정할 점이 없지 않지만 그들 또한 문제가 적지 않다.

 

[353]

정주의 방귀를 향기롭다고 하던 자들은 비웃던 그 입과 혀로 레닌의 방귀는 달다하니, 청년들이여, 정신을 좀 차릴지어다.

 

우리나라의 특성과 백성들의 수준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연구실시하려고 머리를 쓰는 자 있는가?

 

4) 여사공과의 선상생활

[354]

오늘은 남문 호수에서 자고, 내일은 북문 강변에서 자고, 낮에는 땅위에서 행보나 할 뿐이었다.

 

 

 

4. 다시 민족운동의 전선으로

 

1) 장개석 면담과 낙양군관학교

특무공작으로 천황을 죽이면 천황이 또 있고, 대장을 죽이면 대장이 또 있지 않소? 장래에 독립하려면 군인을 양성해야 하지 않겠소?

 

2) 5당 통일운동

[358]

나는 목적이 각기 다른 그런 통일운동에는 참가하길 원하지 않소.

 

[359]

임시정부가 종종 위험을 당하는 것은 튼튼한 배경이 없었기 때문인데, 이제 임시정부를 옹호하는 단체가 필요하다 생각하고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였다.

 

3) 폭격 속의 남경 생활

[360]

나는 부득이 가흥의 여자 뱃사공 주애보를 매월 15원씩 본가에 주고 데려와, 화청교에 방을 얻어 동거하였다.

 

[362]

남경에서 출발할 때 주애보는 본향인 가흥으로 돌려보냈다. 그후 종종 후회되는 것은, 송별할 때 여비 100원밖에 주지 못하였던 것이다..내가 뒷날을 기약할 수 있을 줄 알고 돈도 넉넉히 돕지 못한 것이 유감천만이다.

 

4) 어머님에 대한 추억

[363]

처는 내가 그곳에 못한 까닭에 보륭희원에서 최후 작별을 하였다.

 

[365]

세월이 흐르는 물과 같아서 내 나이 오십 여라. 과거를 회상하고 장래를 추상하니 신세 가련하다.

 

[367]

나는 지금부터 시작하여 라는 말을 고쳐 자네라 하고, 잘못하는 일이라도 말로 꾸짖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네. 듣건대 자네가 군관학교를 하면서 다수 청년을 거느리고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나도 체면을 세워주자는 것일세.

 

5) 가슴에 박힌 총탄

[371]

자네의 생명은 상제께서 보호하시는 줄 아네. 사악한 것이 옳은 것을 범하지 못하지. 하나 유감스러운 것은 이운환 정탐꾼도 한인인즉 한인의 총을 맞고 산 것은 일인의 총에 죽은 것보다 못하네.

 

 

5. 중경 임시정부와 광복군

 

1) 전시수도 중경으로

[377]

그들은 어머님을 잘 모시지 못하는 나의 형편을 알고, 자신들이 어머님 시중을 들겠으니 나는 마음 놓고 독립사업에만 전념하라는 것이었다.

 

2) 7당 통일회의

[378]

어서 독립이 성공되도록 노력하고, 성공하여 귀국할 때 나의 유골과 인이 어미의 유골까지 가지고 돌아가 고향에 묻어라.

 

3) 광복군 창설

[386]

봉빈은 비록 여성이나 총명과감하여 전시공작의 효과와 능률이 중국 방면에까지 널리 알려져 칭찬을 받았으며, 봉빈 자신도 항상 자기가 경이적인 공헌을 하리라고 마음먹고 있어 장래가 촉망되는 바이다.

 

4) 대가족과 대륙에 묻힌 영혼

[390]

석오 이동녕 선생은 재덕이 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서 선두에 내세우고, 스스로는 남의 부족을 보충하고 고쳐 인도하는 일이 일생의 미덕이었다. 최후의 한순간까지 선생의 애호를 받은 사람은 오직 나 한 사람이었다.

 

 

6. 해방 전후의 대륙

 

1) 한국독립당과 광복군

[395]

왜군의 앞잡이로 끌려 다니다가 개죽음을 하지 말고 우리 정부를 찾아가서 독립전쟁을 하다가 영광스러운 죽음을 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2) OSS 국내침투훈련

3) 왜적의 조기항복

[399]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

 

[400]

7년간의 중경생활을 마치게 되니 실로 감개 무량하여 무슨말을 써야 할지 말의 주리와 일의 두서를 찾기가 어렵다.

 

4) 중경생활 회고

[402]

내 일생을 통하여 가족을 모아서 가정생활을 한 적은 시간으로도 짧다......18세에 붓을 던진 이후 시종 유랑생활이었으니.........

 

5) 해방직후의 상해

[408]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안중근의 아들)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 중국 관헌에게 부탁하였으나 관원들이 실행치 않았다.

 

 

7. 조국에 돌아와서

 

1) 감격의 귀환

 

[409]

수많은 동포들이 나를 환영하기 위하여 여러 날을 모여들어 고대하였는데, 당일 마중 나온 동포가 얼마 되지 않은 것은, 미군을 경유하기 때문에 통신이 불철저했기 때문이라 한다.

 

[410]

그러나 38선 이북에서는 이와 반대로 환영회 대신 무쌍한 욕설을 반포한다 하니 참으로 탄식과 쓴웃음이 나올 뿐이다.

 

2) 지나온 자취를 찾아서

[412]

물러나 속세의 일을 돌아보니 마치 꿈속의 일만 같다.

 

3) 삼남지방 순회

4) 서부지방 순회

 

 

나의 소원

 

1) 민족국가

[424]

내 차라리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왕의 신하로 부귀를 누리지 않겠다.

 

피와 역사를 같이하는 민족이란 완연히 있는 것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못 됨과 같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 없는 것은, 마치 형제도 한 집에서 살기 어려움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둘 이상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서 명령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근본 문제가 되는 것이다.

 

철학도 변하고 정치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거니와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

 

[425]

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할 최고의 임무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인류세계에는 새로운 생활원리의 발견과 실천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담당한 천직이라고 믿는다.

 

[426]

우리가 주연배우로서 세계 역사의 무대에 나서는 것은 오늘 이후다..........내가 원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이 아무도 한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2) 정치이념

[427]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 독재다.

 

[428]

국민의 머리 속에 아무리 좋은 사상과 경륜이 생기더라도 그가 집권 계급의 사람이 아닌 인상, 또 그것이 斯文亂賊이라는 범주 밖에 나지 않는 이상 발표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428]

자연계의 변천이 변증법에 의하지 아니함은 뉴튼아인슈타인 등 모든 과학자들의 학설을 보아서 분명하다.

 

[429]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배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또 철학을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 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

 

한 사람의 생각, 한 학설의 원리로 국민을 통제하는 것은 일시 속한 진보를 보이는 듯 하더라도 필경은 병통이 생겨서 그야말로 변증법적인 폭력의 혁명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작은 꾀로 자주 건드리면 이익보다도 해가 많다.

갑론을박으로 서로 토론하는 동안에 의견이 차차 정리되어서 마침내 두어 큰 진영으로 포섭되었다가, 다시 다수결의 방법으로 한 결론에 달하여 국회의 결의가 되고, 원수의 결재를 얻어 법률이 이루어지면, 이에 국민의 의사가 결정되어 요지부동하게 되는 것이다.

 

[430]

백성들의 작은 의견은 이해관계로 결정되거니와, 큰 의견은 그 국민성과 신앙과 철학으로 결정된다. 여기서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이 생긴다. 국민성을 보존하는 것이나 수정하고 향상하는 것이 문화와 교육의 힘이요. 산업의 방향도 문화와 교육으로 결정됨이 큰 까닭이다.......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431]

이렇게 남의 나라의 좋은 것을 취하고 내 나라의 좋은 것을 골라서 우리나라에 독특한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도 세계의 문운(文運)에 보태는 일이다.

 

3)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부강한 나라...아니다.....남을 침략하는.....원치 아니한다......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우리 국조 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

 

[432]

우리 국민 각자가 한번 마음을 고쳐먹음으로써 되고, 그러한 정신의 교육으로 영속될 것이다. 최고 문화로 인류의 모범이 되기로 사명을 삼는 우리 민족의 각원은 이기적 개인주의자여서는 안된 다.

 

[433]

개인의 행복이 이기심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기심으로 남을 해하면 천하가 이기심으로 나를 해할 것이니, 이것은 조금 얻고 많이 빼앗기는 법이다.

 

앞으로는 세계인류가 모두 우리 민조의 문화를 이렇게 사모하도록 하지 아니 하려는가. 나는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 질 것을 믿는다. 우리나라의 젊은 남녀가 다 이 마음을 가질진대 아니 이루러지고 어찌하랴!

 

1947

샛문 밖에서

 

 

 

 

                                                                              * * * * *

 

 

 

 

 

 

 

 

 

 

 

 

3. 책 소개와 평가 

 

 

 

(1) 목차와 전체적인 뼈대

 

교감원칙

 

일러두기

 

백범 출간사

 

 

[ 상 권 ]

 

.신 두 아들에게

 

1. 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

2. 시련의 사회 진출

3. 질풍노도의 청년기

4. 방랑과 모색

5. 식민의 시련

6. 망명의 길

 

 

[ 하 권 ]

 

하권을 쓰고 나서

 

1. 상해 임시정부 시절

2.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3. 피신과 유랑의 나날

4. 다시 민족운동의 전선으로

5. 중경 임시정부와 광복군

6. 해방 전후의 대륙

7. 조국에 돌아와서

 

 

나의 소원

 

백범 연보

 

인물 찾아보기

 

 

 

백범일지는 상, 하로 나눠져 있다.

 

<>은 김구가 어린 두 아들에게 지난 날, 자신이 한 일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에서 썼다.

<>는 미주, 하와이 동포들에게, 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자신의 경륜과 소감을 알리고자 썼다.

 

책의 뼈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린 시절 배움에 뜻을 품고 청년시절, 갖은 경험과 방황을 하며 자신의 뜻을 세우고 나아갈 바를 찾아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그의 평생의 삶이 민족과 함께한 독립운동의 역사다. 그는 자신이 걸어온 여정과 독립운동의 흐름을 세세하게 소개하면서 자신이 뜻을 품은 동기, 나라와 민족이 나아갈 방향 등을 강건하면서도 호소력 있는 문체로 전한다.

 

일제에 해방 되었지만 미국과 소련의 간섭을 받게 되었고 우리는 분단되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고 따로 남이 대신 시켜주는 것이 아니다. 책 전반에 흐르는 김구의 주체의식과 큰 가르침은 그가 정말 우리 민족의 위대한 스승임을 절감케 한다.

 

 

 

 

(2) 감동적인 절 또는 장

 

우선, 그의 자서전을 통해 1900년대 전후의 시대상과 풍물, 신분문제, 결혼에 대한 의식 등을 만날 수 있어서 흥미진진하다.

특히, 1<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이야기는 조선 말 고스란히 남아있는 확대가족 형태의 집성촌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조혼 풍습과 세 집안의 딸을 바꾸는 교환혼풍습에 대한 세세한 설명 덕분에, 내 조부모의 삶(1부 다처, 제사 때 밥그릇이 여러 개인 이유)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37<사형수의 옥중생활> 59<옥중의 의식주>는 당시의 감옥 생활을 영화의 한 장면으로 보듯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김구 자신의 자서전 이전에, 그 시대 감옥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510<기인과 영웅>은 그가 감옥에 수감된 도적, 활빈당 우두머리에게서도 무언가의 장점을 찾아내고 배우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그는 이미 신민회라는 운동조직을 만들었지만, 일제의 가혹한 감시 하에서도 강인한 생명력과 굳은 결의를 지킬 수 있는 보다 강력한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김구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희망 없어 보이는 감옥에서조차 앞날을 준비하는 주도면밀함을 보인다. 더더구나 지금으로 치면 조직폭력배 두목쯤 되는 자에게 조직 관리 방법을 배웠다.

 

 

가장 첫 부분의 <백범 출간사>와 마지막 부분의 <나의 소원>

 언제보아도 가슴 뭉클하며 또한 이 나라의 통일에 벽돌 한 장 얻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대목이다.

 

 

 

 

 

(3) 내가 저자라면

 

 

백성들의 작은 의견은 이해관계로 결정되거니와, 큰 의견은 그 국민성과 신앙과 철학으로 결정된다. 여기서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이 생긴다. 국민성을 보존하는 것이나 수정하고 향상하는 것이 문화와 교육의 힘이요. 산업의 방향도 문화와 교육으로 결정됨이 큰 까닭이다.......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부강한 나라...아니다.....남을 침략하는.....원치 아니한다......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나의 소원중에서-

 

내가 저자라면 어떤 책을 써야 할까?

김구는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을 말한다. 김구 자신도 어린 시절, 분노 에너지를 배움을 길에 힘을 쏟았기에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길을 찾고 일제 식민지 치하에 살았지만 일본의 노예가 아닌, 그 누구보다 떳떳하고 자유로운 주인으로 살 수 있었다.

 

교육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나는 이 말을 믿는다. 아이들 역사교육, 독서/글쓰기 교육을 보다 솔솔한 재미를 갖춘 프로그램으로 할 수는 없을까? 그 일환으로 나는 평범한 일상, 소소한 이야기의 틀을 넘어서 역사 속에서 현재의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 또는 기발한 발상을 뽑아내는 책을 쓴다. 나는 역사 언저리를 늘 배회할 것이다. 그리고 김구 선생의 바람처럼 아름다운 나라의 아름다운 후손이 되어 그가 나를 전염시켰듯이 우리 문화의 힘이 담겨있는 아름다운 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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