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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23일 11시 23분 등록

No21

2013.09.23

글쓴이: 오미경

 

                                                  백범일지

                                                                                                      백범 김구 자서전 도진순 주해,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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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욕에 초연하야 그윽이 뜰 앞을 보니

꽃은 피었다 지고

가고 머무름에 얽매이지 않고 하늘가 바라보니

구름은 모였다 흩어지는구나.

 

맑은 창공 밝은 달 아래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어도 불나비는 유독 촛불만 쫒는다.

맑음 물 푸른 숲에 먹을 것 가득하건만

수리는 유난히도 썩은 쥐를 즐긴다.

 

아! 세상에 불나비와 수리 아닌 자 그 얼마나 될 것인고?

 

 

 

1. 저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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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본명은 김창수 ( 1876.08.29~1949.06.26)

안동 김씨 김자점의 방계 후손으로, 황해도 해주 백운동 텃골에서 아버지 김순영과 어머니 곽낙원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다음은 김구가 말한 글들을 요약하여 김구의 생애를 살펴보았다.

 

“우리 조상이 텃골로 들어오던 시기는 조선시대 전성기로 양반과 상민의 계급 차별이 엄밀하였던 시기이다. 우리 조상들은 멸문의 화를 면하기 위하여 김자점의 족속임을 숨기고 일부러 상놈 노릇을 하였다. 양반의 문화생활을 접어두고 농사 짓고 임야를 개척하며 생계를 유지하다 보니 완전히 ‘판 박힌 상놈’이 되었다.”

 

 

어머님은 나에게

“너희 집에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로 생기니 너마저 술을 먹는다면, 나는 단연코 자살하더라고 그 꼴을 안 보겠다.”

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겼다.

 

아버님은 종종 나에게 이런 훈계를 하셨다.

“밥 벌어먹기는 장타령이 제일이라고, 너도 큰 글 하려고 애쓰지 말고 실용문서에나 주력하여라“

 

아드님이 못생겼다고 그다지 근심은 마시오. 내가 보건대 창수는 범상입디다. 인중이 짧은 것이라든지 이마가 두툼한 것이라든지 걸음걸이라든지. 장래 두고 보시오. 범의 냄새도 풍기고 범의 소리도 질러서 세상을 크게 놀라게 할는지 알겠소?

 

나는 깜짝 놀랐다. 망명객이 되어 사방을 떠돌아다디던 때에도 내게는 영웅심과 공명심이 있었다. 평생의 한이던 상놈의 껍질을 벗고, 평등하기보다는 월등한 양반이 되어 평범한 양반에게 당해온 오랜 원한을 갚고자 하는 생각이 야욕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야말로 불씨 문중에서는 추오도 용납할 수 없는 악마와 같은 생각이었다. 만일 이런 따위의 악한 생각이 계속해서 마음속에 싹트고 자랄 때에는, 호법선신께 의뢰하여 물리쳐내야 하는 것이었다.

 

1946년 나는 38선 이남 지방 순회를 시작하였다. 제 1차로 인천을 순시하였는는, 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지대라 할 수 있다.

22세때 인천감옥에서 사형을 받았다가 23세때 탈옥, 도주하였고, 41세 때 17년 징역을 언도받고 인천감옥으로 이감하였다. 17년 전에 파괴하고 탈주하였던 그 감옥을 다시 철망에 얽히어 들어가니 말없는 감옥도 나를 아는 듯, 내가 있던 자리는 옛날 그대로나를 맞아주었다. 그러나 17년(1929) 전 김창수는 김구로 이름을 바꾸었고, 세월 또한 오래 흐른 관계로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 일생을 통하여 가족을 모아서 가정생활을 한 적은 시간으로도 짧다. 18세에 붓을 던진 이후 시종 유랑생활이었으니, 장련읍 사직동 생활에서 모친을 모시고 종형 남매 일가와 거주하며 2~3년 머무르고, 그후 문화, 안악 등지에서 몇 개월 몇 년간 거주하였으나 역시 유랑생활이었다. 가장 오랫동안 머문 곳은 상해 불란서 조계에서 4년간 가족과 같이 생활한 것이다. 아내를 잃은 이후 10여 년 동안 어머님은 인과 신을 데리고 본국에서 지내시고, 나만 혈혈단신으로 동포들의 집에 의탁하거나 새우잠을 자는 옹색한 집단생활을 계속했었다. 어머님이 9년 만에 다시 중국으로 오셨으나, 어머님은 어머님대로 인과 신을 데리고 따로 생활을 하시고, 나는 나대로 동포들의 집과 혹는 중국 친우들의 집에서 더부살이 생활을 계속하였다. 중경 생활 역시 마찬가지였다.”

 

 

2. 마음을 무찔르는 글귀

 

눈오는 벌판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발걸음 함부로 하지 말지어다

오늘 내가 남긴 자국은 드디어 뒷사람의 길이 되느리

 

분단 전후 백범이 가장 즐겨 썻던 서산대사의 선시이다.

눈보라치는 조국의 위기에 당면하여 일신의 안위나 현실 정치의 이해관계보다

후손들에게 남겨줄 역사를 강조하였다.

 

 

영욕에 초연하야 그윽이 뜰 앞을 보니

꽃은 피었다 지고

가고 머무름에 얽매이지 않고 하늘가 바라보니

구름은 모였다 흩어지는구나.

맑은 창공 밝은 달 아래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어도 불나비는 유독 촛불만 쫒는다.

맑음 물 푸른 숲에 먹을 것 가득하건만

수리는 유난히도 썩은 쥐를 즐긴다.

아! 세상에 불나비와 수리 아닌 자 그 얼마나 될 것인고?

 

백범이 생을 마치는 1949년에 즐겨 쓴 시로, 불나비와 같이 덧없는 영화를 쫓거나 수리와 같이 눈앞의 이익만 탐하는 무리를 질타하는 내용이다.

 

상권

 

[14]

 

끝에 붙인 <나의 소원> 한 편은 내가 우리 민족에게 하고 싶은 말의 요령을 적은 것이다.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과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뢰하고 저희끼리는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현상을 보면 더러는 로크의 철학을 믿으니 이는 워싱턴을 서울로 옮기는 자들이요, 또 더러는 맑스-레닌-스탈린의 철학을 믿으니 이들은 모스크바를 우리의 서울로 삼자는 사람들이다. 위싱턴도 모스크바도 우리의 서울은 될 수 없는 것이요 또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니, 만일 그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예전 동경을 우리 서울로 하자는 자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 삶도 마찬가지다. 남들이 다 하는대로 따라하는 것보다 자기만의 철학을 가지고 자신만의 길을 가야 한다. 자신에 걸맞지 않은 옷을 입고 불편해하기 보다는 자기만의 옷을 입어야 한다. 남들이 가니까 나도 가는게 아니라 내 필요에 의해 나의 길을 가야 그것이 바로 나의 길이요 내 삶이 될 것이다.

 

[15]

우리는 우리의 시체로 성벽을 삼아서 우리의 독립을 지키고, 우리의 시체로 발등상을 삼아서 우리의 자손을 높이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서 우리의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너야 한다. 나보다 앞서 세상을 떠나간 동지들이 다 이 일을 하고 간 것을, 나는 만족하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 비록 늙었으나 이 몸뚱이를 헛되이 썩히지 아니할 것이다.

 

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 삼천만이 저마다 이 이치를 깨달아 이대로 행한다면, 우리나라가 독립이 아니될 수도 없고, 또 좋은 나라 큰 나라로 이 나라를 보전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나 김구가 평생에 생각하고 행한 일이 이것이다.

 

<중략>

 

나는 우리 젊은 남녀들 속에서 참으로 크고 훌륭한 애국자와, 엄청나게 빛나는 일을 하는 큰 인물이 쏟아져 나오기를 믿는다. 동시에 그보다도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저마다 이 나라를 제 나라로 알고 평생 이 나라를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니, 나는 이러한 뜻을 가진 동포에게 이 '범인의 자서전'을 보내는 것이다.

1947. 11. 15일

 

 

1. 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

[21] 1)조상과 가정

우리는 안동 김씨 경순왕의 자손이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어떻게 고려 왕건 태조의 따님 낙랑공주의 부마가 되셔서 우리들의 조상이 되셨는지는 <삼국사기>나 <안동김씨족보>를 보면 알 것이다. 경순왕의 8대손이 충렬공, 충렬공의 현손이 익원공인데, 이 어른이 우리의 시조요, 나는 익원공에서 21대손이다. 충렬공, 익원공은 다 고려조의 공신이거니와 이조에 들어와서도 우리 조상은 대대로 서울에 살아서 글과 벼슬로 가업을 삼고 살았다.

 

그러다가 우리 방조 김자점이 반역죄를 저질러 전 가족이 멸문의 화를 당할 때 우리 조상은 처음에는 경기도 고양군으로 망명하였다가 그곳이 서울에서 가까운 지방이라 다시 먼 곳 황해도로 옮기게 되었다. 이리하여 해주읍에서 서쪽으로 80리 떨어진 백운방 텃골 팔봉산 아래 양가봉밑으로 은거하였는데, 이러한 내력은 족보를 살펴보아도 명백하다.

 

우리 조상이 텃골로 들어오던 시기는 조선시대 전성기로 양반과 상민의 계급 차별이 엄밀하였던 시기이다. 우리 조상들은 멸문의 화를 면하기 위하여 김자점의 족속임을 숨기고 일부러 상놈 노릇을 하였다. 양반의 문화생활을 접어두고 농사 짓고 임야를 개척하며 생계를 유지하다 보니 완전히 ‘판 박힌 상놈’이 되었다.

 

[29]

어머님은 나에게

“너희 집에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로 생기니 너마저 술을 먹는다면, 나는 단연코 자살하더라고 그 꼴을 안 보겠다.”

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겼다.

===> 디오니소스 축제때 술을 마시고 사람들이 미치고 날뛰던 신화이야기가 생각난다. 술이 적당량을 넘어 과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폐가 망신하는 것은 다반사다.

 

주성(酒聖)으로 통하던 시인 조지훈은 술꾼의 급을 18단계로 나누었다. 맨 아래인 9급은 술을 못하지는 않으나 안 마시는 불주(不酒), 8급은 마시긴 하되 겁내는 외주(畏酒)다. 7단 낙주(樂酒)에 이르면 술과 더불어 유유자적하고, 8단 관주(關酒)는 술을 보고 즐거워할 뿐 이미 마실 수 없는 단계다. 맨 위인 9단은 술로 인해 다른 세상으로 떠나게 된 폐주(廢酒)라 했다. 조지훈은 엄청난 주량을 뽐냈던 후배 시인 김관식에게 겨우 3단을 줬다. 고약한 술버릇이 주도에 어긋난다고 봤던 거다.

 

삼성이 벌주, 원샷, 사발주 등을 퇴출하는 절주(節酒) 캠페인을 벌이기로 했다. 술로 인해 사고가 생기면 당사자뿐 아니라 술자리를 주도한 부서장에게까지 책임을 묻고, 신입 경력 사원이나 임원 교육에도 절주 강의를 넣는다고 한다. 술 못 마시면 출세 못한다는 말이 사라지도록 한다는 것이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정한 '한 자리에서 남자 소주 7잔, 여자 소주 5잔'을 고위험 음주의 기준으로 삼기로 했다. -한국경제/2012.09.21 -

 

[33]

아버님은 종종 나에게 이런 훈계를 하셨다.

“밥 벌어먹기는 장타령이 제일이라고, 너도 큰 글 하려고 애쓰지 말고 실용문서에나 주력하여라“

 

[39]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은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58]

새벽 굼벵이는 살고자 흔적 없이 가버리나

저녁 모기는 죽기를 무릎쓰고 소리치며 달려든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삶을 좇아 소리 없이 피신한 경우와, 곧 죽을 줄 모르고 날뛰는 무리(동학교도)를 양반적 입장에서 풍자한 것으로 보인다.

 

[61]

당시 나의 심리 상태는 매우 절박하였다. 먼저 과거장에서 비관적인 생각을 품었다가 희망을 관상서 공부로 옮겼고, 나 자신의 관상이 너무도 못생긴 것을 슬퍼하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리라는 결심을 했었다. 그러나 마음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 또한 묘연하던 차에 동학당의 수양을 받아 신국가. 신국민을 꿈꾸었으나, 이제 와서 보면 그도 역시 바람 잡듯 헛된 일이었다. 이제 패전한 장수의 신세가 되어 안진사의 후의를 입어 생명만은 안전하게 지키게 되었지만, 장래를 생각하면 과연 어떤 곳에다 발을 디여야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던 참이었다.

 

[62]

지금은 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이니.

 

[63]

아무리 발군의 뛰어난 재주와 능력 있는 자라고 의리에서 벗어나면 재능이 도리어 화근이 된다는 것과, 사람의 처세는 마땅히 의리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일을 할 때에는 판단, 실행, 계속의 세 단계로 사업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 등.

고 선생은 경서를 차례로 가르쳐 주는 것보다 나의 정신과 재질을 보아 떨어진 곳을 기워주고 빈 구석을 채워주는 구전심수(문헌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절실히 필요한 바를 파악하여 말과 마음으로 전수하여 주는 것을 말한다. )의 교법 가장 빠른 길이라 여기신 듯하였다.

 

[66]

“일반 백성들이 의를 붙잡고 끝까지 싸우다가 함께 죽는 것은 신성하게 망하는 것이요, 일반 백성과 신하가 적에게 아부하다 꾐에 빠져 항복하는 것은 더럽게 만하는 것일세. 지금 왜놈 세력은 온 나라에 차고 넘쳐 대궐 안까지 침입하여 대신들을 마음대로 내치니 우리나라를 제2의 왜국으로 만든 것 아니겠느가? 만고 천하에 망하지 않은 나라 없고 죽지 않는 사람이 없은즉, 자네나 나나 죽음으로 일사보국 한 가지 일만 남아 있네.”

 

[70]

산은 들이 좁아 할까 저어하여 저 멀리 우뚝 솟아 섰고

물은 가는 배가 두려워 얕게 흐르는구나.

 

-김병연 별호는 김삿갓 또는 김립-

 

[71]

조선의 사대물이라 함은 경주의 인경과 은진 미글, 연산의 쇠솥, 함흥의 장승을 이르는 것이다. 이태조가 세웠다는 함흥의 낙민루도 구경하였다.

[86]

아드님이 못생겼다고 그다지 근심은 마시오. 내가 보건대 창수는 범상입디다. 인중이 짧은 것이라든지 이마가 두툼한 것이라든지 걸음걸이라든지. 장래 두고 보시오. 범의 냄새도 풍기고 범의 소리도 질러서 세상을 크게 놀라게 할는지 알겠소?

 

[94]

문: “네가 어릴 때부터 ‘마음 좋은 사람’ 되기가 소원이 아니었더냐?”

답: “그렇다. 그러나 지금은 원수 왜놈을 죽이려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도리아 죽임을 당하면 한낱 도적의 시체로 남겨질까 미리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까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은 다 거짓이고, 사실은 ‘몸에 이롭고 이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는 소원만 가졌던 것이 아닌가.”

 

[103]

“나무는 조용히 있고 싶어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

 

[106]

불서에 말하기를 “부모와 자녀는 천 번을 태어나고 백 겁이 지나도록 은혜와 사랑을 끼치며 사는 인연”이라고 한 말이 헛말이 아니었다.

 

[126]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이며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예사스런 물고기가 아니리.

충은 반드시 효에서 비롯되니

그대여, 자식 기다리는 어머니를 생각하소서.

 

[152]

한 걸음씩 한 걸음씩

혼탁한 세계에서 청량한 세계로,

지옥에서 극락으로,

세간에서 걸음을 옮겨 출세간의 길을 간다.

 

[154-155]

중이 되려면 제일 먼저 자기 마음을 낮추어야 한다고 하며, 사람에게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금수나 곤충에게까지 자기 마음을 낮추지 않으면 지옥의 고통을 받는다고 하였다.

전날 밤 나을 찾아와 자기 상좌가 되어 달라고 할 때에는 지극히 공손하던 하은당부터 “애, 원종아”를 기탄없이 부르고, “생긴 것이 미련스러워서 고명한 중은 되지 못하겠다. 얼굴이 어쪄면 저다지도 밉게 생겼을까? 어서 나가서 물도 긷고 나무도 쪼개거라” 한다.

 

나는 깜짝 놀랐다. 망명객이 되어 사방을 떠돌아다디던 때에도 내게는 영웅심과 공명심이 있었다. 평생의 한이던 상놈의 껍질을 벗고, 평등하기보다는 월등한 양반이 되어 평범한 양반에게 당해온 오랜 원한을 갚고자 하는 생각이 야욕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야말로 불씨 문중에서는 추오도 용납할 수 없는 악마와 같은 생각이었다. 만일 이런 따위의 악한 생각이 계속해서 마음속에 싹트고 자랄 때에는, 호법선신께 의뢰하여 물리쳐내야 하는 것이었다.

 

[162]

유가 천년이면 불가도 천년이요

내가 보통이면 그대들도 보통이다

 

[173]

“뱀의 꼬리를 붙잡고 올라가면 용의 머리를 볼 터이지요.”

 

[174]

창수라는 이름이 쓰기 매우 불편하다 아여 성태영과 유완무가 이름을 고쳐 지어주었다. 이름은 김구라 하고, 호는 연하, 자는 연상이라 고쳐서 행세하기로 하였다.

 

[192]

준례는 당시 18세로 뜻에 맞는 남자를 골라 자유결혼을 원하고 있었는데, 양성칙이 나에게 의향이 있는지를 물은 것이다. 나는 당시에 조혼으로 인한 여러 가자 폐해를 절감하던 터여서 준례에게 지극한 동정심이 생겼다.

사평동에 가서 준례를 만나본 후 혼약이 성립되게 되자 강성모 측에서 선교사에게 고발했다. 교회에서 나에게 그만두도록 권고하였고 친구 중에서 만류하는 자가 많았다. 그때 신창희는 은율읍에 살고 있었는데, 나는 최준례를 사직동 내 집으로 데려가 굳게 약혼하고 난 뒤, 경성 경신학교에 유학 보냈다.

처음에는 교회의 금지 권고를 듣지 않는다 하여 교회가 책벌을 선언하였으나, 끝내 불복할 뿐 아니라 구식 조혼을 인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것은 교회로서 잘못이고 사회악풍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항의하였더니, 군예빈이 혼례서를 작성하여 주고 책벌을 해제하였다.

 

[203]

모양만 상놈이 아니고 정신가지 상놈이 되고 말았다. 그이들은 민족이 무엇인지. 국가가 무엇인지 터럭만큼의 각성도 없는 밥벌레에 불과했다.

 

[215]

나부터 망국의 치욕을 당하고 나라 없는 아픔을 느끼나, 사람이 사랑하는 자식을 잃으면 슬퍼하면서도 살아날 것 같은 생각이 나는 것처럼, 나라가 망하였으나 국민이 일치 분발하면 곧 국권이 회복될 것 같이 생각되었다. 그렇게 하려면 후세들의 애국심을 앙양하여 장래에 광복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되어, 계속하여 양산학교를 확장하고 중소학부에 학생을 늘려 모집하면서 교장의 임무를 다했다.

 

[222]

나의 혀 끝에 사람의 생사가 달렸다는 것을 각오하였다.

 

[226-227]

왜놈이 신문하는 방법에는 대략 세 가지 수단이 있다.

첫째, 가혹한 고문이다. 채찍과 몽둥이로 난타하는 것, 두 손을 등위에 포개고 오랏줄로 결박하여 천장의 쇠고리에 끌어올리고서, 심문받는 자를 둥근 걸상 위에 세웠다가 오랏줄 한 끝을 한편에 잡아매고 발판을 뽑아버리면 온몸이 공중에 매달려 질식하게 되는데, 그수 결박을 풀고 냉수를 온몸에 끼얹어 숨이 돌아오게 하는 것. 화로에 쇠막대기를 즐비하게 늘어놓아 벌겋게 달군 후 그 쇠막대기로 온몸을 함부로 지지는 것, 손가락 크기의 농목 세 개를 세 손가락 사이에 기우고 나무 양끝을 노끈으로 동여매는 것, 거꾸로 매단 후 곳구멍에 냉수를 부어넣는 것 들이 그것이다.

 

둘째, 굶기는 것이다. 신문할 때 음식을 보통 수인의 반으로 줄여 생명만 유지하게 해놓고, 친척이 사식을 청원하여도 신문 주임의 허가를 얻지 못하면 도로 내보낸다. 신문 주임 되는 놈은, 사실 유무는 관계치 않고 거짓말이라고 왜놈들이 좋아할 만한 말을 하는 수인에게는 사식을 허락하고, 반항성이 있어 보이면 절대로 허가하지 않는다. 그래서 유치장에서는 자연히 사식을 받아먹는 자는 강경치 못해 보이게 된다.

 

그밖에 한 가지가 온화한 수단이다. 좋은 음식도 대접하고 훌륭히 장식한 아카시의 방으로 데려가 극진히 공경하며 점잖게 대우하는 바람에, 가혹한 고문을 참아낸 자도 그 자리에서 실토한 사람이 더러 있다.

내가 신체 고문에는 한두 번 참아보았고, 저놈이 발악을 하면 나도 감정이 발하여 자연 저항력이 생기므로 인내하였지만, 둘째와 셋째를 당하여 참아내기는 지극히 어려웠다. 두 번째는 굶주림이니, 처음엔 밥이라야 껍질 절반 모래 절반에 반찬은 소금이나 쓴 장아찌 꽁댕이를 주는데, 구미가 없어서 안 먹고 도로 보내기도 하였다.

 

[228]

그런 때 다른 사람들이 문전에서 사식을 먹으면, 고깃국과 김치 냄새가 코에 들어와서 미칠 듯이 먹고 싶어진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음식 냄새가 코에 들어올 때마다, 나도 남에게 해가 될 말이라도 하고서 가져오는 밥이나 다 받아 먹을까, 또한 아내가 나이 젊으니 몸이라도 팔아서 좋은 음식이나 늘 하여다 주면 좋겠다 하는 더러운 생각이 난다.

 

박영효의 부친이 옥에서 섬거적을 뜯어먹다가 죽었다는 말, 소무가 전모를 씹으며 19년 동안 한나라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는 글과, 전날에 알몸으로 고초를 받던 일을 생각했다. “나의 육체를 욕보일 수 있을지언정 나의 정신은 뺏을 수 없다”고 같이 수감된 동지들에게 주창하던 기개와 절개를 생각하면서, 이러다가 인간의 본성은 사라져 없어지고 짐승의 본능만 남는 것이 아닐까 자책하던 때, 아카시아 방에서 나를 극진히 우대를 하면서 신문한 것이었다.

 

[238]

나의 심리 상태가 체포된 이전과 이후에 큰 변동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체포되기 이전에는 십수년 동안 성경을 들고 교회당에서 설교하거나 교편을 들고 교실에서 학생을 교훈하였으므로, 하나하나 일마다 양심을 본위로 삼아서, 삿된 마음이 생길 때마다 먼저 자기를 자책하지 않고는 감히 다른 사람의 그릇됨을 탓하지 못하는 것이 거의 습관이 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학생들과 친우들 간에 충실하다는 신망을 받고 지냈고, 매사에 자기로부터 실천하여 남에 미치는 것이 습관이 되었건만, 어찌하여 불과 반년 만에 심리에 큰 변동이 생겨났는가를 연구해 보았다.

 

그러고보면, 나의 변화는 경무총감주에서 신문받을 때 와타나베 놈이, 다시 마주앉은 오늘의 김구가 17년 전 김창수인 것도 모르고, 대담하게 자기 가슴에는 x 광선을 붙이고 있어 출생 이후 지금것 나의 잎에 행동을 투시하고 있으니 터럭만큼이라도 숨기면 당장 쳐죽이겠다고 협박하던 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태산처럼 크게 보이던 왜놈이 그때부터 겨자씨와 같이 작아 보였다. 무릇 일곱 차례나 매달려 질식된 후 냉수를 끼얹어 살아나곤 하였디만, 마음은 점점 강고해져 왜놈에게 국권을 빼앗긴 것은 일시적 국운 쇠퇴요, 일본은 조선을 영구통치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불 보듯 확연한 사실로 생각되었다.

 

[240]

심리 상태가 변한 것은 나뿐 아니었다. 동지들도 다 평소에 비하여 크게 변했다. 그중 고정화는 용모부터 험상궂은데다 마음까지 변하여 옥중에서 소위 관리를 괴롭게 하기로 유명했다. 그는 음식을 먹다가 밥에 돌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땅에서 모래흙을 주워 입에 넣었다. 그리고 이를 밥과 혼합하여 싸가지고 전옥 면회를 청해, 자기가 받은 1년 징역을 종신역으로 고쳐 달라 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은 모래를 먹고 살 수 없는데 내가 먹는 한 그릇 밥에서 골라낸 모래가 밥의 분량만 못하지 않으니, 이것을 먹고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기왕 죽을 진댄 징역이나 중하게 지고 죽는 것이 영광이다. 1년도 종신이요, 종신도 종신이 아닌가?”

전옥은 얼굴색이 주홍같이 되어서 식당 간수를 불러 꾸짖고 밥 짓는 데에 극히 주의하여 모래가 없도록 개량했다.

 

[261]

도당은 수효만 많고 정밀치 못한 것보다는 수효가 적어도 정밀한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각 도 지방 책임 유사에게 노사장이 매년 각 분 설에서 자격자 한 명씩을 정밀 조사하여 보고케 합니다. 그 자격자란 것은,

첫째, 눈빛이 굳세고 맑을 것

둘째, 아래가 맑고

셋째, 담력이 강실할 것

넷째, 성품이 침착할 것

 

자격자에게 착수하는 방법은, 먼저 그 자격자가 즐기고 좋아하는 것을 알아보고, 여색을 좋아하는 자에게는 미색으로, 술을 즐겨 마시는 자에게는 술로, 재물을 좋아하는 자는 제물로 극진히 정을 베풀어 환심을 사서 친형제 이상으로 정의가 밀착케 된 후 훈련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263]

우리 법에 4대 사형죄가 있습니다.

제1조, 동지의 처첩을 간통한 자.

제2조, 체포, 신문 때에 자기 동료를 실토한 자.

제3조, 도적질할 때 장물을 은닉한 자

제4조, 동료의 재물을 강탈한 자입니다.

 

[267]

그리하여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구’(九)라 하고, 호를 ‘백범’(白凡)이라 고쳐서 동지들에게 언포하였다. 연하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 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복역중에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고 할 때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호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 달라’고.

 

[279]

나는 소작인 준수규칙 몇 조를 반포했다.

- 도박하는 소작인의 소작권을 허락하지 않음

- 학령 아동을 입학시키는 자는 소작지 중 가장 좋은 논 두 마지기씩을 더해 줌

- 학령 아동이 있는데 입학시키지 않는 자는 소작지 중 좋은 논 두마지기를 도로 회수함.

- 농업에 근실한 성적이 있는 자는 조사하여 추수시 곡물을 상으로 줌.

 

[283]

독립은 만세만 불러서 되는 것이 아니고 장래 일을 계획, 진행하여야 할 터인즉 나의 참, 불참이 문제가 아니니, 자네들은 어서 만세를 부르라.”

===> 독립은 만세만 불러서 되는 것이 아니다. 말로서 독립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하기 위한 계획을 하고 차근차근 하나씩 실행을 해나가는 것이다. 혹시 나도 말로만 하고 있는 것이 있는것이 나 자신을 살펴보게 하는 글이다.

 

[288] 대개 사람이 귀하면 궁함이 없겠고 궁하면 귀함이 없을 것이나, 나는 귀해도 궁하고 궁해도 궁한 일생을 지냈다. ]

 

[289]

자식들에게 대하여도 아비된 의무를 조금도 못하였으므로 내가 아비라 하여 자식된 의무를 하여 주기도 원치 않는다. 너희들은 사회의 은택을 입어서 먹고 입고 배우는 터이니, 사회의 아들이라는 심정으로 사회를 부모처럼 효로 섬기면 내 소망은 이에서 더 만족이 없을 것이다.

 

[290]

내 일생에서 제일 행복이라 할 것은 기질이 튼튼한 것이다. 거의 5년의 감옥 고역에 하루도 병으로 일 못한 적 없었고, 인천감옥에서 학질에 걸려 반나절 동안 역을 쉰 적이 있을 뿐이다. 병원이란 곳에는 혹을 떼러 제중원에 1개월, 상해에 온 후 서반아감기로 20일 동안 치료한 것뿐이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지 1년이 넘은 민국 11년(1929, 54세) 5월 3일에 종료하였다.

 

백범일지 하권

 

1. 상해 임시 정부 시절

 

[298]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을 하고 죽는 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하와이 동포들을 만나보고 돌아오다 비행기 위에서 죽으면 시신을 아래로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 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뱃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302]

국무회의에서, 백범은 여러 해 감옥생활을 하여 왜놈 사정을 잘 알고 혁명시기는 인재의 정신을 보아서 등용한다며 “이미 임명된 것이니 사양하지 말고 공무를 집행하라”고 강권하였다. 결국 나는 경무국장에 취임하였다.

 

[307]

나의 신조는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고,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조로 인하여 종종 해를 당하면서도 천성이라 평생 고치지 못하였다.

 

[310]

우리 독립운동이 우리 한민족의 독자성을 떠나서 어느 제3자의 지도, 명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자존성을 상실한 의존성 운동입니다. 선생은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배되는 말을 하심이 크게 옳지 못하니, 아우는 선생의 지도를 따를 수 없으며 선생의 자중을 권고합니다.

 

[313]

레닌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식민지운동은 복국운동이 사회운동보다 우선한다”고 발표하였다. 이 말이 한번 떨어지자 어제까지 민족운동 즉 복국운동을 비난,조소하던 공산당원들이 돌변하여 독립,민족운동을 공산당의 당시로 주창하였다.

 

[315]

3부가 점차 할거하여 군정, 민정을 합작하지 않고 세력을 다투어 서로 전쟁까지 하였다.

스스로 업신여기면 다른 사람도 나를 업신여기게 된다.”고 함은 바로 이를 가리킨 격언이라 할 수 있다.

 

2.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323]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 해도 과거 반생에서 맛본 방랑생활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일본영감 이봉창-

 

[326] “제 일생에 이런 신임을 받은 것은 선생께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

 

”“저는 영원한 쾌락을 향유코자 이 길을 떠나는 터이니, 우리 두 사람이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으십시다.”

 

[328] 일본천황 불행부중不幸不中

한인 이봉창이 일본 천황을 저격하였으나 불행히도 명중하지 않았다.

 

[337]

“뜻을 품으면 마침내 일을 이룬다”

 

[332]

운이 다하면 천복비도 벼락친다.

 

[334]

나는 윤봉길에게 이렇게 주의시켰다.

“여보, 그것이 무슨 말이오? 모수가 꿩을 쏠 대에도 날게 하고 쏘아 떨어뜨리고, 숲 속에서 자고 있는 사슴은 달리게 한 후 쏘는 것이 사냥의 진정한 맛이오. 군이 지금 그러는 것은 내일 거사에 성공할 자신감이 미약하기 때문이 아니오?”

 

3. 피신과 유랑의 나날

 

[345-346]

남호 연우루 동문 밖 10리쯤에 한나라 주매신의 묘가 있다. 주매신은 글만 읽고 세상을 모르는 서치-글읽기에만 골몰하여 세상일에는 바보 같은 사람- 같았는데, 하루는 부인 최씨가 농사일을 나가면서 보리나락을 잘 보라고 부탁하였다. 그런데 아내가 일을 마치고 밭에서 돌아와 보니 보리는 소낙비에 떠내려 가는데, 남편은 그것도 모른 채 독서만 하고 있었다. 주매신의 아내는 그만 목수에게 개가하고 말았다. 그후 주매신이 과거에 급제하여 회계 태수가 되어 돌아오는 길에 도로를 수리하는 여자를 보니, 자기의 엣 처가 아닌가. 그 여자를 뒷수레에 태우게 하여 관사에서 불러 보니, 그년는 주매신이 영귀하게 된 것을 보고 다시 부인이 되기를 원하였다. 그러자 주매신은,

“물 한 동이를 길어다 땅에다 쏟은 후, 다시 주워 담아 한 동이가 되면 같이 살자.” 고 하였다. 그려는 그와 같이 해보니 물이 동이에 다시 차지 못함을 보고, 낙범정 앞 호수에 빠져 죽었다는 것이다.

 

[349]

14년 동안 산수에 주렸는데, 10여 일 사이에 실컷 산수를 즐겼다.

 

[352]

명대 시절 우리나라의 의관문물은 모두 중국제도에 따른다 하고서, 실제는 아무 이익도 없이 불편하고 고통스럽기만 한 망건.갓 등 망할 놈의 기구만 들여왔으니, 생각만 하여도 이가 시리다.

우리 민족의 비운은 사대사상의 산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질적인 국리민복을 도외시하고, 주희학설 같은 것은 원래 주희 이상으로 강고한 이론을 주창하여 사색 당파가 생겨 수백년 동안 다투기만 하다 민족적 원기는 다 소진하고, 발달된 것은 오직 의뢰성뿐이니, 망하지 않고 어찌하리오.

 

[353]

정주(성리학)의 방귀를 ‘향기롭다’고 하던 자들을 비웃던 그 입과 혀로 레닌의 방귀는 ‘달다’하니, 청년들이여 정신을 좀 차릴지어다.

나는 결코 정주학설의 신봉자가 아니고 마르크스와 레닌주의 배척자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특성과 백성들의 수준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연구. 실시하려고 머리를 쓰는 자 없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

 

4. 다시 민족운동의 전선으로

 

[361-362]

나는 안공근을 상해로 파견하여 자기 가솔과, 안중근 의사의 부인인 큰형수를 기어이 모셔오라고 거듭 부탁하였다. 그런데 공근은 자기의 가속들만 거느리고 왔을 뿐, 큰형수를 데려오지 않았다. 나는 크게 꾸짖었다.

“양반의 집에 화재가 나면 사당에 가서 신주부터 안고 나오거늘, 혁명가가 피난하면서 국가를 위하여 살신성인한 의사의 부인을 왜구의 점령구에 버리고 오는 것은, 안군 가문의 도덕에는 물론이고 혁명가의 도덕으로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군의 가족도 단체생활 범위내에 들어오는 것이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본의에 합당하지 않겠는가”

 

[365]

어머님은 주야로 상해에 있는 자손을 잊지 못하시고 생활비에서 절약하여 약간의 금전도 부쳐 보내셨지만, 그것은 타오르는 화로 속의 한 점 눈송이처럼 별 보탬이 되진 못했다.

 

[367]

9년 만에 모자 상봉하는 첫 말씀.

나는 지금부터 시작하여‘너’라는 말을 고쳐 ‘자네’라 하고 잘못하는 일이라도 말로 꾸짖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네. 듣건대 자네가 군관학교를 하면서 다수 청년을 거느리고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나도 체면을 세워주자는 것일세.

이로 인해 나는 나이 육십에 어머님이 주시는 큰 은전을 입었다.

 

[371]

“자네의 생명은 상제께서 보호하시는 줄 아네. 사악한 것이 옳은 것을 범하지 못하지. 하나 유감스러운 것은 이운환 정탐꾼도 한인인즉, 한인의 총을 맞고 산 것은 일인의 총에 죽은 것보다 못하네.”

 

5. 중경 임시정부와 광복군

 

[379]

어머님은 일찍이 노복은 물론이고, 팔십 평생 ‘고용’두 글자와도 상관이 없으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손수 옷을 꿰메고 밥을 짓고, 일생 동안 다른 사람의 손으로 당신의 일을 시켜보지 않으신 것도 특이하다고 하겠다.

 

[386]

봉빈은 비록 여성이나 총명.과감하여 전시공작의 효과와 능률이 중국 방면에까지 널리 알려져 칭찬을 받았으며, 봉빈 자신도 항상 자기가 경이적인 공헌을 하리라고 마음먹고 있어 장래가 촉망되는 바이다.

 

[389]

석오 이동녕 선생은 재덕이 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서 선두에 내세우고, 스스로는 남의 부족을 보충하고 고쳐 인도하는 일이 일생의 미덕이었다.

 

395. 부모와 조부모들이 비밀히 교훈하기를 ‘우리의 독립정부가 중경에 있으니, 왜군 앞잡이로 끌려다니다가 개죽음을 하지 말고 우리 정부를 찾아가서 독립전쟁을 하다가 영광스러운 죽음을 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 말에 따라 일본 부대에서 탈주하다가 더러는 죽고 더러는 살아 우리 정부를 찾아 온 것입니다.”

 

[397]

우리 청년학생들은 훈련시키는 미국 장교들이 각자 맡은 과목을 실습하는 광경을 구경하였다. 첫째로 본 것은 심리학 박사가 각 학생들을 심리학적으로 시험하여 모험성이 풍부한 자는 파괴술을, 지적 능력이 강한 자는 적정 정탐으로, 눈 밝고 손재주 있는 자는 무전기 사용법을 분과 과목으로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심리학자가 시험 성적의 개요를 보고하였는데, 특히 한국 청년은 앞으로 촉망된다고 하였다.

 

[402] 김구의 생활

내 일생을 통하여 가족을 모아서 가정생활을 한 적은 시간으로도 짧다. 18세에 붓을 던진 이후 시종 유랑생활이었으니, 장련읍 사직동 생활에서 모친을 모시고 종형 남매 일가와 거주하며 2~3년 머무르고, 그후 문화, 안악 등지에서 몇 개월 몇 년간 거주하였으나 역시 유랑생활이었다. 가장 오랫동안 머문 곳은 상해 불란서 조계에서 4년간 가족과 같이 생활한 것이다. 아내를 잃은 이후 10여 년 동안 어머님은 인과 신을 데리고 본국에서 지내시고, 나만 혈혈단신으로 동포들의 집에 의탁하거나 새우잠을 자는 옹색한 집단생활을 계속했었다. 어머님이 9년 만에 다시 중국으로 오셨으나, 어머님은 어머님대로 인과 신을 데리고 따로 생활을 하시고, 나는 나대로 동포들의 집과 혹는 중국 친우들의 집에서 더부살이 생활을 계속하였다. 중경 생활 역시 마찬가지였다.

 

[403]

그후 문 밖을 나가보니 정차장 있는 곳에 시체가 형형색색으로 흩어져 있는데, 앉아서 죽은 자, 누워서 죽은 자, 혹은 반동강 시체 등 참혹한 광경은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중경에서 폭격을 당할 때에 중국의 국민성이 위대한 것을 깨달았. 높은 큰 건물이 삽시간에 재가 되는데도, 집주인들은 한편으로 가족 중 피살자를 매장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생존자들은 불 붙지 않은 나머지 기둥과 서까래를 모아 임시 가옥을 건설하였다. 그 일을 하는 중에 웃는 얼굴로 비장한 빛을 보이지 아니하므로, 나는 그들을 볼 때 이러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405]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라는 문구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쓰이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406]

중경의 기후는 9월 초부터 다음해 4월까지는 구름과 안개 때문에 햇빛을 보기 힘들며, 저기압의 분지라 지면에서 솟아나는 악취가 흩어지지 못해 공기는 극히 불결하며, 인가와 공장에서 분출되는 석탄연기로 인하여 눈을 뜨기조차 곤란하였다. 중경에 거주하는 외국의 영사관이나 상업자들이 3년 이상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에서, 우리가 6~7년씩이나 가주하다 큰아들 인이도 역시 폐병으로 사망하였으니, 알고도 불가피하게 당한 일이라 좀처럼 잊기 어렵다.

 

[408]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 안준생은 안중근의 아들이며, 미나미 지로를 자신의 애비라 칭하였다)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 중국 관헌에게 부탁하였으나 관원들이 실행치 않았다.

 

7. 조국에 돌아와서

 

[409]

고국을 떠난 지 27년 만에 김포 비행장에 착륙하였다. 착륙 즉시 눈앞에 보이는 두 가지 감격이 있으니, 기쁨이 그 하나요 슬픔도 그 하나이다.

 

[411]

22세때 인천감옥에서 사형을 받았다가 23세때 탈옥, 도주하였고, 41세 때 17년 징역을 언도받고 인천감옥으로 이감하였다. 17년 전에 파괴하고 탈주하였던 그 감옥을 다시 철망에 얽히어 들어가니 말없는 감옥도 나를 아는 듯, 내가 있던 자리는 옛날 그대로나를 맞아주었다. 그러나 17년(1929) 전 김창수는 김구로 이름을 바꾸었고, 세월 또한 오래 흐른 관계로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구속된 몸으로 징역 공사한 곳이 축항공사장이었다. 그 항구를 바라보니 나의 피와 땀이 젖은 듯하고, 면회차 부모님이 내왕하시던 길에는 눈물 흔적이 남아 있는 듯 49년 전 옛날 기억도 새로워 감개무량하였다.

 

[412]

물러나 속세의 일을 돌아봊니

마치 꿈속의 일만 같다.

 

나의 소원

 

[423]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는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내 과거의 70 평생을 이 소원을 위해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하려고 살 것이다. 독립이 없는 백성으로 70 평생에 설움과 부끄러움과 애탐을 받은 나에게는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이 완전하게 자주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보다가 죽는 일이다.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424]

나는 공자, 석가, 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서 새운 천당, 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대,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피와 역사를 같이하는 민족이란 완연히 있는 것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못 됨과 같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 없는 것은, 마치 형제도 한 집에서 살기에 어려움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둘 이상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서 명령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근본문제가 되는 것이다.

 

[425]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이 모양으로 모든 사상도 가고 신앙도 변한다. 그러나 혈통적인 민족만은 영원히 성쇠흥망의 공동 운명의 인연에 얽힌 한 몸으로 이 땅 위에 남는 것이다. 사해동포(四海同胞)의 크고 아름다운 목표를 향하여 인류가 향상하고 전진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요 마땅히 할 일이나, 이것도 현실을 떠나서는 안되는 일이니,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도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이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으로 하여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 민족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을뿐더러, 우리 민족의 정신력을 자유로 발휘하여 빛나는 문화를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전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운 뒤에는,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 세계에는 새로운 생활원리의 발견과 실천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담당한 천직이라고 믿는다.

 

[426]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런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426-427]

나의 정치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

자유란 무엇인가? 절대로 각 개인이 제멋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 하면 이것은 나라가 생기기 전이나, 저 레닌의 말 모양으로 나라가 소멸된 뒤에나 있는 일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인류에게는 이러한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란 일종의 규범의 속박이기 때문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법이다. 개인의 생활이 국법에 속박되는 것은 자유 있는 나라나 자유 없는 나라나 마찬가지다.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범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 일개인에서 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 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 독재다. 군주나 기타 개인 독재자의 독재는 그보다도 큰 조직의 힘이거나 국제적 압력이 아니고는 깨뜨리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 나라의 양반 정치고 일종의 계급 독재이어니와 이것은 수백년 계속하였다. ... 다만 정치에 있어서 독재가 아니라 사상, 학문, 사회생활, 가정생활, 개인생활까지도 규정하는 독재였다. 이 독재정치 밑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는 소멸되고 원기는 마멸된 것이다.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 경제, 산업에까지 미치었다. 우리나라가 망하고 민력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실로 여기 있었다. 왜 그런고 하면 국민의 머리 속에 아무리 좋은 사상과 경륜이 생기더라도 그가 집권 계급의 사람이 아닌 이상, 또 그것이 사문난적이라는 범주 밖에나지 않는 이상 세상에 발표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싹이 트려다가 눌려 죽은 새 사상, 싹도 트지 못하고 밟혀버린 경륜이 얼마나 많았을까. 언론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통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오직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만 진보가 있는 것이다.

 

[428]

어느 한 학설을 표준으로 하여서 국민의 사상을 속박하는 것은 어느 한 종교를 국교로 정하여서 국민의 신앙을 강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옳지 아니한 일이다. 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또 철학을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

 

[429]

모든 생물에는 다 환경에 순응하여 저를 보존하는 본능이 있으므로 가장 좋은 길은 가만히 두는 것이다. 작은 꾀로 자주 건드리면 이익보다도 해가 많다. 개인생활에 너무 잘게 간섭하는 것은 결코 좋은 정치가 아니다. 국민은 군대의 병정도 아니요. 감옥의 죄수도 아니다. 민주주의란 국민의 의사를 알아보는 한 절차 또는 방식이요. 그 내용은 아니다. 즉 언론의 자유, 투표의 자유, 다수결에 복종, 이 세 가지가 곧 민주주의 이다.

 

[430]

백성들의 작은 의견은 이해관계로 결정되거니와, 큰 의견은 그 국민성과 신앙과 철학으로 결정된다. 여기서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이 생긴다. 국민성을 보존하는 것이나 수정하고 향상하는 것이나 문화와 교육의 힘이요, 산업의 방향도 문화와 교육으로 결정됨이 큰 까닭이다.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 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국민교육이다. 그러므로 좋은 민주주의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될 것이다. 건전한 철학의 기초 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의 교육은 그 개인과 그를 포함한 국가에 해가 된다. 인류 전체를 보아도 그러하다.

 

현재의 우리들의 이론으로 우리 자손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속박함이 없는 나라, 천지와 같이 넓고 자유로운 나라, 그러면서도 사랑의 덕과 법의 질서가 우주 자연의 법칙과 같이 준수되는 나라가 되도록 우리나라를 건설하자고. 그렇다고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를 그대로 직역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소련의 독재적인 민주주의에 대하여 미국의 언론 자유적인 민주주의를 비교하여서 그 가치를 판단하였을 뿐이다.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한다면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기초로 한 자를 취한다는 말이다.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반드시 최후적인 완성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인생의 어느 부분이나 다 그러함과 같이 정치형태에 있어서도 무한한 창조적 진화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와 같이 반만년 이래로 여러 가지 국가 형태를 경험한 나라에는 결점도 많으려니와, 교묘하게 발달된 정치제도도 없지 아니할 것이다.

 

[431]

가까이 이조시대만 보더라도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같은 것은 국민 중에 현인의 의사를 국정에 반영하는 제대로 멋있는 제도요, 과거제도와 암행어사 같은 것도 연구할 만한 제도다. 역대 정치제도를 상고하면 반드시 쓸 만한 것도 많으리라고 믿는다. 이렇게 남의 나라의 좋은 것을 취하고, 내 나라의 좋은 것을 골라서 우리나라에 독특한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도 세계의 문운(文運)에 보태는 일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가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432]

우리 민족이 주연배우로 세계의 무대에 등장할 날이 눈앞에 보이지 아니하는가. 이 일을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양식의 건립과 국민교육의 완비다, 내가 위에서 자유의 나라를 강조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최고의 문화 건설의 사명을 달할 민족은 일언이 폐지하면, 모두 성인(聖人)을 만드는데 있다. 대한사람이라면 간 데마다 신용을 받고 대접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주장하되, 그것은 저 짐승들과 같이 저마다 제 배를 채우기에 쓰는 자유가 아니요, 제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 살게 하기에 쓰이는 자유다.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 우리는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남의 덕을 입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에게, 이웃에게, 동포에게 주는 것으로 낙을 삼는 사람이다.우리 말에 이른바 선비요 점잖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게으르지 아니하고 부지런하다. 사랑하는 처자를 가진 가장은 부지런 할 수 밖에 없다.한없이 주기 위함이다.힘드는 일은 내가 앞서 하니 사랑하는 동포를 아낌이요. 즐거운 것은 남에게 권하니 사랑하는 자를 위하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네가 좋아하던 인후지덕(仁厚之德)이란 것이다.

 

[433]

내가 이기심으로 남을 해하면 천하가 이기심으로 나를 해할 것이니, 이것은 조금 얻고 많이 빼앗기는 법이다. 일본의 이번 당한 보복은 국제적, 민족적으로도 그러함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실례다.

 

민족의 행복은 결코 계급투쟁에서 오는 것도 아니요. 개인의 행복이 이기심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동포 여러분! 이러한 나라가 될진대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네 자손을 이러한 나라에 남기고 가면 얼마나 만족하겠는가. 공자께서도 우리 민족이 사는 데 오고싶다고 하셨으며, 우리 민족을 仁을 좋아하는 민족이라 하였으니 옛날에도 그러하였거니와, 앞으로는 세계 인류가 모두 우리 민족의 문화를 이렇게 사모하도록 하지 아니하려는가. 나는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우리나라의 젊은 남녀가 다 이 마음을 가질진대 아니 이루어지고 어찌하랴! 나도 일찍이 황해도에서 교육에 종사하였거니와 내가 교육에서 바라던 것이 이것이었다. 내 나이 이제 70이 넘었으니, 직접 국민교육에 종사할 시일이 넉넉지 못하거니와, 나는 천하의 교육자와 남녀학도들이 한번 크게 마음을 고쳐먹기를 빌지 아니할 수 없다.

 

1947년 샛문 밖에서

 

3. 내가 저자라면

3-1. 이 책의 전체적 뼈대를 논하라.

 

백범일지 상권은 아들이 성장하면 아비의 일생 경력을 알 곳이 없기 때문에 인 과 신 두 아들에게 자신이 살아온 개인적인 행로를 들려주는 글이다. 53세때 상해 법조계 마랑로 보경리 4호 임시정부 청사에서 1년여 시간을 들여서 기술했다. 그 동기로 말하면,

 

“젊은 나이에 글공부를 걷어치우고 예순이 되도록 큰 뜻을 품은 채, 나의 보잘것 없는 역량과 고루한 재주를 돌아보지 않고 성패와 영욕에도 연연하지 않으며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30여 년 분투하였으나 하나도 이룩한 것이 없었다. 10여 년 동안 임시정부를 고수하였으나, 기미년 이후 독립운동이 점점 퇴조하여 정부라는 명칭마저 간수하기 어려웠다. 당시 떠돌던 말과 같이, 몇몇 동지와 더불어 고성낙일- 고립무원의 외딴 성에 해마저 진다 는 뜻으로 패망이 얼마 남지 않거나 위세가 덜어진 쓸쓸한 모습을 말한다- 에 슬픈 깃발을 날리며 스스로 헤아리기로, 독립운동도 부진하고 나이도 죽을 대가 가까워졌으니,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 새끼를 얻지 못한다“는 말처럼 무슨 일이든지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침체한 국면을 타개할 목적으로 한편으로는 미국, 하와이 동포들에게 편지하여 금전의 후원을 부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철혈남아들을 물색하여 테러(암살, 파괴)운동을 게획하던 때 <백법일지 상권>을 기술하였다. ”

 

상권을 기술하던 때 임시정부는 괴국인은 고사하고 한인도 국무위우너들과 10여 명의 의정원 의원 이외에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으니, 당시 일반의 평판과 같이 임시정부는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었다.

 

하권은 백범이 50년 동안 분투한 사적을 기록하여, 숱한 과오를 거울삼아 다시는 이같은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다. 하권을 쓸 무렵에는 의정원 의원과 국무위원들의 얼굴에서 수심에 찬 기색도 싹 가시고 내무, 외무, 군무, 재무 등 4부 행정이 비약적으로 진전되었다.

 

 

<백범일지> 상, 하 권의 집필 시기와 집필 동기의 차이로 인해 상권의 내용이 주로 백범 개인의 성장과 신변활동에 관한 것이다. 하권은 백범 개인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와 주변 인물들에 관해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차례

교감 원칙

일어두기

백범 출간사

상권

인, 신 두 아들에게

1. 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

1)조상과 가정

2) 난산의 개구쟁이

3)궁핍한 배움길

 

2. 시련의 사회 진출

1)과거 낙방

2)동학의 세계로

3)팔봉 접주

4)청계동 안진사

5)스승 고능선

 

3. 질풍노도의 청년기

1)북행 견문과 청국 시찰

2)김이언 의병

3)인연 없는 스승의 손자사위

4)복수 의거, 치하포 사건

5)첫번째 투옥

6)역사적인 심문

6)사형수의 옥중 생활

8)파옥

 

4. 방랑과 모색

1)서울로 도피

2)삼남견문록

3)출세간의 길

4)장발의 걸시승

5)동지를 찾아서

6)스승과의 논쟁

7)부친상, 미혼처의 죽음

8)교육자의 길, 그리고 결혼

 

5. 식민의 시련

1)을사늑약과 구국운동

2)안악 양산학교와 하기 사범 강습

3)각 군 순회 교육운동

4)재령지역 교육운동의 추억

5)신민회와 안악 사건

6)세번째 투옥과 고문

7)기약없는 15년형

8)서대문 감옥으로

9)옥중의 의,식,주

10)기인과 영웅

11)다시 인천감옥으로

 

6. 망명의 길

1)출옥, 고향으로

2)농감생활

3)상해 망명

4)경무국장에서 국무령까지

5)내 인생을 돌아보며

 

하권

하권을 쓰고 나서

 

1. 상해 임시정부 시절

1)상해에서 첫출발

2)경무국장 시절

3)사상 갈등과 국민대표대회

4)무정부상태의 국무령

 

2.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1)‘일본영감’ 이봉창

2)일본 천황 불행부중

3)윤봉길과의 짧은 만남

4)홍구공원의 쾌거

 

3. 피신과 유랑의 나날

1)위기일발의 상해 탈출

2)광동인 장진구

3)시골 농부의 민족주의

4)여사공과의 선상생활

 

4. 다시 민족운동의 전선으로

1)장개석 면담과 낙양군관학교

2)5당 통일운동

3)폭격 속의 남경생활

4)어머님에 대한 추억

5)가슴에 박힌 총탄

 

5. 중경 임시정부와 광복군

1)전시수도 중경으로

2)7당 통일회의

3)광복군 창설

4)대가족과 대륙에 묻힌 영혼

 

6. 행방 전후의 대륙

1)한국독립당과 광복군

2)OSS 국내침투훈련

3)왜적의 조기항복

4)중경생활 회고

5)해방 직후의 상해

 

7. 조국에 돌아와서

1)감격의 귀환

2)지나온 자취를 찾아서

3)삼남지방 순회

4)서부지방 순회

 

나의 소원

백범 연보

인물 찾아보기

 

 

3-2.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눈오는 벌판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발걸음 함부로 하지 말지어다

오늘 내가 남긴 자국은 드디어 뒷사람의 길이 되느리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은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독립은 만세만 불러서 되는 것이 아니고 장래 일을 계획, 진행하여야 할 터인즉 나의 참, 불참이 문제가 아니니, 자네들은 어서 만세를 부르라.”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일본영감 이봉창-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범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 일개인에서 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 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또 철학을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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