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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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받았다. 건너편의 남자는 자신을 소개한 후 말한다. 메일 잘 받아보고 있다. 오늘 전화한 용건은 투자에 관한 조언을 듣고 싶어서라고 한다. 적은 돈인데 괜챦은지 물어왔다. 적은 돈이 얼마인지 나는 묻지 않는다. 내 기준으로도 적은 돈일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적은 돈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니 섣불리 판단하면 안 된다. 금융기관에서 일을 하면서 알게 된 것 중 하나이다. 적은 돈을 가지고 생색을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적지 않은 금액도 내세우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그는 일년 전 쯤 나와 함께 교육을 받았다고 했다. 명함을 주고 받은 모양이다. 한 테이블에서 공부를 한 사람인듯하다. 하루짜리 교육이었으니 명함을 교환했을 터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하는데 명함은 유용하다. 한 개인을 설명하기에 충분하진 않지만 기본정보는 제공해준다. 이름, 전화번호, 하는 일, 이메일주소 정도의 데이터를 한 눈에 알기에는 좋은 도구이다. 영업을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명함을 제일 먼저 챙기게 된다. 가끔 명함을 건네면 “저는 명함이 없는데요.”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이럴 때 나는 말한다. “명함이 필요 없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지요. 명함이 없다는 것은 굳이 자신을 알리지 않아도 된다는 반증일테니까요.” 받은 명함은 손 글씨로 언제 어디서 만난 사람인지 기록을 하고 명함첩에 보관한다. 오늘은 명함첩을 찾는 수고로움을 덜었다.
그 여름의 끝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
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
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
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내가 보내던 메일 샘플이다. 매일 아침 시를 고르고 소소한 일상의 일들을 적었다. 단체메일임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수신인들은 말한다. 손 편지를 받아 든 느낌이라고. 증권회사에서 날아드는 메일이라고 하기에는 프레임이 달랐다. 시장에 대한 정보나 종목, 펀드에 대한 이야기를 넣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정보는 넘치고 있고 어떤 정보를 선택하는지는 투자자 개인의 사정에 따라 다르다. 누군가 성공한 투자가 나에게도 맞는다고 말하기 어렵다. 개개인의 성향과 상황에 따라 같은 투자상품이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 투자자의 재정상태와 삶의 철학까지 알아야 재무상담은 가능하다. 단타성 정보로 사람과의 인연이 맺어지기는 어렵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었다.
전화를 걸었던 남자. 이제는 10년지기 친구가 되었다. 적은 돈이라고 하던 투자금액이 이제 제법 큰돈이 되어있다. 적게 시작한 투자는 이제 그의 전 재산이 내게 맡겨져 있다. 우리는 투자이야기를 주로 하진 않는다. 요즘 재미있었던 책은 무엇이며, 안식월에 다녀온 네팔여행은 어떠했는지? 한강에서 춘천까지 가는 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마라톤을 열심히 하는 걸보니 대한민국 40대 남자가 맞다느니…시장이 궁금하여 전화를 하기보다 사람이 궁금하여 전화를 한다. 나도 그렇고 그도 그렇다. 돈벌이 이야기만 한다면 나는 미다스의 손이 되어야 한다. 인간탐욕의 극치를 보여주는 미다스왕의 신화.
수십명이 참가했던 세미나, 같은 테이블, 명함교환, 메일쓰기, 걸려온 전화. 우리의 인연이 어긋날 확률은 많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많은 선택의 순간이 지나 그와 내가 연결된 것은 다가온 인연인가 끌어당긴 인연인가. 앉아서 인연을 기다리는 가. 좋은 인연을 끌어당기는 노력을 하는가. 당신의 선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