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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1일 10시 18분 등록

2008 6 12. 출근을 하다 전화를 받았다. 본부장 호출이다. 출근하다 불려가기는 처음이다. '무슨 일일까?' 생각해본다. 집히는 곳이 없다. 가벼운 마음으로 방향을 틀었다. 성수대교를 건너 우회전을 하면 나의 사무실이고 좌회전을 하면 본부장이 있는 곳이다. 전화를 받은 위치가 성수대교진입 전이니 가는 길에 들러가면 된다. 커피 한잔씩을 앞에 두고 본부장과 마주 앉았다. 무슨 일인지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 "말씀하세요?" 내가 먼저 입을 떼었다. 상사가 아래직원을 불러놓고 뜸을 들이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오늘 저녁 발령이 있을 겁니다. 잠시 가 있으면 다시 복귀될 겁니다." 발령? 무슨 발령?

 

일년 전 사내에서 공모가 있었다. 하나금융지주에 인수된 후 인적교류 차원의 공모였다.  대상은 지점장급이다. 은행과 증권회사의 교차근무이다. 다른 성격의 금융기관이라 업무를 배우는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진행된 사안이다. 이때 하나은행에서 온 지점장들의 복귀발령이 있을 시즌이었다. 그들의 복귀와 나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본부장이 가 있으라는 곳은 얼마 전 합병한 다른 증권회사의 영업부였다. 나의 지점에서 일어난 민원 건이 문제가 되었다는 설명이다.

 

금융기관에서 일어나는 민원은 다양하다. 서비스불만에서부터 금전사고까지. 고객민원 건으로 감사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어떤 결론에 다다를지 마무리되지 않은 일이다. 일정부분 불법이 있기는 했지만 관리책임을 질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그 동안 그래왔다. 소소하게 일어나는 민원들에 책임을 져야 한다면 지점장이라는 자리는 한 달을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 관례라는 것이 이곳에도 있다. 무엇보다 회사에 입히는 피해규모에 따라 책임의 문제는 따르게 되어있다. 감사를 하는 동안 객관적일려고 노력했다. 불법이 이루어졌다면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 이는 회사나 직원의 입장을 떠나 타인의 돈을 다루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가져야 하는 기본이다. 정직해야 할 수 있는 일. 내 일의 성격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관리하는 돈은 가벼운 돈도 없고 더 중요한 돈도 없다. 그냥 제3. 타인의 돈일 뿐이다. 일을 하는 사람의 입에서는 모든 돈이 같은 돈이란 말이다.

 

내 경우를 두고 사람들은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고 말한다. 회사가 합병이 되고 임원진의 교체시기에 생긴 일이다. 자신의 사람을 심어야 하는 상황에서 몇 개의 자리가 필요했을 것이고 그 타깃으로 삼기에 시기가 맞아 떨어졌다는 의미이다. 문제가 일을 법한 지점을 찾으라고 했다는 후문(後聞)이 그것을 뒷받침해준다. 물론 민원이 없었어야 했다. 불법영업을 하는 직원이 없어야 했다. 꼬투리를 찾아도 빌미를 제공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시절인연이지 싶다. 무엇으로 그 뱡향을 틀 수 있었을까. 이미 오래 전 잉태되어 있던 일이 그 시점에 터진 것일 테니까.

 

차에 올랐다. 시동을 건다. 사무실에 들어가야 할 시간이지만 그래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가야 했던 곳인데 이제 가야 할 필요가 없어진 곳이 되어버렸다. 아직 발령이 문서화되지 않았으니 출근을 해야 하는 것이 맞기는 하다. 출발한 자동차는 올림픽대로를 접어들고 있었다. '어디로 갈까?' 잠시 생각했을 것이다. 목적지가 없이 달렸을까? 6번 국도로  접어들었다. 며칠 전 갔던 찻집이 생각났다. 목요일 오전의 지방도로는 한적했다. 오늘이 두 번째이다. 길가에 있는 간판을 보고 들어갔던 날에 부재중인 주인을 전화로 부르고 기다렸던 곳이다. 좌탁의자에 다양한 종류의 차들을 준비하고 인연되는 사람과의 차 한잔을 나누고자 하는 곳이었다. 첫 느낌이었다. 나를 모르는, 나의 역사를 모르는, 누군가를 붙들고 하소연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얼마나 회사에서 열심히 일 했는지, 왜 오늘 이런 일이 일어나야 했는지, 이해하지도 공감하지도 못할 이 일에 대하여 누군가 내 편을 찾는 과정이었을 게다.

 

한스 에리히 노삭의 <늦어도 11월에는>이란 소설에는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그저 “네”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그를,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것이 내가 본 그의 최초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은 그냥 얼굴이 아니었다. 그때의 그의 얼굴은 행복할 때의 그것이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건넨 첫마디이다. 여자는 그를 따라 나선다. 그는 작가였고 여자는 남편과 아이가 있는 상태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의 한마디 말에 그녀는 삶을 바꾼다.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난다. 무엇이 그녀를 떠나게 했을까. 아마도 그녀는 이미 삶의 짐을 싸 놓고 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1982년2월1일부터 264개월11일 동안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던 내 삶이 바뀐 순간이다. 종이 한 장이 내 삶의 방향을 틀었다. 나는 생각해본다. 나도 그녀처럼 언제라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터닝포인트. 방향을 바꾸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던 그날. 그 무엇인가는 사람마다 다르다. 이를테면 돈, , 사랑, 권력, 건강…어떤 것이었어도 특별한 마주침이 있는 순간 스스로는 알아차린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그리고 방향을 튼다. 가던 방향을 튼다는 것은 관성의 법칙을 어기는 일이고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일이다. 새로운 세상에는 다른 꿈과 다른 기쁨과 다른 아픔이 있다.

 

다른 하루가 내게 왔다. 어제와 다른 하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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