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미영
- 조회 수 3198
- 댓글 수 4
- 추천 수 0
그 무엇이 나에게 일어났다. 떠나야 했다. 단 하루만이라도.
두 아이는 하루 세 끼씩 꼬박꼬박 챙겨 먹었고, 남편은 밤마다 기어들어와 옷을 갈아입고 나가기 바빴다. 밥을 하고 빨래를 하면서 죽을 것 같았다. 왜 여기에 있는지, 왜 먹는지, 왜 사는지, 왜 남들처럼 지저귀는지, 텅 빈 껍데기일 뿐인 나를, 일상을 참아내는 나를, 견딜 수 없었다. 나 아닌 남들과 같아지길 원하며 살아온 삶에 멀미가 났다.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고 아내로 엄마로 사는 일상이, ‘나’는 어디에도 없는 하루하루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누가 내 준 지도 모르는 결혼이란 숙제를 해치운 30대의 나는, 나를 감당할 수 없었다.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별것 아닌 줄 알았는데 별거였다. 유부녀가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건다는 건 용기라는 것을 알았다. 그 순간 가슴이 다시 뛰었다는 것도. 우리는 인사동의 거리에서 만났고 삼청동의 어디쯤에서 마주 앉았다. 어릴 적 좋아했었다고 이제는 많이 변해서 못 알아보겠다고 아이가 몇이냐고 와이프랑 사이는 좋으냐고 묻고 나니 더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그 날의 그 하늘이 눈부셨고 그 날의 그 바람이 새삼스레 느껴졌다. 그 날의 공기는 나를 많이 웃게 했다. 나는 나를 그렇게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 친구를 통해서.
그러나, 나는 돌아왔다. 집으로 향하는 게으른 발걸음에 숨이 막힐 것 같았지만 한 끼 식사뿐인 그 일탈조차 감당할 수 없었다. 눈이 부신 햇살과 시원한 바람이 견딜 수 없이 낯설었다. 왜 그 하늘은 달리 보였을까? 그 공기는, 그 웃음은, 왜 나를 다시 집으로 향하게 했을까? 밥을 하고 빨래를 하는 뻔한 시간표의 멀미나는 껍데기를 뒤집어쓴 나를 받아들인 것이었을까? 나 아닌 채인 일상도, 나를 만난 일탈도, 감당하지 못하는 나도, 나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를 찾아 떠나기엔 그동안의 일상이 너무 무거웠다. 그때의 나는 거기까지였다.
그때가 가을이었다.
지난 10년간, 그 가을을 잊지 못해서 해마다 가을을 탄다.
다시 떠나고 싶어서, 다시 가슴 뛰고 싶어서, 어쩌면 다시 돌아오고 싶어서.
내가 뭔가를 해서 채우는 것만이 아닌 누군가가 내 삶에 애정인지, 우연인지, 하여간 뭔가로 들어와서 만들어지는 그런 게 그리웠던게 아닐까 하네요.
혼자사는 저는 제가 켜지 않으면 보일러는 안돌아요. 그런데 전 퇴근할 때쯤에 누군가가 방에 불을 좀 때줬으면 좋겠어요. 가을에는 따뜻한 방이 더 그리워요.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336 | 가시 | 김미영 | 2013.08.29 | 3210 |
335 | 범해 1. 아버지의 여행가방 [6] | 범해 좌경숙 | 2013.09.01 | 3365 |
334 | 토크 No.19 - 임원의 자격 | 재키제동 | 2013.09.02 | 8596 |
333 | 버드나무가지 말고는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던 그때 [1] | 효우 | 2013.09.04 | 3364 |
332 | 비교를 한다는 건, 건강하다는 증거다 | 김미영 | 2013.09.05 | 5964 |
331 | 범해 2. 한 줄도 너무 길다 [4] | 범해 좌경숙 | 2013.09.08 | 4070 |
330 | 토크 No.20 - 경력계발의 정석 [2] | 재키제동 | 2013.09.09 | 3473 |
329 |
마지막 편지 ![]() | 효우 | 2013.09.11 | 3161 |
328 | 몰입과 쾌락의 상관관계 | 김미영 | 2013.09.12 | 3407 |
327 | 범해 3 . 나는 지금 웰다잉 중이다 [4] | 범해 좌경숙 | 2013.09.15 | 5775 |
326 | 토크 No.21 - 쥐꼬리 월급으로 풍요롭게 사는 법 | 재키제동 | 2013.09.16 | 3751 |
325 | 예서/ 망운지정 『望雲之情』 | 효우 | 2013.09.18 | 3886 |
324 | 범해 4. 당신의 마지막 소원은 무엇입니까? [2] | 범해 좌경숙 | 2013.09.22 | 3534 |
323 | 토크 No.22 - '나'라는 퍼즐이 풀리는 순간 | 재키제동 | 2013.09.23 | 3777 |
322 | 예서/ 타자의 다름 | 효우 | 2013.09.25 | 3350 |
321 | 투명인간 | 김미영 | 2013.09.26 | 3243 |
320 | 범해 5. 책과 밤을 함께주신 신의 아이러니 [2] | 범해 좌경숙 | 2013.09.29 | 3766 |
319 | 예서/ 깊이에의 강요 [1] | 효우 | 2013.10.02 | 3569 |
» | 가을 [4] | 김미영 | 2013.10.03 | 3198 |
317 | 범해 6. 제주 올레 14-1 코스 [4] | 범해 좌경숙 | 2013.10.06 | 328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