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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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볕은 뜨거우나 바람이 좋았다. 우리는 보리 비빔밥을 먹었고, 빈대떡도 먹었고, 막걸리도 한 잔 했다. 그는 아직 총각이었기에 사귀는 여자 친구가 있는지도 물어 보고, 함께 쓰는 책에 대해서도 물어 보았다. 그러다가 그가 나에게 물었다.
"사람은 여러 곳에 걸려 넘어 집니다. 가지가지에 걸려 넘어지지만 대략 다음과 같은 4가지 덫에 걸려 넘어지면 좀 봐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그것을 4F 라고 적어 보았습니다. Food, Fame, Fortune, Family가 그것인데요.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
나는 4가지를 다 봐 줄만큼 관대한 사람은 아니다. 2가지는 나도 사람으로써 어찌할 수 없다고 동의했다. 그러나 다른 두 가지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자가 Fortune 이라고 표현한 그 말의 정체는 돈이다. 돈은 사람을 엎어지게 한다. 그러나 돈에 걸려 가서는 안되는 길을 갔다면, 그것이 아무리 유혹적이라도 그 사람은 사회적 리더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니 조심해야한다. 돈의 힘을 즐겨본 사람들은 돈으로 유혹한다. 돈의 유혹에 걸리지 않는 사람들도 악질적인 비방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비방의 대상이 깨끗하면 비방자들은 그 측면을 공격한다. 가족과 측근을 집요하게 후벼 판다. 그러면 반드시 누군가 걸려들게 되고, 그 악취는 도덕성이 강한 사람의 흰 옷에 붉은 피처럼 튀긴다. 입은 옷이 정결할 수록 그 피는 더욱 선명하다. 그리하여 부패한 사회일 수록 특히 엄격한 도덕성의 소유자들은 가장 확실한 악의적 비방의 표적이 되어왔던 것이다.
만약 명성과 명예에 걸려 넘어진 사람이 있다면, 자기 관리에 서투른 사람이다. 특히 명성은 주로 허영이 강한 사람들의 미덕이다. 남의 눈치를 보느라고 삶의 즐거움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명성의 덫에 걸려 넘어지기 십상이다. 조작된 가치를 만들어 획일화하려는 독재자 역시 왜곡된 가치에 대한 복종을 명예로 치환하여 강조한다. 스파르타의 여인들은 자식을 전쟁터로 떠나 보낼 때, "방패를 들고 오거나, 방패 위에 눕혀져 오라'가 말한다. 그렇게 교육받았다. 전장에서 항복은 없다. 싸워 이겨서 개선하던지 죽어 시체로 돌아오던지 둘 중의 하나이며, 이것이 군인의 명예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의 시인 아르킬로코스는 이렇게 말한다.
"버려야 한다면 버려야겠지. 불쌍한 방패. 적들은 이 방패를 얻어서 좋고, 나는 목숨을 건져서 다행이다.
오냐, 잘가거라, 방패야. 나는 새것을 구하면 그 뿐이지"
명성과 명예에 걸리지 않는 스스로 해방된 자유로운 사람들이 있다. 자유로운 사람은 고독하다. 이겼다고 교만에 들뜨지 않고, 졌다고 빈집에 웅크리고 앉지도 않는다. 명예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대중의 영웅을 추종하지 않는다. 비겁하게 도망가지도 않는다. 그러나 삶을 사랑하고 운명에 맞섬으로써 스스로의 영웅이 된다.
만일 먹을 것이 없어 하루하루 생계가 어렵고, 아이를 학교 보내지 못할 만큼 빈한하고, 아픈 아내를 거두지 못할 만큼 쪼들릴 때, 자신도 싫어하는 비굴한 짓을 하고, 몇 년이 지나 생활이 나아진 다음 그때 그 일을 해서는 안되었을 일로 내내 후회한다 하더라도, 먹지 못해 저지른 행위를 들어 사람을 비난한다면 그것은 비난한 사람의 잘못이다. 이미 장 발장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이것을 어떻게 생각해야할지를 가르쳐 주는 고전적인 텍스트가 되었다. 한 사내가 배가 고파 빵 한 덩어리를 훔쳤다면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의 잘못이다. 나는 주장한다. 다른 사람들이 밥을 먹을 때, 밥을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 날 때부터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났듯이, 다른 사람들이 밥을 먹을 때, 그 사람도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는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건강한 사회라고 믿는다.
만일 가족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역시 비난하기 어렵다. 못난 일임에 틀림없으나 부모가 자식에게 정의를 지킬 수는 없다. 이 대목에서 정의의 목소리가 너무 크면 그것은 왜곡된 사회다. 그래서 법이 칼날 같고 정의가 추상같은 사회는 살기 어려운 강퍅한 사회인 것이다. 공자가 법 대신 덕치를 주장한 이유이며, 노자와 장자가 인위를 거부한 이유인 것이다. 법이 없어도 정의가 살아 있다면 법이 무슨 필요가 있으며, 옳고 그름의 정의가 없어도 모두 다 행복하다면 그 정의를 무엇에 쓰겠는가 ? 부모가 자식을 위해 사회적 잘못을 저지를 수 밖에 없다면 그것은 정의롭지 않아서가 아니라 인간의 조건이 그렇기 때문이다. 부모는 몰락해도 자식에 대한 도움을 거부할 수 없다. 그러니 그것은 불쌍한 일이지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람으로 불쌍한 일을 당하면, 아르킬로코스의 시 구절하나를 기억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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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통에서 포도주 한 잔을 가득 꺼내들고 갑판 난간에 서서 바람에 섞어 마셔야한다.
우리도 사람인데 어찌 맨 정신으로 이 꼴을 볼 수 있겠는가 ?'

진정한 자식을 위함은 거부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새겨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