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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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어느 무더운 날이었다. 긴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양복을 꺼냈다. 거의 8개월 만에 입어보는 양복이었다. 거울 속 정장 차림의 내 모습을 보니 웬 지 낯설기만 했다. 퇴직 전 지난 20여 넘게 거의 매일 입었던 ‘근무복’이었건만 어느새 내게 맞지 않은 옷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오늘만은 입어야 했다.
헤드헌터로부터 전화를 받은 건 며칠 전이었다. 새로 설립한 대기업의 한 계열사 물류총괄 부문 자리라고 하며 지원을 권유했다. 고민하지 않고 바로 그녀에게 필요한 서류와 경력 사항을 상세히 적어 보냈다. 자신이 이룬 성과를 개량화하여 줄 것도 요청했다. 하지만 성과라는 것이 한 개인이 아닌 공동의 노력으로 일궈낸 것이고 매년 사업 손익이 다른데 이익을 시현한 것만 부각시키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어쨌든 면접 일시가 최종 결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았고, 면접 전날은 그녀를 만나 예상 질문에 대응하는 면접 리허설도 했다. 인터넷에 들어가 회사의 주요 사업영역과 실적 등도 살펴보았다. 동네 미장원에 가서 머리도 단정하게 다듬었다. 한달 전에 염색을 했는데 어느새 머리카락이 다시 희었다. 눈에 거슬렸다. 염색할 필요가 없다는 미용사가 얘기했지만 다시 염색을 했다. 면접 시, 첫 인상이 중요한데 아무래도 젊고 생기 있는 인상을 주는 것이 나을 듯싶었다.
인사부 여직원의 안내를 받아 대기실에서 면접 순서를 기다렸다. 신입사원 면접 이후 생애 두 번째 면접이었다. 긴장도 될 법한데 오히려 마음이 차분했다. 그 때 보다 입사가 더 절실한데도 떨리지 않는 것은 아마도 세월의 연륜 때문인지 모르겠다. 삶의 풍파를 많이 겪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몸과 마음에 떨림과 설렘이 없으니 감정이 둔해 진 건 아닌지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대기실에는 이동용 간이 흰색 칠판이 있었고 칠판은 깨끗했다. 칠판 아래 받침대엔 매직펜과 지우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대기실 테이블과 의자도 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경험상 ‘그렇고 그런’ 회사는 손님을 맞는 접견 실 또는 회의실이 산만하고 지저분한 경우가 많았다. 사소한 부분이 회사의 격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드디어 시간이 되었다. 여직원이 나를 면접실로 안내했다. 대 회의실이었다. 면접관 다섯 명이 내 맞은 편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사전에 헤드헌터가 면접관 중에 임원과 실무팀장도 함께 참석할 거라고 귀 뜸을 해 주었다. 보통 면접관 중에 답변이 어려운 예리한 질문을 하여 면접자를 당황스럽게 하는 경우가 있는데 다행히 그런 사람은 없었다. 리허설 대로 예상 질문이 나왔다. 어떻게 전 직장을 퇴사하게 되었으며, 앞으로 새로운 조직의 장이 되어 무엇을 구상하고 있는지, 등등을 물었다. 내 생각과 소신대로 말을 했다. 30여분간 진행된 인터뷰는 그렇게 큰 무리 없이 끝이 났다. 결과적으로 입사에는 실패했다. 아쉽긴 했지만 면접까지 볼 수 있었던 것 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아무래도 면접 끝날 무렵, ‘재무 경험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며 말끝을 흐리는 한 면접관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평일 도서관에 가면 각종 공무원 시험과 기업체 시험을 준비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본다. 몇 개월은 보통이고 몇 년을 시험 준비에 매달리는 사람들도 있다. 학교 졸업과 동시에 수많은 ‘청년 백수’들이 양산된다. 자발적 실업자는 논외로 하더라도 취직을 기약할 수 없는 비자발적 실업자들에게는 하루 하루가 고통이요, 고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회사가 경영난을 이유로 구조조정, 명예퇴직, 감원, 적대적 합병 등으로 중년의 한창 젊은 나이에 길거리에 내몰리는 퇴직자들도 마찬가지다. 자녀 교육비등 가족을 부양하는 사오십대 가장들한테 실업은 감당하기 힘든 두려움과 공포다. 매월 생활하는 데 꼭 필요한 생활비, 교육비와 예측할 수 없는 변동비는 자신을 압박한다. 날이 갈수록 줄어드는 통장의 잔고는 더 무기력하고 초조하게 만든다. 좌절감과 압박감을 느낀다. 퇴직 후, 재취업을 위해 눈높이를 낮추라고 하지만 아무리 낮추어도 자신의 경험과 전문적 지식을 발휘할 만한 회사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자신의 소질과 기질과는 상관없이 당장의 실업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무데나 취직을 하게 된다. 설령, 운이 좋아서 중소기업에 들어가더라도 가업을 계승한 어린(?) 사장들과 함께 일하면서 갈등을 겪는다. 얼마 못 가서 회사를 뛰쳐나오고 만다.
대인관계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점차로 꺼리게 된다. 퇴직과 동시에 모셨던 상사, 부하 직원, 직장 동료, 그리고 친한 거래처로부터 약속이나 한 듯 연락이 끊긴다. 간혹 위로나 안부를 묻는 전화가 오지만 형식적인 대화 몇 마디가 전부다.
A: 어떻게 지내요? 잘 지내시죠?
B: 잘 지내
A: 언제 가까운 시일 내에 식사나 같이 합시다
B: 네, 그러시죠 (당연히 식사를 한 적이 거의 없다)
이것이 현실이다. 뭘 더 바라겠는가! 어느 날 문득 세상에 홀로 던져진 기분이 들기도 한다.
퇴직 후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 하지 않았다. 휴식도 필요했지만 인생 2막은 새로운 분야에서 새로운 직업을 찾고 싶었다. 그렇다고 전에 몸담았던 분야와 일이 맞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즐거움과 재미를 찾지 못할 것 같았다.
일자리는 어디든지 널려 있다. 자신의 소질과 관심분야, 급여, 그리고 일 할 회사의 장소가 어디에 있든 신경 쓰지 않는다면 당장이라고 구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일이 매월 최소한의 비용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동시에 억지로 일을 한다면 그 일은 강제 노역이나 다름없다. ‘취업 바이블’이라고 불리는 리처드 볼스(Richard N. Bolles)가 쓴 ‘당신의 파라슈트는 어떤 색깔입니까? (What Color is your Parachute?)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매년 그 내용이 갱신되는데 최신 개정판에서 그는 실직을 당하면 먼저 자신의 타고난 소질과 기술을 찾고 그 것을 발휘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을 찾으라고 한다. 그러면 승리감 넘치는 인생을 살 수 있다고.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웬 지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린다. 누군들 그러고 싶지 않겠는가? 각 나라마다 고용 환경이 틀리겠지만 미국에서는 가능할 지 모르겠지만 이 곳 대한민국에서는 그러한 얘기가 머나먼 얘기처럼 들린다. (물론 그렇게 일을 찾는 사람도 있지만)
퇴직 후, 귀농이나 귀촌 하여 사는 사람들의 얘기가 방송을 타기도 한다. 1인 지식기업가의 길을 걷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소수의 사람들만 자리를 잡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아직은 모르겠다. 그들이 정말로 자신의 소질과 기질에 맞는 일을 하고 매일의 삶 속에 희열을 느끼며 살고 있는지. 재취업에 성공을 하든, 1인 지식기업가의 길을 가든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자신에게 맞는 최적의 길을 선택하면 그만 인 듯싶다. 예고 되든 예고 없이 찾아 오든, 퇴직과 그 이후의 삶은 한번은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다. 하지만 어떻게 넘어야 할지 명확한 답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2013.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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