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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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테세우스, 아들 히폴리토스를 잃고 추방되지만 다시 테세이온에 안치되다
아이게우스의 뒤를 이어 테세우스는 아테네의 왕이 되었다. 그는 현명하고 공정한 왕이었다. 그는 백성 위에 군림하기를 원치 않았다. 시민들이 투표할 수 있는 의회를 짓고 공화국을 만들었다. 모든 나라들이 한 사람의 절대군주 밑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체제를 구축해 갈 때, 아테네는 모든 나라와 도시 중에서 가장 자유롭고 번영하는 도시가 되었다. 테세우스는 국민들이 스스로 통치하는 위대한 나라의 초석을 놓았다.
테세우스의 모험 또한 계속 되었다. 그는 여전사들의 나라인 아마존으로 가서 그 여왕을 납치해 왔다. 그 여왕의 이름이 안티오페 Antiope 라기도 하고, 히폴리타 Hippolyta 라는 설도 있다. 어찌되었던 테세우스는 그녀와의 사이에서 히폴리토스 Hippolytus 라는 아들을 얻게 되었다. 히폴리토스는 멋진 청년으로 자라게 되었고, 특히 사냥과 축제의 여신인 아르테미스를 지극 정성으로 숭배했다. 반면 변덕스러운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비웃었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아프로디테는 복수의 기회를 찾고 있었다. 드디어 그 기회는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안티오페가 죽자 테세우스는 미노스 왕의 딸로서 아리아드네의 동생인 파이드라 Phaedra와 결혼하게 되었다. 아리아드네를 버린 테세우스가 하필 그녀의 동생을 아내로 얻은 것은 그녀를 잊지 못해서인지 그밖에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는 분명치 않다. (주*) 어찌되었든 이 결혼으로 테세우스는 결정적인 비극 속에 빠지게 된다. 계모인 젊은 파이드라가 의붓아들인 히폴리토스에 대한 절망적인 사랑에 빠져들게 되었기 때문이다.
파이드라는 불륜의 사랑에 수치심을 느끼면서도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히폴리토스는 파이드라에게 무심했으며 그녀의 사랑조차 알지 못했다. 이 어두운 짝사랑 뒤에는 히폴리테스에게 복수하려는 아프로디테의 부추김과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파이드라에게는 충실한 유모가 있었다. 나날이 야위어가는 파이드라를 걱정하다가 우연히 파이드라가 히폴리테스에 대한 짝사랑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모는 히폴리토스르를 찾아가 이 사실을 알려 주었으나 그는 더욱 더 이 불륜의 사랑을 추악한 것으로 몰아붙였다. 파이드라는 절망했다. 스스로 그 사랑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은 증오로 바뀌었기 때문에 죽음으로 히폴리테스를 파멸시키고자 했다. 테세우스의 손에는 그녀가 마지막 남긴 유서가 쥐어져 있었다. 그는 절규한다.
"이 편지가 크게 외치는구나. 낱말들이 말을 하고 그것들에게도 혀가 달려 있구나. 내 아들이 내 아내를 범했구나. 오, 포세이돈이시여, 아들을 저주하는 제 말을 들으소서. 이 저주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격분한 테세우스는 히폴리토스를 추방했다. 억울한 분노와 쫒겨난 침울함으로 히폴리토스는 마차를 몰고 아테네를 떠났다. 그때 갑자기 앞 바다 속에서 물결이 산처럼 일어나고, 그 꼭대기 물결이 갈라지면서 홀연 거대한 황소가 나타나 커다란 코구멍으로 바닷물을 토해냈다. 기겁을 한 말이 놀라 뛰자 그가 탄 마차는 바위에 산산히 부서지고, 히폴리토스는 온몸이 거대한 상처가 되어 죽고 말았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테세우스의 저주를 들어 주었던 것이다. '말에 의해 찢어진 자' 라는 뜻의 히포-리투스 (Hippo-lytus)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결국 그의 이름에 상응하는 운명이 되어 죽고 말았다. 비탄에 빠진 테세우스 앞에 아르테미스 여신이 나타나 사건의 진상을 알려 주었다. 유서가 거짓이며, 사랑을 품고 그것을 증오로 바꾸어 히폴리토스를 음해한 것은 바로 파이드라였음을 밝혀준다. 테세우스는 사랑의 배신과 아들의 죽음에 다시 절규한다.
만년에 이르러 이런 실수들로 인해 쇄락한 테세우스는 아테네에서 추방당했는데, 친구인 스키로스의 리코메데스 왕에게 몸을 의지하게 되었다. 처음 테세우스를 돌보아 주던 리코메데스는 후에 테세우스를 죽이게 되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영웅 테세우스는 그렇게 조국 아테네에서 쫒겨나 친구의 손에 살해되고 말았다. 영웅의 말로는 비참했다. 아버지 아이게우스의 자살, 아내 파이드라의 자살, 아들 히폴리토스의 억울한 죽음에 이어 자신의 비참한 죽음에 이르기 까지 테세우스의 인생은 영광과 비극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테네 인들은 어느 누구 보다도 테세우스를 사랑하고 누구보다 추앙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를 아테네롤 옮겨와서 테세이온 이라는 신전에 안치하였다. 그의 죽음 자체는 비참했으나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죽은 후 그의 이름은 그리스 인들 중 가장 사랑 받는 영웅으로 남게 되었다. 테세우스의 복권과 그의 조국 아테네의 번성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죽기 전 테세우스는 인간으로써 가장 불행하고 동시에 가장 장엄한 한 영혼이 떠도는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와 그의 조국 아테네는 그 사람의 유해를 거두어 들임으로써 신의 축복을 받았던 것이다.
시인은 노래한다.
파시파에의 딸이 (주**) 유혹하여
아비의 침상을 더럽히자는 것을 뿌리쳤다네
증오가 된 사랑이 죽어가면서 꾸민 덫
아비는 절규하며 아들을 쫓아내니
여신 아르테미스만이 억울한 진실을 알려주었네
거대한 바다 물덩이가 산같이 부풀어 오르다
꼭대기 물결이 갈라져 한 마리 크레테 황소가 울부짖자
말들이 미친 듯 날뛰고
마차는 바위에 부딪혀 산산히 부서지니
히폴리토스는 몸 전체가 거대한 상처가 되어 죽고 말았네
(주*) 파이드라와의 결혼은 서서히 크레테 섬의 지배력이 끝나가고 그리스 본토의 지배자들이 크레테를 멸망시켜가는 과정이 이 이야기 속에 상징적으로 녹아든 것으로 짐작된다. 아마존을 정복하고 안티오페를 납치해 오듯, 아테네는 크레테와의 싸움에서 크레테의 왕녀 파이드라를 전리품으로 빼앗아 온 것일 수도 있다.
(주 **) 파시파에와 미노스의 딸 파이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