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땟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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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가 나에게 다가왔다.
야구 안해볼래?
야구?
그래, 야구. 우리 반에 야구부 있거든. 너도 괜찮으면 같이 하자. 재미있어.
그렇게 J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서울에서 살다가 속초로 전학간지 얼마되지 않아 모든 환경이 낯설고 서먹한 나였다. 그런 내게 J가 다가왔다. 반장이기도 한 J는 언제나 당당하고 멋진 아이였다. 그 시골 촌동네 - 1980년대 중반의 속초는 바닷가 깡촌 중에 깡촌이었다 - 에서 야구부를 결성해서 어울림을 주도했고, 공부도 잘하고 만화까지 잘 그린 팔방미인이었다. J의 권유로 나는 야구부 활동을 시작했고 열심히 활동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나의 실력은 처음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얼마 뒤 J가 야구부원들을 모아놓고 각자에게 자신이 직접 그린 야구부원 소개카드를 나눠주었다. 뭐가 달라도 다른 J였다. J가 나에게 준 카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실력은 뛰어나지 않지만, 열정 하나로 똘똘 뭉친 아이, D'
J가 연필로 그린 내 모습은 수준급이어서 꽤나 맘에 들었지만, 나를 묘사한 문장은 왠지모르게 정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한참 세월이 흐른 뒤 나는 알게 되었다. J가 나를 제대로 봤음을 말이다.
나는 의욕넘치는 사람이었다. 아니, 의욕'만' 넘치는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내가 살아온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나의 이런 기질을 보여주는 몇몇 순간들이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즈음 나는 공부잘하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열심히 공부를 했다. 되도록 좋은 성적으로 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성적은 그저 그랬다. 고등학교 때도열심히 공부했다. 그래도 결과는 지지부진이었다. 뭔가 부족한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른뒤 알게 되었다. 나에게는 두가지가 부족했음을...... 바로 끈기와 생각이었다.
언제나 끈기가 부족했다. 무언가를 해도 일주일을 넘기지 못할 때가 태반이었다. 책 한권을 읽어도 2,3일은 커녕 2,3시간이 지나면 덮어버렸고, TV를 보거나 친구들을 만나로 가기 일수였다. 의기양양하게 시작한 공부에 대한 내 불타는 의지도 용두사미처럼 스르르 힘없이 꺼지는게 태반이었다. 내 눈앞에 닥친 무언가를 실행에 옮기는데는 능숙했지만, 그게 전부 였다. 내 실행에는 생각이 없었다. '내가 이것을 왜 해야하지?',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 '혼자하는게 나을까? 친구들과 같이 하는게 나을까?' 난 이런 중요한 질문들을 나 자신에게 던져본 적이 별로 없다. 생각하지 않고 행하니, 성과가 탁월할리 없었고 사이사이 질문과 회의에 맞닥드리니 결국 오래동안 행할 수 없었던 건 당연지사였다.
논어 위정편에는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란 말이 나온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치 않으면 망연해지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나는 전자와 비슷했으리라. 배우기만 하고 생각치 않으면 멍청해진다. 별로 얻는 것이 없게 된다.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게 된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니 지치기 쉽고, 결국엔 가던 길 멈추고 되돌아 오게 된다. 우리가 무언가를 실행에 옮길때 생각이란 걸 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인생 가는 길,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들여 한 발자국씩 내딛는 걸음걸음이 (되도록이면) 헛되지 않도록, 애써 걸어간 길 다시 되돌아오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우리는 길 위에 서 있는 이유를 그리고 그 길을 왜 가야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카페에 앉아 있는 내 앞에 한 가족이 보인다. 아빠는 녹색 칠판 앞에서 침을 튀기며(아마도 그럴 것이다) 열심히 강연을 하고 있는 강사의 동영상 강의를 보며 문제를 풀고 있다. 엄마는 어떤 종류인지는 모르나, 책에 줄을 그며 뚤어져라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옆의 아들-모범생으로 보이는-은 아마도 시험공부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머리 속으로 그려볼 때는 꽤나 이상적인(?!) 가족이라고 생각해 왔었는데, 막상 눈앞에서 보니 혀끝이 씁쓸해지는게 그리 반가운 모습은 아니었다. '저들은 자신들이 서 있는 그 길이 어디인지 알고 있을까?!' 이런 생각이 내 머리 속으로 슬그머니 들어왔다. 한참을 바라보다 정신차린다.
'너나 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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