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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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고네, 비극과 함께하는 불멸의 여인
오이디푸스가 죽은 후, 아버지의 손을 잡고 부양하던 맨발의 하얀 아가씨 안티고네는 테세우스의 호의에 따라 여동생 이스메네와 함께 다시 테베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또 다른 비극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이디푸스의 빈 왕좌를 다투는 합법적인 계승자인 두 명의 오빠가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리다 둘 다 죽고 만 것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흘러갔다. 차남인 에테오클레스가 왕위를 차지하고 형을 테베에서 추방해 버렸다. 쫒겨난 형 폴리네이케스는 아르고스로 도망을 쳤다. 그리고 그곳의 여섯 장군들의 도움을 얻어 고국 테베를 향해 쳐들어 왔다. 시인 소포클레스는 이때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 햇빛이여, 일곱 성문의 테베에 일찍이 보지 못한 빛나는 햇살이여....아르고스에서 온 흰 방패의 전사들...날카롭게 소리치는 독수리같이 눈처럼 흰 날개에 덮여 무장한 대군을 이끌고 투구의 깃을 세우며 테베로 달려 들었다"
전투는 치열했다. 악전고투 끝에 테베가 승리했다. 아르고스에서 온 여섯 명의 장수 중 다섯 명의 장수가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인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는 두 창으로 서로를 찔러 죽고 말았다. 에테오클레스는 죽어가면서 형을 보고 울었다. 폴리네이케스는 간신히 몇 마디를 중얼거렸다.
"나의 적인 내 동생아, 하지만 나는 늘 너를 사랑했다. 나를 고향 땅에 묻어다오. 내 도시에 적어도 그만큼의 땅은 차지할 수 있도록"
그러나 폴리네이케스의 부탁을 들어 줄 사람이 없었다. 왕위 계승자인 두 아들이 죽어 버리자 그들의 삼촌인 크레온이 권력을 잡은 후, 이웃나라의 원병을 거느리고 조국 테베로 쳐들어 온 반역자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들판에 버려두어 새와 짐승이 뜯어 먹게 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나라를 방어하다가 죽은 에테오클레스에게는 더 할 수 없는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졌지만 쫒겨난 왕자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는 짐승의 밥이 되게 되었다. 그의 시체를 장사지내는 자는 누구든 사형에 처해질 것이다.
제대로 장례를 치루지 못한 사람들은 머물 곳을 찾지 못하고 영혼이 떠돌기 때문에 나그네라도 죽은 사람을 묻어 주는 것이 인간의 신성한 의무였다. 폴리네이케스는 정당하고 신성한 신의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도록 앙갚음을 당하고 만 셈이다. 동생인 안티고네는 이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땅에 묻어 주었다. 모래바람이 일어 경비병들이 눈을 뜰 수 없을 때 그녀는 오빠의 시체를 땅에 묻고 제주를 부어 주었다. 경비병이 그녀를 잡아 크레온에게 데려왔다.
크레온이 안티고네에게 묻는다.
"네가 폴리네이케스의 장례를 금한 나의 칙령을 아느냐? 그런데도 그 일을 했느냐? "
안티고네가 대답한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법을 내리신 이는 신이 아니며, 확고한 하늘의 법을 왕의 법이 넘을 수 없는 것이지요. 내가 신들 앞에서도 인간의 법을 어긴 죄인일 수는 없어요.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죽었는데 장례도 치러주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가슴 아픈 일이지요. 나는 죽을 몸, 두렵지 않아요"
그리고 그들의 대화는 이어진다.
"하나는 나라를 망치려는 놈이었고, 하나는 나라를 위해 싸웠다. 악인과 선인이 같은 대접을 받기를 원하느냐 ?"
"저승에서는 무엇이 옳은 지 알 수 없습니다."
"원수는 죽어서도 친구일 수 없다"
"나는 증오를 나누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어요"
"그러면 저승으로 가서 그 놈들을 사랑하려므나"
(안티고네와 크레온)
대화는 끝났다. 둘은 온 힘을 다해 정면으로 충돌했다. 크레온은 안티고네를 동굴에 가두었다. 그리고 안티고네는 그곳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죽기 전 그녀는 탄식한다.
"신방도 못 치르고, 혼인의 축가도 없고, 결혼의 기쁨도,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기쁨도 모르는 나, 친구에게서도 버림을 받은 불행한 이 몸, 목숨을 지닌 채 죽은 사람들의 굴 속으로 나는 떠납니다. 아, 테베의 땅이여. 신들이시여. 테베의 지도자들이여. 살펴주소서, 당신들의 왕가의 마지막 딸을. 그 딸이 신을 경배한 까닭에 받은 고초를 "
시인은 노래한다.
슬프구나, 아버지 오이디푸스를 닮아 굽힐 줄 모르는 그대
꼬장꼬장한 정신에 빳빳한 성격
싸우는 두 사람, 다른 생각을 가진 똑 같은 기질
상대가 없어져야만 편안한 어리석음이여
서로의 파멸로 마주 보고 질주하는구나
함께하지 않으면 바로 적이고
전부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외치는 광신이여
각자 쥐고 있는 유일한 패,
오직 하나의 집착에 모두를 거는구나
얼음같이 찬 죽음을 맞으려는 불타는 심장이여
시인은 참을 수 없어 또 노래한다.
물로 쓰여진 비극은 없다
그것은 오직 피와 눈물로 쓰여질 뿐
영웅이란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끝까지 간 사람들
그 끝에서 인간과 신을 가르는
황금 장벽 앞에서 좌절되는 것, 비극
인간의 법은 늘 바뀌는 것
신의 법은 영원한 것
북극성처럼 양심을 가슴에 품은 자들은
인간 모두에 대항하는 독재자의 법을 거부하노니
역사는 그렇게 자유를 키워왔나니
크레온, 이 죄는 다른 사람에게 돌릴 수 없다
테베의 지도자 크레온에게는 하이몬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하이몬은 안티고네의 약혼자였다. 안티고네가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고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묻어주고 죄를 지어 죽게 생기자 하이몬이 그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나선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에게 무릎을 꿇고 애원하거나 구걸하지 않는다. 그 역시 굽히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 아버지에 그 자식. 그들은 다시 정면으로 맞선다.
하이먼 "바르게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배우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크레온 "내가 이 나라를 내 판단이 아닌 남의 판단으로 다스리라는 말이냐? "
하이먼 "한 사람의 소유물이라면 그건 나라가 아닙니다"
크레온 "국가가 통치자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냐 ?"
하이먼 "사람이 하나도 없는 사막을 훌륭하게 다스리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크레온 "괘씸한 놈, 이렇게 터놓고 아비를 적대하다니"
하이먼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정의를 어기고 계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크레온 "나의 왕권을 존중하는 것도 잘못이야 ?"
하이먼 "신의 명예를 짓밟으시면, 왕권을 존중하는 것이 못됩니다"
크레온 "다 그 계집을 위해서 하는 말이구나. 살아서는 그 여자와 결혼하지 못한다"
하이먼 "그러시면 그 여자는 죽는 것이지요. 죽음으로써 또 다른 한 사람을 죽이는 겁니다"
크레온 "너, 나를 위협하는 것이냐 ?"
하이먼 "잘못 생각하신 것을 말씀드리는 것도 위협입니까? "
대화는 이렇게 끝났다. 그리고 하이먼은 안티고네가 갇혀있는 동굴로 갔다. 그러나 이미 안티고네는 가는 끈으로 목을 매 숨져 있었다. 하이몬은 그 허리를 팔로 껴안고 엎드려 불행한 사랑을 저주하고 비통하게 울었다. 동굴로 찾아 온 크레온은 그 광경을 목도하게 되었다. 아버지를 본 하이몬은 분노와 증오로 십자 손잡이의 칼을 빼들고 그 칼 위에 엎어져 칼이 절반이나 옆구리를 뚫고 튀어 나왔다. 그리고 숨이 붙어 있는 동안 안티고네를 겨우 껴안고 숨을 헐떡였다. 이내 잠잠해져 시체 위에 또 하나의 시체를 겹쳐 누이게 되었다. 그들의 결혼은 어두운 저승에서 이루어졌다.
크레온은 아들의 주검을 옮겨왔다. 그러나 슬픔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두 번 째의 부음을 듣게 되었다. 하이먼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크레온의 아내는 아무 소리없이 궁 안의 제단 앞에서 날카로운 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숨을 거두며, 아들은 죽인 크레온에게 불행이 있으라 저주했다. 크레온은 무너진다. 비통함 속에서 허물어져 통곡한다.
"제발 날 데려가라, 이 쓸모없는 인간을"
아아, 아들아 내가 너를 죽였구나
그리고 아내까지도, 이 저주를 어찌하랴
얼굴을 돌릴데도 의지할 사람도 없구나
내 손에 있는 것들은 다 빗나가고,
견딜 수 없는 운명이 벼락으로 머리 위에 떨어졌구나"
시인은 노래한다.
같은 핏줄 속을 흐르는 같은 피
강인한 뼈처럼 부딪치는구나
모든 것은 국가에 귀속된다, 아들아
개인을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는 국가가 아닙니다, 아버지
권위와 정의가 부딪히고, 왕권과 신성한 양심이 고함쳐 다투는구나
배려도 없고 타협도 관용도 없다
투쟁을 벌리는 사나운 두 영혼에게는
불관용이야말로 가장 필수적인 무기
꽝, 끝내 모두 통곡하는구나
오만한 자들은 끝에 가서야 지혜를 얻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