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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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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9일 11시 22분 등록

J에게


나는 내가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한다고 여기는데, 다른 사람들 기준에는 아닌가봐. 카페에서 일하는 지혜씨가 '언니는 어떻게 그렇게 그림을 잘 그려요?'하고 묻잖아. 그래서 난 '음. 난 잘 그리는 거 아닌데.'했더니, '저기 엽서도 언니가 그린 거라메요?'라 잖아.

내가 잘 그린다고 여기는 거랑, 지혜씨가 묻는 거랑은 기준이 다른 것 같아.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사람을 자유롭게 잘 그려야 잘 그린다고 여기고 있는 것 같아.


어제는 100일창작 모임에서 그림 잘 그리는 법을 소개했어. 오래전부터 '자기발견을 향한 드로잉'이란 것을 생각하고 있었거든. 그걸 교안을 짜보기로 했고, 첫 번째 내용이 그림 잘 그리는 법이었어. 며칠동안 무엇을 이야기할까, 어떤 순서로 말할까하면서 그림을 골라내고 배치를 했어. 어제 당일 마지막까지도 다른 것을 하나 더 넣을까했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던 것 같아. 준비한 것을 말하는 데는 중구난방이었어. 나중에 드는 생각이 '리허설할 껄.' '할말을 미리 다 써볼껄'이었어. 그래서 어제의 아쉬움에 너에게 2차로 또 하는 거야. 

'행하고 행하고 행하는 중에 알게 되고,

가고 가고 가는 중에 깨닫게 되나니.....'

아라한 장풍대작전에 7선들이 상환에게 '깨달음'에 대해서 가르칠 때 이런 문구가 나오더라. 행하고, 행하고, 행하는 중에 알게 되나니. 멋진 말이지 않냐. 나도 이야기하고 이야기하고 이야기하는 중에 군더더기 없이 중요한 것들만을 남기게 될 것같은 기대를 갖고, 그걸 행해보려구.


이번에 교안작성을 하면서 이야기할 꺼리 찾을 때, 그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내 그림을 찾는데도 고민이었어. 좀 많아야지. 그걸 찾을 때 잘 그린 그림이런 뭔가, 잘 그리려면 어떻게 그려야하나 하는 내가 생각하는 기준들이 들어갔지. 어제 이야기 재탕으로 너에게 그림 잘그리는 법을 이야기하고 싶어. 무엇을 이야기해야하는지 찾는 실험으로 한다고 여겨줘.


우선 어떤 그림이 잘 그린 그림인지, 너는 어떤 그림이 멋지다고 생각하는지 말해보자. 이렇게 물으면, 네 머리 속에 떠오르는 그림들이 있겠지? 그걸 말해봐. 

자연스럽다.

형태가 멋지다.

충격적이다.

사람 그린 거, 그사람과 닮았다.

전체적으로 조화롭다.

선이 매끄럽다.

내용이 잘 이해된다. 

스토리가 있다.

상징적이다.

정갈하다.

넉넉하고 여백이 있어 마음이 편안하다.

색깔이 참 예쁘다.

딱 내 취향이다.


뭐 이런 것들? 아마도 이런 것들이 본인이 추구하는 걸꺼구, 자신이 그리는 그림에 들어가면 좋겠다, 이런 요소가 있는 그림이 잘 그린 그림이다 여길거야. 이런 기준과 자신의 그림을 비교하면 자신이 그린 그림들은 초라해져버려. 요구하는게 너무 많잖아. 난 사람을 닮게 그리지 못해서 그것 때문에 매번 스트레스 받는데, 내가 사람 그렸다면 난 그 이유로 내가 잘 그리지 못했다고 할거야. 방금 꼽아본 것들은 기술적인 것, 개인의 취향, 인식의 경계를 넓혀주는 요소, 마음에 안정을 주는 것 등을 모두 포함해서 뒤죽박죽이야. 이런 것들을 모두 한꺼번에 그림에 넣으려한다면 대부분이 좌절하고 말껄. 난 화실에서 그림 배울 때, 머리 속이 뒤죽박죽이고 완전히 난리가 났었어. 아주 미치겠더라구. 선생님 말씀을 못 알아듣겠더라구. 


그러다가 문화센터의 강좌에서 말이 좀 많은 선생님을 만났는데, 그 선생님이 내가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각개격파로 일러주시더라. 선생님은 하나씩 뭔가를 해보라고 하고, 그게 그림에 어떤 요소인지를 설명해주셨어. 그림 속에 어떤 식으로 들어나야하는지를 일러주셨지. 거기에는 기술적인 것과 근육, 인식의 방향, 인식의 한계, 개인 취향, 문화가 있었어. 드로잉 선생님이 구분해주신 것처럼 하나씩 별개로 해서 파악하고 연습해서 그걸 다시 조합해서 사용하고 싶은 것을 사용하면 그리는데 별 문제 없을 거야. 


아라한 장풍대작전에 주인공 상환이가 무술을 배우는 이유는 자신을 때리고 쪽팔리게 한 양아치에게 복수를 하려는 거야. 그래서 장풍같은 걸 배워볼라고 하는데, 선생님은 기초체력훈련만 열나게 시키고, 또 어떤 선생님은 못 알아들을 소리만을 읊어대지. 속성으로 '장풍'같은 걸 배울려고 하는데 그걸 안 가르쳐주고 말이야. 내가 사람 잘그리는 법을 배워보고 싶은데, 그건 안 가르쳐주고 딴 것들만 드립다 가르쳐주는 것처럼 말이야. 그런데, 그게 정확히 뭔지, 어디에 쓰일지 설명을 안해주면서 말이야.


문화센터 드로잉 선생님이 가르쳐주셨던 대로 각개격파란 걸 해보자.


우선 그림들을 보면서 이야기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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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음 이건 연습장에 그린 거야. 어디 갔다가 약속시간까지 좀 시간이 남길래 그렸어. 3~5분이면 한장 그려. 이럴 경우에는 꼼꼼하게 잘 그려야한다, 작품으로 내겠다하는 스트레스가 없이 그냥 그리는거지. 시간 때우기로도 좋고, 스케치 연습하는 걸로도 좋고, 또 이때다 하면서 식물을 관찰하는 것으로 좋지. 그리다보면 많이 들여다보게 되고, 꽃잎이 몇장이나 있는지, 어디에 붙었는지도 보게되니까. 무엇보다 잘 그려야한다는 부담이 없어서 이렇게 그리는 게, 난 좋더라.


다른 스케치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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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건 이미지에세이에 넣으려고 그림을 구상할 때 한 거야. 처음에는 중앙에 커다란 나무를 그리고 배를 만드는 사람을 구상했지.

그리고그게 마음에 별로 안들어서 다시 배치를 했어. 우린 대체로 이런 그림을 잘 그린 그림이라고 하지는 않지. 중간과정의 그림이니까. 이렇게 구상해서 최종으로 그린 건 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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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난 이걸 그리고도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어. 처음에 구상할 때와는 달리 배치가 마음에 안들더라. 작게 스케치할 때는 이렇게하면 조화롭겠다 싶었는데, 막상 원래 크기에 넣고나니 별로 더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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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내 취향? 아니. 내 취향 아니야. 그렇지만 이걸 표현하기에는 이 스타일이 딱 맞을거라 여겼어. 미완성? 아니, 완성.

색을 다 칠하지 않은는데도 완성이냐고 묻겠지만, 완성이냐 아니냐는 그리는 사람이 판단하는 거야.

완성도에 대해서는 남들이 객관적으로 말하는 뭐가 있겠지. 하지만, 완성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창작자 마음이지.

난 여기까지 했을 때 내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다 전달할 수 있으니까 여기가 끝이야.


다른 것들도 좀 보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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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카페 살롱9에 물건을 보고 그렸어. 아주 복잡한 나무여서 그 나무의 일부만을 그렸지. 그걸 다 그릴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고 또 지면도 커야할 것 같아. 난 겨우 작은 엽서 크기에 그리는데 너무 복잡한 것은 크기와 내용이 맞지 않지. 

뭐 나중에는 '에잇, 실험이다. 까짓껏 해보면 돼지.' 하면서 그 엽서에 나무 한그루를 통째로 그리기도 했지만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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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위에 바탕이 흰 것이 처음에 그린 거구. 아래에 초록색 바탕이 나중에 포토샵으로 색보정을 한거야. 나중 것이 이전보다 뭔가가 더 추가가 되었지만 나는 흰 바탕이 더 마음에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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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작년말과 올해 초에 새해카드 만들었어. 포토샵으로 합성했어. 사진은 이전에 찍어둔 것이고, 천사는 그보다 더 이전에 스케치해둔 것인데 포토샵으로 샤샤샥 합성했지. 그리는 게 힘들다면 난 트레싱지 대고 그리거나, 포토샵으로 밑으로 깔아놓고 그 위에 뽄을 따서 그린다거나, 혹은 가져다가 오려서 붙이면 된다고 일러주는데..... 어떤 사람은 '에이, 그게 뭐예요. 자기가 그려야죠.'라고 하는 사람이 있더라구. 꼭 자기 손으로 모두 다 그릴 필요는 없는데 말이야. 펜이나 크레파스나 물감이란 도구를 쓰는 것과 포토샵이라는 도구를 쓰는 것이 뭐가 다를까? 펜이란 도구를 익숙하게 다루는 것은 기술적인 부분이고, 카드 같은 것을 만들어 낼 때 쓰는 구성력은 또 다른 영역의 것인 것 같아. 손기술과 구성력이 꼭 한 세트일 필요는 없는 것 같아. 

내가 보기엔 그 둘은 다른 방식으로 향상되는 것이야. 그러니까 이것도 각개격파의 한 항목으로 나누어서 향상시켜야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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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이건 그리면서 내가 재미나서 그렸어. 사람이 아닌 것을 그리니까 마음이 편안하더라. 그리고 동물이라도 실제 동물을 꼭 닮게 그려야하는 것이 아니라서 좀 편하더라구. 대가리가 크거나 이빨이 세거나 눈이 실제로 이러거나 말거나. 내가 그린 게 실제로 안그런다고 하면, 우리가 본 동물이 몇 종류 안되서 아직 못 봐서 그럴 수도 있다고 우기지 뭐. 그림에는 얘들같은 자유나 억지가 좀 필요한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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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이건 잘 그렸나 못그렸나를 하는 판단을 벗어나버리는 것 같아. 난 추상작품을 보면 그러더라. 

우리는 보통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라고 할 때, 머리 속에 이런 걸 떠올리진 않잖아. 이건 100일창작 모임에서 멤버들이랑 함께 '공포'라는 추상명사를 그려본 거야. 여긴 3명의 두려움이 들어 있어. 이건 그냥 느끼는 거지. 

그런데 말야, 잘 그린 그림, 마음에 드는 그림을 떠올릴 때에 추상작품을 배제하는 건 뭘까? 그건 생각의 방향, 한쪽 치우침 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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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이건 내가 그런 건 아니고, 인터넷에서 하나 골라봤어. 괴기스러운 걸로 골랐지. 이건 파티를 위한 음식이래. 죽이지?


난 이런 걸 그리진 않아. 그런데 어떤 화가 자신이 표현하려 하는 것이 이런거라면 어떠할까? 난 이게 끔찍해서 보고 싶지 않거든. 그러니까 내게는 이건 완전 번외가 되는 거야. 잘 그린 못 그린 그림에 끔찍한 것, 괴기스러운 것 등 내 취향이 아닌 것은 확실히 아웃이지. 

사람들은 말이야, 나처럼 어떤 것은 아예 심사 자체를 안하는 게 있어. 내가 만일 이걸 그리고 사람들의 반응이 별로라서 내가 그림을 못 그렸구나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잘못이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것이라서 잘그리고 못그리고하는 그 평가 자체에서 제외된 것을 '내가 못그려서 사람들이 좋아지 않는거야.'라고 착각을 하지.


이건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마이너한 것을 그려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아니야. 내 취향이 상당히 마이너한 쪽이 아니라서 다행이야. 아마도 이런 영역의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잘그린다 못그린다하는 그 경계를 넘는 것보다는 취향이란 단단하고 거대한 벽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어떻게 우회할 것인가, 어떻게 뛰어넘을 것인가로 엄청난 고민을 하겠지.


그래서 그림을 잘 그린다는 건 자신의 선호, 표현 성향을 찾는 일이기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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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김기덕 감독의 영화 피에타 포스터 사진이야. 난 이 영화를 봤어. 영화속 장면은 이렇게 성스럽지 않아. 내용은 이런 걸 담고 있는데, 표현방식은 아주 신경을 거스르더라구. 난 마구 욕을 하면서 영화를 봤어. 그런데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딱 요 포스터 같은 내용이야. 지저분한 거리, 추악한 돈 숭배, 개잡놈이란 욕이 절로 나오는 인간 말종 남자, 복수에서 연민으로 변한 여자. 


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들과 그것들의 조합으로 만들어내는 내용, 그걸 전하려는 작가, 그런 것들을 넣어서 전체를 볼 때 난 뭔 넣고 뭘 뺄지, 어떤 방식으로 전할지도 생각하게되지. 앞서 말한 그것 것들은 그림을 이야기할 때 넣아야 할 요소 같아. 난 이 포스터 마음에 들어. 쓰레기 더미에서 꽃이 핀것처럼 아련하게 아프고, 평화로워. 내게도 구원이란 것을 전하더라구. 

내게 영화 피에타의 다른 장면을 보여준다면 난 또 욕을 하겠지. 그러니까 그 부분들은 내게 멋져 보이지 않거나 대충대충 구도상으로는 좋네, 혹은 아, 정말 강렬한데 하는 그런 것들이야. 그런데 이 장면은 달라. 포스터 이 장면은 그런 것을 모두 생각나게 하지만 다른 것도 생각나게 해. 

마음에 드는 그림을 이야기할 때는 그런 뭐 이상한 것도 포함해야 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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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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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3) 14) 위에 두 개는 같은 사람을 소재로 그렸어. 같은 날 같은 장소에 있던 사람을 사진으로 찍어 두었다가 나중에 그린 거야. 

위에 것(13)은 그리는 데 시간 별로 안 걸렸어. 몇 시간.  아래 것(14)은 3시간씩 일주일 넘게 걸려서 그렸어. 둘 다 내가 보고 그린 인물과는 조금씩 덜 닮았어. 시간이 많이 들여서 공들여 그린 그림이 잘 그림이라 한다면 그건 아래쪽이 될거야. 하지만 난 위쪽 그림이 훨씬 좋아. 위에 꺼(13)에는 포인트가 있거든. 그리고 그건 그 포인트로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스토리가 있거든. 기술적으로야 아래쪽(14)이 훨씬 낫지. 그런데 우린 그 기술만을 가지고 잘 그렸네 못그렸네 하지만은 안잖아. 앞서도 얘기했듯이 개인의 경험으로 만들어진 취향이란 잣대도 한 몫을 해버리니까.


기술이나 완성도의 기준으로 한다면 다음에 그림들 중에 가장 나중것이 선택될 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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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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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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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3)


우리는 매력이란 요소도 추가해야 할 것 같아. 기술로 이야기한다면 나중것이겠지만 다른 것들과 비교한다면 주관적인 것이 들어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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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 잘 그린 그림 이란 것을 얘기할 때 색의 요소도 배제할 수는 없는 것 같아. 사람들은 색이 없는 것보다는 색이 있는 좋에 혹해서 색이 칠해진 것을 잘 그린 그림으로 선택하곤 해. 그게 더 완성도가 있다고 여기기도 하고.

그러니 잘 그리고 싶다면 자신이 끝까지 완성했다 싶은 단계까지 그렸는지도 한번 점검해 보는 게 좋겠지.


이제는 자연스러운 것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내가 잘 그린 그림이라 여기는 것은 '자연스럽다'거든. 그림을 볼 때, 이건 좀 이상하다 싶은 거, 눈에 거릴리는 것들이 없는 것을 말하는 거야. 그런 게 요소가 있으면 자꾸 걸리거든. 집중을 못하고 딴 짓을 하지. 한눈에 반한다. 보면 볼수록 매력있다 하는 것들은 그런 거슬리는 것이 적을 때 일어나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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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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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나무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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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조리뽕


미로, 나무 뿌리, 조리뽕은 문화센터 드로잉강좌 중에 그린 거야. 선생님이 이런 걸 그러보라고 해서 다행이야. 이건 자신을 탐색하기 위해서 해본 작업이야. 


그냥 복잡한 미로를 그려보라고 하더라구. '자. 이런 걸 상상해봅시다. 어느 정글에 갔다가 엄청나게 복잡한 미로를 만났다. 그 미로를 한번 그려보자.' 복잡한 미로. 이건 처음에 그릴 때, 내가 못 빠져 나올 것 같은 미로는 직선이 아니라고 생각했어. 앞과 뒤가 있는 것이 아닌 것. 전진과 후퇴를 했을 때, 내가 어디 있는지 그 위치를 가늠할 수 없는 것. 그게 내가 생각했던 복잡한 미로야. 그 미로에 빠졌을 때, 방향감을 상실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곡선이라고 여겼거든. 

나중에 내가 그린 것을 들여다보면서 알았지. '아씨! 난 오른손잡이잖아.' 내가 꼰 미로의 나선형 꼬임들은 많은 것들이 오른쪽으로 꼬여있어. 이건 해보기 전에는 몰랐지. 난 미로에 내가 오른손잡이라는 것을 넣고 싶지는 않았어. 그런데, 내가 의도하지 않는 것이 들어갔어.  


나무 뿌리는 선생님이 나무를 지상부분을 그리라고 하면 이상하게 그린다나 뭐라나 그런 설명을 하시더라구. 그래서 지하부분인 뿌리를 그리라고 하신대. 나무뿌리가 어떻게 자연스럽게 뻗어나가는지를 그려보라고 하는데는 눈으로 봐온 것에 대한 것을 잠시 배제하고 실제 나무뿌리와 가깝게 그리라는 의도였어. 조리뽕은 과자 봉지를 뜯다가 잘못 뜯어서 그게 터졌을 때 바닥에 흩어진 조리뽕을 그리시오라는 주문이었어. 이것도 자세히 봐봐. 실제 조리뽕과 닮은 것 같냐? 자연스럽냐구? 내가 보기엔 내가 그린 건 방향성이 있어. 실제는 완전 랜덤이지. 

영화 찍는 사람들이 길거리 행인이 지나가는 것, 군중씬이 자연스러움이 제일 만들기 어렵다고 하더라. 거기엔 규칙이 없는 듯 있는 듯 하거든. 아무런 규칙이 없는 듯 하지만, 사람들이 한 점에 2명이 위치할 수 없지만, 모두 일정 간격으로 떨어뜨려 놓아서도 안되잖아. 어떤 사람은 어울려서 붙어있고, 어떤 사람은 스쳐 지나가고, 어떤 사람은 천천히 걷고, 어떤 사람은 빨리 걷고, 어떤 사람은 장사도 하고..... 조리뽕도 규칙은 없어보이지만 쟤네들은 보리를 튀긴 것이라는 크기를 갖고 있고, 무게 때문에 중력이 있어 제각각 흩어지지. 테이블과 중력이란 제약조건을 가진 것이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인데 우린 그런 것까지 생각하지는 않지. 


이런 건 그냥 보고 그리는 게 제일 자연스러워. 자연스럽게 그린다는 것에 첫번째는 잘 관찰하는 것인 것 같아. 

오른 손 잡이 내손이 근육이 움직이기 편한 대로 그리다보면 한쪽 방향으로 돌거나, 조리뽕이 꼭 자석에 끌려서 한쪽으로 늘어선 것 같은 것을 만들어 내지 않으려면 내 손이 그런 일을 한다는 걸, 내 의식이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돼. 이걸 방지하지 위해 보고 그리느 게 제일 나을 때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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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개미의 궤적

이건 개미가 지나간 것을 표시한 거야. 이것도 선생님이 해보라고 해서 한 거야. 내가 아는 개미는 헛짓거리 안하고 거의 직선으로 다니더라. 자신의 가는 길목에 먹을 게 있으면 그것 탐색하고, 장애물 있으면 돌아가기도 하고, 또 딴 놈이 지나간 곳으로 지나가고 해서 이렇게 그렸어. 

아주 구불구불한 곡선이나 아주 반듯한 직선을 평소에 그리는 사람이라면 개미 궤적을 그리라 했을 때, 무심코 그리면 구불구불 선이나 반듯한 직선을 그리기 쉽지. 이것도 관찰해서 그려야할 대상이야.



이제는 무얼 그릴까 얘기하자. 다음 그림들도 수업중에 그린 거야.

선생님이 남자 그림과 여자 그림을 나눠주면서 옷을 입혀보라고 하더라구. 난 여자는 커리어 우먼같이 산뜻함을, 하나는 파티 의상을 입혔지. 남자는 보는 바와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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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농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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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군복 정장


밑그림으로 그려진 남자가 손에 뭘 들고 있길래, 운동복과 군복을 그렸어. 농구하면 23번 에어 조단. 슬램덩크 그놈도 23번 이었지 아마. 군복은 내가 그 당시에 강철의 연금술사에 빠져 있어서 그랬어. 거기에 군인 많이 나오는데, 군복 입은 남자들 섹쉬하더라구. 쫙쫙 각지게 그려줬지. 

선생님이  이 수업에서 그러시더라. 무엇을 그릴지 먼지 생각하라고. 남자에게 옷을 입히라고 했을 때, 무슨 옷을 입힐 지 먼저 생각하지 않으면 아무 옷이니 입히게 된다고. 그렇지.

난 거기다 하나 더 보태려구. 만일 내가 군복을 입히려고 했는데, 군복의 특징을 모른다면 못 입히고 다른 것을 선택했을 거야. 그림 자세히 들여다보면 알겠지만, 다트 선을 위치를 잘못 넣어서 2개 넣은 것도 있지. 그리기 전에 미리 머리 속에서 시뮬레이션 해야하는데, 선택하고, 재료를 가져다가 한번 입혀보는거야. 이럴 경우 그린다는 것은 머리속 시뮬레이션을  맨 나중에 지면으로 옮기는 작업이 되기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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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주문한대로 그린 식탁


이건 짝궁이 주문한 대로 상차리기였어. 양식을 그리하고 하데. 프랑스 요리. 2인용 식탁. 스테이크, 빵, 버터, 와인, 그리고 프로포즈 반지, 분위기있는 촛불, 꽃장식을 그리라는 주문이었어. 이 모든 것을 한 화면에 배치를 해야했지. 2인용 음식을 배치하고, 포크 나이프, 와인잔의 위치를 잡고, 반지를 놓고, 촛대를 어떤 것을 넣을지를 3차원으로 어느 위치에서 보는 것이 그런 것들이 다 잘 보일까를 궁리해서 그렸어. 각각의 물건들의 크기, 물건들의 간격도 고려해야지.

이걸 수업할 때 선생님이 일러 주셨지. 이런 건 진짜 그리기 전에 먼저 머리 속에서 충분히 그려봐야 한다고. 내가 이런 요리를 안 먹어 봤다면, 이런 장면이 나오는 드라마를 보지 않았다면 못 그렸겠지. 그래서 여기서 팁 하나. 그림을 잘 그릴려고 노력한다는 건 자신의 창고에 재료를 많이 쌓아두는 거야. 평소에 뭔가를 볼 때마다 그걸 머리속에 일부러 차곡차곡 쌓아두는 연습을 하는 거지. 방금 본 것을 눈 감고도 떠올릴 수 있다면 그릴 수 있어. 꼭 그림으로 그리지 않아도 본 것을 말로 묘사하는 연습을 하는 것도 연습 방법의 하나야.


선생님이 또 하나의 가르침은 '그림은 그림으로 말한다'였어. 주문한 대로 그리라고 하시더라. '그림을 설명하려 하지 말고, 그리시오'였어. 스테이크를 주문하면 스테이크를 그리고, 우동은 주문하면 우동을 그리고, 국수를 주문하면 국수를 그리세요. 골뱅이 무침을 주문하면 골뱅이 무침을 그리시오. 넌 그게 뭔줄 아니? 선생님 왈. 우동면발과 국수면발은 굵기가 다르데. 기술과 주의력이 뛰어난 사람은 우동과 국수를 구분하여 그릴 수 있는데, 그런 실력이 부족하면 '우동'을 그려 놓고는 '저는요, 국수를 그리려고 했는데요, 자꾸 손이 삐뚫어지고 펜이 굵게 나와서요, 면발이 이렇게 굵어졌어요.'라고 하게 된다고. 그림쟁이는 그림으로 말해야지, 그걸 설명하려 하면 안된데. 


하하하. 정말이지 스트레스 만땅이야. 우동이랑 국수랑도 구별되게, 그런게 연습이고 실력이라나 뭐라나. 하하하. 스트레스 쌓일 때는 좀 웃어주는 게 좋지. 하하하.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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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자신이 살고 싶은 거실 꾸미기


위에 거실도 식탁과 비슷해. 자신이 살고 싶은 공간을 먼저 선택하고, 그것에 맞는 것들을 하나씩 3차원에 맞게 배치하지. 


이걸 할 때는 개인 취향도 드러나더라. 보이는 것들을 조합했는데, 보이지 않는 것도 그리게 돼. 음악을 하는 사람은 거실에 악기나 음반을 그려 넣었을 거야. 난 보는 쪽을 즐기는 쪽이라 그런 요소들을 넣었지.  밖이 보이는 넓은 창과 크게 자라는 식물이 심어진 화분들과 아이들이 지금 막 가지고 놀다가 두고 나간 듯한 장난감을 그렸지. 벽에는 그림, 사진을 많이 걸어두었고. 이건 내가 바라는 삶의 모습이야.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기도 해. 그러니 그림을 그린다는 건 눈에 보이는 것을 잘 그린다는 것에서 멈추어서는 안된다는 것에 이르지. 이렇게 하면 공부할 게 무지 많아지지. 잘 그린다의 영역이 너무 넓어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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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큰그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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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큰그림2


위에 요소들을 하고도 또다른 것이 하니 있는데, 그건 사이즈의 문제야.

작은 그림은 잘 그리다가 큰 그림은 망쳐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어. 종이는 큰 데 대상을 작게 그려버린다거나, 혹은 자신의 근육이 큰그림 그리기에 맞지 않아서 자꾸만 선이 삐뚫어지거나 혹은 색이 제대로 발색이 안되거나 혼합이 이상하게 되어버리는 거지.


큰 그림을 그릴 때는 그에 맞는 근육(손을 넘어서 팔꿈지, 어깨 혹은 전신까지도...), 그에 맞는 적합한 재료, 적절한 시간(작업시간이 길어짐)을 사용해야 해. 근육은 근육대로 익숙해지도록 단련시키고, 재료의 사용은 수차례의 연습으로 손에 익혀야지. 그림의 사이즈가 커진 만큼 거기에 넣을 것도 사이즈에 맞는 것을 선택해야 하고. 


그래서 그림을 잘 그리고 못 그리고는 자신에게 맞는 사이즈를 선택하는 것이기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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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자화상

난 이 그림의 제목을 자화상이라고 붙여 두었어. 이 그림 속 식물 이름도 몰라. 어느날 아침에 연습으로 그림 그리다가 이녀석이 적당해보여서 그냥 그렸어. 연습삼아 그리기에 적당하게 복잡하고, 적당하게 단순한 녀석이었지. 위에도 그리고, 그리고 이 녀셕을 담고 있는 화분에 그림자도 그렸어. 화분에 내 얼굴이 비쳐 보였어. 그러니까 난 화분을 그리면서 거울 속의 나도 그린 셈이야. 이 녀석은 줄기가 꼭 가시처럼 뽀족뽀족해서 날 닮았더군. 

그래서 난 이 작은 그림이 마음에 들어. 기술적으로 잘 돼서도 아니고, 이 안에 내가 담겨 있어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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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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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화장품 가방과 과자 오뜨는 나다운 채색이어서 여기에 소개해. 실제에는 있지도 않지만, 내 그림 속에만 있는 물결무늬가 있지. 난 이걸 '나다운 채색'이라고 불러. 색을 많이 섞어서 쓰다보면 자신에게 맞는 색채를 찾게되지. 그러니까 이것도 연습해야할 요소 중의 하나야. 


난 거기에다가 다른 것을 하나 더 추가했어.물결무늬가 없었다면 닮게 그려야 한다느니, 색깔이 고와야 한다느니 하는 것을 만족시키기는 했겠지만 특이한 게 없었을 거야. 난 그 특이함이 매력적인 요소라고 생각해. 이건 내 사인이 있건 없건 내그림이다 하는 것을 넣고 싶어서 물결무늬를 다른 색으로 또 넣었어. 어쩌면 이 요소는 그림을 망칠수도 있는 요소인데 나는 이걸 구지 넣고 싶더라구.


그래서 여기서 그림그리는 팁하나 추가!

그림 잘 그린다는 것은 선택과 결단의 문제이기도 하다.


넣어야 할 요소는 많고, 빼야할 요소도 많지. 잘 그리는 법이라고 알려주는 팁들은 따라야할 규칙이 왜이리도 많은지, 연습해야할 것들이 왜이리도 많은지 끔직하지. 그런 책들이 맨 나중에 하는 말이 있어. 

멋진 디자인을 위한 100가지 법칙. 멋진 타이포 그라피를 위한 규칙 100가지. 이런 책들의 맨 마지막 규칙이 뭔고 하니.

'앞에 나온 것들은 모두 무시하라'


잘 그린 그림, 멋진 그림이란 것들은 수많은 것들 중에서 무엇을 선택하여 그리고, 무엇을 선택하여 뺄지, 어떤 방법을 사용할지, 무엇을 강조할지를 결정한 것들이야. 잘 그리기 위한 연습 중에 꼭 해야 할 것은 그런 선택을 매번 하는 것이야. 그리고, 그것에 대한 결과에 대해서 자신이 책임지는 것도 포함해서. 책임이란 게 별 게 아니라 그것을 완성한 것으로 할 것인가 다시 한 번 붓질을 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새로 그릴 것인가하는 것을 또 선택하는 거지. 그런 스트레스는 견디는 것인지, 즐기는 것인지... 하여간 그런 연습이 좀 필요하네. 


앞에 잘 그리기 위해 팁, 잘 그리기 위해 해야할 연습으로 제시한 것들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있다면 난 이 선택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연습이 제일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해.


아, 이런. 심각해지면 안되는데. 내가 그림그리는 걸 재미없게 만들어 버린 것 같아. 

난 잘 그리고 싶어서 책도 드립다 파대. 뭔가를 보면 사진으로 찍어 두기도 해. 그걸 나중에 그리고 싶으니까. 혹은 사람도 위에서 아래로 쫙 훓지. 매번 의도하고 그런 건 아니지만, 가끔 그럴 때, 난 그런 게 재밌더라. 세잔이 그랬다나 뭐라나. 

"당신은 사과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요, 당신은 사과를 볼 때 사람들과는 다르게 보나요?"

"저도 사과를 먹을 때는 당신과 같은 것을 봅니다. 그러나 그릴 때는 다르게 봅니다."


난 그림 그릴 때 긴장이 좋더라. 

그럼 즐기시길.


IP *.131.89.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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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15 15:35:50 *.29.125.15

정화씨 그림 잘 보고 있습니다.

어렸을때, 그림을 그리지 못하여,

정말 힘들어 했던 경험이 있어요.

지금은 왠만큼 그려 지는데, 마음이 안정이 되니까, 더 관찰하게 되고,  더 잘보이는 것 같더군요.

정서까지 그릴 만큼 연습도 하고 싶은데 시간이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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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18 06:32:03 *.131.89.100

번개질주님...전 연습은 잘 안하는 편인데도 욕심은 많아요.

저도 보이는 것으로 안보이는 것(정서)까지 그리고 싶은데.... 그게 안돼네요. 가끔가다 그런 게 저도 모르게 드러나면 화들짝 놀라기도 하구요. 즐거운 시간 많이 가지시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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