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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마음을

  • 오병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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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11일 00시 25분 등록

얘야, 세상에는 두 종류의 여행자가 있단다. 하나는 지도를 보는 여행자고, 또 하나는 거울을 보는 여행자지. 지도를 보는 여행자는 떠나려는 여행자이고, 거울을 보는 여행자는 돌아오고 싶어 하는 여행자야.

- 영화 터치 오브 스파이스에서

 

남도여행을 짧게 다녀왔습니다. 전남 화순에 있는 적벽은 고요함 그 자체였습니다. 달빛 가득 찬 밤에 막걸리 호리병을 옆에 끼고 적벽을 바라보며 시 한 수 읊으면 참 좋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구본형 스승님의 유해를 뿌린 장흥의 수문 해변은 잔잔하고 평화로웠습니다. 막걸리 한잔과 누룽지 안주를 드렸습니다. 생전에 바다를 좋아하셨기에 바다로 돌아가셨습니다. 저녁 무렵에는 강진 다산초당에 여장을 풀고 전어회, 전어무침, 전어구이 3종 세트로 식사를 한 후 이른 새벽 무렵에 다산초당에 올랐습니다. 별이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다산은 아마도 유배생활의 쓸쓸함을 저 별을 보며 달랬을 것입니다.

 

이튿날 백련사를 둘러본 후 고금도로 떠났습니다. 충무사에서 만난 이순신은 슬펐습니다.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후 이 곳에서 80일간 가매장한 후 아산으로 옮겨졌습니다. 예전에 현충사에 가보았는데 그 곳은 영웅의 성지인 반면에 이곳은 그가 살아있을 때의 고뇌가 온전히 느껴지는 공간입니다. 찾는 이의 발길도 거의 없습니다. 외롭고 높고 쓸쓸합니다. 향을 피우고 절을 올렸습니다. 떠나야 할 시간이 왔지만 한 사나이가 여전히 잡아 당깁니다.

 

한 남자가 있었네.

가냘퍼.

모성애를 자극해.

그런데 심지는 대못처럼 단단해.

토사곽란에 시달리면서도

날마다 활을 쐈어.

바다를 바라보며 온갖 번민 속에서 전략에 골몰했어.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어.

아니 죽음의 바다에 기꺼이, 장렬하게 던졌어.

그게 운명이라고 느낀 게야.

그가 우릴 잡아 끌어.

운명을 거부하지 말라고.

운명은 숙명이 아니야.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해.

거기에 용맹 정진하게 뛰어들어야 해.

그게 진짜 삶이야.

 

순천만에서 만난 일몰은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로 황홀했습니다. 천지개벽이 조용히 일어난 듯, 우주의 기운이 온 몸을 휘감았습니다. 우리는 김민기의 그사이라는 노래를 가슴으로 들으며 깊은 침묵에 잠겼습니다.

 

해 저무는 들녘
밤과 낮 그 사이로
하늘은 하늘 따라
펼쳐 널리고
이만치 떨어져
바라볼 그 사이로
바람은 갈대 잎을
살불어 가는데...

 

여수 향일암에서 바라본 바다는 모든 것을 포용하고도 남을 것처럼 넉넉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바다를 보는 방법을 제대로 안 것 같습니다. 바다를 볼 때는 파도의 일렁임을 유심히 봐야 합니다. 파고에 삶의 순간을 얹어보면 자연과 인생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다는 모든 것을 포용합니다. 그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바다는 모든 것을 그 안에 담고도 오직 하나의 색, 푸른빛을 유지하고 있다. 똥과 오줌, 신다 버린 신발, 동물의 시체, 어부인 남편을 잃은 부인의 눈물, 절망한 사람이 먹다 버린 소주병, 부정직한 인간이 밤에 몰래 방류한 폐수, 탐욕스러운 인간이 밤새 퍼먹다 토한 오물을 다 쓸어안고도 푸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바다는 가끔 밑바닥을 뒤집어엎어 스스로를 정화한다. 태풍과 풍랑과 해일과 파도는 바다가 스스로를 정화하는 도구들이다. 바다가 바다일 수 있는 것은 스스로를 새롭게 할 수 있는 능력 때문이다. 어찌 배우고 닮고 싶지 않겠는가?

- 구본형의 떠남과 만남에서

 

이번 여행에서 예기치 않았던 우연의 장면이 있었습니다. 화순에서는 제 뿌리를 발견했습니다. 저는 동복 오씨입니다. 적벽을 보려고 정차한 장소 근처에서 시조비를 우연히 보았습니다.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라는 존재의 씨앗을 조금 확인한 느낌이랄까? 우연히 발견한 화순 이서가든 음식점에서는 예전에 그 곳을 찾았던 한 분의 자욱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메기 매운탕을 기가 막히게 끓여주신 주인 아줌마는 제 스승이 몇 번 다녀간 것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분의 여식과 이야기를 나누며 아이고, 어쩌나를 연발했습니다. 누룽지와 막걸리를 싸주시며 함께 기념촬영도 했습니다. 여행 마지막 날, 갈치조림으로 식사를 하려고 음식점을 먼저 둘러보았습니다. 신기하게도 우리가 들어간 음식점은 일행 중의 한 명이 몇 년 전에 우연히 갔던 집이었습니다. 그 많고 많은 음식점 중에서 왜 그 집이 저에게 꽂혔는지 모르겠습니다.

 

인생은 우연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행은 인생이 우연의 연속이라는 걸 시시각각 우리에게 시그널을 보내줍니다. 그러나 그 우연 속에서 운명 같은 필연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때 꼭 맞게 나를 위해 준비된 장면을 만나게 됩니다. 어느 낯선 항구에서 문득 들려오는 노래를 들으며 예상치 못한 기쁨이 슬그머니 다가오는 것처럼. 그때 나의 가슴은 열리고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삶이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때,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때, 예기치 않은 사건이 찾아올 때는 거기에 운명 같은 뜻이 있다고 믿고 받아들이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연에 대한 열린 마음, 그것이 삶을 풍요롭게 살아가는 방편이라는 것을 깨달은 여행이었습니다. 가을의 절정 10월에, 어느 멋진 날을 담아 보시길. 우연의 축복이 쏟아질 것입니다.

 

순천만 일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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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13 21:55:40 *.217.6.151

하늘에 걸린 잠자리.

10월 우연의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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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14 00:51:12 *.38.189.27

난 서원이 어찌 전국을 싸돌아 다니면서도 꾸준하게 글을 쓰는지 의문을 가질 때가 있었다네. 근데 그 이유가 별나게 특별나지 않다는 걸 난 알어. 나 역시 유별나게 바쁠 때 첫 책을 썼었거든. 그건 절실함이고, 어떤 것에 우선순위를 두느냐의 문제거든.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게 인생이지만 그대는 잔잔하게 꾸준히, 때로는 진하게 살아갈 것이라 믿네. 그 마음을 잃지 않고도 우리는 충분히 삶을 즐길 수 있을 거야. 그대는 참으로 믿음이 가는 사람이야. 난 사람 볼 줄 알거든. 10월의 어느 멋진 날이 계속 이어지기를. 그나저나 우리 벙개해야지. 10월의 마지막 날에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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