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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13일 09시 35분 등록

[에피소드4]

 

첫 명절 풍경

 

 

전화를 받았다. 그녀다. 우리는 종종 명절을 전후하여 통화하곤 했다. 나도 결혼 후 첫번째 추석명절을 보내고 새벽 1시 반에 도착해 쉬고 있는 참이다. 부모님이 농사지어서 새로 도정한 쌀, 나무에서 따서 담은 사과, 참기름과 들기름, 총각김치, 사과 생즙, 올케가 준 미숫가루와 꿀, 고모부가 주신 마늘 1, 시어머님 갖다 드리라는 포도 상자가 거실 바닥에 널려 있다. 마음과 시간이 담긴 선물들. 서울이 고향이라 생전 처음으로 추석귀향길 인파로 장거리 운전을 해본 이도 건넌방에 널브러져 있다.

 

첫 명절을 무사히 치뤄 내야 하는 우리는 며칠 전부터 잔뜩 긴장을 했었다. 이 집에도 저 집에도 속하지 못하는 듯한 외로움, 절대로 남편을 시어머니 앞에서 시켜먹지 말라, 첨부터 너무 열심히 하면 더할 수는 없어도 뺄 수는 없으니 앞으로의 삶이 고단하다, 첫 명절에는 아무 것도 못한다고 하라는 며느리 금기를 전수받았다. 우리 식구끼리 있으면 대강대강 보낼텐데 며느리가 오니까 반찬도 더 해야한다며 시어머니 명절 스트레스를 말해주는 이도 있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그에게 고대로 중계방송을 했다. 그는 나의 느림에 대한 이해와 어머님의 솜씨와 부드러움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었다. 시어머님도 긴장했던 것 같다. 손 많이 가는 녹두부침개는 한동안 안했던 것이라 하고, 산적에 소고기를 꿴 것도 처음이라 하셨다. 드디어 딸이 시댁에서 출발해서 사위와 함께 오는 일정은 전통을 중시하는 경상도 내 부모님에게 안정감을 줄 것이었다.    

 

쇼핑이 취미에다가 미리미리 준비를 해두는 스타일인 그가 인터넷 쇼핑으로 시중보다 싸게 미리 양가에 제수용 고기를 보내고, 인사드릴 친척집에 갖고 갈 선물을 주문해서 택배를 받아 두었다. 나는 진심 고마워하고 감탄했다. 누군가에게 드릴 선물을 미리 선반에 올려놓고 일주일 정도 보면서 지내는 건 나에게도 기쁜 일이었다. 한편 시댁과 친정의 선물인 홍삼세트와 스팸의 가격이 비슷한지, 양가에 들이는 경비와 시간이 비슷한지에 민감했다. 나는 학교에서 추석 계기교육을 하느라고 2주간 한복을 입고 출근하고 있었다. 어떻게 장애 아이들에게 추석을 이해시킬 건지, 그리고 가족들이 모였을 때 잘 인사하고 튀지 않을 건지를 생각했다. 올 추석은 덥기도 하고 혼인할 때 산 배자 딸린 붉은 치마의 한복은 시댁에 있어서 대신 고무줄 바지 계량한복을 입었다. 집이 좁다는 이유로 우리 한복은 그의 친가에 가 있다. 그에게는 단지 그곳이 넓기 때문에 한복을 보관한다는 것이었는데 나는 빨리 찾아와야지 싶은 마음이 안 없어졌다. 내 집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그에게는 거기도 우리집이었다. 나는 피곤하면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어지고, 그는 그렇지 않았다. 아직 나와 같이 사는 집이 덜 우리집인 것도 같다. 그는 인사불성 술이 취하면 거기로 택시를 타고 간다. 그가 들어오지 않은 날 아침에 전화를 걸었더니 니 신랑 여기 와서 잔다며 어머님이 이야기를 해주신다. 동네 친구를 만나 그 근처에서 술을 마신 줄 알았더니 먼데서 마신 거였다. 귀소본능을 일으키는 둥지는 내가 있는 집이 아니라 어머니와 동생이 있는 집이다. 그 동네는 그가 태어난 고향이기도 하다.

 

시댁에서의 차례준비 일정은 사사건건이 우리집과 비교가 되었다. 이런 시각도 올해가 지나면 무뎌지리라. 이건 이방인의 문화충격이다. 명절은 지극히 가족중심적인 행사다. 가족의 특징, 그리고 어느 가족에나 있는 걱정거리와 상태가 그대로 드러나는 바로미터다. 그래서 여행지의 사람이 자신에 대해, 이민자가 자기 조국에 대해 더 분명히 알게 되는 것처럼 나는 내가 자란 집에 대해 더 잘 생각할 수 있었다. 거기서 빠져 나오는 경험과 그것과 대치가 되는 풍경이 필요한 듯 하다. 두 가지가 눈에 띄었다. 하나는 전 부치는 걸 일체 남자들이 한 것, 둘째는 차례상을 간단히 차리고 차례 형식을 안 따지고 남자 여자가 모두 참가한 거였다.

 

남자들이 전을 맡아서 부치게 된 사연이 궁금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버님은 인사 다니느라 집에 안 계시고, 어머님 혼자 음식을 준비했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신 때부터 중학교 2학년 초등학교 6학년 아들 둘이서 부침개를 부쳐 버릇한 거였다. 나는 이런 미풍양속이 앞으로도 계속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30년 전통의 형제전집을 칭찬했다. 실제로 나보다 전 부치는 솜씨들이 좋았다. 입맛 역시 더 예민한 듯 하다. 시장도 남자들 2명이서 봤다. 장남인 그는 어머님이 일을 하시므로 평상시에 용돈을 드리지 않는 대신 제사와 명절 비용을 내고 있는 듯 했다. 어머님과 나는 재료를 준비했다. 재료준비가 손이 더 가고 시간이 많이 걸렸다. 갈기와 야채 썰기, 그릇 가끔 부시기는 시다가 하고 나머지는 모두 이 집 주인인 어머님이 하셨다. 어머님이 하는 일이 정확히 무엇이고 순서가 어떠한 지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옷에 하나도 묻히지 않으면서, 쓴 그릇을 치워가면서, 씽크대와 가스렌지를 닦아가며 일을 하는 걸로 봐서는 뚝딱뚝딱 일을 잘 하는 분인 건 알겠다. 나는 불린 녹두와 쌀을 일어서 분쇄기에 갈았다. 야채를 썰 때는 견본 하나를 만들어 이렇게 할까요 얼만큼 할까요 일일이 보여드리며 물어봤다. 잡채 꺼리는 채치고 산적 꺼리는 길이를 맞춰 자르고, 동그랑땡 꺼리는 다졌다. 제사음식 준비는 집에서도 많이 보던 일이라 그 장면에 들어 가는 게 어색하지 않았다. 그런데 만약 겨울방학에 내가 쉬고 있기 때문에 제사 준비를 나 혼자 하라고 하면 골이 날 것 같다. 한 번 같이 살아보지 못하면 후회할 것 같은 남자가 이 댁 장손이라 혼인을 했지만 이 댁 조상님과 나는 아직 친해지지 않았는데 며느리 의무만으로 그게 당연히 내 일이 된다면 말이다. 죽은 조상님과 산 조상님 모두 라포를 형성하고 좋은 추억을 쌓아 가서 자연스럽게 내 가족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한테 이야기를 많이 해주고 여러 장면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이쁜 옷 버린다고 아끼시던 새 앞치마를 갖다 주셔서 두르고 장만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앞치마를 두르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씽크대 앞에서 조상을 위한 음식을 준비하는 그 장면 자체가 다른 이들에게, 특히 남편이며 장남인 그에게 흐뭇함을 주는 듯 했다. 그가 흐뭇해 하니 나도 뭉근히 기뻤다. 내가 평상시에는 뚱하고 애교 따윈 없지만 같이 사는 것도 아니고 잠깐 며느리 코스프레를 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는 어머님, 동생 가족, 우리 가족이 같이 모여 살고 싶어한다. 아마도 어머님이 일을 그만두고 난 다음, 그리고 우리가 아이()을 낳아 내가 3년 휴직을 마친 때쯤이니까 5년 전후한 미래의 일로 그리는 듯 하다.   

 

어머님은 이런 저런 이 가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신다. 시아버님의 납골당, 고모부님의 제사, 외삼촌댁 등 가족행사에 가는 차 안에서 주로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목포 사람이었던 시할머님은 생선을 여러 마리 찜을 해서 제사상에 놓았고, 1월에 제사와 가족 생일이 다 들었고, 현재 제사는 2번이고 언제이며, 니 남편을 뱃 속에 넣고 과일이 먹고 싶은데 없는 살림에 과일 이야기를 못하고 무 맛있다는 말만 했더니 니 시할머니가 마실 갔다가 무 가운데 토막을 많이 얻어다 주었다, 애기 낳고 한 달 몸조리를 했는데도 살이 안오르니까 뭐라시더라는 이야기나에게는 아마도 이 가족의 좋은 이야기를 주로 들려주고 계실 거라는 생각을 했다. 행간을 읽어야 하는 건 내 몫이리라.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게 몹시 재미있었다. 우리 엄마는 저런 이야기가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학교에 갔다 왔을 때 엄마하고 온갖 이야기를 다 하는 딸들이 대단히 부러웠었다. “오늘은 어땠어? 무슨 일이 있었어?” 그런 질문을 받고 싶었다. 엄마는 일체 이야기를 하지 않는 여자였다. 누구의 험담을 하는 일도 없었고, 누구의 칭찬을 하는 경우도 없었다. 엄마의 역사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엄마는 왜 그랬을까? 성품이 좀 덤덤했을 거고, 과수원 일에 아이 넷을 기르며 너무 바빴을 거고, 그리고 가장 마음 아픈 것은 엄마도 한 번도 외할머니와 그래본적이 없었을 거라는 거다.     

 

추석날이 되었다. 처음으로 시댁에서 자고 일어난 날이다. 혼인한 지 6개월이 지났지만 집이 가까이 있어서 저녁 식사를 같이 하더라도 나는 여기서 자고 간 적은 없었다. 2가지 꿈을 꾸면서 일어났다.

 

1. 베이지색 양복에 금단추를 단 하영목웨버님이 공동묘지 옆 항시미기 길로 즐겁게 걸어가는 꿈이었다. 금단추는 양 어깨에 하나씩, 팔에 3, 바지에 3개씩 붙어 있다. 양복의 바지는 반바지였고 금으로 된 신발을 신고 있었다. 바지의 금단추를 떼려고 하는 그에게 내가 그럴 필요없다, 아무도 신경 안쓴다, 멋지다고 말해준다.

 

2. 내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다. 젖이 퉁퉁 불었다. 오른쪽은 물리지도 못하고 왼쪽 젖을 잠깐 빨렸을 뿐이다. 아기가 입을 다물어 버린다. 아기가 무표정하다고 느끼며 젖꼭지를 빼서 다시 입술에 간질여 봐도 입을 열지 않는다. 잠이 들지는 않았다. 양껏 먹지도 않았다. 아기를 안은 채다. 왼쪽 젖가슴에서 하얀 젖이 계속 뿜어져 나와서 아기 얼굴과 옷을 적시고 흙바닥으로 떨어진다. 아기는 남편과 닮았다. 아니 이마에 주름이 있는 남편 같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엄마가 아니라 다른 여자의 아기란다. 나는 그 여자를 알고 있다. 아기의 생모는 뚱뚱하고 키가 작고 목이 짧고 이마가 좁고 머리털이 멧돼지처럼 뻣뻣하고 앞 정수리는 탈모가 일어나 듬성듬성했다. 애기 엄마는 지적장애에 간질환자였다. 나이차이 많이 지는 늙은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가 병이 들통나서 아기만 낳고 쫒겨나 혼자서 살다 젊어서 죽었다고 했다. 다음 장면, 그 애기엄마의 결혼식에 나는 아기를 안고 참석 한다. 벌써 시작했다. 신랑신부가 주례선생님 앞에 서 있는 상황에서 신부의 세 언니와 같이 예식장에 도착했다. 언니들은 저 년이 연락도 안 했다며 화가 나 있었지만 얼른 가족석에 가서 앉는다. 투덜댐조차 애정인 걸 나는 안다. 나는 예쁜 옷을 입힌 아기를 안은 채 밖에서 아기 엄마의 결혼식이 끝나길 기다렸다. 내가 그녀와 어떤 관계인지는 모른다. 아기의 젖동냥 유모였을까?

 

시댁에서의 첫날밤에 이런 꿈을 꾸다니 이건 무슨 의미일까? 마블링 물감을 도화지에 찍듯이, 닥나무 섬유소로 창호지를 뜨듯이 간수를 쳐서 두부를 굳히듯이 꼼짝 않고 누워서 꿈을 채집했다.   

 

나는 커피 타러 5 30분에 주방에 나갔다. 어머님이 왜 이렇게 일찍 나왔냐, 더 자라. 7시에 나와라하셔서 냉큼 들어갔다. 나도 새벽 첫 일로 주방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내 일정을 하고 싶다. 맏며느리이긴 하지만 아직은 내가 명절 준비의 주무자가 아니니 가능한 일이다. 모닝페이지를 하고 108배를 했다. 모닝페이지는 음식하는 소리가 들리는 주방쪽 베란다로 창이 난 작은 골방에서 했다. 비닐봉다리로 싸둔 선풍기, 상자들, 어머님의 살림살이들이 쌓여있는 방이다. 절은 모기장을 쳐놓고 자고 있는 그의 옆에 가서 했다. 도련님이 자신의 모기장을 내 주었다. 나는 나름 이쁜 걸로 골라서 내주신 어머님 옷을 입고 잤었다. 머리만 대면 어디서고 잘 자는 나는 잠을 설치지 않았다. 그가 익숙한 자기집 소파에서 뒹굴거리며 늦게까지 tv를 보고 형제끼리 이야기를 하는 동안 여자들은 먼저 낯과 발을 씻고 자러 들어갔다. 이 집은 여자들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형이고 남자들은 올빼미형이다. 절을 하다가 추수감사절인 추석에 감사할 꺼리들을 생각한다. 나를 배려하는 여러 사람의 마음씀이, 그리고 어제 야간근무 후 퇴근해서 형제끼리 시장을 봐와서 청소를 하고 있는데도 내가 아직 도착해있지 않아서 그가 말은 안했지만 마음이 상했던 것이 조금 느껴진다.

 

7시에 내가 나갔을 때는 삼색나물을 볶아서 창문 앞에 너른 그릇에 담아 펼쳐놓고 식히고 있다. 취나물, 도라지나물, 고사리다. 도라지는 안 깐 걸 트럭에서 싸게 사서 며칠동안 깠단다. 이미 쪄둔 생선은 조기 2마리와 가자미 2마리다. 실고추를 고명으로 얹었다. 생강을 넣어 끊인 감주가 베란다에 내놓아져 있고 다시마와 덩어리 소고기를 넣은 탕국 국물이 설렁설렁 끓고 있다. 내가 나갔을 때는 잡채 나물을 거진 절반 볶아둔 상태였다. 나는 간을 해주시면 볶으라는 야채를 나무 주걱으로 뒤젂였고 고명용 고기를 찧었다. 양념을 해주면 주물렀다. 제사음식인데도 파마늘을 다 써서 양념을 하고 있었다. 물엿과 매실엑기스가 많이 들어가고 참기름을 아끼지 않는다. 커다란 포대에서 당면을 꺼내어 삶았다. 식구들이 모두 잡채를 좋아한다더니 푸대 단위로 사놓고 해 먹는구나. 오매나! 그가 우리 엄마가 한 것이 제일 맛있다고 격찬했던 그 잡채의 조리 장면이다. 그런 음식이 몇 가지 된다. 잡채, 고추장돼지주물럭, 김장김치에 싸먹는 수육, 유부를 듬뿍 넣은 잔치국수, 돼지갈비, 오이소박이……그럴 때마다 나는 이 시점이 삐질 시점인가 생각하다가 어머님한테 잘 배워서 저 좀 만들어주세요. 기대할께요라고 대꾸한다. 그는 조금 경계한다. 이런 식으로 그가 잘하는 일이 모두 그의 몫이 되면 자신이 피곤해질 것 같아서?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입맛이 대충인 내가 배워서 흉내낼 수 없다는 거다.

 

우리집처럼 목기로 된 고임제기에 음식을 담지 않고, 행남자기 세트에다 담았다. 차례상 앞에 놓인 개다리 소반 위에 소주병과 잔 다섯 개가 놓여있다. 며느리가 처음으로 참여하는 차례니 잔을 올리란다. 내가 무릎을 꿇고 앉자 그가 소주를 따라 준다. 그걸 다섯 분 모두에게 차례 차례 올린다. 그러고서 네 명의 어른이 절을 두 번 했다. 끝이다. 드시는 동안 나와서 20분 정도 TV를 봤다. 우리집 같으면 어림도 없다.

 

4대봉사를 하고 명절 2번에 제사가 아홉번이다. 제사 참석의 자격은 남자로 국한된다. 딸과 며느리는 제사에 참여하지 않고, 음식준비만 할 수 있다. 육촌 조카 아이 남자 1,2,3은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어린애인데 우리집 제사에 들어가고, 우리집 친손녀들은 공식적으로는 제사에 절하러 들어갈 수 없다. 나 역시 단 한번도 내 조상에게 술을 올리거나 절을 드려본 적이 없다. 그저 제삿상에 놓였던 음식 중에서 밤이나 대추처럼 좋아하는 걸 집어서 먹거나 제기를 가지고 소꿉놀이를 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별로 해 본 적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남자들과 여자들의 상 2개를 차려서 따로따로 밥을 먹는 것도 거슬리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원래 그러했기 때문이다.  

 

끝나자 형제는 그냥 움직이지 않고 어머니 더러 이런 저런 것을 시키고 가르친다. 어머니는 또 그래 그러마 하고 움직이다. 아마 예전에 아버지가 하던 모양이었을 것이다. 또 기본적으로 이 댁은 외향적이다. 외향적이란 말의 뜻은 말하면서 생각한다는 거다. 내가 자란 곳보다 말이 3배는 많다. 식구끼리 화목하고 친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나는 또 경상도 우리집 생각을 하고 있다. 우리집은 여자들이 부엌일을 하고, 일체 간섭받지 않는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익숙하다. 제사 음식을 전혀 준비하지 않는 남자들이 제삿상 차림을 홍동백서 좌포우혜 조율이시 하면서 검사한 후 간장이 빠졌으니 간장 가져오라, 꼭 한 가지씩 빠뜨린다고 지청구를 주던 장면과 비슷하다. 내가 아버지나 남동생과 비슷한 남자를 고른 건지도 모른다. 우리집은 음식 준비와 상차림에 남자들이 참여하게 된 지가 얼마 안된다. 시점은 올케가 들어오고 난 다음이다. 올케네 집은 그래도 남자들이 상을 차리는데 이 집은 너무 아무것도 안 한다고 했나 보다. 그게 우리집만의 풍경인 줄을 남동생도 나도 아무도 몰랐다. 따져 보자면 남자들이 모두 전쟁에서 죽고 유복자인 아버지가 제사를 지내야하니 할머니와 증조할머니는 애기 장손이 고맙고 신통하고 안쓰러웠을 것이다.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 제사를 지내는 아이더러 너는 잔만 올리거라 했을 거다. 엄마는 10년간 증조할머니를 모시고 살았으니 그대로 굳어졌을 거다. 그 내력이 지금까지 내처 온 거였다. 게다가 엄마의 친정 역시 남아선호사상이 투철한 집이었다. 요즘도 남자가 부엌 출입을 말아야 하는 건 엄마의 불문율이다. 니 아버지는 평생에 밥 3번 해봤다고 하지만 고치라고 할 것 같지는 않다. 맞벌이를 하느라 제 집에서 각시랑 살 때는 멀쩡히 설거지 잘 하는 아들들도 부모님 집에만 가면 부엌 출입을 하지 않아야 한다. 너희 집에서는 마누라 빤스를 빨아줘도 되지만 여기서는 하지 말라는 게 그녀의 신조다. 아버지는 특히 아들들이 자기 딸램이들의 똥 눈 시기를 알고 있고 변비를 걱정해서 신기해하셨다. 당신은 자식 넷이 클 동안 아이를 안아본 적도 기저귀를 갈아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부침개는 어제 애벌로 부쳐놓고 먹을 때마다 둥근 전기 후라이팬을 꽂아서 데워서 냈다. 송편은 사왔다. 백미, 흑미, 단호박, 쑥 송편이었다. 내가 싱크대에 붙어 서서 앞치마를 하고서 그릇들을 씻었다. 마치 올케의 모습인 듯 하다. 올케는 어떨 지 모르지만 내가 싱크대 앞에 서 있어 보니 가져다 주는 그릇을 씻는 게 편하다. 음식 상을 치우면서 이 집 식구들은 남은 음식을 어떻게 처리할 건지, 이후 일정에 대해서 의논할 게 많았다. 내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할 말도 없다. 그리고 이 집 살림살이를 모르니까 차라리 그릇이나 빨리 닦아 헹구는 편이 낫다. 내 역할을 이전 설에는 작은 아들이 한 것 같다. 아침 먹고 다들 한숨 잤다. 명절 손님은 한 팀이었다. 그가 아이들에게 감주를 퍼주고, 만 원씩을 주었다. 어머님이 연년생인 그 댁 손주들을 부러워했다. 나도 부럽게 쳐다보았다. 어머님은 차례상에 오시는 조상님들께 며느리가 와서 감사합니다. 인제 딸이든 아들이든 손주 하나 보내주세요마치 굿을 할 때 비나리 하듯 말씀하셨다. 제사 형식이 무시되고 오히려 저런 기원이 곧바로 암송되는 식이 훨씬 더 제례의 본래의 모습이지 않을까?  

 

우리도 추석 당일 오후에 친정을 향해 출발했다. 추석 음식을 집 냉장고에 넣고 난 후다. 어머님이 전, 나물, 물김치, 잡채, 떡을 싸 주셨다. 고속도로가 밀려서 3번 국도로 내려갔다. 가는 길에 보름달이 모롱이 돌 때마다 다른 수묵 산수화를 그렸다. 우리는 그 선물에 감탄하며 함께 소원을 빌었다. 한 시간 거리에 사는 동생네가 친정 안가고 기다려주었다. 부모님은 명절 보낸 후 들에 나가 일을 한 판 하고 들어오신 길이다. 엄마가 꾸벅꾸벅 졸았다. 남자들이 술을 한 상 하시는 걸 보고 나는 자러 들어왔다.

 

다음 날 아침, 올케와 엄마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아침식사 준비를 한다. 결혼 10년차가 되니 이제 올케도 아침에 같이 나가 식사를 같이 준비한다. 직장을 다니던 때는 그렇지가 않았다. 거긴 이제 이 집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고유 공간이다. 내 자리가 아니다. 고모인 나는 두 소녀 손을 양 손에 하나씩 잡고 동네 산책을 한다. 내 유년의 공간을 거닌다. 도랑 트레킹을 하고 공동샘에서 물을 퍼보고 길없는 길로 이슬이 내린 들판을 가로질러 다니며 들꽃을 꺽어 꽃다발과 화관을 만든다. 여름에 두 돌이 지나고 아직 기저귀를 하고 뒤뚱거리는 작은 아이가 내가 주워준 홍시를 혼자서 맛보는 게 귀여웠다. 그는 아침을 평소에는 안 먹는데 우리집은 모두 아침을 먹어야 하니 사위 그릇에 더 많이 퍼준 밥과 골뱅이 국을 먹었다. 우리 형제들이 모두 좋아하니 일부러 끓이신 거다. 골뱅이국은 홍두깨에 밀어서 하는 콩가루 섞은 칼국시와 함께, 귀한 손님을 위한 엄마의 특별식이다. 잘 보니 조기를 굽고, 장조림을 하고 엄마가 상에 공을 들이셨다. 올케가 옆에서 나에게 고모부 어제 저녁상도 제대로 못 차려주었다고 어머님이 반찬을 여러가지 만들었다고 사연을 지원사격 한다. 낮에 그와 함께 고모집과 큰아버지 집을 들렀다. 이전에 나는 이렇게 개별적으로 찾아간 적이 없었다. 인사는 아버지와 아들들이 다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인사다닐 집을 내가 선택할 수도 없었다. 그건 가장의 역할이며 권한이었다. 고모부가 우리더러 찾아와 주어 고맙다며 마늘을 한 접 주셨다. 엄마가 같이 일을 좀 해주었으면 해서 과수원에 가서 잎을 훑었다. 출하 앞두고 볕을 보게 하기 위해서였다. 저녁에 작은 집에서 육촌 동생과 사위가 왔다. 서로 손이 귀하고 외로운 집이라 아버지와 큰 아버지는 사촌인데 친 형제처럼 지내고 있었다. 육촌 동생이 그날 술을 먹었고 이야기를 많이 했다. 우리 모두 놀랬다.

 

교통방송에서 고속도로가 밀린다길래 연휴 마지막날 밤 10시에 우리는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이것저것 바리바리 실어 주셨다. 내 부모님은 저런 걸 자식들 차에 실어보내기 위해 며칠 전부터 바빴을 것이다. 쌀을 도정하는 데 하루, 시내 기름집에 가서 기름 짜는데 하루, 새로 기른 알타리무를 다듬어 총각김치를 담는데 한 나절이런저런 것들을 하나씩 모으면서 부모님도 기뻤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떠나기 전에 얼른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내 어머니가 이야기를 한 게 아니라 내 아버지가 나를 불러서 살짝 이야기를 하신다. 보통 딸들이 엄마한테 듣는 이런 걸 나는 모두 아버지에게 들어왔다. 첫 생리를 예감할 때도 그랬다. 나는 그래서 여자보다 남자와 속 이야기를 하는 게 편안하고 익숙하다. 아이 관련된 것은 뜨거운 감자거나 화약고다. 그것이 결혼했니 안했니 다음에 등장하는 무거운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닥치지 않은 것은 더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3번 국도는 한적해서 좋았다. 근데 이천 즈음에서 술 취해서 무단횡단하는 이가 있었다. 어둠 속에서 잘 피했지만 초행길에 야간운전을 하면서 사람을 칠까봐 기절할 뻔한 그는 벌렁거리는 가슴이 안 가라앉는지 내가 고속버스 승객처럼 내처 자버린다고 짜증을 버럭 냈다. 급정거 바람에 깨어난 나는 삐져있던 참이다. 낯선 길을 밤에 운전하려면 네비 말을 잘 들어야 하는데 자꾸 말을 시킨다고 어디 IC 즈음에서 그가 빽 소리를 지르길래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나한테 소리를 지를 수 있냐모드가 되었다. 입을 다무는 찰라 머리만 대면 자는 나는 잠들어버렸었다. 10시는 올빼미형인 그에게는 최고로 활동적인 시간이고 새벽형 인간에다 차만 타면 멀미를 하는 나에게는 최적의 취침숙면 시간이다. 도착해서도 나는 뚱했다. 말없이 짐을 올려놓고 나는 금방 잠들어버렸다. 그는 늦게까지 잠을 자지 못했다. 얼핏 들으니 중간 중간 수건을 말아 쥐고 모기를 잡는 것 같았다.

 

 

 

전화기 너머의 친구는 아기의 기저귀를 갈고 먹을걸 줘가며 1시간 30분 동안 계속 되었다. 이 수다는 소방용이며 명절 후유증의 해독제다. 그 사이에 그가 일어나 나왔다. 피곤이 좀 가신 것 같다. 내 나와바리로 복귀한 나도 다시 생글거린다. 소파에 누워 핸드폰으로 무한도전을 보는 그에게 배를 깍아다 먹이고, 송편과 증편을 데워서 꿀을 뿌려다 주고, 머루포도를 씻어다 준다.

 

 

첫 명절은 무난히 지나갔다. 터미널로 일부러 나가서 고속버스 타고 가는 것보다 옆에서 운전하는 이가 도어 투 도어로 데려다 주니 편했다. 선물을 그가 다 택배로 사 놓으니 좋았다. 시댁에서 하는 일이나 관계도 나는 편안했다. 단지 결혼을 안했다는 이유로 세금 잘 내고, 나름대로 보통사람으로 살고 있는데도 집안 근심거리의 핵인듯 취급당하던 시선이 거두어지니 속 편했다. 한편 그는 친가와 처가 모두를 배려하느라 좀 무리를 했다. 야근하고 퇴근해서 장보고 전 부치고 장거리 운전하고, 선물 준비하고 그리고 고모와 큰아버지 댁에 첫 명절이라고 일부러 인사를 가주었다. 고단했을 것 같다. 그에게 잔소리는 좀 들었는데 세상에는 공짜가 없으니 차비 냈다고 친다.  그만큼 수고하고 그 만큼도 안 하길 바라면 내가 나쁘다. 생각해보니 두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전체 가족에게 첫 명절이었다모두가 영향을 받고 모두의 적응이 시작되었다.

 

혼인은 출산과 죽음처럼 가족의 그물망을 새로 꾸리는 사건이다. 각자는 이런 변화에 어떤 각본을 참조하며 행동을 선택할까? 시어머니와 친정 아버지와 친정 어머니, 남편과 아내, 며느리와 올케와 시동생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건 뭘까? 타고난 기질과 원형, 가족과 문화적 전통, 그가 속한 사회의 선택, 살아온 경험 여러 가지가 있을 거다. 나의 관심은 신화에 있다. 일상과 마찬가지로 명절을 깊이 들여다 보면 거기 신화가 있을 거라며 보물 찾기를 하는 시선은 재미나다. 뭐 보이는 건 없다. 지나고 나면 휘발되어 버릴 며칠을 기록해둠도 의미있을 거다.    

 

 

엄마의 살림살이나 어머님의 내정에 나는 간섭하지 않으려고 한다. 마음 속에서는 이런 저런 의견이 있고, 맏딸 오지랖에 교사의 직업병 말로 가르치는 습관이 있는 나로서는 그걸 입 밖으로 내지 않기가 어렵다. 아니 원래 말이 없는 편이니 말 않기는 쉽다. 속이 시끄럽다. 그러니 생각에 재갈을 물린다. 그 분들의 왕국은 그 분들 나름대로 통치할 권한이 있다. 나는 내 공동체를 아름다운 가정으로 가꾸는 데만 에너지를 투여하는 게 좋겠다. 내가 다른 문화권이나 행성을 여행하는 중이라고, 저 이들은 그 곳의 원주민이라고 생각하려 한다. 같이 살면 나의 생존을 위해 부닥쳐야겠지만 하루 이틀 남의 살림살이에 섞여 머물다 가는 거니, 아프리카 오지를 탐험하는 세계여행자 한비야씨가 원주민이 환영의 의미로 건넨 갓 딴 소의 목피 한 사발을 일단 받아마시면서 그이들의 환영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그 속으로 스미듯이 나는 엄마의 풍습을, 어머님의 질서를 들이키리라. 명절 일꺼리는 무보수 자원봉사도 하는데 뭐 어떠랴 싶다. 핵심은 나의 일상 속에서 나답게 살고 있는지, 그리고 나의 짝궁과 평소에 사이가 좋은 지 같다. 그러면 동심원의 휠씬 바깥에 있는 그 외의 일에 대해서는 관용을 가지기가 쉬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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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15 00:30:07 *.229.239.39

꿈 이야기가 여기 실렸네.

글쎄, 신혼 첫날도 아니고, 시댁 에서 보내는 첫날에 이런 꿈이 무엇을 의미 할지....

아무튼 좋은 꿈이려니하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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