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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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비실비실 시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우리는 종종 생각합니다. 나는 언제 꽃을 피울 수 있을까? 아니 내 삶에 도대체 꽃이 피기는 할까? 나 역시 그렇게 답답해하고 때로 초조하고 심하면 절망감까지 들었던 날이 있습니다. 마흔을 앞둔 나이가 되자 그 위기감은 더욱 커졌습니다. 주말마다 등산을 시작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아, 모든 생명에게 꽃이 있구나. 아 그 꽃들은 모두 저만의 때를 기다렸다가 거침없이 피어나는구나. 아 꽃의 색도 모양도 빛깔도 향기도 제 각각으로 피는구나.
나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내게도 그런 꽃이 필 날 있으리라는. 세상이 끝없이 꽃 중에는 장미가 가장 눈부신 꽃이니 너도 그 꽃을 피워야 한다고 세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가장 눈부신 오월에 꽃을 피워야 하는 것이라는 통념도 교묘한 세뇌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여러 겹을 겹쳐 탐스럽고 진한 빛깔로 피어나야 아름다운 꽃이라는 기준이 내 삶을 시들게 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장미가 온실이나 정원 울타리 근처에서 피어날 때 미나리는 하수구에서 제 꽃 피는 것이고, 사쿠라가 도로변을 점령하고 화들짝 피어나서 쓸 데 없이 벌보다 더 많은 인간을 불러 모을 때, 요즘처럼 서릿발 내리기 시작할 즈음 피어나는 꽃, 산국도 있고 배초향도 있고 가막사린지 뭔지 하는 꽃도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모든 꽃들은 저마다의 빛깔 저마다의 시간, 저마다의 겨냥 속에서 피어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꽃은 그렇게 피어난다는 진리보다 더 깊이 있는 진실 하나도 깨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열매에 관한 것입니다. 각자 제 꼴로 꽃 피워내는 그 눈물겨운 과정은 모두 열매, 씨앗을 품고 익혀내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나무의 진짜 꿈은 꽃이 아니라 열매요 그 속에 간직하는 씨앗이라는 사실! 내가 키워내는 씨앗이 새로운 땅을 만나 그곳의 주인으로 살아가게 하고 싶다는 것, 그것이 모든 생명들의 본능적 지향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시작해야 하는 지점이 있으니, 그것이 참으로 중요한 지점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처음은 바로 눈(bud)을 품고 키워내야 한다. 즉 피울 꽃을 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른 봄날 정원 한 켠에서 확 피어나는 목련도 바로 이미 지난 여름날에 미리 만들어 품어두고 겨울의 추위를 건너야 한다는 점 말입니다. 눈을 품지 않는 자, 열매는 고사하고 꽃조차 피울 수 없는 자라는 사실 말입니다.
나는 또한 이 모든 것보다 더 귀하고 더 포괄적인 진실이 하나 더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나무와 풀과 생명들이 매 순간순간에 온 힘을 모아 살아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땅을 뚫고 싹을 틔워 올리는 순간에도, 잎눈을 틔우고 가지와 잎을 키워내는 순간에도, 드디어 첫 꽃을 피우고 비바람과 그늘과 뜻하지 않은 벌레들을 만나는 순간에도, 열매를 맺고 그것이 폭우와 폭풍을 만나는 순간에도 모두는 오직 온 힘을 그 순간순간에 모으며 살고 있다는 점 말입니다.
오두막 뒤 풀로 가득한 나의 밭에는 지금 지난 겨울 영하 28도의 추위를 견뎌내고 살아남은 5년생 감나무 한 그루가 딱 하나의 감을 달아두고 있습니다. 지난 해에도 그랬듯 나는 저 감을 따지 않을 작정입니다. 그의 위대함을 기리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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