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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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길가는 대로 떠난 여행은 완벽했다. 인생도 그러하련만 지레 겁을 내는구나.
<구본형 칼럼> ‘유끼 수료증 (2011.03.02.) ’ 중에서
토요일 오후 가벼운 드라이브 정도 하면 좋겠다는 느낌으로 집을 나섰다. 답답하니 일단 나가자 했던 거다. 휴대폰에 지갑만 달랑 들고 나왔으니 시내 공원정도 다녀왔으면 딱 좋았는지도 모른다. 어디 갈까? 장난기 어린 대답들이 이어졌다. 청평? 대성리? 춘천? 에이 걍 양양 갈까? 양양은 너무 멀지 않아? 그렇다고 절대로 못 갈 거리도 아니잖아. 가고 싶으면 가는 거지. 그래봤자 대한민국 안인데. 건 그렇네.
몇 마디 주고 받는 동안 네 식구의 간이 동시에 부어올랐던 모양이다. 아냐. 양양말고 춘천 어때? 저번에 청평사 가는 길에 넘 자주 쉬는 바람에 결국 절에는 못 올라갔잖아. 춘천은 그리 멀지도 않으니까 후따닥 달려가서 청평사 찍고 돌아오자. 좋아. 난 닭갈비가 넘넘 맛있어. 나는 올챙이가 진짜 귀여워. 이로써 만장일치. 춘천행이 결정됐다.
다람쥐 때문, 아니 덕분이었을 거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져 틈만 나면 계곡으로 뛰어드는 애들 말릴 일도 없었는데 어찌 청평사에서 내려오는 산길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아직 닭갈비도 못 먹었는데. 그 순간 넷의 눈이 딱 맞았다. 자.고.가.자! 화장품도 없는데, 여벌옷도 없는데, 스마트폰 배터리도 다 떨어졌는데, 잘 데가 있을까? 걸리는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결정은 이미 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뭘 어쩌면 좋지? 모험을 선동하던 아이들이 잠든 차 안에 흐르는 묘한 침묵을 깬 것은 남편이었다. ‘아직도 춘천 사시나 몰라’ 그렇게 한참 안부인사가 오가고 시작된 현지인 버전의 춘천 가이드. 전화 한통에 순식간에 어색하던 춘천이 한결 친근하게 다가왔다. 물론 스마트폰 검색으로 더 풍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3G망이 그 순간 우리가 느낀 안도감까지 전송해줄 수 있었을까?
춘천역 앞 수모텔은 분명 가족여행객을 위해 최적화된 숙박지는 아니었다. 그래도 아이들 불편하다며 일부러 더 큰 방을 찾아 내 주시는 주인아주머니가 계신 곳이었다. 닭갈비에 소주 한잔이 빠질 수 없다는 그의 주장에 콜택시를 불러 타고 찾아간 명동. 서울 명동에 있는 건 다 있는 그 거리에서 마스크 팩을 사고 스킨로션 셈플도 하나 얻었다. 여기에 닭갈비로 꽉찬 배를 적당히 꺼트려주었던 공지천 밤 산책까지. 입었던 팬티를 다시 입고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찝찝함 정도는 가뿐히 상쇄하고도 남을 멋진 오늘이구나!
이튿 날, 은아기사식당과 함께 시작된 낯선 도시의 아침. 속옷 바람으로 충분히 뒹굴거리다 먹는 밥은 그야말로 꿀맛. 마스카라 짙게 바르신 서빙이사님께 애들 데리고 갈 만한 데를 물었다. 밤새 충분히 충전된 스마트폰이 있었지만 왠지 기계보다는 사람에게 길을 묻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음식을 테이블에 놓을 때만해도 심상치 않게 쎄 보이시던 아주머님은 우리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자상한 답변을 주셨다. 애니메이션 박물관과 휴양림.
의암호변의 넓은 대지에 자리 잡은 애니메이션 박물관, 워낙에 만화광인 애들이 좋아한 것은 물론. 애니메이션이 ‘영혼 또는 생명’을 의미하는 라틴어 아니마(anima)에서 유래되었으며 영혼이 없는 것을 움직이게 하여 생명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는 뜻이라는 문구를 발견한 순간. 아~ 하고 나도 모르게 터져나온 탄성. 역시 그런 거였어. 영혼이 살아있지 않으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잖아. 그러니 내가 지금 여기에 머무는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였어. 그래. 그랬던 거야. 아이들을 쫒아다니는 짬짬이 첫 코스에서 발견한 문구를 음미하며 자꾸만 휘청거리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으니 그 곳은 내게도 더없이 고마운 쉼터가 되어 준 셈이다.
벌써 1시.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나있는 걸 발견한 부부는 순간 망설였다. 지금쯤은 돌아가줘야 하는 거 아냐?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어른들의 사정. 아이들, 특히 훈이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자연놀이를 좋아하는 아이가 ‘휴양림’을 잊을 리가 없다. 숲 냄새만 맡고 돌아가는 한이 있어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훈이가 기억하고 있다면 ‘약속’은 지켜져야 하는 것이니까.
결론적으로 그 약속은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했다. 가을색을 품은 사마귀와 메뚜기에 흥분한 훈이, 오빠와 함께 다람쥐를 따라다니며 까르르르 웃음을 참지 못하던 영이, 아무도 없는 한적한 숲에서 웃통을 벗어 제끼고 삼림욕을 제대로 즐긴 아빠, 바지와 신발에 붙은 숲의 흔적이 ‘도깨비풀’이라는 걸 알려주시고 함께 아이들 다리에서 도깨비를 털어주시던 친절한 숲지기 아저씨에게 감동한 엄마까지.
간만에 새벽에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았다. 세탁기에 담겨있는 훈이의 도복과 영이의 어린이집 이불이 떠올라 잠결에 벌떡 일어나 빨래 널던 여운에 깊이 잠들지 못한 덕분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이루마의 골든 콜렉션과 함께 익숙한 사람들과 낯선 사람들이 만들어 준 1박2일을 정리하다 보니 문득 드는 생각. 나 참 잘 살고 있구나. 이리 살 수 있으면 되었지 여기서 무엇을 더 욕심내는 거니?
수시로 벌어지는 사소한 다툼들, 봄에 입을 때보다 조금 더 끼는 듯한 청바지가 주는 압박감. 일탈의 뒷감당이 고스란히 내게로 돌아오는 억울함. 등등 마음날씨를 흐리는 이런저런 순간들이 양념처럼 끼어들어 있었으니 결코 ‘완벽’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여행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는 또 다음 여행을 떠나게 되리라는 것을. 함께 하는 즐거움이 불편함을 훨씬 넘어선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므로. 그 불편함마저도 우리를 특별한 서로로 만들어주는 사랑의 묘약으로 쓸 수 있음을 눈치채게 되었으므로. 그렇게 서로에게 깊어지는 만큼 세상과도 깊어질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으므로...
과거에 나는 얼마나 완벽한 훌륭함인가에 관심이 있었다. 흠 없이 아름다운 사람을 동경했다. 이제는 훌륭함 속에 존재하는 불완전한 것들의 고통을 보게 되었다. 불완전하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스스로 ‘어제보다 아름다운 나’를 만들어 갈 수 있는 변화의 동력이었다. 겨우 인생의 맛을 알기 시작한 것이다. 270
<사람에게서 구하라> 중에서
어제보다 아름다운 오늘을 살고픈 엄마들의 마음공부방
<아이를 기다리는 시간( http://cafe.naver.com/momtim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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