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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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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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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28일 10시 25분 등록

"다시 건강해지면 제일 하고 싶은 일이 뭐야?" 며칠 전, 췌장암 4기 진단을 받은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암 제거 수술을 하루 앞둔 날이었죠. 시월의 하늘은 푸르고 높았습니다. 우리는 아산병원 서관 4층 야외 휴게소를 산책하다가 잠시 벤치에 앉았습니다. 점심을 먹은 탓인지, 따사로운 햇살 탓인지, 비현실적인 기분이었네요. 꿈결 속을 거니는 듯한 몽롱함.

 

여행! 친구에게 질문을 던지고 난 후, 머릿속에 떠오른 답변이었습니다. 아름다운 곳으로 편안한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 뭐 이런 답변 말이죠. 뜻밖의 질문에 친구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잠시 후 녀석의 입술에서 튀어나온 답변은 제 예상과는 다르더군요. "일하고 싶어. 열심히 일을 해서 내가 얼마나 능력 있는 사람인지 보여주고 싶어."

 

친구는 의류 사업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수완이 있었던지 사업 결과가 좋았죠. 그러다가 새로운 분야의 사업에 손을 대어 3년을 노력했지만 그리 성공적이지는 못했습니다. 손실을 감수하고 가게를 접은 녀석은 자신의 본업이라 할 의류 사업에 돌아갔습니다. 아웃도어 의류 매장을 개업하기 직전에 췌장암 진단을 받고 말았네요.

 

일하고 싶어! 가슴을 치는 대답이었습니다. 난치병을 이겨내어 주길 속으로 응원하는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더군요. ‘난치병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만은 아닐 거야.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는 기쁨이 깃들기 마련이니까. 하루 예닐곱 시간 이상 동안 할 수 있는 것이 일 말고 또 있을까. 애인과의 잠자리도 그렇게는 못 하지.’

 

괴테의 단편 정직한 법관에는 아리따운 부인을 홀로 남겨 두고 일하러 떠나는 사내가 등장합니다. 아내의 신뢰와 사랑을 듬뿍 받는 그였지만, 일을 하고 싶어서 멀리 떠나려 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당신 곁에서 누린 행복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소. 그리고 마음속에서 자꾸만 왜 빈둥거리고 있느냐는 질책의 소리만 들리지 않는다면, 그 행복을 더 순수하게 느낄 수 있을 거요. 오랫동안 해 오던 일을 다시 해 보고 싶은 생각이 꿈틀거리고, 나의 오랜 습관이 다시 날 끌어당기고 있소. 제발, 내가 다시 알렉산드리아를 볼 수 있게 해 줘요.“

 

사람은 사랑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사내는 일이 주는 기쁨을 맛보았음을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친구에게 던진 물음을 상상해 보니, 저 역시 똑같이 대답할 것 같네요. 일이 오직 기쁨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일에는 고됨이 깃들기도 하니까요. 일의 양면성을 두고 파울로 코엘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은 축복일세. 일을 통해 우리의 행동을 돌아볼 수 있다면 말일세. 하지만 일에만 매달려 삶의 의미를 도외시한다면, 일은 저주야.” - 흐르는 강물처럼

 

"일하는 것 말고는 없어?" 친구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대답이 술술 이어지네요.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5년쯤 지나면 나도 완전히 나을 테고 그러면 정은이도 함께 나들이를 즐길 나이가 될 테고." 녀석은 한 살배기 둘째 딸과의 미래를 꿈꾸었습니다. 친구에서 아버지로 돌아간 그 순간 녀석의 모습에 저는 왠지 모를 경건한 기분을 느꼈네요.

 

일하고 싶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 평범한 이 대답에 가슴이 울었습니다. 평범한 일상 속에 행복이 깃들어 있음을 새삼 느끼는 한편으론, 우리가 평범한 일이라 부르는 것들이 실상은 실현하기 어려운 이상적인 목록임을 깨닫습니다. "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어." 이리 말하면서 늘어놓는 평범함의 기준들, 이를테면 작은 집 한 채 사고, 좋아하는 일을 하며,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일은 간단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죠.

 

어릴 적에 평범한 삶이라 여겼던 모습을 실현하려면, 얼마간의 행운과 축복이 깃들고 현명한 노력도 기울여야 함을 살면서 점점 더 깨닫습니다. 세상엔 아픈 사람이 수두룩하고, 자기가 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도 많잖아요. 여기 제 곁의 친구만 봐도 그렇습니다. 자신이 개업한 매장을 보지도 못한 채 난치병을 얻고 말았으니까요.

 

얼른 회복해서 매장에서 만나자, 짜식아. 일하는 모습 보고 싶다.”

이 말을 전했는지, 가슴 속으로 삼켰는지, 벌써 가물가물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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