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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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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5일 11시 53분 등록

나는 여행하며 가는 곳마다 엽서를 여러 장 삽니다. 엽서에는 그 지역의 유적지와 유물 그리고 자연풍광에 관한 사진이나 그림이 프린트되어 있습니다. 엽서를 사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엽서를 보며 여행에서의 체험을 되새길 수 있습니다. 가령 체코 프라하에 있는 카를교의 풍경을 담은 엽서를 보면 아내와 함께 카를교에서 바라본 뭉게구름과 그 구름을 가르며 날아가는 새가 떠오르고,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구입한 램브란트의 자화상 엽서를 보면 그 그림과 나눈 강렬한 교감이 다시금 생생해 집니다.

 

두 번째 이유는, 최근에 즐기게 된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얼마 전부터 일주일에 두세 장씩 손글씨로 엽서를 씁니다. 아내에게 쓸 때도 있고, 단군의 후예 참가자 또는 인문학 아카데미 수강생과 강사에게 쓸 때도 있습니다. 마음에 누군가가 떠오르면 엽서 꾸러미에서 그이가 좋아할 만한 엽서를 고릅니다. 대충 고르지 않고 그 사람이 엽서라는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듯 고릅니다. 그리고 좋아하는 만년필에 잉크를 채우며 어떤 이야기를 쓸지 생각합니다. 길게 쓰지는 않습니다. 짧으면 네댓 줄, 길어도 열 줄을 넘지 않습니다. 워낙 악필이고 작은 글씨로 단정하게 쓰지 못하는 탓입니다. 보통 엽서 크기라면 열 줄 이내로 쓰는 게 보기 좋기도 합니다.

 

분량은 적지만 쏟는 시간은 적지 않습니다. 중언부언하지 않고 간결하게 쓰되, 전하고 싶은 마음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성스럽게 씁니다. 보통은 엽서와 함께 책 한 권을 준비합니다. 책을 고르는 과정도 엽서 고를 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엽서를 쓰고 책을 고르는 시간이 참 좋습니다.

 

안대회 선생이 쓴 <선비답게 산다는 것>을 읽으며 내가 쓰는 엽서가 옛사람들이 썼던 ‘척독(尺牘)’임을 알았습니다. 편지(便紙)는 ‘안부나 소식 등을 상대에게 적어 보내는 글’인데, 편지는 분량을 기준으로 ‘서간’과 ‘척독’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합니다. 서간(書簡)은 전하고 싶은 내용을 자세하게 적는 것이고, 척독(尺牘)은 간결하게 적어 보내는 편지입니다. 안대회 선생은 말합니다.

 

“서간은 사실을 상세히 알리거나 상대를 설득할 목적으로 쓴 장황한 편지인 반면, 척독은 보낸 이의 심경과 감정의 토로를 특징으로 한다. 그런 형식상의 이유로 높은 예술성과 품격을 지녀 긴 여운을 느끼게 하는 척독이 적지 않다.”

 

<선비답게 산다는 것>에 나오는 척독 한토막을 소개하겠습니다. 조선 후기의 인물로 시(詩) · 서(書) · 화(畵)에 모두 능했던 조희룡(趙熙龍)이 지인에게 보낸 척독의 일부입니다.

 

“편지가 마침 도착하여 뜯어보고 한바탕 웃었습니다. 마음속에 그리던 사람이 이렇게 이르렀으니 무엇으로 보답할까요? 창 모서리에 뜬 봄별을 오이처럼 따다가 답장 편지 속에 넣어 바로 보내고 싶습니다. (...)

 

객지의 제 형편은 달리 말씀 드릴 게 없군요. 쓸데없이 크기만 한 칠척(七尺) 몸뚱어리가 달팽이 껍질 같은 초가집 안에 웅크린 채 처박혀 있어 침침한 벽 기우뚱한 기둥이 제가 기지개를 펴면 삐걱삐걱 금새 무너질 것 같다는 점만 말씀드리지요.”

 

‘창 모서리에 뜬 봄별을 오이처럼 따다가 답장 편지 속에 넣어 바로 보내고 싶다’는 문장에 눈이 머뭅니다. 얼마나 그립고, 편지가 반가웠는지 확 와 닿습니다. 어떤 사이인지 모르지만 이 한 구절로 향기 나는 관계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편지는 조희룡이 환갑이 넘은 나이에 임자도(荏子島)에서 유배 생활할 때 쓴 것입니다. 모함 받아 잘못도 없이 간 억울한 유배였습니다. 힘들고 울분이 가득 할만도 한데 그의 편지에는 그런 기색이 없습니다. 오히려 여유와 약간의 장난기마저 보입니다. 그는 절해고도(絶海孤島) 유배지에서 익숙한 일상과의 단절을 즐기며 많은 그림과 글을 남겼다고 합니다. 친구들과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그 모두가 ‘척독’, 즉 짧은 편지였다고 합니다. 위에 소개한 편지도 그런 척독 가운데 하나입니다.

 

내가 쓰는 엽서는 그에 비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척독의 의미를 알게 되어서 기쁩니다. 훌륭한 인물의 척독을 맛볼 수 있어 좋습니다. 척독이라는 단어도 좋지만 엽서라는 표현이 나는 더 마음에 듭니다. ‘척독(尺牘)’의 한자어를 풀면 ‘길이가 한 자 가량 되는 글’이고, ‘엽서(葉書)’는 ‘잎사귀에 쓴 글’입니다. 내가 쓰는 ‘척독’에 푸른 향이 나면 좋겠습니다. 푸른 마음을 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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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대회, 선비답게 산다는 것, 푸른역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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