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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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 1.
엘리자베스 1세 (1533~1603)의 <황금의 연설>
재위 (1558∼1603) -25세에 여왕으로 등극
16세기 말, 신교도와 구교도의 대립으로 광풍이 몰아치고, 넓은 바다 곳곳이 전쟁의 폭풍우로 휩싸여 있던 유럽, 그 중심에 한 여인이 있었다. 혼돈의 세기에 여성의 몸으로 영국의 황금시대를 이끌어 낸 엘리자베스 1세는 진정한 여자였고 용감한 전사였으며 훌륭한 통치자였다.
그녀가 치세하던 시기의 영국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거대한 물줄기 외에도 계몽주의라는 새로운 흐름이 가미되던 시기였다. 그녀의 빛나는 통치와 함께 세익스피어와 프란시스 베이컨 같은 걸출한 역사의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세 살 때 어머니를 교수대의 이슬로 보내야 하는 등 불운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1558년 25세의 나이로 여왕의 자리에 올랐다. 초반의 우려와는 달리 그녀는 특유의 카리스마, 정치적인 수완, 냉철한 분별력을 바탕으로 왕으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웃 국가들과의 쉼 없는 전쟁과 끊이지 않는 내란 속에서도 그녀는 160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현명함과 평정심을 잃지 않고 영국의 번영과 평화를 위해 헌신했다. 엘리자베스는 치세 기간 내내 의회의 끊임없는 결혼 강요와 최소한 왕위계승자라도 지목하라는 요구에 시달렸으나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다. 때문에 ‘버진 퀸’이라 불린 그녀는 “짐은 영국과 결혼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러나 여왕의 말년은 이제 그녀의 통치가 막을 내려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분위기였다. (듀런트의 표현대로라면) 영국은 그녀를 사랑하는 일을 중단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전보다 그녀가 의회의 자유를 침해하고, 청교도를 박해하며, 권력을 남용한다며 격렬하게 반발하였다. 놀랍게도 여왕은 마지막 순간에 모든 것을 양보하고 권력의 남용을 중지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찾아온 하원의원 무리들 앞에서 진심을 담은 <황금의 연설>을 하기에 이르른다. 연설을 하는 동안 그들은 모두 무릎을 꿇었다. 그것은 죽음을 앞둔 여왕이 사랑하는 조국 영국을 향해 보내는 마지막 사랑의 편지이기도 하였다.
________
(참고: 영화 <골든 에이지>는 1998년 작 <엘리자베스>의 속편이다. 전작에서 엘리자베스 1세 역을 맡았던 ‘케이트 블랑쉐’가 <골든 에이지>에서도 역시 엘리자베스 1세를 연기한다. <골든 에이지>는 고독하면서도 강건하려 노력해던 엘리자베스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조명한다. 누구보다 영국을 사랑했던 엘리자베스 1세의 삶은 긴 터널을 걷는 것처럼 어둡고 외로웠지만 굳건한 지혜와 희생으로 훗날 오래도록 사랑받는 진정한 여왕으로 남았다.)
엘리자베스 1세 '황금의 연설'(1601년 11월 30일) 에서
“값이 비싼 것은 아닐지라도 어떤 보석도...여러분의 사랑보다 내가 더 좋아한 것은 없습니다. 나는 그것을 어떤 재물보다 귀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를 높이 들어 올리셨지만 그래도 나는 여러분의 사랑과 더불어 통치했다는 것을 내 왕관의 영광으로 여깁니다...”
이 지점에서 여왕은 모두에게 일어나라고 명령하고 연설을 이어갔다.
“왕이 되어 왕관을 쓴다는 것은 그것을 쓴 사람 보다는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더 영광스러운 일입니다...나 자신에 대해 말하자면 양심에 거리낌이 없도록 하느님께서 내게 부여하신 의무를 이행하고 그분의 영광을 지속하고 여러분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이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노동으로 이루어진 영광에서 해방된 기쁨을 누리고 싶습니다. 나의 삶과 통치가 여러분에게 좋은 것보다 더 오래 살거나 다스리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옥좌에 나보다 더 강력하고 더 지혜로운 왕들이 과거에도 많았고 앞으로도 많이 있겠지만 그러나 여러분을 더 사랑한 왕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숙제 2.
울타리가 없는 하루
새벽 5시 30분, 자명종이 요란하게 울린다. 잠을 제대로 못잔 나는 침침한 눈으로 일어나 침대 가장자리에 앉는다. 아직 몽롱한 내 앞에 정신 없는 하루가 다시 시작되고 있다. 어젯밤 내내 학교에 가기 싫다고 울던 둘째가 생각나 그애 방으로 건너가 본다. 그애의 잠든 얼굴을 한 번 내려다보고, 기지개를 펴며 주방으로 들어간다. ‘가만있자, 아침밥을 짓고, 네 놈의 간식과 점심을 합해 8개의 도시락을 싸고, 막내가 유아원 졸업 연극에 입을 의상도 마저 바느질을 해야 하고..아침부터 할 일이 쌓였다. 묘기를 부려도 모자를 시간, 최대한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머리를 굴린다. 아이의 의상을 미리 준비해 두었어야 하는건데.. 어젯밤은 예상치 못한 방문을 받았다. 남편과 친하게 지내는 김집사네 부부는 골치 아픈 문제로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남편은 나의 사정을 물어보지도 않고 그들을 초대했다. 이야기를 오래 나누고 그들은 밤 늦게 돌아갔다. 적절한 핑계를 대서라도 그들의 방문을 지혜롭게 거절했더라면 오늘 아침 바느질로 이렇게 조바심을 내지 않아도 되는건데.. 그렇지만 스스로 합리화를 해본다. ‘그래도 따뜻한 고국의 요리를 대접하고, 귀를 기울여 이야기를 들어주고, 최소한 그들이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돌아갔으니 잘 한거야.’
그로부터 아이들 등교와 남편의 출근을 돕는 아침의 한 시간은 그야말로 지옥이다. 침대에서 나오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거듭 깨워야 하고, ‘당신은 애들도 제 시간에 식탁에 딱딱 못 앉히고 도대체 뭐하는 거야?’ 하는 남편의 불평도 참아내야 하고, 또 나의 등교도 챙겨야 하는 아침인 것이다. 스쿨버스를 타고 아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집을 대충 치우고 나 역시 학교 갈 준비를 한다.
필리핀 국립대학교에서 영어 연수를 마친 후, 크게 맘 먹고 <상담학> 대학원 과정에 등록한 지 두 학기째. 2년 이상 현지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난 후, 하고 싶었던 공부를 다시 시작할 엄두를 어렵게 낸 것이다. 수업 시간에 집중해서 들어도 영어로 하는 강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 못해 고전하는 시간들, 거기에 매주 해내야 하는 숙제까지 만만치가 않다. 내게 유일한 숨통은 학교 도서관에 앉아서 내 공부를 하는 시간 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시간적인 압박에 시달릴 때마다 위압적으로 다가온다. 이미 네 아이의 엄마로, 한 남자의 아내로 해야할 일이 많으니 원 없이 공부에만 투자할 형편은 못된다. 그래서 최소한의 학점인 9학점만 듣고 있다. 그것도 따라가는 것이 쉽지는 않다. 오늘 아침 수업은 3시간짜리 가족 상담학이다. 버지니아 새타이어의 가족 상담의 실제에 대한 비디오 클립을 보고 그룹별로 토론하고 발표하는 시간이다. 영어로 내 의견을, 그것도 한 번도 써먹어보지 못한 전문용어를 섞어가며 말해야 하는 수업은 오늘도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내 미숙한 영어를 참아주고, 오히려 격려하고 도와주는 착한 그룹원들이 고마울 뿐이다.
잠시 점심을 먹고 다시 도서관으로 향한다. 책 냄새와 땀 냄새가 적절히 섞인 열대 나라의 도서관은 그 자체로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영어로 읽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으니 책을 읽을 때는 거의 흥분에 가까운 스릴을 느낀다. 영어로는 어떻게 표현할까 궁금하던 문장들이 너무도 쉬운 단어들에 얹혀 표현되고 있는 것을 보면 나는 거의 치사상태에 이른다.
그 때 유집사가 급히 학교로 나를 찾으러 왔다. 그녀는 한국에서 나름대로 한 사업하다 부도 내고 이곳에 와서 1년 고생 끝에 얼마 전에 분식집을 냈다. 음식 솜씨가 좋고, 인심이 후해 이미 장사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그런데 오늘 무척 중요한 상담이 현지인 사업가와 있는데 통역을 해주기로 한 조카가 급한 사정이 생겨서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정은 딱하지만 나도 시험을 앞두고 있고, 급한 숙제가 한 둘이 아니다. 유집사는 ‘못한다’고 말하면 금방이라도 울상이 될 것 같은 표정이다. 실로 난감한 순간이다. 결국 책을 주섬주섬 챙겨 그녀를 따라 나선다. 나는 어느새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에 통역해주는 사람으로 알려졌다. 새로 마닐라에 정착하는 집사님들이 집을 구하거나 아이들 학교 문제로 어려움을 겪을 때 형편이 되는 한 자원봉사를 자청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통역을 하러 갔다가 그곳에 밥 먹으러 온 또 다른 친구를 만난다. 나를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반가워서 자리를 뜨지 않는다. 내가 건네는 질문들에 기뻐하며 그녀는 끝도 없이 자기 이야기를 쏟아놓는다. ‘바빠서 일어나야 하는 내가 왜 이러고 앉아있지?’ 하면서도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끊고 일어나지 못한다.
그날 일로 한 나절 이상을 뭉떵 잃어버린 나는 한 과목 숙제를 제 때 내지 못해 감점을 받았고, 그런 작은 일들이 쌓여 정작 내 공부는 점점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어렵게 두 학기를 마치며 나는 내 형편이 아직은 공부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몹시 씁쓸해졌다. 어느날 그런 고민을 학교 선배와 나누던 중 나는 내 인생 처음으로 ‘울타리(바운더리)’의 문제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선배와의 상담 아닌 상담을 계기로 지각변동과 같은 엄청난 생각의 전환이 내게 일어났다.
숙제 3
문제 진단: 울타리 올바로 세우기
나는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당시 내가 잘못한 것이라고는 너무 노력했다는 것 밖에는 없다. 그러나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부부생활, 자녀양육, 인간관계, 신앙생활, 모든 걸 잘 꾸려가기 위해 무척 애를 썼지만 무력감과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가끔 삶은 통제 불가능한 맘몬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래 그것이었다. 내 삶에 울타리가 없었던 것이다. 내 땅에 경계 표지판을 세우고, 그 땅의 소유권이 나에게 있음을 주장하지 못한 것이 나의 가장 큰 문제였던 것이다. 경계가 없는 땅이니 사람들은 그 땅을 마치 자기 땅인 냥 함부로 했다. 나는 일이 잘못되면 늘 내가 조금만 더 노력했어도, 조금만 더 부지런을 떨었어도…하는 자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절대 게으르지 않았고, 노력을 적게 한 것도 아니었다. 갈등을 피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일을 떠맡다 보면 어느새 더 많은 일이 내게로 넘어왔다. 울타리의 문제는 다름 아닌 ‘아니오(NO!)를 분명히 말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다. 선의로 생각하고 ‘예스’한 대부분의 일들은 ‘아니오’ 라고 말하지 못해 떠맡게 된 일들이었다. 그 밑에는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두려움이 나로 하여금 남을 기쁘게 하기 위해 병적으로 애쓰게 하고, 사람들의 감정과 상태, 문제에 대해 일일히 신경을 쓰게 했던 것이다. ‘아니오’ 라고 말했을 때 생겨날 불협화음에 대해 준비되지 않았고, 관계에 갈등이 생길까봐 늘 염려가 많았다.
내 삶에 울타리가 결핍되어 있다는 자각이 들었을 때 내가 봉착한 의문들은 이런 것들이었다.
1. 적정한 울타리의 수준은 무엇인가.
2. 울타리를 설정한 이후에도 나는 여전히 사랑스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3. 울타리를 세우면 그것 때문에 힘들거나 상처받는 사람이 생길텐데 어떻게 해야 하나.
4. 울타리를 치려고 할 때 드는 죄책감이나 두려움은 무엇으로 해결하나.
그때부터 울타리에 대해 공부를 시작했다. 울타리가 무엇인지, 울타리는 무엇을 방어해주고, 울타리는 어떻게 발전해가는지, 울타리는 어떻게 사용해야 하고, 어떻게 고칠 수 있는지.. …
분명한 것은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사람에게 울타리를 쳐두지 못하면 그만큼 자신이 남용된다는 것이고, 남용하는 타인에게도 그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직도 ‘노’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그러나 이제는 ‘노’하기 전력 10년이다. 어려운 상황에도 연구원을 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울타리’의 위력 때문이다. 나는 이제 나를 보호하는 법을 배웠고, 이전보다는 쉽게 ‘아니오’ 라고 말할 수 있다.
IP *.127.99.16
엘리자베스 1세 (1533~1603)의 <황금의 연설>
재위 (1558∼1603) -25세에 여왕으로 등극
16세기 말, 신교도와 구교도의 대립으로 광풍이 몰아치고, 넓은 바다 곳곳이 전쟁의 폭풍우로 휩싸여 있던 유럽, 그 중심에 한 여인이 있었다. 혼돈의 세기에 여성의 몸으로 영국의 황금시대를 이끌어 낸 엘리자베스 1세는 진정한 여자였고 용감한 전사였으며 훌륭한 통치자였다.
그녀가 치세하던 시기의 영국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거대한 물줄기 외에도 계몽주의라는 새로운 흐름이 가미되던 시기였다. 그녀의 빛나는 통치와 함께 세익스피어와 프란시스 베이컨 같은 걸출한 역사의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세 살 때 어머니를 교수대의 이슬로 보내야 하는 등 불운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1558년 25세의 나이로 여왕의 자리에 올랐다. 초반의 우려와는 달리 그녀는 특유의 카리스마, 정치적인 수완, 냉철한 분별력을 바탕으로 왕으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웃 국가들과의 쉼 없는 전쟁과 끊이지 않는 내란 속에서도 그녀는 160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현명함과 평정심을 잃지 않고 영국의 번영과 평화를 위해 헌신했다. 엘리자베스는 치세 기간 내내 의회의 끊임없는 결혼 강요와 최소한 왕위계승자라도 지목하라는 요구에 시달렸으나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다. 때문에 ‘버진 퀸’이라 불린 그녀는 “짐은 영국과 결혼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러나 여왕의 말년은 이제 그녀의 통치가 막을 내려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분위기였다. (듀런트의 표현대로라면) 영국은 그녀를 사랑하는 일을 중단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전보다 그녀가 의회의 자유를 침해하고, 청교도를 박해하며, 권력을 남용한다며 격렬하게 반발하였다. 놀랍게도 여왕은 마지막 순간에 모든 것을 양보하고 권력의 남용을 중지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찾아온 하원의원 무리들 앞에서 진심을 담은 <황금의 연설>을 하기에 이르른다. 연설을 하는 동안 그들은 모두 무릎을 꿇었다. 그것은 죽음을 앞둔 여왕이 사랑하는 조국 영국을 향해 보내는 마지막 사랑의 편지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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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영화 <골든 에이지>는 1998년 작 <엘리자베스>의 속편이다. 전작에서 엘리자베스 1세 역을 맡았던 ‘케이트 블랑쉐’가 <골든 에이지>에서도 역시 엘리자베스 1세를 연기한다. <골든 에이지>는 고독하면서도 강건하려 노력해던 엘리자베스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조명한다. 누구보다 영국을 사랑했던 엘리자베스 1세의 삶은 긴 터널을 걷는 것처럼 어둡고 외로웠지만 굳건한 지혜와 희생으로 훗날 오래도록 사랑받는 진정한 여왕으로 남았다.)
엘리자베스 1세 '황금의 연설'(1601년 11월 30일) 에서
“값이 비싼 것은 아닐지라도 어떤 보석도...여러분의 사랑보다 내가 더 좋아한 것은 없습니다. 나는 그것을 어떤 재물보다 귀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를 높이 들어 올리셨지만 그래도 나는 여러분의 사랑과 더불어 통치했다는 것을 내 왕관의 영광으로 여깁니다...”
이 지점에서 여왕은 모두에게 일어나라고 명령하고 연설을 이어갔다.
“왕이 되어 왕관을 쓴다는 것은 그것을 쓴 사람 보다는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더 영광스러운 일입니다...나 자신에 대해 말하자면 양심에 거리낌이 없도록 하느님께서 내게 부여하신 의무를 이행하고 그분의 영광을 지속하고 여러분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이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노동으로 이루어진 영광에서 해방된 기쁨을 누리고 싶습니다. 나의 삶과 통치가 여러분에게 좋은 것보다 더 오래 살거나 다스리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옥좌에 나보다 더 강력하고 더 지혜로운 왕들이 과거에도 많았고 앞으로도 많이 있겠지만 그러나 여러분을 더 사랑한 왕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숙제 2.
울타리가 없는 하루
새벽 5시 30분, 자명종이 요란하게 울린다. 잠을 제대로 못잔 나는 침침한 눈으로 일어나 침대 가장자리에 앉는다. 아직 몽롱한 내 앞에 정신 없는 하루가 다시 시작되고 있다. 어젯밤 내내 학교에 가기 싫다고 울던 둘째가 생각나 그애 방으로 건너가 본다. 그애의 잠든 얼굴을 한 번 내려다보고, 기지개를 펴며 주방으로 들어간다. ‘가만있자, 아침밥을 짓고, 네 놈의 간식과 점심을 합해 8개의 도시락을 싸고, 막내가 유아원 졸업 연극에 입을 의상도 마저 바느질을 해야 하고..아침부터 할 일이 쌓였다. 묘기를 부려도 모자를 시간, 최대한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머리를 굴린다. 아이의 의상을 미리 준비해 두었어야 하는건데.. 어젯밤은 예상치 못한 방문을 받았다. 남편과 친하게 지내는 김집사네 부부는 골치 아픈 문제로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남편은 나의 사정을 물어보지도 않고 그들을 초대했다. 이야기를 오래 나누고 그들은 밤 늦게 돌아갔다. 적절한 핑계를 대서라도 그들의 방문을 지혜롭게 거절했더라면 오늘 아침 바느질로 이렇게 조바심을 내지 않아도 되는건데.. 그렇지만 스스로 합리화를 해본다. ‘그래도 따뜻한 고국의 요리를 대접하고, 귀를 기울여 이야기를 들어주고, 최소한 그들이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돌아갔으니 잘 한거야.’
그로부터 아이들 등교와 남편의 출근을 돕는 아침의 한 시간은 그야말로 지옥이다. 침대에서 나오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거듭 깨워야 하고, ‘당신은 애들도 제 시간에 식탁에 딱딱 못 앉히고 도대체 뭐하는 거야?’ 하는 남편의 불평도 참아내야 하고, 또 나의 등교도 챙겨야 하는 아침인 것이다. 스쿨버스를 타고 아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집을 대충 치우고 나 역시 학교 갈 준비를 한다.
필리핀 국립대학교에서 영어 연수를 마친 후, 크게 맘 먹고 <상담학> 대학원 과정에 등록한 지 두 학기째. 2년 이상 현지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난 후, 하고 싶었던 공부를 다시 시작할 엄두를 어렵게 낸 것이다. 수업 시간에 집중해서 들어도 영어로 하는 강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 못해 고전하는 시간들, 거기에 매주 해내야 하는 숙제까지 만만치가 않다. 내게 유일한 숨통은 학교 도서관에 앉아서 내 공부를 하는 시간 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시간적인 압박에 시달릴 때마다 위압적으로 다가온다. 이미 네 아이의 엄마로, 한 남자의 아내로 해야할 일이 많으니 원 없이 공부에만 투자할 형편은 못된다. 그래서 최소한의 학점인 9학점만 듣고 있다. 그것도 따라가는 것이 쉽지는 않다. 오늘 아침 수업은 3시간짜리 가족 상담학이다. 버지니아 새타이어의 가족 상담의 실제에 대한 비디오 클립을 보고 그룹별로 토론하고 발표하는 시간이다. 영어로 내 의견을, 그것도 한 번도 써먹어보지 못한 전문용어를 섞어가며 말해야 하는 수업은 오늘도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내 미숙한 영어를 참아주고, 오히려 격려하고 도와주는 착한 그룹원들이 고마울 뿐이다.
잠시 점심을 먹고 다시 도서관으로 향한다. 책 냄새와 땀 냄새가 적절히 섞인 열대 나라의 도서관은 그 자체로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영어로 읽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으니 책을 읽을 때는 거의 흥분에 가까운 스릴을 느낀다. 영어로는 어떻게 표현할까 궁금하던 문장들이 너무도 쉬운 단어들에 얹혀 표현되고 있는 것을 보면 나는 거의 치사상태에 이른다.
그 때 유집사가 급히 학교로 나를 찾으러 왔다. 그녀는 한국에서 나름대로 한 사업하다 부도 내고 이곳에 와서 1년 고생 끝에 얼마 전에 분식집을 냈다. 음식 솜씨가 좋고, 인심이 후해 이미 장사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그런데 오늘 무척 중요한 상담이 현지인 사업가와 있는데 통역을 해주기로 한 조카가 급한 사정이 생겨서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정은 딱하지만 나도 시험을 앞두고 있고, 급한 숙제가 한 둘이 아니다. 유집사는 ‘못한다’고 말하면 금방이라도 울상이 될 것 같은 표정이다. 실로 난감한 순간이다. 결국 책을 주섬주섬 챙겨 그녀를 따라 나선다. 나는 어느새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에 통역해주는 사람으로 알려졌다. 새로 마닐라에 정착하는 집사님들이 집을 구하거나 아이들 학교 문제로 어려움을 겪을 때 형편이 되는 한 자원봉사를 자청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통역을 하러 갔다가 그곳에 밥 먹으러 온 또 다른 친구를 만난다. 나를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반가워서 자리를 뜨지 않는다. 내가 건네는 질문들에 기뻐하며 그녀는 끝도 없이 자기 이야기를 쏟아놓는다. ‘바빠서 일어나야 하는 내가 왜 이러고 앉아있지?’ 하면서도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끊고 일어나지 못한다.
그날 일로 한 나절 이상을 뭉떵 잃어버린 나는 한 과목 숙제를 제 때 내지 못해 감점을 받았고, 그런 작은 일들이 쌓여 정작 내 공부는 점점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어렵게 두 학기를 마치며 나는 내 형편이 아직은 공부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몹시 씁쓸해졌다. 어느날 그런 고민을 학교 선배와 나누던 중 나는 내 인생 처음으로 ‘울타리(바운더리)’의 문제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선배와의 상담 아닌 상담을 계기로 지각변동과 같은 엄청난 생각의 전환이 내게 일어났다.
숙제 3
문제 진단: 울타리 올바로 세우기
나는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당시 내가 잘못한 것이라고는 너무 노력했다는 것 밖에는 없다. 그러나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부부생활, 자녀양육, 인간관계, 신앙생활, 모든 걸 잘 꾸려가기 위해 무척 애를 썼지만 무력감과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가끔 삶은 통제 불가능한 맘몬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래 그것이었다. 내 삶에 울타리가 없었던 것이다. 내 땅에 경계 표지판을 세우고, 그 땅의 소유권이 나에게 있음을 주장하지 못한 것이 나의 가장 큰 문제였던 것이다. 경계가 없는 땅이니 사람들은 그 땅을 마치 자기 땅인 냥 함부로 했다. 나는 일이 잘못되면 늘 내가 조금만 더 노력했어도, 조금만 더 부지런을 떨었어도…하는 자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절대 게으르지 않았고, 노력을 적게 한 것도 아니었다. 갈등을 피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일을 떠맡다 보면 어느새 더 많은 일이 내게로 넘어왔다. 울타리의 문제는 다름 아닌 ‘아니오(NO!)를 분명히 말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다. 선의로 생각하고 ‘예스’한 대부분의 일들은 ‘아니오’ 라고 말하지 못해 떠맡게 된 일들이었다. 그 밑에는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두려움이 나로 하여금 남을 기쁘게 하기 위해 병적으로 애쓰게 하고, 사람들의 감정과 상태, 문제에 대해 일일히 신경을 쓰게 했던 것이다. ‘아니오’ 라고 말했을 때 생겨날 불협화음에 대해 준비되지 않았고, 관계에 갈등이 생길까봐 늘 염려가 많았다.
내 삶에 울타리가 결핍되어 있다는 자각이 들었을 때 내가 봉착한 의문들은 이런 것들이었다.
1. 적정한 울타리의 수준은 무엇인가.
2. 울타리를 설정한 이후에도 나는 여전히 사랑스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3. 울타리를 세우면 그것 때문에 힘들거나 상처받는 사람이 생길텐데 어떻게 해야 하나.
4. 울타리를 치려고 할 때 드는 죄책감이나 두려움은 무엇으로 해결하나.
그때부터 울타리에 대해 공부를 시작했다. 울타리가 무엇인지, 울타리는 무엇을 방어해주고, 울타리는 어떻게 발전해가는지, 울타리는 어떻게 사용해야 하고, 어떻게 고칠 수 있는지.. …
분명한 것은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사람에게 울타리를 쳐두지 못하면 그만큼 자신이 남용된다는 것이고, 남용하는 타인에게도 그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직도 ‘노’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그러나 이제는 ‘노’하기 전력 10년이다. 어려운 상황에도 연구원을 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울타리’의 위력 때문이다. 나는 이제 나를 보호하는 법을 배웠고, 이전보다는 쉽게 ‘아니오’ 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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