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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9일 13시 00분 등록

눈을 떴을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바보가 아니라면 그게 죽음은 아니라는 것쯤은 뻔히 알 수 있었다. 나는 확 짜증이 났다. 어둠은 약간의 기대심을 유발하기도 했지만 곧 눈은 익숙해졌다. 눈은 매우 슬픈 것이 되었다. 토사물을 쏟아낸 듯 전선 가닥은 그렇게 전등끝에서 뿜어져나왔다. 목을 매었던 줄을 따라 전등의 부속기가 내장처럼 딸려나왔고 나는 떨어졌다. 더러운 자궁에서 쏟아져 나온 하등한 것이었다. 우주 잡음은 주파수를 맞추더니 창밖의 빗소리가 되었다. 그리고 점점 더 커졌다. 아직 현실이야. 지독히도 끔찍한 현실이야. 탄내와 물내가 섞여서 면빨래를 삶다 태운 냄새가 났다. 주인 아줌마의 빤스 삶는 냄새처럼 삶이 절여진 냄새.

 

나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죽었다고 쳐야 하나? 어차피 정신은 그리 살아 있지 못한 편이었다. 건전지가 점점 마모 마치 죽죽 악에 받쳐 긁어댄 몽당 크레파스처럼 그래 그리 마모되고 부식의 개거품을 물고 나는 화석이 되어 가는 중이었지. 그래도 파충류의 뇌는 남아 있는지 조금 아픈 편이었는데, 아 씨 젠장 너무 아픈데... 제길 정전이 된 걸 보니 확실히 감전도 같이 된건데. 감전이란 즉슨, 비에 젖은 빨랫줄을 가져다 쓴 게 잘못이었고 어떤 망할 자식이 초인종을 누르면서 뭐가 어찌 잘못된 것 같고, 그리고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된 건가? 나의 뇌는? 루트 20은 얼마인가? 4.5 정도 된다. 그렇다면 루트 345234? 아아아, 풀 수 없다. 젠장, 빌어먹을. 천재가 되지도 않았다. 게다가,

 

목을 매달았는데 떨어졌다. 하중에 따른 장력 계산 실패.

감전되었다. 역시 감전 가능성 사전 인지 실패.

 

아무래도 살 기분이 나지 않는다. 살 가치를 느끼기엔 빈정이 많이 상한다. 이까짓 달란트로 어떻게 자존감 있게 살라는 거냐? 아니지. 아니다. 그까짓 달란트로는 죽기에도 아깝다 는 거겠지. 죽는 것도 실패한 실패의 실패자. 하하 와... 차라리 그저 아주 그냥 웃기시네.

 

[ 딩 동 ]

 

나는 핏발이 서도록 벨 소리가 난 문가를 흘겨보았다. 그 민첩성을 인지하며, 나는 내가 조금 다른 무언가가 되었다고 느꼈다. 무언가 싸가지 없는 무언가. 허물의 장막이 걷힌 듯 몸이 가벼웠다. 어쩐지 조금 유포릭(euphric)해지는 것 같기도? 나 죽을 뻔한 사람이야 라는! 될대로 되라지. 참으로 쉽게도 나는 어두운 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머리카락이 광대의 왕관처럼 갈기를 만들고 목에는 진한 의도의 여운이 남았다. 예수의 면유관이 목에 들러붙었군. 팬티를 무릎에 걸친 여자처럼 적절하지 않으나 진부하긴 그지없는 설정. 혹시 머리를 옆으로 밀면 그대로 모가지가 툭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 딩 동 ]

 

벨이 다시 울렸다.

 

세 번째 벨은 확실히 말해주었다. ‘나는 네가 안에 있는 걸 안다. 그것도 산 채로.’ 몇 가지 시나리오가 떠오른다.

 

첫째, 첫 번째 벨을 누른 사람은 죽었다. 나와 같은 감전사로. 10월이라 아직 장갑을 끼긴 힘들고 그렇다면 젖은 초인종에 감전되어 그도 죽었다. 시간이 지나고 처리반으로 온 사람이 종을 누르고 있다.

 

둘째, 주인집 아줌마다. 빨랫줄을 끊어먹고 옷들이 바닥에 널부러진 것을 확인하였다. 그 범인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우리집에 도달.

 

셋째, 주소를 잘못 안 택배기사.

 

넷째, A의 논문 축하 파티에 내가 안온 것을 알고 찾아온 S... 가능성은 낮다.

 

문을 열었다.

 

남자는 내 꼴을 보고 놀라지 않았다. 놀란 것은 오히려 나였는데, 정전이 된 가운데에도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린 달처럼 잘 보였다. 옷빛도 어두워 그의 얼굴은 도깨비불처럼 상공에 떠있었다. 홍채의 가운데를 뚫는 빛은 붉은 가시광선을 반사하고 있었다.

 

내가 죽긴 죽은 건가?

 

아직 끝나지 않은 죽음의 절차. 사신이 찾아오고 정식으로 나를 죽음으로 초대한다. 똑똑똑... 안녕하세요. 사신입니다. 죽으려면 여기 동의서에 사인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살자는 시간외근무에 해당하거든요. 이러기엔 좀... 아니면 어쩌면...

 

당신이 벨 눌렀어?”

 

나는 눈을 치켜떴다. 그래, 네 놈이 벨을 누른 인간이라 이거지? 짐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저 박스 끝으로 초인종을 누르거나 했나 본데. 그래서 저는 감전도 되지 않고 애꿎은 나만 황천길로 갈 뻔했군. 망할 자식. 아아 씨... 저기요, 내가 지금 당신 때문에 죽을 뻔했거든요, ? 라고 말하기엔 내가 방금 자살 중이었고 매달았던 줄을 따라 감전이 된 거라고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하니 조금 곤란한 감이 있었다. 나는 하릴 없이 계속 I See, I See...를 연발하기만 했다. 남자는 별다른 데미지를 입지 않는 듯했다. 아이 씨, 좀 빡이 치는데...

 

내가 당신 때문에 죽을 뻔 했다고!”

 

“... ...”

 

그래서 뭐야? 택배는 아니죠?”

 

나는 재빠르게 말하고 다른 말이 있기 전에 화제를 돌렸다. 남자가 들고 있는 박스를 바라보았다. 25X25X15 씨엠. 세제곱. 낮은 정방형. 뭐지?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뇌물 봉투를 끼워 넣은 파이 상자 같이 생겼다.

 

안녕 친구.”

 

드디어 남자가 웃었다. 그는 여유로워 보였다. 길고 깊은 눈이 유혹적이지만 그늘이 드리워져 의중이 혼란스러웠다. 매력적. 그 이외엔 지우개로 지운 듯 어떠한 디테일도 관찰되지 않았다. 보조개도 없었다.

 

누구...?”

 

누구긴. 네 친구지. 들어가도 될까?”

 

메 아이 컴인?

 

누구신데요.”

 

친구라니깐.”

 

플리즈.

 

글쎄. 난 너 같은 친구를 둔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단기기억상실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렇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너처럼 잘생긴 자식을 친구로 두었을 리는 없다. 취향이 아니다.

 

뭐하려고요?”

 

잠시 대화를 할까 해서. 친구끼리.”

 

뭐야, 새로운 전도 방식인가? 보아하니 집집마다 다니면서 말씀을 전하겠다는 둥의 이단 종교 목사쯤 되나 보군. 이제 박스의 용도도 감이 잡혔다. 박스를 보여줘서 거주인에게 기대감을 높인 후 일단 집안 진입에 성공, 그런 후 그 박스에선 성경이 나온다 성경이. 하나는 내 꺼. 하나는 니꺼. 할렐루야. 이 집에 평화가 깃들기를.

 

대화? 뭔 대화?”

 

무슨 대화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생명의 말씀? ? 꼭 저치들은 생명의 말씀이래 이런 씨이... 니 생명인지 내 생명인지 주체를 명확하게나 하든지... 남자는 미소지었다. 그 때 정전되었던 집에 불이 들어오고, 주황색의 현관등이 켜졌다. 나의 비아냥거리던 눈알이 사소한 발견을 했다. 남자의 상자를 들고 있는 오른손과 상자 사이에는 끝이 뾰족하고 등이 각이 진 식칼이 끼워져 있었다. 돌아다니던 눈알이 경박하게 한곳에 고정되었다. 저거 진짜 칼이야?

 

, 이거 뭔가 전개가 이상한데?

 

나는 문고리를 꼭 잡았다. Y C... 목사 보다 더한 또라이 자식이네. 갑자기 혼란스러워. 방금 자살하려 했었는데 살인자가 들이닥치면, 나는 문을 열어야 돼 닫아야 돼? 그는 나의 인지를 인지했다. You know me and I know you. 남자는 상어의 지느러미가 수면 위로 올라 오듯이 서서히 칼끝을 상자 위로 드러내 보였다.

 

들어가도 될까?”

 

“... ...”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혹시 모르니 그래도 못봤다고 치고, 일단 피하고 보는게... 그런데 문을 닫기엔 남자의 발이 이미 문지방에 걸려 있다. 상황이 안좋네? 나는 벼랑 끝에 손가락 하나로 매달린 기분이었다. 낙상도 자살로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머리통이 깨지는 게 싫어서. 나의 굴러다니는 뇌조각을 사건 구역으로 밀어넣는다고 망할 짭새들이 발로 툭툭 찰 걸 생각하면 기분이 나빠진단 말이지. 검은 구두가 반짝거렸다. 완전 좋은 거네. 반짝하네. 구두에 끈이 있네. 진흙이 묻어 있네. 양말을 신었는데 그 양말에 주름이 잡혔네. 이야 이 남자가 이제보니 진짜 사람이고 그래 사람인데 정말로 나를 골로 보내 줄 살아 있는 생귀신 자식이라는 걸 알겠네.

 

나는 길을 비켜주었다. 뭐 대안도 없고. 궁금했기 때문이다. 죽겠다고 죽으려는 것도 안죽어지는 판에 네 놈이 죽이겠다고 해서 죽어지나 두고 보자. 그래, 어찌되나 두고 보자는 심산이었다. 오늘이 정말 무슨 날인 것 같기는 한데 도대체 그게 무슨 날인지는 겪어 봐야 하는 거니까.

 

남자는 들어왔다. 신발을 신고(죽을라고 이 자식이!). 지도 교수가 연구실 가구를 바꾸면서 나의 자취방으로 폐기 처분한 감색 레자 쇼파에 가만히 앉아 의문의 상자를 유리 탁상 위에 두었다. 마치 다도를 닦듯이 행위가 정갈하다. 나는 벽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그가 하는 꼬락서니를 지켜 보았다. 머리는 정확한 4:6 가르마를 타서 넘겼고 흰 셔츠에 애매한 빛깔의 정장 외투를 입었다. 얼굴은 특징이라곤 아무것도 없도록 의도적으로 다듬은 것처럼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나중에 몽타주를 그리라고 하면 조금 힘들겠다. 그저 눈썹이 확실한 일자라는 것 이외에는. 톨스토이가 말했다던가. 매력적인 사람은 다 비슷하지만 못생긴 사람에는 제각각의 개성적인 이유가 있다. 그는 좀 생긴 편이었다.

 

사실은 좀 많이 잘생긴 편이었다.

 

커피 좀.”

 

?”

 

뭐라고 이 자식아?

 

커피랑 먹어야 맛있어.”

 

남자는 검지로 상자를 톡톡 두 번 쳤다. 내가 커피를 내리는 동안 남자는 양쪽 무릎 위에 팔꿈치를 댄 채 정면을 응시했다. 정확히는 공간을 응시하는 듯했다. 뭐 하는 자식이야. “앞 접시도 좀 갖다 줘.” 아 예, ... 나는 커피 포트에서 두 잔을 뽑은 후 가져갔다. 그 후 살인. 어리석은 경찰들은 이리 분석하겠지. 둘은 커피를 같이 마셨으므로 범인은 면식범이다. 피살자는 이전에 자살을 시도했던 흔적이 있다. 그러므로 면식범은 피살자에게 살인을 부탁 받고 집으로 진입 역시 진입 시에는 악력이 행사된 흔적이 없으므로 면식범인 게 완전 확실. 그러므로 사건은 그럭저럭 종료.

 

남자는 커피잔을 보고 살짝 미소 지으며 나를 슬쩍 바라본 후 자신의 상자를 열었다. 아이보리색 뚜껑이 기기익 소리를 내며 분리되었다. 안에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내가 무언가라고 표현하는 것은 무엇인지 별로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건 박제된 하얀 아르마딜로 같았다. 남자는 들고 왔던 칼을 들어 별 어려움 없이 아르마딜로의 몸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싹뚝 잘린 몸안이 온통 붉었다. 우엑 나는 입을 O 자로 만들었다.

 

영화 <매그놀리아> 봤어?”

 

남자는 어쩐지 핑크빛이 도는 볼을 움직여 말했다.

 

거기에 나온 라즈베리 케익이야. 이거 진짜 맛있어.”

 

남자는 아르마딜로의 머리를 댕강 쳐서 작은 접시에 조심스레 담았다. 그리고 그걸 굳이 내 앞으로 내밀었다.

 

널 위해 직접 만든 거야.”

 

.

 

어쩐지 이 부분이 잘 어울릴 것 같네.”

 

지금 나랑 티타임 놀이라도 하자는 거야 지금? 어쨌거나 저 칼은 이 케익을 자르기 위해 가져온 칼일지도 모르겠군. 나는 포크로 케익이라 주장된 다당류 덩어리를 조금 먹었다. 이런 건 원래 내 취향은 아니야.

 

내 취향은 아니야.”

 

그래?”

 

하지만 진짜 맛있네. 남자가 나의 반응을 예의주시하자 나는 오히려 긴장이 풀렸다. 이런 음식을 만들 수 있을 정도라면 전문 요리사로군. 일반인을 랜덤하게 선별해서 자기 음식의 품평을 바라는 작자일지도 모르겠어. 그러다 혹시, 이 음식이 마음에 안든다고 하면 바로 죽여버리는 그런 연쇄 살인마일지도 모르지. 남자가 지참한 칼은 케익을 자르기엔 지나치게 날카롭다.

 

하지만 진짜 맛있다. 하하하.”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응 진짜 맛있어. 남자는 자부심이 넘쳤다.

 

이제 먹었으니 내 부탁을 들어 줄 수 있겠군.”

 

?”

 

케익값은 해야지 친구.”

 

?

 

남자의 눈이 빛났다. 그는 깍지 낀 손으로 웃는 입을 가렸다. 그리곤 케익에 박혀 있던 칼을 스윽 뽑아내어 냅킨으로 슥슥 닦았다. 이런 거였군.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다더니 해답을 보고 나면 너무도 뻔한 정답 사이로 나는 죽죽 죽 그래. 자책한 들 뭣하겠나. 그러나 도대체 연유라고 알고 칼은 맞아야 할 것 아닌가?

 

이 봐, 친구라는 말 좀 빼. 네가 날 언제 봤다고 친구래 친구긴!”

 

나는 주변에 산재한 공격 아이템에 대해 고민하면서 맞은편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이럼 안되지. 친구. 우린 굉장한 관계야. 아직 깨닫지 못했을 뿐.”

 

“... ...”

 

, 5년 전에 신장을 팔았었지. 기억나?”

 

“... ...!”

 

아주 맛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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